[일본 한 백제시조 신사의  새문 (도로이Torri: 鳥居), 우리나라 솟대나 홍살문과 관련]

  • 글쓴이: 라디오
  • 08.01.29 01:36 http://cafe.daum.net/radioproject/88dS/444http://cafe.daum.net/radioproject/88dS/444')">주소 복사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님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님이 우려하는 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래와 같이 보고 있습니다. 혹 참고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비미호 관련기록】

    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년(서기 173년) 「倭女王 卑彌呼 遣使來聘」
    위지 왜인전 「倭國亂相攻伐歷年 乃共立女子爲王名 曰卑彌呼」
    위지 왜인전 「景初2년(서기 238년) 倭女王遣使 大夫難升米等諧郡...후략」라고 나오는데 일본서기와 양서에는 3년으로 나온다.
    위지 왜인전 「正始元年(서기 240년) 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雋...후략」
    위지 왜인전 「正始4년(서기 243년) 倭王復遣使 大夫伊聲者掖邪拘等 八人上獻」
    위지 왜인전 「正始6년(서기 245년) 詔賜 倭難升米黃幢」
    위지 왜인전 「正始8년(서기 247년) 遣塞曺緣史」
    북사 왜인전 「正始中(서기 240∼247년) 卑彌呼死」
    위지 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중략...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爲王 國中遂定」

    이라고 나오는데 「남왕을 다시 세웠더니 나라 안이 복종하지 않아 서로 다시 주살하여 당시 천여 인을 죽였다...중략...나이 13세인 비미호의 종녀인 일여를 다시 세워 왕으로 삼았더니 나라 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라는 정도로 옮겨진다.
    晉의 起居注에 「晋武帝泰初2년(서기 266년) 倭女王遣重譯貢獻」

    위지의 마지막 기사는 명백히 비미호 사후다. 아마 비미호 사후에 그때까지 공립하던 여왕제를 폐지하고 남왕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자 비미호측과 남왕측과의 연정(聯政)이 깨지고 내란 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국에서 천여 명이 죽을 정도면 큰 난리다. 그러다 비미호 가계의 신녀 지위를 물려받은 인물로 보이는 일여(壹與)를 다시 여왕으로 세우자 내란이 그친 것이다. 나이도 13세라고 했으니 비미호도 처음 지도자가 된 것은 이 정도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비미호의 나이를 추정해보면 아달라왕 20년에 사신을 보내올 정도이니 최소 비미호 사후의 일여 만한 나이는 되었을 것이고 서기 200년이면 30대후반 40대초반 정도 된다. 그러면 북사기록대로라면 80대 정도이므로 크게 무리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문제는 90이 가까이 되도록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 비미호의 종녀인 일여를 비미호의 3세, 4세 후계자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지에 나오는 비미호의 대위(對魏) 사신파견 기록상 서기 247년까지라면 비미호 생전이라고 보기에 약간 무리가 있고 여성지도자가 계속 비미호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대엔 이름에 수직으로 돌림자를 쓴 경우가 보이기 때문이다. 북사기록을 보면 서기 240년에서 247년 사이에 몰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또 비미호란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아달라왕 20년조와 위지 왜인전의 최초기록, 북사 뿐이다. 비미호란 이름은 그들 집단에서 제정일치의 유습에 따른 신녀적인 성격을 띤 여성지도자의 수직돌림자로 보인다.

    서기 266년 진에 최후로 사신을 파견한 야마다[邪馬臺]는 그 후 대륙측과 외교가 불가능한 소국으로 분열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열도에는 이후 서기 390년 응신이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대화왕조를 열 때까지는 전부 공위시대였다. 서기 266년 진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대륙기록에 최초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이 왜왕 讚이고 이 인물이 바로 응신이며 화풍시호 譽田과 호무[讚]=호무[譽]로 연결되고 다시 사노[讚]=사노[狹野]로 연결되는 神武이기도 하다.

    또 <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416p/보주33>에 보면 神功이나 神武를 日人들도 전설로 보고 있다. 게다가 '集解'란 기록에는 일본서기의 신공기 39년, 40년, 43년, 66년 대륙사서 인용기록이 후세인이 가필한 것으로 간주되어 전부 삭제되어있다고 한다.

    【수직돌림자를 쓴 사례】

    〈 '여지승람'의 말통(末通)은 가야왕족들의 수직돌림자〉

    〔말통(末通)이 모도(牟都)〕

    사기와 대륙측 기록에는 동성왕의 이름이 모대(牟大), 모도(牟都)라고 나오고 대륙측 기록에는 조부(祖父)인, 일본서기의 예진별명(譽津別命)이 역시 모도(牟都)라고 나온다. 예진(譽津)은 응신인 예전(譽田)의 형이고 아라 가야왕 아라사등의 장남이다. 가계가 아라사등(阿羅斯等)-> 예진별명(譽津別命)-> 곤기왕(琨伎王)-> 동성왕(東城王)인 것이다. 예진(譽津)의 이칭에 품모도(品牟都)가 있는데 발음이 호무쯔[譽津]=호무쯔[品牟都]다. '호[品]'는 존칭이고 무쯔[牟都]가 원래이름이다. 유교적인 발상으로는 이해가 안되겠지만 가라왕족은 수직돌림자를 썼다. '기'와 '지'는 고대에 교체되어 쓰였다. 성씨록의 곤기(琨伎)가 사기에도 곤지(昆支)로 나오고 서기에도 웅략기에 곤지로 나온다. 열도 최초의 통일왕국인 대화왕조 초대왕인 응신은 동성왕의 종조부(從祖父)인 것이다. 기·기에 나오는 증조부 아라사등의 이칭을 열거해보면

    가) 고사기 개화기(開化記)에 대오왕(大 王)이라고 나온다. 발음이 오호마다[大 ]다.

    나) 서기 숭신기 65년 7월조에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보내...」라는 기사가 있다.

    다) 서기 수인기 2년 시세조(是歲條)에 아라사등(阿羅斯等)의 황우설화(黃牛說話)가 나온다.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인데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 한다...」라고 되어있다.

    라) 서기 신공기 62년조에 「가라국왕(加羅國王) 기본한기(己本旱岐)」라고 나온다.

    마) 서기 계체기 23년 3월조에 가라왕(加羅王) 아리사등(阿利斯等)이 나온다. 이어서 4월조에 「임나왕(任那王)인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가 내조하였다(己能末多란 함은 阿利斯等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고노마다[己能末多]=아리사등(阿利斯等)이라고 하고 있다.

    바) 서기 민달기 12년 7월조에 「...지금 백제에 있는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인 아리사등(阿利斯登)의 아들 달솔(達率) 일라(日羅)가 현명하고 용감하다...」라고 나온다. 동년 10월조에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 형부·차부아리사등(刑部· 部阿利斯登)의 아들 신(臣) 달솔 일라(日羅)는...」라고 나온다.

    신대기를 제외하더라도 인대기의 개화기(開化紀)부터 계체기(繼體紀)까지 수백 년에 걸쳐서 동일인이 이름을 약간씩 달리하면서 계속 등장한다. 기·기는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오호마다[大 ]왕=큰마다왕, 임나국인(任那國人) 소나가시지[蘇那曷叱知], 오호가라[意富加羅/大加羅]의 왕자 쯔누가아리시또[都怒我阿利斯等] 또는 우시기 아리시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가라왕(加羅王) 고노모도간기[己本旱岐], 임나왕(任那王)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阿利斯等],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 아리시또[阿利斯登] 또는 형부·차부(刑部· 部) 아리시또[阿利斯登] 등, 이 이름들은 전부 동일인의 이칭(異稱)이다.

    형부(刑部)란 법(法)을 관장(管掌)하고 차부( 部)란 병권(兵權)을 말한다. 형부·차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고대엔 곧 왕이다. 다시 보면 임나인=대가라왕자=대가라왕=대오왕=임나왕=화·위북국왕인 것이다.

    '오호[意富]'는 '오호[大]'와 같고 '고노[己能]'는 우리말 '큰[大]'의 이두표기 '근(近)'이 '오'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켜 '곤'이 되고 다시 받침 없는 열도발음으로 '고노[己能/近]'가 된 것이다.

    〔모도(牟都), 마다[末多]계 이칭들〕

    그런데 여기서 '마다'계 이칭들을 보면 전부 같은 이름인데 발음과 한자가 약간씩 달리 표기되어있다. '마다[오]'와 '마다[末多]'는 같고 '모도[本]'와도 같은 말이다. 모대(牟大), 모도(牟都). 마다[派], 마다[岐], 무쯔[六], 무지[貴], 모지[持], 마다[股], 말통(末通), 모태(牟泰), 마동[薯童], 모태(慕泰/募泰)도 전부 같은 이름이다.

    최초에는 (ㅁ+아래아)(ㄷ+아래아)에서 파생된 기본적인 조합(組合)이 4개인데 '마다', '모도', '모다', '마도'로 발음이 분화되고 이 아래아의 발음의 특성을 이용하여 반도어와 열도어를 번갈아 사용하고, 교차하여 사용하고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 쓴 것이다. 기·기와 사기·유사에 나오는 용례를 전부 열거해서 보자면

    가 ; '마다'는 마다[오]=마다[派]=마다[岐]=마다[股]=마다[末多]로 만들어 쓰고

    나 ; '모도'는 반도어 모도(牟都)를 같은 발음의 열도어 모도[本]로도 쓰고 다시 열도발음으로 읽어 무쯔[牟都]로 놓고 한자를 바꾸어 무쯔[六]로도 쓰고 여기서 다시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을 이용하여 무지[貴]로 바꾸어 쓰기도 하고 이것을 또다시 모지[持]로도 쓴 것이다.

    다 ; '모다'는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로 모다[牟大]로 놓고 모다[牟泰]를 만들어 쓰고 반도어로 발음이 같은 모태(慕泰/募泰)도 쓴 것이다.

