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부여, 고구려 고고학〉-부여문화의 원류와 서단산문화-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부여의 기원과 그 문제점


                                                        


 

                                           - 목 차 -


                                        Ⅰ. 머리말

                           Ⅱ. 부여의 기원

                             1. 부여에 주목해야하는 이유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3. 서단산문화와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Ⅲ . 부여의 문화와 문제점

                             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집단에 있어 정체성(identity) 문제의 핵심은 동아리 내부의 동질성의 확인과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인식함에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남과 다름을 인식함과 다름 아니다.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고고학적 연구는 많은 자료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자료도 예전에는 고고학 문화를 일정 집단의 동질적이고 규범적인 틀로 보는 대신 오늘날에는 문화적 진화와 사회적 변화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족속과 집단의식에 대한 고고학 연구에 보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 것은 민족성, 혹은 동족성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와 관련된 사회적 조직화의 한 양상으로서 특히 집단 상호간의 경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후과정고고학이 출현하고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민족성 혹은 동족성이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주관적인 정체의식으로서 실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1)

  이처럼 종속성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과 유동성이 인식되면서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족속추정을 시도하는 것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각지에서 식민제국의 붕괴 이후 성립된 제 3세계 민족국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자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대두되면서 양상은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선의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고고학 자료의 정치적 이용이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족속 추정에 있어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역사학이나 인류학 또는 고고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기에 우리민족의 기원을 이미 사람이 이주해 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2) 게다가 중국학계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으로 최근 몇 년간 중국동북지방, 만주지역에 있던 문헌상의 옛 민족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를 위해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그 속에서 부여는 주몽이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적대관계 속에서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실상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에 우선 우리가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부여문화의 기원에 대해 논하기 전에, 부여 문화를 향유하던 세력범위와 고고학 측면에서 부여의 문화에 대해 짧게나마 알아보겠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부여 기원 연구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Ⅱ. 부여의 기원과 정의

1.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3)

 그동안 학계에서도 부여사는 발해사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변경의 역사로 취급되고 있다. 주로 고구려의 원류로서, 그리고 고구려의 정복대상으로서 부차적인 관심만 가져왔기에 부여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넣으려는 근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예맥족의 역사인 부여를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역사로 다루고 있는 사실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부여사의 현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여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학계에서는 부여4)가 우리의 민족의 주요 종족인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건국세력이 바로 부여에서 분파해 나간 점을 들 수 있다. 

 부여의 터전은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이 나왔다. (계루부 왕실) 주몽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5) 그러자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살던 주민들 중 일부 (비류, 온조집단)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동명사당을 두어 부여를 세운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서기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6)라고 고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 ․ 백제 왕실의 뿌리 구실을 했다. 최근 경상남도의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청동솥을 비롯해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 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부여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7)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시조 대조영도 우리 발해는 “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여 부여를 자신들의 오래 된 조상의 나라로 보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책 《무경총요》에서도 발해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으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부여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집단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부여의 역사는 우리 고대 국가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디딤돌이었고, 부여족은 우리 겨레를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중앙집권화 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직전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1)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2)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3)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4) 근대 역사학의 단초를 열었던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기존의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한족(韓族)중심의 정통론을 부정하고,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제기하였다. 신채호는 우리민족이 하나의 종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주동력이 되는 한 종족을 주족(主族)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종족을 객족(客族)으로 취급하여 주족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부여족이 주족, 지나족(支那族)․ 말갈족․ 여진족․ 선비족․ 토족(土族: 韓族과 濊貊등)․몽고족․ 일본족을 객족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사천년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盛衰消長)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민족의 역사, 국사는 곧 부여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채호가 말하는 부여중심의 역사는 고조선사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다.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5) 묘제상으로 볼때  부여와 고구려가 크게 달라 양자간의 관계를 의심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삼국지』고구려전에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 등 여러 가지 사항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두나라의 시조 및 건국신화가 같다는 것은 필경 양자가 역사적 기원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6) 472년 蓋鹵王이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직면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으로 北魏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세에는 고구려가 舊款을 돈독하게 존중했습니다.“고 한 것을 보면 제의 부여씨 왕실이 고구려와 동족, 동원으로 믿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聖王은 587년 왕도를 泗沘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했다. 이는 지배층의 종족의식에 호소하면서 加一層의 단결과 분발을 촉구한 조치로 이해된다.

7) 1990년대 초 한반도 김해지방의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가야고분에서 북방민족의 특유의 청동솥인 오르도스형 이 출토되어, 이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림성 북부 부여족의 이주에 의한 소산으로 적극 검토해 볼만하다고 申敬澈교수가 제기했다. 285년 옥저로 망명했던 부여족이 항해술을 이용, 동해안 항로를 따라 김해지방에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 배경으로 가야의 철이 동예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어 이를 구입하기 위해 김해를 내왕했던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설을 크게 뒷받침하는 측면이 강하다. - 이기동,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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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초쪼꼬  2007.06.08. 17:29

