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역사인 홍산문화, 동이족의 영웅인 치우 그리고 쥬신족의 최초 나라인 고조선 등 이제는 상고시대 역사까지 중화의 것으로 만들거나 왜곡, 부정, 파괴하려고 합니다.

고조선은 한겨레의 최조 나라이고 한겨레의 뿌리입니다. 실상 뿌리인 고조선을 신화로 치부하고 존재 마저 부정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과연 중원 국가에 대한 고조선은 존재감은 어땠을까요? 국가간의 우위는 군사력이고 전쟁에서 확인이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중원 국가간의 전쟁을 사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원 사서에서 고조선을 비하한 다른 이름으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퍼옴] http://m.blog.naver.com/knightblack/10013824767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不哈 平海上熊襲 사벌(沙伐) 단제 무오50(B.C 723)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甲戌六十六年 帝遣祖乙 直穿燕都 與齊兵 戰于臨淄之南郊 告捷 갑술66(B.C 707), 사벌단제께서 조을을 보내 연나라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회에서 싸우고 승리를 알려왔다.」 기록되어 있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二十五年, 北戎伐. 鄭使太子忽來救. 희공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나라에서 태자 홀을 보내 제나라를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사벌단제가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제나라 13대 희공(BC 731~ 698) 때의 일이다. 희공 25년 이면 기원전 707년에 해당하므로 그 연대가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있다. 사기는 고조선을 가리켜 북쪽의 이족이라는 뜻으로 북융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참고로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동이라 표현한 예로 보아 북융은 조선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나라 이전에는 동호를 북융과 산융으로 호칭했음을 말한다. 동호는 동이와 같은 뜻으로 고조선을 비하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是後六十有五年 而山戎 越燕而伐齊 齊禧公與戰于齊郊. 전략. 그로부터 65년 뒤 山戎(산융)() 나라를 넘어와서 () 나라를 공격하여 () 禧公(희공)이 산융과 제 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705년경(770-65=705)으로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산융(山戎)으로 적혀있다.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라 하더니 흉노전에는 산융이라 한다. 이는 조선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중국인의 의도적인 곡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고조선은 제나라를 공격하였을까? 그것은 제나라가 산동성 일대의 래이(萊夷)를 병탄한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원] 정간 편에 의하면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의 말을 듣지 않자 제나라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고 한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춘추 좌전에도 언급하고 있다.

(노나라 환공 ; BC 712 ~ 694) 6(BC 707)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후(齊候 : 희공)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나라 태자 홀이 군대를 끌고가 제나라를 구원하였다. 6월에 북융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북융의 장수인 대량과 소량 및 갑수 300명을 잡아 제나라에 바쳤다.

 

[춘추]는 노나라의 사서를 공자가 도덕적 견지에서 수정 가필한 문헌이다. 윗글을 보면 북융이라 표현된 고조선이 제나라와 연나라 연합군에서 크게 깨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의 춘추 기록을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제후들이 (북융 : 조선의 공격에 대항하여) 제나라를 수비하였기 때문에 제나라에서는 구원하러 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노나라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나라는 뒤로 물러났으며 태자 홀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전공(戰功)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과정에서 연나라가 뒤로 밀려난 것은 실상 그들이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戊辰五十二年, 帝遣兵與須臾兵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入孤竹. 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36대 매륵 (買勒: BC 704~BC 646)) 무진년(戊辰年)이며 재위 52년에 즉 BC 653년에 매륵단제(단군)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위의 단군세기 기록은 매륵단제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사기 제태공세가에도 위와 같은 사살이 실려있다.

 

二十三年 山戎代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代山戎 至干孤竹而還. 제나라 환공 23, 산융이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제나나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산융을 쳐서 고죽까지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전략. 그로부터 44년 후 산융이 () 나라을 쳤다. 연 나라는 곧 위급함을 () 나라 알렸고 () 桓公(환공)은 산융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其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B.C 653년경) [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661년경(705-44=661)으로 적혀 있다.]

 

위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당시 제 환공(BC 685 ~ 643)이 고조선 및 연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교모히 감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만약 승리하였다면 기사의 마무리가 “산융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돌아왔다”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 대 연제 연합군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을까? 설원 권모편을 보기로 하자.

 

“제 환공이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노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노나라 왕은 신하들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만이(蠻夷)의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연나라 군대와 합세한 제 환공이 고조선의 복명에 걸려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 환공이 다시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노나라가 도와주기 않자 제 환공은 고조선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제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이라는 공자의 말(논어) [, 여기서 피발은 종발이라고 하며 고대 고조선인의 머리를 트는 모양을 말한다.], 고조선의 거듭된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 가까이 간 연나라, 그리고 고조선 연제 연합군과의 싸움을 기록한 사서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은 신화상의 국가가 아니라 실존한 국가였으며, 중국이 두려워한 국가였다.