    라 ; '마도'는 반도어를 열도식으로 받침 떼고 읽어서 마도[末通], 마도[薯童]로 쓴 것이다. 마도[薯童]는 '훈+음'으로 조합한 것에서 받침 없이 읽은 것이다. 받침을 붙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동'이다. * 마다[오]> '人 변에 입 口 밑에 하늘 天'이다.

    따라서 사기의 모대(牟大)나 모도(牟都), 말통(末通), 마동[薯童]은 전부 같은 이름이다. 조부와 이름이 같았다는 것은 대륙기록에도 나왔으니 증조부인 아라사등과 같은 이름을 쓴 사례를 보면 위에 나온 고사가 개화기에서 '오호마다'[大오]> '큰마다'> '近마다'가 되고 이것을 다시 열도어로 받침 없이 풀어 읽어 '고노마다'가 된다. 이것은 위의 계체기에 나오는 고노마다[己能末多]와 같고 신공기의 고노모도[己本]와도 같은 것이다. 대(大)나 태(太/泰)는 열도어에 복모음이 없어 '다'로 발음된다. '다(타)이'에서 '이'가 탈락했다고 봐도 된다. 성씨록을 보면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 (河內國諸蕃)으로 나오고 곤기왕(琨伎王)은 사기에 나오는 곤지(昆支)와 동일인물로서 동성왕의 부왕이다. 같은 성씨를 더 찾아보면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河內國諸蕃)로 나오고 이 인물이 바로 동성왕이다. 역시 증조부인 아라사등의 이칭 마다[末多]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륙측 기록 중에는 모도(牟都)가 동성왕의 부왕의 이름이라고 한 것도 있다'한다.

    말하자면 이 모도(牟都)라는 이름은 가라왕족들의 수직돌림자인 것이다. 따라서 '여지승람'의 말통대왕능(末通大王陵)은 동성왕의 능인 것이다.

    비조호조(飛鳥戶造)란 동성왕의 후손들 성씨도 뜻을 풀어보면 "아스까의 문을 만든", "아스까의 문에 닿은", "아스까의 문턱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사실상 가야계 동성왕이 열도출신으로서 대화왕조 네 왕 이후에 다섯 번째로 혜성 같이 등장하여 백제까지도 장악함으로써 대륙 두 백제군과 백제본국, 열도까지도 아우른 대제국을 이루었으나 부여씨 무령왕에게 암살 당하여 그 후로는 가야계 왕통이 끊겨버렸다.

    그 후 후국시대를 지나 백제가 망하고 열도에서 일본이란 나라로 새롭게 출발할 때 백제계왕실 입장에서 기술함으로써 무령왕시대는 아스까로 치고 "동성왕이 아스까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뜻에서 그 후손들 성씨에 그런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서 지어 붙여 창씨한 것이다. 동성왕은 기원 이후 우리 고대사에 있어 최고의 대왕이었다. 이 정도 되니 위나라의 수십 만 대군을 두 번이나 보기 좋게 추풍낙엽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치통감'이나 '남제서'의 기록이 "아닌 땐 굴뚝에 난 연기"가 아닌 것이다.

    마다[末多]를 서기 본문에서 확인해 보면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에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以立島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후략]라고 나와 무령왕 직전의 왕이 동성대왕이고 마다[末多]왕으로 불렸던 것이다. 위에 열거한 '모도', '마다'의 변형이칭들은 서기·고사기·성씨록 등에 숱하게 등장한다

  • 아라가야의 이즈모[出雲] 제철단지 개척사
    아라가야왕 소잔명존의 출운제철단지 개척설화와 신라 거타지설화가 유사점이 있어, 반도의 설화를 수집하여 기·기 분식에 활용한 사례로 보여 대비를 해본 것이고 아라가야가 개척한 열도 제일의 제철단지인 시마네[島根]의 이즈모[出雲]가 실사상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여 그 역사적인 비중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소잔명존과 거타지설화 비교》

    일본서기 신대기 상 8단 본문을 보면 소잔명존(素잔鳴尊)의 출운지방 개척을 설화로 꾸민 것이 있다. 이 내용과 유사 기이상에 나오는 신라 거타지(居陀知)설화가 유사점이 있으므로 비교해 보면


    【설화 본문】


    〔소잔명존 설화〕

    서기 신대기 상 8단 본문

    『이때 소잔명존이 하늘에서 내려와 출운국의 파천 상류에 도착했다. 이때 강 상류에서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소리를 찾아 가보니 노인과 노파가 가운데 한 소녀[童女]를 두고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다. 소잔명존이 "그대들은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는가"하자 대답하기를 "나는 국신입니다. 이름은 각마유이고 아내이름은 수마유입니다. 이 아이는 딸인데 이름은 기도전희입니다. 우는 이유는, 전에는 딸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해마다 팔기대사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지금은 이 아이가 잡아먹힐 차례입니다. 면할 길이 없어 슬퍼서입니다"했다. 소잔명존이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이 아이를 내게 주겠는가"라고 하자 "말씀대로 바치겠습니다"했다. 소잔명존이 잠간 동안에 기도전희를 탕진조즐로 만들어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각마유와 수마유에게 팔온주를 빚게 하고 아울러 방 여덟 간을 만들어 방마다 술통을 하나씩 놓고 술을 가득 붓고 기다리고 있었다. 때가 되니 과연 대사가 나타났다.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이었다. 눈은 붉은 장 같았다[赤酸醬. 등에 송백이 나고 여덟 언덕 여덟 골짜기에 뻗쳤다. 술을 보더니 통마다 머리를 디밀고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잤다. 이때 소잔명존이 차고 있던 십악검을 뽑아 그 뱀을 마디마디 잘랐다. 꼬리에 이르러 칼날이 조금 상했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갈라서 열어보니 칼이 한 자루 있었다. 이것이 소위 초치검이다[이설에 말하기를 원래 이름은 천총운검인데 대사가 사는 곳 위에는 언제나 구름이 있었기 때문인가. 일본무황자 때에 이름을 바꿔 초치검이라 했다]. 소잔명존이 "이것은 신검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이 하겠는가"라고 하며 천신에게 헌상하였다. 그 후 혼인할 곳을 찾아갔다. 드디어 출운의 청지(淸地/스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 마음이 청청(淸淸)하도다"라고 하였다[그리하여 지금 이곳을 청(淸)이라 한다]. 거기에 궁을 지었다. [이설에 말하기를 그때 무소잔명존(武素잔鳴尊)이 노래를 불렀다. "팔운이 피어오르는, 출운의 팔중원이여, 처를 지키는 팔중원을 만들자, 그런 팔중원을"]. 거기서 서로 합하여 아들 대기귀신을 낳았다. 그리고 "내 아이의 궁의 우두머리는 각마유와 수마유다"라고 했다. 그래서 두 신에게 이름을 도전궁주신이라 했다. 그리고 나서 소잔명존은 드디어 근국으로 갔다』


    〔거타지설화〕

    유사 기이2 진성여대왕과 거타지조에 보면

    『진성여왕 때 아찬 양패는 왕의 계자였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骨大島)에서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 일을 머무르게 되었다. 양패공은 걱정하여 사인에게 점을 치게 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솟구치고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을 하나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오"하자 양패공이 잠에서 깨어 좌우에 일을 묻기를 "누구를 남겨두면 좋겠소"했다. 여러 사람이 " 나무조각 50개에 이름을 써서 가라앉히는 제비를 뽑읍시다"했다. 공이 이에 따르니 군사 중에 거타지가 있어 이름이 물에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거타지가 남게 되고 바람이 일어 배는 막힘 없이 나아갔다. 거타지가 섬에 서서 걱정을 하는데 노인이 못에서 나타나 "나는 서해약(=海神)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암송하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먹는 것이오. 그래서 다 먹고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중이 또 필히 올 테니 그대가 활로 쏘아 주시오"라고 했다. 거타지는 "활 쏘는 일이라면 제가 잘하는 것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했다. 노인은 고맙다하고 사라졌다. 거타지는 숨어서 엎드려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뜨니 과연 중이 와서 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하였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을 맞히니 곧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공의 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아이를 아내로 삼으시오"라고 사례했다. 거타지는 "제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바라던 바입니다"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호위해서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인들은 신라사신의 배를 용이 호위하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신라의 사신은 필시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하고는 뭇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에 돌아온 거타지는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해 함께 살았다』


    【설화비교】

    비교를 해보면 괴물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괴물을 처치하고 구해주는 줄거리들이 비슷하다.

    〔최초 출발지〕

    소잔은 하늘[天]에서 내려왔다. 거타는 신라다.

    〔활동지역〕

    소잔은 열도의 시마네[島根]현 이즈모[出雲]국 파천상류다. 거타는 남해항로 도중에 있는 진도 부근 곡도(鵠島)다. 소잔의 경우도 일종의 경유지이고 거타도 경유지다.

    〔활동대상〕

    소잔은 거대한 뱀[八岐大蛇]이다. 거타는 늙은 여우가 중으로 변신한 것이다.

    〔대상물의 위력이나 성격〕

    소잔의 경우 등에 소나무가 날 정도의 거대한 괴물이고 여덟 언덕 여덟 골짜기 사이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거대하다. 실제는 비유를 한 것이지 실물이 아니다. 등에 소나무가 났다거나 언덕, 골짜기란 말에서 산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거타는 늙은 여우가 중으로 변신하여 다라니주문을 외울 정도로 영력을 가진 괴물이다. 흔히 여우가 사람을 많이 잡아먹으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전설이 많은데 그런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괴물의 활동〕

    소잔의 경우는 노부부의 딸을 1년에 하나씩 잡아먹는 것이고 거타의 경우는 해뜨는 날 매일 서해약(西海若/海神) 가족 하나의 간을 빼먹고 죽이는 것이다.

    〔구해준 사람〕

    소잔은 각마유, 수마유, 그 딸 셋이고 거타도 서해약 부부 둘과 그 딸까지 셋이다.

    〔괴물 처치방법〕

    소잔은 대사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잠든 사이에 칼로 벤다. 거타는 활로 쏘아 맞혀 죽인다.

