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구스 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에서의 사슴의 상징적의미

 김관웅 (연변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2.  상징적의미 하나 – 우주의 동물로서의 사슴

3.  상징적의미 둘 – 인간의 어머니로서의 사슴

4.  상징적의미 셋 – 죽음과 재생

 

1. 들어가는 말

 

태고시절부터 만-퉁구스 제 민족의 조상들은 장백산과 흑룡강 사이의 드넓은 동북평원과 동몽골초원, 그리고 대흥안령, 소흥안령 같은 산속에서 살아왔다. 특히 대흥안령의 원시삼림속의 추운 고장에서 살아온 어원커, 어른춘, 시버, 허저족의 조상들은 사슴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어른춘이라는 이 족명은 “순록을 부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바로이런 까닭에 중국의 고대 사서들에서는 흥안령 일대에 사는 이런 사람들을 “사록부(使鹿部)”, 즉 “사슴을 부리는 부락”이라고 기록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어원커족,어른춘족, 허저족, 시버족, 녀진족, 만족 등 만-퉁구스 제 민족의 설화들에는 사슴이 많이 등장하며 따라서 이런 사슴들을 신통력을 갖고 있는 신령한 동물로 등장한다.

 

이와 아주 류사하게 조선민족의 설화에도 사슴이 자주 등장하며 또한 이런 설화중의 사슴들은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동물로 되여 있다. 이 점은 비교설화학에서만 아니라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고대 문화의 저층을 알아내고 그 원류 및 량자의 련관성을 파악하는데도 상당히 유익한 계시를 준다.

 

이 글에서는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에서의 사슴의 형상이 갖고 있는 상징적의미만을 탐구해보려고 한다.

 

2. 상징적의미 하나 – 우주의 동물로서의 사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는 모두 가장 중요한 숭배대상을 하늘에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기독교의 하느님도 이슬람교의 알라신도 불교에서의 석가모니불도 그리고 만주족의 조상을 낳았다는 천녀도, 조선민족의 조상을 낳았다는 천제(天帝) 환인의 아들 환웅도 모두 하늘에 내려온다.

 

 왜 인류는 이토록 하늘을 숭배하면서 자기들이 가장 숭배하는 대상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고대 동양인들은 우주공간의 방위를 “륙합(六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른바 “륙합”이란 동(东), 서(西), 남(南), 북(北)과 상(上), 하(下) 이 여섯개 방위로 이루어진 공간, 즉 우주를 뜻하는 게념이였다. 그런데 동, 서, 남, 북은 사람들이 모두 갈수 있고 또그래서 알수 있는 공간이며, 또한 하(下) 역시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이니 매일마다 접촉하는 공간이다. 유독 상(上) , 즉 상천(上天)만은 날개가 없는 인간으로서는 바라볼는 있어도 닿을수 없는 공간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하늘은 가장 신비롭고 따라서 가장 상상력을 동원하여 거짓말을 꾸며낼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종교를 만들어냈고, 예호와요 알라요 환인이요 하는 등등의 수많은 각이한 천신(天神), 즉 하늘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각이한 하늘신들을 만들어 내여 숭앙하는 이상  또한 이런 하늘에서 산다는 하늘신들과 소통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날개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 옛날에 사람들은 땅과 하늘사이를 련결해주고 소통시켜주는 그 어떤 대상을 상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간들에 의해 선택된 산, 나무, 동물 등 다양한 자연대상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사슴이란 이 동물도 들어있었다. 특히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에서 시슴은 바로 땅에서 사는 인간과 하늘에 있다는 천신 사이를 련셜시켜주고 소통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로 등장한다.

 

그 첫번째 사례를 어른춘족의 신화를 통해 보기로 한다.

 

신령스러운 사슴 한마리가 아아한 흥안령 산정우에 누워있는데 그 사슴의 머리에 돋은 뿔은 어찌가 굵고 긴지 구중천에까지 뻗어올라갔다. 그리하여 어른춘사람들은 그 사슴의 뿔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하늘신 은두리(恩都力)를 배알하면서 자기들이 행복을 삶을 살수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두번째 어원커족의 “하늘과 소통한 신령스러운 사슴(神鹿通天)”이라는신화를  보기로 한다.

 

사슴은 원래 천상의 동물이였다. 사슴에게는 다리 여섯개가 달렸기에 하늘에서 날아다녔다. 후에 천신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지상에 쫓겨내려와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였으나 사슴은 원래 천상의 동물인지라 하늘에 날아오를수 있었다고 한다.

 

세번째 사례를 시버족의 “시리엄마의 전설(喜利妈妈的传说)”에서 보기로 한다.

 

사슴은 원래 천상계의 동물이였다. 후에 천신의 은덕으로 땅우에도 사슴이 살게 되였다. 어느해 왕가물이 들어 시리엄마가 수많은 잡귀신에게 빌어보았으나 모두 효험이 없자 태양을 쏴서 떨궈버리려고 하였다. 이때 커다란 말사슴을 탄 백발이 성성한 로인이 태양을 쏘지 못하게 말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로인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는 그 말사슴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후에 시리엄마는 백학과 까치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을 만난다. 그런데 알고보니 하느님의 가장 사랑하는 좌기(坐骑)는 바로  말사슴이였다. 하느님은 시리엄마의 정성에 감동되여 왕가물을 퇴치하는 방도를 알려주며 그녀는 지상에 내려와 하느님이  알려준 방도로 왕가물을 퇴치한다.

 

네번째 사례는 만족의 “매화록(梅花鹿)”을 통해 보기로 한다.

 

얼룩 반점이 박인 매화록은 천상계에서 땅에 내려온 동물이다. 만족이 녀진이라고 불렸을 때 아갑이라는 사냥군이 늑대의 주둥이에서 그 매화록을 구해주었다. 상처가 아물자 그 매화록은 아갑의 운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천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갑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아래에서는 조선민족과 관련이 있는 고구려의 주몽전설을 통해 사슴이 하늘과 소통하는 신통력이 있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고구려인들의 관념을 보기로 한다.

