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샤와르에서 - 석가(사카)는 카불(가비라)에서 태어나고 페샤와르(파샤, 파사, 秦都, 錦都)에서 도를 폈다

여지껏 여러분은 발해가 반도의 북쪽에서부터 현재의 간도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을 앞글들에서 필자는 한헌석 칼럼을 인용하여 논하였다.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은 조선의 朝가 '아시'이며 '아시아'는 아샤라는 소리일 뿐 마지막의 '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에서 만들어지는 발음상의 늘어진 음절에 불과하다.

 

고기에 이르기를 '인류의 조상을 나반과 아만이라 하니 천하(天河)의 동쪽에 살다가...서로 만난 곳이 아리스타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리스타 또한 아리의 땅이란 뜻이다. 아시나 아리나 모두 시작 처음 아침을 뜻하며 곧 태양을 뜻하기도 한다.

 

한인이 한웅이 한검이 모두 한님, 하늘님의 조화 교화 치화의 삼권을 칭하는 의미라면 현 인류사는 하늘의 역사이며 태양의 역사 빛의 역사 광명의 역사이다. 즉 광명이세를 추구하는 지상문명시대이다. 이것이 현 지상 인류문명의 정체이다.

 

아사아가 조선이란 등식에서 놓고 볼 때 조선이란 아시의 태양, 아시의 해, 아시의 광명이란 뜻이며 조선은 곧 아시아의 아침이요 태양이요 빛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해모수가 성이 해씨요, 고주몽이 성이 고씨였다. 소서노가 소서의 신령한 빛을 받고 태어났기에 소서노라 하였으며, 알영이 또한 아리영이며 아리 아시와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이름이었다.

 

여러분은 빛의 역사 아시아 조선의 역사 아니 세계사 자체가 조선의 역사인데 그 역사의 비밀을 벗기는 것이 곧 광명이세하는 길이며 이 지상문명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란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필자는 조선 고려사의 핵심인 서안(평양)과 동경(낙양)과 남경(호탄, 에덴)과 송도(개경)과 의주(카스)를 비롯하여 람시성(안시성, 발흐), 해주(백주, 배성) 등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추적하여 왔으며, 지속적으로 필자의 기고를 탐독한 독자는 혼란과 곤혹스런 고통을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역사거 거대하게 왜곡되고 그 왜곡하는 세력들이 있다면 그 세력들의 게임은 의도하는 큰 그림이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Central Aisa 즉 아시아의 중앙이 바로 조선의 중앙이며 세계의 중심이란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지 않고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여러분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오늘의 기고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가비라국과 설법을 한 파사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한헌석 칼럼을 전문인용한다. 秦都와 錦都가 어디였는지를 알기 바라며, 또한 석가모니를 인도인으로 조작하는 것과 불기를 조작하는 현란한 조작자들의 솜씨를 보기를 바란다.

 

조선신도(신두)를 조작하여 조선을 지우면서 신두, 힌두를 인도로 완벽하게 잘알지 못하게 조작하여 놓고 불교가 있던 자리에 이슬람을 채색하여 놓는가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을 인위분리하여 동서파키스탄의 사이에 인도를 조작하여 놓고 이슬람에 포위된 채로 중앙아의 불교흔적을 깔끔히 청소하는 거대한 음모를 이미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동방견문록을 조작의 교과서로 삼고서 대당서역기를 비롯하여 조작의 뼈대를 구성하여 놓고 역사의 골격을 다시 구성하여 나가면서 완성된 현재 역사서술이 완전히 엉터리란 것을 여러분이 알 때, 오늘의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숨은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간다. 한헌석 칼럼을 깊히 탐독하여 주길 바라는 바이다.

P158 '바다샨에서 남쪽으로 열흘 거리 떨어진 곳에 파샤이라 불리는 지방이 있는데, 그곳 주민들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고 우상숭배자들이며 피부가 검다. 그들은 주술과 마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남자들은 귀에 귀걸이를 달고, 금은과 진주 그리고 보석이 많이 박힌 버클을 차고 다닌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이고, 풍습도 나쁘다. 이지방은 매우 더우며, 주민들은 고기와 쌀을 주식으로 삼는다.'