    〔활동 후 얻은 것〕

    소잔은 노부부의 딸 기도전희를 얻었고 적극적으로 달라고 하여 조건부로 얻었다. 또 청지(淸地)라는 새로운 땅을 얻게 된다. 거타는 활동 후에 딸을 주는 것을 받았고 소극적이다. 반면에 사신길에 호위하는 용의 도움으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딸의 변신〕

    소잔은 자신이 빗으로 변하게 해서 머리에 꽂았다. 거타는 서해약이 꽃가지로 변하게 하여 품에 넣어 주었다. 소잔이 적극적이고 거타는 수동적이다.

    〔활동계기〕

    소잔은 설화상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신대기 앞부분을 보면 신들에게 미움받고 천조대신과 서약을 하고 자신이 원해서 내려온다. 거타는 활을 잘 쏘는 덕에 사신일행에 뽑혀서 가게 되었고 제비에 뽑히는 바람에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그 전에 서해약이 거타일행이 오는 것을 알고 풍랑을 일으켜 곡도에서 머물게 하고 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역시 거타지는 수동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최종도착지〕

    소잔은 근국(根國)으로 간다. 거타는 신라로 돌아온다.

    〔딸과 혼인〕

    둘 다 혼인은 하나 소잔은 아들을 낳고 거타는 결혼 이후는 안나온다.

    〔연대비교〕

    위의 설화 두 가지의 연대를 비교해 보면 소잔은 서기를 편찬할 시점에 수많은 신화·설화 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기·기를 분식하는 과정에서 만든 설화이고 거타지설화는 신라 진성여왕대에 만들어진 것이 유사에 채록된 것으로 보이므로 사서를 저술한 시점은 서기가 빠르지만 설화생성연대는 거타지의 경우가 빠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거타지설화를 기·기 저자가 수집하여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잔명존의 적극성과 거타지의 소극성〕

    소잔명존은 대체로 적극적,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거타지는 소극적, 수동적으로 활동하는데 이 두 인물의 활동상의 이런 차이는 소잔의 경우는 신천지개척을 나선 인물로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거타지의 경우는 신하의 입장으로서 대체로 소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결국은 두 인물의 신분과 입장차이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소잔은 개척자의 입장이고 거타는 발탁되는 입장인 것이다.

    〔거타지 설화의 실사상의 모델〕

    설화의 주인공인 거타지는 실사상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사기 신라본기의 진성왕조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안하고 9년조, 10년조, 11년조 기사가 설화와의 분위기와 유사한 점이 있어 거타지는 헌강왕의 서자이자 진성왕의 위를 이어 효공왕이 된 요(嶢)가 아닌가 짐작된다.

    신화·설화에서 여성은 영토를 은유하고 여자를 받았다는 것은 그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은유할 경우가 많은데 거타지가 처녀를 받았다는 것은 곧 왕이 된 것과 결부시켜 해석할 수 있고 원래 왕위계승서열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서자였지만 자질이 출중하여 왕이 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진성왕 9년조에서는 그(=嶢)를 두고 "장체모괴걸(長體貌魁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장하자 체격과 풍모가 헌걸차고 빼어났다"는 뜻이다.

    또 사기나 유사의 기술태도, 즉 왕실내분이나 쿠데타 등은 대부분의 경우 직필하지 않고 설화 등으로 처리하거나 비교적 정상적인 승계로 분식하였는데 석탈해설화, 동성대왕의 서동설화, 고이왕이나 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무령왕 등은 전부 쿠데타로 집권한 것으로 판단되고, 고구려의 경우도 안원왕은 쿠데타, 양원왕은 왕자의 난으로 집권했는데 정상적인 승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거타지의 경우도 진성왕에 대한 쿠데타로 집권한 것을 분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한다.


    【소잔명존설화의 실사적인 해석】


    〔소잔명존은 누구인가?〕

    스사노오노미꼬또[素盞鳴尊]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이고 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조에 나오는 백제의 좌평 진정(眞淨)이고 고사기 신대기 대국주신조에 나오는 오호아나무지노가미[大穴牟遲神]이며 한편으로는 기·기상에서 반정(磐井) 등 많은 이칭을 가지고 활약하는 인물이다. 시대적으로는 4세기 중반인 서기 340년대부터 350년대 정도로 본다. 백제의 근초고대왕 재위 전반기 정도인 것이다.

    〔출운에 온 목적〕

    출운에 온 목적은 신천지개척이고 출운은 고대 열도에서 제일 질 좋은 사철광산지역으로 최고의 제철단지였다. 지금의 시마네[島根]현 출운으로서 이곳에서 나는 철을 바탕으로 질 좋은 병기와 농기를 생산하는 것이 열도에 고대국가를 건설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잔명존의 팔기대사 설화도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98∼102p>에 잘 해설되어 있는데 거기에 인용된 출운이란 지방의 성격을 나타내는 글을 인용해보면

    『이즈모의 시마네현에 安來라는 곳이 있다. 현지에서는 '야스기'라고 하는데 이 '야스기'라는 것도 출운의 현지인 말로는 "편안하게 사람들이 도래하여 와서 산 땅이란 데서 安來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거야 어찌되었든 安來에는 화동기념관이 있다. 이 '和'라는 것은 日本을 가리키는 和로서 히다찌제작소가 지금도 그곳에 철강을 만드는 대공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장이 철생산을 기념하여 만든 철박물관인 것이다. 中國산맥에서 채취된 사철로 철을 만들었다. 그것은 고대부터의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그곳에는 대단히 질이 좋은 사철이 채취되고 있다. 그 사철로 만든 철강이 일본에서 가장 좋다. 가장 좋은 철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화동기념관에 가서 보면 철이 도래하여 온 철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출운에 상륙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사철에서 철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따라서 찍은 사진도 있고 여러 가지 모형도 있어 아주 알기 쉽게 되어있다. 그것을 보면 고대에 사철로부터 철을 획득한 집단은 대단한 힘을 가진 주도세력이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자력에 필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는데 출운과 신라와는 철에 의한 연관성이 대단히 짙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출운의 고대 유적은 거의 신라계이다. 이 신라와의 관계가 아주 상세히 쓰여진 것으로 水野裕氏의 '고대의 출운'이란 책이 있다. 이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고대 출운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須佐之男命(素盞鳴尊을 말함)은 신라의 도래인이 그들의 조신으로서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는 스사노오노미꼬또[須佐之男命]를 제신으로 한 신사만도 8천쯤이 되는데 출운에는 스사족[須佐族]이라 한 집단도 있었다고 쓰여 있다<고대일조관계사입문/김달수/筑摩書房/18p>』라고 나온다.

    아라가야왕 소잔명존이 출운의 제철단지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신라도 아라가야의 고칭 아시라[阿尸良]=신라(新羅)를 지칭하는 것이다. 경주신라는 제철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하늘[天]이란?〕

    백제 또는 한반도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각마유·수마유는 출운지역의 원주민〕

    원주민이라고 해서 반드시 열도원주민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도에서 기원전부터 수없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시마네현은 구주 북부와 마찬가지로 반도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들도 반도에서 선진농업기술을 가지고 건너간 반도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다리 脚', '순 手'를 이름에 쓰고 있어 피지배층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도전희(奇稻田姬)〕

    이름 그 자체를 보더라도 아주 비옥한 전답(田畓)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사람이 아니다. 새로 개척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은유한 것이다. 도전(稻田)은 논[畓]을 뜻하는 말이다. 奇는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탕진조즐〕

    빗[櫛]으로 표현하기는 했어도 탕이란 것이 제철용탕을 말하므로 제철용구의 일종으로 보이고 예컨대 용탕(熔湯)의 위에 뜨는 찌꺼기, 불순물을 걷어내는 도구로 보인다.

    〔팔온주〕

    여덟 번 깨물은 술이라고 하는데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여러 단계의 야철공정을 거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온=酉+(日 밑에 그릇 皿)

    〔사스기[假기]〕

    제철로를 설치한 공장과 단조하는 대장간, 주조하는 주물공장으로 보면 된다. 가기(假기)의 기( ) 자를 보면 재주 기(技) 자가 들어있다. 즉 '재주[技術]가 발휘되는 집'이란 뜻이니 바로 요즘말로 공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술통이 곧 제철도가니인 셈이다. 기·기를 읽다보면 절묘한 은유·비유·상징들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한편으로는 그 속에 한자를 파자(破字)를 해봐야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위의 기( ) 자도 그 중의 하나다. 돌집 엄(엄) 밑에 재주 技

    〔팔기대사(八岐大蛇)〕

    출운의 질 좋은 노천사철광산에서 흘러내리는 산화철 녹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 녹물이 연례적으로 우기만 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농토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에 딸을 낳자마자 대사에게 잡아먹혔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녹[청=金+靑]으로 인한 피해는 철광석의 품위(=평균함량)가 높을수록 심해진다.

    "등에 소나무가 나고 여덟 언덕 여덟 골짜기"란 말에서 보듯이 팔은 성수(聖數)이긴 하지만 대사란 것이 노천철광산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사기/강담사학술문고/次田眞幸/2000년/上/104p>에 보면 팔기대사를 두고

    「대사의 꼬리에서 초치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히노가와[肥河]의 상류일대가 우수한 사철산지고 비하(肥河) 유역에서 검(劍)이 단조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사의 배[腹]가 언제나 피에 진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비하의 철을 함유한 붉은 물이 흘러드는 모양으로 볼 수도 있다」라고 나오는데 정확한 지적으로 본다.

    〔천총운검(天叢雲劒)〕

    갖고 있던 십악검(十握劒)으로 뱀의 꼬리를 자르다가 칼날이 빠졌는데 보니 뱀의 꼬리에서 칼 한 자루가 나왔다는 것은 출운에서 만든 칼이 더 좋은 칼이라는 뜻이다. 출운의 사철 질이 그만큼 좋았다는 말이다. 반도의 가라지역도 기원전부터 유명한 철산지였지만 그곳에서 만든 가라사히[韓鋤], 아라사히[추正]보다 출운의 철이 질이 좋았다는 의미다. 추(추)는 사슴 녹(鹿) 자가 석 자다. <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1/96p>에는 아라마사[추正]라고 읽고 있으나 사히[正]로 음독해야하고 반도어 '(ㅅ+아래아)이[金]'에서 나온 말이고 칼[刀]을 의미할 때가 많다.

