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국의 역사와 문화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감정위원

 

1.명칭 유래

안라국(安羅國)은 현재 함안군 일대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국가였다. 옛 문헌에서 안라국에 대한 국명(國名)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로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과 아나가야(阿那加耶)라는 국명으로, 물계자전에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아라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 용어는 가야가 존재했던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아시량(阿尸良)’의 ‘시(尸)’는 옛말의 사이시옷을 표기한 것이므로 아시량은 곧 ‘아ㅅ라’를 표기한 것이며, 이것은 아나, 또는 아라로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시량, 아나, 아라, 안라 등은 모두 ‘아ㅅ라’라는 나라 이름을 뜻하며,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사이시옷은 ‘ㄹ’받침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이 ‘안라’이므로 함안지역 가야국의 국명은 ‘안라’ 또는 ‘안라국’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2.지리적인 위치와 대외무역
 
안라국은 삼한시대 변진(弁辰)의 한 국가인 안야국(安邪國)이 성장 발전하여 성립되었다. 함안군의 지형을 살펴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이다. 남동쪽으로 해발 500~700m 정도의 산들로 창원, 마산, 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 강으로 창녕, 의령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다.

함안군 일대에는 많은 지역에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미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지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평지와 구릉지의 경사면을 개간하여 농경을 하면서 차츰 성장하여 기원 전후시기 안야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안야국은 구야국과 함께 변한제국 중에서는 중국 군현과 교섭하면서 중국에 잘 알려진 유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안야국의 인구는 『삼국지』의 기록에 의거해 보면 4~5천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의 구조는 대개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으로 구성되는데, 안야국의 국읍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변한시대의 널무덤[木棺墓] 유적, 5세기대 이후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가야읍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야국의 정치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농업생산력, 교역에 유리한 조건 등이었다. 즉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을 이용한 계곡 사이의 평야들과 남강, 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야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강을 이용한 교통로 확보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차지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등도 안라국의 성장 기반이었을 것이다.

삼한의 여러 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 및 인근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중국계 유물과 왜계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도 가야읍 사내리에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방제경(小型倣製鏡)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안야국도 인근 변한제국이나 진한 및 마한제국, 한의 군현, 중국, 왜 등과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야국의 대외교역로는 대체로 진동만으로 통하는 교통로와 마산만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해로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안야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자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식량 이외에 철, 수산자원 등이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현재 함안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북광산이 있고, 동광(銅鑛)의 산출지로는 함안광산과 군북광산이 있다. 동광의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야국 당시에도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여 주변지역과 교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안라국 성장기

안야국이 성장하여 안라국이 된 시기는 대체로 변한에서 가야로 변하는 3세기 말 4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즉 이 시기 낙동강 서남부지역은 고고학적 유물, 유적의 양상이 이전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세기 말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의 출현과 딸린덧널[副槨]을 가진 대형덧널무덤(大型木槨墓)의 등장, 4세기대 이후 지배자의 무덤에 나타나는 철소재(鐵素材)의 다량 부장, 철제갑주(鐵製甲冑)의 출현, 철제농기구의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의 현상은 가야사회로의 이행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것은 문헌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말 김해 가락국에서부터 나타난 큰 정치적인 변화가 인근 가야제국으로 파급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완만한 발전을 보이던 안야국도 낙동강하류역의 정치적 변동에 연동하여 안라국으로 재편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대 이후 함안지역에서 김해 가락국뿐만 아니라 신라계 및 왜계 등 외래계 토기문화의 양상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안라국으로의 전환과정에서 보다 넓은 교역망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세기대 이후 안라국의 실재를 잘 보여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이다. 광개토대왕비문 경자년(400) 기록에는 왜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안라인수병(安羅人 戍兵)’이라는 단어가 세 차례 나타나고 있다. ‘안라인수병’을 이해하는 입장은 다양하므로 여기에서의 안라가 함안의 안라국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 여부를 떠나서 당시 안라가 고구려 남정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고구려의 남정을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김해 가락국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본다. 전기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안라국은 가락국, 왜와 공동으로 고구려와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김해 일대에서 펼쳐졌으며 안라국은 국읍을 비롯한 중심부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의 피해는 한결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남정 이후에도 자신의 국력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전기가야연맹에 참여하였던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안라국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안라국의 영역 확대를 보여주는 독자적 토기양식인 불꽃무늬토기[火焰文土器]의 확산에서 증명되고 있다.


안라국의 권역

그렇다면 안라국의 권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사실 안라국의 지방통치체제나 영역 확대를 보여 주는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역이나 국왕의 통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함안지역에 현존하는 성곽의 분포와 고고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대략의 정치권역을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함안분지를 둘러싼 산 위에는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안라국은 인접한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러한 산성의 분포에 따라 안라국의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추정할 수 있다.

안라국의 북쪽에는 낙동강, 남강이 있어 자연적인 방어수단이 되었다. 서쪽에는 방어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 있는 여항산성과 파산봉수는 안라국이 남쪽 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이자 동시에 남해안을 통한 외적을 침입을 대비한 시설물로 보인다.

또 대현관문은 함안군 여항면과 마산시 진북면의 경계지역에 있는데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의 중요한 경계지역이었을 것이다. 동쪽에 있는 포덕산성은 마산疎♧¯ 방면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 북쪽에 있는 성지봉산성, 검단산성, 성산성, 안곡산성, 칠원산성과 연결되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대비한 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로 볼 때 안라국의 권역은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함안군 일대였다.

5세기대 함안의 대표적인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의 분포를 통해서도 안라국의 지배권역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토기가 조사되는 지역은 함안분지내의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외곽지대에는 칠원면 오곡리유적, 마산시 현동유적, 창원시 도계동유적, 의령 예둔리유적, 유곡리고분군, 봉두리고분군, 진북 대평리고분군, 진양 압사리유적 등이다.

