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⑧숭선전지(崇善殿誌)에 기록된 가야건국

숭선전지(崇善殿誌)는 김해 김씨 집안의 역사서이자, 경전과도 같은 책이다.
숭선전(崇善殿)이란 한민족의 최초 조상인 환인씨(桓仁氏)로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 역대로,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전각을 말한다.

  삼황(三皇)이란 천황(天皇, B.C.8479년)·지황(地皇, B.C.8364년)·인황(人皇, B.C.8247년)이다. 오제(五帝)는 유소씨(有巢氏:일명 桓雄氏, B.C.3898년)·수인씨(燧仁氏, B.C.3739년)·복희씨(伏羲氏, B.C.3512년)·신농씨(神農氏, B.C.3071년)·황제씨(黃帝氏, B.C.2679년)이다. .

 기자조선(箕子朝鮮) 때는 숭인전(崇仁殿)이라 했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 때는 숭령전(崇靈殿)이라 했다. 신라 혁거세(赫居世) 때는 숭덕전(崇德殿), 신라 4대 탈해왕(脫解王, A.D.56∼78년) 때는 숭신전(崇信殿)이라 했다. 그리고 알지왕(閼智王),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과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때는 숭혜전(崇惠殿)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제 온조왕 시절에는 숭렬전(崇烈殿)이라 했고, 고려 태조왕건 때는 숭의전(崇義殿)라 했다.
그러므로 가야국의 숭선전까지 8대전으로,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숭선전에는 머리말에서부터 후서(後敍:뒤에 기록한다는 뜻)가 있고, 숭선전지서(崇善殿誌序)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숭선전지》의 목차가 시작된다. 목차에는 도판(圖版:도록으로 된 판)이 있고 사진으로 된 능의 도표와 왕묘, 그리고 제각 등이 수록되어 있다.

  《숭선전지》의 제1권은 가락국기(駕洛國記)로 시작하여, 제2권은 여러 가지 통문(通文:신하들의 상소문 같은 것)이 있다. 제3권에는 각종 제문(祭文:제사 때 올리는 글)과 여러 가지 상량문(上樑文:집을 지을 때 들보를 올리는 글)을, 제4권에는 관문(關門:중요한 요처의 글)이 있고, 제5권에는 여러 곳의 전각이 배치된 곳을 싣고 있다. 그리고 끝장에는 속편에 부록으로 실은 제1권으로 광무(光武) 7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광무 7년이면 후한(後漢:東漢) 때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A.D.25∼56년)는 이름이 유수(劉秀)이며 연호는 건무(建武)라고 되어 있다. 광무 7년은 후한 광무제 32년이란 뜻이다. 가락국의 기록은 후한 광무제 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숭선전지 머리말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보면 김해부(金海府)라고 되어 있다. 김해부(金海府)는 필자가 앞서 밝혔듯이, 대륙의 절강성(浙江省) 임해군(臨海郡)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은 남천축의 아유타국(阿踰陀國) 왕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서장성과 인도와의 접경지대가 아리(阿里)이다. 아유타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남천축국이다.

본래 천축국은 신강성 동북부에서 시라일다(尸羅逸多)라는 왕이 세운 것으로 강대해지자 다섯 천축국으로 나누어졌다. 서장성과 청해성(靑海省) 서쪽지역과 신강성(新疆省) 일대가 모두 옛 천축국이었다

  사서에서 아(阿)자는 본래 언덕이라는 뜻이다. 사막이 많고 돌이 많으며 거친 땅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의 글자가 아(阿)자이다. 아자를 보면 금방 서역(西域)임을 알 수 있다.
아리(阿里), 아라(阿羅), 아슬라(阿瑟羅), 아미타불(阿彌陀佛), 아유타(阿踰陀) 등은 주로 사막이 옆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들이다.   한국에는 모래와 사막과 언덕이 없기 때문에 아(阿)자가 붙을 만한 곳이 없는데, 유독 아현동(阿峴洞)에 아자가 붙어있으나 모래와 사막이 있는 언덕이 아니므로 후에 갖다붙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허황옥의 호(號)는 보주태후(普州太后) 또는 보조태후(普照太后)라고 했다. 보주(普州)는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또 수로왕의 묘지인 왕릉과 허황옥의 왕릉은 구지봉(龜旨峯)의 산 동쪽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숭선전지 서문 24페이지에서 보면 가야국의 계통은 삼한(三韓)이 오가야(五伽耶)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무릇 491년 간 지속되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光武帝, A.D.25∼56년) 당시 신라와 더불어 삼한(三韓)의 왕통에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숭선전지 첫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벽 후 나라가 아직 서지 아니했고 나라이름이 없을 때 군신이 없는 신라의 칭호를 간(干)이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임군이 없었을 때 제후들의 칭호에 무조건 간(干)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도간(我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酋長) 등이 모여, 백성들 중에 뽑은 영수와 백성 100여 명과 함께 모여 가야 왕을 선출하는 문제를 의논했다는 기록이다. 그때 백성 7만 5천 명은 도시 외곽의 산야에서 논밭을 경작했다고 한다.

  숭선전지 1권 5쪽에 보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년(壬寅年) 계욕( 浴:목욕하고 푸닥거리를 뜻함)일에 북쪽에 있는 구지봉(龜旨峯)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상스러운 기운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지 사람의 소리는 분명했다.
구간(九干:아홉 명의 한국인. 즉 대표자격)들이 대응하기를 여기는 구지(龜旨)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말하라고 하자 하늘에서는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했다. 그때 구지봉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구하구하(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수기현야(首其現也:머리를 내밀어라)
        약불현야(若不現也:만약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번작이끽야(幡灼而喫也:이글거리는 불에 구워먹겠다
)

  이와 같은 뜻으로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춤과 노래를 불렀다고 되어 있다. 그 당시 하늘에서는 이상한 자색 빛이 나타나더니 그 빛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곳에 불그스레한 황금알 여섯 개가 둥근 해처럼 놓여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여러 번 절하여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아도간(我刀干)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을 안고 집에 가져왔다.  
그후 여섯 알이 화하여 동자가 되었고, 그들이 각각 여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인데, 알〔卵〕이라는 것은 가장 핵심을 뜻한다. 게다가 황금알이라고 했으므로 군신의 자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알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대륙의 북쪽 방향에서 남쪽 대륙으로 내려온 것을 뜻한다. 그리고 9간으로 대표되는 인근의 제후들이 모여 가야국의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사를 구지봉 주위에서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김수로왕의 나라이름은 대가락(大駕洛)이라고도 하며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했는데 여섯 가야 중에 하나이다라고 했다. 나머지 다섯은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며,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이 있고 서남으로는 창해(滄海:차디찬 바다. 즉 東海를 뜻함)가 있고 서북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있으며, 동북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지리산(智異山)은 지금 중국 대륙의 지주(智州)가 있는 곳이다. 지주에 있는 지이산은 광서성(廣西省) 울림현(鬱林縣)과 하지현(河池縣) 동쪽이다.   황산강(黃山江)이라는 강 역시 한국에는 없는 강이다. 여기서 황산강(黃山江)은 안휘성 남부에 있고 황산에서 상해 동쪽으로 흐르는 샛강인 듯하다. 지금 한국의 김해를 가야국으로 보았을 때 동쪽인 부산쪽에는 황산이나 황산강이 있을 리 없다. 현재 중국 지도에는 상해시(上海市) 주변에 황강(黃江) 황포(黃浦)라는 강과 포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황산강은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에서 동으로 멀리 뻗어 흘러간 강으로 보인다.

 고려 태조(太祖, A.D.918∼942년) 5년 경자(庚子) 때 다섯 가야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금관(金官)은 김해부(金海府). ㉡고령(古寧)은 가리현(加利縣). ㉢비화(非火)는 창녕(昌寧) 또는 고령(高靈). ㉣아라(阿羅)를 성산(星山)으로 했다는 기록이다. 성산을 혹 벽진가야(碧珍加耶)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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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⑨숭선전지에 기록된 가야지명

숭선전지는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기록을 참고하여 산천(山川)·궁실(宮室)·불우(佛宇)·능묘(陵墓)·고적(古蹟)·인물(人物) 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명이다.

㉠ 감로사(甘露寺)
  숭선전지에 나타나는 감로사(甘露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대륙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북쪽 산인 북고산(北固山)에 있다고 적고 있다.  감로사는 오(吳)나라 때 손권(孫權:大帝, 연호는 黃武, A.D.222∼229년)이 설치했다. 그리고 당(唐)나라 때 이덕유(李德裕)가 절터를 다시 증개축하면서 창건된 절이 감로사이다.
  택지를 조성할 때 땅에서 달콤한 단물이 나온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후 청(淸)나라 성조(聖祖)였던 강희(康熙:이름은 玄燁, A.D.1662∼1722년) 때 이름을 고쳐 초안사(超岸寺)라고 했다고 한다.