    천총운검은 나중에 천신에게 바치는데 백제왕실에 헌상한 것이다. 천신은 백제왕실에서 파견한 경진주신(經津主神/근구수왕)이고 항복하고 나라를 바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것이 지금도 일본왕실에 전승되고 있는 삼종신기(三種神器) 중의 하나다.

    〔구름[雲]이란?〕

    출운이나 천총운검의 '구름 운(雲)'은 사실은 구름이 아니고 제철단지에서 나오는 연기였던 것이다. 제철용 숯을 굽는 연기를 구름이라고 한 것이다.

    〔스가[淸地]란?〕

    이것은 소잔명존의 땅이라는 뜻이다. 청(淸)이 소잔의 이칭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잔의 백제이름은 진정(眞淨)으로 청(淸)과 정(淨)은 통하는 말이다. 또 반정(磐井)으로도 나오는데 역시 우물 정(井)도 같이 통하는 말이다.

    <고사기/강담사학술문고/次田眞幸/2000년/上/103p>에 보면

    「島根縣 大原郡 大東町 須賀의 땅. 여기에 須佐之男命과 稻田比賣命을 제사지내는 須賀社가 있다」고 한다.

    스가[淸地]=스가[須賀], 스사노오노미꼬또[素잔鳴尊]=스사노오노미꼬또[須佐之男命], 구시이나다히메[奇稻田姬]=이나다히메노미꼬또[稻田比賣命]다. 신령스럽다는 뜻의 구시[奇]는 미꼬또[命]와 대응되는 존칭이고 히메[姬]와 히메[比賣]는 같다. 사실은 이것도 8세기 이후에 여기에 심은 내용이다. 기도전희란 이름도 기·기 저자들이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의인화된 땅을 지칭한다.

    사기에 나오는 진정(眞淨)이란 이름에서 정(淨)도 기·기에 나오는 청(淸), 정(井)과 발음과 의미가 통하는 말로 바꾸어 실은 것으로 보인다.

    〔청(淸)은 소잔명존의 이칭〕

    소잔이 아라사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기·기저자들은 "내 마음이 청청(淸淸)하도다"라는 노래까지 지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게 기·기상에서 암시를 해주는 전형적인 기법이다. 물론 이 말에도 중의적인 의미가 들어있기는 하다. 백제의 그늘로부터 벗어나서 독립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감상도 들어있는 말이다. 그런데 소잔이 청(淸)이라고 알려주는 기사가 이설1에 바로 나온다.

    「소잔명존이 도전궁주 책협지팔개이의 딸 도전원(稻田媛)을 보고 기어호(=침소)를 세워 낳은 아들을 스가[淸]의 탕산주(湯山主) 3명 협루언팔도소(狹漏彦八島篠)라 불렀다」라고 하여 소잔(素盞)이 청(淸)이고 그 아들이 셋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전원이 기도전희를 말하는데 사실은 땅을 차지한 것을 은유한 것이다.

    〔소잔명존의 세 아들〕

    판경언팔도수명(坂輕彦 八島 手命), 협루언팔도야(狹漏彦 八島 野)라고도 한다고 되어있다.
    사루히꼬[狹漏彦]=사루히꼬[坂輕彦]는 장자 예진별명(譽津別命)이다. 야시마[八島]는 응신이고 예전별명(譽田別命)이다. 야시마[八島]란 "대팔주(大八洲)를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야시마[八島]=야시마[八洲]다.      소(篠)=수명(手命)=야(野)로 아라사등의 셋째 아들 진언(珍彦)이다. 소(篠)는 '시노'라고 읽고 '소죽(小竹)'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도 암호다. 죽(竹)은 그 훈이 '대'로서 이것으로 큰 대(大) 대신에 쓴다. 다께[武]와 다께[竹]도 발음이 같은데 뜻이 '크다[大]'로 쓰인다. 소죽(小竹)은 치무(稚武)와 뜻이 같다.

    가야왕족의 백제에서의 성씨 진(眞)은 열도발음으로는 신[眞]이 되는데 받침 없이 읽어서 시노[眞]가 될 수 있다. 일인들은 사까가루[坂輕]라고 읽고 있으나 사루[坂輕]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이 신대기 하 9단 천손강림조에서는 바로 사루[원/원田彦神]로 나오고 천손강림신화를 인대기에서는 일본무존(=구수대왕)이 축자평정하는 것으로 분식해 놓았는데 서기 경행기 18년 7월조에는 사루[猿/猿大海]로 기록하고 있다. 사루[坂輕]에서 발음을 따고 대(大)는 장자라는 뜻이고 해(海)는 가야계를 나타내는 해신(海神)에서 딴 것이다. 이름이 '사루'라는 가야왕실의 장자집안인물이라는 의미다. 원=猿에서 오른 쪽의 袁 대신에 爰이 있는 글자인데 뜻과 음이 같다.

    〔파천과 가애천은 발원지가 동일〕

    이설2에 보면 출운의 파천 상류를 안예국의 가애천(可愛川) 상류라고 말을 돌려놓았다. 강은 다르지만 지도를 보더라도 두 강의 발원지는 동일한 지역이다. 파=대 竹 변 밑에 (其+皮)

    〔초치검은 천총운검〕

    서기 신대기 상 8단 이설2에 보면 초치검은 미장국의 오탕시촌에 있고 열전(熱田)의 축부(祝部)가 관장하는 신이라고 한다. 뱀을 벤 칼 추정(추正)은 '아라사이'라고 하며 '아라가야의 쇠[金]'라는 뜻이고 석상에 있다고 되어있다. 석상은 근초고대왕을 모신, 나라현 천리시의 석상신궁(石上神宮)을 말한다. 아라가야왕 소잔명존(=眞淨)이 만든 칼이 백제왕실의 신보가 된 것이다. 가라나 백제는 칼을 신보로 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치=초 두 변 밑에 꿩 치(雉)

    〔팔운(八雲)이 피어오르는 출운〕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출운의 제철단지를 나타내는 말이고 출운의 팔중원(八重垣)이란 출운을 단단히 확보하여 열도개척의 전진기지로 삼자고 다짐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출운은 그 당시로는 더할 수 없는 병기기지에, 기도전희로 상징되는 병참기지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八은 성수다.

    〔처를 가두는 팔중원(八重垣)〕

    처를 가두는 팔중원이란 말은 지킨다, 보호한다는 의미로서 처는 결혼을 한 사람이므로 열도통치권를 말한다. 즉 백제로부터 독립된 열도왕국을 꿈꾸는 노래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출운을 단단히 개발하고 지키자는 의지를 표현한 노래인 것이다. 팔중의 울타리[垣]를 말한다.

    소잔명존=대기귀신〕

    소잔명존이 본문에서는 대기귀신(大己貴神)을 낳고 있고 이설1에서는 5세손이 대국주신(大國主神)이라고 나와 있는데 소잔명존 본인이다. 대기(大己)는 발음이 '오호아나'로서 '대아나(大阿那)' 또는 '대안(大安)'의 다른 표기이고 '대가라'를 말한다. '대가야의 귀한 신'이라는 뜻이다. 고사기에서는 대혈모지신(大穴牟遲神)으로 나온다. 대기(大己)와 대혈(大穴)이 발음이 같고 무지[貴]와 무지[牟遲]가 같다. 이설2에서는 소잔의 6세손이 대기귀명(大己貴命)이라고 나온다. 아들인 대기귀신과 6세손인 대기귀명이 동일인인 것이다. 대수 자체는 대개가 이런 식으로 신대기에서부터 분식하여 홀리고 있다. 사실은 전부 본인이다. 대수만 늘려놓은 것이다.

    <백제에 의한 애국통치삼백년사/윤영식/102p>에 보면 「그의 異名도 좋은 쇠[鐵]를 뜻하는 백철(白鐵), 즉 素쇠, 素잔(스사)로 짓고서...」라고 나오는데 일리 있는 해석이다. 잔(盞)인데 밑의 그릇 명(皿)을 뺀 약자 형태로 전(箋-대 竹 변)으로도 쓰인다.

    이 소잔명존이 최초에 열도로 건너간 곳은 신대기에 보면 구주쪽으로 나온다. 신대기 상8단 이설4에

    「소잔명존의 소행이 무상하였다. 그래서 여러 신이 천좌치호를 과하고 쫓아내었다.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가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하기를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는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서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峰)으로 갔다」라고 나오는데 백제의 많은 신들로부터 박해받고 열도로 건너온 것인데 먼저 구주로 갔다가 출운으로 다시 건너간 것이다.

    신라국이란?〕

    구주 서남부에 아구네[阿久根]와 누마[野間]반도를 연결하는 지역에 가라가 개척한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것도 원래 본국인 아라가야의 고명 신라(新羅/阿尸良) 그대로인 것이다. 아라사등의 중자 천일창이 개척한 나라다. 그리고 그 동쪽에 인접하여 웅습국(熊襲國)이 있었다. 이 웅습국이 바로 반도어로 '큰 소의 나라'라는 뜻을 가지는 가야가 개척한 소국이다. 구마소노구니[熊襲國]에서 '구마[熊]'는 반도어 '크다'의 명사형 '큼'이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켜 '쿰(굼)'이 되고 다시 받침 없이 명사형어미를 붙여 발음하여 "쿠마(구마)'가 된 것이다. 소[襲]는 반도어 소[牛]를 열도발음으로 치환하여 이두표기한 말이다.

    〔소시모리는 어디?〕

    열도어 소[曾]는 역시 반도어 소[牛]를 달리 표기한 것이고 '시'는 사이시옷이고 모리[茂梨]는 머리[頭]를 달리 표기한 것이다. 열도어에는 '어' 발음이 없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오'로 발음하고 표기된다. 즉 원래는 '쇠머리'라는 뜻이고 신라국과 웅습국의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지칭하는 구주남부의 지명으로 판단된다.