Ⅲ . 부여의 문화와 문제

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그렇다면 부여의 문화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전한 이후 부여인들이 남긴 문화는 서단산문화 다음에 나타나는 한 대문화이다. 그렇지만 부여문화의 실체는 1980 ․ 81년에 대규모로 발굴된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세 개의 층위 가운데 중층이 부여문화에 해당하는데, 장방형 수혈토광묘 129기와 마두 매장갱 1기, 유물 4200여 점이 발굴되었다. 또한 1985년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3기가 발견되고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길림 모아산(帽兒山)고분군은 부여문화의 연구에 본격적인 불을 댕기게 되었다. 아직은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서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나 용담산(龍潭山)에서 시작하여 너른 범위에 걸쳐 토광목곽묘, 토광묘, 토광목관묘, 토광화장묘, 토광석광묘 등 다양한 고분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이 발굴됨으로써 이제 비로소 부여문화의 기준이 설정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길림시 일대에서 발견되는 한 대의 유적은 한인 취락형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부여문화로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부여문화의 범주에서 다루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하심유적의 족속문제이다. 1985년에 처음 발표된 발굴보고에는 선비(鮮卑)로 규정하였지만 오히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부여인으로 규정해오고 있다. 노하심 유적은 부여 당시에 송화강 수로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거리인 100여km보다 훨씬 가깝게 느꼈을 것이지만 이를 부여유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부여 핵심부와는 독립된 세력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삼국지』부여전(夫餘傳)에서 보듯이 부여는 다양한 제가집단(諸加集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출도(四出道)를 분장(分掌)하는 제가와 관련된 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아산 고분군의 실체가 보고되어야만 부여 중심부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노하심 일대 세력의 정체와 함께 길림시 세력과의 관계도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까지의 견해에서는 노하심중층유적과 함께 서차구유적과 석역향 채람유적을 모두 부여 유적에 넣는 것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박양진 선생님은 묘제나 유물에서 족속을 판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없고, 다만 상대적으로 농경화된 유적은 부여에 속하는 반면에 유목적 요소를 강하게 띄는 것은 조선에 속한다고 판단하였다. 서로 비슷한 요소가 보인다고 해서 동일한 족속으로 판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서차구유적과 채람유적을 부여문화에 넣는 것은 이들 유적이 노하심유적보다 이른 시기에 속하여 부여사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쩠든 이러한 유적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부여의 문화적 특성을 알아보자.1)


(1)유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곽


①토기

 쌍이사경호(雙耳斜頸壺)와 쌍이관(雙耳罐2)), 두(豆)3) 등이 가장 대표적인 부여의 토기로 인식되는데 서단산문화의 토기로부터 포자연유형을 거쳐 발전한 점이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후기로 갈수록 토착적인 속성의 토기는 점차 축소되는 반면 한식토기 또는 한식토기를 모방하여 자체 제작한 토기류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는 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 상층유적과 노하심(老河深) 유적 등이 있고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는 동단산과 모아산 유적이 있다. 

②철기(鐵器)

 철기는 그 계통상 한 대 철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으로 인정되지만, 출토되는 철기의 수량으로 볼 때, 자체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장방형 주조 도끼인 곽(钁)4)과 수확 도구인 겸(鎌)의 출토 빈도가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가 농경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철제 무기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는데 농구 및 공구와 비교할 때, 철검 및, 대도 등과 같은 단조철기를 이용한 무기의 출토 숫자가 좀 더 많으며 출토 빈도도 상대적으로 높다. 이것이 부여문화의 군사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일반적인 부장 관습인지는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이밖에도 철기로 차마구가 있는데 당시의 전형적인 한 대 마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a. 거마구

 부여는 죽을 때 무덤에 말이빨과 턱뼈를 가지고 갈 정도로 말을 숭상하고 애용하던 사회였고, 이러한 풍조는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이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부여는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쇠퇴하기 직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나라는 물론 북방유목민족 관련 집단중 가장 부강하고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의 경우 이동시 수레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부여의 유적에서는 적지 않은 수량의 거마구류가 발견되고 있는데, 절대다수는 마구류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말머리의 미간으로부터 코까지를 장식하던 말얼굴장식, 두쪽말재갈, 몸체 중간에 두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 말재갈멈치, 프로펠러 모양의 말재갈멈치, 단추모양의 말띠장식 등이 있다. 이외 부여에서는 아직 중장기병과 관련된 마갑(馬甲) 류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은데, 기원후 494년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마구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인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b.무기

 부여는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중 가장 넓고 평탄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토질 또한 좋아 오곡이 고루 재배되었고 일찍부터 요동의 한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그야말로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 여러 종족중 가장 잘 살고 풍부한 나라였다. 그러나 동쪽의 읍루, 서쪽의 선비, 남쪽의 고구려, 북쪽의 다소 늦은 시기의 물길과 같은 강한 세력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어 늘상 이들의 위협 속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외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부여의 무덤 유적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무기가 다량 부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차구나 노하심(老河深)과 같이 한화(漢化)가 비교적 덜 진행된 전기 유적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부여만의 무기가 적지 않이 부장되어 있다. 예를들어 서차구와 노하심에는 손잡이 끝에 주산알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연령병식(連鈴柄式)의 동병철검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검은 부여 외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형식이다. 부여의 칼중에는 손잡이 끝에 새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조형병식(鳥形柄式)의 동병철검도 있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칼은 부여문화 형성 이전 길림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선행하여 유행한 같은 류의 칼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외 연령병식검의 상당수가 손잡이 끝 장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손잡이부가 비파형동검과 중간형동검(중세형동검)의 T자형 청동제 검손잡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점을 통해 부여의 무기 형성에 길림 중부 토착집단의 무기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외 부여의 무기중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중국식의 둥근 고리 달린 철검과 나무 손잡이를 자루 맞추개에 따로 끼어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납작 자루 맞추개의 철검이 있는데, 이러한 중국식 철검은 중국식 청동거울과 동전 및 타날문토기 등과 함께 부여와 중국 군현과의 교역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칼 외에 주요한 무기류로는 철창과 철화살촉이 있는데, 철창은 중국제품을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 것과 제작기술의 수용에 의해 자체 제작된 것이 있고, 철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과 같이 부여 양식의 특징적인 유형이 제작되었다.