 

주몽은 비류국을 정복하기 전에 흰 사슴 한 마리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 흰 사슴이 구슬프게 울어대는 소리가 하늘에 전해졌고, 또 그래서 하느님은 련속 보름이상이나 장마비를 퍼부어 비류국을 온통 물속에 잠기에 함으로써 고구려가 손쉽게 비류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를테면 한국 경북 고령에서 발굴된 고분에서 나온 사슴뿔은 당시에 록각숭배가 행하여 졌음을 시사해주며, 따라서 사슴의 뿔을 본 뜬 후세의 신라 황금 왕관을 통해서도 이러한 록각숭배의 전통이 맥맥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할수 있다.

 

고려시기의 리제현의 《력옹패설》의 기록에는 고려 때의 문신 서희(徐熙, 943년- ?)의 조부 서신일(徐申日)의 이야기가 수록되여 있다.

 

서신일은 일찍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천상의 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자네가 구해준 그 사슴은 나의 아들이네. 나는 당신의 자손들이 세세대대로 재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와주겠네.” 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리하여 서신일의 아들을 이어서 손자인 서희가 재상이 되였고 서희의 아들들인 서눌(徐讷), 서유걸(徐惟杰) 역시 재상 자리에 올랐고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여 외척가문의 하나로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이것이 다 천신의 아들이 사슴을 구해준 덕분이라는것이다.

 

함경북도 두만강 하류의 경원, 경흥 등 지방에서 전승되여 온 “전백록(全百禄)”역시 우의 서희 관련 전설과 비슷한 시슴의 보은담이다.

 

함경도 경원군에 채씨라는 녀인이 전씨가문에 시집을 갔다. 하루는 채씨가 집안에서 베틀에 앉자 베를 짜고 있는데, 흰 사슴 한마리가 마당안으로들어서고 멀리서 사냥군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채씨는 그 상처를 입은 사슴을 숨겨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어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하루는 그 흰 사슴이 꿈에 나타나서 “전번에 저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 하해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저는 당신이 옥동자를 낳을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 채씨는 과연 태기가 있었고 달이 차서 정말로 금덩이 같은 옥동자를 낳았다. 부부는 이것이 모두 흰 사슴의 덕분이라고 여기고  아기의 이름을 전백록(全白鹿)이라고 지었으며 장성해서는 동음이어로 바꾸어 전백록(全百禄)이라고 고쳤다. 전백록은 후에 “리괄의 란”을 평정하는데 대공을 세웠고 무관으로 큰 벼슬을 지내게 되였다.[1] 

 

조선민족의 유명한 민담 “나무꾼과 선녀”에 나오는 사슴 역시 천상계의 소식을 손금 보듯이 다 알고 있는 신통력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어디에, 어때에 내린다는것이라든가, 하늘에서 신선들이 물을 길어 느라고 지상의 내려보내는 두레박이 언제, 어디에 내려오는가 등등 하늘의 상황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다.

 

총적으로 사슴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树) 같은 우주의 나무나 아사달 같은 산처럼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 같은 기능을 갖고있으며 하늘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바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관념속에서 사슴은 우주의 동물이였다.

 

3.상징적의미 둘 – 인간의 어머니로서의 사슴

 

사슴은 만-퉁구스 제 민족이 숭배했던 토템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사슴은 그들이 수렵생활에서 가장 많이 포획하고 길들이고 또한 식용, 약용으로 삼는 동물이였고 따라서 사슴은 마치도 마를줄 모르는 어머니의 젖줄기마냥 이런 수렵족들을 루루 수천년 먹이고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첫번째 사례를 만족의 “흰 사슴 엄마(白鹿额娘)”를 통해 보기로 한다.

 

한 사냥군이 늘그막에 아들을 얻었지만 마누라가 급병으로 죽자 아기는 젖을 먹을수 없었다. 그 사냥군은 백발이 성성한 한 로파의 말대로 산에 가서 늑대에게 물려 각일각 죽게 된 흰 사슴을 구해가지고 집으로 안고 온다. 이때로부터 그 흰 사슴은 자기의 젖으로 아기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 애가 어른이 되자 창업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게 도와준다. 그런데 며느리로 들어온 새 색시는 흰 사슴 엄마를 박대하기 시작한다. 이에 분개한 젊은 사냥군은 흰 사슴 엄마와 함께 산속에 들어가 흰 사슴 엄마가 늙어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여 봉양한다. 옛날 녀진족과 만족은 사슴이 자기네 족속을 먹어살린다고 생각하면서 특히 흰 사슴을 “엄마(额娘)”라고 불렀다.

 

둘째 사례는 고구려의 “록족부인(鹿足夫人)”을 통해 보기로 한다.

 

산속에 은거해 사는 한 선비의 집에 사냥군에게 쫓긴 암사슴이 들어왔는데, 이 암사슴은 그 선비의 오줌을 핥아먹고 태기가 있더니 딸을 낳는다. 그 딸은 천하 미인으로 자라났으며 후에는 왕비가 되였다. 발자국마다 꽃을 피워 1000송이의 련꽃을 만들었다. 이것을 모든 짐승의 간(肝)과 함께 상자에 넣어 물에 띄웠고 그 상자는 물길을 따라 중국에 닿았다. 중국인들이 두껑을 여니 간과 련꽃은 1000명의 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이들이 장성하여 군사가 되여 고구려를 침입했다. 그러자 그들의 어머니 격인 사슴의 딸 록족부인이 동쪽의 500명 군사에게 동쪽의 젖을 먹이고 서쪽의 500명 군사에게는 서쪽의 젖을 먹여 모자(母子)임을 확인시켰다. 그래서 500명은 중국으로 되돌아 가고 500명은 고구려에 남으니 형제 국가로서 싸움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사슴을 자기의 어머니로 생각했던 고구려인들의 토템관념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평안도 지역에는 전설 “열두삼천리벌”이 오래동안 널리 전승되여 왔다.

