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bc8937.pe.ne.kr/  이름: 율곤 2005/11/8(화) 2013/2/28(목) 

삼성기(三聖紀)와 흑수(黑水) 삼위태백(三危太白)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삼성기(三聖紀全) 상편 원문 / 안함로(安含老)

 "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長生久視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부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

 " 우리 환국이 세워질 때 최고 오래된 한분의 神이 있었다. 그 神은 흰 힘이 서로 나누어진 것이다. 하늘은 홀로 화하여 神이 된 것이다. 광명이 우주를 비추니 생물이 권리를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물이 창생되었다. 환인께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오래 오래 사셨으니 그 묘함이란 氣를 타고 노니는 것이며, 모습 없이 볼 수가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환인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

 안함로(安含老)는 신라 사람으로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다른 이름은 안함 또는 안홍이며, 이찬이었던 시부의 손자이다. 신라 진평왕때의 안홍법사, 안함태 화상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평왕 22년에 왕명으로 중국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던 도승(道僧)이다. 그는 물위를 걸었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는 선승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행적으로 보아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선덕왕 9년 62세로 만선도장(萬善道場)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紀)는 신라 진평왕때 쓰여졌고, 부도지(符都誌)는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이 저술했다. 그러면 두 사서는 같은 시기에 쓰여진 역사서이다. 중국 25사와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사실들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잊혀진 우리의 역사는 제 2, 제3의 부도지(符都誌)가 출현하면 완전히 밝혀질 것이다.

천산(天山) 아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로 왔으므로 환인씨 때 흑수(黑水)는 탑리목하(塔里木河)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으로는 찾을 수 없다.

 천산(天山)은 한民族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이다. 천산(天山)이 백산(白山)이다.   

 '중국 고금 지명 대사전'에 흑수는 천산에서 발원하여 삼위산을 거쳐 대륙의 남쪽으로 흘러간다고하였다.
먼저 천산(天山)이 백산(白山)인 것부터 밝혀보자.         

" 太白山卽水經注之白石山也. 在陝西 郿縣南.接洋縣界. 亦曰太一(太壹). 太白山. 去長安三百里. 不知其高機何. 俗云武功太白. 去天三百. 山下軍行不得鼓角. 鼓角卽疾風雨至. 冬夏積雪. 望之晧然. 洞天記以此爲第十一洞天. 山有大太白. 二太白. 三太白, 三池海, 天旱秦人多禱雨於此. 太白者四方神名也. 參看太一山條. 在甘肅慶陽縣北一百五十里. 黑水原於此 " 

  태백산은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 백석산(白石山)이다. 섬서성 미현 남쪽과 양현의 접경지대이다. 태일(太一) 또는 태대(太壹), 태백산(太白山)이라 한다. 장안(長安) 즉 서안(西安)에서 3백 리이다. 그 산 높이는 얼마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속언에 의하면 무공을 세웠다는 뜻으로 태백산(太白山)이라 했다. 태백산은 높이가 3백이다. 산 아래로 군인이 행군할 때는 북을 치거나 뿔을 불 수 없다. 북을 치거나 뿔을 불게 되면 빠르게 풍우가 몰아친다.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흰눈이 쌓여 있다. 산을 바라보면 정말 호연지기가 있는 기상이다. 11 동천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산은 대태백·이태백·삼태백이 있는데, 세 곳에 모두 못이 있다. 가뭄이들면 진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많이 지냈다. 태백(太白)은 사방(四方)에 神의 이름이 있는데, 태일산(太一山)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태백산(太白山)은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백5십 리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쪽, 태일산(太一山)을 찾아보았다. 곤륜산에서 연결하여 감숙성까지 남산(南山)을 총칭하는 이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태일태백산(太一 太白山)이라고 정확하게 적고 있다.

 그렇다면 상고시대(上古時代) 태백산(太白山)은 춘하추동(春夏秋冬)할 것 없이 눈이 쌓여 있는 남산(南山)을 뜻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유독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하는 것은 흑수(黑水)가 발원하는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뜻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바로 여기가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인 돈황(敦煌)이다.

 정리를 하자면 " 흑수는 우공의 글에 있다. 화산의 남쪽으로부터 흑수 사이가 양주이다. 흑수와 서하의 사이가 옹주이다. 흑수는 삼위산까지 흘러 남쪽으로 바다까지나아간다."

 흑수가 '화양흑수에 유양주'라하는 것은 섬서성 화음현(華陰縣)에 있는 화산의 남쪽으로부터 사천성(四川省)과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 접경에 있는 흑수 즉 지금의 금사강(金沙江) 사이가 양주이고, '흑수서하에 유옹주'라는 것은 청해성 북부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감숙성으로 흘러드는 흑수 즉 지금의 당하(黨河)와 서하(西河)(황하의 남북으로 흐르는 동 . 서 두 줄기 중 서쪽) 사이가 옹주이다.

