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4〉김해 초선대와 파사석탑 |
가야(伽倻). 낙동강 유역을 근거지로 기원전후부터 562년까지 존재했던 고대국가. 1세기 무렵 12부족이 6가야로 편성되었고 제법 발달된 철기문화를 통해 한반도 동남부를 지배했던 연맹체. 초대 왕은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 안의 황금알에서 태어난 수로왕(首露王). 이때가 서기 42년. 그는 6년 뒤 멀리 불교국가인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서기 199년 15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이 이국의 신부와 함께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든 인물. 신비의 왕국 가야의 역사는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다. ‘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장유화상 발자취 지역사찰 곳곳에 남아 불상과 석탑에는 인도양식 특징 나타나 <사진> 초선대 마애불. 상호에서 인도 귀족의 모습이 보여 가야불교의 증거라고 전한다. 600년을 유지한 나라의 역사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고작 몇 줄이 전부이고, 그밖에 일본의 역사서에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할 뿐이다. 그래서 가야의 역사는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다. 근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철기를 사용한 선진문화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어도 역사의 대부분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주류 사학계의 연구가 실체가 불분명한 가야사의 정형화에는 기여했으나, 고대사에서 필요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도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이른바 재야사학 쪽의 시각은 훨씬 스케일이 크다. 단순 연맹체 정도가 아니라 1세기에 멀리 인도와도 독자적 교통을 할 정도로 강대한 해상국가였으며, 가야 출신의 천황(10대 숭신천왕)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 직접적 영향력을 주었던 초강대국이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한국 고대사를 주름잡았던 잊혀진 고대왕국에 대한 짙은 향수가 느껴진다. 가야의 역사와 불교를 신화가 아닌 사실로 인정하고 연구함으로써 이 분야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종기(李鍾琦, 1995년 작고)다. 신문언론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그는 가야의 고토를 모두 답사한 것은 물론이고 왕비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국으로 비정되는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인도의 아요디야국까지 찾아가 그곳에서 가야와의 연관성을 추적한 뒤 1975년에 <가락국탐사>라는 책을 펴냈다. 순전히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지만 그 책은 국내 사학계가 관심을 갖지 않던 부분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위업’이라 할만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열정에 넘치는 아마추어가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를 능가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가야사에 관해서는 불교사학계도 논의의 당사자다. 수로왕이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할 때 인도의 불교가 함께 들어왔다는 것이 가야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뱃길을 통해 허황옥과 함께 온 오빠 장유(長遊)는 인도의 고승으로서 그로 인해 가야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가야’라는 말 자체에 불교의 색채가 가득 묻어있다. 주지하다시피 석가모니가 성도한 곳이 바로 부다가야 아닌가. 가야불교에 대한 의문은 내게서 늘 떠나지 않았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중국 전진(前秦)에서 순도를 통해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 일행이 파사석탑을 들여오고, 또 그의 오빠인 장유는 가야 영토 곳곳에 사찰을 창건했으니 결국 정황상 불교가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는가. 이렇게 되면 교과서에 나오는 불교도입시기와는 무려 300년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지만 가야불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초선대 마애불 앞 불족적. 왼쪽 발자국으로, 인도 부다가야에 있는 오른쪽 발자국과 한쌍이라고 전한다. “가야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왕이 허황후를 아내로 맞아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 년이나 되었지만 당시 아직 절을 세우고 불교를 믿는 일이 없었다…제8대 질지왕 2년(452)에야 비로소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452년 이후일 것이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가야인들이 수만 리나 떨어진 인도를 알고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 그들은 불교가 전래된 후에야 비로소 불교의 성지인 인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을 것이다. 따라서 허황후의 인도 출신설은 조작 내지 윤색된 것이다.” 여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김해를 중심으로 한 옛 가야의 영토에 자리 잡은 사찰들에서는 예외 없이 허황후 이야기가 전한다. 나는 그런 사실에 도통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여러 의문점들이 떠올랐다. 이 지역 일대의 거의 모든 사찰에서 가야 창건설이 주장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전설이라고만 할 것인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전설은 아무 이유 없이 만들어졌겠는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8000㎞도 넘는 먼 바닷길이라지만 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길이라고만 생각하는가? 