    〔출운은 열도제일의 철산지〕

    그런데 이곳을 살 곳이 아니라고 하고 출운으로 건너간 것은 역시 출운의 사철광산을 개발하여 제철단지를 만들어 열도경략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전략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시마네[島根]의 출운이란 지명에서 볼 때 "(열)島 (개척의) 根(본)"이란 뜻이다.

    〔천좌치호(千座置戶)〕

    어떤 형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대기의 분위기를 볼 때 백제의 좌평이었던 진정이 자꾸 열도로 가기를 원했지만 '가야영역만 다스려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직역하면 "천년 동안 집에만 앉아 있어라"라는 뜻으로 보이고 일종의 연금(軟禁)과 같은 상태로 비유한 것이다. 백제의 좌평이란 사실은 가야사·백제사를 개작하여 기·기를 분식한 결과이고 원래는 아니었다고 본다. 백제가 가라를 침탈하여 후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잔명존(=아라사등)이 출운을 개척하고 이어서 구주까지 개척하여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고 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직전에 백제가 본격적으로 가야를 정복하고 열도에 무내숙이를 후왕(侯王)으로 임명하여 보낸 것이다. 출운을 개척해 놓은 후에 다시 근국으로 갔다는 것이 위에 나왔다. 여기서 말하는 근국(根國)은 구주의 서남부에 있는 아구네[阿久根]를 말한다. 실사상의 연대를 보면 이 일들은 서기 4세기중반에서 5세기초반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신화화한 것이다. 진흙배란 보잘것없다는 뜻으로 비하하여 표현한 것이다.

    〔도리가미[鳥上]=도리가미[鳥神]〕

    조상봉에서 도리가미[鳥上]란 말은 도리가미[鳥神]라는 뜻으로서 기·기상에서 무내숙이를 새[鳥]로 은유하고 있으므로 무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내는 출운국조(出雲國造)이기도 하고 출운대신(出雲大神)이라고도 한다. 이 출운국이 서기 신공기 62년 시세조에는 신라(=가라)의 미인으로 의인화하여 은유되어 나온다. 미인 둘 중 하나가 바로 이 출운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 위의 설화는 일본열도를 처음으로 대규모로 본격개척한 시발이 되는 사건으로서 그것도 바로 우수한 농기구와 병기를 생산하는 제철단지라는 것은 동북아 제일가는 제철왕국이었던 가야다운 일이기도 하고 고대에 있어 중차대한 전략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 정도 되니 그곳을 "(열)島 (개척의) 根(본)"=島根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된 것이다.
    안라국의 역사와 문화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감정위원

     

    1.명칭 유래

    안라국(安羅國)은 현재 함안군 일대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국가였다. 옛 문헌에서 안라국에 대한 국명(國名)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로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과 아나가야(阿那加耶)라는 국명으로, 물계자전에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아라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 용어는 가야가 존재했던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아시량(阿尸良)’의 ‘시(尸)’는 옛말의 사이시옷을 표기한 것이므로 아시량은 곧 ‘아ㅅ라’를 표기한 것이며, 이것은 아나, 또는 아라로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시량, 아나, 아라, 안라 등은 모두 ‘아ㅅ라’라는 나라 이름을 뜻하며,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사이시옷은 ‘ㄹ’받침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이 ‘안라’이므로 함안지역 가야국의 국명은 ‘안라’ 또는 ‘안라국’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2.지리적인 위치와 대외무역
     
    안라국은 삼한시대 변진(弁辰)의 한 국가인 안야국(安邪國)이 성장 발전하여 성립되었다. 함안군의 지형을 살펴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이다. 남동쪽으로 해발 500~700m 정도의 산들로 창원, 마산, 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 강으로 창녕, 의령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다.

    함안군 일대에는 많은 지역에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미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지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평지와 구릉지의 경사면을 개간하여 농경을 하면서 차츰 성장하여 기원 전후시기 안야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안야국은 구야국과 함께 변한제국 중에서는 중국 군현과 교섭하면서 중국에 잘 알려진 유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안야국의 인구는 『삼국지』의 기록에 의거해 보면 4~5천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의 구조는 대개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으로 구성되는데, 안야국의 국읍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변한시대의 널무덤[木棺墓] 유적, 5세기대 이후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가야읍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야국의 정치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농업생산력, 교역에 유리한 조건 등이었다. 즉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을 이용한 계곡 사이의 평야들과 남강, 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야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강을 이용한 교통로 확보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차지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등도 안라국의 성장 기반이었을 것이다.

    삼한의 여러 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 및 인근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중국계 유물과 왜계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도 가야읍 사내리에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방제경(小型倣製鏡)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안야국도 인근 변한제국이나 진한 및 마한제국, 한의 군현, 중국, 왜 등과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야국의 대외교역로는 대체로 진동만으로 통하는 교통로와 마산만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해로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안야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자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식량 이외에 철, 수산자원 등이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현재 함안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북광산이 있고, 동광(銅鑛)의 산출지로는 함안광산과 군북광산이 있다. 동광의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야국 당시에도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여 주변지역과 교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안라국 성장기

    안야국이 성장하여 안라국이 된 시기는 대체로 변한에서 가야로 변하는 3세기 말 4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즉 이 시기 낙동강 서남부지역은 고고학적 유물, 유적의 양상이 이전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세기 말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의 출현과 딸린덧널[副槨]을 가진 대형덧널무덤(大型木槨墓)의 등장, 4세기대 이후 지배자의 무덤에 나타나는 철소재(鐵素材)의 다량 부장, 철제갑주(鐵製甲冑)의 출현, 철제농기구의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의 현상은 가야사회로의 이행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것은 문헌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말 김해 가락국에서부터 나타난 큰 정치적인 변화가 인근 가야제국으로 파급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완만한 발전을 보이던 안야국도 낙동강하류역의 정치적 변동에 연동하여 안라국으로 재편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대 이후 함안지역에서 김해 가락국뿐만 아니라 신라계 및 왜계 등 외래계 토기문화의 양상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안라국으로의 전환과정에서 보다 넓은 교역망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세기대 이후 안라국의 실재를 잘 보여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이다. 광개토대왕비문 경자년(400) 기록에는 왜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안라인수병(安羅人 戍兵)’이라는 단어가 세 차례 나타나고 있다. ‘안라인수병’을 이해하는 입장은 다양하므로 여기에서의 안라가 함안의 안라국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 여부를 떠나서 당시 안라가 고구려 남정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고구려의 남정을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김해 가락국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본다. 전기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안라국은 가락국, 왜와 공동으로 고구려와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김해 일대에서 펼쳐졌으며 안라국은 국읍을 비롯한 중심부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의 피해는 한결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남정 이후에도 자신의 국력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전기가야연맹에 참여하였던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안라국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안라국의 영역 확대를 보여주는 독자적 토기양식인 불꽃무늬토기[火焰文土器]의 확산에서 증명되고 있다.


    안라국의 권역

    그렇다면 안라국의 권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사실 안라국의 지방통치체제나 영역 확대를 보여 주는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역이나 국왕의 통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함안지역에 현존하는 성곽의 분포와 고고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대략의 정치권역을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함안분지를 둘러싼 산 위에는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안라국은 인접한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러한 산성의 분포에 따라 안라국의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추정할 수 있다.

    안라국의 북쪽에는 낙동강, 남강이 있어 자연적인 방어수단이 되었다. 서쪽에는 방어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 있는 여항산성과 파산봉수는 안라국이 남쪽 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이자 동시에 남해안을 통한 외적을 침입을 대비한 시설물로 보인다.

    또 대현관문은 함안군 여항면과 마산시 진북면의 경계지역에 있는데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의 중요한 경계지역이었을 것이다. 동쪽에 있는 포덕산성은 마산疎♧¯ 방면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 북쪽에 있는 성지봉산성, 검단산성, 성산성, 안곡산성, 칠원산성과 연결되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대비한 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로 볼 때 안라국의 권역은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함안군 일대였다.

    5세기대 함안의 대표적인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의 분포를 통해서도 안라국의 지배권역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토기가 조사되는 지역은 함안분지내의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외곽지대에는 칠원면 오곡리유적, 마산시 현동유적, 창원시 도계동유적, 의령 예둔리유적, 유곡리고분군, 봉두리고분군, 진북 대평리고분군, 진양 압사리유적 등이다.

    분포지역으로 보아 당시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에 두고 서쪽의 진주 일부지역, 북동쪽의 창원 일부지역, 서북쪽의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으로는 마산의 진동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역이 멸망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세기대에 이르면 백제,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로 인하여 권역의 축소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세기대 안라국은 남부 가야제국을 주도해 가면서 동쪽과 서쪽에서 잠식해 들어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군사적 또는 외교적으로 대항하였으며, 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야제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문헌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6세기 안락국 대외관계 문헌
    6세기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계체(繼體)·흠명기(欽明紀)에는 가야지역을 둘러싼 주변국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여러 나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모습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많은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철저한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 이 시기 역사 자료들이 대부분 백제삼서(百濟三書)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지만 8세기 일본의 고대 천황주의사관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대체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 내용 가운데 안라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백제가 기문[전북 남원], 대사[경남 하동]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써, 기문을 상실한 가라국은 백제에 대립하여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하였다. 안라국은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가라와 반목하였다. 이러한 가야제국의 갈등을 틈타서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3성을 함락시킨 후 또한 북쪽 경계의 5성을 함락시키면서 차츰 가야지역을 잠식해갔다. 이 시기에 안라는 백제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제2기는 백제가 기문·대사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라가 낙동강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안라의 외교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529년 안라가 주도한 고당회의(高堂會議)-이하 안라회의-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하여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안라는 의도적으로 백제를 배제하였다. 즉 백제가 안라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백제의 대표는 고당에 오르지도 못하였다. 이는 백제가 대사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라지역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대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낮은 관등의 관리를 파견하였으므로 안라회의 자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안라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안라회의가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계속하였다. 백제는 하동에서 함안 사이의 지역에 걸탁성(乞城)을 축조하였고, 신라는 남가라, 탁기탄 지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라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를 이용하여 안라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백제의 안라에 대한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신라와의 외교활동을 주도한 것이 일본부였던 것은 안라가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라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백제의 성왕(成王)은 이미 멸망한 남가라·탁기탄·탁순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안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백제가 계속적으로 가야지역에 군령성주(郡令城主)를 두어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의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라 또한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안라의 외교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548년)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안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는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안라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안라와 백제의 사이가 매우 소원한 관계로 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3기는 안라 주도의 외교적 활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함에 따라 안라가 다시 친백제적인 성향으로 전환했던 시기이다. 안라가 다시 백제와 화친하면서 안라는 백제와 신라가 충돌하였던 관산성전투(554년)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가야의 군대가 2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은 이 전쟁에 국운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에 패배하였고 가야제국은 차례차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관산성전투의 패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관산성전투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하였다. 555년 비사벌(比斯伐,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감문주(甘文州, 김천)를 설치하였으며, 561년에 창녕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라국이 멸망했던 때는 언제쯤일까? 『일본서기』흠명기 22년(561)조에 보이는 “신라가 561년 아라(阿羅) 파사산에 성을 축조하여 일본에 대비했다”는 내용에서 안라국의 멸망을 추정할 수 있다. 아라는 곧 안라국이며, 파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안군 산천(山川)조 및 봉수(烽燧)조에 나오는 ‘파산(巴山)’으로 비정할 수 있다.

