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2> 투바공화국을 아시나요

사라져가는 한 초원국가에 대한 강대국들의 동상이몽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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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2-15 19:11:45
  • / 본지 20면
   
투바호수 위의 한 섬에 세워진 포르-바쥔 성.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 남한의 배 크기 · 인구 30만명 
- 몽골계 민족의 전형적 유목국가 

- 스키타이시대 적석목곽분, 황금유물 등 출토 
- 알타이 못지 않은 유목문화 자랑 

- 푸틴의 강한 러시아 투바 배경 상징화 
- 중국과 러시아 영토·역사분쟁 가능성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에는 우리나라 백두대간에 비유될 수 있는 커다란 산맥이 가로지른다. 이 산맥의 이름은 사얀-알타이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을 아우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타이도 바로 이 산맥의 일부다. 그런데 알타이의 동쪽에는 투바(현재는 티바로 개명)인들의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공화국에는 알타이 못지 않게 고대부터 내려오는 많은 초원의 유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알타이보다 고고학 조사가 덜 진행된 탓에 외부인들이 잘 모른다. 유라시아 대륙 한 가운데 숨겨진 아시아의 진주라고도 할 수 있는 투바공화국은 러시아와 중국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위치와 유목민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20세기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 사라져가는 한 초원국가에 대한 강대국들의 동상이몽

   
러시아의 공화국 지도 속 투바공화국. 아래쪽 녹색으로 칠한 부분이다.
투바는 몽골계 민족이다. 바이칼 근처의 부리야트, 몽골공화국과 함께 라마교를 숭상하는 독실한 불교국가였다. 비록 그들은 부족 별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나라로 갈라서지는 않았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20세기의 열강과 이데올로기였다. 러시아 시민전쟁 때 이 지역은 러시아 백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적군이 승리함에 따라 중국과 몽골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는 1921년에 탄누-투바(투바공화국의 별칭)라는 허수아비 독립정부를 세웠다. 초대 수상인 돈둑(Donduk)은 불교에 근간한 독립국가를 만들려 했지만 결국 볼세비키가 주도한 혁명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제2차대전이 마무리되던 1944년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다. 남한의 배 크기인 17만㎢에 인구는 해운대구보다 적은 30만 명이 사는 전형적인 유목국가다.

   
약 2500년 전 투바족이 사용했던 황금유물.
몽골처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주변국가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투바공화국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초원의 여러 국가가 살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적석목곽분과 황금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돼 알타이 못지 않게 고도로 발달된 유목문화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알타이의 파지릭문화인은 동양계 위주에 서양인이 혼혈된 사람들인 반면, 이 지역 사람들은 순수한 몽골로이드 계통이라는 점에서 유라시아 초원과 아시아를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에 숨어 있는 투바공화국. 하지만 의외로 미국에서 투바는 유명하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손꼽히는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죽기 직전까지 투바의 열렬 애호가로 자청하며 다양한 대외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등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 물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1985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을 규명했으며,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책으로 물리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학자이기도 하다. 


■ 농담 잘 하는 파인만 씨가 진지해진 이유
   
투바족장 황금보검.
파인만은 1970년대 중반 암에 걸리고 이후 10여 년간 힘겹게 투병생활을 했는데, 숨이 다하기 직전까지 투바의 여행을 계획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는 미소 냉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로 파인만은 투바여행을 코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그와 행동을 같이했던 랄프 레이만은 파인만의 투바사랑 역정을 '투바-파인만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 책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며 낙천적으로 행동하는 파인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파인만이 투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40년대에 발행된 '탄누-투바'공화국의 우표 한 장에서 시작됐다. 현대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초원 유목생활을 하는 투바인들은 언제나 창의력과 호기심에 가득 찬 파인만이 죽음의 공포를 떨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파인만의 경우가 잊혀져 가는 유목국가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21세기의 푸틴 러시아 총리(전 러시아 대통령)가 집권한 이후에 투바는 급격히 강해지고 있는 러시아 국력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근육질의 푸틴 총리가 휴가철에 반라의 차림으로 낚시나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가끔씩 외신으로 보도된다. 강한 러시아와 지도자를 원하는 러시아 국민들을 위한 선전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푸틴이 주로 휴가를 즐기는 곳이 투바의 초원이다. 그 배경에는 푸틴의 측근인 투바 출신 러시아 정부 비상대책부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투바의 자연과 역사는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초원문화의 터전에서 러시아 국력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투바에는 호수 속에 세워진 '포르-바쥔' 이라는 성터가 있다. 마치 엘도라도의 전설처럼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성터는 서기 12세기 대 탕구트국(티베트계통의 민족이 세운 나라. 중국어로 서하·西夏)의 것이다. 지난 2007년 여름에 푸틴은 모나코의 황태자 알베르트 2세와 이 성터 발굴 현장에 머물렀다. 한국 같이 정치인들이 양복에 안전모를 쓰고 뒷짐진 채 현장을 순시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며 삽으로 흙을 퍼올리는 모습이 보도됐다. 푸틴의 마초이즘적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데 초원제국을 연구하는 고고학도 동원된 셈이다. 이렇듯 러시아에 가장 늦게 편입된 변방의 투바는 최근 강력해지는 러시아의 거칠지만 강한 자연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러시아의 화가이자 역사가 니콜라이 레리흐가 그린 '초원의 석양'. 아인슈타인이 그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물리학자 중에서 초원에 반한 사람은 파인만뿐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도 초원에 반했다. 아인슈타인은 알타이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자 역사가인 니콜라이 레리흐의 그림을 보며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그림만큼 나를 감동시켰던 것도 없습니다"라고 찬탄을 했다. 왜 이 천재 물리학자들은 초원을 좋아했을까? 단지 새로운 것 또는 지금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동정의 눈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동양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오리엔탈리즘'의 발로였을까. 

