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한민족 기원지/ 바이칼호 주민들

우리와 DNA 비슷…현지인들 “고려 사람들 벼농사 지었다”

주채혁 강원대 사학과 교수

주간조선 2002년 12월19일


우리 민족 기원설은 크게 북방기원설과 남방기원설 그리고 남북방혼융기원설로 나뉜다. 이 중 다수설은 북방기원설. 이 학설은 다시 스키토-시베리아기원설과 오르도스기원설로 나눌 수 있다. 몽골학계도 마찬가지다. 스키토-시베리아기원설은 천산북로의 스텝-타이가로드를 위주로 이루어진 민족의 이동을 전제로 한 것이고, 오르도스설은 그 지역을 넘어서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의 연장선상에 있는 황하상류의 만곡부를 중심지로 추정한 것이다.

몽골고원과 시베리아의 물은 대부분 북류해 북극해로 흘러들고 일부는 남류 또는 북동류하면서 태평양으로 흘러든다. 하류로 갈수록 습도가 높아져서 혹한기만 피한다면 생산이 용이하고 생존가능성이 높아진다. 한여름 알타이산의 기온이 영상 30~40도에 이르고 일조시간이 18시간이나 된다. 몽골고원 북쪽으로 눈을 돌리는 한민족의 바이칼호 기원설은 이러한 점을 기반으로 삼는다. 최근의 항공사진은 바이칼호 언저리의 논농사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부이르호 언저리의 주민들은 “고올리(고려) 사람들이 벼농사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수로의 흔적은 아직도 뚜렷하다. 바다처럼 드넓은 고올리 농장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알타이산맥과 항가이산맥지대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이칼 호수가 있는 러시아는 ‘모피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 모피의 주된 공급지는 시베리아다. 그리고 조선, 부여, 고구려, 거란, 발해, 여진과 몽골은 시베리아에 역사적 태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민족의 뿌리를 밝히려면 ‘모피(fur)의 길’ 추적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몽골의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부이르호 남쪽에 있는 고올리칸 훈촐로의 상이 동명성왕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올리족과 고리(槁離; 고려) 그리고 바이칼호 올콘섬을 시조지로 하는 코리족은 호수 동쪽인 눈강상류-할힝골(훌룬부이르) 언저리를 근거지로 삼았던 것 같다. 몽골에선 오래전부터 이들이 같은 계통이라는 견해가 있어왔다. 이에 관한 분석이 이뤄진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SBS-TV의 ‘몽골리안 루트를 가다’ 제작팀은 데옥시리보핵산(DNA) 검사로 이를 실증했으며 최근 서울대 의대의 이홍규 교수는 이를 좀 더 발전시켜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검증해내고 있다.

DNA방식은 구미의 언어·인류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던 퉁구스족의 기원지 알타이~바이칼 사이의 사얀산맥 소욘(鮮)족에 관한 연구에도 적용됐다. 그 결과가 2001년 졔례ㅇ코와 마뺘르추크가 쓴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지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아메리카원주민의 기원지가 사얀산 일대임을 실증하고 있다.

러시아쪽의 연구도 있다. 모스크바대학의 러시아과학원 일반유전학연구소장 자하로프 교수는 데옥시리보핵산 검사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밀접하게 직관돼 있는 것으로 밝혀진 우리 민족 또한 이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리라는 가정하에 한국인과 소욘족의 혈연적 관계규명을 위한 검사에 착수했다.



‘소욘’은 산이름에서, ‘퉁구스’는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바이칼호 지대라는 개활지에 진출하려면 상당한 힘이 축적돼야 한다. 이 지역은 해발 4000여미터가 넘는 많은 고산지대로 형성되어 있어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수량도 풍족하여 드넓은 땅을 보유해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힘을 비축하고 인구 수를 늘린 뒤, 바이칼 지역으로 진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리랑 지명 분포 지역

알타이(Altai) 산맥 기준으로 알타이 서부와 알타이 동부로 나누어진다.

알타이 동부에 대흥령 산맥 너머 오르도스가 있다.

