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지역을 생각하게 하는 지도 1장. 우연잖게 발견한 지도입니다. 인도라는 지역은 시대별로 그 범위가 달라지는 것같습니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는 인도라는 지역이 15세기에는 범위가 작다가 19세기에는 동남아시아 지역까지를 인도지역으로 인식한 듯합니다. 우리가 오천축(五天竺)이라는 것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소위 신라시기에 혜초라는 중이 인도로 가는 여행기로 만들었다는 왕오천축국전 이라는 것에서 보았습니다. 헌대 인용한 17세기의 지도는 타타리아를 표시한다고 만든 지도인데 여기에 오천축(五天竺)국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http://www.raremaps.com/cgi-bin/gallery.pl/detail/18349 INDIA, INDIA, INTRA GAN GEM, EXTRA GAN GEM, INDOSTAN. (GAN GEM은 인도 북부의 갠지스 강을 표시. 갠지스강이 수직경계선임) 이렇게 오(五)개의 지역이름을 표시한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도의 특이점은 인도지역의 동쪽에 CHINA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EXTRA GANGEM의 지역이 사천성과 티벳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5개의 인도지역이 현 인도의 중부 이북(以北)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서에 기록된 천국(天竺)국은 실제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위치하면서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현 인도의 북부와 현 중국의 서남부 등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지도로 표기했다는 것입니다. 인용 지도의 서북쪽을 보시면 RUSSIA 가 있는데 바로 밑에 SIBIRIA가 있어서 현재 우리가 시베리아 라고 알고 있는 지명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속적으로 옮겨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아래로 BULGARIA, ASTRAKAN 국이 있어서 불가리아 등이 서쪽으로 이동해 가는 도중의 역사적 상황도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가 표기되어 있는 것에서 그 아래 위로 흐르는 강은 확실히 현재의 시르다리야. 아무다리야가 남북으로 있는 것을 분명한 듯 한데.. 두개의 강이 카스피움이라고 적혀 있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니 아랄해가 누락되어 있는 것인지...아니면 당시는 두 강이 카스피해로 흘렀는데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랄해가 빠져 있네요. 그리고.. 소위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그려넣고는 그 남쪽에 CHINA, 그 옆에 반도처럼 그려진 것에 COREA라고 한 것을 보니...그 지역을 중점적으로 날조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TARTARIA의 영토가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있으면서 그 경계선이 아무다리야강, 그리고 서쪽으로서는 유럽과의 경계까지가 되네요. 이것을 요즘에는 아시아 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 오천축 관련 내용을 보시면 http://cafe.daum.net/chosunsa No.53 | 조회수 :152 I 자은 최두환 (2008-05-10 17:01:53.0) 천축국!《혼일강리력대국도지도》와《여지전도》의 진실은? (전략) 《여지전도(輿地全圖)》(18세기말: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는데, 상부에 많은 거리표의 내용이 적혀 있는데, 거기에 "朝鮮國至北京三千五百里 至南京四千里"라고 되어 있고, 지도 전체엔 "明"이라든가, "淸"이란 글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 지도에는 위의《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처럼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포함되어 그려져 있고,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지역에 "다섯 천축국[五天竺國]"이 표시되어 있다. (1) 중천축국(中天竺國): 和田(파미르 Pamir) 남쪽, 叭達山(바닥샨 Badakhshan) 동쪽에 ,崑崙山(곤륜산) 서쪽, 溫都斯池 (힌두쿠시 Hindu Kush: 興都庫什) 북쪽에 있다. 이것을 현재 지도의 경위도로 보면 북위 38도 동경 76도 정도이다. 여기서 화전(Khotan)은 현재의 총령(蔥嶺 파미르 Pamir)이 있는 위치이다. 호탄(和田: 화전)은몽골어로 ‘옥의 집’이라 는 뜻. 총령(蔥嶺)은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2) 동천축국(東天竺國): 緬甸(면전: 미얀마) 북쪽, 西臧(서장: 티베트) 남쪽, 古俚(고리: 캘리커트) 동쪽, 雲南(운남) 서쪽이 다. 이것을 현재 지도 위에 표시하면 북위 30도 동경 96도 정도이다. (3) 남천축국(南天竺國): 지금의 인도의 중부지역이다. (4) 서천축국(西天竺國): 叭達山(바닥샨 Badakhshan) 서쪽, 克什米爾(캐시미르 Kashmir) 북쪽, 古忽魯謨斯(옛 호르무즈) 동쪽, 蔥嶺(파미르 Pamir) 남쪽, 安集延(안디잔 Andijan) 남쪽이다. 이것을 현재 지도의 경위도로 보면, 북위 40도 동경 72 도에서 78도 사이이다. (5) 북천축국(北天竺國): 和田(파미르 Pamir) 북쪽, 阿克蘇(옥서스강 Oxus River; 아무다리아강) 서북쪽, 烏什(오쉬)·庫車 (쿠처) 남쪽, 安集延(안디잔) 동북쪽, 발하슈호 남쪽이다. 이것을 현재 지도의 경위도로 보면 북위 40도 동경 76도 정도 이다. 이렇게 다섯 천축국의 위치를 보면 그 중심이 되는 중천축국은 파미르고원의 중심에 있고, 동천축국은 운남성의 바로 서쪽에 있고, 남천축국은 현재 인도의 중부지역이며, 서천축국은 호르무즈 해협까지는 아니지만, 이란의 중부지역이며, 북천축국은 파미르고원의 북쪽 내지는 더 서쪽으로 발하슈호 남쪽이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은 인도라는 지도의 표시가《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는 매우 작게 그려져 있어 알아내기가 힘들지만,《여지전도》에서는 그런 대로 식별이 가능하다. 그래서 다섯 천축국의 하나인 서천축국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 그곳은 사실 중앙아시아의 서부지역이다. 이《여지전도》에서 특이한 것은 "서쪽 항하(西恒河)"와 "동쪽 항하(東恒河)"가 있는데, 이 "恒河"라는 이름은 대개 "갠지스" 강을 말하는데, 이 지도에는 "동/서"로 구분하였으며, "西恒河"를 "印度河[인더스 강]"라고 밝혀놓았다. 그런데 그 위치가 현재의 지도의 인도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표시가 호르무즈(忽魯謨斯)가 적힌 동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의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의 중부 지역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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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축국(天竺國) 인도 위치 200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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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샤와르에서 - 석가(사카)는 카불(가비라)에서 태어나고 페샤와르(파샤, 파사, 秦都, 錦都)에서 도를 폈다 2009.02.18
- 임나(가야)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2009.02.16
- 가야와 백제의 30년 전쟁 - 가야의 본토수복 전쟁 2009.02.16 1
천축국(天竺國) 인도 위치
카슈미르에서 - 중천축국은 조선의 중국이다
카슈미르에서 - 중천축국은 조선의 중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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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한헌석 조회수 : 246 08.10.15 00:41 http://cafe.daum.net/chosunsa/1Om0/30
본격적으로 케시미르(카슈미르)를 둘러보기 전에 앞에서 4편과 3편에서 메모했던 것을 먼저 인용해 보자. '-신두푸에서 평원과 계곡을 거쳐 5일거리의 테베트로 가 보자. Kaśmīra 또는 가습미라(羯濕弭羅) ·가섭미라(迦葉彌羅) · 계빈(罽賓). 테베트 - TEBET - 카라코룸산맥의 해발 8611M의 고드윈오스턴 산과 히말라야산맥의 해발 7817M의 난다데비 산 사이의 지역이 바로 카슈미르 지역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카슈미르지역까지 가는 데, 현재는 고속도로로 한시간정도 걸리는 거리다. 카슈미르의 중심도시는 스리나가르다. 대당서역기에서는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이라고 했는데, P103의 가습미라국조를 몇줄 인용한다면, '가습미라국의 둘레는 7천여리이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들은 매우 가파르고 험하다. .....농사 짖기에 적합하며 꽃과 열매가 풍성하다. 품종이 좋은 말과 울금향, 화주(火珠), 약초가 많이 난다. 모갈(毛褐)을 입으며 흰 모직 옷을 입는다. 풍속은 경박하고 사람들의 성품은 겁약하다. .... 사람들의 용모는 아름다우나 성품은 속임수를 많이 쓴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들으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같이 믿는다.' 이제 동방견문록 몇줄을 인용해 보자. P311에서 '주민들은 아주 사악해서 강도질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당이며 도적들이다. .... 그들의 옷은 초라하고 의복이라고는 동물가죽이나 삼베 혹은 부크람으로 만든 것이 고작이다..... 이지방에는 낙타털로 짠 천이나 금실과 비단 등으로 짠 여러 옷들이 있고, 우리 고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여러 종류의 향초들이 자라고 있다.' 그런데 왜 마르코폴로는 카슈미르지역을 테베트로 불렀을까? 현지의 주민들은 당연히 주변이 카라코룸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태백(산)지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일년 사시사철 흰눈으로 덮여 있는 지방, - 그래서 태백지방을 마르코폴로는 테베트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방향과 거리표시 없이 가인두지방으로 넘어간다.' P214 '점쟁이 혹은 마술사를 테베트 혹은 케시미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두 민족의 이름이다.' - 아마도 테베트 혹은 케시미르(카슈미르)는 두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을 부르는 두가지 방식일 것이다. 이 구절을 보고 내 자신이 먼저 깜짝 놀랐다. 한헌석칼럼 14호, 마르코 폴로의 실제 여행경로를 밝힌다 - 5에서 테베트를 카슈미르라고 단정적으로 결론 내렸는데, 마르코 폴로가 같은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등줄기에 전율이 일어나고, 잠시 머리가 멍-했었다.' 여기 인용한 두 구절만 봐도 테베트와 케시미르가 동일한 지역을 두가지로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P. 펠리오는 케시미르는 현재의 카슈미르에 비정하고, 테베트는 현재의 티베트에 비정하여 현 북경에서부터 서남쪽의 방향에있는 지역을 가리키도록 조작하여, 중국의 위치를 일만리 이상을 동쪽으로 옮겨 놓는다. 앞의 두 인용문의 추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방향과 거리로 그 비열하고 뻔뻔한 조작을 백일하에 드러내 보자. 처음 중국으로 가는 2편 중앙아시아에서는 현 페샤와르에서 동남쪽으로 7일 거리에 카슈미르가 있다고 했다. 대도에서 서남방의 여행을 하는 4편에는 이슬라마바드(신두푸)에서 5일거리에 테베트가 있다고 했다. 지도를 꺼내 놓고 페샤와르와 이슬라마바드를 지나서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로 가는데 2일과 5일이 걸려서 페샤와르와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 사이가 7일 거리라고 하는 2편의 이야기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두푸를 성도부로 조작을 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성도에서 티베트로 가는 길은 일단 그런 길은 없다. 있다고 해도, 최소 2~3개월은 걸리게 되어 있다. 최소 10개 이상의 산맥을 넘어야 하고,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도 티벳 가는 길은 고약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사천성 섬서성 감숙성 청해성을 돌아서 가는 수밖에 없다. 결단코 단연코 신두푸가 성도도 아니고 더군다나 테베트가 티벳은 더욱 아니다. 엉터리 억지 끼워 맞추기의 조작배기일 뿐이다. 이 테베트가 카슈미르이기 때문에 카슈미르의 바로 옆지방인 간다라로 바로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P158~159의 케시미르조의 내용을 인용해서 그 진실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자. '1) 케시미르 역시 우상숭배자들이 있고 자기들 고유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지방이다. 그들은 악마의 주술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잘 알고 있고 우상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할 정도이다....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의 우두머리이며, 우상은 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 주민들은 검고 야위었지만 여자들은 검은 피부치고는 매우 아름답다. 그들의 음식은 고기와 쌀이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기후의 땅이다. 많은 도시와 마을이 있고, 수풀과 사막,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험난한 산길들이 있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정의로써 다스리는 왕이 있다. 3) 그들의 관습에 따라 은신처에 머무는 은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탐하지 않고 잘 절제하기 때문에 매우 정결하며, 신앙에 어긋나는 어떠한 죄악도 범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매우 성스럽게 여겨지고 또 굉장히 장수한다....우리 고장에서 실려 나가는 산호가 그곳에서처럼 잘 팔리는 곳도 없다.' -1)2)3)은 필자가 편의상 붙인 분류이다. 1)3)의 내용은 카슈미르의 수도승들이 독실하게 수련, 공부하여, 그 전통과 지혜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에, 우상숭배자 즉 불교도들의 우두머리로 보일 정도로 존경받고, 매우 성스럽게 여겨질 정도라는 것이다. 도력이 높은 수도승들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P311에서 '주민들은 아주 사악해서 강도질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당이며 도적들이다.'라고 악의적 조작을 해댄다. 3)에서 '신앙에 어긋나는 어떠한 죄악도 범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한다.'와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는가? 대당서역기의 '사람들의 용모는 아름다우나 성품은 속임수를 많이 쓴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들으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같이 믿는다.'와 같은 묘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치 동방견문록의 논조에 맞추어서 대당서역기를 조작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당서역기의 또 다른 예를 보자. '풍속은 경박하고 사람들의 성품은 겁약하다.' 