    파산은 지금의 봉화산으로서 봉수대는 안라국이 해안으로 진출하는 루트인 진동지역과 함안의 경계지역에 있으며, 봉화산 북쪽 최고봉상에 위치하여 남으로 진해만(진동만)과 북쪽으로는 함안 일대를 비롯하여 낙동강과 남강 너머 의령까지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파산은 안라국의 중요전략기지였을 것이므로 이 지역에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안라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었음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일본서기』흠명기 23年(562)조에 “어떤 책에는 21년(560)에 임나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안라의 멸망시기는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라는 가야제국의 중심국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러한 안라국의 멸망을 전하는 기록이 실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안라국의 멸망은 56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라국의 흔적은 현재 함안군 가야읍의 말산리와 도항리에 말이산고분군이라는 대형무덤들로 남아 있다. 이 유적은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말이산34호분(현재 4호분), 말이산5호분(현재 25호분) 등이 발굴조사 된 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도항리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이 2기의 대형무덤은 도항리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함안지역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발굴조사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다가 199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도항리35호분과 그 주변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고인돌 8기와 집자리 1동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도항리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인간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야읍 아파트 공사 중에 발견된 초대형 덧널무덤인 ‘마갑총(馬甲塚)’을 통해 5세기 전·중반 안라국 지배층 고분문화의 성격과 양상 규명 및 안라국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이 고분은 길이 6.9m, 너비 2.8m, 깊이 1.1m의 긴 타원형의 묘광내에 판재상의 목재로 짠 덧널이 설치된 대형의 덧널무덤이다. 유구의 북쪽 벽은 굴착공사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지만, 중앙에 매장된 무덤주인공의 흔적과 그 좌우에 가지런한 상태로 놓인 말갑옷은 그 동안 영남의 각 지역에서 확인된 것에 비하여 부장상태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유구의 명칭을 마갑총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말갑옷 뿐만 아니라 말의 얼굴을 덮어 보호하는 말머리가리개[馬冑]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여러 점의 판상철편도 확인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1992~1996년까지 5차례의 연차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고총고분인 5호분, 8호분, 15호분 등과 널무덤 20여기, 덧널무덤 20여기, 구덩식돌덧널무덤 10여기, 돌방무덤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안라국 지배층의 무덤 변천과정과 당시 안라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97~1998년에는 도항리와 말산리 일대의 도로 확장공사 및 단독주택 신축공사로 인하여 발굴조사가 필요하게 되자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모두 5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널무덤 38기, 독무덤 3기, 덧널무덤 37기, 구덩식돌덧널무덤 4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말산리의 건물 신축공사 도중 발견된 돌덧널 길이 8.65m, 너비 1.65m의 초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에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 시기의 유물들은 구릉의 북쪽에서 출토, 채집되었다. 이 구릉에 원형 봉토분이 발생한 시기는 5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대형 봉토분들은 입지상 좋은 지점에 위치하면서 구릉의 북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조성된 경향을 보이며, 대형분의 사이와 구릉의 사면에는 중·소형분이 분포한다. 유적의 연대는 삼한시대에서 6세기까지이다.

    이제 안라국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살펴 보자. 먼저 안라국의 토기에 대해 살펴 보면 대체로 4세기 전반부터 고식도질토기가 생산되었는데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화로모양그릇받침, 손잡이잔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4세기대에 안라국 토기를 대표할 수 있는 工자형굽다리접시는, 전반에는 굽다리가 길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차츰 짧아지면서 5세기대의 불꽃무늬굽다리접시와 그 계통이 연결된다.

    5세기대에는 앞 시기의 토기보다 그 형태와 종류가 더 다양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무덤에 부장되는 양도 많아졌다. 이 시기 안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토기는 굽다리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삼각형투창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잔형토기, 종형토기도 제작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류는 그 형태가 조잡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짧아지고, 손잡이가 붙은 것도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령계, 경주계, 창녕계의 토기가 유입되어 안라국 토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라국의 무기를 살펴 보면 공격용무기로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화살촉 및 화살통, 투겁창[鐵鉾] 등이 있고, 방어용무기는 투구와 갑옷 등이 조사되었다. 의례용도구들도 출토되었는데, 덩이쇠, 미늘쇠, 점치는 뼈[卜骨] 등이다. 안라국의 말갖춤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갖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제작·사용되었으며 신라의 말갖춤이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함에 비해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말안장가리개[鞍橋], 발걸이[鐙子], 말띠드리개[杏葉], 재갈[轡] 등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장신구는 주로 유리, 옥, 수정, 마노, 비취 등을 이용하여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으로 이용하였다. 또 생산도구로는 도끼, 낫, 쇠스랑, 괭이, 가래 등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가락바퀴 등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 가운데는 주변의 가야 여러나라, 또는 백제와 신라, 일본 등지에서 제작되어 이 지역의 무덤에 매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계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은 토기가 대부분으로서 굽다리접시, 뚜껑, 항아리 등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5세기 중·후반대에는 창녕의 비사벌, 김해의 남가라계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와 신라, 고령의 가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유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유물들은 각 시대별로 안라국의 대외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안라국의 국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기록인 『함주지(咸州誌)』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가야국의 옛터는 부존정(扶尊亭)의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 기록으로 보아 부존정은 지금의 가야동 쾌안 뒷산(해발 79m)으로 추정된다. 가야동이 안라국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유는 문헌기록도 있지만 초석, 우물, 토축흔적 등의 고고학적 유적과 더불어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된 봉산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도읍지가 대부분 2중성의 구조로 된 것과 일치한다.

    또한 주변 여러 지역에서 신읍(臣邑, 신하들의 생활주거지), 선왕동(先旺洞, 은퇴한 노왕이나 안라국 멸망 이후 왕족이 모여 살던 곳), 궁뒤(왕궁지의 뒤편) 등과 같은 왕궁지와 관련된 지명이 전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지명이긴 하지만 옛 안라국의 영화를 알려주는 왕궁을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서동설화

    삼국유사의 백제 서동설화는 동성대왕의 익산천도와 관련된 것으로 5세기말인데 그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7세기 무왕대의 것이라는 설이 아직도 통하고 있는 것 같다. 삼국유사 기이2 무왕조의 설화는 아래와 같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과부[寡]로서 경(京)의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통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산마[薯여]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때문에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일명 善化)가 아름답기 비할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의 뭇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뭇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라고 불렀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 대궐 안까지 들리자 백관들이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어 곧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지에 이를 때쯤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곁에서 지키며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비록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짝으로 믿고 기뻐했다. 이리하여 같이 가면서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노래가 맞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놓고 살아갈 계획을 의논하려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게 무슨 물건이오"라고 하자 공주가 "이건 황금인데 백년 동안 부를 누릴 것이오"라고 답하자 서동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땅에 흙더미처럼 쌓아 두었소"라고 했다. 공주는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이니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알면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실어보내면 어떻겠소"라고 하자 서동이 "좋소"라고 했다. 그래서 금을 모아 산더미[丘陵]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실어보낼 계책을 물어보니 법사가 "내가 신력(神力)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지고 오시오"라고 했다. 공주가 글을 적어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실어보내자 진평왕은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기를 "모름지기 이 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굳은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라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많은[百] 장인[工]을 보내 도왔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절이 있다[三國史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여기선 과부[獨女]의 아들이라 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실사적인 해석

    달라진 왕통

    「과부의 아들」이라 한 것은 기존의 왕통과는 다른 왕통이라는 뜻이다. 무왕이라고 나오는 인물은 무왕이 아니라 동성대왕이고 가야왕족이다. 기존의 백제 부여씨와는 다른 김씨인 것이다. 과부라고 표현한 것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이고 백제 부여씨가 아니라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이것도 유사저자가 실사를 알았다는 근거가 된다. 단순히 설화를 채록한 것이 아니고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의도적으로 설화를 지어 넣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서기 무열기 7년 4월조에 무령왕이 아들 사아군을 열도에 후왕으로 보내면서 「먼저 조공사로 간 마나군은 백제국주의 골족이 아닙니다[前進調使麻那君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마나군은 먼저 후왕으로 있던 동성대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2월조에는 열도에 후왕으로 간 동성대왕의 아들 둘이 교대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다. 東城子가 글자 그대로 동성대왕의 아들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에 백제신찬이란 사서를 들먹이며 인용해놓은 동성대왕 암살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暴虐]한 짓을 하였다. 드디어 국인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다.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斯摩王이다.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곤지가 왜로 가다가 축자도에 이르렀을 때 사마왕을 낳았다...(중략)...지금 생각해보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백제신찬'이란 사서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동성대왕이 부여씨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말을 빙빙 돌려서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부여씨라면 이렇게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무령왕의 휘를 '사마왕'이라 했다는 것은 이 휘가 6세기 당대의 휘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사마라는 휘는 서기저자들이 지은 무령왕출생설화에서 島君>島王이란 별명을 이두식으로 바꾼 것이고 휘를 단순히 '사마'라고 하지 않고 '사마왕'이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이 휘가 분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휘에 '王'자를 붙이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서기 웅략기 23년(서기 531년) 4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백제 문근왕이 훙했다. 천왕은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젊고 총명하여 불러들여 친히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시켰다. 그리하여 병기를 주고 축자국의 군사 5백인을 딸려 호위시켜 나라에 보냈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 이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 마사신 등이 수군을 이끌고 고려를 쳤다』

    문근왕=(문주왕+삼근왕)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재위기간이 합쳐도 5년밖에 안되니 짧다고 합성이름을 쓴 것인지 아니면 "문주왕의 아들 근왕"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斤은 近과 같아 '큰 大'의 이두로 보면 문주의 장남으로 보인다.