청동기 유물 집중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 기원지도 바이칼 유역

필자는 메이원핑(米文平)이 1980년 초에 발견한 선비족의 석각축문 소재지 ‘가셴둥’이 있는 대흥안령 북부의 Sayan(대선비)산이 ‘이르쿠츠크 북쪽에서 퉁구스하 남쪽 사이에 있다’는 정겸(丁謙)의 기록을 따라 2001년 8월에 현지를 답사, 이를 실증한 바 있다. 그리고 1999년 8월에 대흥안령 북부 오룬춘 기(旗)를 답사하면서 선(鮮)이 순록의 겨울주식인 이끼, 즉 선(蘚)이 나는 산임을 ‘시경(詩經)에 관한 모시주소(毛詩注疏)’ 권23을 통해 입증했다. 또 조선(朝鮮)의 ‘조’자는 ‘아침’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고 ‘찾음’을 뜻하는 글자임은 흥안령 선비족 기원지와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를 현지 조사해 확인했다. 또 ‘중국어사전’을 참고해 ‘조선’이 이끼(蘚)가 나는 새 땅을 찾아다니는 ‘순록 유목민’을 의미하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토속어란 사실도 밝혀보았다. 이른바 ‘조선 순록유목민설’이 되는 셈이다.

이끼는 응달에 많이 나고 습기가 많을수록 잘 자라므로 조선겨레들은 서시베리아쪽에서 산지를 따라 태평양이 있는 동쪽으로 ‘이끼의 길’을 찾아 이주해 왔으리라는 추론도 있다. 아울러 몽골의 맥(貊) 고올리 기원설을 선보이며 맥이 ‘Ussurian Racoon Dog’이라는 학명을 갖는 너구리임을 훌룬부이르대학 생물학과의 황학문 교수와 함께 대흥안령 현지 조사를 통해 입증했다. 또 최남선 선생의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불함(不咸)은 ‘밝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붉음’을 뜻하는 것임을 시베리아-몽골-만주 현지 연구를 통해 정리했다.



현지 원주민들에게는 타이가의 자작나무와 물가의 버드나무가 신앙의 대상이다. 버드나무 중에도 붉은 가지를 가진 버드나무가 특히 그렇다. 현지 나나이족 언어로 버드나무를 푸르칸(purkan)이라 한다. 이는 그대로 burqan(不咸: 하느님)으로 적을 수 있다. 만주에는 ‘보드마마’굿이라는 무당굿 메뉴가 있는데 이는 ‘버들어머니’굿과 같은 것으로 ‘버들꽃’을 의미하는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 유화(柳花)에 대한 모태회귀신앙과 접맥된다는 논문이 1993년에 조선족 동포 최희수 교수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길림성야생경제식물지’(1961년)에 보면 조선버드나무(朝鮮柳)의 별칭이 붉은 버드나무(紅柳)다. 물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는 분포밀도로 보아 전 몽골리안루트-스텝로드에 걸쳐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박혁거세’란 이름도 ‘붉을 혁(赫)’자를 사용해 ‘혁거세’라 한 것이나 ‘弗矩內’라 이두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보아 ‘밝음’이기보다는 ‘붉음’을 상징색으로 하는 제사장 종족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올 유월 우리의 잠든 영혼을 강타한 ‘붉은 악마’ 신드롬을, 적어도 이 정도의 역사적 안목은 가지고 천착해 봐야 할 것 같다.

저명한 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라는 불후의 명저에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이 남북 축으로 돼 있는 데 대해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 축으로 퍼져 등온대(等溫帶)를 이루기 때문에 사람과 기술의 이전이 용이했다”며 “따라서 유라시아 대륙인이 다른 대륙을 지배하는 주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이에 다시 몽골리안 루트로 접맥되는 유목민의 기동성이 가세하는 중심축을 이루는 곳이 유라시아 대륙임을 강조한다. 더구나 야생식물의 작물화와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맨먼저 가장 다양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진 곳이 서아시아다.