 그러므로 '화양흑수'는 남쪽에서 흐르는 흑수를 말하며, '흑수서하'는 청해성 북서쪽에서 발원하는 흑수를 말한다. 그것은 서우공(書禹貢)이라고 했으니 우왕(禹王)이 치수를 하였을 때 흑수는 완전히 동쪽으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흑수의 위치는 흑룡강이다. 통일 후 한民族의 미래에 흑룡강에서 새 역사 창조의 신화가 열릴 것을 기대해 본다. 

 환인시대가 지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흑수의 기운이 돈황쪽으로 이동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많은 東夷들이 돈황으로 이주하였다. 돈황에서 흑수를 따라 남하하여 하, 은, 주나라가 차례로 세워졌다.  

 흑수는 중원 대륙의 중심부에 생명수가 되어 고대국가의 형성의 산실이 되었다. 그것을 이른바 관중이라고 한다. 

  흠정서역동문지 4권(卷之四) '천산남북로산명'(天山南北路山名)에 삼위산(三危山)의 위치와 삼위산이 곧 천산(天山)이며 이를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을 '산해경'과 '대명일통지' 등의 고서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 古天山 東盡境(山海經) 三危山 西三百五十里 曰 天山 漢書 西域傳 西域 南北有大山 通典 始自張掖 而西至于 庭州 山皆周遍 一統志天山一名白山自哈密東北境綿亘而西…"

 " 천산은 동진경(산해경)에 삼위산 서쪽 삼백 오십 리에 천산이 있고 한서 서역전에 서역에 남북으로 걸쳐 있는 큰산이며 통전에서 말하기를 장액의 서쪽, 모든 산은 천산의 위용이 골고루 미친다. 일통지에 천산은 일명 백산이라 하고 합밀(투루판) 동북 끝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다. "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는 중국 청(淸)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이며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포함된 지리서이다. 이 책은 한자와 만주어.몽골어.아라비아어.타밀어.티베트문자 등으로 된 희귀본이며 '삼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 유일의 고서이다.

 건륭 28년은 청나라의 최 전성기로 '강희자전(康熙字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사고전서(四庫全書)'와 같은 대규모 편찬 사업을 펼쳤다.

 이 당시에 청나라 이전 사서들이 재교감 되면서 많은 부분들이 삭제 되었다고 한다. 특히 사기(史記)는 고대사 부분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그러니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 같은 지리서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매우 흥미있는 책이다.

 그런 중요한 책에 한民族의 시원이 천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대명일통지를 인용하여 천산은 일명 백산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백산은 첫째, 크다는 뜻이 있다. 둘째, 깨끗해서 성스럽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하늘을 뜻한다. 그것은 천산이다. 셋째, 백산은 싯담어로 박산이다. 박(Vak)은 제사장을 뜻한다. 즉,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산에 올라가서 제를 지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산은 일명 백산이라한 것이다.

 흑수의 발원지

 위 지도에서 보듯이 흑수는 천산에서 발원하여 사막 지역을 지나 감숙성 돈황, 삼위산에 이르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약수와 합류, 사천성을 지나 남해 바다까지 나아간다. 또 세월이 흘러 단군시대가 되면 흑수는 더 내륙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면 간략하게 흑수를 실펴보기로 한다. 먼저 우공(禹貢)의 글에 흑수가 나온다. 우공의 글에서 흑수가 지나가는 지역을 양주, 옹주라고 하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91쪽

" 黑水書禹貢 華陽黑水惟梁州 黑水西河惟雍州 導黑水至于三危入于南海... 이하생략"

 " 흑수는 우공의 글에 있다. 화산의 남쪽으로부터 흑수 사이가 양주이다. 흑수와 서하의 사이가 옹주이다. 흑수는 삼위산까지 흘러 남쪽으로 바다까지나아간다."

  흑수(黑水)는 삼위산(三危山)에 다다른 다음 방향을 바꾸어 남해(南海)로 흘러들어 간다(尙書 禹貢篇).

 다시 삼위(三危)를 찾았다.

 사기 권일 사마천 찬(史記卷一司馬遷撰本文) 본문 35쪽

 " 括地志云, 三危山 有峰故曰三危俗亦名卑羽山 在沙州燉煌縣東南三十里... "

 괄지지에서 말하길 삼위산은 비우산의 옛 이름이다. 사주 돈황현 동남 삼십리에 있다.