  또다른 곳은 섬서성(陝西省) 화현(華縣) 동남으로 8리에 있는 소화봉(少華峯) 서쪽에 당(唐)나라 장교(張喬)와 정곡(鄭谷)이 함께 놀러왔다가 감로사(甘露寺)에 대한 시(詩)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고 적고 있다.
  이 시의 감로장조에 보면 사천성(四川省) 자중현(資中縣) 서북 50리에 통라천정로(通羅泉井路)라는 곳에 감로사(甘露寺)가 있으며, 당나라 승려였던 진덕(眞德)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절 옆에 있는 샘물은 병을 고치는 물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감로사(甘露寺)가 있는 곳에 신어산(神魚山)이 있으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옥지연(玉池淵)이란 연못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감로사가 있는 곳에는 신어산(神魚山)이 있고, 신어산 가까운 곳에는 옥지연이란 연못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송(宋)나라 이종(理宗:趙 , A.D.1225∼1264년) 가희(嘉熙, A.D.1237∼1240년) 원년에 승려인 해안(海安) 스님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후 몽암(蒙庵)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 구암사(龜巖寺) 
  구암사(龜巖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구암사,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凉寺)는 신어산(神魚山)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신어산은 감로사(甘露寺)에 있다는 기록을 보았다. 감로사는 신어산에 있다 했으며 감로사는 지금 대륙의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북고산(北固山)이라 했다. 북쪽에 있는 고산(固山)인지 북고산(北固山)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북고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83쪽에 북고산이 있었다. 이곳은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북쪽 1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지형으로는 산이 우뚝 솟은 입구에서부터 강으로 이어져 삼면(三面)이 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황금색과 붉은 색의 두 산이 나란히 있고 경치가 수려해 사람들이 말하기를 삼산(三山), 즉 세 개의 산의 서울이란 뜻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산 아래에 다다르면 큰 강이 있고 산세와 강물이 험난하고 견고하여 양(梁)나라 무제(武帝, A.D.502∼519년, 이름은 숙연, 연호는 천감)가 산에 올라 오래도록 서 있다가 말하기를, 산 준령으로서 자태를 지키는 것은 부족함이 없구나. 과연 서울인 도읍지다운 입구는 실로 장관이로다라고 했다고 한다.
  산봉우리에는 용왕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송(宋)나라 때 한세충(韓世忠)이 군사를 파견해 사당에 매복해 있다가 중원에서 온 왕출(王出)을 굴복시켰다고 적고 있다. 진강현(鎭江縣)은 진강시로 되어 있고, 강소성 남쪽으로 지금의 남경시(南京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중국 지도에 남경시 동쪽에 있는 진강시(鎭江市)에는 감로사가 있고 신어산(神魚山)도 있으며, 구암사·십선사·청량사, 그리고 운점산(雲岾山)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진국사(鎭國寺)와 명월사(明月寺)도 진강현 주변인 명월산(明月山)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casahoo

대륙절강의 가야

김수로왕의 가야가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에 가야의 선조가 대륙의 절강성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소개합니다


고조선의 명이변한은 옹관묘제를 사용했는데 소호씨(少昊氏)세력과 관계가 있으며 대릉하 대성자(大城子)지역과 산동지역에 있었습니다.

참고- 번한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16685

 

그런 소호씨(가야)세력이 남하하여 절강지역의 청양(靑陽)에 정착하였는데 가야와 관계 있는 지명들로 허황옥의 출생지일수도 있는 허촌(許村)이 있고 묘수(廟首)도 있으며 구지봉에 나오는 구지산(九支山)도 있습니다.

 

<산해경>'황제내경'에 청양지역 남쪽에서 파사석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고 가야가 금성을 침범했다가 퇴각하면서 지나가는 지명으로 독산(獨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김해(金海)에 김수로왕의 묘는 있으나 황산강(黃山江)이 없고 동북쪽에 가야산(加倻山)도 없습니다.


지도- 가야의 위치 추정지명

 


가야세력을 대륙의 절강성 청양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이유로 <삼국사기>에 초기신라의 천문관측기록을 보면 양자강유역의 청양지역으로 나오고 귀지(貴地)와 허촌, 묘수, 구지산의 지명이 사서의 수로왕신화에 나오는 지명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가야의 선조 소호씨의 묘가 대륙의 곡부에 있으며 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은 서라벌신라에 귀화하고 후대에 왕의 칭호를 받고 후손들이 왕권을 장악하면서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김수로왕의 선조인 소호씨의 역사가 서라벌신라의 기록에 편입됩니다.


지도- 천문기록도(고구려, 백제, 가야)

 

그래서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중에 신라가 대륙의 절강지역으로 나오지만 신라가 아니고 가야의 천문기록으로 봐야합니다.


그 이유는 서라벌신라는 3세기경에 요녕지역에 있었는데 조위(曺魏)의 낙랑에 패하여 한반도로 이동하고 5세기경에 고구려로부터 독립하면서 가야계를 흡수했고 김유신은 서라벌신라의 진골로 편입됩니다.

참고- 대륙삼국의 증명(천문기록), 초기삼국의 위치

http://blog.naver.com/casahoo/20001340770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39524 



이렇게 가야사가 흡수되면서 서라벌신라의 역사에 혁세씨와 소호씨의 역사가 혼재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가야의 김수로왕 세력은 지금의 한반도 남부(영산강, 김해)로 이주하면서 한반도의 토착세력과 융합하여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했으나 백제가 한반도로 진출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일본열도로 다시 이주하고 야마토정권와 대화왕조를 건국합니다.

*가야가 백제에 패배한 이유는 기동력의 차이로 보임

                                             (가야는 전차병이고 백제는 기마병)

 

다시 말하면 가야연맹의 왕족들은 백제에 흡수되어 일본열도를 통치하면서 백제사에도 등장하고 일부는 서라벌신라에 편입된 것입니다.


지도- <일본서기>의 천문관측도

 

여기서 <일본서기>의 천문기록을 살펴보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는데 A는 초기'가야사'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고  B는 김수로왕의 '가야사'의 관측기록이며  C와  D는 일본열도를 가야와 백제가 지배한 후의 관측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 백제의 속국이던 열도가야(왜)가 일본이라는 국호로 독립하면서 가야사와 백제사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참고- 일본서기의 인식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56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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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위치는 한반도 경상도가 아니고 안휘성 궤지(潰池)근처이다. 가라 위치를 확정적으로 찾아야 임나를 찾을 수 있다.


< 삼국유사 >가 발행된 이후


『고려사(高麗史)』를 포함한 조선시대 모든 기록과 안정복 신채호에 의해서도 경상남도에 가라(加羅)가 있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김유신이 황해의 동쪽에서 활동했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지명 등 관계로 보아 『삼국사기』 및 『25사』동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가라"가 최초로 기록된 곳은 호태왕비(好太王碑)인데 왜와 신라와 백제 임나가라(任那加羅)는 같은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삼국지에서 남사까지의 동이왜(東夷倭)는 남월, 주애, 회계동야현, 이주(南越, 朱崖, 會計東冶縣, 夷洲)가 있는 지역에 있다고 했으며 고구려의 북평, 태원 남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송나라 때의 지도인 "우적도"에 의하면 북평과 태원이 있는 남쪽인 지금의 양자강 이남 지도상에 왜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니 왜가 있는 지역에 가라도 있었을 것이며 호태왕비(好太王碑)의 임나가라도 양자강 유역에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째

가라가 중국 사서에서 최초이고 유일하게 항목으로 기록된 것이 남제서(南齊書)인데 한의 일부라 하였으니 "韓"의 위치에 의하여 가라의 위치가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삼국지 후한서 동이(東夷)에서 "韓"은 북평, 태원의 고구려와 남월, 주애, 회계동야현, 이주, 단주의 왜 사이에 있었으니 한의 일부였던 가라의 위치 또한 그 사이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넷째  

남제서이외에는 양서, 북사, 남사의 "東夷倭" 항목에 임나가라가 있으니 왜의 지명이 있는 양자강 유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섯째  

삼국유사 가라전은 초기에 구간이 있다고 했으며 또 "九干"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가라와 다른 지역의 구간 기록을 섞어서 가라 기록으로 변경된 것은 아닐까

또한 九干을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한반도의 고구려간(高句麗干)이 아닐까 ?

삼국사기 신,구당서에서 한(汗) 또는 간(干)은 고구려 지역통치자로 기록하고 있으니 九干이 경상남도 지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九干인 것이지 加羅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



여섯째  

가라의 위치를 밝히는데 가장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가라의 후예 김유신의 위치로 규명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의 선조 소호금천씨가 살던 청양(靑陽 : 소호 : 少昊)이 기자 묘가 있는 몽성(蒙城)의 남쪽에 있고 청양(靑陽)의 주위에 김유신 시대 전쟁 지명인 동성 잠산 독산 덕안 항성이 있으며 가라 위치와 관계가 있는 황산 허촌 묘수 창계 지주(궤지) 구자산등이 있으니 임나가라의 위치는 위의 지명이 있는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

[출처] 자료로 정리해본 한국 고대사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65463


나주의 옹관묘집단

한반도의 영산강유역에 옹관묘집단의 유적이 나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집단이 가야이며 백제와 관계를 알아봅니다


*나주지역의 고분은 백제의 고분양식과는 다른 고분

                                             

사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그런데 대륙의 대릉하 대성자(大城子)유지에서 옹관묘가 발견되는데 한반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제와 관련이 있으며 나주의 신촌리고분에서 옹관과 토기, 유리구슬, 청동환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형식은 일본열도의 후나야마, 이나리야마와 암호산과 비슷하고 원통형 외관의 토기부장품도 일본열도의 하나와무덤의 토기와 차이가 없으며 야마토정권의 고분하고도 비슷합니다.

 

야마토는 가야 수로왕의 왕자와 공주가 세운 정권이고 응신과 아라사가 세운 대화왕조에 연결되며 일본열도에서도 인정하는 대화왕조(열도가야-5)는 가야왕조이며 왕의 성씨가 김씨라고 일본열도의 <성씨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출토된 유물에서 왕을 상징하는 환두대도, 금동관, 금동신이 출토되어 단순한 세력이 아니었고 대륙의 절강지역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백제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남진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남부(영산강과 김해)를 장악하고 있던 가야연맹 입니다.

참고- 대륙의 가야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65463 

 

나주 신촌리 9호분은 가야식 옹관묘이며 형식은 전방후원분보다 빠르고 이곳이 발라국(發羅國) 또는 보라국(保羅國)으로 불렸던 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의 입점리고분도 가야왕족으로 백제왕이 된 인물의 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 보라는 옛 글에서는 +아래아+,> 발라(發羅)이다.)

