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대제기 10년 (400년)

十年 庚子 二月 慕容盛引兵三万來侵新城 先鋒熙迂入南蘇 上引精騎八千 擊熙於鵠林 大破之 朋連龍臣大戰于新城 追擊于河上 斬獲甚多 上仍擊章武以西 拓地七百余里 徒戶五千余而還 聞倭入羅 遣胥狗解裎等將五万往救退倭 任那安羅加洛等 皆遣使來朝 南方悉平
10년 경자 (400년) 2월 모용성은 병사 3만명을 이끌고 신성에 침입하였다. 선봉인 모용희는 남소로 쳐들어왔다. 상은 정예 기병 8천명을 이끌고 鵠林(곡림)에서 모용희을 격퇴시켜 크게 깨뜨렸다. 붕련,룡신은 신성에서 크게 전투를 하였다. 河上(하상)까지 추격하여 심히 많이 참획하였다. 상은 거듭 章武(장무) 서쪽을 쳐서, 700여리의 땅을 개척하고, 5천여 戶(호)를 옮겨 놓고 돌아왔다. 왜가 신라에 침입한 소식을 듣고, 胥狗(서구)와 解裎(해정)등 병사 5만명을 보내 왜를 격퇴시켰다. 任那(임나), 安羅加洛(안라가락)등 모두 사신을 보내 래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10년 경자 (400년) 2월 왜가 신라에 침입한 소식을 듣고, 胥狗(서구)와 解裎(해정)등 병사 5만명을 보내 왜를 격퇴시켰다. 任那(임나), 安羅加洛(안라가락)등 모두 사신을 보내 래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
400년에 이르러, 광개토왕은 왜가 신라에 침입하자... 5만명의 대군을 보내어 왜를 물리칩니다.

그런데, 뒤에 '任那(임나), 安羅加洛(안라가락)등 모두 사신을 보내 래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갑자기 쌩뚱 맞게 임나,안라가락등이 사신을 보내 온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 기사을 처음에 봤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팔린통빙고 인덕조를 해석해 보자....그 윤곽이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시죠.

----------------------------------------------------------------------
팔린통빙고 권2, 仁德朝
○後三年(己亥歲) 襲津彦出伐新羅 新羅告急高麗 高麗卽大發兵救之 我軍敗績 禍及任那 王巳本旱岐(一作 伊尸品) 王子百久底 提其族避難於百濟 事聞 天皇卽遣木羅斤資(百濟宰也 斤資與吉士同) 領精兵入任那 復其社稷 邀戰數次 任那縣邑 劫掠焚燼 將士多死之
<補> 이하 생략

3년후, (기해년, 399년) 襲津彦(습진언)은 출정하여 신라를 벌하였다. 신라는 급히 고구려에 보고를 하여, 고구려는 즉시 병사를 크게 발진시켜 신라를 구했다. 우리(왜) 군사가 패배하니, 禍(화)가 任那(임나)까지 미쳤다. (임나)왕 巳本旱岐(사본한기)(혹은 伊尸品이시품)와 왕자 百久底(백구저)는 그의 가족(백성)을 데리고 백제로 피난하였다. 이 일을 듣고, 천황은 즉시 木羅斤資(목라근자)(백제의 재상(우두머리)이다,斤資(근자)는 吉士(길사)와 같은 말이다)를 파견하여 정예 병사를 인솔하여 임나로 들어가게 하여, 그 사직을 복구시켰다. 격전이 수차례 있어 임나의 현읍은 약탈당하고 불에 탔으며, 장사는 많이 죽었다.

*邀戰數次 => 次 글자였다.
*399년보다 40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

팔린통빙고에서는 399년으로 나와 있으나, 1년 편차를 감안하여 40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我軍敗績 禍及任那 '
'우리(왜) 군사가 패배하니, 禍(화)가 任那(임나)까지 미쳤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광개토왕이 5만명의 군사로 신라의 왜군을 치는데, 덤으로 禍(화)가 任那(임나)까지 미쳤다는 말입니다.
실상은 신라땅의 왜군을 쳤지만, 임나같은 나라가 전쟁의 불똥이 튄 셈이라는거죠.

왜 광개토왕은 임나를 쳤을까요?

임나는 백제와 비슷하게 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친왜국가'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광개토왕이 그런 친왜적인 나라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란 말이죠.