파샤이는 F본에는 PASCIAI,  R본에는 BASCIA Z본에는 PAXAY로 나와 있다. 파샤의 발음이 각각 다르게 전승되다가 고정된 것 같다. 이 파샤이는 법현전,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에 다 나온다.



먼저 법현전부터 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501 '여기서(숙가다국, 현 스와트)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錦都, 간다라-대당서역기의 건타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탁실라, 현 이슬라마바드)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건타위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대당서역기의 포로사포라-현 페샤와르)에  이르렀다....부처님 발우는 바로 이 나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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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당서역기/동국역경원 P66 '건타라국의 큰 도성은 포로사포라(주34, PURUSAPURA-지금의 페샤와르)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이다. 왕족은 이미 후사가 끊겨졌으며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왕성 안의 동북쪽에 옛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보대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발우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수백년에 걸쳐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 올렸는데,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지금은 파라사(波剌斯- 뒷편에서 페르시아로 조작해 놓았다.)에 있다.'


-포로사포라는 파라사국, 파사국 혹은 파라사성이다. 현재의 페샤와르다.(PURUSAPURA>퍼ㄹ사보라>페사[순경음]보르>페샤와르)



대당서역기 P354~363의 현장의 귀로에 다시 건타위국(간다리지방)을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에 언급하는 나라들을 열거해보자. 신도국 무라삼부로국 발벌다국 아점파시라국 낭게라국 파랄사국 비다세라국 아반다국 벌랄나국 등이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 카불(서경)에 수도를 둔 카피시국이 건타라국의 포로사포라를 동경으로 삼고 있었다.(바로 수나라의 서경과 동경이다.-현장이 왔을 때는 수가 고구려에 망해서 고구려의 도호부가 카피시에 세워진다. 대당서역기는 이를 돌궐이라 부른다.)


 이 카피시국이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고 있는데, 대당서역기의 묘사가 참으로 기묘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무라삼부로국은 책가국(탁실라, 법현전의 축찰시라, 현 이슬라마바드)에 복속, 발벌다국도 책가국에 복속, 아점파시라국은 신도국에 통치되고, 낭게라국(P65의 나게라갈국 -카불과 페샤와르 사이의 현 낭가르하르 지방)은 파랄사국에 복속, 비다세라국은 신도국에 복속, 아반다국은 신도국에 복속, 벌랄나국은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현장의 귀로에 묘사하고 있는 지역은 현 이슬라마바드에서 카불까지의 지역인데, 그 지역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책가국, 신도국, 파랄사국, 가필시국을 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 파랄사가 페르시아란다. 얼토당토 않다. 아예 어이가 없다.


카불과 페샤와르의 서경 동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그 지역을 통치할텐데, 무슨 그런 콩가루 조작을 해대고 있는 것인지! - 쯧, 딱하기도 하다. 고구려에 패한 수나라가 망하고, 고구려 점령군이 서경 동경을 장악하고 있는데, 역시 딱하게도 이 점령군을 돌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점령군은 분명히 발흐(안시성)의 양만춘장군의 군대일 수밖에 없다. 658년에 이 점령군은 당군에 의해 다시 다시 쫒겨나지만(흔히 이 지역에서의 서돌궐이 당조에 의해 멸망했다고 운위되지만), 7세기 말에 발해에 의해 다시 재점령되는 것이다. 물론 고선지의 파미르를 넘는 위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 발해세력의 견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력에 의해 격퇴되는 것이다.



대당서역기의 파랄사국조를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P358~359  20) 파랄사국[비록 인도의 국가는 아니지만 가는 도중에 나오는 나라이며 구역(舊譯)에서는 파사(波斯)라고 한다.]