 

입점리고분이 발견된 웅포 역시 공주와 마찬가지로 곰나루인데 <일본서기>'웅신기'에도 말다왕(末多王)이 구마나리(久麻那利)에 도읍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웅포의 고분축조 연대가 사마왕능보다 앞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입점리고분의 구조는 공주 송산리고분과 비슷하고 출토유물에서 금동관과 금동모, 금동신발은 나주의 신촌리고분 출토품과 비슷한데 일본열도의 구주 후나야마고분에서도 나오고 있어 문화의 일본열도 전파를 뒷받침할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가야왕족의 고분군에서 나주 신촌리고분이 가장 빠르고 구주 암호산고분이 370년대이며 후나야마고분은 380년대 것을 8세기에 이장 증축한 것이다.

 

그 다음이 입점리고분인데 이것이 <여지승람>에는 말통대왕(末通大王)의 능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는 무강왕(武康王)의 능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이나리야마고분이 가장 나중의 것으로 봅니다.

 

일본열도의 암호산고분은 동성왕의 고조부 가야왕 아라사의 능이며 후나야마고분은 동성왕의 증조부이며 아라사의 장자 대언명의 능이고 이나리야마고분은 대언명의 9세손 이나리의 능입니다.

 

<일본서기>'신공기'

[비자발,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귀수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읍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아라다와케, 목라근자등이 함께 의류촌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카히코가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

 

기록의 주체가 일본열도(왜)로 되어 있으나 침미다례를 남만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로 보아야 합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영산강의 옹관묘집단이 어떤식으로 백제에 편입되는지 고분양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하고 강역을 확장하였는데 북은 패하에 이르고 남은 웅천에 한하며 서는 대해에 이르고 동은 주양에 이르렀다]

 

이 기록은 근초고왕의 기록으로 근초고왕은 고해진을 점령한 후에 영산강세력(가야)과 강역을 정하고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이북은 백제가 이남은 영산강세력이 자치권을 행사한 것으로 백제의 삼족토기가 노령산맥을 넘지 못했다.

 

이유는 백제가 해상교통의 요지인 고해진을 점령하므로 영산강세력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면서 나주의 농업과 수산물의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백제가 고구려에 패배하면서 영산강세력과 통합하게 되는데 백제사에 갑자기 나오는 '8성대족'이 바로 영산강세력이고 가야계왕족인 동성왕시대에 영산강세력이 백제의 중앙 정치제도에 '8성대족'으로 완전히 편입됩니다.

 

지도- 가야의 영토

 

<삼국사기>의 '왜'라는 기록도 가야이며 <일본서기>에는 임나가야, 대가야, 금가야. 아라가야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일본열도에는 '왜'도 없고 일본도 없었습니다.

 

'왜'라고 불린 세력은 한반도에서 백제에 밀려 일본열도로 진출한 가야였고 한반도의 가야는 4세기까지 호남과 영남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일본열도로 진출한 후에는 구주, 본주의 서쪽이 가야의 영토로 백제와 가야가 연합체로 성장합니다.

 

<삼국사기>의 백제기록에서 '8성대족'이라는 집단이 영산강유역의 가야세력으로 <성씨록>에서도 백제의 진씨(眞氏)와 가야의 김씨(金氏)가 나오고 백제의 담로제라는 것이 가야의 왕자, 공주의 분봉제와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전북 익산의 입점리고분과 영산강유역의 나주 신촌리고분 유물이 흡사하고 일본의 구주 후나야마, 이나리야마고분 유물과도 비슷합니다.

 

후나야마고분은 동성왕의 증조부의 능이라고 <일본서기>와 <성씨록>에도 나오고 이나리야마고분의 주인공도 동성왕의 선조로 모두 가야왕 아라사의 장자 예진의 후손입니다.

*<성씨록>- '이나리'는 동성왕 증조부의 후손으로 기록됨

 

그리고 가야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백제에게 밀리기 전에는 경기, 충청도 가야의 영토로 보입니다.

 

그것은 가야의 성씨가 '김(金)'이고 철의 생산지이므로 '쇠(金)'자가 증명하듯 '빛땅'계열 지명들이 있는데 미추홀, 완산, 완주, 광산, 비사벌, 비자발, 삼량화, 추량화, 삼랑진, 밀양, 추화 등 충남부터 호남, 영남에 그런 지명이 있으며 이런 지명들은 특정한 부족만이 쓰는 겁니다.

참고- 가야계열 지명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59010

 

백제의 비류계는 고구려(광개토왕)에게 패하여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가야와 일본열도에서 세력다툼을 하게 되고 백제의 온조계는 호남과 영남을 빼앗는데 <일본서기>'응신기'에 백제의 비류계 아신왕과 가야계 응신의 연합군에게 백제의 온조계 진사왕이 구원에서 전사하고 그 아들 권속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합니다.

참고- 고대백제

http://blog.naver.com/casahoo/20001157436

 

그 후에 비류계 아신왕과 가야계 응신이 백제와 일본열도를 분리하여 한반도는 백제의 땅이 되고 일본열도는 가야가 대화왕조를 세우고 구주, 본주 서쪽지역을 차지하여 100년 이상 유지하다가 동성왕이후 가야의 김씨가 쇠퇴하고 백제의 부여씨(무령왕)가 일본열도도 장악합니다.

 

<삼국사기>에는 30년후에 서라벌신라에 가야의 영토가 넘어갔다고 되어 있는데 거짓기록으로 무령왕때부터 일본열도가 백제의 완벽한 속국이 되었는데 그 중간거점인 김해의 가야를 서라벌신라가 차지했다면 일본열도에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산강고분의 변화를 보면 3세기부터 고분이 거대화되었고 이후 6세기부터는 옹관묘가 점차 소멸되고 나주 흥덕리에서 은제관식이 매장되어 있는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가야가 백제에게 흡수된 것입니다.

 

결국 백제에 흡수된 가야연맹(영산강과 김해)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백제와 공동으로 지배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역사 읽기]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글쓴이: 김태식  날짜: 2004.02.23. 05:41:24   조회: 181   글쓴이IP: 211.245.244.85
삼한시대 ‘낙랑·왜’와 교역 활발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 나온다.

다양하게 남아있는 유적들
창원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 민무늬 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 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유적은 마을이 야산의 구릉에 높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사람 두 길 이상되는 환호(環濠)에 둘러싸여 있는 방어성 취락 유적으로서, 이미 청동기시대에 창원지방에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걸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덕천리 1호 지석묘는 길이 8미터, 폭 6미터, 깊이 4.5미터의 토광 하단에 석곽을 설치하고 그 위를 판석과 괴석으로 3단에 걸쳐 덮은 후 다시 흙을 덮고 지석과 상석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 외곽에는 방형의 주구(周構:주위를 도랑으로 판 것)가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높이 40~50센티미터의 석축이 쌓여 있었다. 유물로는 민무늬 토기 평저옹, 홍도, 대롱구슬 일괄, 간돌검,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묘역을 갖춘 대형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기는 최초의 일로서, 지석묘 유적 단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 이후의 유적으로는 분묘와 성지가 있는데, 목관묘 및 목곽묘 유적으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고분군, 동읍 다호리 고분군, 북면 화천리, 동전리 고분군, 진해시 성내동(웅천) 고분군 등이 있고, 옹관묘 유적으로는 삼동동 고분군이 있다. 창원시 토월동 진례산성, 동읍 무성성지, 북면 화천리 성지 등은 해당시기의 성지로 추정된다.

위의 고분군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다호리 1호분인데, 봉분이 없고 길이 278센티미터, 너비 85센티미터, 깊이 205센티미터의 토광에 길이 240센티미터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철검, 철제 고리자루 손칼, 청동투겁창, 쇠투겁창, 판상철부, 쇠따비, 성운문 거울, 청동 띠고리, 오수전, 청동말종방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곽을 비롯하여 검집, 원형두, 방형두, 원통형 칠기, 뚜껑, 각형 칠기, 붓, 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토기와 와질토기 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 거울, 오수전, 띠고리, 청동말종방울,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곽 등의 중국 한나라식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경남 해안지대에서 창원지방에 가장 선진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창원시 도계동 및 다호리 분묘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기원후의 시기에 이들은 다호리 초기와 같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이 번성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4세기경의 창원 도계동 18호 목곽묘는 길이 350센티미터, 너비 160센티미터, 잔존 깊이 55센티미터의 토광 안에서 철제 손칼 2점, 투겁창 2점, 미늘쇠 1점, 도끼 2점, 낫 1점, 끌 1점 등의 철기류와 적갈색 양이부소호 2점, 회청색 고배 2점, 원저단경호 1점, 유개대부호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창원지방의 중심지가 아닌 도계동 고분 축조 집단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패통 유적지로는 창원시 외동 성산패총, 가음정동, 남산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진해 패총, 용원동 패총 등이 있다.

일본과의 교류
<일본서기> 신공 섭정 46년(366)조에서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고, 탁순국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사신에게 자문해주고 왜국사신에게 백제사신의 말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사람 '과고'를 보내 왜국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 신공기 49년(369)조의 기사에서, 탁순국은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이런 기사들이 얼마나 진실을 전하고 있는 지는 분명치 않으나, 창원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집단이었음은 확실하다. 4세기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창원지역에 탁순국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양직공도>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의 ‘탁순국(卓淳國)’이 바로 그것이다. 창원 반계동 고분군은 6세기의 것으로서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게 등의 단야구가 출토되어 이들이 제철집단임을 알 수 있으며,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개배, 유개대부 파수부발 등이 출토되어, 이들이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창원 탁순국의 왕 또는 유력자로 추정되는 '아리사등'은 대가야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후기 가야연맹의 한 소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522년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 당시 따라온 수행인원 중 창원지방에 배치된 사람들이 돌연 신라 관복으로 갈아입자, 그 수행인원들을 신라로 쫓아보내는 자주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트집삼아 탁순국을 공격하고, 백제군이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까지 진주해오자, 탁순국은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왜국의 사신단도 구사모라=기질기리성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자, 아리사등은 백제,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회의를 요청했다. 백제는 군대를 더욱 전진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탁순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일파와 신라에 투항하자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왕이 신라에 종속되기를 원했다. 그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마산시), 웅신현(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이는 멸망시기 탁순국의 영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멸망 직전의 탁순국이 신라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전쟁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군현 편제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탁순국 당시보다 넓은 영역을 신라로부터 배정받은 때문일 수도 있다.
<김태식(홍익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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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초록불 | 2008/02/24 20:21 | *..역........사..* |

신공황후 46년, [일본서기] 연대로는 246년 봄 3월에 탁순국卓淳國에 사신을 보냈다. 탁순의 왕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이런 요지의 말을 전했다.