이 문장의 앞과 뒤에 '적들이 침공, 정벌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라는 용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이로써 마침내 인근 국가들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자체 문맥의 정반대되는 문장을 끼워 넣은 것이다. 2)에서도 '수풀과 사막,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험난한 산길들이 있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정의로써 다스리는 왕이 있다.'와 같이 아무도 두려워 않고,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고 정의로써 다스린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경박하고 겁약하다니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지금도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전면전을 세 차례나 치르고 끝없는 위기국면을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는 카슈미르인데 말이다. 2)에서 '주민들은 검고 야위었지만 여자들은 검은 피부치고는 매우 아름답다. '동방견문록과 대당서역기를 읽어 나가면, 뱃속이 알싸하게 아파 오면서 가슴에서 부터 열이 끓어오르고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나도 몰래 어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 구절도 바로 그런 경우다. 이 모멸감과 치욕과 모욕을 내 자식 새끼들에게까지 유산으로 남겨주고 가야하는가? 먼저 재미있는 인용을 하나 해 보자. 이 모욕의 땅 카슈미르 출신 자와하를랄 네루의 네루자서전/간디서원 P41~42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델리를 떠날 때 누이동생도 함께 있었는데, 이 나이 어린 여동생은 일부 카슈미르 아이들이 그렇듯이 아주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도중에 마주친 영국 군인들이 고모를 영국 소녀로 오해하여, 나의 큰아버지가 그녀를 유괴한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혐의를 받게 되면 즉결재판을 거쳐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행히도 큰아버지가 영어를 알았기 때문에 옥신각신 시간을 끌고 있던 차에 큰아버지를 아는 분이 지나가다가 그와 가족들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네루자서전에서 이렇게 묘사되는 카슈미르 여성을 13세기에 마르코 폴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심한 악의적 조작이다. 카슈미르인들에 대한 인종청소정책을 완수했다는 자신감이 그 밑에 깔려 있는 대단히 불온한 문구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지독한 너무나 지독한 악마적 문구다(영 국 군 인 들 이 혐 의 가 있 으 면 즉 결 재 판 으 로 처 형 하 기 까 지 몇 분 밖 에 걸 리 지 않 는 것이 영국신사들의 식민지 경영의 현실이었다. - 모골이 송연하고 불온하고 참으로 악마적이지 않은가?). 3)에서 '우리 고장에서 실려 나가는 산호가 그곳에서처럼 잘 팔리는 곳도 없다.'는 문장은 분명히 케시미르 조에 있는 문장인데, 테베트를 설명하는 P312의 '이 지방 사람들은 산호를 아주 귀한 보석으로 여겨 자기 아내의 목이나 우상에 걸어 주기 때문에 값이 매우 비싸다. 이지방에는 낙타털로 짠 천이나 금실과 비단 등으로 짠 여러 옷들이 있고, 우리 고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여러 종류의 향초들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다시 대당서역기에서 가습미라국조의 인용과 비교해 보자. P312 '품종이 좋은 말과 울금향, 화주(火珠), 약초가 많이 난다. 모갈(毛褐)을 입으며 흰 모직옷을 입는다.' 현장의 묘사가 테베트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케시미르와 테베트의 산호이야기가 일치하지 않는가? 테베트는 케시미르이고 가습미라국이고 현재의 카슈미르지방을 말하는 것이 100% 확실하다. 케시미르조에서 '우상숭배자들의 우두머리로서 악마의 주술'을 언급하는데, 테베트조에서는 '영악한 마술사와 노련한 점쟁이들의 진기한 마술과 놀라운 술수'를 이야기한다. 그 전후의 여정도 정확히 일치한다. 케시미르 조에서는 바닥샨에서 페샤와르를 거쳐 카슈미르로 갔다가 도로 바닥샨으로 돌아가는데, 테베트 조에서는 발흐에서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카슈미르로 갔다가 간다라지방으로 돌아온다. 이 테베트 지방의 정확한 지리적 비정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너무 장황하게 서술하는 것이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다시 한번 이렇게 확실하게 결론 내리고 넘어가자. "동 방 견 문 록 의 테 베 트 는 현 카 슈 미 르 지 방 이 다." P312 '테베트는 매우 커다란 지방으로 주민들은 자기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으며 우상숭배자들이다. 만지라든가 다른 여러 지방들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 - 여기 결정적으로 중요한 만지의 개념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만지는 파미르 남쪽의 비중화지역이라고 개념잡고 있던 생각을 여지없이 깨뜨려서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어 준 구절이다. 자- 한번 보자. 파미르 남쪽이 만지라면, 테베트가 만지라고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테베트가 만지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테베트는 만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테베트가 만지가 아니라면, 만지의 개념이 잘못 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의해 누군가에 의해 조작당하고 세뇌당해서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 조작과 실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르코 폴로의 만지에 대한 다른 언급을 살펴보자. 발흐에 대한 묘사에서 P306 '도읍은 악크발렉크 만지라고 불리는데 '만지변경의 하얀도시'라는 뜻이다.' 간다라지방의 페샤와르의 묘사에서 P307 '내가 여러분에게 위에서 말한 산지를 (발흐에서) 서쪽으로 20일 동안 가면, 역시 만지의 변경지역의 하나인 평원에 위치한 신두푸라 불리는 어떤 지방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의 도읍은 한때 매우 크고 당당했으며 신두푸라는 이름을 가졌고, 옛날에는 강력하고 부유한 왕들이 있었다.' -파미르 이남을 만지라고 알고 있었을 때는 '그럼 만지의 쎈타는 간다라지방쯤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간다라지방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페샤와르를 가리키는 신두푸를 역시 만지의 변경지역의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당혹감과 좌절감으로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영역이거나, 마르코 폴로가 잘못 알았겠지 정도로 결론내리고 백기를 들고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기 대원전의 대하조에 아무다리아 남쪽의 대하(박트리아)의 수도 박트라(발흐)를 란시성(藍市城)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고구려사와 수당史의 그 유명한 만 주 의 양 만 춘 장 군 의 안 시 성 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아하! 만지변경의 하얀도시 - 악크발렉크 만지라는 말이 만주의 밝달(박트라, 발흐[발간-밝은 땅])이라는 말이구나. '밝은'이라는 말을 페르샤어 흰색을 의미하는 '악크'와 도시를 의미하는 '발렉'으로 (더군다나 발렉은 발크나 발흐와 발음도 비슷하니) 조합하여 조작해낸 것이다. 만 지 는 만 주 였 구 나!!!!!! 시르다리아와 아무다리아 유역이 만주 지방인데, 간다라 지방의 16국을 통합했던 수나라가 망하자 고구려의 만주지방이 확대되어 간다라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그런데 신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 후고구려세력이 간다라지방을 장악하여 발해(대진국)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하자, 만주지방이 발흐 선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다시 왕건의 고려가 후백제(페르시아)를 통합하고, 발해를 통합(조작사에서는 거란의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켰다고 해 놓았다)하면서 만주 지방이 다시 간다라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만지변경의 하얀 도시, 발흐이고, 만지변경의 신두푸인 것이고, 카슈미르는 만지와 변경을 접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래야 말이 되는 것 아닌가? 하나만 더 짚어 보자. 발흐와 페샤와르가 만주의 변경이면 만주의 센타는 어딜까? 페르시아의 이란(테헤란)일까? 아랍의 이라크(바그다드)일까? 인도의 중부지방 어디일까? 아랄해 주변의 어디(우르겐치나 히바)일까? 도대체 서아시아, 남아시아, 남부 중앙아시아의 센타는 어디일까? 당연히 옛 진나라의 수도였던 진도(금도, 신두푸, 페샤와르)와 함양(안시성, 함흥, 발흐)이 중심이지 다른 중심이 있을 수 없다. 아하! 이것을 숨기고 싶어서 계속 만지변경이라는 말을 썼던 것이었구나. 힌두쿠시 남쪽이 독립적인 세력이 되면, 페샤와르와 발흐는 대치하는 쌍방이 되고, 통합이 되면 보완적인 양대 센타가 되는 것이었다. 아하! 아하! 천하의 센타에서 볼 때 천하의 경략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바로 서아시아, 남아시아, 남부 중앙아시아의 센타이니까. 당신이 천하의 주인인 황제라면, 이 포인트에 누구를 세우고 싶은가? 장남은 태자로서 천하를 상속시켜야 하니까, 장남은 아니라도 최소한 차남 정도는 이 포인트에 세워야 할 것 아닌가? 무굴제국을 세웠다는 바부르는 조선 천하(조선 천지)의 제 2인자 정도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당서역기의 중국의 개념 대당서역기 P103 '이 나라는(가습미라국-현 카슈미라) 본래 용이 사는 연못이었다. 옛날 불세존께서 오장나국(스와트지방)으로부터 사악한 신을 항복받고 나신 뒤 중국(中國)으로 돌아 오고자 허공을 타고 오시던 중 이 나라(가습미라국) 상공에 이르셨다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 -이때 중국이란 간다라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서경은 현 베그람(카피사, KAPISA-대당서역기의 가필시)이고, 동경은 페샤와르(신두푸, 진도, 금도, 동방견문록의 파샤이, 대당서역기의 포로사포라)이다. 동방견문록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P307 '내가 여러분에게 위에서 말한 산지를 (발흐에서) 서쪽으로 20일 동안 가면, 역시 만지의 변경지역의 하나인 평원에 위치한 신두푸라 불리는 어떤 지방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의 도읍은 한때 매우 크고 당당했으며 신두푸라는 이름을 가졌고, 옛날에는 강력하고 부유한 왕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강력하고 부유한 왕들이 있었다.' - 옛날의 왕들을 한번 열거해 보자. 마우리아조(진나라), 쿠샨 굽타조(한나라 구려의 직할지), 수나라, 발해의 강력하고 부유한 왕들의 東京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란 바로 이 남천축국의 서경 동경이 있는 간다라 지방이다. 왕오천축국전/학고재,정수일 P281~285 '간다라국은 대체로 오늘의 파키스탄 라왈핀디와 페샤와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포함한 인도 펀자브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로 진입하는 인후로서 전략상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 문명 교류의 요로이기도 하였다.... 건타라를 찾은 현장은 이 나라가 동서로 천여 리이고 남북이 팔백여 리나 되며, 동은 신도하에 임해 잇고, 대도성인 포로사포라(페샤와르 - 파샤)는 주위가 40여리에 달하며, 왕은 후예가 없어 가필시국(계빈국)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사실 현장이 방문했을 때는 2)돌궐이 1)에프탈을 대신해 간다라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현장이 귀국한 후 얼마 안되어 서돌궐이 3)당조에 의해 멸망(658년)하자 돌궐은 몽지와 곤릉의 2도호부로 나누어졌고, 중국은 세력을 가필시와 개실밀(카슈미르)일대까지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가필시는 안서도호부 예하의 수선도독부로 편입되고 왕은 당조가 책봉하였다. 4)753년에 오공이 당나라 사신 장도광을 수행하기 위해 건타라국에 갔을 때는 이 나라가 계빈국(가필시) 동부의 한 도성이 되어, 왕이 여름이면 이곳에 머물고 겨울에는 계빈에서 보내곤 했다.' - 1)에프탈은 수나라를 의미한다. 수나라를 숨기기 위해서 조작했던 것이다. 2)돌궐은 고구려를 의미한다. 고구려를 숨기기 위해서 조작했던 것이다. 3)658년 당나라 신라가 이 지역을 정벌해서 고구려의 도호부에 소속되었던 군대를 2개 도호부로 나누어서, 안서도호부에 소속시켰다는 말이다. 4)그러나 너무나 뜻밖에도 수선도독부에 편입된 이 지역에 당 사신 장도광이 온다(753년). 당조가 자신이 정벌하고 도독부를 둔 지역에 웬 사신을 보내는가? 자신의 군대가 패퇴하여 그 지역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어느 세력에게 패퇴했을까? 바로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후고구려(대진국, 발해)세력이 당군을 패배시키고 이 지역을 장악하고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이때 포로사포라가 가필시국(대진국, 발해)의 동부의 한 도성(동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남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동북쪽의 중국과의 모든 교역과 문화, 정치, 전략의 중심이 되는 중국이 되는 것이다. 대진국 발해와 이름이 같은 진나라가 바로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중원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진나라와 마우리아왕조(마가다-굽타왕조) 관련된 년표(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 BC627, 진목공, 효에서 진(晉)과 싸워 패배(뒤에, 목공은 춘추오패로서 크게 영토를 넓힘) BC563, 갠지즈강 유역에 앙가, 마가다등의 소국가 분립(마가다국은 BC6세기무렵부터 강성하기 시작함.) BC430, 인도 와가다왕국, 갠지즈강 유역을 통일. - 와가다는 박달 혹은 배달족인 진나라의 이명 마가다(마하가타 - 대가라 즉 대가야)로 사료됨. BC325, 진이 왕을 칭하니, 열국이 이에 따름.(혜문왕-지역제후가 아닌 왕조를 설립) BC317,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왕조 설립.(~BC180) BC300, 인도의 마우리아왕조, 인더스 강, 갠지tm 강 유역을 통일. BC292, 마우리아왕조, 빈두사라왕 즉위. (소양왕[진시황의 아버지], BC306년[~250년) 즉위) BC268,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 즉위.(왕조 최전성기 시작) BC261, 아소카왕, 동남인도 카링가 왕국 정복. BC260, 진, 장평에서 조에 대승. BC256, 진, 주나라를 멸함. BC249, 진, 여불위, 재상이 됨 BC246, 진시황 즉위. BC244, 아소카왕, 제3차 불전 결집. BC237, 진시왕, 이사 등용. BC232, 아소카왕 죽음. BC221, 진시왕, 중국 통일 BC210, 진시황제, 죽음. BC206, 진나라 멸망. BC184, 마우리아왕조 멸망. - 아무 의도 없이 그 년표에 나오는 진과 마우리아조를 시대별로 뽑아 보고 필자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그 시작과 끝이 이렇게 똑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대표적 군주와 사건을 비교해 보자. 진나라의 대표적 군주 /진목공-춘추오패 /혜문왕 /소양왕 /진시왕 마우리아의 대표격 /갠지즈유역통일 /찬드라굽타 /빈두사라왕 /아소카왕 진나라와 마우리아왕조는 같은 사건을 조금 다른 지역으로, 조금 다른 사건으로, 조금 다른 시대로 각색한 이란성 쌍생아임이 분명하다. 진(秦)은 匠隣切의 발음으로서 중국어 발음은 QIN 즉 친으로 발음한다. 