 三危山은 太白山이다. 소공(昭公) 9년 두정(杜頂)이 좌전(左傳)에 붙인 주석을 보면, 삼위산(三危山)은 과주(瓜州) 즉, 현재의 돈황(燉煌) 남쪽 당하(黨河) 근처에 있다. 水經注에도 역시 돈황현 남쪽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41쪽에는 태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래는 남산의 지도이다. 남산이란 것은 다름이 아닌 천산의 남쪽을 말하는 것이며 천산과 곤륜산이 음양으로 마주보고 있으니 곤륜산의 북쪽이 되는 셈이다. 마치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그 중앙에 있는 사막의 이름이 태극마한(太極馬韓, 타클라마칸)이다. 

고대사에 등장하는 남산의 총체적인 모습. 남산 줄기는 모두 고대 번성했던 문명의 중심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였던 탑리목분지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곤륜산맥을 南山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남산 위쪽으로는 고대 번성했던 도시들이다. 신라 역사에 등장하는 경주의 남산도 바로 곤륜산맥에서 뻗어 내린 남산을 말한다. 

《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6)

http://www.dbanews.com  동북아신문
박문희  |  pwx0907@yahoo.com.cn  2008.03.14


《단군신화》를 보면 460여자 되는 짧은 글속에 수천년간에 걸친 아름찬 력사내용을 압축해 담고있다. 환웅의 삼위태백 강림, 단군의 탄생, 조선국 창설, 백악산아사달 천도, 장당경 은둔...하다면 환웅이 내렸다는 삼위 태백은 진실일가, 허구일가? 아니면 태백의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가? 진실이라면 그 위치는?

《尚書·舜典》에 “三危”란 지명이 追記된 이래 력대의 문헌기록과 후세 사람들의 연구자료를 보면 “고삼위”의 존재는 확실하며 위치도 서북지역임이 분명하다.

北魏의 酈道元 등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水經注》)고,  

唐의 리태 등은 “삼위산은 沙州(돈황)의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括地志》)고, 

《한서》,《후한서》,《상서정의》,《상서법》,《태평어람》등은 “三危가 감숙과 청해성 경내에 있다"고 기술했고  

동한시기 마융의 《상서주》와《한서·공안국전》,  

唐나라 공영달의《尚書正義》등 史籍은 “三危”가 서부지역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중 “대삼위”, “대돈황”설과 최신판《辭海》력사지리 분책에 올린 감숙성 롱서현(隴西縣) 서북부 지역설 등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얻고있다.

초보자 위한 강좌 - 영주(營州)의 흔적.. 玄朝_문무의 조선사 / 역사

玄朝..  2010.10.09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3pCY/23

# 롱서(隴西)의 수양산(首陽山)은 확실히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확대해서 보면 다음 아래와 같다..

{ ※ 우연하게도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위원(渭源)은 근세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 관련 지명이기도 하는데, 평양(平壤)과 양평(襄平)도 역시 평안도(平安道)에 속하는 지명이기도 한다.. }

롱서(隴西)는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에 실존하는 지명이고, 롱서(隴西)의 북쪽 경계에는 란주(蘭州 : 金城)와 령주(靈州)가 있는데..

營州,鄰海軍,下,刺史。本商孤竹國。

영주,인해군,하,자사。본상고죽국。
[ # 요사(遼史) 권040.. ]

 # 간단히 보면, 영주(營州)는 본디 상나라(商) 당시의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地理誌曰 : 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지리지왈 : 영지유고죽성, 고고죽국야..
史記曰 : 孤竹君之二子伯夷 · 叔齊, 讓國於此, 而餓死於首陽..
사기왈 : 고죽군지이자백이 · 숙제, 양국어차, 이아사어수양..
[ # 수경주(水經注) 권014.. ]

 지리지(地理誌)가 말하기를 :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고,(그 곳은) 옛 고죽국(孤竹國)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말하기를 : 고죽(孤竹) 임금의 아들 2명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고, (고죽국에) 나라(고죽국)의 자리를 사양하였고, 수양산(首陽山)에 굶어 죽었다..

 # 윗 문구를 보아 알수 있듯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곳 - 수양산(首陽山)은 고죽국(孤竹國)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수양산(首陽山)을 단서로 삼아 추적하기 전에 근세 조선(朝鮮)의 시를 읊어보면서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得聖之淸孰與齊 : 성인으론 맑은 이를 누가 겨루랴
首山道便此憑隮 : 수양산 가는 길 이로 좇아 올랐도다
爲傳公信及公達 : 백이와 숙제를 전하기 위함인데 
底較遼西復隴西 : 요서와 농서는 비교나 되랴 
何事宋朝賜圭冕 : 송 나라선 무엇하러 규면을 내렸는지 
可知夫子視塗泥 : 부자께서 흙덩이로 여김 알 수 있네 
史遷慨羡靑雲士 : 사마천은 청운의 선비 부러워했으니 
未識浮名本稗稊 : 뜬 소문 원래 쓸데없음을 몰라서지 
[ # 계산기정(薊山紀程) 제4권 - 돌아오는 길[復路] : 근세 조선(朝鮮).. ]

 # 요서(遼西)와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을 고죽국(孤竹國)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단서로 얻었다..