"244년 7월 중순에 백제인 구저, 미주류, 막고莫古 세 사람이 와서 '백제왕이 동방의 귀한 나라 일본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바다가 멀고 풍랑이 심하니 큰 배가 있어야 갈 수 있다고 하니 '배를 준비하겠다.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꼭 우리나라에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왜의 사신은 종자와 탁순인을 붙여 백제로 가게 했다. 백제의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보물을 나눠주고 일본에 조공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위 내용은 [환단고기]와 맞먹을 뻥이라 하겠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는 표류한 임나인을 만난 적이 있고, 신라라는 존재도 "신"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백제와 접촉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탁순국을 통해서 백제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위 기사 속에 담긴 유일한 진실이겠다. (말금한기에서 末錦은 일본서기 독음이 makomu이고 寐錦은 mukimu로 우리 발음은 같지만 일본어에서는 발음이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백제의 초고왕은 재위기간이 166년에서 214년이다. [일본서기]와 연대가 맞지 않는다. 저 왕이 근초고왕이라면 재위 기간이 346년에서 375년이 되는데, 연대를 2갑자 내리면 364년의 일이 되기 때문에 연대가 맞는다. 특히 저 기사에 나오는 사람 중 막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에 나오는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틀림없다. 따라서 저 일이 일어난 때는 364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위 접촉의 결과 신공황후 47년, 즉 365년에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막고가 사신으로 갔다.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백제 측의 공물이 신라 측의 공물에 비해 형편없어서 이를 따지자, 백제 사신은 이런 말을 한다.

"길을 잃어 사비신라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우리를 3개월간 감금했고 결국 죽이려고 했다. 그들을 저주하자 그것을 두려워해서 죽이지 않고 공물만 바꾼 뒤에 이 일이 알려지면 돌아오는 길에 죽이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이에 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 일을 책망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백제가 왜에 가기 위해서는 신라의 영향권 안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신빙성이 전혀 없으므로 따질 필요가 없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앞에 이런저런 말이 붙는데, 앞서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하겠다고 할 때도 고금신라栲衾新羅라는 말을 쓰고 있다. 혹시 신라가 여럿 있었던 것은 아닐까? (栲衾은 takuhusuma라고 읽으며 신라에 붙는 마쿠라고토바(枕詞=특정 단어 앞에 나오는 수식어)라고 한다. 沙比新羅(sahisira)는 草羅(sahira)라고도 적는 삽량주歃良州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다. - 알려주신 모님께 감사.)

그리고 신공황후 49년 [일본서기] 연대 249년에 신라를 공격한다. 이것이 신공황후의 두번째 신라 공격인 셈이다. (솔직히 "일본을 공격한다"라는 농담만큼 뜬금없다.)

3월 왜군은 탁순에서 백제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군대가 적었다. 그래서 추가 군대가 백제에서 온다. 이 백제군을 이끈 장수가 목라근자木羅斤資다. 훗날 문주왕(재위 475-478)을 웅진으로 도피시킨 목협만치의 아버지다. 엄마야, 249년에 부대를 이끌던 장군의 아들이 475년에도 살아있다고? [일본서기]를 보다보면 이런 좀비들을 좀 만날 수 있다. 다음 회에 다른 사람을 소개하겠다.

목라근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때는 429년으로, 3갑자를 내려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다음 구절이 문제가 된다.

백제-왜 연합군은 신라를 격파했다. 그 뒤 비자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탁국(口+彔)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쪽의 고해진(古奚津), 남만의 침미다례(忱彌多禮)도 정벌했고, 이 모든 것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 위세에 놀라 비리(比利), 피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했고 이 또한 백제의 것이 되었다. 백제의 초고왕과 왕자 구수(뒤의 근구수왕)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칠 것이라 약속했다.

여기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다시 등장한다. 이들의 등장이라면 연대는 2갑자를 내려서 이 일이 369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429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라근자의 등장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이유다. 신라본기에는 431년에 왜의 공격이 있었다고 나온다. 이 공격은 실패했다. 433년에는 백제에서 화친의 사절이 온다. 나는 목라근자가 바로 이 화친의 사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신라 공격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위의 내용만 잘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탁순이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인 것처럼 썼고, 심지어 탁순에서 정벌군이 출발했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목라근자가 정벌한 일곱나라 이름에 탁순이 들어가 있다. 탁순은 본래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탁순을 정벌하지 않고 탁순에서 신라 정벌군이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백제는 가야와 남방 정벌에 나서면서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이다. 목라근자는 이때 우호의 표시로 신라 여인과 결혼하는데, 그 신라 여인의 아들이 바로 목만치(=목협만치=목리만치)다.

이렇게 되면 이 무렵은 비유왕 때가 되겠다. 비유왕 때에 이런 일에 대해서 감을 잡을만한 무슨 기록이 있을까?

비유왕 2년(428)에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50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가야 정벌에 어떤 정보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비유왕은 다음해 가을에 중국의 유송에 사신을 파견한다. 중국과의 교류는 전전대왕인 전지왕 때 동진과 교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대왕 구이신왕 때는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없다. 전지왕은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비유왕도 이 관직을 물려받았다. 이런 활발한 대외 활동은 백제의 남방 정벌에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무렵 왜도 활발한 국제 외교를 펼치는 중이었다. [송서]에는 왜의 사신이 425년 와서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요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유송은 안동장군왜국왕의 지위만 내렸다. 안동장군은 진동장군보다 낮은 지위다. 유송은 백제의 지위를 높여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51년에 유송은 왜의 줄기찬 노력에 굴복해서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의 직을 내려주었다. 백제는 빠지고 대신 가라가 들어갔다. 왜 처음에는 가라가 없었을까? 왜는 오국제군사가 되는 것보다는 육국제군사를 유지하기 바랐던 것 같다. 임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라를 다시 넣은 이유는 그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백제가 공략한 7국은 임나의 땅이었다. 흠명천황 23년조(562년)를 보면 알 수 있다.

춘정월,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 (한 책에 말하기를 21년에 임나가 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 다라국多羅國,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 합해서 10국이다.

붉게 표시한 세 나라가 신공황후기에도 나오는 나라다.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7국이 가야 지방이라는 증거다. 562년은 진흥왕 23년이다. 이 해에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를 정벌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한다.

364년 백제는 왜와 처음 접촉했다. 이 상황에서 바로 연합군을 결성한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쳐들어왔다. 가야 정벌은 3월, 고구려의 침입은 9월이다. 백제는 평양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있다. 정말 이 해에 북방과 남방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근초고왕과 일본 사신과의 동맹의 맹세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맹세에 후광을 더하기 위해 비유왕 대의 가야 정벌을 근초고왕 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닐까?

앞서 나는 이 가야 정벌을 429년의 일로 본다고 했다. 그것은 400년에 있었던 고구려군의 원정과 관련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보기 5만의 대군을 파견한다. 이것이 바로 400년이다. 이때 고구려는 신라성에서 남거성에 이르기까지 가득찬 왜인을 몰아내고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함락시킨다. 이들 성을 지키는 일은 신라인들이 맡았다. 고구려 군의 일부는 신라에 남아 신라의 국정을 좌우하다가 눌지왕의 즉위 후 신라에서 철군한다. 눌지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신라 독자 노선을 걷는다. 이 이야기는 이미 [신라, 희망의 5세기]에서 한 바 있다.

소지 마립간 3년(481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백제와 가야의 병력이 출동한다. 가야가 언제부터 백제와 같이 움직인 것일까? 각자 독자적으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나선 것일까?
 

포상팔국 전쟁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 감정위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 변진사회에 국가적 사활이 걸린 큰 전쟁이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단 문헌자료를 훑어보기로 하자. 먼저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14년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를 침범해 왔으므로(물계자전에서는 아라로 쓰여있다) 가라왕자가 구원을 청해왔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병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장군을 쳐서 죽이고 포로 6천명을 잡아 돌아왔다(『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내해이사금 14년조)
→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加羅 勿稽子傳皆作阿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三國史記』卷2, 新羅本記2 奈解尼師今 14年條)


물계자는 내해이사금때 사람이다.(중략) 이때에 포상팔국이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을 치니 아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의 손자 내음을 시켜 근군과 6부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니 마침내 팔국병이 패하였다.(중략) 그 후 3년에 골포, 칠포, 고사포 3국인이 갈화성에 와서 공격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구하니 3국의 군사가 대패하였다.(하략)(『삼국사기』권48, 열전8, 물계자전)
→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中略)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使王孫 音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中略) 後三年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下略)(『三國史記』卷48, 列傳8 勿稽子傳)


『삼국유사』에는 물계자전에 포상팔국의 전쟁 기록이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0대 내해왕 즉위 17년 임진에 보라국, 고자국, 사물국 등 8국이 힘을 합하여 변경을 내침하였다. 왕이 태자 내음,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니 8국이 모두 항복하였다.(중략) 10년 을미(내해이사금 20년)에 골포국 등 삼국 왕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갈화를 공격하니(굴불인 듯하니 지금의 울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니 삼국이 모두 패하였다.(하략)(『삼국유사』권5 피은8 물계자)
→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音 將軍一代等 率兵拒之 八國皆降(中略)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下略)(『三國遺事』卷5 避隱8 勿稽子)


포상팔국의 현재 위치를 알아보면 낙동강 서쪽 남해안 지역이다.