분포지역으로 보아 당시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에 두고 서쪽의 진주 일부지역, 북동쪽의 창원 일부지역, 서북쪽의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으로는 마산의 진동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역이 멸망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세기대에 이르면 백제,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로 인하여 권역의 축소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세기대 안라국은 남부 가야제국을 주도해 가면서 동쪽과 서쪽에서 잠식해 들어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군사적 또는 외교적으로 대항하였으며, 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야제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문헌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6세기 안락국 대외관계 문헌
6세기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계체(繼體)·흠명기(欽明紀)에는 가야지역을 둘러싼 주변국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여러 나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모습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많은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철저한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 이 시기 역사 자료들이 대부분 백제삼서(百濟三書)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지만 8세기 일본의 고대 천황주의사관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대체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 내용 가운데 안라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백제가 기문[전북 남원], 대사[경남 하동]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써, 기문을 상실한 가라국은 백제에 대립하여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하였다. 안라국은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가라와 반목하였다. 이러한 가야제국의 갈등을 틈타서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3성을 함락시킨 후 또한 북쪽 경계의 5성을 함락시키면서 차츰 가야지역을 잠식해갔다. 이 시기에 안라는 백제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제2기는 백제가 기문·대사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라가 낙동강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안라의 외교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529년 안라가 주도한 고당회의(高堂會議)-이하 안라회의-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하여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안라는 의도적으로 백제를 배제하였다. 즉 백제가 안라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백제의 대표는 고당에 오르지도 못하였다. 이는 백제가 대사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라지역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대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낮은 관등의 관리를 파견하였으므로 안라회의 자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안라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안라회의가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계속하였다. 백제는 하동에서 함안 사이의 지역에 걸탁성(乞城)을 축조하였고, 신라는 남가라, 탁기탄 지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라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를 이용하여 안라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백제의 안라에 대한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신라와의 외교활동을 주도한 것이 일본부였던 것은 안라가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라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백제의 성왕(成王)은 이미 멸망한 남가라·탁기탄·탁순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안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백제가 계속적으로 가야지역에 군령성주(郡令城主)를 두어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의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라 또한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안라의 외교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548년)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안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는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안라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안라와 백제의 사이가 매우 소원한 관계로 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3기는 안라 주도의 외교적 활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함에 따라 안라가 다시 친백제적인 성향으로 전환했던 시기이다. 안라가 다시 백제와 화친하면서 안라는 백제와 신라가 충돌하였던 관산성전투(554년)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가야의 군대가 2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은 이 전쟁에 국운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에 패배하였고 가야제국은 차례차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관산성전투의 패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관산성전투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하였다. 555년 비사벌(比斯伐,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감문주(甘文州, 김천)를 설치하였으며, 561년에 창녕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라국이 멸망했던 때는 언제쯤일까? 『일본서기』흠명기 22년(561)조에 보이는 “신라가 561년 아라(阿羅) 파사산에 성을 축조하여 일본에 대비했다”는 내용에서 안라국의 멸망을 추정할 수 있다. 아라는 곧 안라국이며, 파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안군 산천(山川)조 및 봉수(烽燧)조에 나오는 ‘파산(巴山)’으로 비정할 수 있다.

파산은 지금의 봉화산으로서 봉수대는 안라국이 해안으로 진출하는 루트인 진동지역과 함안의 경계지역에 있으며, 봉화산 북쪽 최고봉상에 위치하여 남으로 진해만(진동만)과 북쪽으로는 함안 일대를 비롯하여 낙동강과 남강 너머 의령까지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파산은 안라국의 중요전략기지였을 것이므로 이 지역에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안라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었음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일본서기』흠명기 23年(562)조에 “어떤 책에는 21년(560)에 임나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안라의 멸망시기는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라는 가야제국의 중심국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러한 안라국의 멸망을 전하는 기록이 실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안라국의 멸망은 56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라국의 흔적은 현재 함안군 가야읍의 말산리와 도항리에 말이산고분군이라는 대형무덤들로 남아 있다. 이 유적은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말이산34호분(현재 4호분), 말이산5호분(현재 25호분) 등이 발굴조사 된 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도항리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이 2기의 대형무덤은 도항리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함안지역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발굴조사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다가 199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도항리35호분과 그 주변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고인돌 8기와 집자리 1동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도항리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인간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야읍 아파트 공사 중에 발견된 초대형 덧널무덤인 ‘마갑총(馬甲塚)’을 통해 5세기 전·중반 안라국 지배층 고분문화의 성격과 양상 규명 및 안라국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이 고분은 길이 6.9m, 너비 2.8m, 깊이 1.1m의 긴 타원형의 묘광내에 판재상의 목재로 짠 덧널이 설치된 대형의 덧널무덤이다. 유구의 북쪽 벽은 굴착공사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지만, 중앙에 매장된 무덤주인공의 흔적과 그 좌우에 가지런한 상태로 놓인 말갑옷은 그 동안 영남의 각 지역에서 확인된 것에 비하여 부장상태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유구의 명칭을 마갑총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말갑옷 뿐만 아니라 말의 얼굴을 덮어 보호하는 말머리가리개[馬冑]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여러 점의 판상철편도 확인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1992~1996년까지 5차례의 연차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고총고분인 5호분, 8호분, 15호분 등과 널무덤 20여기, 덧널무덤 20여기, 구덩식돌덧널무덤 10여기, 돌방무덤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안라국 지배층의 무덤 변천과정과 당시 안라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97~1998년에는 도항리와 말산리 일대의 도로 확장공사 및 단독주택 신축공사로 인하여 발굴조사가 필요하게 되자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모두 5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널무덤 38기, 독무덤 3기, 덧널무덤 37기, 구덩식돌덧널무덤 4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말산리의 건물 신축공사 도중 발견된 돌덧널 길이 8.65m, 너비 1.65m의 초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에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 시기의 유물들은 구릉의 북쪽에서 출토, 채집되었다. 이 구릉에 원형 봉토분이 발생한 시기는 5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대형 봉토분들은 입지상 좋은 지점에 위치하면서 구릉의 북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조성된 경향을 보이며, 대형분의 사이와 구릉의 사면에는 중·소형분이 분포한다. 유적의 연대는 삼한시대에서 6세기까지이다.

이제 안라국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살펴 보자. 먼저 안라국의 토기에 대해 살펴 보면 대체로 4세기 전반부터 고식도질토기가 생산되었는데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화로모양그릇받침, 손잡이잔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4세기대에 안라국 토기를 대표할 수 있는 工자형굽다리접시는, 전반에는 굽다리가 길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차츰 짧아지면서 5세기대의 불꽃무늬굽다리접시와 그 계통이 연결된다.