●“유라시아인, 이동 쉬워 다른 대륙 지배”



유라시아의 거대한 섬이라 할 중국은 히말라야산맥-천산산맥 등과 타크라마칸사막 등으로 그 서부와 북부가 가로막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고립되었던 데에 대해, 칭기즈칸의 안방처럼 스텝과 타이가로 탁 트인 천산북로-스텝로드는 사람과 기술의 이동이 자유로워 그 언저리들에 또 다른 선진 문화권을 이룰 수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배경 위에서 조악한 유목적 생산환경에 도전·응전하며 적응해 오는 역사를 펼치다 보니 그 부산물로 뛰어난 군사력이 생겨나서 북방민족이 중원의 안보를 담보하는 역할을 해내며 농업생산 환경을 보장하는 정치적 경영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이징은 바로 이런 스텝로드와 중원농경지대의 농산물 집산지. 한반도와 만주세력이 되새김질해 키워낸 수렵-유목 민족들의 중원 경영역량이 발산돼 나오는 길이 만나는 곳이다. 실로 북방민족의 중원 정복왕조 창업 및 수성 능력은 흑룡강 북쪽으로 만주보다 훨씬 더 드넓은 대만주로 이어지는 거대하고 비옥한 지역을 기반 삼아 스텝로드로부터 주입되는 수준 높은 인력과 물력을 포용해 생겨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건조지대란 고원지대라 바람을 많이 맞아 습기가 적어진 스텝-준 사막지대를 주로 일컫는데 그런 생태환경에서 빚어진 인간들의 한 부류가 북방민족이고 그들이 한민족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북유럽에서 티베트고원으로 이어지는 지대에도 진출하고, 북극해를 건너 툰드라-타이가-스텝으로 이루어진 북서부 아메리카에도 진출해 간 것이었다.



(주채혁 강원대 사학과 교수)


주간조선 2002년 12월19일

천축(天竺)과 천독(天毒)이 동일하다면 왜 조선(朝鮮)과 나란히 있지?
오래된 일이지만, 제목으로 “《산해경》에 적힌 ‘조선’은 중국대륙의 중심에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가 있다.
거기에 나온 내용은 <海內經>의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의 번역을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하늘이 사랑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까지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天毒”을 “하늘이 사랑하는 나라가 있는데”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원문의 문장과 나라의 이름[有國名]과에서 그 흐름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동해(東海) 안과, 북해(北海)의 모퉁이와가 조선(朝鮮)과 천독(天毒)과의 어떤 간계가 있으며, 지리적으로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동해니, 북해니 하는 것은 동/남/서/북이라는 방위의 중심에서 볼 때에 어디가 중심이 되는 것인지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동쪽/북쪽이라는 것은 사실상 매우 부정확/불명확한 지리적 위치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일단 동쪽의 안이라면 그 서쪽에 중심지가 있을 것이며, 그 중심지가 통상적 관내도(關內道: 섬서성 장안 중심)이든, 천산산맥, 파미르고원이 있는 곳이든, 동해는 한반도와 일본렬도가 있는 지역에서 서쪽이 되는 바다, 즉 동경 123도에 있는 황해의 서쪽인 산동반도/강소성/안휘성/절강성 등지가 “동해의 안[東海之內]”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조선”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북해의 모퉁이[北海之隅]”라는 말은 어디에 걸리는 말인가? 이것은 분명 “천독(天毒)”과 관련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天毒”을 “하늘이 사랑하는 나라가 있는데”라는 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된다. 이는 “조선”과 마찬가지의 지리적 위치를 가지는 국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산해경》속의 지리의 중심지는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구조적으로는 오장산경(五臟山經)을 보면, 하남성 낙양과 섬서성 장안이 중심이 되지만, 내용적으로는 천산산맥[곤륜산] - 파미르고원이 중심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란 지리적 위치는 별로 변함이 없을 수 있지만, 일단 “북해의 모퉁이”에 있는 것이 “천독”이라는 나라라고 본다면, 그 “천독”이 어떤 성격의 나라이며,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중국력사지도집》제2책, (p.37-38, p.65-66)의 지도에 보면, 대월씨(大月氏)의 남쪽 인더스강 상류,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 “天毒(身毒)”라고 적혀 있다. 이곳은 인도의 서북부 이슬라마바드[Islamabad: 伊斯蘭堡(이사람보): 북위 34도, 동경 73도]가 되는 곳이다. 즉 “천독(天毒)=신독(身毒)”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身毒”(신독)은 무엇인가?