그 전에 다음 아래의 글을 읽기 전에 마음을 비워두기를 바란다..

 阮籍《詠懷詩》亦以爲然。今此二山。竝有夷、齊祠耳。
완적《영회시》역이위연。금차이산。병유이、제사이。
而曹大家注《幽通賦》云。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
이조대가주《유통부》운。롱서수양현시야。금롱서역유수양산。
許愼云。首陽山在遼西。諸說不同。致有疑惑。
허신운。수양산재료서。제설부동。치유의혹。
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
이《백이가》운。등피서산。칙당롱서자근위시야。 
[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고죽수양산변증설(孤竹首陽山辨證說) : 근세 조선(朝鮮).. ]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는 역시 그렇다고 여겼고, 지금의 두 산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제사를 기울이면서 아울러 가졌다..
조대가(曹大家)의 주석 유통부(幽通賦)가 이르기를 롱서(隴西)의 수양현(首陽縣)이 옳다.. 지금 롱서(隴西)에 역시 수양산(首陽山)이 있다..

허신(許愼)이 이르기를 수양산(首陽山)은 요서(遼西)에 위치한다.. 여러 사람이 주장하는 말이 똑같지 않고, 의혹하기를 이르렀다..
백이가(伯夷歌)가 이르기를 서산에 오르면, 당연히 롱서(隴西)와 가까우니 옳다고 한다..

 # 윗 기록을 읽으면서 알수 있듯이  요서(遼西) 위치설에 대하여 여러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니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 # 우리 나라의 사학계와 지나(支那 : 중화) 사학계는 이를 알지 못하는채, 의혹스러운 요서(遼西) 위치설을 고집하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

 # 확실한 것은 고조선(古朝鮮) 시대부터 근세 조선(朝鮮) 시대까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에 위치하는 것은 옳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정론으로 볼 수 있다..

 

東漢經文學家曹大家(即班昭)注《幽通賦》說:"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陽。" …
동한경문학가조대가(즉반소)주《유통부》설:"이제아어수양산재롱서수양。" …
正義曰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정의왈조대가주유통부운:「이제아어수양산,재롱서수。」
[ # 사기(史記) 권061 백이열전제일(伯夷列傳第一).. ]

 동한경(東漢經)의 문학가 - 조대가(曹大家 : 즉 반소(班昭)이다)의 주석 유통부(幽通賦) 설에 따르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에 위치한다..

정의(正義)가 말하기를 조대가(曹大家)의 주석 유통부(幽通賦)가 이르기를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에 위치한다..

 #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근세 조선(朝鮮) 당시의 기록과 후한(後漢) 당시의 기록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에 있다는 것이다..

 首陽山, 古孤竹國之地, 伯夷 · 叔齊, 孤竹君之二子, 餓死首陽山之下, 即此山也..
수양산, 고고죽국지지, 백이 · 숙제, 고죽군지이자, 아사수양산지하, 즉차산야..
[ # 무경총요(武經總要) 전집(前集) 권022.. ]

 수양산(首陽山)은 옛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고,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아들 2명이다..  수양산(首陽山)의 아래에 아사하여 죽었고, 즉 이 산(롱서의 수양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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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濟 현제  2009-03-02 12:38:57

 


▲ 참고로 백석산(白石山)은 살수(薩水)와 깊이 관련되는 지명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은 고죽국(孤竹國)이라면..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의 서쪽에는 백석산(白石山)이 실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① 東漢經文學家曹大家(即班昭)注《幽通賦》說:"夷齊餓於首陽山 在 隴西首陽。" …

▲ 윗 문장을 읽어보면, 알 수있듯이..
반고(班固)의 유통부(幽通賦) : 백이 숙제가 굶어 죽은 곳 즉 수양산(首陽山)이고,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史記: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③ 竝有夷、齊祠耳。而曹大家注《幽通賦》云。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 … (중략) … 許愼云。首陽山在遼西。諸說不同。致有疑惑。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


즉, 기록에는 옳다(是) 이라고 분명히 나와있어서,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은 본디 백이 숙제의 무덤임을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백이가(伯夷歌)에 의하면, 백이(伯夷)와 관련되는 서산(西山)도 역시 당연히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적어도, 기록에 따르기 위해서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은 현 하북성(河北省)과 현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할 수 없는 지명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제 견해로 보자면.. 현 산서성(山西省) 서남부의 수양산(首陽山)은 본디 근세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이라고 추측합니다..

