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건국 내용에서 동명왕이 고리국(槀離國)에서 떠나왔다고 한다. 고리국(槀離國)은 탁리국(橐離國), 색리국(索離國)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탁리국 기원에 대한 연구 내용이 있어서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발췌] '사서 분석을 통한 고죽과 부여의 위치 비정' 심제 이진우

고죽국의 위치와 관련된 "孤竹國의 성립과 古朝鮮 후국의 지위"라는 연구에서 신용하는 고죽국에서 고구려가 발생하였다는 『배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고추가라는 관직명이 고죽의 중국고어(中古語)인「kuchu」라는 사실과 동명의 탁리국이 중고어「Tari(Dari)」로서 제나라와 전쟁을 벌인 고죽국왕의 이름 답리가(答里可)에서 기원하므로 부여에서 가장 강성했던 종족이라 밝힌 것은 성과로 볼 수 있으나, 기존 연구자들의 논지와 유의차 없이 현 하북 영평부로 보았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의 황금문화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새녘출판사)

노하심 유적의 묘제와 출토 유물의 문화내용은 앞의 서차구 유적과 같은 계통의 문화로서 그 시기만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와 문화내용은 다음과 같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 나라[부여]에서는 가축을 잘 기르며, 좋은 말과 붉은 구슬[적옥()]·담비·아름다운 구슬[미주()]이 산출되는데, 구슬은 대추만하다. 그리고 활·화살·칼·창 등 병기를 사용하며 집집마다 각자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계속해서 “부여는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왔다[]”라고 한 점을 미루어보아 부여에서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 夫餘 비마형 飛馬形 금구 1쌍 노하심묘에서 출토된 금동제 신수문()금구. 머리를 치켜세우고 갈기를 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매우 동적인 금동조각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부여에서는 명마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바로이 비마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는 7.2×11.5cm.

부여의 황금 귀고리 부여에서는 황금이 많이 산출되었으며, 부여족들은 금과 은으로 관식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 고분에서 출토된 금 귀고리.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 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각주

  1. 무국훈(武國勛) ; 「夫餘王城新考-前期夫餘王城的發現」 『黑龍江文物叢刊』 1983-4, p.35~42.
  2. 손수도(孫守道) ; 「‘匈奴西岔溝文化’古墓群的發現」 『문물(文物)』 1960-8·9, p.25~32.
  3. 전운(田耘) ; 「서차구고묘군족속문제잔석(西岔溝古墓群族屬問題淺析)」 『黑龍江文物叢刊』 1984-1, p.29~34.
  4. 이전복(李殿福) ; 「漢代夫餘文化歸議」 『北方文物』, 1985-3.
  5.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 문물출판사, 1987.
  6. 유경문(劉景文)·방지국(龐志國) ; 「길림유수노하심묘장군족속탐토(吉林楡樹老河深墓葬群族屬探討)」 『북방문물(北方文物)』 1986-1.
  7.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5, p.213~227.
  8. 노태돈 ; 「부여」 『국사관논총』 4, 국사편찬위원회, 1989.

부여, 스키타이 황금 기마민족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유물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기원전 150년~서기 50년)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말 탄 두 무사가 초원을 누비는 모습.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생명나무와 2마리 낙타.


KBS 역사스폐셜 부여 동명왕 편에 '북부여'의 유물들로 소개된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버클들.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동물투쟁모티브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쌍雙 황소.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새 부리를 가진 괴물(왼쪽).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새 부리를 가진 천마天馬


기원전 150년~서기 50년 -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황금 귀고리들.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안테나 자루 철검.
 

러시아 여자 고고학자들의 스키타이 여궁사女弓士 재현.

 

[퍼옴] 부여의 기원과 문제점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1)부여의 중심지와 세력권


 부여의 문화의 기원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부여의 세력범위 및 위치설정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중국 및 우리학계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제 문헌사료 등을 참작,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시 일대, 더 구체적으로는 초기 부여의 왕성을 길림시 동단산(東團山)남성자(南城子)로, 그리고 기원후 4세기 이후의 부여 중심지역을 농안지방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으로 비정한다는 전제 아래 기원후 3세기경까지의 부여의 세력권이 ‘약수’곧 제 1송화강(동류 송화강)을 그 북한(北限)으로 동으로는 장광재령, 서로는 이통하 유역, 그리고는 남으로는 휘발하 유역을 포섭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또 혹자는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 기원후 1~3세기 부여국은 대략 북으로는 눈강과 송화강 일대까지 포괄하면서, 서쪽으로 조올하(洮兀河)하류의 건안(乾安) ․ 장령(長岭) ․ 쌍요(雙遼)등지를 경계로 하며,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접하고, 동으로 위호령(威虎嶺)을 경계로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길림 합달령(哈達嶺)을 경계로 휘발하 이북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다.


