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그렇다면 부여의 문화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전한 이후 부여인들이 남긴 문화는 서단산문화 다음에 나타나는 한 대문화이다. 그렇지만 부여문화의 실체는 1980 ․ 81년에 대규모로 발굴된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세 개의 층위 가운데 중층이 부여문화에 해당하는데, 장방형 수혈토광묘 129기와 마두 매장갱 1기, 유물 4200여 점이 발굴되었다. 또한 1985년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3기가 발견되고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길림 모아산(帽兒山)고분군은 부여문화의 연구에 본격적인 불을 댕기게 되었다. 아직은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서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나 용담산(龍潭山)에서 시작하여 너른 범위에 걸쳐 토광목곽묘, 토광묘, 토광목관묘, 토광화장묘, 토광석광묘 등 다양한 고분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이 발굴됨으로써 이제 비로소 부여문화의 기준이 설정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길림시 일대에서 발견되는 한 대의 유적은 한인 취락형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부여문화로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부여문화의 범주에서 다루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하심유적의 족속문제이다. 1985년에 처음 발표된 발굴보고에는 선비(鮮卑)로 규정하였지만 오히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부여인으로 규정해오고 있다. 노하심 유적은 부여 당시에 송화강 수로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거리인 100여km보다 훨씬 가깝게 느꼈을 것이지만 이를 부여유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부여 핵심부와는 독립된 세력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삼국지』부여전(夫餘傳)에서 보듯이 부여는 다양한 제가집단(諸加集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출도(四出道)를 분장(分掌)하는 제가와 관련된 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아산 고분군의 실체가 보고되어야만 부여 중심부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노하심 일대 세력의 정체와 함께 길림시 세력과의 관계도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까지의 견해에서는 노하심중층유적과 함께 서차구유적과 석역향 채람유적을 모두 부여 유적에 넣는 것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박양진 선생님은 묘제나 유물에서 족속을 판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없고, 다만 상대적으로 농경화된 유적은 부여에 속하는 반면에 유목적 요소를 강하게 띄는 것은 조선에 속한다고 판단하였다. 서로 비슷한 요소가 보인다고 해서 동일한 족속으로 판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서차구유적과 채람유적을 부여문화에 넣는 것은 이들 유적이 노하심유적보다 이른 시기에 속하여 부여사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쩠든 이러한 유적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부여의 문화적 특성을 알아보자.1)
(1)유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곽
①토기
쌍이사경호(雙耳斜頸壺)와 쌍이관(雙耳罐2)), 두(豆)3) 등이 가장 대표적인 부여의 토기로 인식되는데 서단산문화의 토기로부터 포자연유형을 거쳐 발전한 점이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후기로 갈수록 토착적인 속성의 토기는 점차 축소되는 반면 한식토기 또는 한식토기를 모방하여 자체 제작한 토기류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는 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 상층유적과 노하심(老河深) 유적 등이 있고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는 동단산과 모아산 유적이 있다.