내가 가야사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락국탐사>를 읽고부터였다. 고등학교 시절, 동네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손에 잡은 나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가야의 역사에 매료되었다. 전공을 사학으로 정한 것도 이 책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엔 마침 김해에서 올라온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 나는 학교 근처의 허름한 라면집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가운데 두고 역사 토론을 벌이느라 야간통금에 걸리기 일쑤였다. 평소에도 알아듣기 힘들던 그의 김해 사투리는 빈 병이 늘어감에 따라 해독불능의 수준이 되곤 했지만…. 김수로왕과 허황후를 각각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끼리는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나, 김해 김씨에게는 몽고반점 비슷한 남다른 신체적 특징이 있어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서 처음 들었다. 대학생활이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이 친구의 김해 집으로 내려가 함께 김해 일대의 가야유적을 쏘다녔는데 이것은 가장 소중한 추억 중의 하나다. 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사찰의 범위는 꽤 넓다. 내가 다녀본 바로는 김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합천 해인사, 서쪽으로 하동 쌍계사, 그리고 북쪽으로 청도 대운암에 이르기까지 가야불교의 시조 장유화상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나는 가야의 영토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가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들의 분포가 곧 가야의 영토일 테니까. 공간적 범위를 김해 지방에만 한정해 보더라도 몇 가지 유물도 전한다. 대표적인 게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이 석탑은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한다.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가 표면에 남아 있는 등 우리나라에서 나는 석질이 아니라서 수만 리를 건너온 이력을 짐작케 한다. 금선사 옆에 있는 초선대(招仙臺)의 마애불상 역시 가야불교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다. 5m 크기의 바위에 새겨진 이 불상을 대부분 고려시대 것으로 본다. 하지만 가야불교를 믿는 쪽에서는 1세기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사진> 파사석탑. 허황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때 가져왔다고 전한다. 그 근거로 상호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닮았고, 가사 자락에 새겨진 국화꽃 형태가 인도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 불상 바로 앞에는 불족적 하나가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가야불교의 증거로 거론된다. 한파가 몰아치던 1월 중순, 거의 30년 만에 초선대 마애불상 앞에 다시 섰다. 그 동안의 연륜 때문일까, 그때와 지금 보는 감흥이 사뭇 다르다. 함께 간 불교조각가 친구가 보자마자 외친다. “각(刻)이 달라! 이건 가야만의 조각일 수밖에 없어!” 그의 말마따나 귀에는 인도 귀족이 흔히 차던 가락지 같은 귀고리가 걸려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가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을 1세기로 보아 우리나라 불교의 도입을 300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을 지, 혹은 과장된 설화에 불과한 것인지 당장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란 문헌에만 의지한다고 해서 모두 다 풀려지지는 않는다. 기록이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현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신화와 전설을 포함하여 실제로 전해지고 있는 현상,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 이런 것을 무시하고 문자만 따질 때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야사도 바로 그런 경우일 수 있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97호/ 1월30일자] 2008-01-26 오전 11:33:19 / 송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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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2009.02.16
-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4> 신나라 왕망 화천(貨泉) 2009.02.16
- 대륙가야(加耶) 2009.02.16
- 가야 해상무역로2 - 해남 2009.02.16
- 가야 해상무역로1- 해남 2009.02.16 1
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4> 신나라 왕망 화천(貨泉)
대륙가야(加耶)
가야/가락을 찾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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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최두환 2007.11.15
조선의 력사 가운데서 신비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런 신비한 력사 가운데서 "가야"만큼 아리송한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재 경상도, 특히 김해 지방에서 유물이 나오기만 하면 거의 "가야"유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야에는 김수로가 건국했다는 "금관가야"에서부터 "대가야·소가야·고녕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가 그것이다. 이런 가야의 이름에도 비슷한 소리의 글자가 많다. 이것은 나중에 인도로 지역이 이동되면서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金官伽倻: 駕洛·南+伽倻·伽耶·加耶
大伽倻: 高靈·大+加耶·加羅. 伴跛
小伽倻: 固城+固城. 久差·古嵯·
古寧伽倻: 咸昌+伽倻·伽耶·加耶
阿羅伽倻: 咸安·安羅·阿尸良·呵耶+伽倻·伽耶·加耶
星山伽倻: 星州·碧珍+伽倻·伽耶
非火伽倻: 昌寧·比自
이렇게 많은 가야에서 그것이 정작 어디라고 말하기에는 마땅찮기도 하다.