상나라가 망해서 이 간다라지방으로 이동해 온 상도(시앤도, 신도, 신두, 힌두, 진도)를 原天竺(天毒, 身毒, 信度)으로 바꿔치기를 했지만, 秦都 혹은 震都 혹은 錦都로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을 장악했던 발해의 이름이 大震國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다라지방은 워낙 거대한 지리적 장벽으로 인해 원 천축인 중원과 상대적으로 독립된 지역인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쎈타로서 중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법현전의 중국의 개념 고승전 P499~500 '이 강(신두하)을 건너 곧 오장국에 이르렀는데, 그 오장국은 바로 북인도이다. 여기서는 모두 중인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인도는 소위 중국이라고 한다. 속인들의 의복이나 음식도 또한 중인도와 같으며 불법이 대단히 성했다.' -우리가 이 문장을 보면 조금도 무리 없이 바닥샨 바로 아래 지역인 오장국은 북인도 혹은 북천축이고, 그 아래쪽에 있는 간다라 지방은 중인도 혹은 중천축인 중국으로 이해되고 아무 의심 없이 깔끔하게 스무드하게 넘어갈 수 있다. 여기까지라면, 대당서역기의 중국 개념과 모든 역사적 왕조와도 크게 무리 없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오천축국전/학고재,정수일 P302 '의상과 음식, 풍속은 건타라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같지 않다.'고 나와 있다. 언어는 건타라국과 같지 않단다. 여기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이제 대당서역기 P83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모직 옷을 입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그 밖의 옷차림을 한다. 언어는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자못 인도와 서로 관계 있다.' - 여기서 이제 그 윤곽과 정체를 어느 정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 언어가 인도와 대체로 같다면, 문자와 예의가 인도와 관계가 있다면, 인도에 들어가서 이런 문장을 굳이 남길 이유가 있을까? 만일 오장나국이 중원에 있는 중국의 한 부분인데 인도말을 한다면, '야 그거 신기하네! 왜 인도 말을 한담. 뭐 좀 다르기는 하지만 완전히 인도말이네.'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 실 내 용 은 인 도 에 왔 는 데, 오 장 나 사 람 들 은 원 천 축 의 말 을 그 대 로 쓰 고 있 다 는 말인 것이다. 原 천축 즉 조선천축의 말을, 즉 신라 고구려의 말을 즉 신강 지역과 감숙성 지역과 만주 지역의 말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 문장을 '언어는 다르기는 하지만 원 천축과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자못 원 천축과 서로 관계가 있다.'고 고치면, 그 문장이 의미도 닿고, 상식에도 통하고, 그 문장이 존재의미도 가지는 것이다. '옷도 우리하고 똑같이 흰 옷을 입네, 소수 예외도 있지만.' 이렇게 되어야 그 앞문장도 의미를 가지는 문장이 되고, 현장이 좀 덜 떨어진 중‘님’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 아닌가? 이제 대당서역기 P83의 주2)를 한번 보자. ‘"법현전"에는 '오장나국은....모두 중천축국의 말을 쓴다. 중천축국이란 중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스와트강 근변의 SWAT KOHISTAN은 DARDISTAN이라 불리며, 그 방언은 언어상 DARDIC어파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것은 고래로 고립적인 상황이면서도 언제나 서쪽 인접 지역인 이란어와 교섭을 가져왔던 본질적으로는 인도 아리아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 쩌-릿 쩌-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 가고, 전신의 모든 피부가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린다. 여기 주2)에서와 같이 그 원문을 살짝만 노출시키면, 완전히 다른 의미내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대당서역기 본문을 분석했던 내용이 바로 튀어 나오는 것이다. 이 중천축 즉 중국이라는 말로 다시 본문을 바꿔 보자. '언어는 다르기는 하지만 중천축(중국)과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자못 중천축(중국)과 서로 관계가 있다.' 어떤가? 말이 통하는 문장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또 이란어 타령을 하고 있다. 그러면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과연! 과연 그랬던 것이다. 고승전 속고승전 명고승전 해동고승전이라는 고승에 관한 한 '대백과사전'과 같은 대 시리즈물이 먼저 완성되어 출간되어 버렸는데, 이를 어쩌나? 그 중의 딸랑 한권 고승전에 이 '법현전'이 끼워져 있는데, 아-차! 이 한 어구를 놓쳐버린 것이다. 이런 실수를 발견한 대당서역기와 왕오천축국전의 집철 교감자들이 이 흠집 때우기 작업에 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1) 대당서역기 P103의 가습미라국조에서 '이 나라는(가습미라국-현 카슈미르) 본래 용이 사는 연못이었다. 옛날 불세존께서 오장나국(스와트지방)으로부터 사악한 신을 항복받고 나신 뒤 중국(中國)으로 돌아오고자 허공을 타고 오시던 중 이 나라(가습미라국) 상공에 이르셨다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고 오장나국에서 중천축국이라고 심어 놓은 고라크푸르, 바라나시, 파트나가 있는 비하르주로 오는 직선거리의 중간에 있는 가습미라국조에서 중국이라는 어구를 살짝 끼워 넣어 놓았다. 조작해 놓은 문구들의 형식논리학 상으로는 말이 되지만, 의미론적 맥락으로는 서아시아 남아시아의 중국은 간다라지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미론적 맥락을 아는 우리에게는 이 땜질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기들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위의 대당서역기의 중국의 개념과 같이 실제 의미론적 맥락의 중국일 수밖에 없는 간다라 지방의 모든 역사적 실상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게 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덤으로 의미론적인 맥락으로 볼 때의 남천축국의 중국이 간다라 지방이라면, 원천축국 혹은 중천축국의 중국이 현 중국의 맨 서쪽 끝에 붙어 있는 것과 똑 같이 현 인도의 맨 서쪽 귀퉁이에 붙어 있게 된 것이다. 오히려 인도를 벗어나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북쪽 지방에 붙어 있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현 인도의 중국이나, 현 중국의 중국이 아니라, 간다라 지방은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중국이고, 신강지방은 천하의 중국이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는 우리의 의식에서 베어 내버렸기 때문에 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언제쯤 우리의 마음이 동서좌우가 균형잡힌 전체를 아우르는 온전한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아직은 마음이 갑갑하기만 하다. 2) 대당서역기 P83의 오장나국 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모직 옷을 입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그 밖의 옷차림을 한다. 언어는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자못 인도와 서로 관계있다.'와 같이 고심에 찬 어색한 문장으로 땜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3) 그래도 부족하고 아쉬우니까 주3)의 완전범죄의 땜질을 시도하다가 '중천축국이란 중국이다'는 구절을 노출하는 실수를 다시 범하는 바람에 완전히 들통나고 말았다. 4) 왕오천축국전 P302 '의상과 음식, 풍속은 건타라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같지 않다.(言音不同)'의 땜질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건타라를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와 남부 중앙아시아의 중국(건타라국)이라고 살짝 노출시켜서, 의상과 음식, 풍속이 원천축국(중국)과 같다는 말을 살짝 돌려 놓은 것이다. 거기다가 대당서역기의 '언어는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자못 인도와 서로 관계가 있다.'는 문장의 의미가 '대체로 같고, 자못 관계가 있다'는 내용을 뒤엎어서 '다르기는 하지만'의 조건절만 살려서 '언음부동'(언어는 같지 않다)이라고 쳐박아 넣고 덮어버렸다. 대단히 천재적인 발상과 솜씨이다. 덕분에 간다라 지방이 의미론적 맥락으로 볼 때에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와 남부 중앙아시아의 중국이라는 힌트를 얻게 되었지만, 그 실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저릿저릿한 흥분에 겨워 그대들의 실수를 감싸 안고 환희에 벅찬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이제 칠흑같은 밤은 보내고 환한 아침을 이리도 기쁘게 맞이 하노니! 법현 현장 혜초의 참으로 길고도 멀리 뻗치는 깊고도 큰 법력 덕분이로다. 내 반드시 남석 스님이 계신 개태사에 찾아뵙고 간단한 차례상을 차리고 세분의 억울한 온갖 누명을 하날님께 고하여 벗겨 드리는 제를 지내고 백팔배의 감사기도를 드리리라!!! 그러니까, 결론은 북천축도 동천축도 서천축도 남천축도 중천축도 없었다. 오직 천축뿐이었다. 조 선 천 축. 나머지는 전부 조작이었던 것이다. -가령 이 필자의 출생지가 이리라고 하자. 우리 집안의 증조할아버지 형제들이 하도 살기 힘들어서 선산 지킬 우리만 빼고, 1900년대초에 나머지 4형제가 모두 현재의 만주 흑룡강 성으로 이주를 했는데, 거기 무인지대의 무한에 가까운 광야를 발견하고, 친구와 집안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는데, 위생관념이 발전하고 의료혜택도 없지 않았고, 그쪽 현지인 작은 부인도 얻고 해서 보통 한 집안 당 자식수가 한 15명 정도가 되기도 해서 집안 식구들만 근백년 사이에 몇 천 명이 되고 친구 등 아는 사람의 집안도 또한 몇 천 명이 되었단다. 그래서 어엿한 소도시를 하나 이룰 정도의 대 집성촌을 형성하자, 거기 읍내에 흐르는 강을 이리강(이리 시내를 흐르는 강의 이름)이라고 부르고, 그 읍내를 이리라고 부르게 되고, 물론 그 동네에서 통용되는 말은 이리의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했단다. 물론 현실은 항상 뻑뻑한 법이라, 일본어를 때로는 중국어를 때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리 사투리를 많이 사용했다. 물론 장례식이나 결혼식등의 행사가 있으면, 항상 흰 두루마기와 치마 저고리를 빠지지 않고 다 입었단다. 아버지 고향은? 아버지는 어디 사람고? 물으면, 이리 분, 이리어른, 이리양반 일리스키등 정말 갖가지 온갖 표현의 답을 다 했단다. 한국의 다른 지역 출신이나, 러시아나 중국의 교포출신이 들을 때 이미 많이 헷갈려서, 나중에는 그분들을 부를 때는 이르어르노므(이리어른놈)로 부르기도 했단다. 그런데 정작 러시아 중국 일본사람들이 듣고 일얼스키, 일분살진등 얼토당토 않은 명칭이 다 나오고, 거기에 복잡하게 전라도내기 호남인, 남반부 아-, 조선인, 반도놈, 식민지놈, 조작배기, 엽전, 이주민 등등 복잡하기 짝이 없었단다. 그런데 거기에 정식 행정명칭과 우편주소 명칭이 필요해지고, 일본식민지가 시작되면서, 엉뚱하게도 발음도 안되는 훌룬베이얼현 두얼보터멍시 우란하오터구 등등등, 좀 있다가 소련군이 밀고 와서 이노켄트예브카 노보트노이치코예(가칭), 좀 있다가 인민해방군이 와서 랴오양똥뻬이구 메이허커우가, 좀 있다가 홍위군이 와서 랴오허티엔구 메이허거우로 부르더니, 다시 헤이룽장성 쑹화자치현 이리시로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국내에 있는 원 이리는 일제식민지를 겪고, 분단과 함께 미군정도 겪고 남북전쟁도 겪고, 군사독재도 겪는 바람에 많은 전변을 겪고, 조선어 맞춤법도 생기고 이후 맞춤법이 몇번 바뀌기도 하고, 창씨개명도 하고 지명개칭도 하다가 박 정권 때 최종적으로 익산시라고 확정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세월이 100년이 흐른 뒤에는 이리는 흑룡강에 있는 곳이고, 익산은 한국에 있는 곳이 되어 버린다. 흑룡강과 한국의 양쪽에서 벌어진 역사적 추이의 흐름을 감을 잡지 못하면, 이리가 5천리나 떨어진 흑룡강이 원 이리인 것으로 인식되어 버린다.- 실제 필자의 증조부의 고향은 밀양이다. 고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증조부 때 대륙에서 피난을 오신 것으로 추정되니까. 이제 실제 조선천축의 이주민들이 자리 잡았던 만주의 한 지역, 마르코 폴로가 '만지의 변경지역의 하나인 신두푸'를 예를 들어서 살펴 보자. BC1520년경 하나라가 망하면서 남쪽으로 밀려 온 사람들은 자기를 '하(샤)'라고 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온 사람들은 '팕트ㄹ 혹은 밝 혹은 샼트(얔트, 야르)'라고 했는데, 요즘 고향 고국에서는 간단하고 편하게 '夏(샤-사카)'라고만 하는구나 하고 짐작했을 거다. 좀 더 발전한 청동기와 세련된 제사양식과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군대와 좀 더 우위에 있는 생산력을 가진 여태껏 황제(불천-법왕)로 모시던 제일 큰 어른이 오셨으니, 모두가 받들어 夏부다(카부라>카불 혹은 카부타>카푸라>카피라 혹은 카피티>카피시-카부타>구부타>굽타, 가라, 가락, 고락, 가야)성으로 모셨을 것이다. 가장 존경받는 큰어른으로 대접받았을 것이다. 여기 다시 BC1122년의 상조의 멸망으로 간다라지방으로 대이주하여 자기를 商(샹-天[티엔, 치엔, 시엔, 친, 신])이라 부르고, 자기 왕도를 상도(商都-天竺 天毒 身毒 信度 信頭) 혹은 신라(<神那-神[天 혹은 佛]의 땅 즉 불국토란 의미, 실라, 슈라)라고 불렀다. (BC1100, 아리아인,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주. 인도에 철기문화 전파.-한국사연표, 단, 이때 갠지스 강이란 마르코 폴로가 키안수 혹은 GANGE-S[강수]라고 부르는 현 인더스강을 의미, 신강성의 동북쪽에 있던 상조의 세력은 감숙성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기자동래설로 정리하여 한국사연표에 나와 있음.) 이제는 한자문화와 강력한 철기문화와 세련된 통치술과 신기술과 합리적 사고방식 등으로 또다시 가장 존경받는 큰 어른으로 대접받고, 한 지역에 웅거했으니, 인도사에는 마우리아조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중국사에는 秦나라로 남아 있는 세력이다. 그 한 지역이 현 페샤와르(건타라 국의 포로사포라{PURUSAPURA>PERSHAWAR]) 지역이다. (슈라바스티[室羅伐悉底] 혹은 사위성 - 조작세력은 이를 저 북동 인도의 고락푸르와 바라나시 지방으로 옮겨 조작해 놓았다.) 또한 이 페샤와르 지역은 파사국 혹은 파랄사국(페르시아))으로 조작해 놓았다. 이제 서아시아 남아시아 남부 중앙아시아 지역에 철기문명을 들고 온 조직적인 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역사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 BC1100년대에 페샤와르에 자리잡은 이 秦은 왕사성 혹은 사위성(슈라바스티-파사- 현 페샤와르)에서 교역과 산업과 정치와 문화의 급속한 발전으로 남아시아의 가장 번화한 중심으로 변모해간다. 바로 이때(BC1000년경)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남천축의 중심이었던 카필라국의 태자였던 석가모니가 이 번화한 신문명과 권력의 중심(실라 슈라 수도)으로 출가해서 필사적인 고행의 구도를 한다. 그리고 앞글의 두산백과사전의 가비라국조에 말하는 것 같이 사위국이 그 서쪽에 있는 가비라국(현 카피사 혹은 베그람)을 정복한다. 商의 세력(秦나라 세력)이 이주한 지 약100여년 만이다. 참고로 전등록 1권/바로보인,문재현 P45~48 '이때(부처님이 탄생하실 때)가 주소왕 26년 갑인 4월 8일이다....이때(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곧 주목왕 53년 임신년 2월 15일이었다.' 주소왕 26년은 BC1027년이고, 주목왕 53년은 BC949년이다. 두산백과사전의 秦조에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켰다. 그 후 진은 BC 8세기 초, 주나라가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고, BC 771년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諸侯)로 승격하였다. 이가 襄公이다.