 

고구려 시대의 한 왕비의 두 발은 사슴의 발족을 닮았기에 다들 그 왕비를 록족부인(鹿足夫人)이라고 불렀다. 어느 해 이 왕비는 사슴발족 같은 두 발을 가진 사내애를 12명이나 낳았다. 록족부인은 자기의 젖으로 이 열두명의 아들들을 키웠다. 그런데 이 열두명의 아들들은 소시적에 엄마의 말을 귀전으로 흘리고는 신발을 벗고 다녔다. 록족부인은 부득이 이 열두명의 아들들을 돌로 만든 함에 넣어 강물에 뛰워 보냈다. 중국에 닿은 이들은 장성하여 저마다 3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구려 안주를 침공하여 왔다. 이들과 대치하고 있던 12명의 아들들을 보고 록족부인은 “너희들의 발은 필시 사슴의 발족을 닮았을것이다”라고 소리쳤다. 12명의 아들들이 아닌 척 하자 록족부인은 자기의 젖통을 꾹 눌렀다. 젖꼭지에서는 열두 젖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더니 면바로 열두 아들들의 입안으로 날아들어갔다. 이리하여 록족부인은 열두 장군과 모자관계를 확정지었다. 그때로부터 록족부인의 아들들인 열두 장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고장을 “열두 삼천리 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와 류사한 이야기들은 허저족, 어원커족의 설화들에서도 자주 볼수 있다.

 

총적으로 만-퉁구스  제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들에서 암사슴은 흔히 인간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이는 이들이 원시시대에 사슴을 토템으로 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4.상징적의미 셋 – 죽음과 재생

 

고대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조상들 속에서는 록각(鹿角)숭배가 행해졌다.

 

록각숭배는 곧 사슴숭배로 이어져 내려왔다. 죽은 이의 부장품으로서의 사슴뿔은 수사슴이 누리는 남권의 상징이자 가부장 및 공동체 우두머리의 상징이기도 했다. 만-퉁구스 제민족의 신라 샤만들이 머리우에 사슴뿔 모자를 쓰고, 신라 초기의 황금 왕관이 사슴뿔을 본뜬것은 바로 이런 록각숭배의 반영이라고 볼수 있다.

 

죽은 이의 부장품이라는것을 감안하면 사슴뿔과 사슴은 또한 영생 또는 재생을 상징한다고도 볼수 있다. 사슴이 후세에 와서 십장생의 하나로 된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리고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이 사슴뿔인 록용을 인삼과 함께 명약재중의 명약재로 귀중하게 여겨온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바가 역시 크다. 물론 록용은 확실히 약효가 있지만 록용에 대한 미신이 그처럼 대단했던것은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뿌리 깊은 류감사유(类感思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옛날에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이 사슴을 영생이나 재생의 상징으로 간주한 원인은 대관절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사슴을 대지의 동물로, 우주의 동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슴뿔은 나무가지 모양을 하고 있고, 봄철에 돋아나 자라면서 딱딱한 각질로 되였가 그 이듬해 초봄이 되면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뿔이 돋는다. 이러한 순환기능과 나무를 머리에 돋게 하여 키울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슴뿐이다. 따라서  사슴은 대지의 동물, 우주의 동물로 여겨졌다고 할수있다.

 

춘하추동 계절의 순화과 궤를 같이하여 해마다 떨어짐(죽음)과 거듭남(재생)을 되풀이하는 이 사슴뿔은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영생력, 즉 죽음에 의해 중단되면서도 거듭 재생을 누리는 영생력 자체로 간주될수 있었던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슴은 겨울에 죽은듯이 동면했다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곰과 더불어 가장 전형적인“죽음과 재생(death and rebirth)”의 신화적원형으로 되였던이다.

 

신라의 왕관이 사슴의 뿔을 본뜬것은 바로

 

                            2008년 4월 25일 연길에서

석가족의 나라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 8월호), pp.12-19에 게재된 것이다.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1)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2)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으로 연상하기 쉽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3) 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그러나 그 뒤 빈센트 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5)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6)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7)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8)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9)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0)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1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12)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13)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14)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15)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16)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17)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18)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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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사카 번역

1.명칭,언어, 역사적 배경

사카(Sakas)는 (고대 이란어의 영어 형태로 복수 남성명사, 고대 그리스어Σάκαι, Sakai; 사스크리트어 Śaka)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중기 페르시아 시대까지 중국 신장에서 부터 동유럽에 걸펴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평지에 이주하여 살았다.  중기 페르시아 때 투르크 이동으로 투르크인으로 대치되거나 투르크에 흡수되었다.
 * 투르크는 돌궐(突厥)이다.

아키메니드 제국 때 사카 영역 대부분은 페르시아의 관할영에 있었고 사카(Saka)라 불렸고 고대 이란 다른 지역에도 거주했다.  고대 그리이스인은 사카를 스키타이(Scythians)라고 불렀지만 페르시아어로 사카이(Sakai)로 인식했다.
사카이는 모든 스키타이인을 의미하고 또한 중앙 아시아와 극동의 종족까지 의미했다.

기원후 300년 전, 중기 페르시아 시작 전에  이들은 후에 카작스탄(Kazkhstan), 우즈벡키스탄(Ozbekistan), 타직스탄(Tajikistan),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 인도와 이란 지역, 알타이 산맥,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신장성
에 살았다.  이 때문에 로마는 Saceans (Sacae) 과 Scyths (Scythae) 모두 인식을 하였다.
   스키타이인는 경계 지역에서 중국어로 사이(Sai: , Old Sinitic*sək)로 불러졌고 서쪽 경계에서는 중동 지역에 들어온 첫 이란인 이었다. 아시리아 시대 에사하돈 기록에 사카인들에 대해서 아쉬쿠자(Ashkuza) 또는 이쉬후자(Ishhuza)로 불렸다.