5세기대에는 앞 시기의 토기보다 그 형태와 종류가 더 다양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무덤에 부장되는 양도 많아졌다. 이 시기 안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토기는 굽다리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삼각형투창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잔형토기, 종형토기도 제작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류는 그 형태가 조잡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짧아지고, 손잡이가 붙은 것도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령계, 경주계, 창녕계의 토기가 유입되어 안라국 토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라국의 무기를 살펴 보면 공격용무기로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화살촉 및 화살통, 투겁창[鐵鉾] 등이 있고, 방어용무기는 투구와 갑옷 등이 조사되었다. 의례용도구들도 출토되었는데, 덩이쇠, 미늘쇠, 점치는 뼈[卜骨] 등이다. 안라국의 말갖춤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갖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제작·사용되었으며 신라의 말갖춤이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함에 비해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말안장가리개[鞍橋], 발걸이[鐙子], 말띠드리개[杏葉], 재갈[轡] 등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장신구는 주로 유리, 옥, 수정, 마노, 비취 등을 이용하여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으로 이용하였다. 또 생산도구로는 도끼, 낫, 쇠스랑, 괭이, 가래 등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가락바퀴 등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 가운데는 주변의 가야 여러나라, 또는 백제와 신라, 일본 등지에서 제작되어 이 지역의 무덤에 매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계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은 토기가 대부분으로서 굽다리접시, 뚜껑, 항아리 등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5세기 중·후반대에는 창녕의 비사벌, 김해의 남가라계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와 신라, 고령의 가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유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유물들은 각 시대별로 안라국의 대외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안라국의 국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기록인 『함주지(咸州誌)』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가야국의 옛터는 부존정(扶尊亭)의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 기록으로 보아 부존정은 지금의 가야동 쾌안 뒷산(해발 79m)으로 추정된다. 가야동이 안라국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유는 문헌기록도 있지만 초석, 우물, 토축흔적 등의 고고학적 유적과 더불어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된 봉산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도읍지가 대부분 2중성의 구조로 된 것과 일치한다.

또한 주변 여러 지역에서 신읍(臣邑, 신하들의 생활주거지), 선왕동(先旺洞, 은퇴한 노왕이나 안라국 멸망 이후 왕족이 모여 살던 곳), 궁뒤(왕궁지의 뒤편) 등과 같은 왕궁지와 관련된 지명이 전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지명이긴 하지만 옛 안라국의 영화를 알려주는 왕궁을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서동설화

삼국유사의 백제 서동설화는 동성대왕의 익산천도와 관련된 것으로 5세기말인데 그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7세기 무왕대의 것이라는 설이 아직도 통하고 있는 것 같다. 삼국유사 기이2 무왕조의 설화는 아래와 같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과부[寡]로서 경(京)의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통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산마[薯여]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때문에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일명 善化)가 아름답기 비할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의 뭇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뭇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라고 불렀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 대궐 안까지 들리자 백관들이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어 곧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지에 이를 때쯤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곁에서 지키며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비록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짝으로 믿고 기뻐했다. 이리하여 같이 가면서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노래가 맞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놓고 살아갈 계획을 의논하려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게 무슨 물건이오"라고 하자 공주가 "이건 황금인데 백년 동안 부를 누릴 것이오"라고 답하자 서동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땅에 흙더미처럼 쌓아 두었소"라고 했다. 공주는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이니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알면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실어보내면 어떻겠소"라고 하자 서동이 "좋소"라고 했다. 그래서 금을 모아 산더미[丘陵]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실어보낼 계책을 물어보니 법사가 "내가 신력(神力)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지고 오시오"라고 했다. 공주가 글을 적어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실어보내자 진평왕은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기를 "모름지기 이 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굳은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라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많은[百] 장인[工]을 보내 도왔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절이 있다[三國史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여기선 과부[獨女]의 아들이라 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실사적인 해석

달라진 왕통

「과부의 아들」이라 한 것은 기존의 왕통과는 다른 왕통이라는 뜻이다. 무왕이라고 나오는 인물은 무왕이 아니라 동성대왕이고 가야왕족이다. 기존의 백제 부여씨와는 다른 김씨인 것이다. 과부라고 표현한 것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이고 백제 부여씨가 아니라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이것도 유사저자가 실사를 알았다는 근거가 된다. 단순히 설화를 채록한 것이 아니고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의도적으로 설화를 지어 넣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서기 무열기 7년 4월조에 무령왕이 아들 사아군을 열도에 후왕으로 보내면서 「먼저 조공사로 간 마나군은 백제국주의 골족이 아닙니다[前進調使麻那君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마나군은 먼저 후왕으로 있던 동성대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2월조에는 열도에 후왕으로 간 동성대왕의 아들 둘이 교대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다. 東城子가 글자 그대로 동성대왕의 아들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에 백제신찬이란 사서를 들먹이며 인용해놓은 동성대왕 암살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暴虐]한 짓을 하였다. 드디어 국인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다.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斯摩王이다.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곤지가 왜로 가다가 축자도에 이르렀을 때 사마왕을 낳았다...(중략)...지금 생각해보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백제신찬'이란 사서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동성대왕이 부여씨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말을 빙빙 돌려서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부여씨라면 이렇게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무령왕의 휘를 '사마왕'이라 했다는 것은 이 휘가 6세기 당대의 휘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사마라는 휘는 서기저자들이 지은 무령왕출생설화에서 島君>島王이란 별명을 이두식으로 바꾼 것이고 휘를 단순히 '사마'라고 하지 않고 '사마왕'이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이 휘가 분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휘에 '王'자를 붙이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서기 웅략기 23년(서기 531년) 4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백제 문근왕이 훙했다. 천왕은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젊고 총명하여 불러들여 친히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시켰다. 그리하여 병기를 주고 축자국의 군사 5백인을 딸려 호위시켜 나라에 보냈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 이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 마사신 등이 수군을 이끌고 고려를 쳤다』

문근왕=(문주왕+삼근왕)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재위기간이 합쳐도 5년밖에 안되니 짧다고 합성이름을 쓴 것인지 아니면 "문주왕의 아들 근왕"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斤은 近과 같아 '큰 大'의 이두로 보면 문주의 장남으로 보인다.

곤지왕은 부여씨가 아니고 가야왕족 대반씨다. 쯔꾸시[築紫]는 구주로서 가야인들의 기반이 확고한 곳이다. 고대에는 구주가 가야땅이었던 것이다. 동성대왕은 그곳의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말다왕이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칙하여 궁중에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일러 그 나라의 왕으로 하였다」라는 것은 웅략이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므로 그 형의 증손자를 기특해한 것이다.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하내국제번)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하내국제번)    

비유왕의 아들 곤기왕이 곤지왕이며 사기 문주기 3년조의 내신좌평 昆支와 동일인물이다. 말다왕은 동성대왕의 별칭이며 말다는 가야왕족들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 중의 하나다.  
                          
군사수 500인은 대폭 줄인 것이다. 열도에서 500명으로 백제에 와서 쿠데타에 성공할 수 없다. 열도를 이미 장악하고 반도로 왔기 때문에 상당한 대군이 왔을 것으로 본다. 최소 1만 명 이상의 가야계 정예철갑기병 정도라야 쿠데타가 가능하다고 본다. 쿠데타군이 기병이라는 것은 기동성이 뛰어나지 않으면 전격적인 작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응신과 아신의 밀약에 의한 백제·왜의 분립관계가 깨지고 통합왕국을 열었던 것이다. 이때가 기원 이후만 보면 우리민족 사상 초유의 대제국을 이룬 순간인 것이다. 대륙의 두 백제군과 열도와 백제본국을 합친 것이다. 당대 아시아의 최강자로서 어쩌면 당시 동서양을 통털어 제일의 대제국이었을 수도 있다.  