*'10년 경자 (400년) 2월 왜가 신라에 침입한 소식을 듣고, 胥狗(서구)와 解裎(해정)등 병사 5만명을 보내 왜를 격퇴시켰다. 任那(임나), 安羅加洛(안라가락)등 모두 사신을 보내 래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제, 무엇 때문에, 任那(임나), 安羅加洛(안라가락)등의 사신이 래조하였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400년에 광개토왕이 임나를 친 사항을 파악할 수 있으며,
광개토왕 비문과 환단고기에도 그 사항이 나오죠. 여기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서로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박규호

3. [화제]일본 최초의 여왕은 가야인

[뉴스메이커 2006-09-15 09:48]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설화와 스리랑카 비자야왕 설화 ‘이렇게 닮았다’
경북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 <김영민 기자>
사마태(邪馬台, 일본어발음은 ‘야마타이’) 비미호, 또는 비미크 (卑彌呼, 일본어 발음은 ‘히미코’)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 임나(任那)(일본어 말음은 ‘미마나(彌摩那)’ ) 등.

한국의 가야(伽倻)나 일본의 사마태국(邪馬台國)등 한일(韓日) 고대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과 지명이 똑같이  나타나는 나라가 있다. 바로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비자야(Vijaya, 재임 기원전 543~504 )에 의해 싱할리 왕국을 수립한 스리랑카다.

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승리(victory) 또는 정복(conquest)의 뜻에서 정복자(Conquerer)로 발전한 비자야 왕의 이야기는 아시아권 정복개국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한반도에서 수만리 멀리 떨어진 스리랑카의 역사와 지리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 최초 왕 비자야 설화와 수백년 뒤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金首露, 42~199)왕 설화를 비교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비자야 왕의 설화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바꿔 넣으면 정확히 일치

“인도 대륙 북동부가 고향인 한 공주가 사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 비자야를 낳았다. 이 왕자는 행실이 불량하다고 추방당한다. 비자야는 인도땅을 떠나 추종자 700명과 함께 거북 모양의 선박에 올라타고 바다 건너 스리랑카 서부해안에 도착한다. 기원전 543년 비자야는 추종자에 의해 스리랑카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고 인도 최남부에 있는 타밀인의 판디야 왕국(Pandya Kingdom)에 왕비감을 청원, 타밀 공주 야쇼다라(Yasho dhara)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추종자도 타밀인 하녀와 결혼한다.”

김수로왕의 설화는 주지하다시피 “기원 42년 가야지역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하 수백명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하자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나왔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김수로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이 돼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48년 인도에서 바다 건너 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필자는 허왕후를 타밀 출신으로 본다)

두 설화를 비교하면 비자야 왕과 김수로왕 모두 거북과 관련있고 새 땅에 도래, 첫 왕국을 열었으며 추종자 수백명의 추대에 의해 초대 왕위에 올랐고 바다 건너 인도 땅에서 (타밀인) 왕비를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 설화는 아주 비슷하다. 정복개국설화의 원형인 비자야 왕 이야기는 구전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펴졌으며 종국에는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쳐 수로왕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인이 이를 모방해 ‘대위법’에 의해 수로왕 설화 형성에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왕과 히미코 여왕 ‘부녀지간’

수로왕(42~199) 장남인 금관가야 제2대 거등왕(199∼253) 사이,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중반에 걸쳐 재임했던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비자야 왕 시절 국무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 대부분의 언어에선 ‘ㅎ(h)’ 와 ‘ㅋ(k)’는 음성학적으로 호환 가능)와 일치한다. 또 그녀가 통치했던 ‘사마태 (邪馬台)’는 비자야 왕의 수도 탐바판니(Tambapanni)에 국무총리가 주도해 건설한 왕궁의 이름 ‘사마테(Samate), 또는 ‘사마타이(Samatai)’와 각각 일치한다.

아울러 비미호 여왕이 죽고 잠시 남자 왕이 재위한 뒤 등극하는 여왕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도 비자야왕의 조카로 스리랑카 제2대왕이 된 판두바사(Panduwasa, 재위 504~474 B.C.)의 부인 이름 ‘일여(Ilyo)’왕비와 일치한다.

비자야 왕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나타나는 ‘비미호(비미크)’ ‘사마태’ ‘일여’ 등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기록에 나오는 명칭이 일본어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과 똑같다는 것은 일본이 가야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음을 시사한다.

