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공도구 인증 미지정으로 지적을 받았어요.
배관 파이프 머신 작업장에는 기존에 인증받은 사람 사진이 게시되어있어요.  그런데 사내현장에서 밴드 쏘 사용시
2인 1조로 한명이 절단하고 한명이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안전대원이 공도구 사용 지정이 되었냐고 미지정으로 S카드 개선지시서 발급받았어요.
그래서 사무실 아래 스티커 받았어요

공도구 스티커

모두들 안전작업을 하세요~

비전동  도솔한방병원

먼저 한방 한의원으로 도솔한방병원이 있어요.
규모가 커고 깔끔하고 서비스도 좋고 안내원도 예뻐요~~ 개인적으로 안마보다 침맞는 것을 선호해요.


동삭동 한의원

공휴일 진료 개인병원

서정리 365연합의원

오산  무지개연합의원

감기같은 경우 건설현장에선 먼지를 많아서 잘 낫지않기때문에 가능하면 이빈후인과 의원 진료를 권장해요.  아니면 가을에 미리 독감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한방법인 것같네요.

S 전자 건설현장은 출입전에 보안경 착용이 의무에요. 현장 내에 매점에서 보안경을 팔기도 해요.
보안경은 눈을 보호하는 안경을 말해요.  일반 작업환경에서  회전공구 작업이나 페인트 분사 등에서 착용하기도 해요.    기존에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의 경우  도수 렌즈가 들어있는 안경을 안경점에서 만들어야 해요.    보안경 테  종류가 몇가지 없어서 투박하고 선택권이 없어요.    

보안경 종류
보안경 코가 딱딱한데 안경 코를  제작해서 판매하는데도 있어요.
경기도 평택 법원쪽에 있는 안경점에서 제작했어요

코가 있는 안경

동사무소(洞 事務所)는 최소 행정단위로 동(洞) 주민에게 서류 사무적인 일을 해주는 곳이에요.

공무원이 서류 일을 해주는 곳이 니까 업무창구 담 자체도 높아서 민원을 보러 온 사람은 서서 얘기를 하고 기다려야 했고 공무원은 권위적으로 대하고 심지어 뇌물을 주지 않으면 행정처리를 일부러 진행해주지 않기도 했지요.

‘동사무소’라는 명칭은 1955년 부터 사용되엏고 2007년 52년 만에 ‘동주민센터’로 바겼다.

동주민센터란 주민을 위한 기본 서류 및 행정업무 외  복지, 문화, 고용, 보건, 생활체육 등 주민생활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곳이어요.

업무창구 담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당당 공무원과 눈높이가 맞는 높이로 낮아졌고 공무원은 민원인에게 봉사하는 자세로 대한다.

동주민센터란 명칭에서 아예 행정복지센터로 다시 변화되었지요.

최근은 코로나119 백신접종예약 접수도 받아줘요.





언양, 복음의 씨앗, 왕길지(王吉志, Gelson Engel·1864∼1939) 호주선교사

 

  언양제일교회는 100년이 넘은 오래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02년 삼남면 덕천역(德川驛) 수남(水南)마을에서 수남교회로 시작해서 교인이 늘자 언양읍성 남문 밖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덕천역은 삼남읍 교동리 수남마을의 덕천고개 서북쪽에 설치됐던 역참(驛站)인데 이 역은 양산의 위천역(渭川驛), 울산의 굴화역(堀火驛), 경주의 잉보역(仍甫驛, 인보(仁甫))을 연결하여 조선시대 언양현 물류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덕천고개를 넘어 진등(長嶝, 陣嶝) 산등성이를 따라 가다보면 교동리 진장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생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 언양읍성에 도대체 어떻게 복음이 전파된 것일까?   그 시작은 부산·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독일 출신 왕길지(王吉志, Gelson Engel·1864∼1939) 호주선교사로부터 비롯됐다.