「이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라고 하는 것도 우회표현이다. 가야왕족이지만 백제왕이 되자 백제왕족들이 전부 도리 없이 복종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명기에서 신수도를 건설하는데 건설본부장인 大匠을 왕인(=귀수대왕)의 후손인 서직현(書直縣)이 하고 있는 것, '남제서' 백제전에서 보다시피 대륙백제군에 발령낸 태수들 명단에 보면 백제왕족 夫餘氏들이 다수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성대왕은 열도출신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라는 것이 열도출신임을 은유한 것이다. 무령왕출생설화에 나오다시피 곤지왕의 중자로서 열도의 대화왕조 출신이다. 「남쪽 못 가」가 열도를 가리키고 경(京)이 백제를 가리킨다. 축소비유한 것이다.

동성대왕은 가야왕족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는 것은 출신성분이 왕족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성대왕은 가야의 아라사등의 고손자이자 아라사등의 장남인 예진별명의 증손자다. 용은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야왕족을 해신(=龍)이라고도 하므로 가야왕족이라는 의미다. 성씨록에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가나[任那]국주'로서 성씨록에서 유일하게 '용 龍'자가 들어간 용주왕이 나온다. 또 용은 해신으로서 신대기부터 이자나기노미꼬또[伊장諾尊]가 물에서 몸을 씻고 낳은 아이가 와다쯔미[少童]로 나오고 같은 발음으로 와다쯔미[綿積]라고 성씨록에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安曇連; 綿積神命兒 穗高見命之後也(하내국지기)
安曇宿니; 海神綿積豊玉彦神子 穗高見命之後也(우경지기)    

출신성분 분류에서 神別 중에 유일하게 지기(地祇)는 아라사등의 삼자로서 대화왕조 2대왕인 진언밖에 없다. 아즈미[安曇]도 아즈마[東]와 같은 '아침'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고어로서 가라의 이칭 신라의 新이기도 하고 성씨 김(金)이기도 하고 新羅와 金城은 같은 뜻이므로 금(金)이기도 한 것이다. 가야왕족인 것이다. 분명히 해신 와다쯔미[綿積]라고 나온다. 서양신화의 포세이돈이나 넵튠 같은 해신이다.            

벽田首; 出自任那國主都奴加阿羅지등也(대화국제번) (지등=志, 等)   

쯔누가아라시또[都奴加阿羅지등]가 아라가야왕 아라시또[阿羅斯等]이자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인 것이다. '가나[任那]국주'다. 위의 성씨록 '대반조'조의 나온 '사이[佐利]'왕이 바로 이 인물들의 성씨가 김씨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ㅅ+아래아)이>(사이, 소이)>새[新], 쇠[金]가 되고 새[新]도 新羅가 金城이므로 결국은 금(金)과 김(金)은 같은 것이다. 이것도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음운현상을 보면 원래가 같은 것이다.  

절세의 영걸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라는 말은 위의 서기 인용기사에 나오는 그대로다. 실사적으로도 절세의 영걸로 분석된다. '남제서'나 '자치통감' 같은 대륙측 기록을 보더라도 북위의 수십 만 대군을 연전연파할 정도로 당대 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최고의 영웅이었다. 서기 무열전기 11월조에도 「希世之雄」 > "희세의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마[薯여]는 실사와의 연결고리

「산마[薯여]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는 말은 설화상에서 중요한 키워드이자 실사와의 연결고리다. 이것은 서기에도 키워드로 나온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그 손으로) 마[暑預]를 캐게 했다」라고 나온다. 열도어로 이모[暑預]는 이모[薯]와 같다. '이모'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쟈가이모(=감자), 사쯔마이모(=고구마), 이모(=마) 등이다. 이 기사는 서기저자들이 폄하한 위사로서 이런 일은 없었다고 본다. 다만 기사 속에 이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키워드로 심어놓은 것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마동[薯童]이 나온 것이다. 이 서동의 '이모[薯]'는 같은 발음의 '이모[妹]'로 동성대왕의 왕권장악을 은유한 설화가 서기 인덕전기에도 나온다. 대화왕조에서 왕을 배출한 아라사등의 세 아들집안을 비유한 설화인데 「본변은 기미[君]를 생각하고 말변은 이모[妹]를 생각한다」라고 나오는데 기미[君]는 초대왜왕인 응신을 가리키고 이모[妹]는 아라사등의 장자 예진의 증손자인 동성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이모[妹]'가 열도어로 음도 같은 무열기의 '이모[暑預]'이자 서동설화의 '이모[薯여]'이며 서동의 '이모[薯]'인 것이다. 이 모두가 치밀한 기획, 각본에 의한 작품들인 것이다.  

일연이 마동[薯童]이란 이름을 설화에 지어 넣은 것도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의 기사를 보고 주인공 이름을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의 하나로 변조하여 이름을 짓고 설화를 꾸민 것인데 이런 실사를 다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려시대만 해도 고려인들은 고대사의 실상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다. 이런 것을 보면 사서에 실린 신화·설화들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단순히 채록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설화를 보고 '이야기꾼'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만들어 설명하는 것은, 현대의 학자들이 고대인의 발상이나 실사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 참조  

신라왕은 소지왕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라고 했는데 동성대왕 재위시의 신라왕은 진평왕이 아니고 소지왕이다. 소지왕의 딸과 결혼한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사기에는 동성대왕이 신라왕족인 이찬 비지(比智)의 딸과 결혼했다고 나오는데 소지왕의 이칭을 비처(毗處)라고 하여 비지와 음이 거의 같고 소지왕의 왕비이름이 선혜(善兮)부인이라고 하여 공주이름 선화와 흡사하다.          

설화 속의 선화, 비지 등 이런 이름들은 삼국사기의 선혜, 비처 등의 이름들을 일연이 보고서 연결고리로 삼아 지어 붙인 것이다. 이 역시 설화는 자연발생이 아니라 사서저자들이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작위적으로 신화나 설화로 꾸며 실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외교에도 능란

「경(京)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고 친해졌다」는 것은 외교에 능하고 신라에 도움을 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정도라는 말이다. 또 '남제서'를 보더라도 군사, 외교적으로 탁월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겠다. 이런 외교도 역시 힘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京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앞의 京은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서동요는 제라동맹 협상을 의미

여기 나오는 서동요 자체는 설화 속의 일부분이다. 풀이하자면 「선화공주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라는 구절에서 신라와 백제가 제라동맹을 위한 "협상을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정도로 풀 수 있다. 그 전까지 신라는 광개토대왕 이래로 고구려에 신속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신라가 백제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고구려에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비밀리에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혼인의 의미

기·기상에서 볼 때 여자를 대부분의 경우 영토를 은유하고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은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이 경우는 실사로 보인다. 만약에 영토에 대한 통치권으로 은유하여 썼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신라가 그 전 90년 간 고구려에 대해 했던 것처럼 백제에 신속(臣屬)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나 그 당시의 백제의 능력으로 볼 때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근거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일단은 백제가 우위를 가진 동맹관계로 보인다.      