파인만과 아인쉬타인이 좋아했던 초원은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틀에 박힌 현대문명의 삶과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생활의 사람들이 그 원인은 아니었을까. 물리학에서 파인만이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기존의 통설을 깨는 단순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으로 살며 새로운 취미와 연구를 즐겼다. 그는 지적으로는 이미 유목민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래서 나노(nano) 시대를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투바에 빠진 이유는 단순한 탐험가적 취미가 아니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들 천재들은 유목민의 모습에서 수십 년 뒤 지구의 미래를 본 것은 아닐까?

초원은 창조력의 원천인 동시에 강대국들이 국력을 휘두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투바의 역사가 그를 증명한다. 투바는 13세기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청나라때는 중국의 판도에 편입되었다가 1911년에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소련의 영토가 됐고, 지금은 강한 러시아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직 중국이 투바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주변지역의 역사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으니, 조만간 두 강대국 간 투바를 둘러싼 역사분쟁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한국에서도 투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2003~2005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투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행한 적이 있다. 일반인들은 오로지 알타이나 바이칼에만 관심이 있을 때 차분하게 숨겨진 진주를 밝혀서 조사한 것은 놀랍다. 21세기, 세계로 국력이 뻗어나가는 우리나라가 보는 초원은 달라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한 강대국이 아니라 투바와 같은 약소국이었음을 잊지 말자. 우리의 힘은 군사력이 아닌 주변국가에 대한 문화적인 관대함과 포용력에서 나와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투바공화국의 매력을 느끼길 바란다. 파인만과 아인슈타인이 초원에 매혹을 느낀 배경에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포용이었음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유라시아, 공활한 순록·양 유목목초지-2황금빛 기마 양유목혁명 2_1