(1) <宋史>(卷490 列傳249 外國6) 天竺國舊名身毒, 亦摩加陀, 復曰波羅門.
(2) <後漢書>(卷89 列傳78) 天竺國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

이 두 사료 <송사>와 <후한서>에서 보면, 옛날에 “신독”이 “천축국”으로 고쳐졌으며, 그것이 월씨국(月氏國)의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국명을 가진 나라가 동해의 안과 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북해의 모퉁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어디로 보겠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3) <史記>(卷123 大宛63) 身毒在大夏東南數千里. 大夏在大宛西南千三百里.
(4) <漢書>(卷96上 西域傳 65上) 捐毒國, 王治衍敦谷, 去長安九千八百六十里. 東至都護治所二千八百六十一里至疏勒, 南與蔥嶺屬無人民. 西上蔥嶺則休循也. 西北至大宛千三百里, 北與烏孫接.

신독국은 대하의 동남쪽에 있고, 섬서성 장안에서 서쪽으로 9860리 되는 곳이다. 이곳은 역시 인도의 서북쪽 인더스(Indus)강 유역이다.
그렇다면《산해경》원문의 “北海”라는 말은 “南海”라는 말로 바뀌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北海”는 인도의 “오천축(五天竺)”의 중심이 되는 “중천축국(中天竺國)”의 북쪽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산해경》의 구도와는 원칙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된 내용에서 “身毒”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와 관련된 강명을 보면, 대개 영어권에서는 “인더스(Indus)”라고 한다. 그런데 페르시안(Persian)말로는 “힌두스(Hindus)”라고 하며, 산스크리트(Sanskrit)어[범어(梵語)]로는 “신두(Sindhu)” 또는 “신두스(Sindus)”라고 한다.[유원수 역주,《몽골비사 元朝秘史》(사계절, 2004), p. 273/p. 484] 요즈음의 이란에서는 “헨드”라고, 터키에서는 “힌디”라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印度”의 印“을 조선의《동국정운》에서 “여린 ㅎ”이라는 문자가 들어간 “”이다. 즉 알파벳트로 첫 자가 “H”가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의 발음이 페르시아안, 즉 중앙아시아에서 발음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동일언어권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자 발음으로는 물론 “신독”을 현대에 와서는 “인도(印度)”라고 바뀌었다.

(5) <표준 종합역사지도>(조좌호, 수학사, 단기4294, p. 13) 신드 Sind.
(6) <고등학교 역사부도>(오인석, 이존희, 최찬일; 두산동아, 1997, p. 80) ‘1877년의 인도’에 인더스강 하류가 ‘신드’지역임.

역시 “인더스” 강을 지방말에 따라 “힌두스(Hindus)”니 “身毒(신독)”, “신두스(Sindus)>신드(Sind)”이며, 인더스 유역의 평원의 인도 서북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India<Indos<Indus<Hindus<Hind라는 말이 한자로 印度<天毒<身毒으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원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정리하자면,《산해경》시절(B.C.12세기 - A.D.4세기)의 지리적 내용적 중심지는 결국 고대에서는 곤륜산[천산산맥, 파미르 고원. 총령]이 있는 지역이며, 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남쪽의 모퉁이에 신독[身毒=천축(天竺)=Sind=Hind, Sindus=Hindus=Indus=印度]이라는 나라가 있으므로, “남해의 모퉁이[南海之隅]”라는 말로 바꾸지 않을 수 없으며, 이렇게 되면, 그 “東海”가 “동쪽이 되는 바다”가 아니라 “동쪽으로 바다”가 되며, “北海”는 “南海”로 바꾸어 “남쪽으로 바다”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인도서북부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틀에 있으며, 그 중심지가 곤륜산이므로 그 동쪽에 있는 지역이 “동해의 안[東海之內]”이 되며, 바로 그곳이 조선인 것이다. 결국 천축(天竺)과 나란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조선”이기 때문에《산해경》의 <해내경>에서 그렇게 쓴 것이며, 곤륜산의 서쪽에 있는 西아시아 역시 “조선”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산해경》의 <해외서경 21>에 “肅愼之國 再白民北.[숙신국은 백민국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숙신(肅愼)이 있으니, 이는 결국 조선(朝鮮)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지역에 발해(渤海) 있었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이를 보면 조선이란 아시아 전체를 말하는 것이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조선이었음을 새삼 놀랍기도 하다.