‘사마태(邪馬台)’ 국의 한자 ‘邪’는 일본어 음독으로 ‘자’로, 훈독으론 ‘요코시마’로 읽으며 예외적으로 감기를 뜻하는 ‘風邪’만 ‘가제’로 읽는데 ‘야마’로 읽는 경우는 邪馬台뿐이다.

당시 당시 최고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를 갖춘 가야는 중국과 일본 등에 철을 수출하면서 동시에 기동력있는 항해술로 한반도 남부 및 일본 열도를 아우르는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 가야다.


이는 일본땅에 가야의 분국이 있었다는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 1915∼1996) 교수가 1960년대에 내놓은 ‘삼한(三韓) 분국설(分國說)’과 일맥상통한다. 김교수의 제자인 조성희 박사도 ‘일본에서 조선 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년)이라는 저서에서 혼슈(本州)섬 오카야마(岡山)현 기비(古備)지방에 가야의 소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야와 일본의 관계 연구에 평생을 전념한 재야사학자 이종기 선생(1929~1995)은 김수로왕의 딸 묘견(妙見)공주가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九州)로 건너가 남동생 선견(仙見)왕자와 또 다른 가락국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타이국이며 히미코 여왕이라고 주장한다. 가야의 한반도 남부지역과 규슈지역에서 발견된 파형동기(巴形銅器)나 신어문(神魚文)등이 거의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도흠 교수(한양대 국문학과, 한국학연구소장)도 “고대 일본 첫 여왕인 ‘히미코(卑彌呼)’가 가야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두 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3세기 일본 규슈 사마태국은 가야와 같은 2모작을 했고, 철기공방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민들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일본은 한국 역사를 기술하면서 청동기시대 없이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이어진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기 712년과 720년에 잇따라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인이 펴낸 고대 일본역사서에 두 여왕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들이 왜국 토착민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해외 도래인일 가능성이 커 아예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선 비미호와 일여 얘기를 없애고 비미호를 신공황후(神功皇后)로 동일화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20년을 삽입하는 억지를 피우고 있다.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양식있는 학자는 ‘일본서기’를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혹평한다.

일본의 일부 학자는 신공황후를 히미코와 동일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이는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첫째 ‘삼국사기’는 히미코가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일본서기’ 기년으로 신공황후가 정권을 장악한 때는 201년이고, 2갑자 더한 연도로는 321년이라는 점이다.

가야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 대가야 박물관. <김영민 기자>
일본 역사서에 여왕이 없는 이유

둘째, ‘삼국지’는 히미코가 결혼하지 않고 남동생의 보좌로 왕위를 유지했다고 했는데, 신공황후는 제14대 주아이(仲哀) 천황의 황후이며, 그의 아들 오진(應神) 천황을 낳았다.

셋째, 히미코는 공식적인 왜의 왕이고, 239년 중국의 위(魏)에서 내린 조서에도 ‘친위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공황후는 히미코와 동일 인물일 수 없다.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다라국(多羅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졸마국(卒麻國) 걸찬국(乞飡國) 사이기국(斯二岐國) 염례국(稔禮國) 탁순(卓淳) 탁기탄(啄己呑) 등 12개 소국(小國)이름이 비자야왕과 타밀 출신 둘째 부인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 자녀 이름과 일치한다.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e, Taksun, Takkitan이 된다.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한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이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지역을 정복, 통치했다며 ‘일본서기’에서만 언급돼 조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임나(任那)일본부의 ‘임나’, 즉 일본어로 미마나(彌摩那)도 비자야 왕이 수도 탐바판니에서 동부 내륙으로 들어가 개척한 마을 임나(Eemna)와 미마나(Mimana)등 인접한 두 마을의 이름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임나(미마나)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이 아니라 비미호 여왕의 통치 지역 ‘사마태국’ 부근에 있던 것이란 해석이 훨씬 합리적이다. 더구나 한 지역의 명칭을 두고 임나와 미마나 등 두 가지 한자표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비자야 왕이 건설한 인접한 두 마을 이름을 하나로 묶으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면 비자야 왕 설화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산스크리트어로 ‘승리자’를 뜻하는 비자야 왕의 설화는 기원전 6세기 새로운 땅에 세운 정복왕조설화의 원형이라 동남아시아 등에 널리 퍼졌다. 당시 해양로는 동남아시아및 중국을 거쳐 타이완(臺灣) 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면 쉽게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 해안까지 연결될 수 있어 비자야 왕 이야기가 극동아시아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토론토/김정남 통신원 namkimm@hanmail.net>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