감사합니다..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1부)

성훈 http://blog.joins.com/slsung

B.C 1,100년 경 은나라 말기에는 고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유명한 은나라 마지막 주(紂)왕과 은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문왕(西伯昌)과 무왕(武王)이 등장하며, 그 유명한 기자(箕子)와 백이.숙제(伯夷.叔齊) 그리고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姜太公)이 등장한다.


필자가 이들의 역사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당시 하남성에 있었던 은나라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단군조선의 강역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3,1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은나라 건국에 관련된 단군조선 
먼저 은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한다. 중국은 삼황오제의 시대를 지나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가 들어서고, 4백 수십 년이 훨씬 지나 하나라 다음에 은(殷)나라가 들어선다. 이 은나라 역시 삼황오제와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동족(同族)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였다. 

중국 사학자들의 공동 저서인 ‘고사변’에 따르면 “현조(玄鳥)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족의 조상신이다. 동이와 은나라 사람은 같은 종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 제준, 소호, 제곡, 제순(순임금) 그리고 설(은나라 조상) 등이 동이족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은나라는 우리와 동족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조는 검은 새로 은나라 조상인 설(契)의 탄생난생신화(誕生卵生神話)에 나오는 새이다.

이런 은나라의 건국에는 단군조선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 1767년) 겨울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의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명하여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걸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길을 막자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섬서성)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라가 망하고 은나라가 들어설 때의 일인데, 은나라가 하나라를 쳤으나 조선이 하나라를 도우니 은나라가 사죄하고 돌아갔고, 하나라 왕이 약속을 어기자 이번에는 조선이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이다. 즉 하나라와 은나라의 운명은 단군조선의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섬서성 빈.기의 땅에 관청을 설치했다 하는데 빈.기는 섬서성 서안 서쪽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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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중국지도에서의 빈과 기. 섬서성 서안 서쪽의 고대 지명이다.

이 기록은 <단군세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그 관련 기록이 있다. 한나라 때 유향이 쓴 <설원(設苑)> 권모(權謀)편에 같은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번역)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길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러자 걸왕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윤이 말하길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원문: 湯欲伐傑 伊尹曰 請阻乏貢職 以觀其動 傑怒起九黎之師以伐之 伊尹曰 未可彼尙猶能起九黎之師 是罪在我也 湯乃謝罪請服 復入貢職)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움직이려 하였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말하기를 “됐습니다.”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징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
(明年又不供貢職 傑怒起九黎之師 九黎之師不起 伊尹曰可矣 湯乃興師伐而殘之 遷傑南巢氏焉)


이 외에도 <후한서> 동이(東夷)전과 서강(西羌)전에도 같은 내용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동이전) “걸왕이 포악하고 잔인하자 여러 동이들이 쳐들어왔다.(傑爲暴虐 諸夷來侵)”
(서강전) “걸왕이 어지럽자 견이가 빈(邠).기(岐) 사이에 들어와 점거하였다. (傑之亂 畎夷入居邠岐之間)”

위 <단군세기>의 기록과 중국 사서의 기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위 중국 기록에서의 구이(九黎)와 견이(畎夷)는 단군조선임을 알 수 있다. 하나라가 멸망한 것도, 은나라가 일어난 것도 모두 단군조선의 강력한 힘이 작용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탕왕(湯王)에 의해 세워진 은나라는 17세 30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은나라의 통치기간에 대해 중국 기록인 <죽서기년>에는 은나라가 496년간 다스렸다고 하고, <삼통력>에는 6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단군세기>의 기록으로 볼 때는 <삼통력>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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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대 역사교재에 나와 있는 하대형세도에 하나라는 하남성 일대에만 있고 서안 바로 서쪽에 견이가 그려져 있다.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갈등 

은나라는 단군조선 덕택에 나라를 세우고는 조선에게 계속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곤 했다. 그러다가 약 470년 후에 아래와 같이 단군조선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참고로 고등(高登)이란 사람은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조선의 22세 단군이 되는 색불루의 조부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21세 소태단군 47년(B.C 1291년) 은나라 왕 무정(22대)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귀방이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귀방은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도 나와 <단군세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를 입증하고 있다. 