허그 윈클러(Hugo Winckler)는 심한 의문이 들지 않게 스키타이와 정체성을 연관시킨 첫 사람이다.   고대 시메리안(Cimmerians)이라 알려진 기미라이(Gimirrai)와 관련되었다. 이 스키다이인은 주로 우라투(Urartu) 왕국에 정착하는 관심이 있었고 후에 아르메니아(Armenia)가 되었다. 유티(Uti), 사쿠센(Shacusen)은 그 이름을 반영한다.   고대 히브루 텍스트에 아쉬쿠즈(Ashkuz)는 기미리(Gimirri; Gorner)부터 파생된 종족으로 여겼다.  

스키타이는 키에프 남쪽 우크라이나(Ukraine)와 트레이스(Thrace),마케도니아(Macedon)로 진출했다. 구별된 명칭이 이점을 줄 정도로 충분히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키메니드(Acheamenid)는 그들을 위한 관할 명을 스쿠드라(Skudra)로 지었다. 그 이름은 엘람과 아카이드에 Is-ku-ud-ra로 발견된다.  

사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국 신장성 웨이우얼 자치구에 있지만 그 언어는 이란 동부 또는 북동부 지역에 넓게 퍼졌고 다시 2개 방언으로 갈라졌다.  중기 이란 시기에 스키타이는 사마트(Sarmatians),알란(Alan), 로하러니(Roxolani)같은 다른 민족명으로 동화되거나 훈족으로 흡수되었다.


페샤와르에서 - 석가(사카)는 카불(가비라)에서 태어나고 페샤와르(파샤, 파사, 秦都, 錦都)에서 도를 폈다

여지껏 여러분은 발해가 반도의 북쪽에서부터 현재의 간도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을 앞글들에서 필자는 한헌석 칼럼을 인용하여 논하였다.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은 조선의 朝가 '아시'이며 '아시아'는 아샤라는 소리일 뿐 마지막의 '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에서 만들어지는 발음상의 늘어진 음절에 불과하다.

 

고기에 이르기를 '인류의 조상을 나반과 아만이라 하니 천하(天河)의 동쪽에 살다가...서로 만난 곳이 아리스타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리스타 또한 아리의 땅이란 뜻이다. 아시나 아리나 모두 시작 처음 아침을 뜻하며 곧 태양을 뜻하기도 한다.

 

한인이 한웅이 한검이 모두 한님, 하늘님의 조화 교화 치화의 삼권을 칭하는 의미라면 현 인류사는 하늘의 역사이며 태양의 역사 빛의 역사 광명의 역사이다. 즉 광명이세를 추구하는 지상문명시대이다. 이것이 현 지상 인류문명의 정체이다.

 

아사아가 조선이란 등식에서 놓고 볼 때 조선이란 아시의 태양, 아시의 해, 아시의 광명이란 뜻이며 조선은 곧 아시아의 아침이요 태양이요 빛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해모수가 성이 해씨요, 고주몽이 성이 고씨였다. 소서노가 소서의 신령한 빛을 받고 태어났기에 소서노라 하였으며, 알영이 또한 아리영이며 아리 아시와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이름이었다.

 

여러분은 빛의 역사 아시아 조선의 역사 아니 세계사 자체가 조선의 역사인데 그 역사의 비밀을 벗기는 것이 곧 광명이세하는 길이며 이 지상문명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란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필자는 조선 고려사의 핵심인 서안(평양)과 동경(낙양)과 남경(호탄, 에덴)과 송도(개경)과 의주(카스)를 비롯하여 람시성(안시성, 발흐), 해주(백주, 배성) 등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추적하여 왔으며, 지속적으로 필자의 기고를 탐독한 독자는 혼란과 곤혹스런 고통을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역사거 거대하게 왜곡되고 그 왜곡하는 세력들이 있다면 그 세력들의 게임은 의도하는 큰 그림이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Central Aisa 즉 아시아의 중앙이 바로 조선의 중앙이며 세계의 중심이란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지 않고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여러분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오늘의 기고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가비라국과 설법을 한 파사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한헌석 칼럼을 전문인용한다. 秦都와 錦都가 어디였는지를 알기 바라며, 또한 석가모니를 인도인으로 조작하는 것과 불기를 조작하는 현란한 조작자들의 솜씨를 보기를 바란다.

 

조선신도(신두)를 조작하여 조선을 지우면서 신두, 힌두를 인도로 완벽하게 잘알지 못하게 조작하여 놓고 불교가 있던 자리에 이슬람을 채색하여 놓는가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을 인위분리하여 동서파키스탄의 사이에 인도를 조작하여 놓고 이슬람에 포위된 채로 중앙아의 불교흔적을 깔끔히 청소하는 거대한 음모를 이미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동방견문록을 조작의 교과서로 삼고서 대당서역기를 비롯하여 조작의 뼈대를 구성하여 놓고 역사의 골격을 다시 구성하여 나가면서 완성된 현재 역사서술이 완전히 엉터리란 것을 여러분이 알 때, 오늘의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숨은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간다. 한헌석 칼럼을 깊히 탐독하여 주길 바라는 바이다.

P158 '바다샨에서 남쪽으로 열흘 거리 떨어진 곳에 파샤이라 불리는 지방이 있는데, 그곳 주민들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고 우상숭배자들이며 피부가 검다. 그들은 주술과 마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남자들은 귀에 귀걸이를 달고, 금은과 진주 그리고 보석이 많이 박힌 버클을 차고 다닌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이고, 풍습도 나쁘다. 이지방은 매우 더우며, 주민들은 고기와 쌀을 주식으로 삼는다.'