석가족의 나라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 8월호), pp.12-19에 게재된 것이다.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1)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2)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으로 연상하기 쉽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3) 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그러나 그 뒤 빈센트 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5)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6)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7)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8)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9)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0)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1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12)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13)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14)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15)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16)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17)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18)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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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사카 번역

1.명칭,언어, 역사적 배경

사카(Sakas)는 (고대 이란어의 영어 형태로 복수 남성명사, 고대 그리스어Σάκαι, Sakai; 사스크리트어 Śaka)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중기 페르시아 시대까지 중국 신장에서 부터 동유럽에 걸펴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평지에 이주하여 살았다.  중기 페르시아 때 투르크 이동으로 투르크인으로 대치되거나 투르크에 흡수되었다.
 * 투르크는 돌궐(突厥)이다.

아키메니드 제국 때 사카 영역 대부분은 페르시아의 관할영에 있었고 사카(Saka)라 불렸고 고대 이란 다른 지역에도 거주했다.  고대 그리이스인은 사카를 스키타이(Scythians)라고 불렀지만 페르시아어로 사카이(Sakai)로 인식했다.
사카이는 모든 스키타이인을 의미하고 또한 중앙 아시아와 극동의 종족까지 의미했다.

기원후 300년 전, 중기 페르시아 시작 전에  이들은 후에 카작스탄(Kazkhstan), 우즈벡키스탄(Ozbekistan), 타직스탄(Tajikistan),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 인도와 이란 지역, 알타이 산맥,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신장성
에 살았다.  이 때문에 로마는 Saceans (Sacae) 과 Scyths (Scythae) 모두 인식을 하였다.
   스키타이인는 경계 지역에서 중국어로 사이(Sai: , Old Sinitic*sək)로 불러졌고 서쪽 경계에서는 중동 지역에 들어온 첫 이란인 이었다. 아시리아 시대 에사하돈 기록에 사카인들에 대해서 아쉬쿠자(Ashkuza) 또는 이쉬후자(Ishhuza)로 불렸다.

허그 윈클러(Hugo Winckler)는 심한 의문이 들지 않게 스키타이와 정체성을 연관시킨 첫 사람이다.   고대 시메리안(Cimmerians)이라 알려진 기미라이(Gimirrai)와 관련되었다. 이 스키다이인은 주로 우라투(Urartu) 왕국에 정착하는 관심이 있었고 후에 아르메니아(Armenia)가 되었다. 유티(Uti), 사쿠센(Shacusen)은 그 이름을 반영한다.   고대 히브루 텍스트에 아쉬쿠즈(Ashkuz)는 기미리(Gimirri; Gorner)부터 파생된 종족으로 여겼다.  

스키타이는 키에프 남쪽 우크라이나(Ukraine)와 트레이스(Thrace),마케도니아(Macedon)로 진출했다. 구별된 명칭이 이점을 줄 정도로 충분히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키메니드(Acheamenid)는 그들을 위한 관할 명을 스쿠드라(Skudra)로 지었다. 그 이름은 엘람과 아카이드에 Is-ku-ud-ra로 발견된다.  

사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국 신장성 웨이우얼 자치구에 있지만 그 언어는 이란 동부 또는 북동부 지역에 넓게 퍼졌고 다시 2개 방언으로 갈라졌다.  중기 이란 시기에 스키타이는 사마트(Sarmatians),알란(Alan), 로하러니(Roxolani)같은 다른 민족명으로 동화되거나 훈족으로 흡수되었다.


조선 세종때에 4군과 6진을 개척한다고 알고 있다. 6진은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 여진족(女眞族) 침입에 대비하여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6진을 운영하는 가운데 변동사항이 있는데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겨 종성군으로 하고 알목하에 회령진을 신설하는 조취를 내린다.회령진이 신설치된 것은 여진족 내분으로 후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목하라는 지명이 놀랍게도 징기스칸(成吉思汗) 의 손자 쿠빌라이칸(원 세조)이 카라코롬(和林)북쪽 알목하 상류에서 나라(원=몽고)를 일으킨 곳이다.이 곳을 회령으로 부르는 것은 헤를렌 강(몽고 수도 울란바토르 동쪽) 흐르기 때문에 헤를렌을 음사한 것이 회령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은 혜란강으로 부른다.선구자의 노래 가사 중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혜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라고 나온다.구한말 이전부터 혜란강(헤를렌)은 유목족의 중요한 강이기 때문이다. 바이칼호에서 동남쪽으로 만주를 가다보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회령인 것이다.