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때부터 정복지를 현(縣)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간쑤성[甘肅省] 동부에서 웨이수이강[渭水] 연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 때에 옹성(雍城:陝西省 鳳翔縣)으로 이동하였다.' -물론 다 조작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 진나라와 마우리아왕조(마가다국) 관련된 년표(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 BC627, 진목공, 효에서 진(晉)과 싸워 패배(뒤에, 목공은 춘추오패로서 크게 영토를 넓힘) BC563, 갠지즈강 유역에 앙가, 마가다등의 소국가 분립(마가다국은 BC6세기무렵부터 강성하기 시작함.) BC430, 인도 와가다왕국, 갠지즈강 유역을 통일. -와가다는 박달 혹은 배달족인 진나라 혹은 마가다로 사료됨. BC325, 진이 왕을 칭하니, 열국이 이에 따름.(혜문왕-지역제후가 아닌 왕조를 설립) BC317,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왕조 설립.(~BC180) BC300, 인도의 마우리아왕조, 인더스 강, 갠지스 강 유역을 통일. BC292, 마우리아왕조, 빈두사라왕 즉위. (소양왕[진시왕의 아버지], BC306년[~250년) 즉위) BC268,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 즉위.(왕조 최전성기 시작) BC261, 아소카왕, 동남인도 카링가왕국 정복. BC260, 진, 장평에서 조에 대승. BC256, 진, 주나라를 멸함. BC249, 진, 여불위, 재상이 됨 BC246, 진시황 즉위. BC244, 아소카왕, 제3차 불전 결집. BC237, 진시왕, 이사 등용. BC232, 아소카왕 죽음. BC221, 진시왕, 중국 통일 BC210, 진시황제, 죽음. BC206, 진나라 멸망. BC184, 마우리아왕조 멸망. 이 이후의 진의 후세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왕오천축국전 P148 '기원전 2세기 말엽에 마우리아왕조가 망한 후 순가왕조, 칸바완조, 등승왕조, 사카족이 세운 쿠샨왕조에 점령되었다. 쿠샨왕조의 쇠퇴를 틈타 320년 화씨성에서 기의한 찬드라굽타 1세는 강대한 통일 굽타 왕국을 건립하였다. 마우리아 왕조의 영토와 비견되는 영토를 확보하고....법현전에 '여러 나라 중에서 이 나라의 도읍이 가장 크고 사람들은 부유하며 인의를 다투어 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P150 '신당서 "천축국전"에서 마가다국을 인도의 별명이라고 했을 만큼 마가다국은 중국에 잘 알려진 중요한 국가였다.' P156 '마가다국이 중국인들에게 북인도의 지배국으로 간주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혜초는 마가다국에 녹야원(첫 설교지), 구시나(열반지), 사성(왕사성, 사위성-구도지, 25년간 설교지, 영취산과 죽림정사-마우리아조의 창건주인 빔비사라왕[두산백과에서 진을 일으킨 비자]이 세워준 최초의 정사), 마하보리사(대각득도지)등의 4대영탑이 있다고 했다. 슈라바스티(사위성)가 있던 페샤와르 지방이다. 이것을 중인도에 조작해놓은 것이다. 빔비사라왕은 BC10세기에 마우리아조를 일으킨 그래서 그 옆에 있는 가비라국(석가모니의 출생국인 사카족의 나라)을 멸망시킨 석가시대의 商 출신의 왕이다. 마가다국의 별명을 보자. 마게타 마가타, 마갈, 묵갈제(묵갈타)등 여러 이름이 있다. 먼저 집사 2권 칭키스칸기 P274 '힌두와 카시미르의 언어로 키타이 지방을 친 마친 지방을 마하친 즉 커다란 친이라고 부른다.'의 용례와 같이 마가다 혹은 무갈의 마나 무는 마하의 줄임말이다. 그러면 마하가타라는 말은 대가타 대가라 대가야라는 말이다. 찬드라굽타 1세는 16가야(가락국)을 통일한 대가타 대가라 대가야의 창건자라는 말이다. 굽타왕조는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6세기 말에 붕괴되었다. 에프탈은 사카족이 세운 수나라다. 619년에 수나라가 망하자 고구려의 도호부가 들어선다. 그리고 당나라의 공격으로 659년에 당의 도호부가 들어선다. 698년 발해세력이 대진국을 세우는데, 대진국이 마하친 혹은 마친이다. 왕건의 고려의 직할지가 되어서 고려의 만주의 도호부로 존속하다가 근세조선의 만주 도호부로 존속했다. 18세기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정권이 이 지역의 실력자 무굴(마하구르 - 대고려 - 조선의 제후국)왕국을 앞세워 무굴제국으로 조작하였다. 무굴이란 말도 마가다국의 다른 이름 마갈이나 무갈과 같이 무정형모음의 약점을 이용해서 마하가라 즉 대고려 대가라 혹은 대가야제국을 무굴(모굴)제국으로 이름을 변형 고정시킨 것이다. 조선을 명나라나 청나라로 변모시킨 것과 거의 똑 같다. 그 변모된 명나라나 청나라(사실상의 조선)를 동쪽으로 이동시켜서, 사실상 정식 국가권력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지 않던 동쪽 왜의 세력권을 명나라 청나라의 주류역사로 만든 것과 똑같이 석가시대부터 인도의 동북지방을 석가의 활동무대인 것처럼 꾸며 놓고, 인도의 중국인 것처럼, 중천축 혹은 중인도로 이름붙이면서, 마지막 무굴제국까지 인도의 중심이 마치 중인도(현 인도의 중부지방)인 것처럼 조작해 놓은 것이다. 원천축인 조선 중조의 역사의 주무대가 신강 감숙 지방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인 것과 똑 같이 남천축국(마친, 대진, 마가다, 무굴)인 인도와 서아시아 남부 중앙아시아의 역사의 주무대는 간다라지방인 것이다. 인도역사의 두축 夏(샤-사카 스키타이 키타이 카타이 카레이 코레이 구르 가라 가야 카부타 굽타)와 商(시앙-천 티엔 친 신)의 대결과 협력으로 진행되던 이 역사를 영국의 식민지정권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잘라내 버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역사로 조작한 것인데, 장기간 좀더 강력했던 商都(天竺 天毒 身毒 信度 信頭 실라 슈라 사위)를 현대 인도의 고대사로 확정하고, 원 천축 중국은 역사에서 삭제해버린 것이다. 원 천축에서 온 기본철학(原 불교)은 브라만교 혹은 힌두교로 정리하고, 이는 코카서스지방에서 온 아리안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버린다. 원 천축 즉 조선천축의 근본뿌리와 그 사상 종교를 감 잡기 위해서는 힌두교 경전들을 참고하는 수밖에 없다. 우파니샤드를 연구해야하는 소이연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코카서스 지방 근처에 원천축의 흔적을 조작해 놓고 일본과 유럽의 사학자들의 몇몇 논저들로 얼버무려 놓고 있다. 동방견문록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보자. P111 '도시(바우닥-현 바그다드) 한가운데로 굉장히 큰 강(티그리스 강) 하나가 지나고, 그 강을 따라가면 무사히 인도양에 도달할 수 있으며, 상인들은 상품을 갖고 그곳을 왕래한다. 그 강이 바우닥에서 인도양까지 족히 열여드레 거리이며, 인도양으로 가려는 상인들이 그 강을 따라 키시라는 도시까지 내려가 거기서 인도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47)에서 '이 부분은 마치 바그다드에서 티그리스강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로 들어가는 항구도시 키시를 만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인도양 무역의 주요 거점 항구인 키쉬는 티그리스 하구에서 동남쪽으로 200마일(320킬로-서울 부산간 직선거리)이나 떨어진 해안에 위치해 있다.' 동방견문록을 집철 교감한 자들이 바그다드와 키시를 마치 가까이 있는 한 짝인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조작한 사실을 주47)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시배달과 힌두쿠시와 천축학시의 짝을 키시와 함께 여기 바그다드(縛達, 白達, 報達-P111 주43에서)에 심을려고 했는데, 영민한 김호동교수님께 들켜서 지적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바그다드 바로 남쪽에 바빌론 유적지가 대대적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슈메르 유적지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대당서역기와 왕오천축국전에서 페샤와르에 있던 파사(파랄사, 포로사푸라 - 슈라바스티 혹은 사위성)를 페르시아로 조작하는 것은 '중아아시아 5 파샤이'에서 보여 주었다. 목적은 원 천축과 남천축을 숨기고, 그것이 페르시아나 그 이동 쪽쯤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 상기하자 파샤이 때려잡자 조작혼란! 이제 한단고기/정신세계사,임승국 P25 주2)에서 '한단고기를 처음 번역한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는 한국사나 일본사를 히브리, 바빌론, 아카드, 슈메르 역사의 후손인 것으로 해석하고, 여기 나오는 나반과 아만을 아담. 이브일 것이라고 해석하고 아이시타를 노아의 방주와 관련지어 아라라트 산일 것이라는 식의 주해를 달았다.' P28 '한때 중국문화나 중국인의 기원을 바빌로니아부터라고 하는, 서양 내지 바빌로니아 기원론이 득세한 적도 있었으니 아마 가지마도 그런 학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런 학설로 한 때 유행했던 국내저작도 몇권 있다. 지중해문명과 단군조선/집문당,박용숙, 황금가지의 나라/철학과 현실사,박용숙, 한국미술사 이야기/예경, 박용숙, 이 세권만 보면, 서양 바빌론 기원론의 서양 일본 논저들이 다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대단한 이론이나 증거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문명을 담지한 언어의 뿌리 역사를 본다면, 온갖 거짓말이 금방 다 들통날 것을 뭐 그리도 야단들인지, 끙 안스럽고 가소롭다. 쯧. 고대 아리아인의 언어의 뿌리에서 페르시아>그리이스>로마 라틴어의 순서라는 것은 기본일 텐데, 어찌 그것을 역으로 돌린다는 말인가? 아리아인들은 코카사스에서 오지 않았다. 조선천축에서 온 것이다. 서구어의 모어인 아리아인의 언어 즉 산스크맅은 ㅎ한서글이다. 바로 한글이다. 한글의 고어인 실담어다. 바로 실라(신나, 신라)어다. 여기 케시미르(카슈미르) 지방을 떠나기 전에 카슈미르 출신의 인도 정치가 네루의 이야기 한 토막을 인용해 보자. 1935년에 나온 네루자서전을 1940년에 재판을 내면서, 그 서문으로 나온 글이다. 네루자서전/간디서원 P629 '내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중국, 인도, 버마, 실론,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 른 나 라 들 까지를 포함하는 연방정부이다.' -지중해부터 인도네시아까지의 나라들의 경계를 인도인이 결정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와의 경계를, 중국과의 경계를 인도가 결정하지 않았다. 대영제국이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까지 중국, 네팔의 남쪽까지 식민지의 영역으로 만든 것뿐이었다. 인도의 양심인 무저항주의자 네루는 대영제국과 프랑스와 러시아와 미국과 일본이 그어 놓은 이 악마의 경계선이 정치, 경제, 문화, 역사와 운명의 오랜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무저항적 저항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는 하나다! 아시아는 하나다! 아시아는 하나다! 아시아는 하나다!!!!!!!! |
페샤와르에서 - 석가(사카)는 카불(가비라)에서 태어나고 페샤와르(파샤, 파사, 秦都, 錦都)에서 도를 폈다
페샤와르에서 - 석가(사카)는 카불(가비라)에서 태어나고 페샤와르(파샤, 파사, 秦都, 錦都)에서 도를 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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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한헌석 조회수 : 162 08.10.14 01:49 http://cafe.daum.net/chosunsa/1Om0/28
여지껏 여러분은 발해가 반도의 북쪽에서부터 현재의 간도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을 앞글들에서 필자는 한헌석 칼럼을 인용하여 논하였다.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은 조선의 朝가 '아시'이며 '아시아'는 아샤라는 소리일 뿐 마지막의 '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에서 만들어지는 발음상의 늘어진 음절에 불과하다.
고기에 이르기를 '인류의 조상을 나반과 아만이라 하니 천하(天河)의 동쪽에 살다가...서로 만난 곳이 아리스타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리스타 또한 아리의 땅이란 뜻이다. 아시나 아리나 모두 시작 처음 아침을 뜻하며 곧 태양을 뜻하기도 한다.
한인이 한웅이 한검이 모두 한님, 하늘님의 조화 교화 치화의 삼권을 칭하는 의미라면 현 인류사는 하늘의 역사이며 태양의 역사 빛의 역사 광명의 역사이다. 즉 광명이세를 추구하는 지상문명시대이다. 이것이 현 지상 인류문명의 정체이다.
아사아가 조선이란 등식에서 놓고 볼 때 조선이란 아시의 태양, 아시의 해, 아시의 광명이란 뜻이며 조선은 곧 아시아의 아침이요 태양이요 빛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해모수가 성이 해씨요, 고주몽이 성이 고씨였다. 소서노가 소서의 신령한 빛을 받고 태어났기에 소서노라 하였으며, 알영이 또한 아리영이며 아리 아시와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이름이었다.
여러분은 빛의 역사 아시아 조선의 역사 아니 세계사 자체가 조선의 역사인데 그 역사의 비밀을 벗기는 것이 곧 광명이세하는 길이며 이 지상문명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란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필자는 조선 고려사의 핵심인 서안(평양)과 동경(낙양)과 남경(호탄, 에덴)과 송도(개경)과 의주(카스)를 비롯하여 람시성(안시성, 발흐), 해주(백주, 배성) 등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추적하여 왔으며, 지속적으로 필자의 기고를 탐독한 독자는 혼란과 곤혹스런 고통을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역사거 거대하게 왜곡되고 그 왜곡하는 세력들이 있다면 그 세력들의 게임은 의도하는 큰 그림이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Central Aisa 즉 아시아의 중앙이 바로 조선의 중앙이며 세계의 중심이란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지 않고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여러분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오늘의 기고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가비라국과 설법을 한 파사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한헌석 칼럼을 전문인용한다. 秦都와 錦都가 어디였는지를 알기 바라며, 또한 석가모니를 인도인으로 조작하는 것과 불기를 조작하는 현란한 조작자들의 솜씨를 보기를 바란다.
조선신도(신두)를 조작하여 조선을 지우면서 신두, 힌두를 인도로 완벽하게 잘알지 못하게 조작하여 놓고 불교가 있던 자리에 이슬람을 채색하여 놓는가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을 인위분리하여 동서파키스탄의 사이에 인도를 조작하여 놓고 이슬람에 포위된 채로 중앙아의 불교흔적을 깔끔히 청소하는 거대한 음모를 이미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동방견문록을 조작의 교과서로 삼고서 대당서역기를 비롯하여 조작의 뼈대를 구성하여 놓고 역사의 골격을 다시 구성하여 나가면서 완성된 현재 역사서술이 완전히 엉터리란 것을 여러분이 알 때, 오늘의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숨은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간다. 한헌석 칼럼을 깊히 탐독하여 주길 바라는 바이다. P158 '바다샨에서 남쪽으로 열흘 거리 떨어진 곳에 파샤이라 불리는 지방이 있는데, 그곳 주민들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고 우상숭배자들이며 피부가 검다. 그들은 주술과 마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남자들은 귀에 귀걸이를 달고, 금은과 진주 그리고 보석이 많이 박힌 버클을 차고 다닌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이고, 풍습도 나쁘다. 이지방은 매우 더우며, 주민들은 고기와 쌀을 주식으로 삼는다.' 파샤이는 F본에는 PASCIAI, R본에는 BASCIA Z본에는 PAXAY로 나와 있다. 파샤의 발음이 각각 다르게 전승되다가 고정된 것 같다. 이 파샤이는 법현전,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에 다 나온다. 먼저 법현전부터 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501 '여기서(숙가다국, 현 스와트)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錦都, 간다라-대당서역기의 건타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탁실라, 현 이슬라마바드)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건타위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대당서역기의 포로사포라-현 페샤와르)에 이르렀다....부처님 발우는 바로 이 나라에 있다.'