③청동기및 금동유물

 부여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경의 절대다수는 한경이다. 한경과 오수전(五銖錢) 등은 부여의 무덤에서뿐만 아니라 인접한 선비의 무덤에서도 빈번하게 출토되고 있는데 한과의 직 ․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서 획득한 위세품으로서 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피장자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이 뚜렷한 청동유물로는 청동용기인 복(鍑)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에서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는 이러한 청동 용기는 부여와 인접한 선비, 흉노 등의 유적에서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부여의 청동 장신구로서 완식(腕飾)과 이환(耳環), 금동패식(金銅牌飾) 등은 부여의 특징적인 유물이면서 동시에 북방 문화적 특징을 강하게 보여준다.

a. 위엄구

 청동기시대 중국문화권에서는 부월(斧鉞)5)과 옥기류 등이 위엄구로 활용된 반면, 석곽묘, 석관묘, 지석묘, 비파형동검 등이 유행한 중국 동북지역의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집단에서는 다뉴기하학문경6)이 대표적인 위엄구로 사용되었다. 철기시대 전기에는 다뉴기하학문경 외에 한나라로부터 교역이나 증여를 통해 들여온 한경(漢鏡)과 이를 모방하여 제작한 방제경(倣製鏡)7)이 위엄구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기원후 5세기 동안 존속한 부여에서는 청동거울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엄구가 사용되었는데, 대인(大人) 이상이 썼다고 하는 금은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모라든지, 유니콘과 유사하게 생긴 신마상(神馬像)이 장식되어 있는 금도금 청동패식이라든지, 가슴 부위에 장식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른 바 호심경(護心鏡)이라든지, 벽옥(璧玉)이나 규옥(珪玉)이라든지 하는 것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외 부여 왕이 쓰고 있었을 왕관 또한 위엄구로 볼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예가 없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2)종합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부여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시기의 고고학문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시기의 문화 변화가 자체적인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외부 문화유입은 북방의 영향보다는 남쪽의 한문화의 영향이 훨씬 더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대표적인 토기인 쌍이사경호와 쌍이관 등에서 확인되는 서단산문화의 전통적 영향은 자체 문화발전의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여 초기의 문화적 발전을 보여주는 포자연전산 상층, 양둔대해자맹 중층, 대가산 상층, 학고동산 상층 등의 문화층 아래에서는 모두 서단산문화층이 존재하고 있어서 단절없는 문화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서단산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부여사회가 발전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중국 동북 지방 전역에 유입되는 전국 연문화 및 진한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연문화의 영향은 길림성 남부 이수현 이용호 성지 출토유물에서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 토착사회와 전국시대 중국 제후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교류의 결과물에 있어서는 새로운 토기 양식이 출현하고  철제 농경 도구가 사용되며 유적에서는 토광묘가 이전의 석관묘를 대체하게 된다.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경에 일어난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화와 발전은 중국 문화 유입에 따른 문화적 충격에 각 지역의 소규모 사회가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재지 사회가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후기 부여 문화가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지역에 중원문화가 본격적으로 파급된 결정적 계기는 기원전 108년 한문제가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 사건이다. 길림성 중부 지역의 토착사회는 이제 합달령 이남지구에 자리잡은 한 ․ 현토군과 직 ․ 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군현 및 한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고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부여, 고구려 등을 비롯한 정치 ․ 사회적 집단의 형성과 발전이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하면, 고고학적 증거에서 관찰되는 부여 문화의 상한 연대는 기원전 2세기말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른바 포자연유형의 성립으로 초기 부여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부여사 연구에서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사서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 내용의 신빙성 문제이다. 중국 역대 정사와 기타 문헌들은 주변 민족들에 대한 보다 풍부하고 체계적인 기록임을 자부하고 있다. 타자에 의한 기록은 객관성을 제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자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일방적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중국측 기록들의 단편성이나 부정확성 문제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그 기록들이 중국인의 전통적인 천하관과 화이사상에 의해 진상이 크게 이지러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그 역사서들은 중국 天子의 당위적인 지배 범위를 '천하'로 상정하고, 이민족 세계를 그 천하의 일부에 포함시켜 주변 민족의 역사를 사실상 중국 왕조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한편, 문화적으로 월등한 '중국'에 신속해야만 하는 야만 단계의 민족상을 구축하는데 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들은 자체의 기록을 갖지 못하였던 주변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변 민족들이 독자적인 사서를 편찬할 때도 이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이것이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잘못된 역사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이와 같이 형성된 전통적인 '동북관'이 현재까지 은연중 계승되고 있는 예가 드물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공간된 동북공정 관련 고구려사 및 동북지방사 연구 성과물의 상당수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8)

 두 번째로는 족속추정의 어려움이다. 부여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족속자체의 변화와 복합성이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시기를 달리하면서 계속 등장하고 소멸하는 여러 이름의 종족들이란 대부분 그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식이나 종족의식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9)

 세 번째로는 우리가 연구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자료가 가지는 문제점이다. 특히 동북지방에서 이제까지 조사된 대부분의 유적발굴이 구제발굴의 성격이 강하고 유적의 정확한 양상이나 내용이 명확하게 보고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한 발굴된 자료 역시 중국 정부에서 공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연구의 어려움이 있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부여의 문화와 그 기원에 대해 그리고 부여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사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방향설정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은 부여를 우리 역사로 꼭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과거 우리 역사라 칭해도 탈이 없는 고구려나 백제 등에서 저마다 부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칭한데서 부여 역시 우리역사라고 자부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왕조에 부속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과연 단일민족일까 하는 다른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단군 이래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관주도 민주주의에 대항해 만들어진 민족사학자들의 대항 담론으로서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지적하듯이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싸움을 민족간의 경쟁으로 보거나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을 민족통일로 보는 것은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라는 영토 안에서의 단일한 정치체의 출현을 곧 민족공동체의 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는 왕조국가였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신라에 의한 통일은 민족의 통일로 기억된다.