    왕길지는 아내 클라라 베스(Mrs. Clara Math)와 세 아이 넬슨(Fred Nelson), 허비(Herbert), 도라(Dora)와 함께 호주 멜버른(Melbourne)에서 출발하여 1900년 10월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공부하고 풍습을 익혔다.   그는 그 달 말에 한국어 발음을 연습해서 축도 즉 축복기도를 시도했고 3~4개월이 지나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국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했는데 “엥겔”과 “왕길”의 발음이 비슷했고 그 이름에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는 부산진교회에 사역을 하면서 1901년 6월 순회선교사로 울산, 언양, 장기(지금의 포항 구룡포), 감포, 경주 등을 말을 타고 돌며 전도에 나섰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6월 6일 목요일 장기에 살고 있는 교인 ‘김 서방네’ 심방을 갔다가 언양을 거쳐 통도사에서 1박을 한 후 교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경상도 동부일대 순회 전도

  왕길지는 당시 번화한 읍성인 언양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통도사 쪽으로 향했다.   그 일행이 수남마을 벚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말 고삐가 풀려 말이 달아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일행이 마을에 들어가 말을 찾던 중 말이 정희조(鄭喜祚)라는 사람의 콩밭에 들어가 밭작물을 훼손한 사실을 알게 됐다.   왕길지는 “밭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희조(鄭喜祚)는 “말 못하는 짐승이 한 것을 어찌 그리 하겠소”하고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때 왕길지는 ‘한국인의 예’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 후 교동리 밭주인 정희조는 언양의 첫 신자가 되어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았다  그것이 1902년 9월 15일의 일이다.   이러한 일화는 왕길지의 일기에서만 확인된 게 아니다.   정희조의 증손자 정길원(언양평강교회) 집사의 가계사 구술에서도 그 일치함이 확인됐다.   정희조는 훗날 부산 동래 안평교회 설립에도 관여한다.

 

  이렇게 울주지역 중심교회가 된 당시 수남교회는 인근 반천, 보은, 궁근정(지금의 상북)에 교회를 분리 개척하고 그래도 교인을 감당할 수 없자 읍성 남문 앞 지금의 교회 터로 이전한다.   와가(瓦家, 기와 집) 5칸을 매입, 동부교회라 칭했다. 1917년 이후로는 언양읍교회로 불렸다.   언양제일교회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64년이다.

언양제일교회

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울산 월평교회

 

  월평교회는 1909년 3월 8일 왕길지 선교사가 전읍교회 이기연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경주교회 김희조(金熙祚) 성도의 헌금으로 교회당을 구입했다.   월평교회는 6.25 한국전쟁 전후 6명의 순교로 2011년 순교자 기념교회로 지정되었다.

 

  첫 순교자는 한학자 우영식씨의 3남 우두봉 집사이다.   경주교회에서 집사로 섬기던 우두봉 집사는 1948년 월평 고향집에 잠시 드렸다가 ‘예수 믿는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빨치산에게 사살 되어 월평 땅에 순교의 피를 뿌렸다.

 

  두 번째 순교자는 우재만 집사이다. 1950년 2월 빨치산이 우재만을 끌고 다니다가 월평교회 앞 저수지에서 사살하고 불태웠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5일 지난 6월 30일 밤늦은 시간에 빨치산이 교회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정두란 집사, 조재년 성도, 조말복 성도를 끌어내어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난사하여 죽였다.

 

  여섯 번째 순교자로 우재만 집사의 동생인 우성만 집사이다.   1951년 8월 14일 추석명절을 맞아 홀로된 형수를 위로하기 위해 큰댁을 찾았다.   형수는 우 집사에게 “공비들이 올 줄 모르니 피하라”고 말을 했지만 우 집사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피하기를 거부했다.   이날 들이닥친 빨치산에게 우 집사는 사살됐다.

순교자 기념교회 기념패
월평교회 뒷뜰, 순교자의 비

*참고

1. 전정희 기자, 국민일보(2015년 01월31일), ‘한국의 성읍교회 – 언양제일교회’

2. 장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3-2), '겔슨 엥젤(Gelson Engel, 1868~1939)'

3. 김종익 장로(울산교회), 기독교보(2014년 5월 2일), '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울산 월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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