이제 대당서역기/동국역경원 P66 '건타라국의 큰 도성은 포로사포라(주34, PURUSAPURA-지금의 페샤와르)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이다. 왕족은 이미 후사가 끊겨졌으며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왕성 안의 동북쪽에 옛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보대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발우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수백년에 걸쳐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 올렸는데,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지금은 파라사(波剌斯- 뒷편에서 페르시아로 조작해 놓았다.)에 있다.' -포로사포라는 파라사국, 파사국 혹은 파라사성이다. 현재의 페샤와르다.(PURUSAPURA>퍼ㄹ사보라>페사[순경음]보르>페샤와르) 대당서역기 P354~363의 현장의 귀로에 다시 건타위국(간다리지방)을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에 언급하는 나라들을 열거해보자. 신도국 무라삼부로국 발벌다국 아점파시라국 낭게라국 파랄사국 비다세라국 아반다국 벌랄나국 등이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 카불(서경)에 수도를 둔 카피시국이 건타라국의 포로사포라를 동경으로 삼고 있었다.(바로 수나라의 서경과 동경이다.-현장이 왔을 때는 수가 고구려에 망해서 고구려의 도호부가 카피시에 세워진다. 대당서역기는 이를 돌궐이라 부른다.) 이 카피시국이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고 있는데, 대당서역기의 묘사가 참으로 기묘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무라삼부로국은 책가국(탁실라, 법현전의 축찰시라, 현 이슬라마바드)에 복속, 발벌다국도 책가국에 복속, 아점파시라국은 신도국에 통치되고, 낭게라국(P65의 나게라갈국 -카불과 페샤와르 사이의 현 낭가르하르 지방)은 파랄사국에 복속, 비다세라국은 신도국에 복속, 아반다국은 신도국에 복속, 벌랄나국은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현장의 귀로에 묘사하고 있는 지역은 현 이슬라마바드에서 카불까지의 지역인데, 그 지역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책가국, 신도국, 파랄사국, 가필시국을 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 파랄사가 페르시아란다. 얼토당토 않다. 아예 어이가 없다. 카불과 페샤와르의 서경 동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그 지역을 통치할텐데, 무슨 그런 콩가루 조작을 해대고 있는 것인지! - 쯧, 딱하기도 하다. 고구려에 패한 수나라가 망하고, 고구려 점령군이 서경 동경을 장악하고 있는데, 역시 딱하게도 이 점령군을 돌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점령군은 분명히 발흐(안시성)의 양만춘장군의 군대일 수밖에 없다. 658년에 이 점령군은 당군에 의해 다시 다시 쫒겨나지만(흔히 이 지역에서의 서돌궐이 당조에 의해 멸망했다고 운위되지만), 7세기 말에 발해에 의해 다시 재점령되는 것이다. 물론 고선지의 파미르를 넘는 위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 발해세력의 견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력에 의해 격퇴되는 것이다. 대당서역기의 파랄사국조를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P358~359 20) 파랄사국[비록 인도의 국가는 아니지만 가는 도중에 나오는 나라이며 구역(舊譯)에서는 파사(波斯)라고 한다.] ‘파랄사국의 둘레는 수만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소랄살당나(주56-SURASTHANA)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에 달한다.... 가람은 두세곳 정도 있으며 승도들은 수백명이 있고 이들은 모두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법을 익히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발우가 이 나라 왕궁에 있다.(P359의 주59-페르시아에 사원이나 승려들이 있었으며 소승교를 전하고 있었고 부처님의 발우를 받들고 있었다고 하는 기사는 다른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진위(眞僞)가 불분명하고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없다.)' -우선 소랄살당나(SURA-STHANA)성을 먼저 확인해 보자. 왕오천축국전/학고재,정수일 역주 P184 '사위국(슈라바스티, 사바티)은 "비슈누푸라나"에 의하면 슈라바스타(실라벌실다)왕이 사위성을 건설한 데서 기원했다고 하고,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이 슈라바스타왕이 슈라바(실라벌)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수라바스타성을 수라스타나성이라고 소랄살당나성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부처가 25년간 머물면서 설법한 사위국인 것이다. 수라스타나의 스타나는 ㅅ당 혹은 스탄이 틀림없는데, 이는 슈라바스티 혹은 슈라바스타의 슈라(SURA)의 성 혹은 땅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삼봉집/민족문화추진회 P329 '사위성-(안)사위는 파사국의 이름이다.'의 구절이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슈라를 현장은 실라라 부르고 바스타를 벌실다라고 부른다. 현장의 귀에는 슈라가 실라로 들렸던 것이다. 소도 수도 혹은 부도가 수터(새터, 쇠터)와 함께 쓰였는데, 수터가 수러로 발음되는 것은 류음화현상이다. 슈라 혹은 실라는 수도라는 말인 것이다. 즉 여러 왕국을 거느린 중소제국의 수도였던 것이다. 석가부처는 조그만 소왕국의 태자가 아니라 간다라지방 전체의 제왕의 태자였던 것이다. 이 파사를 산스크리트의 파라사라는 원음을 이용해 마치 현장이 페르시아에 간 것처럼, 부처님 발우까지도 페르시아로 옮겨놓는 조작을 하고, 슈라바스티(사위국)을 네팔 남쪽의 궁벽한 곳에 교살라국의 주요도시라고 심어 놓은 것이다. 선입견을 다 버리고, 상식적으로 본다 해도, 불교유적이 산같이 그득그득한 간다라지방이 불교의 중심 활동무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 지방에서 석가가 태어나고 출가하고 깨닫고 활동하고 죽었다고 보아야 상식적으로 온당한 것이 아닐까? 불교유적 유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 히말라야산맥의 고원지대에서 태어난 아기부처를 발가벗은 채로 야외에서 바가지로 물을 들이붓는 목욕을(관정식) 시킨다면 아무리 부처님 도력이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조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더욱 황당하게 조작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파사국(페르시아)>대식국(아랍)>대불림국(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까지 혜초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 참 어이없기가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이제, 동방견문록으로 돌아 가보자. 바닥샨과 카슈미르 사이에 선명하게 파샤이(파샤 혹은 파사)를 마르코 폴로는 자기발로 밟았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파사가 페르시아가 아니고, 이들이 불교도라고 선명히 이야기한다. 바로 앞의 바닥샨(파미르고원의 일부) 그 첩첩산중까지 마호메트를 신봉한다고 했는데도, 이 사위성(슈라바스티, 파사, 페샤와르)에 불교전통이 석가시대 이후로 가장 강력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석가부처는 베그람 혹은 바그람에서 태어나고( 베그람[카불 북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은 대당서역기에서는 가필시[KAPISI]라고 부른다. 카필라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명이다. KAPI 다음에나오는 시와 라는 슈라혹은 실라 두음절 어느 것이 오더라도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두산백과사전의 가비라성[迦毗羅城,KAPILAVASTU]조를 인용하면, '가비라바소도(迦毘羅婆蘇覩)·가유라위(迦維羅衛)라고 하며, 줄여서 가비라(迦毘羅)·가이라(迦夷羅)·가유(迦維)라고도 한다. 네팔의 타라이(Tarai) 지방에 해당한다. 가비라 선인(仙人)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석가모니 생존시에 사위국(舍衛國, 슈라바스티)에게 망하였다.' 인용문과 같이 가비라국은 옆에 있는 페샤와르의 슈라바스티국-사위국에 망하는 것이다.), 페샤와르(파사국)에서 깨달음을 얻고 가르치고 니렌하 혹은 니르바나하, 열반하인 인더스강(마르코 폴로가 키안수라고 부른) 옆의 그 보리수나무 아래서 열반하셨다. 바로 카불지방에서 탁실라, 카슈미르까지의 간다라지방을 무대로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 고대 불교문화의 유적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지방을 마르코 폴로는 만지 즉 (조선,고려의)만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스키타이(키타이 카타이 사카 석가 塞 夏 가라 구르 가야)가 파미르 바닥샨의 산지의 길을 열고 중천축(천조 신주 중국 - 신강)으로부터 이동하고 연결을 놓지 않고 있던 남천축의 센타였던 것이다. 문자(카불은 카부도이니, 사카족의 수도라는 말이다) 그대로 사카족의 활동무대이다. 이제 석가부처의 생몰연대를 전등록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추적해서 이 사카족이 천축 신주 천조 중국 즉 신강으로부터 언제 이 남천축으로 이동하였는지를 확인해 보자. 전등록 1권/바로보인,문재현 P45~48 '이때(부처님이 탄생하실 때)가 주소왕 26년 갑인 4월 8일이다....이때(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곧 주목왕 53년 임신년 2월 15일이었다.' 주소왕 26년은 BC1027년이고, 주목왕 53년은 BC949년이다. 현재 세계의 공식적인 불기는 2552년이다. 그러면 부처의 몰년은 BC544년이다. 전등록의 불기로는 올해가 2957년이다. 약 407년의 차이가 난다. 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의하면 석가부처의 몰년은 BC484년이다. 최두환칼럼 277호 해동고승전의 행방을 인용해보자. '《해동고승전》이 지어진 시기는 그 책에서 “佛入滅至今乙亥 二千一百六十四年”,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가 열반하신 지 올 을해년까지 2164년이라는 말로 보아, 고종(高宗) 2년인 1215년이다. 이 2164년의 숫자는 석가모니 나이 79살, 주(周)나라 목왕(穆王) 임신(壬申: BC. 949년)에 열반하신 때부터 계산한 것과 일치된다. 2003년은 불기(佛紀) 2547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석가모니는 BC.544년(丁巳)에 태어난 것이 된다. 이것은《세계대백과사전》의 경우 BC.563(?)~BC.483(?)이라고 하는 것과는 서로 19년의 차이가 있지만, 각훈이 지은《해동고승전》에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26년의 잘못) 갑인(甲寅), 즉 BC.1027년에 태어났다는 것과는 무려 483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이 옳다면 2003년은 불기 3030년이다.' 대당서역기 P68 '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신 뒤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백년이 지난 뒤 어떤 왕이 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 이름을 가니색가라고 할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석가부처는 BC272년에 돌아가신 것이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677년의 차이가 난다. 송운의 서역기를 보면(낙양가람기/눌와) P196에 보면, "내가 열반한 이백년 후에 가니색가라는 이름의 국왕이 이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 -카니시카왕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고 카니시카탑을 조성한 연도가 135년이니, BC65년에 석가부처가 돌아가신 것이 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884년의 차이가 난다. 왜 이리 한사코 부처시대를 400년 500년 700년 900년이나 후대로 끌어 당겨 내릴까?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월지 혹은 월씨의 관련조를 한번 정리해보자. BC174, 월씨, 중국으로 부터 서방으로 이동을 시작. BC165, 월씨, 흉노에게 쫒겨 감숙으로부터 이리방면으로 축출. BC162, 대월씨, 흉노에게 쫒겨 돈황, 기련방면에서 이리 방면으로 축출. BC160, 사카, 월씨의 침략을 받고 밀려 이동을 시작. BC140, 중앙아시아에 대월씨국을 세움. BC138, 漢 장건, 대월씨국에 사신으로 파견됨. /월씨, 아무르강의 유역을 공략하여 취함. - 우선 눈에 띄는 모순점은 월씨가 바로 사카인데, 그 월씨가 사카를 침략했다는 것이 조작의 난맥상이 노출된 것이다. 어쨌든 월지가 중앙아시아와 서북인도에 이주한 시기가 BC160년경이면, 석가가 그 이후에 태어났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조작자의 강박관념이 만들어 낸 하향조정인 것이다. 이제 사기 대원열전의 대월지조를 한번 인용해보자. '처음에 월지는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자 멀리 떠나 대원(페르가나)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박트리아)를 공격하여 그들을 신하로 삼고, 마침내는 규수(아무다리아강) 북쪽에다 도읍을 세우고 왕정을 삼았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남산(南山)과 강족(티베트계 부족)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이 소월지가 바로 당항 혹은 당구트 혹은 탕구트인데, 이들이 후대 7세기에 서북인도(인도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와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여 대당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당제국의 국제적인 도시, 낙양이 바로 돈황이다. 돈황을 묘사한 법현전을 인용해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494 '하안거를 마치자 다시금 나아가 돈황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가 약 80리 남북이 40리나 되는 성의 요새가 있었다.'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대도성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P241 '그(대도성) 둘레는 24마일이고 한 면이 다른 면보다 더 길지 않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한면의 길이가 6마일 즉 9.6킬로가 되니 10킬로로 쳐서 그 넓이가 100평방킬로가 되는데, 돈황은 동서 32킬로 남북 16킬로가 되면, 그 넓이가 512평방킬로가 되니 돈황이 대도의 5배나 더 큰 도성이었던 것이다. 이 돈황이야말로 신라사의 동경 금성 바로 경주인 것이다. 당나라의 낙양성이다. 우리가 대도를 수도로 한 원제국의 실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BC162년에 고비사막(그 동북쪽 변경이 돈황에서 하미를 거쳐 트루판까지다)을 지나서 천산북로를 지나 이리지방으로 대원을 지나 BC160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하여 사카가 아프간의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한 스토리다. 잘 조직된 대상(隊商)이라 하더라도 아무 방해 없이 간다면 2년은 족히 걸릴 길을 축출당하는 부족이 끝없는 정복전을 계속해서 2년만에 대하를 정복했다면, 소도 웃을 일이다. 실제 천하의 칭키스칸도 신강지역을 정복하고 대하까지 정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월지 스토리는 싸구려 3류 무협지의 소재감도 못되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억지 조작일 뿐이다. 그러면 실제 석가족 혹은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의 이동을 추적해 본다면, BC11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해의 연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두가지가 보인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성립했다는 것과,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금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중원(하화 혹은 중화, 신강)의 주인이었던 하족(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서쪽 훈 혹은 한이라고 불리는 구려(역사상 주나라)에게 밀려서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이주했는데, 그 일을 단행한 지도자가 스키타이 혹은 키타이의 키즈(기자)라고 불리는 이였는데, 팔조금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바로 誠信愛濟禍福報應의 팔조로 된 참전계경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로 고정되는 것은 그 후대의 일이겠지만. 그 내용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일치한다. -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참전계경과 우파니샤드를 생산한 주체를 추적하여 고대의 사상의 원형과 현대세계에 대한 대안적 사상의 모색에 있기 때문에 이 두 고경의 분석과 비교연구를 필생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회가 닿으면 연구서를 낼 계획이다.)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기록이 사기 한서 상서 삼국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사략에 나오고, 근세조선시대까지 단군과 함께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왔다. 이 기자동래는 신강지역의 쿠차(혹은 카라샤르)지방에서 감숙지방의 돈황으로의 사카족 스키타이(시앤-商)의 이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지의 신라의 새부도 건설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기자동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장에 돈황(탕구트조)이 나오므로 그때 좀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한편 서쪽과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시앤-商)의 이동을 추적해 보면, 기자동래의 20년후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나와 있다.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BC1100년조에 '아리아인, 갠지즈강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라는 기사다.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의 신두푸조에서 논했지만, 갠지즈란 GANGE-SE(QUIANSU 혹은 QUIAN江이라고 마르코폴로가 불렀던 인더스강을 의미하고, 인도라는 이름은 영국의 식민지경략 때, 본격적으로 불리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아리아인(하족 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철기문화를 들고 인더스강의 상류지방 즉 간다라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를 '사카남래'라고 불러 보자. 관련연표를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스키타이 인도 아리아조를 정리해 보면 (BC1751~1520, 하나라 멸망.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BC1500, 인도 북서부에 아리아인 침입, 인더스문명 쇠퇴, 이후 인더스강 유역에 H묘지문화, 주카르문화, 가르문화 형성. 리그베다 성립 BC1200, 북아시아의 카라수크,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 문화가 서아시아와 동지중해로 퍼짐. BC1122, 은 망하고, 주 성립. 은의 기자,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법금 제정. BC11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 BC10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에 이주. 아타르바베다 성립. BC900, 인도 브라만교 일어남. 카스트제도 발생. BC800, 브라만문헌의 성립(후기 베다 시대). BC600, 故우파니샤드 문헌 성립. BC563, 석가모니 태어남. 갠지즈강 유역에 앙가, 마가다 등의 소국가 분립. BC519,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간다라를 정벌. BC500, 스키타이 기마문화, 북아시아에 퍼짐. BC430, 인도 와가다왕국, 갠지즈강 유역을 통일. BC327, 알렉산더 인도 침입. (BC324, 바빌론으로 돌아옴. BC323, 알렉산더 죽음.) BC317,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조 설립. BC268,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즉위. 