②철기(鐵器)
철기는 그 계통상 한 대 철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으로 인정되지만, 출토되는 철기의 수량으로 볼 때, 자체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장방형 주조 도끼인 곽(钁)4)과 수확 도구인 겸(鎌)의 출토 빈도가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가 농경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철제 무기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는데 농구 및 공구와 비교할 때, 철검 및, 대도 등과 같은 단조철기를 이용한 무기의 출토 숫자가 좀 더 많으며 출토 빈도도 상대적으로 높다. 이것이 부여문화의 군사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일반적인 부장 관습인지는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이밖에도 철기로 차마구가 있는데 당시의 전형적인 한 대 마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a. 거마구
부여는 죽을 때 무덤에 말이빨과 턱뼈를 가지고 갈 정도로 말을 숭상하고 애용하던 사회였고, 이러한 풍조는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이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부여는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쇠퇴하기 직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나라는 물론 북방유목민족 관련 집단중 가장 부강하고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의 경우 이동시 수레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부여의 유적에서는 적지 않은 수량의 거마구류가 발견되고 있는데, 절대다수는 마구류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말머리의 미간으로부터 코까지를 장식하던 말얼굴장식, 두쪽말재갈, 몸체 중간에 두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 말재갈멈치, 프로펠러 모양의 말재갈멈치, 단추모양의 말띠장식 등이 있다. 이외 부여에서는 아직 중장기병과 관련된 마갑(馬甲) 류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은데, 기원후 494년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마구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인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b.무기
부여는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중 가장 넓고 평탄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토질 또한 좋아 오곡이 고루 재배되었고 일찍부터 요동의 한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그야말로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 여러 종족중 가장 잘 살고 풍부한 나라였다. 그러나 동쪽의 읍루, 서쪽의 선비, 남쪽의 고구려, 북쪽의 다소 늦은 시기의 물길과 같은 강한 세력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어 늘상 이들의 위협 속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외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부여의 무덤 유적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무기가 다량 부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차구나 노하심(老河深)과 같이 한화(漢化)가 비교적 덜 진행된 전기 유적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부여만의 무기가 적지 않이 부장되어 있다. 예를들어 서차구와 노하심에는 손잡이 끝에 주산알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연령병식(連鈴柄式)의 동병철검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검은 부여 외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형식이다. 부여의 칼중에는 손잡이 끝에 새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조형병식(鳥形柄式)의 동병철검도 있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칼은 부여문화 형성 이전 길림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선행하여 유행한 같은 류의 칼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외 연령병식검의 상당수가 손잡이 끝 장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손잡이부가 비파형동검과 중간형동검(중세형동검)의 T자형 청동제 검손잡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점을 통해 부여의 무기 형성에 길림 중부 토착집단의 무기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외 부여의 무기중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중국식의 둥근 고리 달린 철검과 나무 손잡이를 자루 맞추개에 따로 끼어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납작 자루 맞추개의 철검이 있는데, 이러한 중국식 철검은 중국식 청동거울과 동전 및 타날문토기 등과 함께 부여와 중국 군현과의 교역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칼 외에 주요한 무기류로는 철창과 철화살촉이 있는데, 철창은 중국제품을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 것과 제작기술의 수용에 의해 자체 제작된 것이 있고, 철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과 같이 부여 양식의 특징적인 유형이 제작되었다.
③청동기및 금동유물
부여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경의 절대다수는 한경이다. 한경과 오수전(五銖錢) 등은 부여의 무덤에서뿐만 아니라 인접한 선비의 무덤에서도 빈번하게 출토되고 있는데 한과의 직 ․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서 획득한 위세품으로서 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피장자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이 뚜렷한 청동유물로는 청동용기인 복(鍑)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에서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는 이러한 청동 용기는 부여와 인접한 선비, 흉노 등의 유적에서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부여의 청동 장신구로서 완식(腕飾)과 이환(耳環), 금동패식(金銅牌飾) 등은 부여의 특징적인 유물이면서 동시에 북방 문화적 특징을 강하게 보여준다.
a. 위엄구