    곤지왕은 부여씨가 아니고 가야왕족 대반씨다. 쯔꾸시[築紫]는 구주로서 가야인들의 기반이 확고한 곳이다. 고대에는 구주가 가야땅이었던 것이다. 동성대왕은 그곳의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말다왕이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칙하여 궁중에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일러 그 나라의 왕으로 하였다」라는 것은 웅략이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므로 그 형의 증손자를 기특해한 것이다.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하내국제번)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하내국제번)    

    비유왕의 아들 곤기왕이 곤지왕이며 사기 문주기 3년조의 내신좌평 昆支와 동일인물이다. 말다왕은 동성대왕의 별칭이며 말다는 가야왕족들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 중의 하나다.  
                              
    군사수 500인은 대폭 줄인 것이다. 열도에서 500명으로 백제에 와서 쿠데타에 성공할 수 없다. 열도를 이미 장악하고 반도로 왔기 때문에 상당한 대군이 왔을 것으로 본다. 최소 1만 명 이상의 가야계 정예철갑기병 정도라야 쿠데타가 가능하다고 본다. 쿠데타군이 기병이라는 것은 기동성이 뛰어나지 않으면 전격적인 작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응신과 아신의 밀약에 의한 백제·왜의 분립관계가 깨지고 통합왕국을 열었던 것이다. 이때가 기원 이후만 보면 우리민족 사상 초유의 대제국을 이룬 순간인 것이다. 대륙의 두 백제군과 열도와 백제본국을 합친 것이다. 당대 아시아의 최강자로서 어쩌면 당시 동서양을 통털어 제일의 대제국이었을 수도 있다.  

    「이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라고 하는 것도 우회표현이다. 가야왕족이지만 백제왕이 되자 백제왕족들이 전부 도리 없이 복종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명기에서 신수도를 건설하는데 건설본부장인 大匠을 왕인(=귀수대왕)의 후손인 서직현(書直縣)이 하고 있는 것, '남제서' 백제전에서 보다시피 대륙백제군에 발령낸 태수들 명단에 보면 백제왕족 夫餘氏들이 다수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성대왕은 열도출신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라는 것이 열도출신임을 은유한 것이다. 무령왕출생설화에 나오다시피 곤지왕의 중자로서 열도의 대화왕조 출신이다. 「남쪽 못 가」가 열도를 가리키고 경(京)이 백제를 가리킨다. 축소비유한 것이다.

    동성대왕은 가야왕족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는 것은 출신성분이 왕족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성대왕은 가야의 아라사등의 고손자이자 아라사등의 장남인 예진별명의 증손자다. 용은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야왕족을 해신(=龍)이라고도 하므로 가야왕족이라는 의미다. 성씨록에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가나[任那]국주'로서 성씨록에서 유일하게 '용 龍'자가 들어간 용주왕이 나온다. 또 용은 해신으로서 신대기부터 이자나기노미꼬또[伊장諾尊]가 물에서 몸을 씻고 낳은 아이가 와다쯔미[少童]로 나오고 같은 발음으로 와다쯔미[綿積]라고 성씨록에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安曇連; 綿積神命兒 穗高見命之後也(하내국지기)
    安曇宿니; 海神綿積豊玉彦神子 穗高見命之後也(우경지기)    

    출신성분 분류에서 神別 중에 유일하게 지기(地祇)는 아라사등의 삼자로서 대화왕조 2대왕인 진언밖에 없다. 아즈미[安曇]도 아즈마[東]와 같은 '아침'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고어로서 가라의 이칭 신라의 新이기도 하고 성씨 김(金)이기도 하고 新羅와 金城은 같은 뜻이므로 금(金)이기도 한 것이다. 가야왕족인 것이다. 분명히 해신 와다쯔미[綿積]라고 나온다. 서양신화의 포세이돈이나 넵튠 같은 해신이다.            

    벽田首; 出自任那國主都奴加阿羅지등也(대화국제번) (지등=志, 等)   

    쯔누가아라시또[都奴加阿羅지등]가 아라가야왕 아라시또[阿羅斯等]이자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인 것이다. '가나[任那]국주'다. 위의 성씨록 '대반조'조의 나온 '사이[佐利]'왕이 바로 이 인물들의 성씨가 김씨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ㅅ+아래아)이>(사이, 소이)>새[新], 쇠[金]가 되고 새[新]도 新羅가 金城이므로 결국은 금(金)과 김(金)은 같은 것이다. 이것도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음운현상을 보면 원래가 같은 것이다.  

    절세의 영걸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라는 말은 위의 서기 인용기사에 나오는 그대로다. 실사적으로도 절세의 영걸로 분석된다. '남제서'나 '자치통감' 같은 대륙측 기록을 보더라도 북위의 수십 만 대군을 연전연파할 정도로 당대 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최고의 영웅이었다. 서기 무열전기 11월조에도 「希世之雄」 > "희세의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마[薯여]는 실사와의 연결고리

    「산마[薯여]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는 말은 설화상에서 중요한 키워드이자 실사와의 연결고리다. 이것은 서기에도 키워드로 나온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그 손으로) 마[暑預]를 캐게 했다」라고 나온다. 열도어로 이모[暑預]는 이모[薯]와 같다. '이모'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쟈가이모(=감자), 사쯔마이모(=고구마), 이모(=마) 등이다. 이 기사는 서기저자들이 폄하한 위사로서 이런 일은 없었다고 본다. 다만 기사 속에 이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키워드로 심어놓은 것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마동[薯童]이 나온 것이다. 이 서동의 '이모[薯]'는 같은 발음의 '이모[妹]'로 동성대왕의 왕권장악을 은유한 설화가 서기 인덕전기에도 나온다. 대화왕조에서 왕을 배출한 아라사등의 세 아들집안을 비유한 설화인데 「본변은 기미[君]를 생각하고 말변은 이모[妹]를 생각한다」라고 나오는데 기미[君]는 초대왜왕인 응신을 가리키고 이모[妹]는 아라사등의 장자 예진의 증손자인 동성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이모[妹]'가 열도어로 음도 같은 무열기의 '이모[暑預]'이자 서동설화의 '이모[薯여]'이며 서동의 '이모[薯]'인 것이다. 이 모두가 치밀한 기획, 각본에 의한 작품들인 것이다.  

    일연이 마동[薯童]이란 이름을 설화에 지어 넣은 것도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의 기사를 보고 주인공 이름을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의 하나로 변조하여 이름을 짓고 설화를 꾸민 것인데 이런 실사를 다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려시대만 해도 고려인들은 고대사의 실상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다. 이런 것을 보면 사서에 실린 신화·설화들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단순히 채록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설화를 보고 '이야기꾼'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만들어 설명하는 것은, 현대의 학자들이 고대인의 발상이나 실사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 참조  

    신라왕은 소지왕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라고 했는데 동성대왕 재위시의 신라왕은 진평왕이 아니고 소지왕이다. 소지왕의 딸과 결혼한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사기에는 동성대왕이 신라왕족인 이찬 비지(比智)의 딸과 결혼했다고 나오는데 소지왕의 이칭을 비처(毗處)라고 하여 비지와 음이 거의 같고 소지왕의 왕비이름이 선혜(善兮)부인이라고 하여 공주이름 선화와 흡사하다.          

    설화 속의 선화, 비지 등 이런 이름들은 삼국사기의 선혜, 비처 등의 이름들을 일연이 보고서 연결고리로 삼아 지어 붙인 것이다. 이 역시 설화는 자연발생이 아니라 사서저자들이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작위적으로 신화나 설화로 꾸며 실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외교에도 능란

    「경(京)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고 친해졌다」는 것은 외교에 능하고 신라에 도움을 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정도라는 말이다. 또 '남제서'를 보더라도 군사, 외교적으로 탁월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겠다. 이런 외교도 역시 힘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京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앞의 京은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서동요는 제라동맹 협상을 의미

    여기 나오는 서동요 자체는 설화 속의 일부분이다. 풀이하자면 「선화공주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라는 구절에서 신라와 백제가 제라동맹을 위한 "협상을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정도로 풀 수 있다. 그 전까지 신라는 광개토대왕 이래로 고구려에 신속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신라가 백제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고구려에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비밀리에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혼인의 의미

    기·기상에서 볼 때 여자를 대부분의 경우 영토를 은유하고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은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이 경우는 실사로 보인다. 만약에 영토에 대한 통치권으로 은유하여 썼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신라가 그 전 90년 간 고구려에 대해 했던 것처럼 백제에 신속(臣屬)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나 그 당시의 백제의 능력으로 볼 때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근거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일단은 백제가 우위를 가진 동맹관계로 보인다.      