불전 편찬. 남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전부 지배. - 역사조작세력의 고심의 흔적이 많이도 보인다. 먼저 이 아리아인의 정체를 확인해 보자. 이 주체들의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고찰해 보면,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이들의 언어를 우리는 산스크리트라고 부른다. 그 종교를 우리는 힌두교라고 부른다.(연표에서는 브라만교라고 불렀지만.) 그 문화를 위 연표에서 주카르문화와 가르문화라고 불렀다. 수카르(<스카트<스카타이) 혹은 가르(가트<[ㅅ]카타이) 혹은 가라 혹은 가락 혹은 가야 혹은 굽타 문화는 사카문화이고, 중원의 夏문화인 것이다. 그 종교는 힌두교 혹은 신두교다. 신두는 신독, 천독, 천축이다. 바로 천부도이고 부도교이고 부다교이다. 그 내용이 우파니샤드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범신론이면서도 주재자가 확실히 있는 유일신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날님 상제 제석을 모시는 原불교인 것이다. 바로 참전계경의 하날님이고, 천부경의 하날님을 모시는 부도교 부다교이다. 우파니샤드와 참전계경을 본격적으로 비교분석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 언어는 산스크리트, 즉 인도-아리아어로서 '그 잘난' 아리아인의 서구어의 모어로 전세계인이 알고있는 바로 그 언어다. 앞에서 분석한 적이 있지만, 산스크리트는 ㅎ한서글(書契)이다. 필자가 이전에 산스크리트가 하도 궁금해서 'ㅎ한글 고어사전 실담어 주석'/강상원,한국세종한림원을 붙잡고 한두어 시간 뒤적뒤적 꼬부랑꼬부랑 단어를 그 주석부분만 읽고 있는데, 세상에나! 그 모든 자음과 모음이 읽혀지는 게 아닌가? 한글 자모와 똑같은 글자가 거의 3분의 1이나 되지 않는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금 연구를 했더니, 그 발성원리와 제자원리가 훈민정음과 완벽히 똑같지 않은가? 놀라와라!!!! 산스크리트가 한글이라니. 한글이라니, 이게 무슨 경천동지의 일이고, 대경실색의 일이란 말인가? 역사조작의 온갖 굴레가 훠언히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남천축이 다름아닌 남조선이란 말이 아닌가? 그러면 중천축인 천축이 천독, 신독이 조선의 천조 신주 중국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하 여기 파미르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가 인류사의 주무대라는 것이 잡히는 순간, 고조선부터 근세 조선까지의 그 중앙의 황제직할지 중국이 신주 천조 중원 천축이 바로 중앙아시아(좁게는 신강)라는 것이다. 이제야 훠언히 알겠다. 왜 칭키스칸이 중앙아시아만 정복하느라 20년을 소모전을 했는지? 왜 대영제국이 인도를 200년이나 식민지로 붙잡고 대륙경영을 했는지? 왜 러시아를 중앙아시아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조선 중앙의 만주지역을 파괴하고 러시아화시키고, 아프간 파미르 천산 라인으로 러시아를 견제했는지? 러일전쟁의 무대가 여기 이 라인에서 벌어지고, 1905년의 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이 진행되는 중에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이 늙은 호랑이(조선) 처리의 뒷거래를 하면서, 영국 미국이 러시아를 밀어 붙이는 과정에서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905년 러시아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왜 러시아의 비밀조직쪽으로 미국의 검은 자금이 흘러 들어갔는지, 미국자본가들의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일본을 지원하는지 훤히 알겠더라는 것이다. 아리아인은 산해경의 '조선 천축'人이었던 것이다. BC1200년조의 북아시아의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문화가 서아시아와 지중해지역으로 퍼졌다는 말이 바로 중앙아시아 중천축 즉 조선의 중국으로부터 퍼졌다는 말인 것이다. BC519년은 이 년표대로라면, 석가 나이 56세 때 한창 간다라 지방에서 왕성하게 설법하실 때, 다리우스가 간다라를 정벌했다면, 불경에 온통 그 사건의 일화가 가득 들어 있을 텐데, 엉터리 조작일 따름이다. 도대체 BC1520년과 BC1122년에 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민족대이동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夏)는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520년까지 존재했다고 기록된 중국의 옛 나라이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중국의 첫 국가이기도 하다. 상나라의 탕왕에게 멸망되었다. -위키백과사전의 하나라조에서 인용. 한단고기/임승국,정신세계사 P89~90 '설원의 기사를 옮긴다. "....탕임금은 걸왕을 쳐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다." BC1520년경에 멸망한 지배층과 그 부족이 아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중원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한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상(商)이라고도 한다. 문서자료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여 이 왕조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전설적인 최초의 왕조 하(夏)의 계승국가로, 창건 연도는 BC 1760~1520년이며 몰락시기는 BC 1122~1030년으로 추측이 다양하다. 통치기간은 BC 1766~1122년으로 전해진다.’ - 브리태니커 은나라조에서 BC1122년에 중원을 차지했던 은나라가 망하고, 이제는 동쪽의 감숙성지방으로 이 화족이 도망치게 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도망치는 사건을 기자동래와 사카남래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제 남쪽에 자리잡은 하(사카, 시앤-商)족이 간다라지방을 장악하고, 정치문물의 안정화가 되어가는 시기에 그 이전에 이동해 왔던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나라의 사카(스키타이)족의 혼란한 사상 종교상황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역사적 과제를 석가부처가 맡게 되는데, 바로 BC1027에 태어나서 BC1000년경에 대각득도를 하는 것이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일인가? 그런 민족이동과 과거에 이동해간 고대적 사상과 정치 문화적 과제를 떠맡는 것이 그 지방(간다라)의 황태자로서도 얼마나 적확한 문제의식과 정면대결한 것인지가 사무쳐지도록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런 석가를 국적불명의 사상적 고아로 만들어 놓는다는 말인가? 이 시기 비정이 잘못되면, 역사의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만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 앞으로 더 많은 실증적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
임나(가야)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5> 성왕과 가야(임나) 삼총사
부제: 임나(가야)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백제의 역사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 : ? ~?)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지만 근초고왕·근구수왕 때의 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기록이 한국쪽에서는 거의 없고 주로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모꾸라 곤시(Mokurakonshi)'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이 당시의 말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가급적 이 말들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는 현재의 창녕·경산·함안·합천·고령 등의 가야와 신라 지역을 공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여인을 맞아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리만치)]를 낳습니다. 모꾸마치(木滿致)는 구이신왕에서 문주왕의 시기에 활약한 백제의 유명한 대신입니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소가씨(蘇我氏)가 나옵니다. 천황보다 더 큰 권력을 1백여년을 장악했던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소가씨가 바로 이 모꾸마치(木滿致)의 후예로 알려져 있죠. 모꾸마치는 개로왕의 조신(朝臣)으로 국란을 당하자 피신하여 문주왕(475~477)을 등극시켰던 사람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천황이 모꾸마치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고 하는데 그 후 백제에서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에는 소가노마치[소가만치(蘇我滿智)]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일본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성씨에 차이가 있지만 이름이 같고 활약한 시기가 같은데다가 한반도에서 활약한 이후 일본으로 갔고 이후에는 일본에서만 기록이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물론 소가노마치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노마치의 행태를 보면 그는 모꾸마치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모꾸라곤시[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이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였고 이 사람이 바로 『일본서기』의 소가노마치(蘇我滿智)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의 이름들이 모꾸마치의 출신을 짐작하게 합니다. 먼저 소가노마치(蘇我滿智)의 가계를 보시죠.
소가노마치(蘇我滿智) ― 소가노가라꼬[蘇我韓子(소가한자)] ― 소가노코마[(蘇我高麗(소가고려)] ) ―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소가도목)] ― 소가노우마꼬[蘇我馬子(소가마자)] ― 소가노젠도꾸[蘇我善德(소가선덕)] ―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소가입록)]
이들 소가씨 가문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년 간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이름이 한국인을 의미하는 한자(韓子 : 한국아이), 고려(高麗) 등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의 정식이름은 소아대랑임신안작(蘇我大郞林臣鞍作)인데2) 여기서 안작(鞍作)이라는 이름은 백제계의 씨족명과 같고 씨에 해당하는 임씨(林氏)는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백제인 목귀(木貴)의 후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꾸마치는 475년까지는 가야지역에 남아 그 지역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3) 그렇다면 모꾸마치 즉 소가노마치는 가야지역이 바로 자신의 영역이니 이 지역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성왕과 일본의 킨메이 천황이 유난히 이 가야지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천황의 기록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즉 가야지역 구체적으로 보면 임나 지역(금관가야 : 현재의 김해지역)에 대한 킨메이 천황과 성왕의 집착은 마치 동일인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이 가야지역에 대해 이만큼 집착한 예는 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부(일본)에서는 킨메이 천황이 임나 출신의 왕자가 아닌가 하는 말이 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이 소가씨의 혈통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6세기 당시의 가야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신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정치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4~5세기의 가야는 철생산이 풍부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에 철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지』「변진(弁辰)」조에는 가야의 철이 한(韓), 예(穢), 낙랑(楽浪), 대방(帯方) 등에 까지 철을 공급된 내용이 기록되어있죠. 이것은 한편으로는 고구려, 신라, 부여(반도부여 및 열도부여) 등의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야는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전통적으로 부여계(백제, 야마토)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5세기경 고구려가 신라를 강력하게 지원함에 따라 큰 타격을 받게되었고, 6세기 경에는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친신라계와 친부여계로 분열되어 가야 자체의 결속력이 매우 약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532년 법흥왕이 본가야(本伽倻: 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561년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평정함으로써 가야는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6세기 이후 『삼국사기』에 줄기차게 나타나 신라를 괴롭히던 왜(倭)가 사라져 버립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500년 이후 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신라의 침공으로 정신이 없는데 웬 침략을 하겠습니까?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554년 백제·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후 대부분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투항합니다. 6세기 중반 대가야도 신라에 멸망당합니다(562). 즉 전기가야 연맹의 수장이었던 금관가야(현 김해 지역)는 532년에 멸망하고 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는 562년 멸망한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500년 이전의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倭)는 일본(日本)이 아니라 경남해안 지방의 가야인 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이 시대의 왜구(倭寇)는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지방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가야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즉 가야의 멸망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반도부여계입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나 성왕의 심경을 알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로부터 신라는 무도하였고 식언(食言)을 하고 신의를 위반하여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옛날에는 (신라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충직한 나라[股肱之國]였으나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려 해도 오히려 후회하게 될 뿐이다."4)
당시 반도 부여(백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잃었던 한강유역을 회복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가야지역(임나)을 반도부여의 영역으로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야지역은 신라와 각축을 해야했고 한강유역의 회복은 신라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반도부여는 결국 두 지역을 모두 신라에 빼앗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성왕의 숙부인 게이타이 천황은 527년(? : 게이타이 21년) 오미노게누노오미(近江毛野臣)를 대장으로 삼아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지만 신라의 사주를 받은 이와이(磐井)의 반란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반도와 열도의 역사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게이타이 및 그의 직계 자손들이 멸족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금관 가야(이른바 임나)의 김구해왕은 532년에 왕자 2명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고 있습니다(금관 가야의 멸망). 일부에서는 소가씨가 이 금관가야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일본의 천황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여계의 직계혈통이 아닌 사람으로 천황을 옹립했을 경우 정통성의 시비는 물론이고 당시 소가씨가 이런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면서까지 천황을 옹립할 정도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던 상황입니다. 오히려 킨메이 천황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이 소가씨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가씨는 킨메이 천황가와 겹겹이 혼인을 함으로써 '소가씨의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킨메이 천황은 친소가씨(親蘇我氏) 계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킨메이 천황이 과연 성왕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혈족들이 몰살당했고 이후 소가씨와 킨메이의 연합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가씨(임나)와 킨메이(야마토)를 이어주는 사람으로 성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따라서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지지기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 사람 즉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을 연결하는 고리는 임나 즉 가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임나 삼총사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홍윤기 교수와 고바야시 교수가 제기한 '성왕 = 킨메이 천황' 이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시다. 우리는 이 분석을 통해 '성왕 = 킨메이 천황'라는 가설을 밝힐 수 없을지는 몰라도 열도 부여의 역사를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는 계기는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본 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성왕과 깊이 관련되어있고 이것이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동일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부분을 살펴봅시다.
임나일본부와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조에 이른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는 이미 그 일부를 살펴보았고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던 사안이라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는 없지만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한일합방을 앞두고 강조하게 된 대표적인 정치적 사안이기도 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약 2백여 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두었다는 것이 골자인데 이것을 요약 정리한 사람은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였지요.