청동기시대 중국문화권에서는 부월(斧鉞)5)과 옥기류 등이 위엄구로 활용된 반면, 석곽묘, 석관묘, 지석묘, 비파형동검 등이 유행한 중국 동북지역의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집단에서는 다뉴기하학문경6)이 대표적인 위엄구로 사용되었다. 철기시대 전기에는 다뉴기하학문경 외에 한나라로부터 교역이나 증여를 통해 들여온 한경(漢鏡)과 이를 모방하여 제작한 방제경(倣製鏡)7)이 위엄구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기원후 5세기 동안 존속한 부여에서는 청동거울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엄구가 사용되었는데, 대인(大人) 이상이 썼다고 하는 금은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모라든지, 유니콘과 유사하게 생긴 신마상(神馬像)이 장식되어 있는 금도금 청동패식이라든지, 가슴 부위에 장식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른 바 호심경(護心鏡)이라든지, 벽옥(璧玉)이나 규옥(珪玉)이라든지 하는 것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외 부여 왕이 쓰고 있었을 왕관 또한 위엄구로 볼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예가 없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2)종합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부여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시기의 고고학문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시기의 문화 변화가 자체적인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외부 문화유입은 북방의 영향보다는 남쪽의 한문화의 영향이 훨씬 더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대표적인 토기인 쌍이사경호와 쌍이관 등에서 확인되는 서단산문화의 전통적 영향은 자체 문화발전의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여 초기의 문화적 발전을 보여주는 포자연전산 상층, 양둔대해자맹 중층, 대가산 상층, 학고동산 상층 등의 문화층 아래에서는 모두 서단산문화층이 존재하고 있어서 단절없는 문화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서단산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부여사회가 발전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중국 동북 지방 전역에 유입되는 전국 연문화 및 진한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연문화의 영향은 길림성 남부 이수현 이용호 성지 출토유물에서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 토착사회와 전국시대 중국 제후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교류의 결과물에 있어서는 새로운 토기 양식이 출현하고 철제 농경 도구가 사용되며 유적에서는 토광묘가 이전의 석관묘를 대체하게 된다.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경에 일어난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화와 발전은 중국 문화 유입에 따른 문화적 충격에 각 지역의 소규모 사회가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재지 사회가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후기 부여 문화가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지역에 중원문화가 본격적으로 파급된 결정적 계기는 기원전 108년 한문제가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 사건이다. 길림성 중부 지역의 토착사회는 이제 합달령 이남지구에 자리잡은 한 ․ 현토군과 직 ․ 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군현 및 한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고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부여, 고구려 등을 비롯한 정치 ․ 사회적 집단의 형성과 발전이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하면, 고고학적 증거에서 관찰되는 부여 문화의 상한 연대는 기원전 2세기말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른바 포자연유형의 성립으로 초기 부여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부여사 연구에서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사서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 내용의 신빙성 문제이다. 중국 역대 정사와 기타 문헌들은 주변 민족들에 대한 보다 풍부하고 체계적인 기록임을 자부하고 있다. 타자에 의한 기록은 객관성을 제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자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일방적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중국측 기록들의 단편성이나 부정확성 문제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그 기록들이 중국인의 전통적인 천하관과 화이사상에 의해 진상이 크게 이지러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그 역사서들은 중국 天子의 당위적인 지배 범위를 '천하'로 상정하고, 이민족 세계를 그 천하의 일부에 포함시켜 주변 민족의 역사를 사실상 중국 왕조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한편, 문화적으로 월등한 '중국'에 신속해야만 하는 야만 단계의 민족상을 구축하는데 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들은 자체의 기록을 갖지 못하였던 주변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변 민족들이 독자적인 사서를 편찬할 때도 이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이것이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잘못된 역사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이와 같이 형성된 전통적인 '동북관'이 현재까지 은연중 계승되고 있는 예가 드물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공간된 동북공정 관련 고구려사 및 동북지방사 연구 성과물의 상당수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8)
두 번째로는 족속추정의 어려움이다. 부여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족속자체의 변화와 복합성이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시기를 달리하면서 계속 등장하고 소멸하는 여러 이름의 종족들이란 대부분 그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식이나 종족의식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9)
세 번째로는 우리가 연구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자료가 가지는 문제점이다. 특히 동북지방에서 이제까지 조사된 대부분의 유적발굴이 구제발굴의 성격이 강하고 유적의 정확한 양상이나 내용이 명확하게 보고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한 발굴된 자료 역시 중국 정부에서 공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연구의 어려움이 있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부여의 문화와 그 기원에 대해 그리고 부여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사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방향설정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은 부여를 우리 역사로 꼭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과거 우리 역사라 칭해도 탈이 없는 고구려나 백제 등에서 저마다 부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칭한데서 부여 역시 우리역사라고 자부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왕조에 부속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과연 단일민족일까 하는 다른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단군 이래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관주도 민주주의에 대항해 만들어진 민족사학자들의 대항 담론으로서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지적하듯이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싸움을 민족간의 경쟁으로 보거나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을 민족통일로 보는 것은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라는 영토 안에서의 단일한 정치체의 출현을 곧 민족공동체의 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는 왕조국가였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신라에 의한 통일은 민족의 통일로 기억된다.