파샤이는 F본에는 PASCIAI,  R본에는 BASCIA Z본에는 PAXAY로 나와 있다. 파샤의 발음이 각각 다르게 전승되다가 고정된 것 같다. 이 파샤이는 법현전,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에 다 나온다.



먼저 법현전부터 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501 '여기서(숙가다국, 현 스와트)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錦都, 간다라-대당서역기의 건타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탁실라, 현 이슬라마바드)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건타위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대당서역기의 포로사포라-현 페샤와르)에  이르렀다....부처님 발우는 바로 이 나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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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당서역기/동국역경원 P66 '건타라국의 큰 도성은 포로사포라(주34, PURUSAPURA-지금의 페샤와르)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이다. 왕족은 이미 후사가 끊겨졌으며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왕성 안의 동북쪽에 옛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보대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발우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수백년에 걸쳐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 올렸는데,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지금은 파라사(波剌斯- 뒷편에서 페르시아로 조작해 놓았다.)에 있다.'


-포로사포라는 파라사국, 파사국 혹은 파라사성이다. 현재의 페샤와르다.(PURUSAPURA>퍼ㄹ사보라>페사[순경음]보르>페샤와르)



대당서역기 P354~363의 현장의 귀로에 다시 건타위국(간다리지방)을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에 언급하는 나라들을 열거해보자. 신도국 무라삼부로국 발벌다국 아점파시라국 낭게라국 파랄사국 비다세라국 아반다국 벌랄나국 등이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 카불(서경)에 수도를 둔 카피시국이 건타라국의 포로사포라를 동경으로 삼고 있었다.(바로 수나라의 서경과 동경이다.-현장이 왔을 때는 수가 고구려에 망해서 고구려의 도호부가 카피시에 세워진다. 대당서역기는 이를 돌궐이라 부른다.)


 이 카피시국이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고 있는데, 대당서역기의 묘사가 참으로 기묘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무라삼부로국은 책가국(탁실라, 법현전의 축찰시라, 현 이슬라마바드)에 복속, 발벌다국도 책가국에 복속, 아점파시라국은 신도국에 통치되고, 낭게라국(P65의 나게라갈국 -카불과 페샤와르 사이의 현 낭가르하르 지방)은 파랄사국에 복속, 비다세라국은 신도국에 복속, 아반다국은 신도국에 복속, 벌랄나국은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현장의 귀로에 묘사하고 있는 지역은 현 이슬라마바드에서 카불까지의 지역인데, 그 지역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책가국, 신도국, 파랄사국, 가필시국을 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 파랄사가 페르시아란다. 얼토당토 않다. 아예 어이가 없다.


카불과 페샤와르의 서경 동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그 지역을 통치할텐데, 무슨 그런 콩가루 조작을 해대고 있는 것인지! - 쯧, 딱하기도 하다. 고구려에 패한 수나라가 망하고, 고구려 점령군이 서경 동경을 장악하고 있는데, 역시 딱하게도 이 점령군을 돌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점령군은 분명히 발흐(안시성)의 양만춘장군의 군대일 수밖에 없다. 658년에 이 점령군은 당군에 의해 다시 다시 쫒겨나지만(흔히 이 지역에서의 서돌궐이 당조에 의해 멸망했다고 운위되지만), 7세기 말에 발해에 의해 다시 재점령되는 것이다. 물론 고선지의 파미르를 넘는 위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 발해세력의 견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력에 의해 격퇴되는 것이다.



대당서역기의 파랄사국조를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P358~359  20) 파랄사국[비록 인도의 국가는 아니지만 가는 도중에 나오는 나라이며 구역(舊譯)에서는 파사(波斯)라고 한다.]


‘파랄사국의 둘레는 수만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소랄살당나(주56-SURASTHANA)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에 달한다.... 가람은 두세곳 정도 있으며 승도들은 수백명이 있고 이들은 모두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법을 익히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발우가 이 나라 왕궁에 있다.(P359의 주59-페르시아에 사원이나 승려들이 있었으며 소승교를 전하고 있었고 부처님의 발우를 받들고 있었다고 하는 기사는 다른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진위(眞僞)가 불분명하고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없다.)'


-우선 소랄살당나(SURA-STHANA)성을 먼저 확인해 보자. 왕오천축국전/학고재,정수일 역주 P184 '사위국(슈라바스티, 사바티)은 "비슈누푸라나"에 의하면 슈라바스타(실라벌실다)왕이 사위성을 건설한 데서 기원했다고 하고,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이 슈라바스타왕이 슈라바(실라벌)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수라바스타성을 수라스타나성이라고 소랄살당나성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부처가 25년간 머물면서 설법한 사위국인 것이다. 수라스타나의 스타나는 ㅅ당 혹은 스탄이 틀림없는데, 이는 슈라바스티 혹은 슈라바스타의 슈라(SURA)의 성 혹은 땅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삼봉집/민족문화추진회 P329 '사위성-(안)사위는 파사국의 이름이다.'의 구절이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슈라를 현장은 실라라 부르고 바스타를 벌실다라고 부른다. 현장의 귀에는 슈라가 실라로 들렸던 것이다. 소도 수도 혹은 부도가 수터(새터, 쇠터)와 함께 쓰였는데, 수터가 수러로 발음되는 것은 류음화현상이다. 슈라 혹은 실라는 수도라는 말인 것이다. 즉 여러 왕국을 거느린 중소제국의 수도였던 것이다. 석가부처는 조그만 소왕국의 태자가 아니라 간다라지방 전체의 제왕의 태자였던 것이다.