 “역사를 복원하는데 망각된 사람과 사건을 발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었다. 망각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써 나가는 필요조건이 된다.”10)

라고 말한 윤형숙선생님의 말씀은 고고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기원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예맥과 더 나아가 한민족의 기원문제에 까지 이르게 되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기원문제는 부여의 문제를 비롯하여 나아가 한민족의 문제까지 딱 이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고고학자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기원설정에 대한 언급없이 잠재적으로 이것은 이 문화이다라는 가정하에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논의되다 보니 부여나 기원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옛 부여가 있었고, 현재는 중국의 영토인 동북지방은 민족문제 등 예민한 문제들로 인하여 깊은 연구는 이뤄지고 있지만 실제 학계에 발표된 것이 극히 적고 서로의 연구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많다. 지금 이 지역의 역사학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부단히 연구되고 있지만 어느 민족역사에 포함시켜 심도 있게 그 전모를 밝혀야 하는지는 아직은 많은 난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잘못하면 자국의 역사에 대한 오류와 아울러 국익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갖고 시작하여 그 깊은 내용들을 파헤쳐 가면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고 또한 역사학자들의 사실을 정확히 보는 눈보다는 자국의 정치적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요구하기에 역사학자들이 사명감(使命感)을 갖고 올바른 인식과 설득력(説得力) 있는 연구 결과로써 진실이 밝혀져야 하고 또한 이를 인정해 줌으로써 자존심 문제나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고 본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부여의 역사는 우리,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아닌 부여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관련국들이 상호 긴밀한 협조로써 깊은 연구 하에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유물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함으로써 별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줄 안다.


<참고자료>

• 김정배, 『한국고대사입문』, 신서원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KSI한국학술정보(주)

• 대원 문재현, 『바로보인 환단고기 3 역사의 나침반』, 바로보인

• 이도학, 『고대문화산책』, 서문문화사

• 이도학, 『꿈이 담긴 한국고대사 노트(상)』, 일지사

•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 이종욱, 『한국의 초기국가』, 마르케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 박경철, 2006, 「예맥․ 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한국고고학보 39호

• 박양진, 2005, 「고고학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연구 37호

•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 송기호, 2005, 「부여사연구의 쟁점과 자료해석」, 한국고대사연구 37호

• 왕면후, 「고대부여의 흥망과 왕성의 변천」, 백산학보 58호

• 한국신문, 『한민족의 문화유산(고조선, 부여, 발해)』

• 오강원, 「중만지역의 초기철기문화-포자연식문화의 성립과 전개과정」

• 역사탐구위원회, http://cafe.naver.com/19101945

• 베네딕트앤더슨/윤형숙 역, 2005, 『상상의 공동체』, 나남

 

 

1) 이 곳에 소개한 유물들은 대게 부여의 유적이라 생각되는 노하심(老河深)유적과 모아산(帽兒山)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2) 질로 만든 두레박이나 주전자

3) 두껍고 굽이 높으며 뚜껑이 있어서 고기붙이, 국 따위를 담는 데 쓰는 나무로 된 제기(祭器).

4) 그러나 괭이로 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끊다, 쪼개다라는 듯도 있어 도끼로 추정되긴 하지만 전국(戰國)·진(秦)·한(漢) 시대의 실례로서는 두부(頭部)가 둥글고 조붓이 생긴 날의 한 끝에 네모난 구멍을 뚫었고, 약간 구부러진 것이 중국 허난성의 전국시대 묘(墓)에서 출토되었고, 또한 너비가 넓은 대형(臺形)의 날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것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5) 생살권의 상징으로서 주던 큰도끼와 작은도끼. 정하는 대장에게 통솔권의 상징으로 임금이 손수 주던 작은 도끼와 큰 도끼. 정벌, 군기, 형륙(形戮)을 뜻한다 

6)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보급된 된 것으로 원형의 뒷면에 꼭지(뉴)가 2-3개 달리고  대체로 삼각거치(三角鋸齒) 무늬를 무늬구성단위로 한 기하학무늬 거울을 말한다

7) 중국 한나라의 거울을 본 떠 만든 본뜬거울.

8) 박경철, 濊貊·扶餘와 高句麗의 正體性에 관한 硏究 , 강남대

9)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10) 베네딕트앤더슨/윤형숙 역, 2005, 『상상의 공동체』, 나남, 280~282p

[퍼옴] 부여는 우리 고대사의 엑스트라 아닌 주인공 

한겨레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   2015-10-01 21:08

 

부여를 세운 부여족은 사슴을 귀히 여기던 사슴족이라 한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사진은 지린시 어귀에 있는,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 사계절 제공
부여를 세운 부여족은 사슴을 귀히 여기던 사슴족이라 한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사진은 지린시 어귀에 있는,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 사계절 제공
‘고조선 박사 1호’ 송호정 교수
최근 발굴·연구 성과 녹여
20여년 묵힌 ‘부여사’ 개관
 
“우리 고대 역사상 두번째 국가
부여사를 변방 아닌 중심에 놔야”
한나라보다 먼저, 진시황대에 등장
700여년 동안 고유 문화 일궈
처음 읽는 부여사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

송호정 지음/사계절·1만8000원

부여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저 고조선의 말미, 고구려의 초입에 동예·옥저와 함께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랄까, 곁다리 존재랄까.