그런데 "가야"니, "가락"이니 하는 것에는 뭔가 공통적인 것이 보인다. 이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加耶[三國史記]
伽耶[三國史記/三國遺事]
伽倻[高麗史/東國輿地勝覽]
(2) 加羅[廣開土王碑/南齊書/日本書紀]
伽羅[梁書倭傳]
迦羅[隋書/北史]
羅[三國遺事]
柯羅[日本書紀]
(3) 狗邪[三國志魏書東夷]
拘邪
(4) 加良[三國史記]
駕洛[三國史記/三國遺事]
駕落[三國史記]
위의 글들은 우리들이 통상 "가야/가락"으로 두 가지의 형태를 부르는 말인데, 한자로는 4가지 부류로 구분했지만, 각각 다른 글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의 소리를 다르게 썼을 뿐인데,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보자.
위의 (1)은 그 소리가 그대로 [가야][gaya], (2)는 [가라][gara], (3)은 [구사][kusa][쿠추][kuchu], (4)는 [가라][쟈로][zalo]이다.
결국 이들은 [gaya][gara][kuchu][zalo]의 4가지로 줄어지며, 앞의 [gaya]는 가야[Gaya] 또는 부다가야[Buddha Gaya]로서 현재 인도의 동북부 지방이다.
두 번째 [gara]는 [goro]로도 모음변화가 가능하며, [ghore]로도 쓰여 아프가니스탄 고르[Ghore: 북위 34도 동경 65도]로 보인다.
세 번째 [kusa]는 [kush]로, [kash]로 변형이 가능하며, 이곳은 카슈[Khash][북위 30도 동경 63도
]일 것이다.
네 번째 [zalo]는 [lo]가 [벌/불/부루]와도 같은 변화로 보면, [zambul][잠불]로도 볼 수 있다. 이곳은 고르 동남쪽에 있다.
이렇게 가야/가락국 지역을 중앙아시아로 보는 까닭은 결코 한반도 경상도의 그 김해 중심의 가야니, 가락국이라는 것이 옳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곳의 이름을 한반도에서는 하나로 얼버무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지『신증 동국여지승람』(권32 김해도호부)에 나오는 설명부터 알아보고 넘어가자.
(5) 성곽: 정몽주의 기문에, …그리하여 당시에 왜적을 방어하던 자취를 대개 볼 수 있었다. 지난적에 글안(契丹)·금(金)나라·원(元)나라와 국경을 린접한 敵이며, 몇 해나 항전하였으나, 옛 강토를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음에도,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지금 국가에서 20여 년이나 군사를 움직이고 있으니, 성과 못은 곳마다 퇴폐하여 태평성대와 다름이 없다. … 내 장차 옛 가야 터를 찾으려는 바, 새 성 위에서 술잔을 들며 박위(朴 ) 후(侯)의 정적(政敵)에 성공이 있음을 축하하리라.
여기서 잘 보자! 경상도 김해 가야가 어디인데, 그 국경이 되는 쪽의 위치에 "글안(契丹)·금(金)나라·원(元)나라"가 있다는 건가? 참으로 얼토당토 않다. 그것이 한반도라면 말이다.
이 "가야 김해"를 중앙아시아 "고르(Ghore)"로 보자. 그러면 위의 김해성각의 기록이 어떻게 풀어지는가를 말이다.
지금까지 글안이라는 서북쪽의 키타이, 알타이가 중심이된 금[金]나라, 우랄·알타이 바로 그 지역에 말갈이 있었고, 그 말갈의 다른 이름의 몽고라는 원이 있었다고 보면 모두가 풀어질 것이다.
또 그 김해도호부에 있는 지명을 보자.