이 파사를 산스크리트의 파라사라는 원음을 이용해 마치 현장이 페르시아에 간 것처럼, 부처님 발우까지도 페르시아로 옮겨놓는 조작을 하고, 슈라바스티(사위국)을 네팔 남쪽의 궁벽한 곳에 교살라국의 주요도시라고 심어 놓은 것이다. 선입견을 다 버리고, 상식적으로 본다 해도, 불교유적이 산같이 그득그득한 간다라지방이 불교의 중심 활동무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 지방에서 석가가 태어나고 출가하고 깨닫고 활동하고 죽었다고 보아야 상식적으로 온당한 것이 아닐까? 불교유적 유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 히말라야산맥의 고원지대에서 태어난 아기부처를 발가벗은 채로 야외에서 바가지로 물을 들이붓는 목욕을(관정식) 시킨다면 아무리 부처님 도력이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조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더욱 황당하게 조작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파사국(페르시아)>대식국(아랍)>대불림국(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까지 혜초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 참 어이없기가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이제, 동방견문록으로 돌아 가보자. 바닥샨과 카슈미르 사이에 선명하게 파샤이(파샤 혹은 파사)를 마르코 폴로는 자기발로 밟았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파사가 페르시아가 아니고, 이들이 불교도라고 선명히 이야기한다. 바로 앞의 바닥샨(파미르고원의 일부) 그 첩첩산중까지 마호메트를 신봉한다고 했는데도, 이 사위성(슈라바스티, 파사, 페샤와르)에 불교전통이 석가시대 이후로 가장 강력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석가부처는 베그람 혹은 바그람에서 태어나고( 베그람[카불 북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은 대당서역기에서는 가필시[KAPISI]라고 부른다. 카필라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명이다. KAPI 다음에나오는 시와 라는 슈라혹은 실라 두음절 어느 것이 오더라도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두산백과사전의 가비라성[迦毗羅城,KAPILAVASTU]조를 인용하면, '가비라바소도(迦毘羅婆蘇覩)·가유라위(迦維羅衛)라고 하며, 줄여서 가비라(迦毘羅)·가이라(迦夷羅)·가유(迦維)라고도 한다. 네팔의 타라이(Tarai) 지방에 해당한다. 가비라 선인(仙人)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석가모니 생존시에 사위국(舍衛國, 슈라바스티)에게 망하였다.'


인용문과 같이 가비라국은  옆에 있는 페샤와르의 슈라바스티국-사위국에 망하는 것이다.), 페샤와르(파사국)에서 깨달음을 얻고 가르치고 니렌하 혹은 니르바나하, 열반하인 인더스강(마르코 폴로가 키안수라고 부른) 옆의 그 보리수나무 아래서 열반하셨다. 바로 카불지방에서 탁실라, 카슈미르까지의 간다라지방을 무대로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 고대 불교문화의 유적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지방을 마르코 폴로는 만지 즉 (조선,고려의)만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스키타이(키타이 카타이 사카 석가 塞 夏 가라 구르 가야)가 파미르 바닥샨의 산지의 길을 열고 중천축(천조 신주 중국 - 신강)으로부터 이동하고 연결을 놓지 않고 있던 남천축의 센타였던 것이다. 문자(카불은 카부도이니, 사카족의 수도라는 말이다) 그대로 사카족의 활동무대이다.


이제 석가부처의 생몰연대를 전등록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추적해서 이 사카족이 천축 신주 천조 중국 즉 신강으로부터 언제 이 남천축으로 이동하였는지를 확인해 보자. 전등록 1권/바로보인,문재현 P45~48 '이때(부처님이 탄생하실 때)가 주소왕 26년 갑인 4월 8일이다....이때(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곧 주목왕 53년 임신년 2월 15일이었다.' 주소왕 26년은 BC1027년이고, 주목왕 53년은 BC949년이다. 현재 세계의 공식적인 불기는 2552년이다. 그러면 부처의 몰년은 BC544년이다. 전등록의 불기로는 올해가 2957년이다. 약 407년의 차이가 난다.


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의하면 석가부처의 몰년은 BC484년이다.


최두환칼럼 277호 해동고승전의 행방을 인용해보자.

'《해동고승전》이 지어진 시기는 그 책에서 “佛入滅至今乙亥 二千一百六十四年”,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가 열반하신 지 올 을해년까지 2164년이라는 말로 보아, 고종(高宗) 2년인 1215년이다. 이 2164년의 숫자는 석가모니 나이 79살, 주(周)나라 목왕(穆王) 임신(壬申: BC. 949년)에 열반하신 때부터 계산한 것과 일치된다. 


2003년은 불기(佛紀) 2547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석가모니는 BC.544년(丁巳)에 태어난 것이 된다. 이것은《세계대백과사전》의 경우 BC.563(?)~BC.483(?)이라고 하는 것과는 서로 19년의 차이가 있지만, 각훈이 지은《해동고승전》에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26년의 잘못) 갑인(甲寅), 즉 BC.1027년에 태어났다는 것과는 무려 483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이 옳다면 2003년은 불기 3030년이다.'


대당서역기 P68 '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신 뒤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백년이 지난 뒤 어떤 왕이 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 이름을 가니색가라고 할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석가부처는 BC272년에 돌아가신 것이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677년의 차이가 난다.


송운의 서역기를 보면(낙양가람기/눌와) P196에 보면, "내가 열반한 이백년 후에 가니색가라는 이름의 국왕이 이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 -카니시카왕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고 카니시카탑을 조성한 연도가 135년이니, BC65년에 석가부처가 돌아가신 것이 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884년의 차이가 난다.


왜 이리 한사코 부처시대를 400년 500년 700년 900년이나 후대로 끌어 당겨 내릴까?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월지 혹은 월씨의 관련조를 한번 정리해보자.


BC174, 월씨, 중국으로 부터 서방으로 이동을 시작.


BC165, 월씨, 흉노에게 쫒겨 감숙으로부터 이리방면으로 축출.


BC162, 대월씨, 흉노에게 쫒겨 돈황, 기련방면에서 이리 방면으로 축출.


BC160, 사카, 월씨의 침략을 받고 밀려 이동을 시작.


BC140, 중앙아시아에 대월씨국을 세움.