제라동맹성립

백관들이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는 것은 백제의 동성대왕이 신라를 회유했을 테고 신라의 백관들은 처음엔 백제와의 화친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구려와 화친하고 백제는 멀리하자는 등의 정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점은 고구려 장수왕 말기다. 결국은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동맹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사기는 부여를 말갈이라고 비칭

그런데 동성대왕 즉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동맹관계가 이루어진 증거가 사기 소지기 3년조에 나오는데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이 있을 때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 「...우리 군이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았다. 적은 패하여 물러났다...」라고 하였는데 사기의 이 말갈기사는 당시의 판도를 볼 때 반도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 서북의 고구려를 상정하면 동북 즉 지금의 함경도지역 외에는 달리 상정할 데가 없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동부여의 후예로서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여진이라 불린 세력이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이들의 조상들에게 시대를 소급해서 말갈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지 고구려가 지금의 함경도지역에 있는 말갈과 연합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반도의 북부 중앙을 척추처럼 남북으로 세로지른 험한 산맥을 넘어 무슨 연합을 하고 할 것이 있겠는가. 고려인들이 의도적으로 꾸민 것으로 보인다.

제라동맹에 가야군 등장

특이하게도 가야의 구원병이 나오는 것도 역시 동성대왕의 군대인 것이다. 백제왕권을 장악하러 데리고 들어갔던 열도의 가야계 정예병으로 구성된 친위대거나 가야본토의 병력일 것이다. 이 내용이 위에 인용한 웅략기 23년 시세조의 「축자의 안치신(安致臣)과 마사신(馬飼臣)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라는 내용과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바로 대응되는 것이다.            

소지왕과의 묘한 인연

동성대왕과 소지왕은 특이하게도 즉위연도가 같다. 몰년도 1년 차이다. 묘한 인연이다. 동성대왕 즉위 서기 479년, 무령왕에게 암살 당한 것이 501년이다. 소지왕은 즉위 서기 479년, 몰년이 500년이다.

고구려에 본때를 보이다

구주의 군사가 고구려를 쳤다는 것은 4세기말 이후 약 90년 간 백제는 영락대왕과 장수왕에게 자주 시달렸기 때문에 동성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구주의 가야계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때를 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서기기록상 웅략 23년이 동성왕 원년으로 되어있고 사기에는 소지왕 3년으로 나와 기록이 2년 차이가 있지만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

가야군이 주도

안치신의 아나[安]는 가야인임을 암시하고 아라가야장수다. 마사신은 말먹이는 사람이 아니고 막강한 가야의 기병대장이다.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전기에 보면 대반장덕련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가야왕족의 성씨인 대반씨에 字가 馬飼라고 나온다. 역시 가야인이고 기병대장이다. 長德이란 장자집안 인물이라는 뜻이고 동성대왕의 증조부인 예진별명이 장자였으므로 동성대왕의 집안인물인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흠명기 4년 12월조에 보면 집안인물 중에 東城道天이란 이름도 보인다.  

돈독한 제라동맹

사기 소지기 3년, 6년, 16년, 17년조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군을 막아내고 있다. 돈독한 제라동맹이다. 이런 경우는 사국시대에 이 때 뿐이었다. 이런 것도 동성대왕이 명군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야가 확 트인 영웅이었다.



공주가 가지고 온 금은 한 말이지만 서동의 금은 산더미[丘陵] 같았다는 말도 신라가 제라동맹으로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는 말이다. 가야가 장악하고 있는 열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한 것이다. 제라동맹으로 인한 양국의 "동맹의 이점"을 은유한 것이다.

백제불교 초전은 신라에서

용화산의 사자사 지명법사가 나오는데 백제에 침류왕대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동성대왕 불교기사는 사실로 보이고 동성대왕대에 경주신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본다. 동성대왕은 불교와 유달리 관련이 많다.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은 사기기록에 따르면 동성대왕 15년이므로 서기로 493년 정도다. 이후에 익산에 새로 수도를 건설하면서 신라의 지원을 받아 미륵사를 지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의 침류왕 불교도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서기에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기 대화5년 3월조에 침류왕이 진사군과 가야군에 협공 당하여 자결하는 장면에서 절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내용이 위사임을 알고서도 옮겨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저자들이 만든 분식명을 가려보았다는 것은 일본고대사서의 이면실사를 다 파악했다는 뜻이다. 이 기사에서 침류와 진사는 일인다역인데 효덕천황·소아창산전대신·이리도덕 등은 침류왕이고, 소아일향신(=身刺)·물부이전조염은 진사왕이고, 황태자(=천지)·대반박련·삼국공마려·수적교신·목신마려 등은 가야측이다.        

"해를 향하여[日向]"란 뜻을 가진 진사왕의 이칭은 "왕[日]을 바라보고 살아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데 말을 바꾸면 진사왕은 원래 왕위계승서열에서 벗어난 인물이란 뜻이다. 또 이복형인 침류왕의 시신을 팔단을 냈다고 하여 이름을 지어도 "몸을 베다[身刺]"라고 짓고 있는 것이다. 물부는 초고대왕을 조로 하는 성씨이고 二田이란 나라를 둘로 만든 인물이란 뜻으로 붙인 것이다. 진사왕 때문에 대화왕조가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유사 흥법 아도기라편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있어 시자 세 사람과 더불어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 해를 살다가 병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종종 신봉하는 사람이 생겼다[주에 이르기를 "본비와 여러 전기와는 사실이 다르다"라고 했다. 또 '고승전'에는 "서축인이다"라고 했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라고 했다]. 아도본비를 상고해 보면 아도는 고려사람이다...』

고려는 고구려고 서축은 인도를 이른다. 그런데 유사 흥법 순도조려편에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고구려에 건너온 것은 서기 374년으로 되어있다. 동성대왕의 혼인시점과 시차가 정확히 햇수로 120년이나 벌어진다. 전혀 다른 인물이다. 분명히 비처왕은 소지왕의 이칭인데 위의 유사이야기는 신라가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것이 와전되었거나 왜곡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본비와 여러 전기의 내용이 다르다고 한 것도 이상하다. 다르다는 내용 자체는 기록하지 않고 다르다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吳나라라는 말도 사기에 나오는 마라난타의 동진(東晉)을 의식하여 쓴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기사 때문에 실사를 그대로 기록하지는 못하고 빙빙 돌려서 알아보기 어렵게 기록한 것이다.  