‘파랄사국의 둘레는 수만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소랄살당나(주56-SURASTHANA)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에 달한다.... 가람은 두세곳 정도 있으며 승도들은 수백명이 있고 이들은 모두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법을 익히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발우가 이 나라 왕궁에 있다.(P359의 주59-페르시아에 사원이나 승려들이 있었으며 소승교를 전하고 있었고 부처님의 발우를 받들고 있었다고 하는 기사는 다른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진위(眞僞)가 불분명하고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없다.)'


-우선 소랄살당나(SURA-STHANA)성을 먼저 확인해 보자. 왕오천축국전/학고재,정수일 역주 P184 '사위국(슈라바스티, 사바티)은 "비슈누푸라나"에 의하면 슈라바스타(실라벌실다)왕이 사위성을 건설한 데서 기원했다고 하고,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이 슈라바스타왕이 슈라바(실라벌)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수라바스타성을 수라스타나성이라고 소랄살당나성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부처가 25년간 머물면서 설법한 사위국인 것이다. 수라스타나의 스타나는 ㅅ당 혹은 스탄이 틀림없는데, 이는 슈라바스티 혹은 슈라바스타의 슈라(SURA)의 성 혹은 땅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삼봉집/민족문화추진회 P329 '사위성-(안)사위는 파사국의 이름이다.'의 구절이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슈라를 현장은 실라라 부르고 바스타를 벌실다라고 부른다. 현장의 귀에는 슈라가 실라로 들렸던 것이다. 소도 수도 혹은 부도가 수터(새터, 쇠터)와 함께 쓰였는데, 수터가 수러로 발음되는 것은 류음화현상이다. 슈라 혹은 실라는 수도라는 말인 것이다. 즉 여러 왕국을 거느린 중소제국의 수도였던 것이다. 석가부처는 조그만 소왕국의 태자가 아니라 간다라지방 전체의 제왕의 태자였던 것이다.




이 파사를 산스크리트의 파라사라는 원음을 이용해 마치 현장이 페르시아에 간 것처럼, 부처님 발우까지도 페르시아로 옮겨놓는 조작을 하고, 슈라바스티(사위국)을 네팔 남쪽의 궁벽한 곳에 교살라국의 주요도시라고 심어 놓은 것이다. 선입견을 다 버리고, 상식적으로 본다 해도, 불교유적이 산같이 그득그득한 간다라지방이 불교의 중심 활동무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 지방에서 석가가 태어나고 출가하고 깨닫고 활동하고 죽었다고 보아야 상식적으로 온당한 것이 아닐까? 불교유적 유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 히말라야산맥의 고원지대에서 태어난 아기부처를 발가벗은 채로 야외에서 바가지로 물을 들이붓는 목욕을(관정식) 시킨다면 아무리 부처님 도력이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조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더욱 황당하게 조작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파사국(페르시아)>대식국(아랍)>대불림국(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까지 혜초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 참 어이없기가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이제, 동방견문록으로 돌아 가보자. 바닥샨과 카슈미르 사이에 선명하게 파샤이(파샤 혹은 파사)를 마르코 폴로는 자기발로 밟았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파사가 페르시아가 아니고, 이들이 불교도라고 선명히 이야기한다. 바로 앞의 바닥샨(파미르고원의 일부) 그 첩첩산중까지 마호메트를 신봉한다고 했는데도, 이 사위성(슈라바스티, 파사, 페샤와르)에 불교전통이 석가시대 이후로 가장 강력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석가부처는 베그람 혹은 바그람에서 태어나고( 베그람[카불 북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은 대당서역기에서는 가필시[KAPISI]라고 부른다. 카필라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명이다. KAPI 다음에나오는 시와 라는 슈라혹은 실라 두음절 어느 것이 오더라도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두산백과사전의 가비라성[迦毗羅城,KAPILAVASTU]조를 인용하면, '가비라바소도(迦毘羅婆蘇覩)·가유라위(迦維羅衛)라고 하며, 줄여서 가비라(迦毘羅)·가이라(迦夷羅)·가유(迦維)라고도 한다. 네팔의 타라이(Tarai) 지방에 해당한다. 가비라 선인(仙人)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석가모니 생존시에 사위국(舍衛國, 슈라바스티)에게 망하였다.'