골포국( 마산,창원),칠포국(칠원),고사포국(진해 또는 고성),
고자국(고성,고사포국 동일 지역 간주하는 견해있음),사물국(사천),보라국(위치미상)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3세기 초에 가야제국 가운데 포구에 면한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같은 가야지역인 가라 또는 신라를 두 번이나 대규모로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이 전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정리해보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1.포상팔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먼저 사로국(斯盧國)이 3세기대 진한지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던 과정상에 일어
  난  일련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이 시기 사로국의 활동무대가 낙동강으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그에 대해 4세기 전반대 해상교역권을 놓고 안라국과 포상팔국 이 김해를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구원으로 패배하였으며 이후 가야는 함안의 안라국과 김해의 가야국으로 분열되었다는 견해 고성 고자국을 중심으로 남해해상교역권 장악을 위해 김해가
야세력을 공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3.또 한군현의 쇠퇴와 인접한 사로세력권의 팽창으로 김해의 가야세력이 대외교역권을 상실하였으며 포상팔국전쟁은 김해의

 구심체로서의 역할 상실로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4.한편 내해왕대의 기록을 실제로는 진흥왕대의 사실로 보고 6세기 전반 백제의 남부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에 위협을 느낀 아
  라가신라에 도움을 구했으며, 이에 백제는 포상팔국을 움직여 아라가야를 공격하였다는 해석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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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해 이사금의 태자 석우로 장군]

AD 184년 아달라 이사금이 재위 31년만에 승하했다. 이어 9대 임금 벌휴 이사금 (석탈해왕의 아들 구주각간과 김수로왕의 딸 지진래례의 아들임), 10대 임금 내해 이사금, 11대 임금 조분 이사금, 12대 임금 첨해 이사금이 차례로 즉위했다. 석우로(일본서기 우류조부리지간)는 10대 임금 내해 이사금의 태자이며 용맹한 장수였다.

나해 14년(209) 가락국 주변의 포상팔국(골포 등 남해안 일대의 8개의 작은 나라)이 가야국을 침략하자 가락국의 왕자가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나해 이사금은 태자 우로에게 6부의 군사를 동원하여 가락국을 돕도록 했다. 우로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8국의 장수들을 죽이고 사로잡혔던 가락국 병사 8천여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228년 내해 이사금은 승하할 때 태자 우로보다 사위 조분이 사리판단이 명확하기 때문에 다스리는 일은 사위에게 맡기고 나라를 지키는 일을 우로에게 맡겼다. 이리하여 사위 조분이 임금이 되고 황태자가 대장군이 되었다. 석우로는 대장군이 되자마자 옆나라인 감문국을 쳐서 그 땅을 서라벌의 군으로 삼았다. 그러자 감문국 왕은 졸지에 왕에서 일개 군의 책임자가 되었다.

조분 4년(233) 왜인이 동해안으로 침범하자 우로는 바람을 이용하여 왜의 병선에 불을 질러 이들을 물리쳤다. 조분 16년(245) 고구려가 변방을 침공했다. 석우로는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두책까지 물러나 방비만 했다. 때는 겨울. 추위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하는 군사들을 보고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다 불을 피워 군사들의 몸을 녹이게 했다. 그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였다.

247년 속국 사량벌국(경북 상주)이 백제와 가까워지자 사량벌국을 정벌했다. 이리하여 명장 석우로는 나라 안팎으로 그 명성을 널리 떨쳤다. 그러자 교만해졌는지 석우로는 말실수를 하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2대 첨해이사금 3년 (서기 249년) 4월에 왜인이 서불감(서울시장) 우로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얘기]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석우로가 접대를 맡았는데 사신을 통해 석우로의 명성이 왜국에서도 자자하며 그의 이름만 듣고도 울던 아이가 그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랬더니 석우로는 이렇게 거만한 말을 했다. <으하하! 나의 명성이 그토록 자자하다니, 언제 한번 왜국에도 쳐들어가, 너희 왕을 소금집 종으로 만들고,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리라. 하하!>
농담이라도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사신은 돌아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왜왕은 <무엇이! 날 소금집 종으로 만들어? 절대 용서 못해?>하며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을 치게 했다. 이리하여 왜군이 침공하자 첨해 이사금은 석우로의 책임으로 돌려 그를 왜군에게 내어주었다. 왜인들은 석우로는 나뭇단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이에 석우로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벼르다 13대 임금 미추 이사금 때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자신의 집에서 그 사신을 접대하겠다고 자청했다. 왜국의 사신에게 주연을 베풀자 사신이 취하여 석우로의 아내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석우로의 아내는 왕족 희롱죄로 즉시 그 사신을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왜군은 금성까지 침공했으나 패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신라의 피해도 컸다. 석우로의 말 한 마디와 그 아내의 복수가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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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본토를 대화왕조가 일시관장(서기 405년∼426년)

○ 석우로전과 신공기  
  
삼국사기 석우로전과 박제상전을, 서기 신공전기 10·12월조 및 신공기 5년조와 비교·검토해본 결과 신공기의 미사흔 인질건은 실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사기 박제상전의 인질구출건도 실사로 믿기 어렵다.


△ 석우로전과 신공기 비교

먼저 서기 신공섭정전기 12월조에 이설이 아래와 같이 둘 있다.    

이설1

『...즉시로 황후는 남장하고 신라를 쳤다. 이때 신이 머물며 길을 인도하였다. 이 때문에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 마중 나와 무릎을 꿇고 왕의 배[王船]를 잡은 채로 머리를 땅에 대고 "신은 이후로 일본국에 계시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內官家)가 되어 끊임없이 조공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설2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이르러 무릎근을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참하여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재(新羅宰)로 하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몰라서 혼자서 재를 꾀려는 마음을 먹었다. 곧 재를 꾀며 말하기를 "그대가 왕의 시신이 묻힌 곳을 알려주면 반드시 두텁게 보답하고 또 그대의 처가 되겠다"라고 했다. 이에 재는 꼬드기는 말을 믿고 몰래 시신이 묻힌 곳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와 국인이 공모하여 재를 죽였다. 다시 왕의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때 재의 시신을 왕의 묘토 밑에 묻고 왕의 관을 들어 그 위에 내려놓고 "존비의 순서는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듣고 다시 분노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멸하려 하였다. 이때 군선이 바다에 가득히 떠갔다. 신라의 국민이 모두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서로 모여 공모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석우로전 후반

『첨해왕 7년 왜국사신 갈나고(葛那古)가 빈관에 있을 때 우로가 주관하여 접대하면서 농담을 하기를 "조만간 당신네 왕을 소금구이 종[鹽奴]으로 하고 왕비는 밥짓는 종[찬婦]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왜왕이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은 궁에서 나가 유촌에 머물렀다. 우로가 아뢰기를 "지금 이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탓이니 그 감당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왜군에 다다르자 이르기를 "전일의 말은 농담이었는데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대답도 않고 그를 붙잡아 섶더미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이때 우로의 아들은 어리고 약해 걷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안아서 말에 태워 돌아왔는데 뒷날 흘해왕이 되었다. 미추왕때 왜국의 대신이 와서 방문했는데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부탁하여 사적으로 왜국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취하기에 이르자 장사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 이전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은 분히 여겨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공통점 두 가지

존비의 순서

석우로전에서 석우로가 한 농담 「조만간 당신네 왕을 소금구이 종으로 하고 왕비는 밥짓는 종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한 말과 신공기 이설2에서「재(宰)의 시신을 왕의 묘토 밑에 묻고 왕의 관을 들어 그 위에 놓고 "존비의 순서는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약간 각색은 됐지만 분위기가 흡사하다.

원수 갚는 일

역시 각색은 됐으나 석우로전에서 석우로를 신공기의 신라왕으로, 석우로 부인은 신공기의 왕비로 놓으면 부인이 우로의 원수를 갚는 일은 양쪽이 거의 같은 것이다.


△ 인물비정

우류조부리지간은 조분왕

우류조부리지간은 이름의 발음을 볼 때 석우로와 동시대의 신라 조분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열전에서는 원수 갚는 일이 후대의 미추왕 때 사건으로 나와 연대가 어긋난다.

갈나고는 가라인

왜국 사신 갈나고는 가라인이다. '葛/曷'은 '加羅'의 준말로 기·기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다. '가라'를 받침을 붙여 반도식으로 발음하면 '갈'이 되기 때문이다. 기·기상에 '갈성(葛城)'이란 말도 자주 나오는데 원래 가야계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那'는 '나라'라는 뜻으로 城, 羅 등으로 대치해 쓸 수 있는 말이고 결국 葛城>葛那는 '加羅羅>加羅國'이라는 뜻으로 가야일 수밖에 없다. 이름만은 '古'다. 이 古도 열도어 고[子]와 음이 같아 갈나고는 단순히 가라인을 달리 표현한 말로 보인다. 갈나>'가라라'란, 아라가야=아라국>'아라라'와 같은 방식의 표기다.

우도주군도 가라인

왜의 장군 우도주군도 마찬가지로 가야인이다. '于道'는 기·기상에 나오는 토도(토道)와 같이 '우지'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于'는 기·기상에서 가야계를 지칭하는 '우사기[兎]'의 '우'이고 가야계 왜왕인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이 서기 응신기에는 응신의 태자 우지.노.와끼이라쯔꼬[토道稚郞子]황자로 등장한다. 와께/와끼[稚]는 응신의 아우라는 의미다. 또한 '우지[토道/宇治]'는 가야계 지명으로 자주 쓰이고 있기도 하다.  
              