백제 우위의 동맹

진평왕이 서동을 존경하고 항상 안부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동성대왕의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보다는 백제가 역시 월등히 우위였던 것이다.

설화 속의 설화

왕이 어느 날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려다가 용화산 밑 큰 못 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절을 하고 왕비가 그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하자 세운 것이 미륵사다. 이 이야기는 설화 속의 또 하나의 설화다.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 이 회전과 낭무는 유적발굴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경우도 또 우리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기록은 정확한데 해석을 잘못하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익산의 웅포, 왕궁리 유적은 7세기 무왕의 유적이 아니다. 이것은 동성대왕이 5세기말에 신라의 도움으로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설화로 꾸민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흠명기 6년 9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이 달 백제가 장육(丈六)의 불상을 만들었다. 원문(願文)을 지어 이르기를 "듣건대 장육의 불상을 만들면 공덕이 심대하다. 지금 삼가 만들었다. 이 공덕으로 원컨대 천황이 훌륭한 덕을 얻어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가 모두 복과 도움을 얻을 지어다. 또 원컨대 천하의 일체중생이 다 해탈을 얻을 지어다. 그래서 만들었노라"』

이 기사도 동성대왕의 미륵사와 관련한 내용을 달리 처리한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가 8년으로 끝나고 있고 흠명기 6년조에 위의 내용이 나오므로 단순히 봐도 동성대왕 14년 정도면 서기 492년 정도로 시기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불상은 백제가 만들었는데 원문에 천황의 덕을 칭송하고 복을 빌고 있으니 흠명천황이 사실은 백제왕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열도에 불교전파

일본의 불교초전은 백제가 5세기말 동성대왕대에 신라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무령왕을 거쳐 성왕대에 당시 백제의 후국이던 열도에 전해준 것으로 본다. 백제가 신라로부터 받아들인 지 수십 년 후라면 시간적으로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일본서기에도 흠명기 13년 10월조에 「百濟聖明王 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別表 讚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諸法中 最爲殊勝 難解難入 周公·孔子 尙不能知 此法能生無量無邊福德果報..........」라고 나와 이것이 실사로 판단된다. 연대는, 흠명 13년이라면 서기로 551년이지만 실사상으로는 성왕이 즉위한 서기 523년부터 약 10년쯤 지난 530년대부터 550년대 정도로 추정된다.          

※ 백제 서동설화는 위와 같이 열도출신인 가야계 동성대왕의 1. 익산천도, 2. 제라동맹, 3. 경주신라로부터의 백제불교초전 등을 설화와 노래로 꾸민 것이다. 사서의 기록도 아직 제대로 해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사의 잘못된 기록을 믿고 7세기 무왕이 남긴 유적, 유물이라고 믿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http://blog.daum.net/kyrie0803


[출처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가야에 속하는 국가

《삼국지》의 변진12국(弁辰十二國),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접도국(接塗國) ·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 고순시국(古淳是國) · 반로국(半路國, 혹은 半跛國) · 악노국(樂奴國) · 군미국(軍彌國) ·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 감로국(甘路國) · 구야국(狗邪國) · 주조마국(走漕馬國) · 안야국(安邪國) · 독로국(瀆盧國) 등

 

《삼국유사》의 5가야조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 대가야(大伽耶) · 성산가야(星山伽耶) · 소가야(小伽耶) · 금관가야(金官伽耶) · 비화가야(非火伽耶) 등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가야 · 금관국 · 아시라국(阿尸良國) · 대가야국(大加耶國) 등


《일본서기》
남가라(南加羅) · 탁순(卓淳) · 탁기탄(啄己呑)과 멸망 당시의 이른바

임나십국(任那十國)인 가라국(加羅國) · 안라국(安羅國) · 사이기국(斯二岐國) · 다라국(多羅國) · 졸마국(卒麻國) · 고차국(古嵯國) · 자타국(子他國) · 산반하국(散半下國) · 걸찬국(乞飡國) · 염례국(稔禮國) 등

 

그 중에서 지명고증이 대개 일치하는 것은

 

김해(狗邪國 · 金官伽耶 · 金官國 · 南加羅) ·

함안(安邪國 · 阿羅伽耶 · 阿尸良國 · 安羅國) ·

고성(古資彌凍國 · 小伽耶 · 古嵯國) ·

합천(多羅國) ·

고령(大伽耶 · 大加耶國 · 加羅國)

가락국사 연표

가야사 연표

연대
시대구분
가락국의 역사
관련자료
한국사
가야사
문헌
유적
유물
기원전
25∼10세기
신석기 시대

단군조선
가야 전사 최초의 김해인 김해지역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무 리를 이루어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조개무지
장유수가리
덧띠문토기
빗살무늬토기
뼈낚시바늘
기원전
10∼1세기
청동기시대

고조선 B.C108년
고조선멸 망,한사 군설치
구간사회(九干社會) 김해지역이 가락구촌(駕洛九村)으로 나뉘어 구간이라는 촌장에 의해 영 도되고, 연합하기도 하였던 부족연합 단계의 사회생활을 하였다   고인돌
구산동구지봉
장유면무계리
주촌면양동리
대동면감내리
상동면우계리
진영읍본산리
독무덤
회현리조개무지
돌널무덤
회현리조개무지
좁은놋단검
대롱옥
구슬옥
간돌검
간돌촉
붉은간토기
민무늬토 기
기원전
2 ∼기원후 1 세 기
삼국건국
B.C57년 신라,
B.C37년 고구려,
B.C18년 백제
37년 고구려 낙랑축출
57년 신라 탈해즉위
85년 점제현신 사비
전기가야 가락국의 성립 - 小國 42년 수로왕(首露王)이 구지봉에 등 장하여 가락국을 세웠다 43년 수로왕이 신답평에 도읍을 정 하고, 왕궁을 세웠다
44년 수로왕이 왕위를 빼앗으러 온 탈해(脫解)를 계림으로 쫓아냈다 48년 수로왕 아유타국 공주 허왕옥 (許黃玉)을 맞아들여 혼인하였다

77년 아찬(阿 ) 길문(吉門)의 신라 군과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94년 신라의 마두성(馬頭城)을 공격 하였다 96년 신라의 남경을 침략하여 가성 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살해하였다 97년 신라에게 사죄하였다
삼국지
삼국유사