[출처] 실증 한단고시 (정신세계사), 한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사)

[특별기획] 단군신화, 그리고 북방이야기

주간경향 2007.10.30뉴스메이커 747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단일종족 신화 논리는 역사를 축소… ‘단군-게세르 계열’로 안목을 넓혀야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우사, 풍백, 운사, 세오가 환웅을 보필하는 사신(四神)으로 설정되고, 태초의 혼돈 속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이 현무, 백호, 청룡, 주작의 전투 장면으로 묘사된다.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알려진 우사와 풍백이 실제로는 전쟁의 신이었고, 현무, 백호로 변신하여 지상의 악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연출인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보는 시각의 일부다. 물론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족조신화로 축소하며, 단일 종족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신화를 통한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고조선에서 분화한 다양한 종족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농경이라는 상식화된 추론이 실제로는 막연한 추정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북방신화인 ‘게세르’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단군신화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단순히 연출자 개인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 어렵다.  


단군조선 사회체제 접근 신중해야 

프롤로그와 제1, 2부를 비교해보자. 게세르 신화에서는 신화 텍스트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늘 세계의 회의, 하늘신 게세르의 지상 파견, 지상의 조화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지상세계의 문제와 백성들의 도탄을 목격한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얻은 뒤 우사, 풍백, 운사를 비롯한 전쟁신 혹은 최첨단 신무기를 갖추고 하늘용사 3000명과 함께 지상강림한다. 이후 신시로 불리는 하늘 신의 직접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지상에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들을 제압한 뒤 지상과 우주의 조화를 복원한다. 이렇게 보면 두 신화가 닮은꼴이 아닌가? ‘불함문화론’에서 단군신화와 몽골계 부리야트인의 게세르 서사시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한 육당 최남선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주곡’이라는 표현을 농경사회의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으나 단군신화가 유목에 가까운 북방 종족들의 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면, 조금 더 조심스러운 시각으로 단군조선의 사회경제 체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에 농경을 상징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성립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쩌면,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정주민 이데올로기가 첨가된 편견일 수 있다. 유목세계에 존재하는 닮은꼴 신화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바람’이나 ‘비’, ‘주곡’의 요소를 농경사회의 모티프로 추론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단군조선의 경제 기반을 농경에 연결하는 시도는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한반도의 거주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범하지 않는 평화 지향의 정주민, 백의민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정착 과정으로 설명하는 통설과 함께 여인으로 변한 웅녀를 두고서 곰족을 부각시키며 단군조선을 곰족의 국가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절반쯤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서울대 강정원 교수는 ‘북아시아 곰 관련 의례와 관념 체계’(비교민속학회 발표문, 2007)라는 논문에서 이 같은 상식의 우상을 부분적으로 허문다. 곰 관련 샤머니즘 제의를 시베리아에서 찾기 어렵고, 곰 제의와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이 의문스러워서 단군신화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이 말은 역으로 샤머니즘과 곰 토템 사이에 역사적인 관련성이 크지 않음을 인정하면 단군신화를 샤머니즘 신화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시베리아 곰 의례 관련 대표적인 연구자라 할 수 있는 한스-요하힘 파프로트의 저서 ‘퉁구스족의 곰 의례‘(태학사, 2007)에는 샤머니즘과 곰을 직접 연결시키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자. 웅녀는 자신의 의지로 삼칠일간의 혹독한 수련을 통해 자신이 속했던 곰족의 행태와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곰족의 종족 이데올로기에서 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이념으로 하는 하늘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을 수용하는 존재로 전이한 것으로 말이다. 웅녀는 하늘 세계 이념을 공유하고 개별 종족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이 된 웅녀에게 곰족이나 호족은 자랑스러운 혈통이 아니라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교화 대상이다. 단군신화가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라는 좁은 범주가 아니라 고대의 제국 형성과 소멸 과정을 담은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종족 복합사회 성격 간과 말아야 

신화 텍스트를 살펴보면,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다 웅녀의 자식이거나 혹은 단군의 직접적인 후손인 것도 아니다. 단군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곰족, 호족을 비롯해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되지 못한 무리들을 인간으로 교화시켜 보편과 인간을 지향하는 다종족 이념사회인 고대 조선제국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와 북방 거주자들은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순혈 이데올로기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음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단군신화를 한민족 혹은 단일민족의 족조신화 혹은 건국신화로 보는 시각은 단군신화가 다종족 복합사회의 성격을 가진 제국의 신화인 점을 간과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에 대한 기억을 해체하며 조선의 영역과 범위를 축소하는 왜소한 접근이다. 단군을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나 건국신화로 주장하는 논리는 자신의 역사를 축소하는 논리를 생산해온 것이다. 신화 텍스트 속의 조선은 다종족, 다문화를 인정하고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이념을 공동가치로 지향하는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원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신화 연구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연구에서 출발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대로 바이칼 샤먼 발렌친은 게세르 신화와 닮은꼴인 단군신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 단군과 게세르의 닮은꼴 이야기가 탄생된 경위를 따져봐야 한다. 바이칼 샤먼인 발렌친뿐 아니라 다수의 몽골계 연구자들이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몽골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 2〉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의 예다. 담딩수렝은 동북아시아의 특이한 영웅 서사시인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모티프가 ‘티베트→몽골→바이칼 지역 부리야트’의 방향으로 전파가 이루어졌다는 전파론을 주장했고, 발렌친을 비롯한 일단의 연구자들은 몽골인들의 게세르 이야기가 주변 지역 거주자들의 장가르 서사시, 마아다이카라, 단군신화와 같은 유사한 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영향설을 펴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신화세계에서 기원설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비교 연구를 통해 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기원을 밝히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조차 객관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군신화 채록이 500여 년 앞서 