BC138, 漢 장건, 대월씨국에 사신으로 파견됨. /월씨, 아무르강의 유역을 공략하여 취함.


- 우선 눈에 띄는 모순점은 월씨가 바로 사카인데, 그 월씨가 사카를 침략했다는 것이 조작의 난맥상이 노출된 것이다. 어쨌든 월지가 중앙아시아와 서북인도에 이주한 시기가 BC160년경이면, 석가가 그 이후에 태어났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조작자의 강박관념이 만들어 낸 하향조정인 것이다.


이제 사기 대원열전의 대월지조를 한번 인용해보자. '처음에 월지는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자 멀리 떠나 대원(페르가나)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박트리아)를 공격하여 그들을 신하로 삼고, 마침내는 규수(아무다리아강) 북쪽에다 도읍을 세우고 왕정을 삼았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남산(南山)과 강족(티베트계 부족)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이 소월지가 바로 당항 혹은 당구트 혹은 탕구트인데, 이들이 후대 7세기에 서북인도(인도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와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여 대당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당제국의 국제적인 도시, 낙양이 바로 돈황이다. 돈황을 묘사한 법현전을 인용해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494 '하안거를 마치자 다시금 나아가 돈황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가 약 80리 남북이 40리나 되는 성의 요새가 있었다.'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대도성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P241 '그(대도성) 둘레는 24마일이고 한 면이 다른 면보다 더 길지 않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한면의 길이가 6마일 즉 9.6킬로가 되니 10킬로로 쳐서 그 넓이가 100평방킬로가 되는데, 돈황은 동서 32킬로 남북 16킬로가 되면, 그 넓이가 512평방킬로가 되니 돈황이 대도의 5배나 더 큰 도성이었던 것이다.


이 돈황이야말로 신라사의 동경 금성 바로 경주인 것이다. 당나라의 낙양성이다. 우리가 대도를 수도로 한 원제국의 실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BC162년에 고비사막(그 동북쪽 변경이 돈황에서 하미를 거쳐 트루판까지다)을 지나서 천산북로를 지나 이리지방으로 대원을 지나 BC160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하여 사카가 아프간의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한 스토리다.


잘 조직된 대상(隊商)이라 하더라도 아무 방해 없이 간다면 2년은 족히 걸릴 길을 축출당하는 부족이 끝없는 정복전을 계속해서 2년만에 대하를 정복했다면, 소도 웃을 일이다. 실제 천하의 칭키스칸도 신강지역을 정복하고 대하까지 정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월지 스토리는 싸구려 3류 무협지의 소재감도 못되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억지 조작일 뿐이다.



그러면 실제 석가족 혹은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의 이동을 추적해 본다면, BC11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해의 연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두가지가 보인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성립했다는 것과,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금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중원(하화 혹은 중화, 신강)의 주인이었던 하족(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서쪽 훈 혹은 한이라고 불리는 구려(역사상 주나라)에게 밀려서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이주했는데, 그 일을 단행한 지도자가 스키타이 혹은 키타이의 키즈(기자)라고 불리는 이였는데, 팔조금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바로 誠信愛濟禍福報應의 팔조로 된 참전계경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로 고정되는 것은 그 후대의 일이겠지만. 그 내용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일치한다. -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참전계경과 우파니샤드를 생산한 주체를 추적하여 고대의 사상의 원형과 현대세계에 대한 대안적 사상의 모색에 있기 때문에 이 두 고경의 분석과 비교연구를 필생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회가 닿으면 연구서를 낼 계획이다.)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기록이 사기 한서 상서 삼국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사략에 나오고, 근세조선시대까지 단군과 함께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왔다. 이 기자동래는 신강지역의 쿠차(혹은 카라샤르)지방에서 감숙지방의 돈황으로의 사카족 스키타이(시앤-商)의 이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지의 신라의 새부도 건설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기자동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장에 돈황(탕구트조)이 나오므로 그때 좀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한편 서쪽과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시앤-商)의 이동을 추적해 보면, 기자동래의 20년후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나와 있다.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BC1100년조에 '아리아인, 갠지즈강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라는 기사다.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의 신두푸조에서 논했지만, 갠지즈란 GANGE-SE(QUIANSU 혹은 QUIAN江이라고 마르코폴로가 불렀던 인더스강을 의미하고, 인도라는 이름은 영국의 식민지경략 때, 본격적으로 불리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아리아인(하족 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철기문화를 들고 인더스강의 상류지방 즉 간다라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를 '사카남래'라고 불러 보자.


관련연표를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스키타이 인도 아리아조를 정리해 보면

(BC1751~1520, 하나라 멸망.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BC1500, 인도 북서부에 아리아인 침입, 인더스문명 쇠퇴, 이후 인더스강 유역에 H묘지문화, 주카르문화, 가르문화 형성. 리그베다 성립


BC1200, 북아시아의 카라수크,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 문화가 서아시아와 동지중해로 퍼짐.


BC1122, 은 망하고, 주 성립. 은의 기자,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법금 제정.


BC11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


BC10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에 이주. 아타르바베다 성립.


BC900, 인도 브라만교 일어남. 카스트제도 발생.


BC800, 브라만문헌의 성립(후기 베다 시대).


BC600, 故우파니샤드 문헌 성립.


BC563, 석가모니 태어남. 갠지즈강 유역에 앙가, 마가다 등의 소국가 분립.


BC519,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간다라를 정벌.


BC500, 스키타이 기마문화, 북아시아에 퍼짐.


BC430, 인도 와가다왕국, 갠지즈강 유역을 통일.


BC327, 알렉산더 인도 침입. (BC324, 바빌론으로 돌아옴. BC323, 알렉산더 죽음.)


BC317,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조 설립.


BC268,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즉위. 불전 편찬. 남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전부 지배.