가야계 지명 중에는 구주의 우사[宇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우사[宇佐]도 우사기[兎]에서 나온 '우사'이고 원래는 고사기 신대기 대국주신조에 나오는 이나바[稻羽/因幡]의 시라우사기[白兎]설화에서 나온 말이다. 시라우사기[白兎]>[시라+(우사)+기]=시라기[新羅]+우사[宇佐]로 분해된다. 시라우사기[白兎]설화 자체가 가야와 백제의 열도쟁탈전을 은유하여 꾸민 설화다. 백제측은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인물 와니[王仁]로 대표시키되 같은 음의 와니[鰐]>악어로 치환하고 가야측은 국호 신라를 넣어 시라기[新羅]+우사기[兎]=시라우사기[白兎]>흰토끼로 치환하여 설화를 꾸민 것이다.

기·기상에서 가야를 시라기[新羅]라고 하고 있는데 그 이전에 가야도 '신라'라는 국호를 썼던 것이다. 그것이 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시라[阿尸良]>新羅인 것이다. 아시[阿尸]는 우리말 '아침'의 사국시대 고어형태인 '앛', '앚', '앗' 중에서 '앗'에 명사형어미 '이'를 붙여 받침 없이 읽은 것이고 한역하면 朝, 初, 新 셋 중에서 '새[新]'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良]는 고어로 나(那), 라(羅)와 같은 말로 쓰였으므로 아시라[阿尸良]는 신라인 것이고 천일창의 구주신라이기도 하고 아라가야의 이칭이었다.

우도주군을 의미로 풀어보면 '붉을 朱'는 왕을 상징하는 색깔이고 君도 王이므로 '우지[于道]왕'이라는 뜻이 되어 대화왕조의 2대왕 진언으로 판단된다. 진언은 대륙기록에도 왜왕 '珍'으로 기록되어 있고 하리마[播磨]풍토기에는 우지[宇治]천황이라고도 하고 있다. 우지[宇治/토道]라는 이름도 '이'와 '으'가 교체되어 쓰이는 음운현상을 이용하여 진언의 본명인 우즈[珍]>'우지'로 놓고 한자를 바꾼 이름이다. 따라서 '우지.노.기미[于道君]'는 곧 '우즈.노.오호기미[珍王]'인 것이다.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의 삼자로서 원래 성씨가 김씨이므로 본명이 金珍인데 성씨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大和宿니; 出自神知津彦命也 神日本磐余彦天皇 從日向地向大倭洲 到速吸門時 有漁人乘艇而至 天皇問曰 汝誰也 對曰 臣是國神 名宇豆彦...중략...天皇嘉之 任大倭國造 是大倭直始祖也(대화국지기)

이 내용은 서기 신무전기에 진언이 등장하는 기사 그대로다. 知津彦이라는 이름도 있고 아라사등의 계자지만 신분이 낮은 국신으로서 기·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 유일하게 신별분류에서 地祇로 나온다. 이름이 우즈히꼬[宇豆彦]라고 하고 있는데 우즈히꼬[珍彦]를 한자만 바꾼 것이다. 히꼬[彦]는 존칭이다. 대화왕조의 2대왕이 되어 자신 포함 왕이 셋 나온 가문이므로 대왜국조로 임명하고 대왜직의 조가 되었다고 한 것이고 후손 성씨도 大和를 넣어 창씨를 한 것이다. 대왜직을 왜직이라고도 한다.                  
 
가라칠국 백제가 반납

응신천황 재위(서기 390년-426년) 중에 아신왕이 고구려에 시달릴 때 원군을 보내 도와주고 서기 369년 초고대왕대에 백제에 빼앗겼던 가라본국을 일시적으로 도로 회복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사도 두 번이나 서기에 나오고 이때 진언이 건너와 관할했었던 것을 암시하는 기사도 있다.  

서기 응신기 39년 2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百濟直支王 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新齊都媛 率七婦女而來歸焉 > 백제 직지왕이 그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 섬기게 했다. 신제도원은 7인의 부녀를 거느리고 귀화했다』  

웅략전기(안강 3년 8월)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圓大臣)伏願 大王奉獻臣女韓媛與葛城宅七區 請以贖罪 > (원대신이)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여식 한원과 갈성의 집[宅] 일곱 구를 대왕께 바칠 터이니 죄를 속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위의 두 구절이 바로 가라의 대화왕조가 신공기 49년조에 나오다시피 초고대왕대에 백제에게 빼앗겼던 가라칠국을 이때 도로 반환 받았다가 다시 백제관할로 넘어간 것을 은유한 기사로 본다.    

신제도원과 한원        

'신제도원'과 '가라히메[韓媛]'가 대응되고 "'7인의 부녀"와 "갈성의 집 일곱 구"가 정확히 대응된다. 서기에는 본문에서도 영토 또는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광범위하게 쓰고 있는데 위의 "7인의 부녀"도 신공기 49년 3월조의 '가라칠국'을 은유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제도원에서 '新'은 아라가라의 고명 新羅에서 딴 것이고 '齊'는 왕의 서열을 (大王>王>侯王)=(大藏>齊藏>內藏)으로 은유한 경우도 많은데 그 중 제장을 가리키며 왕에 해당하는 것이다. 쯔[都]는 노[之]와 같고 원(媛)은 영토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말을 바꾸면 "가라왕의 땅"이 되는 것이다. 가라히메[韓媛]는 역시 의인화기법으로 영토를 은유한 것이고 가라구니[韓國]>가라국이라는 뜻이며 갈성>가라성>가라국이고 "갈성의 집 일곱 구"가 역시 '가라칠국'을 축소비유한 것이다. 유사 기이1 진한조에 보면 씨족들의 마을을 '댁(宅)'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한의 일파였던 가라의 소국들을 마을 또는 집으로 축소비유한 것이다. 집이든 마을이든 결과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것은 없다.  

전지왕대에 반환

이 가라칠국을 가라의 대화왕조가 반환 받은 시점은 위에서 보다시피 직지왕(=전지)이 응신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전지왕즉위 즈음해서인 것 같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는데 응신기 37년조를 보면 아지사주(=아신)와 도가사주(=전지)에게 오(吳)에 가서 공녀를 구하게 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뭔가 영토협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吳王이 4부녀를 주었다고 했는데 서기상의 오국은 백제이므로 아신왕이 살았을 때는 4개국 정도였던 것이 전지왕이 즉위한 후에 남해안 7국을 다 반환한 것 같다.  

백제를 오국으로 표기한 것은 백제라는 국명을 가리기 위해서였고 [반도어 (오)다>반도어이두 (吳)다=열도어 (구)루]에서 (吳=구)로 놓고 구다라[百濟]>구다라[吳國]로 바꾸어 쓴 것이다. 국(國)은 '땅'의 이두 달[達]>다라(多羅)와 같으므로 구[吳]+다라[國]=구다라[百濟]로 된 것이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가라본토는 아신·응신의 백제·왜분립을 통해 백제가 관할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태왕비문에서 보다시피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여러 차례 충돌할 때 등장하는 왜는 전부 당시의 대화왕조의 응신이 보내준 가라군이므로 고구려·신라연합군과 백제·가라연합군이 충돌한 것이다. 이때 열도에서 건너온 가라군의 장수가 응신보다 훨씬 젊은 진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가라본국 진언이 일시 관장

이 가라칠국을 진언이 건너와 관할했다는 것은 인덕전기에 나오는데 "왜직의 조 마려"의 아우 오자롱이 韓國에 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가라구니[韓國]=가라구니[加羅國]다. 위의 성씨록 대화숙니조에서 본 대왜직은 왜직과 같고 그 조는 진언이다. 말하자면 마려도 진언이고 오자롱도 진언인 것이다. 진언은 아우가 없었으므로 이때도 일인이역이다. 민달기 3년 10월조에 「선사 왕진이의 아우 牛에게 조하여 津史라는 성을 주었다」라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기법이다. 왕진이는 진사왕인데 없는 아우를 들먹여 辰斯와 같은 음의 津史라는 성을 주었다면서 왕진이가 진사왕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인덕전기는, 전지왕즉위 무렵 반환 받은 가라칠국을 관할하다가 응신이 몰할 즈음 열도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오자롱이 반도에서 열도로 도로 건너오는 상황인데 이때 반도로 진입한 세력이 바로 이 기사에 나오는 무내숙니의 후손 어우숙니이고 출운신의 조로 나오며 이 인물이 다름 아닌 백제 비유왕인 것이다.

백제 비유왕은 열도출신의 무내 후손

오우[어宇]는 출운국 지명 오우[意宇]와 같고 신대기 상7단에 출운신의 원조가 천수일명이라 했는데 이가 곧 귀수대왕의 장남 무내숙니다. 천수일명은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에서 위원중국(=열도)에 보냈더니 3년이 지나도 보고가 없다 했고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에서는 3년이 지나도 다리로 일어서지 못하는 질아로도 나온다. 출운신의 원조가 곧 출운국조의 조라는 뜻이다. (어=삼수변+於)  

1) 出雲宿니; 天穗日命子 天夷鳥命之後也(좌경천손)
2) 出雲臣; 天穗日命十二世孫 제濡渟命之後也(좌경천손)
3) 出雲臣; 天穗日命子 天日名鳥命之後也(산성국천손)
4) 出雲臣; 天穗日命十二世孫 宇賀都久野命之後也(하내국천손)
5) 平群朝臣; 石川朝臣同氏 武內宿니男 平群都久宿니之後也(좌경황별)
6) 平群文室朝臣; 石川朝臣同祖 都久宿니之後也(좌경황별)
7) 都保朝臣; 平群朝臣同祖 都久足尼之後也(좌경황별) / 스꾸네[足尼]=스꾸네[宿니]  
8) 雀部朝臣; 建內宿니之後也(좌경황별)

1)과 3)에서 천수일명의 아들이라고 나오는 아메.노.이나도리[天夷鳥]와 아메.노.히나도리[天日名鳥]는 동일인이고 (출운국조의 조)라고 했고 천수일명 그 자신이다. 귀수대왕을 신공기에서 흰깃큰수리[羽白熊鷲], 경행기에서 백조, 성씨록에서 봉황새[鸞]로 은유하면서 장남은 새와 관련된 이칭들을 지어 썼기 때문이다. 또 2)와 4)에서 그 십이세손이라는 인물들도 새와 관련된 이름인데 사다새(弟+鳥), 우가[宇賀]>우가[羽化]>'새깃'인 것이다. 또 4), 6), 7)의 쯔구[都久]는 무내숙니의 후손 쯔구.노.스꾸네[木토宿니]와 같은 이름이고 5)에서 보다시피 무내 아들 헤구리쯔구[平群都久]에서 갈라진 성씨다. 쯔구[都久/木토]도 부엉이를 말하고 역시 새[鳥]인 것이다. 8)에서 보다시피 '참새 작(雀)' 자가 들어간 후손 성씨까지 있을 정도다.  