‘게세르 판본 연구’(비교민속학, 2007)에서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전파설의 말단에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가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신화 공간을 간직하고 있는 고본이고, 육당이 몽골이나 티베트가 아닌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를 단군신화와 연결했던 사실을 보면 전파의 경로 추적은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부리야트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출판 연도로는 가장 오래된 부리야트어 게세르 판본. <신동호 기자>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발생을 해명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이야기 채록 시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부리야트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출판 연도로는 가장 오래된 부리야트어 게세르 판본. <신동호 기자> 다. 문헌에 의한 고증은 이야기의 존재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기 때문이다.

북방민족들에게서 전해오는 게세르 신화들 가운데 가장 이른 채록본으로는 ‘1716년 베이징 판본’을 손꼽을 수 있다. 만주족의 족조신화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몽골의 게세르 서사시가 베이징에서 1716년 목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1716년 베이징 판본’ 채록 이전에 티베트 지역에서 이미 1600년대 초에 게세르 계열의 서사시가 존재했고, 채록되었다는 보고가 있지만, 실제로 티베트 고본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판본을 찾을 길이 없다. 1830년대에 몽골어로 기록된 ‘링 게세르(Geser of Ling) 판본’을 티베트 고본의 몽골어 번역본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어 티베트 고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화적인 시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판본들 역시 그 각본들의 수가 100여 개가 넘지만 대부분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채록된 것이다. 알타이의 ‘마아다이카라’와 칼묵인들의 ‘장가르’ 역시 18세기 이후 채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3세기에 일연선사가 기록한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이야기 계열에서 가장 오래된 채록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단군신화를 채록한 이후 무려 5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게세르 신화와 서사시들이 몽골 등지에서 채록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단군을 게세르 계열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게세르 이야기들을 단군신화 계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고고학적인 사실뿐 아니라 신화적인 내용까지 북방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유사한 사례와 비교해서 전파론과 영향설의 잣대로 해석하는 방법론이 과연 옳은가?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를 ‘단군-게세르 계열’로 부르는 것이 마땅해보인다. 

13세기는 몽골제국이 성립하는 단계이며 한반도가 몽골에 무릎을 꿇고,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의 일본열도 공략 시도가 있던 격변의 시기였고, 이를 감안하여 단군신화를 일연선사에 의한 위작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국난에 직면해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신화 활용 전략이 구사된다는 설명인데, 국난을 초래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계 신화를 모방해서 한반도의 신화를 창작했다는 주장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일연선사는 단군신화가 본인의 창작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의 채록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오늘날 단군신화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신화적인 서사들이 동북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발견되는 것을 보면, 유사한 이야기들이 일연 이전에도 지역과 종족에 따라 독특한 판본 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파 방향이야 확인할 길이 없으나,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존재를 13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헌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양민종/ 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

[퍼옴] 다음 까페 '삼태극'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mGTN&fldid=IMPV&datanum=27

檀君 (단군) = 單君(단군) = 單干(단간) = 單于(선우)| 단골조선부여

칠성신 | 조회 323 |추천 0 | 2010.01.19. 17:03

 

 우리역사연구재단 www.koreahistoryfoundation.org

 

지은이 | 주학연(朱學淵)

1942년에 광서성(廣西省) 계림(桂林)에서 태어나 1965년에 상해의 화동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을 졸업한 후 사천(四川), 남경(南京) 등지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10여 년 동안 재직하였다. 1978년에는 중국과학원 대학원에 입학하여 저명한 역학자(力學子)이던 담호생(談鎬生) 원사(院士)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983년에는 미국 몬타나(Montana) 주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에는 미국 에너지 자원부 산하의 실험실에서 박사후 연구에 참여하면서 고체물리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1987년부터는 저술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인문과학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그동안 중국 역사서에서 풀지 못했던 역사∙언어∙인류학적 난제들의 해결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주었다.

주요 저술로는〈마자르인의 극동 시원론〉(1998),〈 유라시아 초원의 퉁구스족〉(1999), 〈훈족의 선비-퉁구스 혈연〉
(2000), 〈선비민족과 그 언어〉(2000), 〈염달∙고차∙토화라스탄 제 민족〉(2000), 〈서역 족국명과 동북아 족명의 상관성)〉(2002),〈 중국 북방 제 민족과 유럽 민족의 혈연관계 신탐〉(2003), 〈고대 중원한어의 퉁구스어∙몽골어∙돌궐어적 요소들〉(2003) 등의 논문과 함께《중국 북방 제 민족의 원류》(초판: 2002, 재판: 2004),《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대만: 2006, 중국: 2008) 등의 저서가 있다.