널무덤 구지로12호분 내덕리19호분 양동리17호분 양동리427호분





봉황대유적

와질토기
철제관(鐵 製冠)
가야식동 검
가야식본 뜬거울
중국식청
동거울




집터
삼국사기
1 ∼ 3세기
101년 신라 월 성축조 111년 부여 낙 랑공격 157년 신라 세 오녀도 일 173년 신라 왜 외교 194년 고구려 을파소 진대법 실시 205년 위 대방 군설치 214년 백제 신 라 전쟁 전기가야 가락국의 성장 - 大國 102년 수로왕은 신라의 요청에 따라 신 라에 가 음즙벌국(안강)과 실직곡국(삼 척)의 영토분쟁을 조정해주고, 신라 육 부(六部)의 하나 한기부(漢祇部) 촌장 보제(保齊)를 죽이고 귀국하였다 106년 신라 마두성주를 시켜 가야를 침 략하였다 115년 2월에 신라의 남경을 공격하고, 7 월에 신라 지마왕의 침입을 황산하(黃山 河)에서 격퇴하였다 116년 신라 정병 1만의 침입을 물리쳤다 189년 허왕후가 157세로 돌아갔다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고, 제2 대 거등왕(居登王)이 즉위하였다 201년 가야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209년 포상팔국이 연합하여 가락국을 공 격하자 신라에 왕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 하였다. 신라는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 음을 보내 포상팔국군을 격퇴하였다. 212년 골포(骨浦, 마산)·칠포(柒浦, 칠 원)·고사포(古史浦, 고성)의 3국이 신라 의 갈화성(竭火城, 울산)을 공략하였다 3세기 가락국은 고대동아시아의 유일한 중개무역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해상왕국이었다 3세기 가락국은 생산시스템을 갖추고 대 방군과 일본에까지 철을 수출하는 철의 왕국이었다 삼 국 지


삼국사기

토광목곽묘
대성동27호분
대성동53호분
양동162호분
허왕후릉
수로왕릉
마을유적
봉황대유적





부원동유적

토광목곽묘

대성동45호분

철촉
철검
철부
소뿔 잡이단지
유리옥목걸 이 판상철부 철정 철검
오르도스형
철솥 따비 재갈
본뜬거울
구슬옥목걸 이
중국식청동
거울
환호
송풍관 이동식
부뚜 막
점치는뼈
고정식부뚜막
노형토기
철창
철촉
고리큰칼
옥꾸미개
보습 따비
막대모양철부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 국 지
3세기
233년 신라왜에 대승 246년 위 관구검 고 구려 침략
전기가야
212년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었다 253년 거등왕이 돌아가고, 제3대 마품 왕(麻品王)이 즉위하였다 291년 마품왕이 돌아가고, 제4대 거질 미왕(居叱彌王)이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대성동29호 양동235호 금동관편
노형기대
두귀단지
오르도스형 청동솥 고리큰칼
수정목걸이 철정
삼국유사
4∼ 5 세기
304년 백제낙랑 공격 307년 신라 국호 사용 313·4년 고구려 낙 랑·대방축 출 346년 백제 근초고왕 즉위 399년 신라 고구려에 구원요청
가야사의 전 환 기
가락국의 쇠퇴 313·4년 고구려가 낙랑·대방군을 축출하여, 가락국에 들어오던 중국 선 진문물의 수입이 단절되었다 346년 거질미왕이 돌아가고, 제5대 이 시품왕(伊尸品王)이 즉위하였다 400년 고구려광개토왕이 보낸 보병 기병 5만이 임나가라(任那加羅)종발성 (從拔城)에 이르자 항복하고, 안라(安 羅, 함안)가 대항하였다 삼국지사 기 덧널무덤
대성동13호
대성동10·18호 대성동1·2·3·23호 구덩식돌방무덤 대성동42호
대성동Ⅱ16호
예안리고분군
노형기대
바람개비모
양청동기
몽고발모양 투구
비늘갑옷
통모양청동기
굽다리접시
사발모양기대
철기류
편두 (두개골 성형)
유사
광개 토 왕 릉 비
5C
414년 광개토왕비 건립 424년 고구 려 신라 외 교 449년 중원 고구려비 475년 백제 개로왕패사 웅진천도 493년 신라 백제 결혼 동맹 494년 부여 고구려에 투항
후기가야
407년 이시품왕이 돌아가고, 제6대 좌지왕(坐知王)이 즉위하였다 421년 좌지왕이 돌아가고, 제7대 취희 왕(吹希王)이 즉위하였다 451년 취희왕이 돌아가고, 제8대 질지 왕이 즉위하였다 452년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 기위해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 479년 대가야왕이 중국 남제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다 대가야의 우륵이 가야금12곡을 작곡 하였다 481년 가야·백제·신라연합군 고구 려격퇴 492년 질지왕이 돌아가고, 제9대 겸지 왕(鉗知王)이 즉위하였다 496년 가야가 꼬리가 다섯 자 되는 흰꿩을 신라에 보냈다 삼국유사 토광목곽묘 대성동1호 대성동7호 명월사 흥국사 부산강서지사동 구덩식돌방무덤 대성Ⅰ3·4호 굽다리접시
발형기대
마주 행엽 등자
철정 통형동기
컵형토기 판갑
금동삼존불 대도
은귀걸이
사 기
삼국유사
6∼ 7C

503년 신라 왕호 제정 513년 백제 일본에 오경 박사 파견 520년 신라 율령반포 525년 무녕 왕릉 538년 백제 일본에 불교 전파 551년 단양 적성비 553년 신라 한강유역확 보 554년 백제 신라 관산성 전투 성왕전 사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 비

후기가야
521년 겸지왕이 돌아가고,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이 즉위하였다 522년 대가야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 가락국의 멸망 524년 신라 법흥왕이 남쪽 의 변경을 순행할 때 가야 왕이 가서 만났다 532년 구해(형)왕이 왕비와 노종(奴宗)·무덕(武德)·무 력(武力)의 세 왕자를 데리 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신라 는 이들을 진골(眞骨)로 편 입시키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해 주었다 551년 대가야 우륵이 신라 에 투항하였다 554년 가라가 관산성전투에 참전하였다 561년 안라국(함안) 멸망 562년 대가야(고령) 멸망 삼국사기삼국유사 일본서기 굴식돌방무덤
구산동고분군
구산동유적
유하리전왕릉
산청전구형왕릉
신라식토기
신라토기
가마
도장무늬토기
금동장식


가야사 연표

(『삼국사기』,『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관련 기사에 의거)

42년
3월, 금관국 수로왕 즉위하여 가락국(금관국) 건국.(유사)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 (伊珍阿?王·
일명 惱窒朱日)이 즉위하여 대가야국 건국.(승람)

43년
금관국 수로왕, 신답평(新畓平)에 도읍을 정함.(유사)

44년
금관국, 궁궐과 관사를 낙성함. 수로왕, 신궁으로 옮겨 정무를 봄. 탈해(탈해)가 나타나 왕위를 쟁탈하려 하자 수로가 싸워 계림(鷄林)으로 쫓아냄.(유사)