    제라동맹성립

    백관들이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는 것은 백제의 동성대왕이 신라를 회유했을 테고 신라의 백관들은 처음엔 백제와의 화친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구려와 화친하고 백제는 멀리하자는 등의 정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점은 고구려 장수왕 말기다. 결국은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동맹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사기는 부여를 말갈이라고 비칭

    그런데 동성대왕 즉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동맹관계가 이루어진 증거가 사기 소지기 3년조에 나오는데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이 있을 때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 「...우리 군이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았다. 적은 패하여 물러났다...」라고 하였는데 사기의 이 말갈기사는 당시의 판도를 볼 때 반도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 서북의 고구려를 상정하면 동북 즉 지금의 함경도지역 외에는 달리 상정할 데가 없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동부여의 후예로서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여진이라 불린 세력이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이들의 조상들에게 시대를 소급해서 말갈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지 고구려가 지금의 함경도지역에 있는 말갈과 연합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반도의 북부 중앙을 척추처럼 남북으로 세로지른 험한 산맥을 넘어 무슨 연합을 하고 할 것이 있겠는가. 고려인들이 의도적으로 꾸민 것으로 보인다.

    제라동맹에 가야군 등장

    특이하게도 가야의 구원병이 나오는 것도 역시 동성대왕의 군대인 것이다. 백제왕권을 장악하러 데리고 들어갔던 열도의 가야계 정예병으로 구성된 친위대거나 가야본토의 병력일 것이다. 이 내용이 위에 인용한 웅략기 23년 시세조의 「축자의 안치신(安致臣)과 마사신(馬飼臣)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라는 내용과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바로 대응되는 것이다.            

    소지왕과의 묘한 인연

    동성대왕과 소지왕은 특이하게도 즉위연도가 같다. 몰년도 1년 차이다. 묘한 인연이다. 동성대왕 즉위 서기 479년, 무령왕에게 암살 당한 것이 501년이다. 소지왕은 즉위 서기 479년, 몰년이 500년이다.

    고구려에 본때를 보이다

    구주의 군사가 고구려를 쳤다는 것은 4세기말 이후 약 90년 간 백제는 영락대왕과 장수왕에게 자주 시달렸기 때문에 동성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구주의 가야계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때를 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서기기록상 웅략 23년이 동성왕 원년으로 되어있고 사기에는 소지왕 3년으로 나와 기록이 2년 차이가 있지만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

    가야군이 주도

    안치신의 아나[安]는 가야인임을 암시하고 아라가야장수다. 마사신은 말먹이는 사람이 아니고 막강한 가야의 기병대장이다.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전기에 보면 대반장덕련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가야왕족의 성씨인 대반씨에 字가 馬飼라고 나온다. 역시 가야인이고 기병대장이다. 長德이란 장자집안 인물이라는 뜻이고 동성대왕의 증조부인 예진별명이 장자였으므로 동성대왕의 집안인물인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흠명기 4년 12월조에 보면 집안인물 중에 東城道天이란 이름도 보인다.  

    돈독한 제라동맹

    사기 소지기 3년, 6년, 16년, 17년조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군을 막아내고 있다. 돈독한 제라동맹이다. 이런 경우는 사국시대에 이 때 뿐이었다. 이런 것도 동성대왕이 명군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야가 확 트인 영웅이었다.



    공주가 가지고 온 금은 한 말이지만 서동의 금은 산더미[丘陵] 같았다는 말도 신라가 제라동맹으로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는 말이다. 가야가 장악하고 있는 열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한 것이다. 제라동맹으로 인한 양국의 "동맹의 이점"을 은유한 것이다.

    백제불교 초전은 신라에서

    용화산의 사자사 지명법사가 나오는데 백제에 침류왕대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동성대왕 불교기사는 사실로 보이고 동성대왕대에 경주신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본다. 동성대왕은 불교와 유달리 관련이 많다.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은 사기기록에 따르면 동성대왕 15년이므로 서기로 493년 정도다. 이후에 익산에 새로 수도를 건설하면서 신라의 지원을 받아 미륵사를 지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의 침류왕 불교도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서기에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기 대화5년 3월조에 침류왕이 진사군과 가야군에 협공 당하여 자결하는 장면에서 절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내용이 위사임을 알고서도 옮겨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저자들이 만든 분식명을 가려보았다는 것은 일본고대사서의 이면실사를 다 파악했다는 뜻이다. 이 기사에서 침류와 진사는 일인다역인데 효덕천황·소아창산전대신·이리도덕 등은 침류왕이고, 소아일향신(=身刺)·물부이전조염은 진사왕이고, 황태자(=천지)·대반박련·삼국공마려·수적교신·목신마려 등은 가야측이다.        

    "해를 향하여[日向]"란 뜻을 가진 진사왕의 이칭은 "왕[日]을 바라보고 살아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데 말을 바꾸면 진사왕은 원래 왕위계승서열에서 벗어난 인물이란 뜻이다. 또 이복형인 침류왕의 시신을 팔단을 냈다고 하여 이름을 지어도 "몸을 베다[身刺]"라고 짓고 있는 것이다. 물부는 초고대왕을 조로 하는 성씨이고 二田이란 나라를 둘로 만든 인물이란 뜻으로 붙인 것이다. 진사왕 때문에 대화왕조가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유사 흥법 아도기라편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있어 시자 세 사람과 더불어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 해를 살다가 병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종종 신봉하는 사람이 생겼다[주에 이르기를 "본비와 여러 전기와는 사실이 다르다"라고 했다. 또 '고승전'에는 "서축인이다"라고 했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라고 했다]. 아도본비를 상고해 보면 아도는 고려사람이다...』

    고려는 고구려고 서축은 인도를 이른다. 그런데 유사 흥법 순도조려편에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고구려에 건너온 것은 서기 374년으로 되어있다. 동성대왕의 혼인시점과 시차가 정확히 햇수로 120년이나 벌어진다. 전혀 다른 인물이다. 분명히 비처왕은 소지왕의 이칭인데 위의 유사이야기는 신라가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것이 와전되었거나 왜곡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본비와 여러 전기의 내용이 다르다고 한 것도 이상하다. 다르다는 내용 자체는 기록하지 않고 다르다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吳나라라는 말도 사기에 나오는 마라난타의 동진(東晉)을 의식하여 쓴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기사 때문에 실사를 그대로 기록하지는 못하고 빙빙 돌려서 알아보기 어렵게 기록한 것이다.  

    백제 우위의 동맹

    진평왕이 서동을 존경하고 항상 안부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동성대왕의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보다는 백제가 역시 월등히 우위였던 것이다.

    설화 속의 설화

    왕이 어느 날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려다가 용화산 밑 큰 못 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절을 하고 왕비가 그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하자 세운 것이 미륵사다. 이 이야기는 설화 속의 또 하나의 설화다.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 이 회전과 낭무는 유적발굴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경우도 또 우리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기록은 정확한데 해석을 잘못하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익산의 웅포, 왕궁리 유적은 7세기 무왕의 유적이 아니다. 이것은 동성대왕이 5세기말에 신라의 도움으로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설화로 꾸민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흠명기 6년 9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이 달 백제가 장육(丈六)의 불상을 만들었다. 원문(願文)을 지어 이르기를 "듣건대 장육의 불상을 만들면 공덕이 심대하다. 지금 삼가 만들었다. 이 공덕으로 원컨대 천황이 훌륭한 덕을 얻어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가 모두 복과 도움을 얻을 지어다. 또 원컨대 천하의 일체중생이 다 해탈을 얻을 지어다. 그래서 만들었노라"』

    이 기사도 동성대왕의 미륵사와 관련한 내용을 달리 처리한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가 8년으로 끝나고 있고 흠명기 6년조에 위의 내용이 나오므로 단순히 봐도 동성대왕 14년 정도면 서기 492년 정도로 시기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불상은 백제가 만들었는데 원문에 천황의 덕을 칭송하고 복을 빌고 있으니 흠명천황이 사실은 백제왕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열도에 불교전파

    일본의 불교초전은 백제가 5세기말 동성대왕대에 신라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무령왕을 거쳐 성왕대에 당시 백제의 후국이던 열도에 전해준 것으로 본다. 백제가 신라로부터 받아들인 지 수십 년 후라면 시간적으로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일본서기에도 흠명기 13년 10월조에 「百濟聖明王 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別表 讚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諸法中 最爲殊勝 難解難入 周公·孔子 尙不能知 此法能生無量無邊福德果報..........」라고 나와 이것이 실사로 판단된다. 연대는, 흠명 13년이라면 서기로 551년이지만 실사상으로는 성왕이 즉위한 서기 523년부터 약 10년쯤 지난 530년대부터 550년대 정도로 추정된다.          

    ※ 백제 서동설화는 위와 같이 열도출신인 가야계 동성대왕의 1. 익산천도, 2. 제라동맹, 3. 경주신라로부터의 백제불교초전 등을 설화와 노래로 꾸민 것이다. 사서의 기록도 아직 제대로 해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사의 잘못된 기록을 믿고 7세기 무왕이 남긴 유적, 유물이라고 믿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http://blog.daum.net/kyrie0803


    [출처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가야에 속하는 국가

    《삼국지》의 변진12국(弁辰十二國),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접도국(接塗國) ·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 고순시국(古淳是國) · 반로국(半路國, 혹은 半跛國) · 악노국(樂奴國) · 군미국(軍彌國) ·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 감로국(甘路國) · 구야국(狗邪國) · 주조마국(走漕馬國) · 안야국(安邪國) · 독로국(瀆盧國) 등

     

    《삼국유사》의 5가야조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 대가야(大伽耶) · 성산가야(星山伽耶) · 소가야(小伽耶) · 금관가야(金官伽耶) · 비화가야(非火伽耶) 등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가야 · 금관국 · 아시라국(阿尸良國) · 대가야국(大加耶國) 등


    《일본서기》
    남가라(南加羅) · 탁순(卓淳) · 탁기탄(啄己呑)과 멸망 당시의 이른바

    임나십국(任那十國)인 가라국(加羅國) · 안라국(安羅國) · 사이기국(斯二岐國) · 다라국(多羅國) · 졸마국(卒麻國) · 고차국(古嵯國) · 자타국(子他國) · 산반하국(散半下國) · 걸찬국(乞飡國) · 염례국(稔禮國) 등

     

    그 중에서 지명고증이 대개 일치하는 것은

     

    김해(狗邪國 · 金官伽耶 · 金官國 · 南加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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