6진 중에 경흥은 연해주이며 회령은
혜를렌강 일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만주 전체가 함경도 땅이자
동북부 간방 조선의 영역이다.
문명의 난생신화와 흑계룡!

백두산은 민족 이동과 함께 중요한 신앙과 정신적인 상징의 대상이다. 항시 정북에 위치하고 있다.중앙아시아에서는 힌두쿠시 산과 칸탱크리 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신강성에서는 천산산맥의 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고 서안에 수도를 삼을 때에는 삼서성에 있는 태백산을 북경에 수도를 삼았을 때에는 의무려산을, 만주에서는 길림성에 있는 북산(베이산)을, 몽고 동부에서는 초이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
즉 백두산은 하나의 산이 아닌 민족의 중심지역의 북쪽을 백두산으로 삼은 것이다.

만주와 몽고를 나누는 축은 강으로 보면 헤를렌강이며 이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린다. 그리고 동과 서를 기준으로 나누면 대흥안령산맥이다.몽고고원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지나면 만주 평원으로 뚝 떨어지는 공간이 나온다.대흥 안령산맥의 북쪽 끝에서 소흥 안령 산맥이 뻗어 장백산맥으로 이어진다.장백산맥은 현 한반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축으로 지나가는 산맥이다.이 산맥이 있어서 한반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대흥 안령산맥과 장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 마치 알을 품은 것처럼 타원형의 평원이다. 이 지역의 중심지역의 작은 산악을 중심산으로 삼았으며 백두산으로 인식한 것이다.
후일 한반도로 내려와 1900년 이후에 새로운 상징으로 백두산을 중심산으로 삼은 것이다.

이성계가 태어난 지명이며 이씨 조선의 세력 기반이 되는 지방이다.그러나 이 지방은 청원만족자치구지역이며 청나라가 태생한 곳이라 알려진 곳이다.그리고 길림성 길림과 장춘 사이에 있는 북산이 천하 제일의 명산이라 지칭되며 여러 만주족 유적이 있다. 그러나 만주족이 아닌 조선족의 유적이다.유목 연합이기 때문에 같은 뿌리를 기반으로 출발을 하기 때문이다.
만주는 또 다른 난생지역의 계룡지역인 것이다. 그 상징을 흑룡으로 보는 것이며 고구려의 상징이자 고조선의 후신으로 본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는 신만주이며 원만주는 신강성 만주이다.둘다 지형이 계란형이다. 그래서 계룡산이라 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상형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구만주(신강성)는 황계룡, 신만주(간도)는 흑계룡이다.

이성계의 고향과 함흥처사의 비밀

이성계가 태어난 고향은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이다.영흥과 길주를 합하여 영길도라고 하였으니 영흥은 길림성에서 그리 멀지 않는 요충지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된다. 영흥은 요양이나 심양일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요녕성이 영흥지방이며 길림성이 길주지방이 된다.
고려말 공민왕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활동한 지역이다.이 시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동북방의 쌍성총관부는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가 된다.이성계도 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다.
고려말에 요녕성 길림성 일대 상황을 보면 이성계가 예맥족/ 만주족/조선족의 활동무대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의 이합집산이 일어났다.금나라에서 몽고로 몽고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세력 순환의 격동 속에서 이성계의 가계 내력이다.이 시기에 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내조하러 왔다. 여진족과 몽고족 틈바구니에 있는 만주에 기반을 둔 이성계 집안이 지방 호족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태조의 발상지는 청태조의 선조인 이성계의 발상지이다.
후일 임진왜란 당시에 청나라에서 조선에게 먼저 왜 공격에 격분하여 먼저 도워 주겠다고 하면서 <쥐 새끼 같은 왜를 몰아내 부모님의 나라에 원수를 갚겠다고 나온다.> 조선은 우리 부모님의 나라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성이 <애각신라>라는 사실이다. 신라의 후예를 지칭한 것이다. 청나라 이전에 금-후금을 세운 여진족도 김씨 후손을 내세운 것이다.태조 이성계 이후에 왕자의 난이 있고 이성계가 함흥으로 세력 기반을 옮겼다.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처사는 바로 만주에 세력 기반을 둔 만주족의 근거지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한 것이지 자기 고향에 휴양삼아 기거한 것이 아니다.