48년
아유타국(阿鍮陀國)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금관국에 오자 수로왕이 그녀와 혼인함.(유 사) 금관국, 9간(干)의 명칭을 고침.(유사)

77년
가야, 신라의 아찬(阿?) 길문(吉門)의 공격을 받아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웠으나 1천여명이 사로잡힘.(사기)

87년
7월,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여 가소(加召), 마두(馬頭)의 두 성을 쌓음.(사기)

94년
2월, 가야, 신라의 마두성을 에워쌌으나 아찬 길원(吉元)의 공격을 받아 물러남.(사기)

96년
9월,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였으나 신라 파사왕이 보낸 5천 병력과 싸워 패배함.(사기)

97년
정월, 가야, 신라 파사왕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 하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함.(사기)

102년
8월, 금관국 수로왕,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역 싸움을 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아 해결에 참여하여 문제된 땅을 음즙벌국의 것으로 판정함. 이때 신라 파사왕이 수로왕을 대접. 5부에서는 이찬(伊?)을 파견하였으나 오직 한기부(漢 祇部)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내자 화가 난 수로왕이 한기부주(漢祇部主) 보제(保齊) 를 죽이고 귀국함.(사기)

106년
8월, 신라 파사왕이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게 함.(사기)

115년
2월,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함.(사기) 7월, 가야, 신라 지마왕(祗摩王)이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 공격해 오자 그를 물리침.(사기)

116년
8월, 가야, 정병 1만으로 구성된 신라의 공격을 받자 성을 굳게 지킴. 때마침 비가 오 래도록 내려 신라병이 물러남.(사기)

189년
3월, 금관국 허황후, 157세로 사망.(유사)

199년
3월, 금관국 수로왕, 158세로 사망하고 세조(世祖) 거등왕(居登王)이 즉위.(유사)

201년
2월, 가야,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사기)

209년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는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함. 신라 나해왕(奈解王)이 태자 우로(太子 于老)와 이벌찬(伊伐 ?) 이음(利音)을 보내어 가라를 구원하여 8국을 항복시킴.(사기) *유사에는 212년 포상8국이 아라(阿羅)를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212년
골포(骨浦), 칠포(漆浦), 고사포(古史浦)등 3국인이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침공하였 으나 패퇴함.(사기) *유사에는 215년의 일로 되어 있다. 3월, 가야, 신라에 왕자를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함.(사기)

253년
금관국 거등왕이 사망하고, 마품왕(麻品王) 즉위.(유사)

291년
금관국 마품왕이 사망하고, 거질미왕(居叱彌王) 즉위.(유사)

346년
금관국 거질미왕이 사망하고, 이시품왕(伊尸品王) 즉위.(유사)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보낸 병력이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항복. 안라인(安羅人)으로 구성된 수병(수병)은 그에 저항.(광개토대왕릉비)

407년
금관국 이시품왕이 사망하고, 좌지왕(坐知王)이 즉위.(유사)

421년
금관국 좌지왕이 사망하고, 취희왕(吹希王)이 즉위.(유사)

451년
금관국 취희왕이 사망하고, 질지왕(?知王)이 즉위.(유사)

452년
금관국,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를 세움.(유사)

479년
가락국왕 하지(荷知)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 王)에 제수됨.(남제서)

481년
3월, 가야,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미질부성(彌秩夫城)등을 침공하자 백제와 연합하 여 신라를 구원함.(사기)

492년
금관국 질지왕이 사망하고 겸지왕(鉗知王)이 즉위.(유사)

496년
2월, 가야, 꼬리가 다섯자 되는 백치(白雉)를 신라에 보냄.(사기)

521년
금관국 겸지와이 사망하고, 구형왕(仇衡王)이 즉위.(유사)

522년
3월,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니 신라에서는 이 찬 비조부(比助夫) 딸을 보냄. 그들 사이에 월광태자(月光太子)가 탄생.(사기, 승람)

524년
9월 가야국왕, 신라 법흥왕이 남쪽 국경으로 순행하여 땅을 넓혀 오자 가서 만남.(사 기)

532년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 왕비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 신라는 그들을 진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 (食邑)으로 삼게 함.(사기, 유사) *『일본서기(일본서기)』에는 구체적인 연월일이 명시되지 않은 채 남가라의 멸망 기사가 여러 곳에 보인다.

551년
3월,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낭성(娘城)에 행차하였을 때 국원(國原)에 있던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樂師 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이文)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함.(사 기)*『일본서기』에는 이 해에 백제의 주도 아래 신라와 임나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것으로 되어있다.

552년
신라의 진흥왕이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3인으로 하여금 우륵에게 음 악을 배우게 함.(사기)

554년
가량(加良), 백제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다가 대패 당함.(사기) *『일본서기』에도 비슷한 내용의 자세한 기사가 실려 있다.

562년
가야가 반란하므로, 이사부(異斯夫)가 거느린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함. 그곳에 대가야군(大加耶郡)이 두어짐.(사기)*『일본서기』에는 같은 해 6월에 임나10국이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음.



출전 :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http://todori.inje.ac.kr/~kaya/main.htm

가야의 개국설화에 대한 검토*

백 승 충**

머리말

1. 김해 가락국(駕洛國)의 개국설화

1) 내용 분석

2) 전승과정

2. 고령 가라국(加羅國)의 개국설화

1) 내용 분석

2) 전승과정

맺음말

머리말

가야의 개국설화에 대한 연구는 최근까지도 다방면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신화학에서는 대개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의 한 유형으로, 국문학에서는 농경사회의 전통 내지는 민속제례의 일면으로, 민속학에서는 ‘즉위의례’의 측면에서 각각 접근하고 있다. 이들 견해는 해당 분야 나름대로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것인데, 그러나 각기 고유 학문의 틀 속에서만 이루어졌고 대개는 ‘수로설화’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개국설화 전반적인 파악에는 한계가 있음도 분명하다. 이러한 한계의 보완 내지 극복은 역사학 쪽에서의 연구로서만이 가능한데,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 학계의 경우, 이병도는 가락국의 ‘6란설화’는 ‘6가야연맹체’를 결성하던 때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서 원래는 ‘1란설화’가 맞고, 가라국과 가락국의 혈연적 종지관계(宗支關係)는 3세기 전반 가야연맹의 결성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철준은 가라국 개국설화에서 정견모주(正見母主)를 ‘가야산신(伽倻山神)’이라고 한 것은 ‘가야산’이 주산(主山)으로서 가야제국을 포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가락국의 개국설화가 1단계 설화라고 한다면 이것은 2단계의 것으로서 이후 고대국가로 발전했다면 신라 중고왕실의 ‘진종설(眞種說)’과 같은 3단계로 나아갔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정중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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