- 역사조작세력의 고심의 흔적이 많이도 보인다. 먼저 이 아리아인의 정체를 확인해 보자. 이 주체들의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고찰해 보면,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이들의 언어를 우리는 산스크리트라고 부른다. 그 종교를 우리는 힌두교라고 부른다.(연표에서는 브라만교라고 불렀지만.) 그 문화를 위 연표에서 주카르문화와 가르문화라고 불렀다. 수카르(<스카트<스카타이) 혹은 가르(가트<[ㅅ]카타이) 혹은 가라 혹은 가락 혹은 가야 혹은 굽타 문화는 사카문화이고, 중원의 夏문화인 것이다.


그 종교는 힌두교 혹은 신두교다. 신두는 신독, 천독, 천축이다. 바로 천부도이고 부도교이고 부다교이다. 그 내용이 우파니샤드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범신론이면서도 주재자가 확실히 있는 유일신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날님 상제 제석을 모시는 原불교인 것이다. 바로 참전계경의 하날님이고, 천부경의 하날님을 모시는 부도교 부다교이다. 우파니샤드와 참전계경을 본격적으로 비교분석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 언어는 산스크리트, 즉 인도-아리아어로서 '그 잘난' 아리아인의 서구어의 모어로 전세계인이 알고있는 바로 그 언어다.


앞에서 분석한 적이 있지만, 산스크리트는 ㅎ한서글(書契)이다. 필자가 이전에 산스크리트가 하도 궁금해서 'ㅎ한글 고어사전 실담어 주석'/강상원,한국세종한림원을 붙잡고 한두어 시간 뒤적뒤적 꼬부랑꼬부랑 단어를 그 주석부분만 읽고 있는데, 세상에나! 그 모든 자음과 모음이 읽혀지는 게 아닌가? 한글 자모와 똑같은 글자가 거의 3분의 1이나 되지 않는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금 연구를 했더니, 그 발성원리와 제자원리가 훈민정음과 완벽히 똑같지 않은가? 놀라와라!!!! 산스크리트가 한글이라니. 한글이라니, 이게 무슨 경천동지의 일이고, 대경실색의 일이란 말인가?


역사조작의 온갖 굴레가 훠언히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남천축이 다름아닌 남조선이란 말이 아닌가? 그러면 중천축인 천축이 천독, 신독이  조선의 천조 신주 중국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하 여기 파미르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가 인류사의 주무대라는 것이 잡히는 순간, 고조선부터 근세 조선까지의 그 중앙의 황제직할지 중국이 신주 천조 중원 천축이 바로 중앙아시아(좁게는 신강)라는 것이다.


이제야 훠언히 알겠다. 왜 칭키스칸이 중앙아시아만 정복하느라 20년을 소모전을 했는지? 왜 대영제국이 인도를 200년이나 식민지로 붙잡고 대륙경영을 했는지? 왜 러시아를 중앙아시아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조선 중앙의 만주지역을 파괴하고 러시아화시키고, 아프간 파미르 천산 라인으로 러시아를 견제했는지? 러일전쟁의 무대가 여기 이 라인에서 벌어지고,


1905년의 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이 진행되는 중에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이 늙은 호랑이(조선) 처리의 뒷거래를 하면서, 영국 미국이 러시아를 밀어 붙이는 과정에서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905년 러시아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왜 러시아의 비밀조직쪽으로 미국의 검은 자금이 흘러 들어갔는지, 미국자본가들의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일본을 지원하는지 훤히 알겠더라는 것이다.


아리아인은 산해경의 '조선 천축'人이었던 것이다. BC1200년조의 북아시아의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문화가 서아시아와 지중해지역으로 퍼졌다는 말이 바로 중앙아시아 중천축 즉 조선의 중국으로부터 퍼졌다는 말인 것이다.


BC519년은 이 년표대로라면, 석가 나이 56세 때 한창 간다라 지방에서 왕성하게 설법하실 때, 다리우스가 간다라를 정벌했다면, 불경에 온통 그 사건의 일화가 가득 들어 있을 텐데, 엉터리 조작일 따름이다.


 도대체 BC1520년과 BC1122년에 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민족대이동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夏)는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520년까지 존재했다고 기록된 중국의 옛 나라이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중국의 첫 국가이기도 하다. 상나라의 탕왕에게 멸망되었다. -위키백과사전의 하나라조에서 인용.


한단고기/임승국,정신세계사 P89~90 '설원의 기사를 옮긴다. "....탕임금은 걸왕을 쳐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다."



BC1520년경에 멸망한 지배층과 그 부족이 아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중원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한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상(商)이라고도 한다. 문서자료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여 이 왕조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전설적인 최초의 왕조 하(夏)의 계승국가로, 창건 연도는 BC 1760~1520년이며 몰락시기는 BC 1122~1030년으로 추측이 다양하다. 통치기간은 BC 1766~1122년으로 전해진다.’ 

- 브리태니커 은나라조에서


 BC1122년에 중원을 차지했던 은나라가 망하고, 이제는 동쪽의 감숙성지방으로 이 화족이 도망치게 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도망치는 사건을 기자동래와 사카남래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제 남쪽에 자리잡은 하(사카, 시앤-商)족이 간다라지방을 장악하고, 정치문물의 안정화가 되어가는 시기에 그 이전에 이동해 왔던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나라의 사카(스키타이)족의 혼란한 사상 종교상황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역사적 과제를 석가부처가 맡게 되는데, 바로 BC1027에 태어나서 BC1000년경에 대각득도를 하는 것이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일인가? 그런 민족이동과 과거에 이동해간 고대적 사상과 정치 문화적 과제를 떠맡는 것이  그 지방(간다라)의 황태자로서도 얼마나 적확한 문제의식과 정면대결한 것인지가 사무쳐지도록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런 석가를 국적불명의 사상적 고아로 만들어 놓는다는 말인가?



이 시기 비정이 잘못되면, 역사의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만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 앞으로 더 많은 실증적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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