 

역자 | 문성재(文盛哉)

1965년 가야, 신라, 백제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합천(陜川)에서 태어나 1988년 고려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서울대 대학원에서 중국희곡을 전공하였다. 1994년 박사과정 이수 후 국비로 중국 남경대에 유학하여 1997년『심경 극작 연구』로 박사학위(문학)를 받았으며, 귀국 후에는 근대 중국어 즉 당, 송, 원, 명, 청대 조기백화(早期白話) 및 몽골어로 연구범위를 확대하여 2002년서울대에서『원간잡극 삼십종 동결구조 연구』로 박사학위(어학)를 받았다. 현재는 동 대학에 출강하면서 번역과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와 역서로는『중국고전희곡 10선』,『 동아시아 기층문화에 나타난 죽음과 삶』(공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고우영 일지매』(중역),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도화선』,『 경본 통속소설』,『 한국의 전통연희』(중역) 등이있으며, 논문으로는 희곡사를 다룬「현대중국의 연극무대: 사실주의에서 표현주의로」,「 중국의 종교극 목련희」,「 명대 희곡의 출판과 유통」,「 안중근 열사를 제재로 한 중국연극〈망국한전기〉」
등과, 중국어와 알타이어의 관계를 다룬「원대 잡극 곡백에서의‘來’」,「 근대한어의 家/價연구」,「 원대 잡극 속의 몽골어」,「 원대잡극에서의 정도부사‘殺’용법」,「 근대중국어의 S'O'(也)비교구문 연구」등이 있다.

 

아래 글은 위 책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우리역사의비밀-네티즌 게시판-eujin 님글

 

 

전에 흉노의 수장 "선우"가 단칸(단군)을 잘못 발음한게 아닐까...라는 글을 올린적있었는데 이는 고대인들의 발음을 한문으로 흉내내는 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난게아닐까라는 가정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책에 몇가지 흥미로운 자료가 있어 올려봅니다.

 

1. 진연경의 <중국고대 소수민족 성씨연구>에서말하길

<위서><관씨지>에서는 아복우 (阿伏于)는 나중에 아씨로 개성하였다..라고 했는데 우(于)자는

간(干) 자의 오류이다, <성찬,칠가><씨족략>에는 문제없지만<광운,칠가>에서는 우(于)로 잘못적고

있다.

 

2. 원시 중원언어의 단서들은 고대사전이라할 <이아, 爾雅>에 고스라니 담겨있다.

이아의 <석기>부분을 보면 황금을 "탕"이라 하는데 그중에도 훌륭한것을 "류"라 한다. 몽골어에선

황금을 알탄(altan)이라 하고 한자로는 보통 아륵단 (阿勒壇)으로 전사하므로 탕,탄 또는 단(壇)의 발

음을 취했을것이었을거다. 이와같은 사례는 이아의 여러곳에서 찾아볼수있다.

 

3. 몽골비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징기스 하안은, 텡기스 한안과 달라이 하안의 두단어와 같은 뜻이므로 모두 다 "큰 바다 같은 하안"이

라는 의미를 가진다. 달라이 라마라는 존호역시 몽골족이 처음 사용한것으로 1578년 황모파의 비조인

종카바의 4대 계승자 소남 갸초가 몽골땅에서 포교활동을 할때 청해호 호반에서 토묵특(튀무르)부

의"알탄 칸"을 만났을때 칸으로 부터 "성스럽게도 모든걸을 다 아시는 바치르 달라 달라이 라마"라는 호

칭을 받았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는 곧 큰 바라같은 고승이란 의미이다.

(라마는 고승이란 의미이고 달라이의 달, 진나라의 대량조 벼슬의 대, 등등, "단, 다,ㄷ"음가를 비교하

고 있습니다. 특히 위의 황금이 알탄 혹은 단이라고 했는데 토묵특의 알탄칸이 존재했다면 단칸이란

호칭도 없었다 할수없겠습니다.)

 

4. 한서의 흉노전을 보면 선우單于는 성이 "연제씨"인데 그 나라에서는 그를 "탱리고도 선우 撑犂孤塗 單于"

라고도 한다.  흉노는 하늘을 탱리라고 하고 아들을 고도라고 하며 선우란 광대무현한 모습을 나타내소

있는데 하늘을 닮은 모습이 선우같아고 해서 하는 말이다. 반고班固는 여기서 선우=탱리-고도가 각각 추장,

하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탱리는 몽골어의 발음 텡그리로서 한자 天과

靑도 알고 보면 몽골어 발음 텡 또는 쳉이 변화한 경우이다 이것들은 북방민족의 언어적 요소들이 한어에

내포되어있다는 증거이자 몽골어족의 선조가 중원에서 기원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단이 하늘 또는 황금을 의미하는것이라면 단군과 소호족(애신족,김씨족)과 관계가 없다'할수없겠습니

다. 특히 다시 언급하겠지만 진-신-칭(청)-김 등의 음가에서 뭔가 관련이 있다는 심증은 갔으나 진,김

과 "ㄷ"의 음가를 비교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청,칭,신과 텡과 관련을 지을수있다면 단과 진과 신

은 관련이 없다할수없겠습니다.)