(6) 신교천(薪橋川): 김해부 서북쪽 30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창원부 렴산(簾山)에서 나오며, 동북쪽으로 흘러 락송지(落松池)에 합치고, 북쪽으로 흘러 해양강(海陽江)에 들어간다.
이 설명에서 렴산은 바로 내가 살았던 고향 뒷산이름이며, 그 이웃 동네의 진산인데, 우리들은 그저 "구룡산(九龍山)"이란 이름으로 통하며, 신라 배극렴(裵克簾)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전해온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강"이 없다. 물론 "낙동강"줄기라는 개구리 몇 마리, 송사시 몇 마리는 살 수 있는 실개천은 있다. 그러니 더더욱 "해양강"이란 거창한 이름의 강은 전혀 없다.
이런 지형 설명은 어디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해양강"은 밀양부(密陽府) 룡진(龍津) 하류의 강이라고 하는데, 한반도 경상도 밀양군, 지금은 밀양시에는 이런 강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밀양"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 발음이 [미량]인데, 본디 "推火郡"[추화군]이었으니, 이것은 "밀불>미르벌>미라벌"로도 된다. 이 지명의 소리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e)의 남쪽에 있는 카슈(Khash)의 남쪽 헬만드 강가에 "Mirabad"(미라바드)가 있다. 바로 이곳이 그 "밀양"일 것이며, "海陽江"이란 이름이 혹시 그 "Helmand"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게 해서 다음의 기록에서 어렴풋이나마 정말 그렇겠구나 하는 말이 나올 것이다.
(7) (김해부의) 서남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세 갈래의 물이 빙 둘렀다.[西南際大海, 三叉經帶]
이 지형 설명은 현재 한반도 김해의 먼 남쪽에 바다는 있을지언정, 서남쪽엔 바다가 없다. 이 "大海"라는 말은 아마도 헬만드(helmand)호일 것이다. 거기에는 북쪽의 하리 강(Hari Rud), 남쪽의 헬만드 강(Helmand Rud), 그 중간의 샛강 파라 강(Farrah Rud)이 너무도 어울린다. 지도에서 한번 감상이나 해보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설명된 황산강(黃山江)을 읊은 강혼(姜渾)의 시 한 수를 감상도 적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8) 김해부에 배를 대고 [泊舟金海府]
문득 진양산을 바라보니 [却望晉陽山]
넓고 넓은 구름 하늘이 멀고 [納納雲天遠]
아득히 물이 질펀한 나라는 넓어[茫茫水國寬]
강과 호수에 이 밤이 흥겨워라.[江湖今夜興]
김해에서 진양산(晉陽山)을 바라본다니 우습다. 그 진양산이 중앙아시아에서도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반도 김해 근처에서는 없다.
그리고 물이 질펀한 나라[水國]이니, 강과 호수[江湖]는 바로 헬만드 호가 안성마춤이다. 게다가 그곳의 흐르는 강을 보며, 이것은『신증 동국여지승람』의 김해부 형승을 설명한 것을 쏙 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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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해상무역로2 - 해남
2. 금관가야 왕국 김해와의 해상교류 | ||||||||||||||||||||||||||||||||||||
해남, 가야와 5백년간 교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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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 군곡리는 기원전 3백년부터 기원후 4백년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해상 도시였고 이 해상도시는 금관가야와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전개했었다. 특히 군곡리 해상세력이 가장 왕성한 대외활동을 전개했던 시기는 기원후 1세기에서 3세기였다. 이 시기 군곡리 세력과 가야세력은 왕성한 교류활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는 군곡리 패총지와 해남의 여러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각종 유물들이 뒷받침해 준다. 군곡리 패총지에서는 화천(동전)과 복골(점치는 뼈), 곡옥, 각골,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김해지역 패총지에서도 같은 종류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철의 나라 가야 가야는 질 좋은 철로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 땅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 및 일본과 활발한 해상교역 활동을 전개하며 부를 축적했는데 이들 해상세력이 거쳐 간 곳이 해남 현산면과 화산면에 있는 백포만 항구였다. 김해시 문화시설관리과 송원영 학예연구담당은 송지 군곡리에서 중국의 화폐와 가야의 토기류, 일본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가야의 해상세력이 백포만을 경유한 후 서해를 거쳐 낙랑과 대방으로 진입했고 낙랑과 대방도 가야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백포만을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송지 군곡리 해상세력도 백포만에서 배를 탄 후 서해를 거쳐 낙랑과 직접 교류했고 가야 및 일본과도 교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포만은 영산강세력의 국제항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4세기 초까지 존속했던 송지면 군곡세력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고대사회를 열었던 신미제국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미제국 일원이었던 백포만 일대에서는 다량의 옹관고분이 발굴되고 있다. 