鬼方(귀방) : 古远方国,《易既济》“高宗伐鬼方,三年春之,”其说有五,
1)谓即西戎,《后汉书章帝纪》克伐鬼方,开通西域,《西羌传》武丁征西戎鬼方,三年乃克,《文选赵充国"042;李善注》“鬼方,于汉则先零戎也,”世本注同,案当在今青海境,
(서융으로 “<서강전>에 무정이 서융귀방을 정벌했다” 지금의 청해와의 경계이다)

2)谓即周荆楚之地,〈惠栋九经古义〉汲郡古文云,武丁三十二年,伐鬼方,次于荆,三十四年,王师克鬼方,氐羌来宾,商"042;殷武云,挞彼殷武,奋伐荆楚,疑周之荆楚,商时谓之鬼方,古文所谓次于荆者,盖鬼方之地也, (주나라 형초의 땅)

3)谓即今贵州,《清一统志》贵州,商周为鬼方地,(지금의 귀주)

4)《丙子学易篇》“苍"049;篇云,鬼,远也,又云鬼方言其幽昧也,”此不以地实之,惠栋斥为臆说, (유매의 땅)

5)近人王国维谓鬼方即狄人,殷周时据陕西西北一带,古之獯"739;,汉之匈奴,皆其同种,春秋时狄人隗姓,隗即鬼也(즉 적인으로 은.주 때 섬서성 서북일대)

여기서의 귀방은 1)번과 5)번으로 거의 같은 지역이다. 즉 단군조선이 하나라가 망할 때 점령해서 관청까지 설치했던 빈(邠).기(岐)와 가까운 곳이다. 필자는 이 지역을 계속 단군조선의 점령지로 보는 이유는 은나라의 도읍은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 섬서성 서쪽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이야기했다.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 (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또 은나라 왕 무정이 공격했다가 단군조선에게 대패한 영지(令支)에 있던 나라는 바로 고죽국(孤竹國)이었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보고 있으나,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이 증명되는 기록이라 하겠다. 은나라가 자기네 제후를 침공하는데 단군조선이 공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 바로 후에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이 되는 곳이다. 그 문헌적인 근거가 아래에 인용한 <한서지리지>이다. 이 요서군의 위치는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남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됨으로서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532;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고 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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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 고향인 수양산에 와서 굶어 죽었다. 백이.숙제의 묘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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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바로 요서군의 땅이라고 밝혀주는 백이.숙제의 묘가 일년 반 전에 발견되었다.


이어서 단군조선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때인 23세 색불루단군 때의 <단군세기> 기록이다.
“B.C 1285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했다가 또 싸워 이를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은나라의 도읍은 황하북부 하남성이며, 고죽군(孤竹君)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으로 뒤에 나올 백이.숙제의 아버지이다. 단군조선은 다시 빈.기를 점령하고는 여(黎)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여는 구리(九黎)와 연관된 말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며, 여파달이라는 장수의 성이기도 하다. 

<단군세기>의 이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熏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 와 그에게 재물과 땅을 요구한 뒤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하고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여들었다.”

고공단부가 옮겨간 기산이 섬서성 서안 서쪽 감숙성과 가까이 있는 바로 기(岐) 땅이다. 이러한 고공단부의 손자 중에 창(昌)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은나라 말기에 서쪽 제후로 봉해졌다 하여 서백창(西伯昌)이라고 하며, 나중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되고 강태공(姜太公)을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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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이 섬서성 서안 서쪽인 빈.기를 점령한 것은 조선의 핵심 강역이 산서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서안 서쪽의 피라미드는 누가 만든 것인가?

섬서성 서안 서쪽에서 엄청나게 큰 피라미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 작업을 하던 중국 당국은 이 유적에서 동이족의 유물들이 튀어나오자 급히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발굴 작업을 했던 인부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게다가 피라미드를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위장을 해 인공위성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중국 정부는 왜 그랬을까?

중국 고대역사의 심장이라는 서안의 서쪽에서 동이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중국의 자존심이 구겨지고 또한 고대 중국의 영토는 옛날부터 만리장성 안쪽이라는 엉터리 거짓말이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성 서안 서쪽 피라미드의 주인은 바로 단군조선이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고조선의 영토로 보는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마치 기록이 잘못된 허구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을 산서성에 놓고 보면 단군조선의 서안 서쪽 점령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아~! 단군조선은 실로 엄청나게 크고 위대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나라를 이천년 넘게 다스린 47분의 단군을 곰의 신화로 만든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천벌이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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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서안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는 아래 사진과 같이 중국정부에서 나무를 심어 철저히 위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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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림성 집안에 있는 피라미드들.  피라미드는 원형이 고인돌로 단군조선/고구려의 전통 무덤 형태이다.


곧 이어서 (2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이 연재됩니다.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단군조선의 영토는? (4부)

성훈님 http://blog.joins.com/slsung   2010-05-03 21:52:58

아래 글은 본 시리즈의 (4부)입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3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 누구인가?