우케다 마사유키(請田正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부는 유라쿠 천황조에 1건이 있기는 하지만 설화적 요소가 강하여 조작으로 의심이 되고 나머지는 킨메이 천황조에 집중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케다마사유키 교수는 제25대 부레쯔 천황 이전에 나타나는 임나 관련 기사들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선언하였습니다.5)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 한반도로 말하면 성왕 때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고 성왕 이후에는 임나일본부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임나문제에 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에 직접적인 의사를 전달한 예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만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한 예는 4회나 확인이 됩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4년 4월, 11월, 5년 2월, 11월 등입니다.6) 즉 임나일본부는 야마토의 직속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직속기관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것은 성왕이 열도에 대해 많은 일본계 관료들을 보낸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즉 이 시기에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가 제대로 구축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들이 반도와 열도로 교환 근무하였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게이타이 천황 ― 킨메이 천황의 시기의 대략 50여년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교환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고구려와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지만 일본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7) 즉 백제 - 가야 - 열도의 통치구조를 제대로 구축하려고 한 시기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성왕의 꿈은 백제 - 가야 - 일본을 연결하는 범부여 제국의 건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부여였던 것이지요. 만약 가야가 신라나 고구려에 넘어가게 되면 남부여는 허리가 짤리는 형국입니다. 만약 백제와 야마토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면 임나의 상실이 일본의 국가적인 과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도 성왕의 이러한 정치적 책동에 대하여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가야 - 왜 지역이 백제와 강하게 결합된다면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큰 압력을 받아야 하고 남으로는 범부여 제국이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신라는 두 가지의 국가 전략을 수립한 듯합니다. 신라의 한반도 남부 전략은 가야의 소국들을 멸망시켜 백제의 허리를 자르는 것이고, 한반도 북부 전략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전략의 한 가운데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23년 (562)에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해가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한 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또 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송서(宋書)』에서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가야를 빼앗았다고 되어있습니다.8) 다시 말하면 가야는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나니 임나일본부니 하는 것도 결국은 백제의 지배영역에 속하는 기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임나일본부가 외교교섭 창구의 역할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교수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에 없으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는 천황 통치의 정통화를 목적으로 한 책인데, 이 목적과 관련해서, 한반도 국가들이 원래 번국(蕃國)이었던 만큼 일본에 복속돼야 한다는 점, 천황이 한반도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거느리는 존재라는 점 등을 보여주는 것이 주요한 주제였다는 것입니다.9) 다시 말해서 요시노 교수의 분석은 이 같은 천황국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이에 맞추어 변조되었고 임나일본부도 그 하나의 예라는 주장인데 타당한 분석입니다.
이와 같이 그 동안 논란이 극심했던 임나일본부 역시 만약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거나 천황과 백제왕계가 같은 계보라면, 상당한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즉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직속기관이었고 가야 역시 백제의 지배영역(또는 백제가 가야 연합세력의 맹주역할)에 속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킨메이 … [관계 모호] … 성왕 → 임나일본부의 관계의 관계는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동일인일 가능성을 증가시킵니다. 쉽게 말해서 백제의 성왕 또는 킨메이 천황이 동일인이면, 이 분은 백제(반도부여 또는 남부여) - 가야(임나일본부) - 왜(열도부여)를 제대로 통치한 것이며,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를 제대로 구축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임나에 대한 심정적인 태도가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킨메이 천황은 죽는 날까지 임나의 부흥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킨메이 천황 32년에 천황은 황태자의 손을 잡으며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 옛날처럼 두 나라가 친하면 죽어서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도 서거합니다. 그런데 이 말투가 성왕이 임나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 거의 흡사합니다. 성왕의 임나에 대한 행한 많은 연설들이 『일본서기』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몇 가지를 보시죠.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10)
"우리는 마치 형제처럼 가까우니 우리는 그대들을 아들이나 아우로 생각하니 그대들도 우리를 아버지나 형처럼 대하세요."11)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성왕이 연설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연출됩니다만 이것은 오히려 조작된 사료라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킨메이 천황이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이라면 이들은 사촌 간이고 서열상으로도 대등하고,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의 관계를 본다면 오히려 성왕이 킨메이 천황보다도 서열이 더 높을텐데 마치 성왕이 황제의 명을 받은 신하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의 지적처럼 『일본서기』가 정치적 목적으로 내용들을 많이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성왕이 임나일본부에게 말했다. '천황(킨메이 천황 - 필자 주)이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만일 임나가 멸망하면 그대(성왕 - 필자 주)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고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고 하셨다. 나는(성왕 - 필자 주) 삼가 천황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송구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가 융성하게 할 것을 기원하였다. 나는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12)
위의 말은 실은 성왕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천황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는 없었고 따라서 조서(詔書)나 조칙(詔勅)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일본서기』에 헤아릴 수도 없이 나타나는 백제왕이 천황에게 올리는 표(表)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과의 관계를 참고해보더라도, 백제 성왕의 서열과 킨메이 천황의 서열이 대등했거나 오히려 부여계 전체로 본다면 성왕의 서열이 더 높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는 말도 앞뒤가 맞지 않지요. 지금까지 본대로 야마토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사람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고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인데 언제 누가 어떤 천황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또 이 때까지도 열도의 통일도 제대로 되지 못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위에서 인용된 문장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의 작문 실력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관의 태도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거늘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역사를 날조하는 수준이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나 북한(DPRK)의 주체사상 하의 한국사 편찬 수준과 다르지 않군요. 이것이 어떻게 역사가 됩니까? 그리고 왜 이런 사실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국민들이 모두 믿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열도쥬신(일본)은 위험한 나라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반도쥬신(한국)은 소중화주의 근성에 빠져 역사를 왜곡·날조한다면, 열도쥬신은 소중화주의뿐만 아니라 유아독존식 사관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의 행태는 쥬신의 미래를 한없이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소중화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반도(한국)는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빠져있고, 열도(일본)는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져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성왕의 그 많은 말들은 그저 남부여 제국으로서 백제(반도부여) - 가야(임나) - 일본(열도부여)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기록들로 보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이 가야 지역이 매우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려는 성왕의 노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조에 있는 임나에 대한 수많은 연설들은 사실상 한 사람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만약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다른 인물이었다면 굳이 성왕의 입을 통해서 킨메이 천황의 말이 나올 이유가 없지요. 그저 사신이나 신하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조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이 성왕과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입니다.
필자 주
(2) 참고로 고대의 일본에서는 만주 쥬신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씨와 성을 따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아시끼다군 일라(葦北君日羅)라고 하면 葦北은 지명에서 따온 씨이고 君은 수장에서 전환된 성이고 日羅가 이름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90쪽.
(3) 김현구, 앞의 책, 67쪽.
(4) 『日本書紀』欽明 5년 冬10月
(5) 請田正幸「6世紀前期の日韓關 -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40쪽.
(6)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87쪽.
(7)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55쪽.
(8) 김현구, 앞의 책, 76쪽.
(9)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천년사』(책과함께 : 2005)
(10) 킨메이 천황 2년에 성왕이 가야 사람들에게 한 말. 원문은 "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여름)
(11)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가을)
(12) 『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가야와 백제의 30년 전쟁 - 가야의 본토수복 전쟁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4) / 가야의 본토수복전 2005/02/27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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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9년 열도의 후왕으로 부임한 무내를 회유한 가라의 근강모야신이 6만 대군을 이끌고 본토수복전을 전개하나 백제에 완패하고 열도로 철수한다.
서기 계체기 21년 6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근강모야신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임나로 가서 신라에 패한 바 있는 남가라, 녹기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하고자 하였다』
신공기 49년(서기 369년) 3월조에는 6만의 가라군이 가라본토로 진입하여 백제군과 전투를 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황전별,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해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렀다. 바야흐르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때 누군가가 말하기를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 다시 사백,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줄 것을 요청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장수다]에게 명해 정병을 이끌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게 했다. 탁순국에 모두 모여 신라를 공격하여 이겼다. 이어서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거듭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베어[屠] 백제에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역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피중(피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절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 황전별, 목라근자 등이 같이 의류촌(意流村/지금 州流須祇라 한다)에서 만났다. 서로 보고 기뻐했다. 두터운 예로써 보냈다. 천웅장언만 백제왕과 더불어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피支山)에 올라 맹세했다. 또 고사산(古沙山)에 올라 반석 위에 같이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우려가 있고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떠내려갈 우려가 있다. 고로 반석에 앉아서 맹세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고 다함없이 항상 서번을 칭하며 춘추조공 하리다"라고 하였다. 천웅장언을 데리고 수도[都下]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보냈다』
백제와 가라의 결전
백제가 서기 367년에 가라를 병탄한 후 서기 368년에 경진주신이 도왜하여 출운에서 대기귀신으로부터 국양을 받아내고 이듬해 서기 369년에 무내를 후왕으로 파견하자 가라는 무내를 회유한 후 연합으로 백제에 다시 대항하여 본토수복을 위한 결전을 하게 된 것이다. 본국을 빼앗긴 후 2년만인 서기 369년 3월에 근강모야신이 6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라본토 수복을 위해 진입하자 백제는 다시 남해안 가라칠국을 완전히 격파하고 빼앗은 사건이다.
등장인물
우선 이 전역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전별, 녹아별, 구저, 사백, 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 초고왕, 귀수왕자, 천웅장언 등이다. 이들이 실사상 각각 누구인지를 비정하는 것이 실사를 바로 해석하는 지름길이다.
황전별은 응신
황전별, 녹아별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은 가야측이다. 황전별은 '아라다와께'라고 읽는데 '아라[荒]'>'阿羅'이고 '田'은 응신의 화풍시호 예전별명에서 딴 연결고리다. '別'은 존칭이다.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止美連; 尋來津公同祖 豊城入彦命之後也 四世孫 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 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持君 三世孫熊 次新羅等...
(이하생략)...(河內國皇別)
풍성입언명의 4세손 황전별의 아들 다지[田道]도 나오는데 '다지'도 응신이다. 지군(持君)이란 이름에서 모지[持]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무쯔[牟都/六], 무지[貴], 마다[末多/派/岐/股], 모도[本], 마도[薯童/末通], 모다[牟大] 등과 같은 '마다'계열 이름이다.
출신국명 시라기[新羅]를 바로 이름으로도 쓰고 있다. 풍성입언명은 가야가 개척한 구주북부 풍국(=후꾸오까현 일대)의 이름을 키워드로 하여 지은 아라사등의 이칭이다. 풍국을 개척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풍성을 붙인 것이다.
응신과의 대수차이는 두 이름이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를 감안하여 늘린 것이다. '마다'계열 이칭 무지[貴]가 들어간 이름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荒荒公; 任那國 豊貴王 之後也(攝津國諸蕃)
아라아라[荒荒]>阿羅阿羅이고 아라라[荒荒]로 읽어도 阿羅羅가 되어 마찬가지다. 임나가 아라가야와 동체임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의 국호 '시라기'를 성씨로 삼은 경우를 하나 더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新良貴; 彦波염武노자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位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右京皇別)
시라기[新良貴]라는 성씨의 조는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이라는 긴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통상 줄여서 언파불합존이라고 부르는 신무의 父다.
도반명은 신무의 형이고 신무가 응신(=예전)이므로 그 형 예진별명인 것이다. 도반명이 시라기.노.구니[新良國/新羅國] 출신이고 신라국주도 했다고 하는데 이 신라는 구주 서남단에 있던 천일창의 신라국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들의 본국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천일창이 응신이고 그들 부자·형제들이 개척한 고대국가이기 때문이다.
도미.노.무라지[止美連]조의 '심래진공'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廣來津公; 上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之後也(河內國皇別)
廣來津公; 下養公同祖 豊城入彦命四世孫 大荒田別命之後也(大和國皇別)
성씨록 주에 '광(廣)'이 '심(尋)'으로 기재된 저본도 있다하므로 '광래진공'은 위의 '도미.노.무라지[止美連]'조의 '심래진공'과 동일한 성씨다. 대황전별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황전별인 응신(=예전별명)을 기준으로 그 형 예진별명에게 '큰 大'자를 붙인 것이다. 조가 같다는 '상모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上毛野朝臣; 下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 大泊瀨幼武天皇(諡雄略)御世 努賀君男百尊...(중략)...百尊男德尊 孫斯羅...(이하생략)...(左京皇別)
풍성입언명의 5세손으로 나오는 다까하세[多奇波世]가 응신의 형 예진별명이다. 위의 '광래진공'조에서는 4세손으로 나왔으나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를 감안하여 대수를 조정한 것이다.
역시 후손 중에 국호를 이름으로 삼은 시라기[斯羅]가 있다. 斯羅가 新羅인 것이다. 이 가미쯔게노[上毛野], 시모쯔게노[下毛野] 성씨가 바로 계체기 21년 6월조의 근강모야신(=아라사등)의 후손인 것이다. 노[野]를 누[野], 나[野]로 읽는 경우도 있다. 상모야와 조가 같은 주길씨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住吉朝臣; 上毛野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左京皇別)
스미요시[住吉]는 가야계 성씨이자 지명이다. (*1)주길신사는 가야 응신의 삼형제와 신공을 제신으로 모신 신사다. 서기 이중전기에서 태자(=초고대왕)를 화공으로 전사시키는 주길중황자가 있는데 이 인물은 주길신사의 남신 셋 중에서 '가운데[仲]'란 뜻이고 아라사등의 중자인 것이다. 그래서 이칭에 '仲/中'자가 종종 따라다니는데 황극기의 中大兄도 응신이다.
다까하세[多奇波世]는 다까하세[竹葉瀨/竹合]라고도 하는데 다까[多奇/竹]는 다께[武/建]와 같아 장남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고 여기서도 보면 원래는 다께[竹/武/建]이던 것을 다까[竹/多奇]로도 발음하므로 열도어에서 '에'와 '애'는 구분이 되지 않아 때로는 (*2)'아'로도 발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데라스[天照]가 아마다라시[天足/天帶]로 발음되는 것도 같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으'가 '이'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도 동시에 볼 수 있다.
(*1) 위치에 대한 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1) '和名抄'에 「攝津國·兎原郡·住吉鄕(현 神戶市 東灘區 住吉)」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는 2) '화명초'에 「섭진국·주길군(현 大阪市 住吉區)으로 현 住吉大社('연희신명식'의 섭진국 주길군 住吉坐神社)가 있는 곳」이라 한다. 주길대사는 大阪市 住吉區 住吉町에 있고 서향이다. 本殿은 동편 안쪽 제1전으로부터 전방으로 순서대로 제2전, 제3전이 있고 제3전의 남쪽에 제4전이 있다. '住吉大社神代記'에 의하면 제신은 제1전은 표통남, 제2전은 중통남, 제3전은 저통남, 제4전은 姬神의 궁으로 氣長足姬皇后로 되어 있다.