옹관고분은 송지 군곡리와 미야리, 현산면 분토리 일대, 삼산면 원진과 목신, 신금, 화산면 부길, 해남읍 호천리 일대서 발굴되고 있는데 옹관묘 안에서는 토기와 철 덩어리, 철칼, 옥 장식품 등이 함께 수습됐다. 이곳 옹관묘에서 수습된 철제품은 가야생산품과 동일해 가야와 교류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와 같은 유물 수습에 대해 변남주 교사(영암 삼호서초교)는 "백포만은 신미제국의 외항적 기능을 수행한 대표 거점포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고 있다. 백포만 세력이 건설했던 군곡리 포구도시는 4세기 들어 백제에 의해 쇠락하고 만다. 대신 백제는 현산 고현리에 포구도시를 세운다. 그런데 백제가 세운 현산면 고현리 세력은 백제가 아닌 가야와의 해상교류를 활발히 전개한다. 고현리 고분군에서 수습된 각종 토기류 대부분이 가야계 토기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토기는 현재 현산초등학교에 소장돼 있다. 한편 백포만의 포구도시였던 현산면 고현세력은 5세기 말 들어 쇠락하고 현산 월송 세력이 그 뒤를 잇게 된다. 일본세력 해남 진입 현산면 월송에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되는 조산고분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192점의 방대한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많은 유물이 금동제 말재갈과 말 장식품 등 마구류였다. 마구류는 해남의 기존 대형옹관묘에서는 수습되지 않는 유물이다. 대신 마구류는 김해지역의 대성동 고분이나 일본 후쿠오카 지역 고분군에서 광범위하게 수습되고 있다. 또한 전형적인 일본 양식무덤인 북일면 대형고분군들에서도 일본과 가야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두귀납작병과 삼각형 철갑옷편 유물들이 수습된 바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백포만 세력은 4세기말 백제 근초고왕이 영산강 일대를 접수한 후에도 백제보다는 가야, 일본과 해상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해남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묘제 양식인 대형합구식 옹관묘가 4세기 말에 소멸된 후 일본 후쿠오카 등에 분포하는 전방후원형 (앞은 길다란 네모, 뒤는 둥그런 무덤 모양)무덤과 즙석분(무덤표면을 작은 돌로 장식)이 등장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고창 영광 광주 함평 등지에서 10여기 발견되었는데 해남의 북일 것이 76m로 가장 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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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해상무역로1- 해남
2천년전 송지 군곡리는 해상무역 도시였다 | ||||||||||||||||||||||||||||||||||||
1. 2천년전 송지 군곡리는 국제항구도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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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밝혀진 군곡리 역사 1986년, 철기시대 국제 항구도시였던 백포만의 면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목포대 박물관이 송지면 군곡리에서 세 차례에 걸쳐 3년간 발굴 조사한 결과 기원 전후 군곡리는 중국과 일본, 가야 문명권과 바닷길을 통해 해상무역을 했고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3세기에 생성되기 시작한 이 항구도시는 이후 700년간 존속했고 철기시대인 1세기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거점항구도시로서 역할을 왕성히 해냈다. 이곳에서는 1세기 중국의 화천(돈)과 복골(점 치는 도구), 다량의 철기류와 일본의 토기류 및 복골 등이 수습되었다. 또 가야지역의 삼천포 늑도 패총지에서 발견된 토기류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국제적인 항구 도시였던 이 도시가 송지면 군곡리에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송지면 군곡리는 백포만에 속한 지역이다. 백포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뱃길이다. 또한 백포만은 서해에서 남해로 꺾이는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백포만은 한중일 문물교류의 주요 거점 포구였고 군곡리는 포구 사람들이 거주했던 국제도시였다. 또한 백포만은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군이 일본과 교류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포구이기도 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서해를 거쳐 백포만을 경유한 후 금관가야였던 김해를 통해 일본의 대마도로 들어갔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의 화천이 군곡리와 제주도, 고흥 거문도, 창원, 김해 등지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군곡리에 세워진 국제 항구도시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포구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변남주 교사는 침미다례라고 말한다. 