병법과 권모술수에 뛰어난 강태공

(3부)에서의 내용과 같이 서백 희창(西伯 姬昌=周文王)은 위수(渭水)에서 여상(강태공)을 만나 수레에 모시고 와서는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하고 은나라를 뒤엎을 것을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 때 강태공이 내놓은 계책은 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모략(謀略)이다. 후세 사람들이 병법과 주나라의 권모술수에 대해 말할 때 강태공을 그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해가 고향인 강태공이 저 멀리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는 위수까지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천하를 낚은 것은 강태공이 권모술수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강태공은 (3부)의 내용과 같이 미리 역관(점성술사)과 각본을 짜고 서백(西伯)이란 대어 중의 대어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얼마 후 서백 희창이 죽고 아들인 희발(姬發=武王)이 즉위했다. 강태공은 군사로서 희발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는 군사로서 모든 군을 장악하고는 그의 뛰어난 병법과 권모술수로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만약 강태공이 없었다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역활은 일등공신 중에서도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9년 희발(武王)은 은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과연 그들이 동참할 것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 도읍인 풍읍(豊邑:낙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맹진(盟津)으로 진격한다. 그러자 사전에 약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맹진으로 달려오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은 주왕을 칠 때라고 말하나 희발(무왕)은 “서두르지 말라. 천명은 아직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다.”하고 일단 철군을 한다. 

은나라를 멸하는 희발(주무왕) 

드디어 11년 희발(무왕)은 제후들을 향해 동참할 것을 재촉하고는 서백(문왕)의 위패를 받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이라 칭하고는 강태공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으로 나아가자 주변의 제후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즉 이번 출정은 명망이 높았던 문왕의 뜻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맹진에서 동쪽으로 사(汜:사수진) 땅으로 나아가 황하를 건넌 후 북상하여 백천(휘현)까지 올라가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기현)를 향해 진격하였다. 드디어 주나라와 은나라는 목야(牧野)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아래는 목야전투의 중국 자료이다.

公元前1046年(一说前1057年)正月,周武王统率兵车300乘,虎贲3000人,甲士4万5千人,浩浩荡荡东进伐商。同月下旬,周军进抵孟津,在那里与反商的庸、卢、彭、 濮、蜀(均居今汉水流)、羌、微(均居今渭水流域)、"667;(居今山西省平陆南)等部落的部队会合。武王利用商地人心归周的有利形势,率本部及协同自己作战的部落军队,于正月二十八日由孟津(今河南孟州市南)冒雨迅速东进。从汜地(今河南荥阳汜水镇)渡过黄河后,兼程北上,至百泉(今河南辉县西北)折而东行,直指朝歌。周师沿途没有遇 到商军的抵抗,故开进"034;利,仅经过6天的行程,便于二月初四拂晓抵达牧野。 周军进攻的消息传至朝歌,商朝廷上下一片惊恐。商纣王无奈之中只好仓促部署防御。但此时商军主力还远在东南地区,无法立即调回。于是只好武装大批奴隶,连同守卫国都的商军共约17万人(一说70万,殊难相信),由自己率"046;,开赴牧野迎战周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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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주나라의 도읍은 낙양.  맹진-->사수진-->휘현-->은나라의 도읍인 기현으로 갔다. 목야는 기현 서쪽 교외에 있다.  위휘현은 강태공의 고향으로 제나라 땅이 된다.  위휘현 근처에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와 임치가 있다.  즉 주나라는 발해(대야택)을 넘지 못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기 위해 떠난 래주는 하남성 위휘현 아래 황하변이다.

주나라 군대가 목야로 진격할 때 백이.숙제가 나타나 주 무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무왕에게 출병의 부당함을 고한다. 그러자 무왕 주위의 장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자 강태공이 “의인(義人)이니 살려주어라”라고 지시를 한다. 해서 백이.숙제는 목숨을 잃는 화를 면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상세한 것은 제 6부에서 다룬다)

드디어 무왕은 목야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읍인 조가에 입성하여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마차에서 내려 다시 칼로 치고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주왕의 목을 잘라 대백기의 끝에 걸었다. 다음 날 희발은 은나라의 궁전으로 들어가 즉위식을 올렸다. 희발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새로 탄생한 것이었다. 

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진 제(齊) 땅은 어디인가? 

주나라 탄생의 일등공신인 강태공은 제(齊) 지방의 영구(營丘)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해진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는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고, 소공 석은 연(燕)에, 동생인 숙선에게는 관(管)에, 동생 숙도를 채(蔡)에 봉하고 그밖에 각자의 공적에 따라 봉지를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에게 하사하는 봉지는 통상 약 사방 100 ~ 200 리가량의 땅이었다. 당시 주나라의 전체 강역이 천리가 넘지 않았으므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지금의 산동성에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북경 근처에 연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노, 제, 연나라는 모두 하남성 황하 주변의 일개 군(郡) 정도의 영토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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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노, 연이 하남성에 있었다고 고백한 중국지도.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제나라와 노나라를 산동성으로, 연나라를 북경으로 옮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동성과 하북성과 산서성은 단군조선의 영토였다.  