(2)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부여의 위치설정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및 중국측 여러 사료와 「광개토왕릉비문」, 「모두루묘지」등에는 ‘부여-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卒本)’라 지칭되는 다양한 부여의 기록이다. 이것은 마치 네 개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 사실은 부여사 인식체계를 짜는데 적지 않은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북부여, 동부여의 실체구명 여하에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간단히 세 가지 유형화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는 따로 떼어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들은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북부여로 불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둘째, 부여, 북부여를 별개의 실체로 보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동부여를 포함하여 세 개의 실체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동부여를 부여나 북부여와 일치시키는 의견도 있다.

 셋째, 세 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통설로 보고 있는 첫 번째 유형을 통해 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실체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이 견해는 본래 주몽의 고향은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로서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에 합병되었고, 동부여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시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의 일족이 세운 나라인바,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 통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부여’란 탁리국(槖離國) 출신의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그 중핵지로 기원전 3~2세기 말경 ‘국가’를 형성, 기원후 4세기 중반경 농안지방으로 그 중심지를 이동, 이후 494년까지 존속한 바 있는 ‘부여’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동부여1)’란 고구려 건국 당초부터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 후 285년 선비 모용외의 제 1차 강습으로 부여(북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지방으로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사행동에 의하여 공멸되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부여의 위치를 설정 해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맨아래쪽) 


3.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2)

 부여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들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청동기문화인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와 부여의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탁리국의 문화로 추정하는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이다.


(1)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길림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서단산문화3)이다. 주거지는 반지하식이고, 주로 석관묘를 조성하였으며 교상횡이호(橋狀橫耳壺)와 길쭉한 방망이 모양의 석부 및 쌍공의 반월형석도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이다. 대체로 동쪽으로 장광재령, 서쪽으로 이통하와 동요하 상류, 북쪽으로 납림하, 남쪽으로 휘발하를 경계로 하여 길림성 중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니, 종래의 부여 범위와 비슷하다. 이 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아 왔고, 발굴조사와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종래는 이 문화의 주인공이 숙신족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부여 건국의 기반이 된 예족의 산물로 보는 데에 별로 이견이 없다.

 오늘날, 우리학계는 동북아시아 주민이동의 큰 줄기인 고아시아족(Palio-Asiatics)과 알타이어족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우리 청동기문화의 향유자인 예맥족이 신석기문화의 담당 주민이었던 고아시아족을 정복·흡수·동화·통합하는 과정이 한민족의 형성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형성과 기원, 그리고 고조선·부여·고구려 주민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예맥이다. 우리 민족의 기원·형성 문제 해명을 위한 노력은 Altai어족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독립된 민족단위인 예맥의 실체 구명 문제로 집약된다. 또 그것은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의 주민 구성과 문화 계통을 밝히는 문제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4)


(2)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두번째는 서단산문화 북쪽에 분포하고 있는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이다. 1974년에 조원현 백금보유적을 발굴한 뒤에 처음 백금보문화란 명칭을 붙였고, 같은 해에 대안 한서유적을 발굴하면서 두 개 층위를 확인하여 하층은 청동기시대인 백금보문화, 상층은 초기철기시대인 한서2기문화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말을 전후하여 고리국(탁리국)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동명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남쪽 예족의 선주지역에 와서 부여국을 건립하였다. 이 내용은 왕충이 쓴 『논형』에 잘 보인다. 이것을 흔히 우리는 동명성왕 설화5)라고 한다.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부여의 시조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국왕의 시녀가 햇빛을 몸 안에 받아들여 낳은 자이다. 성장하면서 신이(神異)한 바가 많으므로 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를 건너 부여 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 이런 비슷한 신화를 가진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다. 동명신화는 바로 부여족 계통의 여러 집단이 공유하였던 건국신화로 고구려의 주몽신화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를 그대로 따른다면 탁리국은 부여에서 북쪽으로 큰 강을 건넌 곳에 위치하게 되어 송화강, 눈강 건너에 분포하고 있는 이들 문화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백금보 문화에 뒤이어 나타난 한서2기문화를 대체로 문헌의 탁리국 소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탁리국 주민들이 제2송화강 중류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예지(穢地)‘로 남하하여 서단산문화를 누리던 부여 선주민과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건립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첫째로 부여의 동명설화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당시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의 주민들이 공유하던 설화로서 역사적 실체는 거의 담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백금보문화-한서2기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이 여기저기 산견되어 발견됨으로써 섣불리 부여와 연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상호 이웃해 있는 문화 사이에 공통적인 요소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동명전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류의 결과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몇 가지 요소로서 전설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로 탁리국의 문화로 비정되는 고고학문화가 탁리국으로 비정할 정도로 상당한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룩한 증거가 있는지, 길림성 중부 지역의 서단산문화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대등한 수준인지, 길림성 중부 지역의 토착사회가 외부 집단의 이주와 정착을 쉽게 허용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1) 한편 ‘동부여’의 입지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혼춘(琿春)을 중심지역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이라고 보는 견해와 단결문화(團結文化-크로우노브카문화)를 남긴 북옥저 지역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혼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 ‘북옥저’지방은 고구려가 국초부터 그 세력을 진출시킨 지역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 동부여의 입지를 혼춘이 아닌 화룡(和龍)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장되기도 한다.