송호정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쓴 <처음 읽는 부여사>는 부여를 주인공 삼은 국내에 보기 드문 책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이루며 등장했던 나라가 부여임을 환기시킨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말(494년)까지 자그마치 700여년을 존속했고, 옛중국 서진(西晋) 사학자 진수(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집필되던 3세기 중엽까지 “한번도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을 정도로 군사력과 통치력이 강했던 나라다. 진수는 부여를 시작으로 하여 고구려·옥저·동예·읍루·한(韓) 순으로 기록했는데, 부여를 “아주 부유한 나라”라 기록했다.

송 교수는 예맥족의 한 갈래인 부여족은 오늘날 헤이룽장성과 지린성 일대인 북만주 지역에 나라를 세워 ‘시퇀산 西團山 문화’라는 선진 문화를 일구었으며, 그리하여 부여는 지린시 동쪽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보듯 쑹넌평원(쑹화강과 넌강 사이)과 쑹랴오평원(쑹화강과 랴오허 사이)을 개척하며 국가 체제를 마련하고 ‘둥퇀산 문화’를 피워낸 나라였다고 파악한다.

부여 왕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둥퇀산.  사계절 제공
부여 왕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둥퇀산東團山. 사계절 제공
고조선 멸망 뒤 그 세력범위 아래 있던 여러 지역집단이 흩어져 나라를 세운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고구려가 새로 등장했고 한강 이남에선 고조선 백성들이 마한·진한·변한을 세웠다.” 부여는 그 이전, 고조선과 공존했던 나라다.

대개 학계에선 부여가, 한나라가 흉노 동쪽 땅을 평정한 기원전 119년에서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 사이에 출현했다고 본다. 송 교수는 <사기> 화식열전에 나오는 조선·부여 기록이 진시황(기원전 246~210) 시대의 사실을 쓴 내용이라는 점을 토대로 하여, 부여가 이미 진시황 때 고조선과 함께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부여의 성립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이다.

여기, 동명왕 건국 신화가 있다.

‘옛날 북방에 ‘탁리’(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 아들을 낳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라 생각해 그 어미에게 거둬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항상 말을 기르게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 했다. 이에 동명이 달아나 (…) 남쪽의 부여 지역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 주몽신화(추모왕 설화)와 똑같은 얼개다. 기원전 1세기 후한 학자 왕충의 <논형> 길험편과 위나라 어환의 <위략>에 나오는 부여 동명설화다. 송 교수는 동명설화가 부여족계의 모든 집단이 공유한 건국 설화로서 고구려 주몽신화에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얘기한다. 자신들을 천신족으로, 자신들의 시조를 천제(일월)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은 단군신화 이래 신라(석탈해·박혁거세)나 가야(수로왕) 설화도 같다.

부여 시조 동명설화에서 동명은 왕이 죽이려 하자 달아난다. 남쪽 ‘엄호수’에 이르니 물고기·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줬고,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송 교수는 부여 시조 동명이 남하해 건넌 엄호수를 오늘날 쑹화강으로 본다. 그 동명이 나라를 세운 땅(지린성 일대)엔 선주민인 예족(예인)이 살고 있었으며 동명은 맥족의 일원이라는 것. 선주민이 예족임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록과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권1), <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 고구려조)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곧, 맥족이 북방에서 쑹화강 유역으로 남하해 예(후이)족의 땅에 건국한 나라가 부여다. 예족과 맥족은 인류학적으로 동일한 종족이며, 원래 예 계통의 주민집단이 살고 있던 랴오허 동쪽 지역에 랴오시 혹은 중국 북방으로부터 맥 계통의 주민집단이 이주하고 융합을 통해 예맥이라는 종족 집단을 형성했다고 본다.

그러면 동명이 본디 살았던 나라 ‘고리’는 또 어디인가. <논형> 길험편은 부여 시조 동명을 고리 국(북이 탁리 국)의 왕자로 적고 있다. 또한 5세기 광개토왕릉의 비문에는 고구려의 기원이 된 나라가 ‘북부여’라고 적혀 있다. “북부여 천제의 아들 추모(주몽)가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적어도 고구려 왕실에선 자신들의 시조 주몽을 북부여의 왕자로 믿었다.

송 교수는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초기 부여에서 이른바 동부여 세력이 나오고 이 세력에서 고구려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이 나왔으며 이 집단이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인 고구려를 세웠다고 본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살던 주민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백제를 건국했다. 백제는 6세기 중반에 남하해 세운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라 하기도 했다.

그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적힌 고구려의 기원 ‘북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이라기보다는 부여의 북쪽에 있었다고 보는 부여사 중심의 해석이 설득력 있다고 얘기한다. 북부여는 ‘<위서> 두막루전’, ‘<신당서> 유귀전’에도 등장한다. 요컨대 송 교수는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북부여가 바로 고리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북부여 지역은 쑹넌 평원(쑹화강과 헤이룽강이 합류하는) 일대라고 추론한다.