이성계의 초상화는 푸른색 곤룡포를 사용한다.다른 왕은 붉은색이나 노란색 곤룡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외인데 후일 청나라의 상징은 푸른색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피줄이자 가계인 것이다. 같은 뿌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청색의 곤룡포와 청나라의 국호 그리고 만주는 하나로 연결된다. 몽고에서는 <따르따르>족라고 하며 우리 문헌에는 <조선조선>족 이라 부르는데 <조선>이 <따르>인 것이다.

조선이 황제국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여진족도 이성계 가계를 정통맥으로 삼았으나 나라를 세우고 황제국으로 부상하자 후기 계승자인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를 정통맥으로 삼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조 발상지가 청조 발상지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에서도 연동되며 이성계 가계 유목족 내력을 숨기게 된다.새로운 가계인 전주 이씨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있다 보니 유목족의 가계 역사에 대해 미화 작업을 함과 동시에 여진족과의 연계된 부분은 조작하게 된다.

대대로 활동해온 만주족의 무대가 어느 날 갑자기 여진족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 된다.백두산 경계비에 일어난 사건은 이성계 고향을 차지하기 위한 정통성 싸움인 것이다.만주에서 존재한 청나라 유적은 조선족의 유적을 바꿔치기 한 것이며 실제 청나라가 일어난 지역은 만주가 아닌 신강성 지역에 기반을 두고 동진을 한 것이다.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한족에 동화되었으며 실제 만주어를 사용하는 일부 민족이 남아있는 지방이 신강성 일대에 약간 남아있으며 만주에는 거의 없다. 이것은 바로 만주에서 청나라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청나라가 중국을 침공하고 그 빈 공간을 한반도 세력이 차지하여 간도를 개발했다는 논리는 허구 일 뿐이며 청나라를 세운 후금이 자기 민족의 발상지를 소홀히 할 리는 없다.청나라 건국지와 수도는 절대 요녕성을 중심으로 하는 심양이 아니다. 신강성이나 내몽고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다.

대륙 조선이 망하여 한반도로 피난하는 과정
중앙대륙 고조선-중앙 대륙삼국-동양 대륙고려-동방 대륙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황제국의 위상과 역사는 사그라 들고 동북방 변방에서 우리는 존재한다.이제 옛 화려한 영광과 역사를 찾아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자 숙명이다.조선의 몰락은 서양과 동양의 패권에서 희생량으로 전락한 것이다.동방의 강자 조선은 다시 일어서야 하며 서양 문명을 이기도 새로운 동양문명을 창조해야 한다. 그 웅홍한 장대한 시작은 한류에서 뜨겁게 타 오르고 있다. 이제 옛 것을 회복하는 다물운동이 벌어저야 한다. 잃어버린 역사와 정신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이 우리의 밝은 미래인 것이다.



서북방의 위협
조선 초기 4군과 6진을 기반으로 광대한 황제국을 자랑하나 4군을 이내 곧 무너지게 되며 4군을 통한 유목족이 유입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6진은 임진왜란 전후까지 강하게 버티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년 동안 북방에서는 유목족의 이합집산이 일어나면서 여진족은 해서(西) ·건주() ·야인()의 3부로 나누어진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워 신강성 일대와 내몽고에서 발흥하기 시작한다.임진왜란 이후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위협하게 된다.

서남방의 배신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어부지리 효과를 보고 양자강 이남과 상류지방에 머무는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 양자강 하류지방까지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전통적으로 동이족과 서이족은 형제관계를 통한 친선 교류의 나라였으며 중국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서이족인 한족에게 한번도 빼앗기지 않은 황제국의 위상을 대대로 지켜왔다. 황하강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을 중심으로 동양 역사의 주도적 역활을 해온 것이다.서이족은 남서방이나 서방 또는 남지나 해를 기반으로 하는 변방의 열국에 지나지 않았다.