2) 예맥문화권안에 서단산문화와 백금보, 한서, 망해둔 문화가 속하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보면 모두 예족계통의 문화, 예족을 기원으로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3) 하지만 이 청동기 문화연대는 B.C. 8세기경까지로 소급되고 있지만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청동제품은 전반적으로 빈약하고 또한 이를 모델로 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동검을 내제화(內製化)하지 못하는 등 서쪽의 요동(遼東)지방 청동기 문화에 비해 현저한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여 부여의 국가형성은 서단산문화가 종말을 고할 무렵인 B.C. 3세기 말경이후로 보고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4) 이 문제와 관련, 학계는 '예·맥·예맥'의 상호관계, 곧 예와 맥이 동일한 종족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여하를 밝힘을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먼저 예맥동종설의 입장에서, '예맥'이라는 명칭은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며, 한대 이후 '예'와 '(예)맥'은 동일 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맥동종설의 관점을 따르더라도, '예맥'이란 연칭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 선진시대부터 '예'와 '맥'으로 표기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예맥'은 '예'와 '맥'이라는 각기 별개의 단칭을 가진 지역적으로 분별되는 동일 종족이었던 것이다. 곧 '맥족'은 요동과 한반도 일부에 분포하며, '예족'의 주지는 길림·송화강 및 눈강 유역 그리고 한반도 일부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예와 맥의 주지를 일정 지역에 고정시켜 이해하는 것보다 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제사상의 시간적 선후 관련성을 유념하여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진 시대 이래 예와 맥은 고조선·부여·고구려 등 여러 국가의 계기적인 성립·발전과 더불어 부단한 변화상을 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경우 맥의 주지를 '예'라 하지 않고, 예의 그것을 일부 '예맥'이라 지칭하기는 했어도 '맥'이라 한 적이 없었음은 눈여겨 볼 점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이들 예와 맥이 남쪽의 '한족'과 더불어 한민족 구성의 근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와는 다소 다른 시점도 없지 않다. 곧 이런 입장은 종래의 예맥 문제 연구 성과를 주민이동론과 분포설로 분별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 견해는  고구려를 세운 족속으로 거론되는 선진 문헌 상 '맥족'이란 고대 황하 유역 주민들이 그 북방의 족속들을 지칭하던 일종의 범칭으로서, 특정한 족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이 견해는 분포설이 사실이라 할 경우라도, 북중국 방면의 맥족은 한국인의 기원이나 고구려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또 이런 입장은 이동설 역시 동이족 혹은 맥족의 이동 과정이나 그 결과물이 考古學 상으로 논증되어야만 그 유의미성이 확인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박경철, 2006, 「예맥․ 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5)“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에 옮겨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엄호수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고로 북이(北夷)지역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논형》왕험편-


[퍼옴] 부여, 고구려 고고학〉-부여문화의 원류와 서단산문화-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부여의 기원과 그 문제점


                                                        


 

                                           - 목 차 -


                                        Ⅰ. 머리말

                           Ⅱ. 부여의 기원

                             1. 부여에 주목해야하는 이유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3. 서단산문화와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Ⅲ . 부여의 문화와 문제점