송 교수는 ‘고조선 박사 1호’로 불린다. 20여년 전 부여사 얼개를 정리해 박사학위 논문으로 써볼 요량이었으나, 지도교수가 국내에서 더 관심이 큰 주제인 고조선사를 주제로 쓸 것을 권유하여 고조선으로 박사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그가 오랜 세월 묵히고 연구해온 바탕 위에 2002~2007년 동북공정 기획 아래 중국에서 쏟아진 연구와 고고학 발굴·연구 성과까지 녹여낸 책이다. 중국의 <삼국지> <사기> <논형> <후한서>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을 오가며, 부여의 주민 구성과 국가 형성, 문화의 양상(기반)까지 그 실체에 다가서고자 했다.

지은이는 이제는 부여사를 우리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변방·주변이 아닌 본류·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조선 동쪽 땅에 생겨난 동예와 옥저는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사라졌고 삼한은 백제·가야·신라의 등장으로 없어졌지만, 부여는 전성기인 3세기를 거쳐 5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부여 지배층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 발해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 고대국가 발전의 중요한 연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 가야와 부여를 더해 한국 고대사의 ‘5국시대’를 설정하자는 학계 일각의 제안을 ‘지지’한다.

중국 학계는 부여사를 중국 고대사의 주요 범주로 다루고 있다. 중국 학계와 한국 학계가 동의하는 건 부여, 고구려는 예맥이 세운 고대 국가란 점이다. 그런데 중국은 부여를 세운 예맥이 바로 중국 고대의 한족(漢族)이라고 본다고 한다. 2007년 동북공정 기획은 끝났어도, 고조선 이전의 랴오허 일대 문화를 중국 상고문명의 하나로 보는 ‘랴오허 문명론’이란 이름 아래 중국은 보이지 않게 동북공정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지은이는 걱정한다.



필명 도불원인님이 작성한 부여옥갑의 비밀 PDF 파일입니다.

 

부여옥갑의 비밀_도불원인.pdf

 

[출처] 삼신도원(三神道院) 원문보기   글쓴이 : 삼신지기

부여의 옥갑(玉匣) 금루옥의(金縷玉衣)

1.부여의 옥갑(玉匣) 금루옥의(金縷玉衣)

 1.1 .불변에 대한 염원-옥 신앙

  그 중 하나는 주왕이 분사하였을 때, 옥을 몸에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불 속에서도 그의 육체가 타지 않고 남았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생각나는 것은 허베이(河北)성 만청(滿城)현 이나 산둥(山東)성 쉬저우(徐州)시 에서 발견된 금루옥의(金縷玉衣)나 은루옥의(銀縷玉衣)이다.

 

  옥은 신선사상에 따라 그것을 소지하면 악귀를 물리친다고 전해져 왔다. 그리고 옥은 사람이 죽어도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옥은 자체에서 발산하는 파동이 우리 인체에 골고루 침투하여 혈액 순환을 좋게 하고, 조직을 생성한다 하여 건강용 보석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고대 중국에서도 옥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효과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옥의(玉衣)는 옥갑(玉匣)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자의 신분에 따라 옥 조각을 이을 때 각각 금·은·동 실로 구분하여 사용했다당시에는 옥으로 만든 옷을 입히면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1968년에 허베이성 만청현에 있는 중산정왕(中山靖王) 부부의 묘에서 금실로 엮은 옥의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2겹의 금루옥의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중산정왕 유승(劉勝)의 옥의는 2,498개의 옥 조각이 금실로, 유승의 처가 입은 옥의는 2,160개의 옥 조각을 금실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각각의 옥 조각들은 모두 정밀하게 설계·가공되었으며, 여기에 구멍을 뚫고 금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연결시켰다. 이것은 당시 수공예의 수준을 알려줄 뿐 아니라 옥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고, 옥 조각을 금실이나 은실로 이어 유체를 영구보존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실로 상·주 시대는 매미, 물고기, , 돼지, 혹은 무기의 본을 뜬 옥 조각품이 유행하였다. 1) 호신용 부적으로, 2) 왕과 제후들 사이에 서약으로, 3) 또는 신분의 증표로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4) 옥에 맹세문을 적어 부장물과 함께 무덤에 넣기도 하였다옥이 이렇게 존중되어진 것은 색이나 광택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옥이 불변하는 보석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옥이 중국에서는 흔하지 않아 매우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주로 황실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자연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왕이 사용하는 의자를 옥좌(玉座),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귀한 아들은 옥동자(玉童子)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1.2 제국 부여의 옥갑

중국 전한(前漢:서기전 206~서기8)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 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즉,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後漢:25~220) 때에는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가, (: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켰다.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중국 위, ,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 금ㆍ은ㆍ보화ㆍ옷감 등을 부여에 조공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1.3 옥갑(玉匣)

()은 원래 갑옷, ‘궤짝’을 뜻하고, 문갑(文匣) 등등의 그 용례에서 들어나듯이 이것이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전(原典)은 이것이 ‘하나의 셑트(set)’임을 밝히는 ‘옥갑(玉匣) 일구(一具)’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옥의(玉衣: 옥갑(玉匣))는 ‘미이라 붕대’이고, ()도 있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옥()과 옷칠, 황칠(黃漆)등의 칠공예 등등이 가미된 ‘신성하기 짝이 없는’ 그런 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옥갑(玉匣) 일구(一具)’를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파괴하지 못했다’라는 말이 기록된 것은, 사후(死後)에 ‘인간의 영혼을 재판하는 재판관’의 옥장(玉葬)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감히 파괴치 못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2. 부여의 옥갑(夫餘的玉匣)

  삼국지 三國志卷30-위서 魏書30-오환선비동이전 烏丸鮮卑東夷傳第30-부여 夫餘

부여는 장성 북쪽에 있다. 현도(玄菟)에서 천리를 가야하고, 남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가 접해 있고,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2천리다.