강태공이 영구 땅에 도착할 무렵 느닷없이 래후(萊候)의 군사들이 공격을 해왔다. 상호간에 영구 땅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당시 낙양에 있던 주나라가 은나라를 평정했을 뿐이지 멀리 떨어진 곳까지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蠻族)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래후를 물리치고 영구에 부임한 강태공은 정치 제도를 가다듬는데 있어 그 고장의 풍습을 귀히 여겼고 예절을 간소화 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하여 고장 특산물인 소금과 생선으로 상업을 크게 일으키니 수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모여들어 강국으로 뻗어나가 춘추.전국 시대를 풍미하는 제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놓는다.

우리는 이렇게 강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고 도읍은 임치(臨淄)로 알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 래(萊) 땅을 지금의 산동성 래주(萊州)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래주는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을 출발시킨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래주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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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동성 임치 주변에 만들어 놓은 제나라 고도 영구의 유적은 가짜이다. 제나라 유적이 산동성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강태공의 고향인 동해(東海)는 어디인가? 

래주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강태공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태공망 여상은 동쪽 끝 해안지대의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의 고향이 동해(황해) 바닷가로 알고 있다. 특히 산동성과 접해있는 강소성 연운항 근처에 동해(東海)라는 시가 있어 그쪽 출신으로 알기 쉽다.

중국은 산동성의 도읍인 제남(濟南)시와 임치(臨淄)시에 강태공의 가짜 묘를 만들어 놓고 산동성이 제(齊)나라 땅이었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산동성은 제나라 땅이 아니라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이다. 과연 그런지 지금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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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강태공의 묘를 산동성 임치와 제남에 만들어 놓았다. 이 묘는 100% 가짜이다.

강태공의 고향을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원문) “姜太公故里,位于河南省新乡卫辉市西北十二公里处。公元前1210年农历八月初三,姜太公诞生于卫辉太公泉镇吕村。据《竹书纪年》上说,姜太公仙逝于“周康王六年”十月二十日。终年一百三十九岁。葬于卫辉太公泉。至今太公泉境内还保留着许多姜太公的历史遗迹,其中较为著名的有:姜太公墓、姜太公祠、姜太公庙、姜太公吕望表等。”

(번역)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B.C 1210년 음력 8월 초삼일 위휘현 태공천진 여촌에서 태어났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여망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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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에 있는 강태공의 진짜 묘.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강태공은 동해(東海) 출신”이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강태공의 고향이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이므로 그 근처에서 바다로 불릴 수 있는 곳은 대야택(발해) 밖에 없다. 즉 고대 중국의 동해는 바로 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는 대야택 즉 발해(渤海)였다. 당시 <사기>에 기록된 제나라의 동쪽 경계는 동해 즉 발해(대야택)로 황하변 하남성이 주나라의 주 무대였던 것이다.  (발해가 어디인가는 아래 자료 참조)
 
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한 중국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288§ion=sc5§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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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였던 발해(=동해)는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주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아직 어릴 때 주위에서 주나라에게 반기를 들자 성왕은 강태공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동쪽 동해(東海)로부터 서쪽 황하(黃河)까지 남쪽 목릉(穆陵)으로부터 북쪽의 무태(无棣)까지 이 모든 지역의 제후들은 각자의 소신대로 반란군을 정벌해도 좋다.”즉 주나라의 동.서.남.븍 강역이 어디인지 보이는 대목이다.

여기서의 동해는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따라서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나 임치는 바로 위휘현 서쪽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수군을 출발시켰다는 래주도 위휘현 서쪽 가까운 황하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 임을 알아야 한다.

맹자는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고 말해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도 그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의 도읍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어떻게 하남성 동쪽 끝인 대야택 건너의 산동성이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으리오!

황하 주변 하남성은 주나라의 강역이고, 산동성은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남성의 북쪽인 산서성은 당시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 있던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건 어불성설로 고죽국은 명백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2세 색불루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그 근거가 된다.

또한 36세 매륵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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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대학교재에 있는 하나라 형세도는 하남성 일대이다. 하나라에 이어 은나라와 주나라도 이 형세도와 비슷하다.  하남성 이외의 사방은 모두 단군조선의 땅이다.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고대 중국의 영토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산동성과 섬서성 서안까지 하남성을 제외한 전 중국 대륙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강역은 세월에 따라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거의 그대로 이어져 후대에 고구려.백제.신라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고 장엄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만 국한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의 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 하겠다. 식민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박멸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와야 우리의 장엄했던 역사가 화려하게 부활될 것이다. 그래야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을 엄중하게 질책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6부)에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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