 

5. 선우의 경우 오래전부터 chan-yu(찬위)로 훈독되어왔다. 그바랍에 후세 사람들도 똑같은 실수를 답습

하여 결국 실제의 어원조차 찾을수없게 되었다. 몽골어에서 추장을 뜻하는 말은 darga (단칸과 너무 닮

았네요..) dekgerm(델케르)로 독음상 서로 흡사하다................프랑스의 펠리오는 darga라는 어휘는

고관을 뜻하는 한어가 몽골로 전해진 사례로 보았지만 실상은 전혀그렇지않다. 몽골어의 역사는 한어보

다 훨씬 오래된데다, 몽골어에서 g(ㄱ)음은 늘 구개음 gh(ㄱㅎ)으로 읽혀지며 때로는 u(,우)로 변형되

어 읽혀지기도 하기 대문이다. 만약 선우를 daghu(다ㄱ후) 또는 dau(,다우)로 읽어보면 그 어원이 몽골

어에 있다는 믿음은 더 강해진다.

 

그렇다면 "單"은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해답은 바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와있다. 그 본문

에 서는 "옥저는...단대령의 동쪽에 있다. ....서쪽이어야 옳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옥저는 우수

리강 동쪽에 자리잡고 있고 그 옆으로는 예로부터 타타르의 바다, 즉 달단해 로 불리던 동해가 있는데

진수가 그것을 단단대령(單單大領)으로 기록한것이다, 따라서 단단이 다단이 되무로 단(單)은 단으로

읽어야 옳다.

 

(저자는 몽골의 다ㄹ가와 비교해가며 "다"의 음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ㄷ의 음가말고도 "우"를 칸으로

대체해도 크게 문제되지않아보입니다.

 

單의 발음도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단단대령의 발음을 單으로 표현했기에 원래 발음이 단이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단군도 이에 대입해 전혀 어색함이 없습니다.

또 선우의 원래 발음이 chan에 가깝다면 역시 "ㄷ"과 "ㅅ"의 어중간한 발음이 단의 실제 발음인듯합니

다. 다시말해 찬,친,신,진,김,칭,단,탄,달 등의 발음들이 황금 내지는 넓은바다, 하늘 등의 뜻을 공유하

는 명칭으로 손색이 없어보입니다.)

 

6.( 진-김-신의 음가에 대한 친연성에 관해서도 글을 올린적이 있는데 저자도 역시 지적하고있습니다.)

영씨 부락에서 기원한 진(秦), 안추 부락에서 창업한 금(金), 애신각라가 건국한 청(淸)등, 이세글자의

독음은 각각 qin(친),-jin(진)-qing(칭)인데 건국시점을 서로 달리하는 이 세나라가 어떻게 해서 서로 비

슷한 발음의 국명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진일보한 역구가 필요할것으로 본다.

 

(이 질문의 대답은 바로 김씨의 신라가 모두 쥐고 있다는걸 저자는 모르는걸까요 무시하는걸까요.

금석문에 소호금천부터 진목공과 흉노 김일제를 선조로 삼아 이 두 종족이 김씨 종족임을 천명하고 있

고 신라의 후손이라 금사 청사에 밝히고 있는바, 바로 이 모든 의문의 해결점을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유물

과 고증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이상 저자가 쓴 몇몇 내용만 말씀드려도 더 설명할 필요없이 큰 연관성을 느끼실수있겠습니다.

특이한 부분은 단의뜻이 황금을 뜻하기도 하고 "ㄷ"과 김,진,친 등과 연관이 된다면 황금 애신족이 단칸족과

연관이 있음을 알수있으며 김씨가 고조선의 유민이라는 말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 할수있겠습니다.

 

가끔 제가 관심있는 신라와 진나라와 흉노와의 연관성에대하여 글을 올려왔습니다만...

지나친 상상이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한데..그동안 제가 상상하고 걱정하던 대부분의 내용을 집대성한, 그것도 중국인에 의해서 최근에

책이 나와있는것을 보고 너무 기뻐 여러분께 알려드리지않을수없어 글을 올립니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진시황은 몽골어를 했고 이들은 여진인이다 가 제목이며 이는 의미심장한 책의 내용을 암시합니다..

즉, 중원의 많은 나라들이 동이에 의해 세워졌고 숙신-여진-선비-흉노 모두 같은 뿌리이며 특히 헌원을 애신족으로 기술하며 김씨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은나라, 진나라가 여진족의 핵심세력,황금민족인 애신족(김씨)에 의해 세워진,여진어(알타이어)를 하는 나라임을 천명하고있습니다.(황제헌원을 애신족 김씨라고 칭합니다)

또 이들의 유대관계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이란(수메르), 터키,독일,불가리아등등의 나라들까지 미치고있음을 언어학적 고고학적으로 밝혀내고있습니다. 마치 환단고기의 내용을 언어학적 고고학적으로 외부인이 풀어내는듯한 인상입니다. 한국에서조차 많은 이들이 얼토당토않다고 여기던 모든 일들을, 그것도 여진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공자가 조선의 성씨를 가졌다는것도 언급이 되나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할부분은 이 통구스(여진)족이 중국의 모든 종족에 고루 퍼지고 한족의 기반을 이루는 중국의 기본민족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입니다. 다른 모든 북방민족을 거론하지만 신라,백제,고구려,삼한에대한 언급이 없는듯합니다. 여진을 애신족(김씨)라고 칭하며 한국과의 연관성은 전혀 언급되지않는듯합니다. 또 여기서 밝히는 바로는 속속 그 증거들이 계속 나오고 있기에 이에대한 중국인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합니다.