군곡세력 백제 근초고왕 때 멸망 송지면 군곡리에 침미다례라는 소국이 들어서 있을 때, 영산강 유역에는 신미제국이라는 고대국가가 들어서 있었다. 영산강 일대에 들어선 신미제국은 독자적인 국가로 옹관고분(항아리 무덤) 이라는 독특한 묘제 양식을 남긴다. 송지 군곡리 일대에서도 대형 합구옹관묘가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일대 세력은 영산강 유역의 신미제국과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군곡리 국제 포구도시가 4세기 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4세기 들어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을 맺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다. 3세기까지 동북아 해상교역은 낙랑과 대방군이 주도하고 있었다. 낙랑과 대방군을 추출한 백제와 고구려는 이제 동북아 연안항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다. 이때 백제에는 위대한 군왕인 근초고왕이 있었다. 근초고왕은 평양성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연안항로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리고 송지 군곡리에 있던 침미다례를 도륙한다. 역사서에 도륙이라고 표기한 것은 아마 침미다례 세력들이 백제에 필사적인 저항을 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서 군곡리 포구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현산 고현세력 등장 군곡리에 들어선 침미다례라는 국제 포구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근초고왕은 그렇다고 백포만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해상로로서의 위치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반대한 군곡세력을 철저히 파괴한 대신 현산면 고현리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군곡리의 역할을 대신하게끔 한다. 그러나 백제의 동북아 해상교역의 주도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현산초등학교에 소장된 토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계 토기가 아닌 가야계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 때문이다. 이는 백제의 통제가 약화되자 고현세력은 독자적으로 가야와 해상교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도시 고현에서 월송으로 백제의 힘이 약화되자 백포만의 해상세력의 거점은 고현에서 현산면 월송리로 이동한다. 그 세력이 바로 해남 월송 세력과 영산강 유역 세력이다. 물론 일본의 부상에 대해 영산강 유역 신미제국을 주도했던 시종면과 반남면의 중심세력들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해남의 월송세력은 백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가야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했고 영산강 유역의 변두리 세력이었던 광주와 함평, 영광 등지의 세력들도 일본과 강화를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산 월송을 비롯한 이 지역에서는 일본식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게 된다. 현산 월송리 조산마을에는 대형 고분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 무덤의 형태가 일본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6세기 고현이 다시 국제도시로 6세기 들어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무령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동북아 해상교역을 회복시킨다. 백제는 영산강유역의 신미제국을 점령하고 일본과 해남 월송세력을 아우르는 동북아 해상교역의 네트워크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해양거점 도시로 확보한 현산 고현을 다시 부활시켜 새금현을 설치한다. 이와 함께 백제는 백포만 일대 산 정상에 산성을 중첩적으로 축조해 이를 요새화 한다. 고려시대 해남지명 첫 등장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백포만은 중요한 국제 포구였다. 이때도 백포만의 중심 포구도시는 현산 고현이었다. 고려는 고현에 있던 새금현을 해남현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해남이라는 지명은 이때 탄생되었다. 백포만 일대에 있는 현산 신방리 백방산에는 중국 송나라와 교류했던 설화와 지명이 많이 전하고 있다. 고려에 왔다 돌아가는 송나라 사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첩이 백방산에서 기다리다 굳어져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과 이제나 저제나 임이 올까 기다리며 건넸다는 탄식천 등이 그것이다. 국제 포구였던 백포만은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쇠퇴하고 만다.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고려정부가 섬과 해안지역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거시키는 공도정책(섬을 비우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로서 현산면 고현에 있던 치소도 내륙인 현산면 구시리에서 삼산면 계동으로 그리고 조선 세종 대에 이르러 해남읍으로 이동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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