동남방의 위협
왜는 해양세력을 말한다.왜(倭)는 외(外)이며 바깥을 의미하며 여인국을 의미한다.광동성과 복건성 그리고 동남아 일대를 대상으로 해적질을 하는 도적때이며 왜구라는 별칭으로 존재하였으며 일본과 또 다른 분류를 하고 있다. 일본이 왜가 아니며 단지 대륙왜의 근거지를 일본왜의 근거지로 바뀌는 것 이외는 없다.왜는 조선국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표현한 것이다.즉 지방 체계로 보면 도 관찰사의 지위이며 지방 호족의 왕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상한 명나라와 이상한 조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이 점유한 탐라를 주고 조선이 점유한 대마도를 맞교환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탐라는 제주이고 대마도는 쓰시나 섬이 아니다.탐라는 대만이고 쓰시마는 일본인 것이다.즉 대륙왜가 일본왜로 쫓겨 들어갔지만 왜는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임진 왜란 당시에 일본은 해양도 소속이며 부속 도서일 뿐이다.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은 교역이 거의 없는 변방이였으며 왜구들이 해외 포르투칼 세력과 해석과 해양 세력의 엽합을 통해 대륙 조선을 정벌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완전 할양 받은 일본은 덕천가강에 의해
에도막부 [(강호막부)]가 열린다. 강호라 불리운 것은 양자강 일대를 형성한 대륙 왜 세력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붕괴시키고 천황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키고 다시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두 번의 침공으로 조선은 완전 패망으로 전략하게 된다.

동북방의 피신

동북방인 간도와 한반도로 피신하는 과정은 서서히 여러 차례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1차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이 대륙을 떠나 간도로 진입하게 되며 2차로 청나라의 오르도스 지방인 서안 북부 내몽고 지방을 점령하게 되고 북경을 위협하자 한반도로 이주하게 된다.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대동법과 사회제도가 크게 비뀌게 된다.또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많은 지리서가 출간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정치적 분열은 당파 싸움이다. 당파는 단순히 정치적 견해가 틀리는 것에 따른 국론 분열이 아니다.지방 호족간에 이견과 이합집산인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 지고 다시 동인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 지는데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 지는 계기가 분조(分朝)활동이다. 그 시작은 광해군 때에 분조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토지결수가 1/10로 줄어들게 된다. 급격한 세입감소는 지방 호족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지 전쟁을 통한 인구 감소나 농사 지을 인구 감소가 아니라 중앙 조선 황제국에서 이탈하는 지방 호족이 늘어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방으로 이전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대륙 조선은 동방조선국(중국 동해안)과 북방조선(만주국과 한반도)으로 나누어 지게 된다.이 이후 본토 조선이 멸망한 시기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명성황후 시해를 기점으로 추산된다.그 때까지 황후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황제국의 전통을 이었다는 것이다.

조선개국 480년에 한양시대가 끝나다!

북경과 서안을 기반으로 하는 한양시대가 끝나는 시기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1895년 10월8일(양력) 명성 황후 시해(을미사변)를 기점으로 열리는 시기로 본다.대륙 조선이 망하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조선인이 한국으로 배를 통해 육지를 통해 건너오게 되거나 한족에 동화되거나 대량 학살이 된다.관동대학살, 남경대학살,중국 해남성 조선인 학살, 사할린 대학살 그리고 만주 지방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인을 이억만리 땅으로 이주 시킨다. 자세히 조사되지 않았지만 뿔뿔히 흩어지는 비극의 역사가 된 것이다. 수 많은 임시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충칭 임시정부-북경 임시정부-만주 독립국이 들어선 것이 그 실 예이다.가장 극심한 타격이 된 이유는 일본의 대륙 진출과 정복 지역이 정확히 대륙조선과 만주 한반도 조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일본이 동남아 제국을 침공한 것은 해양도 백제의 영역이며 해양조선의 영역이다. 중국 동부와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침공한 것은 대륙조선과 만주조선의 영역이다.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성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경성이라고 부른다.우리나라는 그냥 서울이라고 부른다. 왜 이렇게 다르게 부르는 것인가!
중국에서는 전신이 명나라와 청나라이므로 조선에 대해 잘 안다. 한양과 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륙에서 망한 조선인이 건설한 수도이기 때문이다.그래서 한성이라고 부른다.한성 중에 황제가 사는 곳이 한양인 것이다.한민족은 동대문을 낙양으로 서대문을 서안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 동대문 서대문을 일본인이 강제로 부르게 해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의 동대문과 서대문으로 부르는 것은 일본인 일뿐..우리는 그냥 서대문을 서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덕수궁 대안문이 일제시대 대한문으로 바뀌었다.서울 한 복판에 일어난 사실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어떤 학자의 주장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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