 

여기에 여진족을 한민족으로 바꾸고 몽골어를 한국어로 바꾼다면 제가 주장하던 내용과(여러 고증,알탄생신화,새토템,언어,풍습등을 예로 들고있습니다.)대동소이해서 좀 놀랐습니다....숙신지역의 동이와 산동지방의 동이는 원래 한뿌리이며 이들이 중원으로 진출,특히 산동의 동이는 서역으로 진출 서융과 진을 형성한다는 기본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엇습니다.

 

아직 중국내에서 소수로 나오는 주장일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역사전쟁의 방향을 짐작할수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젠 숙신/고조선은 물론 포함되지만 그외에도 진나라,은나라등의 동이족의 적통이 한국이냐, 중국이냐를 놓고 격돌할준비를 해야지 소극적인 대응으로는 한계가 있어보입니다. 진/은 은 한민족과 관계가 없듯이 지나칠수없겠습니다....고조선과 부여계통의 강역만으로 중국대륙과 나눠보는 정도의 대응으론 안될듯합니다.

 

이들이 스스로 밝혀주는 부분이 있어 고맙기도 하나 그만큼 중국도 결사적으로 지키지않으면 통채로 빼앗긴다는 절박함으로 대응하게되지않을까요.

 

저자는 전통적인 역사학자는 아닌 물리학자면서 저술활동을 하는 주학연이라는 사람이네요. 역사학자는 아니나 그래도 논문형태로 발표되어왔던 글을 묶은 형식의 책이라합니다. 여러 역사학자의 감상리플이 달려있는것으로 보아 비중이없는 분은 아니라 보여집니다.

 

중국인들과 북방민족들의 언어(어순)자체가 틀리다는게 문득 더 소중한 자료로 느껴지고 비장의 무기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런 큰 차이가 없었다면 동이의 적통 한민족을 주장하기에 여러모로 더 힘들지않을까 예상합니다.

 

특히 여러사서에 진의 언어와 진한의 언어가 비슷하다 증언하고있는데요(중국 역사 교과서에도 언급되는), 이것은 다시말해 다른 퉁구스언어(만주족이나 몽골족)보다도 한국과 더 가까운 연관성을 확인해주는 증거일수있다고 봅니다. 저자도 책 전체에서 주장하고있는데 바로 "언어야말로 민족의 뿌리를 밝혀낼수있는 최고의 자료인데 이제껏 너무 등안시"해왔다는겁니다. 또 갑골에서 비롯하여 동이족등의 언어를 소리대로 기록하다가 잘못전해진 과정등을 지적하고있는데 매우 중요한점이라 봅니다. 우리도 지금의 우리의 한자발음과 그뜻에만 너무 얽매이지말고 공통발음이나 음가로 실제음을 추정해내는 작업이 필요할거라 생각합니다.

 

 

감숙 甘肅과 롱서 隴西 의 관계에 대하여

최두환 2008.12.27 09:02  http://blog.daum.net/chosunsachoyduhway/8755161

우리는 지금 조선의 력사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 지명의 정체성이다. 력사 속의 그 지명이 현재의 지도 위에 있는 것과 동일하냐? 하는 것이다.
현재의 지도는 분명 력사 속의 지명으로 표시된 것이라야 할진대, 대개 그렇지 않기 때문에 력사학자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그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조선 력사의 패러다임에서는 이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접근하며 아예 통째로 부정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변화가 있으며, 얼마만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한반도가 조선의 터전이었다는 패러다임에서는 어떤 지명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아무리 한반도 북쪽이 만주이고, 고조선의 터전이 지금의 중국대륙의 동부지역을 상당히 차지했을 것이라는 강역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큰 테두리 안에서의 변화는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 료녕성 지역에 있다손 해도.
그러나 이젠 한반도니, 일본렬도로서는 조선의 중심적 력사의 터전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며, 아시아 자체가 꼬리아=조선이라는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지명이 1900±50년 당시에 만들어 놓은 그대로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여러 곳의 지명을 한 곳으로 묶어서 편집하기도 하고, 한 곳의 지명을 다른 이름으로 고쳐서 여러 곳에다 붙여놓기도 했거니와, 아예 지명 자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웬만하면 그 지명 속에 들어있는 력사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력사의 진실 찾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좀은 어렵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한 가지 사례의 지명의 이동된 현상을 찾아보자.