인용문과 같이 가비라국은  옆에 있는 페샤와르의 슈라바스티국-사위국에 망하는 것이다.), 페샤와르(파사국)에서 깨달음을 얻고 가르치고 니렌하 혹은 니르바나하, 열반하인 인더스강(마르코 폴로가 키안수라고 부른) 옆의 그 보리수나무 아래서 열반하셨다. 바로 카불지방에서 탁실라, 카슈미르까지의 간다라지방을 무대로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 고대 불교문화의 유적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지방을 마르코 폴로는 만지 즉 (조선,고려의)만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스키타이(키타이 카타이 사카 석가 塞 夏 가라 구르 가야)가 파미르 바닥샨의 산지의 길을 열고 중천축(천조 신주 중국 - 신강)으로부터 이동하고 연결을 놓지 않고 있던 남천축의 센타였던 것이다. 문자(카불은 카부도이니, 사카족의 수도라는 말이다) 그대로 사카족의 활동무대이다.


이제 석가부처의 생몰연대를 전등록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추적해서 이 사카족이 천축 신주 천조 중국 즉 신강으로부터 언제 이 남천축으로 이동하였는지를 확인해 보자. 전등록 1권/바로보인,문재현 P45~48 '이때(부처님이 탄생하실 때)가 주소왕 26년 갑인 4월 8일이다....이때(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곧 주목왕 53년 임신년 2월 15일이었다.' 주소왕 26년은 BC1027년이고, 주목왕 53년은 BC949년이다. 현재 세계의 공식적인 불기는 2552년이다. 그러면 부처의 몰년은 BC544년이다. 전등록의 불기로는 올해가 2957년이다. 약 407년의 차이가 난다.


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의하면 석가부처의 몰년은 BC484년이다.


최두환칼럼 277호 해동고승전의 행방을 인용해보자.

'《해동고승전》이 지어진 시기는 그 책에서 “佛入滅至今乙亥 二千一百六十四年”,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가 열반하신 지 올 을해년까지 2164년이라는 말로 보아, 고종(高宗) 2년인 1215년이다. 이 2164년의 숫자는 석가모니 나이 79살, 주(周)나라 목왕(穆王) 임신(壬申: BC. 949년)에 열반하신 때부터 계산한 것과 일치된다. 


2003년은 불기(佛紀) 2547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석가모니는 BC.544년(丁巳)에 태어난 것이 된다. 이것은《세계대백과사전》의 경우 BC.563(?)~BC.483(?)이라고 하는 것과는 서로 19년의 차이가 있지만, 각훈이 지은《해동고승전》에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26년의 잘못) 갑인(甲寅), 즉 BC.1027년에 태어났다는 것과는 무려 483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이 옳다면 2003년은 불기 3030년이다.'


대당서역기 P68 '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신 뒤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백년이 지난 뒤 어떤 왕이 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 이름을 가니색가라고 할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석가부처는 BC272년에 돌아가신 것이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677년의 차이가 난다.


송운의 서역기를 보면(낙양가람기/눌와) P196에 보면, "내가 열반한 이백년 후에 가니색가라는 이름의 국왕이 이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 -카니시카왕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고 카니시카탑을 조성한 연도가 135년이니, BC65년에 석가부처가 돌아가신 것이 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884년의 차이가 난다.


왜 이리 한사코 부처시대를 400년 500년 700년 900년이나 후대로 끌어 당겨 내릴까?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월지 혹은 월씨의 관련조를 한번 정리해보자.


BC174, 월씨, 중국으로 부터 서방으로 이동을 시작.


BC165, 월씨, 흉노에게 쫒겨 감숙으로부터 이리방면으로 축출.


BC162, 대월씨, 흉노에게 쫒겨 돈황, 기련방면에서 이리 방면으로 축출.