                             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집단에 있어 정체성(identity) 문제의 핵심은 동아리 내부의 동질성의 확인과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인식함에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남과 다름을 인식함과 다름 아니다.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고고학적 연구는 많은 자료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자료도 예전에는 고고학 문화를 일정 집단의 동질적이고 규범적인 틀로 보는 대신 오늘날에는 문화적 진화와 사회적 변화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족속과 집단의식에 대한 고고학 연구에 보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 것은 민족성, 혹은 동족성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와 관련된 사회적 조직화의 한 양상으로서 특히 집단 상호간의 경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후과정고고학이 출현하고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민족성 혹은 동족성이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주관적인 정체의식으로서 실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1)

  이처럼 종속성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과 유동성이 인식되면서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족속추정을 시도하는 것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각지에서 식민제국의 붕괴 이후 성립된 제 3세계 민족국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자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대두되면서 양상은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선의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고고학 자료의 정치적 이용이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족속 추정에 있어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역사학이나 인류학 또는 고고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기에 우리민족의 기원을 이미 사람이 이주해 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2) 게다가 중국학계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으로 최근 몇 년간 중국동북지방, 만주지역에 있던 문헌상의 옛 민족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를 위해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그 속에서 부여는 주몽이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적대관계 속에서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실상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에 우선 우리가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부여문화의 기원에 대해 논하기 전에, 부여 문화를 향유하던 세력범위와 고고학 측면에서 부여의 문화에 대해 짧게나마 알아보겠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부여 기원 연구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Ⅱ. 부여의 기원과 정의

1.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3)

 그동안 학계에서도 부여사는 발해사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변경의 역사로 취급되고 있다. 주로 고구려의 원류로서, 그리고 고구려의 정복대상으로서 부차적인 관심만 가져왔기에 부여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넣으려는 근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예맥족의 역사인 부여를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역사로 다루고 있는 사실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부여사의 현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여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학계에서는 부여4)가 우리의 민족의 주요 종족인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건국세력이 바로 부여에서 분파해 나간 점을 들 수 있다. 

 부여의 터전은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이 나왔다. (계루부 왕실) 주몽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5) 그러자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살던 주민들 중 일부 (비류, 온조집단)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동명사당을 두어 부여를 세운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서기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6)라고 고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 ․ 백제 왕실의 뿌리 구실을 했다. 최근 경상남도의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청동솥을 비롯해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 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부여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7)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시조 대조영도 우리 발해는 “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여 부여를 자신들의 오래 된 조상의 나라로 보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책 《무경총요》에서도 발해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으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부여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집단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부여의 역사는 우리 고대 국가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디딤돌이었고, 부여족은 우리 겨레를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중앙집권화 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직전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1)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2)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3)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4) 근대 역사학의 단초를 열었던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기존의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한족(韓族)중심의 정통론을 부정하고,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제기하였다. 신채호는 우리민족이 하나의 종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주동력이 되는 한 종족을 주족(主族)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종족을 객족(客族)으로 취급하여 주족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부여족이 주족, 지나족(支那族)․ 말갈족․ 여진족․ 선비족․ 토족(土族: 韓族과 濊貊등)․몽고족․ 일본족을 객족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사천년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盛衰消長)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민족의 역사, 국사는 곧 부여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채호가 말하는 부여중심의 역사는 고조선사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다.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5) 묘제상으로 볼때  부여와 고구려가 크게 달라 양자간의 관계를 의심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삼국지』고구려전에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 등 여러 가지 사항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두나라의 시조 및 건국신화가 같다는 것은 필경 양자가 역사적 기원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6) 472년 蓋鹵王이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직면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으로 北魏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세에는 고구려가 舊款을 돈독하게 존중했습니다.“고 한 것을 보면 제의 부여씨 왕실이 고구려와 동족, 동원으로 믿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聖王은 587년 왕도를 泗沘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했다. 이는 지배층의 종족의식에 호소하면서 加一層의 단결과 분발을 촉구한 조치로 이해된다.

7) 1990년대 초 한반도 김해지방의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가야고분에서 북방민족의 특유의 청동솥인 오르도스형 이 출토되어, 이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림성 북부 부여족의 이주에 의한 소산으로 적극 검토해 볼만하다고 申敬澈교수가 제기했다. 285년 옥저로 망명했던 부여족이 항해술을 이용, 동해안 항로를 따라 김해지방에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 배경으로 가야의 철이 동예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어 이를 구입하기 위해 김해를 내왕했던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설을 크게 뒷받침하는 측면이 강하다. - 이기동,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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