(1) 甘肅省: 在我國中部. 地居 西之西. 故亦曰隴西. … 禹貢雍州之域.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이 말은 "감숙성은 우리나라[지금의 중국]의 중심부에 있다. 그 당은 롱서의 서쪽에 있다. 그래서 '롱서'라고도 한다. … 옛날 우공 시절엔 '옹주'의 땅이었다."는 말이다.
옛날엔 천하를 9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옹주(雍州)" 땅이 "감숙성"이라는 말이며, 곧 "롱서도"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롱서"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2) 西突厥 : 동서쪽으로 44 N-56 E에서 44 N-96 E까지, 남북쪽으로 34 N-80 E에서 50 N-84 E까지.[중국력사지도집 제5책, p.30-31]

이 말은 "서-투르크"의 강역이 천산(天山)과 이식크호 [Issyk: 熱海]를 중심으로 동서쪽 5000km, 남북으로 1800km의 넓은 지역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수조(隋朝) 시절에 그랬다는 말이다. 그 서쪽이 무려 아랄해 서쪽을 넘는다.
그런데 이 "서-투르크[西突厥]" 지역이라고 지도에 표시된 것이 당조(唐朝) 때에는 어땠는가?
위의 책 p.63-64에 보면, 거의 같은 강역인데, 아프가니스탄[阿富汗] 지역이 더 포함디어 있고, 아랄해 서쪽이 잘려나갔을 뿐인 이 지역을 "隴右道西部"[롱우도서부]라고 하였다. 물론 그 중심지는 천산과 이시크호[熱海]이다.
이것은 지역이 西突厥[서-투르크]= 右道西部인 것이다. 물론 西=右이다.

 隴右에 天水가 있다. 그런데 "강/물"이라는 "水"를 가졌지만, 天水는 강이 아니다. 그 옆에 다른 이름의 강이 있다. 아마도 본디 강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西部"(서부)의 상대적 개념은 "東部"(동부)이니, 반드시 "롱右道東部"(롱우도동부)가 있을 것이며, "롱우도서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며, 그곳은 그 동쪽 경계에 있는 지명 과주(瓜州: 옥문관)·사주(沙州: 돈황)가 있는 90 E의 이동쪽에서 106 E까지의 지금의 감숙성 지역이다. 그렇다면 西部와 東部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 "롱"(롱)이라는 말이며, 그곳에 "天水"가 있다는 말이라야 더 합리적 해석이 될 것이다.

이 天山은 너무 커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서쪽 파미르고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알타이산[金山: Altai]까지 2000km나 뻗어있다. 알타이산과 가장 가까운 천산산맥의 동쪽 끝자락에 박달산[博格達山=貪汗山=時羅漫山]의 남쪽에 "天山郡/天山軍"(천산군)이 있고, "交河郡"(교하군)이 있고, 그 바로 옆에 "들판[트루판: 吐魯蕃]"이 있다.

"롱서"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훨씬 서쪽이며, 서아시아의 동부지역에 해당되는 56 E에서부터 지금의 섬서성 서쪽 106 E까지라야 옳지 않을까? 이것은 그만큼 지역/지명이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말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西"와 "右"는 같은 개념이므로, " 西"는 " 右"와 일치해야 설득력이 있다. 지금 "롱서"는 감숙성 지역에 실려있고, 위의 지도 p.61-62에서 보면, 34.9 N-104.9 E에 있다. 그렇다면 이 " 西"는 사실 " 東"에 해당되어야 한다. 그래서 "롱西道東部"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 사실이 바로 "롱서"가 그만큼 동쪽으로, 즉 현재의 감숙성 자리로 옮겨졌음을 말해준다.

天水는 天山과 다르지 않다. 산과 물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미름은 사실 같은 지명이거나, 거의 같은 지역에 나란히 있어야 할 이름이다.

그런데 "天水軍"은 현재 감숙성 천수현 서남쪽 70리에 있다고『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나와 있다. 그런데 위의 지도에서 보면, 물론『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天山軍"이 신강성 동북부에 "西州/高昌" 옆에 적어놓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두 지명은 본디 같은 것으로 보이며, 지명이 옮겨진 뒤의 왜곡이라고 본다.

우리는 롱서/롱우의 지역을 동경 106도에 있는 것으로써 력사의 기준점으로 삼아 해석한다면, 력사의 진실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덕유(李德裕)의 호가, 리춘경(李春卿)의 호가, 리첨(李詹)의 호가 " 西"(롱서)이고, 입만 벌였다 하면 시가 되고,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리백(李白)의 고향이 "롱서"이다. 그곳은 조선의 땅이었다.

섬서성진번이 고조선의 옛 서쪽 경계가 맞았다.

2013.05.01 18:22 http://blog.daum.net/manjumongol/1498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看羊島飛鴻洪在朝鮮鏡城府南九十里。其縱長六十餘里。278_158b其深六百餘尺。中有島曰看羊。洲渚平衍。無草樹之傅焉。沙潔如鋪練。抵北海僅一舍。

간양도 비홍홍(기러기가 난다?)은 조선 경성부 남쪽 90리에 있다.  중간에 섬이 있어 간양도라고 한다. 초목이 없고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해를 가까스로 막고 있다.