BC160, 사카, 월씨의 침략을 받고 밀려 이동을 시작.


BC140, 중앙아시아에 대월씨국을 세움.


BC138, 漢 장건, 대월씨국에 사신으로 파견됨. /월씨, 아무르강의 유역을 공략하여 취함.


- 우선 눈에 띄는 모순점은 월씨가 바로 사카인데, 그 월씨가 사카를 침략했다는 것이 조작의 난맥상이 노출된 것이다. 어쨌든 월지가 중앙아시아와 서북인도에 이주한 시기가 BC160년경이면, 석가가 그 이후에 태어났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조작자의 강박관념이 만들어 낸 하향조정인 것이다.


이제 사기 대원열전의 대월지조를 한번 인용해보자. '처음에 월지는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자 멀리 떠나 대원(페르가나)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박트리아)를 공격하여 그들을 신하로 삼고, 마침내는 규수(아무다리아강) 북쪽에다 도읍을 세우고 왕정을 삼았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남산(南山)과 강족(티베트계 부족)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이 소월지가 바로 당항 혹은 당구트 혹은 탕구트인데, 이들이 후대 7세기에 서북인도(인도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와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여 대당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당제국의 국제적인 도시, 낙양이 바로 돈황이다. 돈황을 묘사한 법현전을 인용해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494 '하안거를 마치자 다시금 나아가 돈황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가 약 80리 남북이 40리나 되는 성의 요새가 있었다.'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대도성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P241 '그(대도성) 둘레는 24마일이고 한 면이 다른 면보다 더 길지 않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한면의 길이가 6마일 즉 9.6킬로가 되니 10킬로로 쳐서 그 넓이가 100평방킬로가 되는데, 돈황은 동서 32킬로 남북 16킬로가 되면, 그 넓이가 512평방킬로가 되니 돈황이 대도의 5배나 더 큰 도성이었던 것이다.


이 돈황이야말로 신라사의 동경 금성 바로 경주인 것이다. 당나라의 낙양성이다. 우리가 대도를 수도로 한 원제국의 실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BC162년에 고비사막(그 동북쪽 변경이 돈황에서 하미를 거쳐 트루판까지다)을 지나서 천산북로를 지나 이리지방으로 대원을 지나 BC160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하여 사카가 아프간의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한 스토리다.


잘 조직된 대상(隊商)이라 하더라도 아무 방해 없이 간다면 2년은 족히 걸릴 길을 축출당하는 부족이 끝없는 정복전을 계속해서 2년만에 대하를 정복했다면, 소도 웃을 일이다. 실제 천하의 칭키스칸도 신강지역을 정복하고 대하까지 정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월지 스토리는 싸구려 3류 무협지의 소재감도 못되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억지 조작일 뿐이다.



그러면 실제 석가족 혹은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의 이동을 추적해 본다면, BC11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해의 연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두가지가 보인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성립했다는 것과,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금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중원(하화 혹은 중화, 신강)의 주인이었던 하족(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서쪽 훈 혹은 한이라고 불리는 구려(역사상 주나라)에게 밀려서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이주했는데, 그 일을 단행한 지도자가 스키타이 혹은 키타이의 키즈(기자)라고 불리는 이였는데, 팔조금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바로 誠信愛濟禍福報應의 팔조로 된 참전계경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로 고정되는 것은 그 후대의 일이겠지만. 그 내용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일치한다. -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참전계경과 우파니샤드를 생산한 주체를 추적하여 고대의 사상의 원형과 현대세계에 대한 대안적 사상의 모색에 있기 때문에 이 두 고경의 분석과 비교연구를 필생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회가 닿으면 연구서를 낼 계획이다.)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기록이 사기 한서 상서 삼국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사략에 나오고, 근세조선시대까지 단군과 함께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왔다. 이 기자동래는 신강지역의 쿠차(혹은 카라샤르)지방에서 감숙지방의 돈황으로의 사카족 스키타이(시앤-商)의 이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지의 신라의 새부도 건설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기자동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장에 돈황(탕구트조)이 나오므로 그때 좀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한편 서쪽과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시앤-商)의 이동을 추적해 보면, 기자동래의 20년후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나와 있다.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BC1100년조에 '아리아인, 갠지즈강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라는 기사다.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의 신두푸조에서 논했지만, 갠지즈란 GANGE-SE(QUIANSU 혹은 QUIAN江이라고 마르코폴로가 불렀던 인더스강을 의미하고, 인도라는 이름은 영국의 식민지경략 때, 본격적으로 불리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아리아인(하족 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철기문화를 들고 인더스강의 상류지방 즉 간다라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를 '사카남래'라고 불러 보자.