이 천수일명이 서기 숭신기 60년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武日照命(一云 武夷鳥 又云 天夷鳥) 從天將來神寶 藏于出雲大神宮 是欲見焉 則遣矢田部造遠祖武諸隅(一書云 一名大母隅也) 而使獻 當是時 出雲臣之遠祖 出雲振根主于神寶...』  

『무일조명(무이조 또는 천이조라고 한다)이 하늘에서 가져온 신보를 출운대신궁에 간수하였는데 (천황이) 그것을 보고싶어했다. 시전부조의 원조 무제우(어떤 책에는 대모우라고도 한다)가 가져다 바쳤다. 당시에 출운신의 원조 출운진근이 신보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무일조명(=무이조/천이조)도 무내숙니이고 하나 같이 새로 은유하고 있다. 위의 성씨록 1), 3)의 천이조명, 천일명조명과 같은 이름이다. 신대기 상 7단에서 출운신의 원조가 천수일명이라 했는데 이가 곧 출운신의 원조 출운진근이자 무내숙니이고 무일조명/천이조명/천일명조명/무이조 등도 전부 무내숙니의 이칭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보가 곧 동진 태화 4년생 칠지도인 것이다. 하늘[天]은 역시 백제다.  

신대기 상8단 이설4에서 소잔명존이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구주 천일창의 신라)에 내려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있다가 진흙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 출운의 파천 상류의 조상봉으로 갔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이 '鳥上'이 곧 음도 같은 도리가미[鳥上]>도리가미[鳥神]로서 역시 천수일명 즉 무내숙니를 가리키고 소잔의 아들이라는 오십맹신도 무내숙니인 것이다. 출운의 지명을 따서 붙인 어우숙니(=비유왕)는 무내계인 것이다. '소시모리'는 구주신라의 동쪽에 있던 웅습국을 지칭한다.  

무내가 칠지도를 가지고 출운에 있는 소잔명존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신대기 상8단 말미의 소언명명설화인데 사사끼[초료]의 깃털로 옷을 해입은 이 스꾸나히꼬나.노.미꼬또[少彦名命] 역시 무내이며 이것은 결국 무내로 비정되는 인덕의 화풍시호 오호사사끼[大초료]>큰새새끼로 연결되고 있다. * 초료=(焦+鳥)(僚-人+鳥)    

어우숙니에 대해 「'國造系圖'는 "三島足努命>어宇足努命>宮向宿니"로 유래한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227p/주13>」라고 하고, 스꾸네[足努]로 읽으며 三島足努가 三島宿니이므로  성씨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三島宿니; 神魂命十六世孫 建日穗命之後也(우경천신)

신혼명은 신황산영존의 준말이고 출운계 신으로서 출운을 개척한 소잔명존으로 비정되며 다께[建]는 건내숙니에서 연결고리로 따고 히호[日穗]는 '天穗日命'의 '호히[穗日]'에서 한자순서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마치 신대기 상5단 월신의 이칭 '월궁(존)'을 '궁월(군)'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경우다. 신대기 상8단 이설4에서 소잔의 아들 오십맹신도 무내숙니로 비정되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소잔(=아라사등)의 후손으로 등재해둔 것은 무내가 백제를 배신하고 가야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대기 하11단 신무의 가계를 소개하는 기사에서도 무내가 언파불합존(=소잔명존/아라사등)의 장남 오뢰명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경우다. 이쯔세[五瀨]라는 이름도 세[瀨]의 발음이 반도어 새[鳥]와 구분이 안되므로 같은 것이다. 이쯔[五]>이쯔[嚴]로 치환하여 음독하면 겐[嚴]이 되어 겐[建/健]과 같이 '크다'는 뜻이 되니 '큰 새'가 되는 것이다.  

가라본국 재차 백제가 차지                

인덕전기에서는 마치 어우가 오자롱을 불러 같이 열도로 온 것처럼 되어 있으나 어우가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로 가자 그걸 보고 사정이 다급해진 진언이 건너와 응신의 후손을 제압하고 대화왕조의 2대왕이 된 것인데 이 스토리는 인덕전기에 태자 토도치랑자(=진언)가 대산수황자(=응신 아들)를 익사시키는 설화로 실려있다. 진언이 본토를 관장한 것은 전지왕 즉위 무렵부터 응신이 몰한 서기 426년까지 약 20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는데 위에서 본 웅략전기(안강 3년 8월)를 다시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圓大臣)伏願 大王奉獻臣女韓媛與葛城宅七區 請以贖罪 天皇不許 縱火燔宅 於是 大臣與黑彦皇子眉輪王 俱被燔死 > (원대신이)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여식 한원과 갈성의 집 일곱 구를 대왕께 바칠 터이니 죄를 속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천황은 듣지 않고 불을 질러 집을 태웠다. 이때 대신은 흑언황자·미륜왕과 더불어 불에 타죽었다』  

응신기에서는 단순히 받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여기서는 집을 불태웠다 하여 마치 전쟁을 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포기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쯔부라.노.오호미[圓大臣]를 보면 고사기 안강기에 쯔부라.노.오호미[都夫良意富美]로 나오고 성씨가 갈성씨인데 갈성습진언의 후손이다. 고사기 효원기에도 건내숙니의 아들로 가즈라기.노.나가에.노.소쯔히꼬[葛城長江曾都毘古]가 나오는데 소쯔히꼬[曾都毘古]=소쯔히꼬[襲津彦]이고 사실은 무내, 건내, 습진언 전부 동일인물이다. 성씨록에도 갈성씨를 찾아보면 갈성습진언의 후손으로 나온다.

葛城朝臣; 葛城襲津彦命之後也(좌경황별)

결국은 위의 원대신도 갈성원대신이고 무내숙니의 후손이므로 인덕전기에 나오는 어우숙니와 동일인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가라의 대화왕조 응신이 전지왕대에 반환 받아 진언이 관할하고 있던 가라본토를 무내의 후손인 어우숙니(=원대신/비유왕)가 쿠데타로 백제왕권을 잡을 때 진언은 열도로 도로 건너와 응신의 후손을 제압하고 왕이 되면서 가라본토를 포기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비유왕이 백제왕이 되고 열도에서는 진언이 대화왕조의 2대왕이 되면서 도로 백제땅이 된 것이다.  
                  
쯔부라[圓]라는 말은 원래 '둥근 것'을 뜻하는데 무내의 이칭 시고오[醜男/色男], 추대사(醜大使) 등을 보면 '쯔부[潰]레루'>(찌부러지다, 찌그러지다)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얼굴이 찌부러진 추남"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내가 본국을 배신하고 그 후손이 다시 정통왕위계승라인을 단절시키고 쿠데타로 위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한 것이다.                                    
     
이 열도어 '쯔부레루'라는 동사도 분명히 반도어 '찌부러지다'가 원형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어간 '쯔부'와 '찌부'는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같은 것이다. '러'까지 포함해도 (찌부러>쯔부레)로 사실상 같은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는 원대신이 죽었다고 했으나 열도출신으로서 백제왕위에 오르면서 열도에서 사라졌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같이 죽었다는 미륜왕은 아신왕으로 비정되는데 사실은 비유왕의 쿠데타로 서기 427년 아신의 직계손인 구이신왕이 쫓겨났으므로 아신의 왕통이 끊겼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굳이 비정하자면 구이신왕을 지칭한다고 보는데 선의 이름으로 후손을 흔히 나타내기도 하므로 이상할 것은 없으나 죽었다는 것은 왕권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신화·설화 구성기법에서 아이의 출생은 새로운 지배권력의 탄생이나 왕조의 성립을 뜻하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역으로 왕권상실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서기의 연대를 보면 응신을 재등재한 웅략이 즉위하기 전의 일로 나오므로 웅략이 진언을 등재한 인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진언은 국신이므로 소외시키고 그 자리에 천신인 응신으로 메운 것이다.  
              
바로 이 전지왕·구이신왕 재위기간 동안에 경주신라와 가라의 진언 사이에 모종의 직접적인 마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데 그런 분쟁을 가라측은 8세기에 진한식 이름과 지명들을 넣어 신라라는 국호에 경주신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실어 신공의 신라정벌기로 꾸며 넣은 것으로 보이고 사기저자들은 서기 신공기를 보고 충신상을 하나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유왕은 열도에 기반이 탄탄

비유왕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不破連; 出自百濟國都慕王之後 毗有王也(우경제번)
春野連; 出自百濟國速古王孫 比流王也(우경제번)
面氏; 春野連同祖 比流王之後也(우경제번)
汶斯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 比流王之後也(우경제번)
岡屋公; 百濟國比流王之後也(산성국제번)  
廣井連; 出自百濟國避流王也(섭진국제번)  
己汶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 汶休奚之後也(우경제번)

백제 比流王이 초고대왕의 손자로 나온다. 그런데 일본왕실의 시조가 초고대왕이므로 그 선대는 일본고대사서에 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비류왕도 발음이 비슷한 비유왕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광정련조의 피류왕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우다. 히류[比流]와 히류[避流]는 같다. 초고대왕의 손자에 문휴해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사서상에 등장하는 손자로는 무내, 침류, 진사 셋뿐이었으므로 초고대왕의 손자로는 볼 수 없다. 위와 같이 비유왕은 열도출신으로서 쿠데타로 백제왕권을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열도에 기반이 탄탄했었던 것이다.    
  