蘓武傳云匈奴徙武北海上。湖之名以鴈書也。島因牧羝而稱焉。然其俗鹵樸。不能載之書策。故或有疑之者。而司馬氏匈奴傳曰。匈奴東接濊貊朝鮮。則今關北固匈奴界也。遼東志所謂木郞古。卽其墟云。

소무전에는 훈족이 북해위로 이동했다. 호인들이 말하기를 안서라고 한다. 섬은 양을 기르기떄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씨의 훈족전에는 훈족은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한다고 하는데  지금 조선 관북이 옛 훈족경계이다. 요동지에는 목랑고라고했는데 모두 같은 곳이다.

新知錄云蘇武牧羝處則陝西鎭番衛也。山因以蘓武名。王昭君墓則山西大同府也。西地多白草。此塚獨靑。苟然則陝西距北海甚遠。漢書278_158c何得稱北海乎。此又可異也已

신지록에는 소무가 양을 기른곳이 섬서성 진번 위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무산이 있다. 왕소군묘는 산서성 대동부에 있다. 서쪽에는 풀이 많다. 섬서는 북해와 아득히 먼데 한서에는 북해라고 했다.(중략)

비슷한 기록이 조선후기에 다른 문집에도 실려있다. 조선의 지리개념은 조선국 길주 서쪽이 고구려 현도이고 그 다음이 훈족의 땅인데 조선이 점령하여 6진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떄 일본군이 쓴 기록에는 길주에서 올량합과 조선군

연합군과 붙었다고도 하는데 당시 올량합은 바이칼호에서 베이징까지 왕래하던 유목민족으로 지금도 몽골서부에 올량합부족이라고 자칭하는 부족이 살고 있다.

원래 동몽골에 살았으나 윤관장군에게 패한뒤 서쪽으로 밀려났고 원나라때 바이칼에서 베이징까지 왕래하며 살게되었다. 조선개국시 올량합 부족은 추장이 와서 조회하고 충성맹세를 하고 조선의 변방을 지키게 되었고 선조때 임진왜란에 조선군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후금이 올량합을 공격하자 조선군이 올량합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청나라의 기록도 있다. 즉 조선은 옜 훈족경계에서 오히려 더 서쪽으로 진격했다는것이다.

지금 바보같은 학자도 훈족의 경계를 베이징에서 약간 동쪽으로 추측하지  북한 함경도지방으로 추측하는 사람은 없다.

위의 글은 조선의 어떤 지명유래에 관한 기록으로 간양도라는 지명이 원래 훈족이 양을 기르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즉 한나라때 훈족이 양을 기르던 섬서성 진번 위지역이 원래는 옛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알수 있다. 훈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동호를 쳐서 땅을 뺴앗았는데 그때문에 훈족선우에게 시집간 왕손군묘가 산서성 서북부에 있는 것이다. 위의 글대로라면 동호는 고조선의 속국인 것이다.(한나라때 기록을 살펴보면 북해가 지금 산서성서쪽에서 감숙 섬서성위의 황하를 말하는 것이다.훈족이 황하를 따라 동진한 것을 설명하는것이 바로 위의 북해를 따라서 이동했다는 기록이다.)

진번은 조선의 서쪽경계로 한나라때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산서성 서부 일대로 나온다. 그런데 청나라 고지도와 무수히 많은 고지도에 진번이 음산의 서쪽 끝에 지금 감숙성의 서부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원래 고조선의 영역이 감숙성 서부였고 그 너머 서쪽에 훈족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훈족이 강성해지고 고조선이 쇠약해지면서 고조선의 진번역시 산서성 서부로 이동하게 된것이다.

당나라 기록에 기련에서 거란(고란)과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다고 했다. 호태왕 비문에는 더 나아가 기련 남쪽의 토욕혼을 정벌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후 돌궐이 발흥해서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밀렸다가 수나라와 당나라때 고구려가 동돌궐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서돌궐에는 사신을 보내 동맹을 제의한다.

고구려 말기 고구려는 전성기 영역의 상당부분을 수복해서 기련산까지 진격한 것이다. 그곳은 바로 고조선의 서쪽영토 진번을 약간 넘어선 것이다.

옛기록에 보면 유연이 전성기에 옛 고조선의 서쪽 변경까지 차지했다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시대인데 굳이 고조선이라고 기록한 것이 아무래도 진번 근처까지 유연이 차지한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는 위구르 서부지방에 진격했다는 중국기록이 있다. 그러면 발해는 고구려의 지명을 그대로 썻을 것이다. 반면 고려는 서쪽변경이 고구려에 비해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작아졌기 때문에 고구려 발해의 지명을 고려땅안에 집어넣어 왕조의 정통성을 살리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웅주라는 명칭도 원래는 황하 서편에 있는데 고려는 새로 점령한 여진족의 땅에 웅주를 설치한다.

고려와 조선의 기록을 보면 발해의 땅에 대한 지리기록이 많다. 실제 발해의 땅이 아니지만 지명을 옮겨서  그곳이 옜날 발해의 땅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발해 서경 중경 상경 동경땅이 모두 있다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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