관련연표를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스키타이 인도 아리아조를 정리해 보면

(BC1751~1520, 하나라 멸망.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BC1500, 인도 북서부에 아리아인 침입, 인더스문명 쇠퇴, 이후 인더스강 유역에 H묘지문화, 주카르문화, 가르문화 형성. 리그베다 성립


BC1200, 북아시아의 카라수크,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 문화가 서아시아와 동지중해로 퍼짐.


BC1122, 은 망하고, 주 성립. 은의 기자,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법금 제정.


BC11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


BC10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에 이주. 아타르바베다 성립.


BC900, 인도 브라만교 일어남. 카스트제도 발생.


BC800, 브라만문헌의 성립(후기 베다 시대).


BC600, 故우파니샤드 문헌 성립.


BC563, 석가모니 태어남. 갠지즈강 유역에 앙가, 마가다 등의 소국가 분립.


BC519,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간다라를 정벌.


BC500, 스키타이 기마문화, 북아시아에 퍼짐.


BC430, 인도 와가다왕국, 갠지즈강 유역을 통일.


BC327, 알렉산더 인도 침입. (BC324, 바빌론으로 돌아옴. BC323, 알렉산더 죽음.)


BC317,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조 설립.


BC268,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즉위. 불전 편찬. 남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전부 지배.


- 역사조작세력의 고심의 흔적이 많이도 보인다. 먼저 이 아리아인의 정체를 확인해 보자. 이 주체들의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고찰해 보면,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이들의 언어를 우리는 산스크리트라고 부른다. 그 종교를 우리는 힌두교라고 부른다.(연표에서는 브라만교라고 불렀지만.) 그 문화를 위 연표에서 주카르문화와 가르문화라고 불렀다. 수카르(<스카트<스카타이) 혹은 가르(가트<[ㅅ]카타이) 혹은 가라 혹은 가락 혹은 가야 혹은 굽타 문화는 사카문화이고, 중원의 夏문화인 것이다.


그 종교는 힌두교 혹은 신두교다. 신두는 신독, 천독, 천축이다. 바로 천부도이고 부도교이고 부다교이다. 그 내용이 우파니샤드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범신론이면서도 주재자가 확실히 있는 유일신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날님 상제 제석을 모시는 原불교인 것이다. 바로 참전계경의 하날님이고, 천부경의 하날님을 모시는 부도교 부다교이다. 우파니샤드와 참전계경을 본격적으로 비교분석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 언어는 산스크리트, 즉 인도-아리아어로서 '그 잘난' 아리아인의 서구어의 모어로 전세계인이 알고있는 바로 그 언어다.


앞에서 분석한 적이 있지만, 산스크리트는 ㅎ한서글(書契)이다. 필자가 이전에 산스크리트가 하도 궁금해서 'ㅎ한글 고어사전 실담어 주석'/강상원,한국세종한림원을 붙잡고 한두어 시간 뒤적뒤적 꼬부랑꼬부랑 단어를 그 주석부분만 읽고 있는데, 세상에나! 그 모든 자음과 모음이 읽혀지는 게 아닌가? 한글 자모와 똑같은 글자가 거의 3분의 1이나 되지 않는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금 연구를 했더니, 그 발성원리와 제자원리가 훈민정음과 완벽히 똑같지 않은가? 놀라와라!!!! 산스크리트가 한글이라니. 한글이라니, 이게 무슨 경천동지의 일이고, 대경실색의 일이란 말인가?