호태왕비문의 왜는 대화왕조의 가야군

호태왕비문에 보이는 왜는 가라가 열도에 세운 대화왕조의 가야군이었다. 그 전부가 가라왕 아라사등의 중자 응신의 재위기간인 서기 390년∼426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호태왕비문에 보이는 신묘년조의 왜는 서기 390년에 즉위한 대화왕조 초대왕인 응신이 아신과의 백제왜분립 밀약을 지키기 위해 진사왕에 대한 역쿠데타를 도와준 사건이었다. 그것이 서기 390년 진사왕의 구원에서의 사냥(1차전역), 391년 국서대도(2차전역)와 횡악지서(3차전역)에서의 두 번에 걸친 사냥이고 마지막으로 서기 392년 구원에서의 4차전역에 성공하여 아신왕이 즉위하는 것이다. 고구려인들도 가야인을 왜라고 불렀던 것이다.

※ "호태왕비문의 왜" 추후 참조

같은 시기의 사기기록    

사기 구이신기 8년 12월조 「왕이 훙했다」  
사기 비유기 원년조 「구이신왕의 장자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용모가 잘 생기고 말솜씨가 있어 사람들이 받들고 존중하더니 구이신왕이 훙하자 왕이 되었다」        

구이신왕은 비유왕의 쿠데타에 의해 열도로 망명한 것이 일본서기 11년 7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백제국에서 도망하여 귀화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자칭 귀신(貴信)이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귀신은 오국인이라고도 했다. 반여의 오금탄 강수옥형마려 등은 그 후손이다』  

음훈이 '구이신[貴信]'이라고 되어 있는데 久爾辛은 이것을 이두식으로 한자를 바꾼 것이다. 오국인이 곧 백제국인이다. 구다라[吳國]=구다라[百濟]다. 서기 응신기 25년조에 나오는 久爾信이라는 이두식 시호도 8세기초에 서기저자들이 지은 것이고 사기저자들은 서기를 보고 옮긴 것이다.  

사기저자들은 구이신왕과 비유왕의 관계를 다 알고서도 「구이신왕의 장자다」라고 써놓고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는 애매한 주를 달아 비유왕이 혈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용모가 잘 생기고 말솜씨가 있어 사람들이 받들고 존중하더니」라는 것도 상투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비유왕의 직계 조인 무내숙니가 백제왕실을 배신했다고 서기에 추남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기에서는 거꾸로 쿠데타를 일으킨 비유왕을 미남이라 하고 있다.

사기의 이 기사들도 전부 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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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네티즌게시판: Re 가야와 임나(왜)  글쓴이: 고대사산책

1) <산책님의 글에서 "360년경부터 반도와 열도에 걸쳐서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을 읽은적이 있는데, 이시기의 반도에서의 가야는 김수로왕의 가야가 아니고 임나(왜)인가요?>      

이 전쟁이 난 것이 가야가 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수로왕의 가야로 봅니다. 임나가라=아라가야=금(관)가야=대가라(고령이 아님)이니까요. 신찬성씨록에 가라왕족들 성씨가 김씨라고 나와 있어요.


2) <산책님의 글 여기저기서 가야와 왜가 동일시 되는 곳이 여러번 있는 것 같은데  북방민족의 후손인 가야인을 체구가 조그마한 "왜인"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까요?>

가야인은 전신이 弁辰이지요? 변진은 변두진한의 준말이고 변두란 편두를 가리키고 아이가 나면 머리 연골이 굳기 전에 이마나 정수리를 나무나 돌로 눌러 편두를 만들었다고 하지요(김해 예안리 고분에서 많이 나왔음). 이마를 누르면 머리가 뾰죽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고깔 弁'자를 쓴 겁니다. 머리가 뾰죽하니 고깔을 쓴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요. 그래서 진한은 진한인데 변두습속이 있는 진한이다 라고 해서 변진이라 했다는 거지요.    

근데 김수로왕상이 구주 백목묘견궁에 지금도 있는데 한복입은 정수리편두의 신선상이예요. 시라기[白木]=시라기[新羅]>阿尸良이지요. 정수리편두를 하면 키가 당연히 작아지지요.

게다가 호태왕비문상의 왜는 대화왕조의 응신이 아니면 아무데도 갖다붙일 데가 없어요. 비문에 가야인을 왜라고 부른 것은, 그 군대가 열도에서 진입하기도 했고 또 열도는 그 전부터 가야가 개척했고 게다가 고구려인이 가야인을 볼 때 "두상이 그로테스크한 이상한 족속"이라는 정도의 뉘앙스로 비칭하고도 남지요. 국호가 "변두습속이 있는 진한"이라고 대륙인들에게도 불릴 정도 아닙니까.  이런 습속은 동북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을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가야는 제철, 무역이 주산업이었으니까요. 이리저리 다니잖아요. 교류도 많고...                  


3) <윗글을 읽어 보다보니 반도의  가야, 임나, 왜,백제 그리고 열도의 가야, 백제, 왜가 뒤죽박죽이 되어 전후 좌우가 뒤바뀌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가  정리가 되지 않아 혼란을 겪는 것 같은데 도무지 종잡지 못하겟습니다. 윗글을 단숨에 분석하시기에는 어려우리라 생각되지만 위글에 대해 산책님 나름대로의 생각(추정이라도)을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물, 유적을 보더라도 영산강유역은 가야계 유적이고 이것은 석우로전과 물계자전에도 나오는데 포상팔국은 가야의 소국연합체였고 그 중심이 된 아라가야를 포상제국이 침공하여 아라가야가 경주신라에 구원을 청한 사건입니다. 경주신라가 구원해준 거지요. 수로부인설화, 석우로전, 물계자전은 전부 같은 사건을 다룬 스토리입니다. 물계자=석우로입니다. 물계자열전도 사실은 석우로의 행적 중의 일부를 따서 설화로 꾸며 열전에 실어 놓은 겁니다. 이것도 장난 친 겁니다. 포상팔국의 난과 그 3년 뒤의 포상삼국의 재침건은 가야연합체의 내란성격이예요. 종주국에 대해 반기를 든 거지요.      

이와 관련된 산책의 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수로부인은 사람이 아니고 '남해안해상통행권'='아라가야의 무역로'를 의인화한 가공인물임.  

거기에 나오는 소국이름 중에 유사 물계자전에 보라(保羅)라고 있는데 이 나라가 영산강유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발라'라는 나라와 같은 이름으로 봅니다. (ㅂ+아래아+ㄹ)라> 발라, 보라(리을 탈락), 아래아의 경우 지금 이처럼 분화되면 '오' 뒤의 리을이 쉽게 탈락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석탈해의 이름에서 (ㅌ+아래아+ㄹ)해> 탈해, 토해(리을 탈락).

또 갈화성(竭火城)이라고 나와 있는 지명이 있는데 이것은 가라국(加羅國)을 고려인들이 변조한 이름입니다. 가라국>가라성에서 음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자를 갈화성으로 바꾼 것이지요. 발음을 부드럽게 해보세요. 갈화성>가롸성>가라성으로 납니다. 이것도 일본서기에 가라국>가라성>갈성으로 만들어 쓴 것을 보고 비슷하게 모방한 듯해요.  

그 논문을 찬찬히 보시고 뭐든지 물어보세요. 산책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런 소설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지 않습니다. 훑어보면 거의 전부가 오류니까요.

구주 후나야마고분과 이나리야마고분, 나주 반남면 신촌리9호분, 익산 웅포 입점리고분 등은 전부 가야계 고분입니다. 이것도 이설이 구구하게 많아요. 왜가 열도에서 반도로 건너와 살았다는 등 말도 안되는 설들 많습니다.
그러나 한인학자들은 유물, 유적이 나오면 연대를 내려 잡는 것 같아요. 일인학자들은 자기네 것 연대를 올려 잡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면 연대가 반도>열도이던 것이 열도>반도로 역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왜가 건너왔다 하지요.
구주에 전방후원분으로 아라사등의 암호산고분도 있는데..
연대가 암호산고분(동성대왕 고조부)과 신촌리9호분이
비슷할 것으로 봅니다. 신촌리9호분은 왕능급 고분으로 금동관이 나왔거든요. 아라사등고분보다 한 세대 정도 빠를 듯하고... 이 정도면 초고대왕이 신공기에 나오는 전남지역을 정복하기 직전 정도 될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6세기라고 하고 있어요.
그 다음이 후나야마고분(아라사등의 장자/예진별명/동성대왕 증조부)>익산 웅포고분(동성대왕)>이나리야마고분(예진별명의 9세손 이나리.노.스꾸네[色鳴宿니])    

신촌리9호분이나 입점리고분이나 한인학자 아무도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6세기까지 마한이 살아 있어서 마한왕의 고분이라는 한심한 설명만 하고 있지요. 한 술 더 떠 왜인이 건너와 남긴 유물이라고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왕인도 마한박사라고 하고 있는 실정이고...왕인도 신찬성씨록으로 추적하면 백제 근구수왕으로 나타납니다. 신찬성씨록 한 번도 안 본다는 거지요. 아무리 봐도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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