“역사를 복원하는데 망각된 사람과 사건을 발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었다. 망각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써 나가는 필요조건이 된다.”10)
라고 말한 윤형숙선생님의 말씀은 고고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기원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예맥과 더 나아가 한민족의 기원문제에 까지 이르게 되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기원문제는 부여의 문제를 비롯하여 나아가 한민족의 문제까지 딱 이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고고학자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기원설정에 대한 언급없이 잠재적으로 이것은 이 문화이다라는 가정하에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논의되다 보니 부여나 기원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옛 부여가 있었고, 현재는 중국의 영토인 동북지방은 민족문제 등 예민한 문제들로 인하여 깊은 연구는 이뤄지고 있지만 실제 학계에 발표된 것이 극히 적고 서로의 연구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많다. 지금 이 지역의 역사학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부단히 연구되고 있지만 어느 민족역사에 포함시켜 심도 있게 그 전모를 밝혀야 하는지는 아직은 많은 난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잘못하면 자국의 역사에 대한 오류와 아울러 국익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갖고 시작하여 그 깊은 내용들을 파헤쳐 가면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고 또한 역사학자들의 사실을 정확히 보는 눈보다는 자국의 정치적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요구하기에 역사학자들이 사명감(使命感)을 갖고 올바른 인식과 설득력(説得力) 있는 연구 결과로써 진실이 밝혀져야 하고 또한 이를 인정해 줌으로써 자존심 문제나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고 본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부여의 역사는 우리,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아닌 부여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관련국들이 상호 긴밀한 협조로써 깊은 연구 하에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유물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함으로써 별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줄 안다.
<참고자료>
• 김정배, 『한국고대사입문』, 신서원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KSI한국학술정보(주)
• 대원 문재현, 『바로보인 환단고기 3 역사의 나침반』, 바로보인
• 이도학, 『고대문화산책』, 서문문화사
• 이도학, 『꿈이 담긴 한국고대사 노트(상)』, 일지사
•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 이종욱, 『한국의 초기국가』, 마르케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 박경철, 2006, 「예맥․ 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한국고고학보 39호
• 박양진, 2005, 「고고학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연구 37호
•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 송기호, 2005, 「부여사연구의 쟁점과 자료해석」, 한국고대사연구 37호
• 왕면후, 「고대부여의 흥망과 왕성의 변천」, 백산학보 58호
• 한국신문, 『한민족의 문화유산(고조선, 부여, 발해)』
• 오강원, 「중만지역의 초기철기문화-포자연식문화의 성립과 전개과정」
• 역사탐구위원회, http://cafe.naver.com/19101945
• 베네딕트앤더슨/윤형숙 역, 2005, 『상상의 공동체』, 나남
1) 이 곳에 소개한 유물들은 대게 부여의 유적이라 생각되는 노하심(老河深)유적과 모아산(帽兒山)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2) 질로 만든 두레박이나 주전자
3) 두껍고 굽이 높으며 뚜껑이 있어서 고기붙이, 국 따위를 담는 데 쓰는 나무로 된 제기(祭器).
4) 그러나 괭이로 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끊다, 쪼개다라는 듯도 있어 도끼로 추정되긴 하지만 전국(戰國)·진(秦)·한(漢) 시대의 실례로서는 두부(頭部)가 둥글고 조붓이 생긴 날의 한 끝에 네모난 구멍을 뚫었고, 약간 구부러진 것이 중국 허난성의 전국시대 묘(墓)에서 출토되었고, 또한 너비가 넓은 대형(臺形)의 날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것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5) 생살권의 상징으로서 주던 큰도끼와 작은도끼. 출정하는 대장에게 통솔권의 상징으로 임금이 손수 주던 작은 도끼와 큰 도끼. 정벌, 군기, 형륙(形戮)을 뜻한다
6)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보급된 된 것으로 원형의 뒷면에 꼭지(뉴)가 2-3개 달리고 대체로 삼각거치(三角鋸齒) 무늬를 무늬구성단위로 한 기하학무늬 거울을 말한다
7) 중국 한나라의 거울을 본 떠 만든 본뜬거울.
8) 박경철, 濊貊·扶餘와 高句麗의 正體性에 관한 硏究 , 강남대
9)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10) 베네딕트앤더슨/윤형숙 역, 2005, 『상상의 공동체』, 나남, 280~28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