夫餘長城之北, 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음  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 (도마와 굽이 달린 그릇)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면 절하고 술을 마시면서 잔을 닦아 돌리고 , 서로 절하고 양보하여 오르고 내린다. (은나라 달력)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으로, 연일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하니, 이를 영고라 하며,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食飮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한나라 시대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도군에 미리 맡겨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가져다가 장례를 치뤘다. 공손연을 쳐서 벨 때 현도의 창고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지금 부여의 곳간에는 수 대를 내려 온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전해졌으며, 노인이 말하길 선대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夫餘庫有玉璧 珪 瓚 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옥갑(玉匣).금루옥의(缕玉衣 

 

玉衣(금루옥의)

명칭        名  : 금루옥의 玉衣

제조년대 制造年代: 서한 西

재료    材  料: 백옥 白玉 청옥

규격      格: 전장 188厘米 cm 

수장지   收 藏 地: 하북성 문물연구소 河北省 文物究所

 

소개 介  

1968년 하북성 만성현 중산정왕 유승묘 출토

  1968年河北省中山靖王刘胜墓出土

옥의유정방형, 장방형, 삼각형과 다변형 옥편 2,498편, 금실로 역어서 사람형태를 만들었다. 옥의는 덮개를 나눌 수 있는데 상체, 소매, 장갑, 바지, 신발과 생식기 등 부분이 있다.  부속품으로 옥 베개 1건, 옥황 2건이 있다.  

玉衣由正方形方形三角形和多玉片2,498以金丝编缀成人形玉衣可分成头罩上身袖子手套鞋及生殖器套等部分附有玉枕一件玉璜二件套玉衣是目前出土的西玉衣中早的一件

玉衣玉匣在西初年是皇帝和显贵使用的西的玉衣使用到了东汉穿玉片的金属丝作了有金表明不同等玉衣在曹魏期禁止目前发现的完整的和遭坏的玉衣共20余套于了解葬制度有重要的考价

估价:人民8,000,000元。

 

0.满城汉墓(만성한묘)

 

 

 

是全重点文物保护单位于保定城西北21公里处满陵山是西中山靖王刘胜及其妻窦绾的墓葬是中目前保存最完整模最大的山洞殿西中山靖王刘胜景帝刘启武帝刘彻的庶兄他在景帝前元三年公元前154被封中山王死于武帝元鼎四年(113)二月长达42中山位于太行山大致包括今易水以南沱河以北的地首府今河北定州市)。西中山有十代王刘胜是第一代王刘胜与窦绾墓均采用以山陵的建方式墓道及墓室山而成呈弧形平面布局上大同小全墓分墓道甬道南耳室北耳室中室和后室6部分墓室中分修建了木结构瓦房和石板房形成了一座功能齐备的豪地下殿除了华丽陈设和棺椁外掘中出土各文物1万多其中玉石器器等精品便有4000多件类铜19尤以金博山等最刘胜窦绾两套完整的金玉衣是全考古工作中首次发现刘胜玉衣全1.88用玉片2498丝约1100窦绾玉衣全1.72用玉片2160丝约600城陵山墓的出土文物曾赴美等和地展出受到了国内外高度赞誉

墓是 刘备先祖,刘胜墓中的文物.

 

 

墓上篇——冀地行之河北省博物

墓位于河北省保定市的中央电视探索发现目的朋友可能还记发现这纯属巧合60年代驻军修建事工程城西南的小山丘上发现了人工开凿的洞穴并发现里面有文物后文物进驻2月的将这个庞大的墓葬昭明天下判定年代西根据又在附近发现了另一座墓这两座墓的主人就是西中山靖王刘胜琯夫墓共出土珍文物一万多件更有金玉衣博山等以往只在文记载国宝时间在全大城小市到都在谈论这个惊天大发现

 

中山靖王侯王中的一首代中山靖王刘胜景帝的武帝刘彻的哥哥他的封地范北到今保定城以北南至今石家庄无极县西到保定唐石家庄新东达今天保定的蠡西早期经过文景之治后这个区应该北平原比的地方也就是这个产颇丰的地支撑了刘胜奢靡的生活

 

传刘胜是一疏于政事的平安王看看几百年后他的子孙刘备某些地方倒是承了老祖宗的墓中那些精美华丽的陪葬品可以个侧面反映出主人年的生活2000以出土文物中的四件作为图样发行了一套中山靖王墓出土文物

食器具

刘胜好酒在墓中出土的器具上得到了印在博物有一排大大的用来储藏美酒的瓦缸有些主人日用的青铜盛酒有特色的展品有龙纹铜壶篆文铜壶钉纹铜壶铜链

 

龙纹铜壶盖有凤纹身通体嵌有金的抽象龙纹围绕龙纹饰还配有云似乎含有行九天的意思展出料介绍说铜壶为诸侯楚元王中的器具楚王参与平定叛后此就被皇室并赐给刘胜使用颇为遗憾的是体有一的凹陷似乎受

 

篆文铜壶很有特点初一看身四周用金银线错出一组组眼花缭乱的花颇为奇特精美在看了文字介后才明白来这组组竟然就是传说中的篆文篆文是由中古代篆演化而由篆字在字体上修抽象的鸟状和虫成一全新的美字体就和今天的综艺体等美字一个概说壶身四周文字是一句酒宴上助用的吉祥