(*2) 邪馬臺는 '야마다이'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고 '야마다'로 발음해야 하며 이것이 후대에 서기에서 열도를 지칭하는 말로써 야마다[山田]로도 표기되고 야마도[倭/大倭/和/大和/日本/大日本/東]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ㄷ+아래아)>(다, 도)로 갈라졌다. 말하자면 '야마또'의 어원은 야마다[邪馬臺]인 것이다.
녹아별은 무내숙니
가가.노.와께[鹿我別]는 무내숙니다. 무내의 이칭에 이가가[伊賀我], 이가가[伊香我], 히가가[日香蚊] 등이 있는데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 '가가'라는 발음이다.
穗積朝臣; 石上同祖 神饒速日命五世孫 伊香色雄命之後也(左京天神)
穗積臣; 伊香賀色雄男 大水口宿니之後也(左京天神)
采女朝臣; 石上朝臣同祖 神饒速日命六世孫 大水口宿니之後也(右京天神)
佐爲連; 速日命六世孫 伊香我色乎命之後也(左京天神)
신요속일명에서 神과 命은 존칭이고 요[饒]는 요[餘]와 발음이 같고 글자모양이 거의 같은 것을 이용하여 살짝 바꾼 것이고 "요[饒]>요[餘]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日]"이란 뜻으로 백제 초고대왕이다. 이것이 신공기 46년조부터 55년조까지 등장하는 초고왕의 다른 표기 速古王과 '速'자를 키워드로 하여 연결되는 것이다.
'좌위련'조를 보면 그냥 '속일명'이라고도 기재하고 있다. 이가시고오[伊香色雄]나 이가가시고오[伊香賀色雄/伊香我色乎]는 전부 동일인물이며 한자가 달라지거나 글자가 한 자 빠져도 계보를 보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이름에서 중간에 '가가'란 발음을 따서 지은 이칭이 녹아별인데 別은 존칭이고 가가[鹿我]인 것이다.
또 이 이름에 든 '사슴 녹(鹿)'자는 이 인물의 또 다른 이칭 소가이루까[蘇我入鹿]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원래는 3세손 즉 손자이지만 요속일과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차를 고려하여 대수를 적당히 늘린 것이다.
이 '가가'란 발음을 키워드 삼아 만들어 쓴 사례를 하나 더 보면 서기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 본문에 경진주신이 무옹퇴신과 함께 열도로 건너가 대기귀신과 그 아들 사대주신으로부터 나라를 이양 받는 내용이 나오고 그 말미에 있는 이설에 보면 경진주신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성신 '가가세오[香香背男]'가 나오는데 이 인물도 무내숙니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구저는 귀수태자
구저가 귀수태자라는 것도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오랠 久', '근본 저'인데 이 이름의 뜻은 "영원한[久] 시조님[저]"이라는 뜻이다. 시호 "고귀하신[貴] 시조님[首]"과 같은 격이다. 지금 이 기사에서는 일인이역하고 있는 것이다.
목라근자=천웅장언=침류왕
모꾸라곤시[木羅斤資]는 침류왕이다. 모꾸라[木羅]=마꾸라[枕]이기 때문이다. 곤시[斤資]>곤시[近子]>太子인 것이다. 천웅장언도 침류왕인데 이름 침류에서 나가스[流]의 발음을 따고 존칭 '별 彦'을 붙여 서기 신무전기에 등장하는 이칭 나가스.네.히꼬[長髓彦]를 짓고 여기서 다시 '스[隨]'를 뺀 나머지로 나가히꼬[長彦]를 만든 것이다.
천웅의 千도 사실은 天인데 같은 음의 글자로 바꾼 것이고 熊은 '크다'는 뜻이다. 천웅장언은 "백제의 큰 장언"이라는 뜻이다. 역시 일인이역을 하고 있다.
관련 당사국
이 전역에 등장하는 국명을 열거해 보면 서기를 쓴 주체인 일본 그리고 백제, 신라 그리고 소국이름으로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침미다례가 있고 소읍으로 비리, 피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가 있고 지명으로 고해진, 의류촌(=주류수기), 피지산, 고사산 등이 나온다.
일본
일본은 이 당시에 없었다. 8세기에 서기를 지으면서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일 뿐이다.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는 가라의 응신이 서기 390년에 세운 대화왕조이기 때문이다. 그 21년 전인 지금은 일본도 왜도 없다. 다만 그 이전에 있던 열도의 소국들을 일러 대륙사서 등에서 일반적으로 왜라고 칭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를테면 비미호의 야마다도 왜국이라 했고 그 후 응신이 세운 대화왕조도 왜라고 불렀던 것이다.
신라
이 신라는 아라가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것으로 경주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라의 이칭 신라를 이용하여 마치 적대국인 것처럼 꾸미고 가라 연합체 내의 소국들 이름을 열거하며 줄줄이 정벌한 것처럼 이중구조로 기술해둔 것뿐이다.
소국들
비자발(比自발)>비지발>빚발로 표기할 수 있고 뜻은 '빛벌/빛땅'이고 지금의 경남 창녕으로 비정된다. 다른 표기로 비사벌(比斯伐)>비시벌>빗벌로 표기되고 뜻도 동일하다. 이것을 보면 '빛[光]'의 사국시대 고어형태[音]는,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현대어 '빛'과 음가가 같은 '빚', '빗'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斯]와 지[自]는 현대어에서 사이시옷(사이지옷)이라 할 수 있다. (발=火+本)
남가라는 김해 정도로 보이며 사기 김유신열전에서 유신비(庾信碑)를 인용한 문구에도 금관가야를 南加耶라고 부르고 있다. 안라는 창원·함안 정도로, 다라는 합천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라는 소가야로 보면 고성 정도일 것 같다.
합천은 고명이 대야(大耶) 또는 대량(大良)인데 야(耶)=라(羅)=라[良]이고 '大'는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로 음독하여 '다'로 읽혔고 '多'로 표기될 수 있으므로 多羅=大耶로 본다. 기타 침미다례는 제주도고 녹국과 탁순은 불명이다. 사실 이런 소국들 이름도 아라가야, 금관가야(=임나), 대가라(고령이 아님)가 전부 동체였음을 감안하면 자잘하게 찢어서 이야기를 꾸민 것을 알 수 있다.
침미다례(枕彌多禮)의 경우는 최초 훈독 '(ㅌ+아래아+ㅁ)[枕]'이 음독 '침[枕]'으로 바뀌고 다시 글자모양이 흡사하고 음이 같은 침[침]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침=心 방변+枕-木)
그런데 최초 발음 '탐/톰'을 유지하려는 기분으로 발음하면 '미' 발음이 자연스럽게 첨가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원래는 '탐다례', '톰다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톰/탐[枕]은 '토막'의 뜻이므로 '토막땅'이라고 할 수 있고 '섬[島]'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또 훈독 (ㅌ+아래아+ㅁ)[枕]>(톰, 탐)으로부터 한자가 탐[耽]으로 바뀌어 탐라[耽羅]로 쓰인 것 같다. 여기서 다시 '탐모라', '담모라', '다모라'라는 음이 나올 수 있다.
백제와 가야 사이에 가야본토를 두고 일대결전을 벌인 것을 마치 왜와 백제의 연합이 경주신라를 격파하고 그 땅을 빼앗아 백제에 준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결과를 보면 그 빼앗긴 영역이 전부 가야영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겉보기 문장만 보아도 이런 것은 경주신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여기서 말하는 신라가 가라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고령에 있던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승람 고령현조에서 2가야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후대에 신라에 투항한 시기나 인물도 다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입장을 뒤집어 기술
백제가 가야에게서 빼앗은 것을 마치 왜가 신라로부터 빼앗아 백제에게 준 것처럼 입장을 뒤집어서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신공이란 인물은 실사상 가야왕족을 모델로 하여 꾸며진 인물이므로 이 경우는 백제를 낮춘다든가 적으로 한다든가 하여 입장을 거꾸로 기록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천황이 백제왕족으로 비정되는 인물일 때는 가야가 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런 것은 일본서기 기술기법의 일종이다.
주류수기
州流須祇는 뒤의 '수기'란 말이 문제다. 주류수기가 반도어, 열도어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須祇는 발음이 '스기'로서 '스기[城]'와 같다. 즉 州流城으로서 이것이 뒷날 백제부흥운동에 나오는 주유성(州柔城/周留城)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실사가 아니고 상징적인 분식기사이기 때문이다.
기타 지명들도 불명인데 일일이 비정한다는 것 자체도 사실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다. 인물도, 국명, 지명도 전부 꾸며져 있고 사건의 성격도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반석 위에 앉은 의미
그런데 위의 신공 49년조 기사 속에는 일본왕실의 중요한 비밀이 하나 들어있다.
『唯千熊長彦與百濟王 至于百濟國 登피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 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천웅장언만 백제왕과 더불어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피支山)에 올라 맹세했다. 또 고사산에 올라 반석 위에 함께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우려가 있고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떠내려갈 우려가 있다. 고로 반석에 앉아서 맹세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고 다함없이...』
석상에 앉은 왕실의 황조신
지금 이 문장에 등장한 인물은 단 둘이다. 천웅장언과 초고왕인데 각각 침류왕과 초고대왕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어디에 앉았는가? 「共居磐石上」 > 「함께 磐石上에 앉았다」 > "(초고대왕과 침류왕이) 함께 (磐)石上에 앉았다" > "(초고대왕과 침류왕이) 함께 石上神宮에 鎭坐했다」라는 암호가 들어있는 것이다.
석상신궁의 제신은 셋이다 주제신은 초고대왕이고 나머지 둘은 귀수대왕과 침류왕이다. 일본왕실의 세 황조신인 것이다.
또 서기 이중전기를 보면 태자가 화공을 당하여 쫓기다가 石上·振의 神宮에 진좌하는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데 「太子便居於石上振神宮」> 「태자는 石上 후루[振]의 神宮에 편히 머물렀다」라고 나오고 이 태자가 곧 신공기에서 "(磐)石上에 앉은 백제 초고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천황은 초고대왕을 등재한 인물인 것이다. 후루[振]는 석상의 지명인데 후루[布留/布瑠]라고도 한다. 그것도 신공기에서 「居磐石上」, 이중기에서 「居於石上振神宮」이라 하여 동사도 같은 '居'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왕실의 영원무궁을 기원
또 「示長遠之不朽者」, 「千秋萬歲 無絶無窮」 두 구절은 인현천황의 화풍시호 "億計>億年之大計"에 해당하는 의미인 것이다.
인현천황의 이름에 島稚子, 大石尊이 있고 모든 천황 중에서 유일하게 諱가 있다[大脚, 大爲라고도 한다].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도치자는 이장낙존과의 연결고리이고 大石이 석상신궁과의 연결고리다.
오호시[大脚], 오호스[大爲]라고 읽고 있는데 '이'와 '으'는 교체되어 쓰이므로 결국은 한자만 달랐지 오호시[大石]와 음도 같다. 또 오호아시[大脚]로도 읽을 수 있어 '큰 아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때 아침은 아스까[飛鳥]를 가리키며 이 '새[鳥]'는 '흰깃큰수리[羽白熊鷲]', 白鳥, 봉황새[鸞]로 은유된 귀수대왕인 것이고 백제왕으로서는 아신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에 해당되고 아신왕의 사서상의 모든 이칭은 '아침'에 해당되는 고어 '아시', '아지'로 조어되어 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연결고리들은 8세기초 당대의 열도에서 한다하는 가야·백제의 대문인들이 수십 명이 모여 수십 년을 걸려서 치밀하게 짜 맞춘 것들이지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민달기 31년 7월조에 錦部首大石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초고대왕임을 알려주기 위한 합성이름이다.
錦部首; 神饒速日命十二世孫 物部目大連之後也(山城國天神)
錦部連; 三善宿니同祖 百濟國速古大王之後也(河內國諸蕃)
신요속일명에서 '신'과 '명'은 존칭이고 이름만은 요속일인데 "요[饒]>요[餘]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日]"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 같은 금부씨의 조인 백제국 속고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금부수대석은 錦部首라는 성씨와 인현천황의 이름 大石尊을 따서 지은 초고대왕의 이칭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신의 이름에 국상입존이 있다. 서기 신대기 상1단에 등장하는 황조신 國常立尊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도꼬시(나)에[常/長/永久]'는 왕실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도꼬[床]와도 음이 같아 磐石 같은 床石과도 의미가 통한다. 암석은 고래로 십장생에도 들어있듯이 영구,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국상입존'이란 이름을 뜻으로 풀면 "나라를 반석 같이 단단히 세운 신"이라는 뜻으로서 다름 아닌 일본왕실의 시조 초고대왕인 것이다.
백제의 열도정복을 위한 사전정지작업
초고대왕이 손자인 천웅장언(=침류) 앞에서 천추만세 서번을 칭하고 춘추로 조공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분식을 해놓았다. 가라칠국평정은 백제가 열도를 가야로부터 접수하기 위해서 세 차례에 걸쳐 가야본국을 침탈했으나 가야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본국을 탈환하러 열도에서 반도로 진입하여 가라본토를 사이에 두고 일대결전을 벌인 것이었고 이것은 백제가 열도를 가야로부터 빼앗기 위한 사전정지작업 성격이었다.
이 전투에서 가라가 완패하고 응신이 열도로 철수하는 장면이 신공기 50년 2월조의 다음과 같은 기사다. 「荒田別等還之」 > 「황전별 등이 돌아왔다」.
이 이후부터는 전장이 열도로 바뀐다. 가라 본국은 이때 망해버린 것이고 그 주력은 새로 개척한 열도에서 백제로부터 독립된 왕국건설을 꿈꾸고 있고 백제는 그마저 빼앗으려고 열도로 건너가 계속해서 가야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이때부터 20년 간이나 더 지속되는 것이다.
같은 시기의 사기기록
서기 369년은 사기 근초고기 24년에 해당하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기 2만을 이끌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면서 민가를 침탈했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치양에 이르러 급습을 해 깨뜨리고 5천 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와 노획한 것을 장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1월) 한수의 남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 기치는 모두 황색을 썼다』
군대사열이란 큰 전투를 우회표현하는 분식일 수 있고 황색기라는 것이 대륙식으로 하자면 천자가 사용하는 색깔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사기저자들이 그런 의미로 썼다면 바로 이 해에 만든 칠지도에서 보다시피 (백제왕 대왕> 백제태자 왜왕> 백제세손 왜후왕)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대왕은 천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39년인데 백제기사와 아귀를 맞추어 썼기 때문에 "군사 2만을 보내 남으로 백제를 쳤으나 치양에서 패배했다"고 나오고 신라는 내물왕 14년인데 기사가 없다. 가야와 백제의 실사는 "고려인은 옛날부터 고려땅에서만 살았다"라는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완전히 절사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