역사조작의 온갖 굴레가 훠언히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남천축이 다름아닌 남조선이란 말이 아닌가? 그러면 중천축인 천축이 천독, 신독이  조선의 천조 신주 중국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하 여기 파미르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가 인류사의 주무대라는 것이 잡히는 순간, 고조선부터 근세 조선까지의 그 중앙의 황제직할지 중국이 신주 천조 중원 천축이 바로 중앙아시아(좁게는 신강)라는 것이다.


이제야 훠언히 알겠다. 왜 칭키스칸이 중앙아시아만 정복하느라 20년을 소모전을 했는지? 왜 대영제국이 인도를 200년이나 식민지로 붙잡고 대륙경영을 했는지? 왜 러시아를 중앙아시아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조선 중앙의 만주지역을 파괴하고 러시아화시키고, 아프간 파미르 천산 라인으로 러시아를 견제했는지? 러일전쟁의 무대가 여기 이 라인에서 벌어지고,


1905년의 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이 진행되는 중에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이 늙은 호랑이(조선) 처리의 뒷거래를 하면서, 영국 미국이 러시아를 밀어 붙이는 과정에서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905년 러시아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왜 러시아의 비밀조직쪽으로 미국의 검은 자금이 흘러 들어갔는지, 미국자본가들의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일본을 지원하는지 훤히 알겠더라는 것이다.


아리아인은 산해경의 '조선 천축'人이었던 것이다. BC1200년조의 북아시아의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문화가 서아시아와 지중해지역으로 퍼졌다는 말이 바로 중앙아시아 중천축 즉 조선의 중국으로부터 퍼졌다는 말인 것이다.


BC519년은 이 년표대로라면, 석가 나이 56세 때 한창 간다라 지방에서 왕성하게 설법하실 때, 다리우스가 간다라를 정벌했다면, 불경에 온통 그 사건의 일화가 가득 들어 있을 텐데, 엉터리 조작일 따름이다.


 도대체 BC1520년과 BC1122년에 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민족대이동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夏)는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520년까지 존재했다고 기록된 중국의 옛 나라이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중국의 첫 국가이기도 하다. 상나라의 탕왕에게 멸망되었다. -위키백과사전의 하나라조에서 인용.


한단고기/임승국,정신세계사 P89~90 '설원의 기사를 옮긴다. "....탕임금은 걸왕을 쳐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다."



BC1520년경에 멸망한 지배층과 그 부족이 아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중원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한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상(商)이라고도 한다. 문서자료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여 이 왕조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전설적인 최초의 왕조 하(夏)의 계승국가로, 창건 연도는 BC 1760~1520년이며 몰락시기는 BC 1122~1030년으로 추측이 다양하다. 통치기간은 BC 1766~1122년으로 전해진다.’ 

- 브리태니커 은나라조에서


 BC1122년에 중원을 차지했던 은나라가 망하고, 이제는 동쪽의 감숙성지방으로 이 화족이 도망치게 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도망치는 사건을 기자동래와 사카남래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제 남쪽에 자리잡은 하(사카, 시앤-商)족이 간다라지방을 장악하고, 정치문물의 안정화가 되어가는 시기에 그 이전에 이동해 왔던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나라의 사카(스키타이)족의 혼란한 사상 종교상황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역사적 과제를 석가부처가 맡게 되는데, 바로 BC1027에 태어나서 BC1000년경에 대각득도를 하는 것이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일인가? 그런 민족이동과 과거에 이동해간 고대적 사상과 정치 문화적 과제를 떠맡는 것이  그 지방(간다라)의 황태자로서도 얼마나 적확한 문제의식과 정면대결한 것인지가 사무쳐지도록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런 석가를 국적불명의 사상적 고아로 만들어 놓는다는 말인가?



이 시기 비정이 잘못되면, 역사의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만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 앞으로 더 많은 실증적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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