 

钉纹铜壶壶纹饰相交集形成若干菱形和三角形再在胎体上嵌以同的琉璃另外在交叉处纹银质个壶看上去大方而又充立体感这个壶原本也是曾放置于长乐宫后再刘胜

 

 

再整理转贴一点相考古一回老是自己写实在累死人

重点文物保护单位于河北省保定市城西北21公里处满陵山城西南1.5公里陵山主峰)。是西中山靖王刘胜及其妻窦绾的墓葬也是中目前保存最完整模最大的山洞殿

西中山靖王刘胜景帝刘启武帝刘彻的庶兄他在景帝前元三年公元前154被封中山王死于武帝元鼎四年(113)二月长达42

西的中山位于太行山大致包括今易水以南沱河以北的地首府今河北定州市)。西中山有十代王刘胜是第一代王

刘胜与窦绾墓均采用以山陵的建方式墓道及墓室山而成呈弧形平面布局上大同小全墓分墓道甬道南耳室北耳室中室和后室6部分墓室中分修建了木结构瓦房和石板房形成了一座功能齐备的豪地下殿

除了华丽陈设和棺椁外掘中出土各文物1万多其中玉石器器等精品便有4000多件类铜19尤以金博山等最刘胜窦绾两套完整的金玉衣是全考古工作中首次发现刘胜玉衣全1.88用玉片2498丝约1100窦绾玉衣全1.72用玉片2160丝约600城陵山墓的出土文物曾赴美等和地展出受到了国内外高度赞誉

刘胜墓全长约52宽处约38最高处约7由墓道车马前堂和后室窦绾墓和刘胜墓的形制大体相同墓的墓室葬品豪奢侈共出土金器玉器石器陶器漆器丝织品等1万余件其中包括"玉衣""""金博山"等著名器物 墓在墓之北皆坐西朝部布局完全模仿殿建筑墓室葬品豪奢侈 墓全51.7宽处37.5最高6.82,700立方米由墓道车马南耳室)、北耳室)、前堂中室和后室前堂是一修在岩洞里的瓦结构建筑宏富象征墓主人生前宴的大后室又分石主室和主室象征内寝白玉石成的棺床上置棺椁主室南的小室象征盥洗室有完整的排水系墓道先用石块填满后在墓道外口砌道土坯间浇水加以   墓和墓大体相同积为3,000立方米外口是在砖墙灌以水封墓更为坚房和车马房亦比墓出土金漆等器物丝织银鸟用金共一万多件

其中有出土于刘胜的夫人窦绾外形是个宫女跪坐灯的形象灯高48厘米通体女跪坐灯的各部分是分而成可以随时拆卸但是合起却天衣无成了一完美的整体的灯可以转动可以所以就能根据需要调节光亮的大小和照射的方向女的体中空火的烟滓可以通过宫女的右臂入体使烟滓停在灯身中用以保持室清洁其科性令人叹为观 怪后来当这件文物在美展出国务卿基辛格连声惊叹人在千年前就有保意了不起2000多年前就能设计得如此精巧世之作 墓中出土了金博山鼎形透雕盘龙博山骑兽人物博山等大量的其中又以国宝错金博山精美它炉身似豆形通体用柔相的金和金片出舒展的云把香料放入点燃香烟通过炉盖的多小孔袅袅上升弥漫房中

博山乃古代神中的仙山金是金银镶嵌的一炉盘上部和则铸出高低起伏挺拔峻峭的山以象征地和群山盖上就山势镂峦间有神虎豹奔走的小猴或是蹲在山峰高或是背上嬉在山中巡一幅秀的自然山景就在工匠的鬼斧神工中然而出座把上透雕成三龙腾出波的海面龙头擎托炉盘座把上的山海之间饰龙纹涵着龙为沟通天人三界的通天神其工之精湛世罕

得一提的是政局特意取中山靖王墓出土的龙纹铜壶金博山朱雀衔环四件具有代表性的国宝级文物20001020中山靖王墓文物票一套四枚 刘胜窦绾都穿着金玉衣下葬玉衣代皇帝和高级贵族死后的玉衣用玉片制成玉片以金丝编缀

刘胜的金玉衣1.88共用玉片2498用金丝约1100玉衣内还发现玉璧十八以及佩戴之物

窦绾的玉衣略小1.72共有2160玉片丝约700这两套完整的金玉衣葬服名中外的首次重大发现是十分珍史文物称国宝根据汉书 礼仪记载皇帝的玉衣用金侯王列侯始封公主用银缕公主用铜缕刘胜侯王如按汉书只能使用银缕玉衣实际出土的却是玉衣古代治者用玉衣作葬服西一直延东汉末年直到魏文帝曹丕下令禁止使用玉衣说这纯属愚俗所一葬服制度才消除了   

墓中的文物还创造多之最 4枚金5银针工盆以及小型漏斗铜药铜质外科手刀等成了迄今掘出土的地最好代最早保存最完整的一整套西汉时医疗器具 计时是迄今出土的年代最早的一古代天文器物 由石磨和大型漏斗成的合磨是我至今所最大代最早设计思奇妙的合粮食加工工具 500多件兵器中有我最早采用刃部淬火新工铁剑 刘胜铁铠也是迄今考古掘中所到的保存最完整的西汉铁 一件玻璃件玻璃耳杯是迄今考古发现最早的国产玻璃容器...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주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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