연  구 /     [한국 시베리아연구] 2014 제18권 2호Chaatang朝鮮이 몽골의 뿌리-순록유목에서 양유목으로 주 채 혁*

Ⅰ. 서론

Ⅱ. 본론

  1. 시원유목태반, 툰드라~수림툰드라의  순록유목

  2. 스텝의 기마 양유목

  3. 몽골과 고구려의 창업기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嫩江 鮮原지대 

<국문요약>1990년 북방개방 이후 북유라시아 유목지대 현지답사를 해오면서 나는 대체로 2대류의 유목이 존재해온 것을 알게 됐다. [騎馴鹿] ‘순록유목’(Reindeer-riding, reindeer herding nomadism) 과 騎馬 ‘양유목’(Horse-riding, sheep herding nomadism:  騎馬 ‘羊’遊牧)이라는 2대유목생산양식이다. 이처럼 유목가축이 크게 2대류로 나뉘고 유목생태도 한랭 고원 저습지대 수림툰드라~툰드라의 응달 소프카-「鮮」과 한랭 고원 건조지대 스텝-「原」으로 차별화되며, 유목민도 그 생산조건들의 변화 발전에 따라 그렇게 분별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비중은 압도적으로 전자가 후자보다 더 길고도 넓지만, 시대와 생태조건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달라지고 있기는 했다.기원전 10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철기로 재무장한 순록치기 소욘족(鮮族)-Scythia가 바로 이 흑해 북녘 공활한 스텝으로 일약 기마 양치기가 돼 황금빛을 번쩍이며 대거 휘몰아쳐 들어오는 유목사상의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붉은 색이 감도는 순록의 목초(蘚)지대 한랭 고원 저습지대(Sopka: 鮮)의 붉은색(Olaan gerel) 해(Burqan: 紅太陽)와는 달리, 양치기들의 삶터 한랭 고원건조지대(Steppe: 原)에서는 태양이 순황금색(Altan gerel)으로 상징된다[金太陽: Altan nar]. 그래서 나는 울야프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 황금마두순록뿔탈[엘미타쥬 미술관 소장]을 Chaatang의 기마양유목화 생산혁명의 상징물로 추정해보고 있다. 여기서 스키타이나 소욘(鮮)과 사하(Saxa)가 모두 시베리아(Siberia: 鮮卑利亞) 원주민의 언어로 순록유목민의 주식 젖을 주는 어미(암)순록(Sugan: Сагаион)에서 비롯된 점이 사실인 만큼, 후기빙하기 이후 북유라시아 시원순록유목의 西傳이 서아시아~중앙아시아의 철기문화와 융합돼 다시 東傳된 것일 수 있다고 여겨진다.물론 철기시대에 들어서 생산성이 순록유목보다 10여배나 더 높은 스텝의 기마 양유목으로 발전해 기마 양유목초지 스텝으로 진출하는 데는,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가 북극해권을 내포하는 동북아시아보다 대체로 더 빨랐다.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철생산을 시작했고 기원전 15세기에는 철생산을 독점한 히타이트 거대제국이 출현하기까지 했다. 순록유목의 기마 양유목화로 후자가 유라시아 유목권의 본격적인 주류로 들어서는 유목생산의 일대 혁명은, 철기사용과 더불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철기의 보급과정에서, 기원전 8~3세기에 걸쳐 기마 양유목 거대 목초지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 대스텝에서 크게 활약한 이란계의 기마 양치기 스키타이~소얀(鮮)족도 등장하게 되면서 거대 수림툰드라 동·서 사얀산맥 중에도 스키타이~소얀족이 일대의 둥지를 틀게 됐고, 이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이어서 朝鮮系 鮮族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이들이 스키타이 제철기술과 결합되어 무서운 弓士戰力集團을 이루는가 하면, 스텝에 진출해 騎馬射術이라는 가공할 당시의 최첨단 遊牧武力을 확보했다. 이렇게 해서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이라는 드넓은 Steppe(原) 기마 양유목지대와 嫩江소프카(鮮: Sopka)라는 거대한 Sopka(鮮) 순록유목지대를 통합해 이 역사적인 순록·양[鮮原]유목제국 태반지대를 모두 지배하면서, 이와 더불어 거대하고 비옥한 곡창지대 만주평야의 생산력이 점차 직·간접적으로 주요 배경토대로 작용하게 되자 치열하게 사회분화가 일어나 고대 동북아시아유목제국이 창업되게 됐다. 그래서 모든 동북아시아 고대유목제국을 낳은 子宮이 훌룬부이르 몽골스텝-嫩江소프카 곧 이른바 呼嫩鮮原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槁離-貊高麗(몽골)-고구려도 물론 예외일 수가 없다. 이런 역사배경을 가지고 생겨나 전승돼온 몽골-고구려의 코리족 族祖 탄생설화이고 東明(Tumen)聖王 전설의 역사적 실체라 하겠다.또 한 가지 문제는 유라시아 전통제국은 특히 창업시각에서 보면 그 주류가 본질적으로 유목 주도 농경통합형 유목제국(Pastoral nomadic empire)-胡漢~韓體制 곧 유목 胡 주도 농경 漢~韓 통합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에 다시 「특히 주로 유목목초지대 툰드라·타이가·스텝으로 형성된 북유라시아는 거대한 [騎馴鹿] 순록·騎馬 양유목권을 이뤄서, 유목적 기동력과 타격력을 한껏 구사해 인류사상 최초로 팍스 몽골리카라는 세계경영체제를 창출해낼 만큼 역사발전을 크게 가속화할 수 있었다」고 첨언한다. 이런 생태조건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주로 유목 주도의 농경 통합이라는 유목제국형 제국이 창업돼 발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이상의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실로 Chaatang조선의 뿌리가 기마 양유목몽골이 아니고, 거꾸로 기마 양유목Mongol의 뿌리가 Chaatang朝鮮이다. 순록치기-Chaatang이 기마 양치기-Honichin의 오랜 시원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Gooli의 기원지 에르구네(多勿) 스텝이, Goolikhan(東明王)석상이 서있는 鮮(Sopka)과 原(Steppe) 양자의 접점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에 자리 잡게 마련이다.

<주제어>[騎馴鹿] ‘순록유목’, 騎馬 ‘양유목’, 한랭 고원 저습지대 수림툰드라~툰드라의 응달 「鮮」, 한랭 고원 건조지대 스텝-「原」, 한랭 고원 저습지대(Sopka: 鮮)의 붉은색(Olaan gerel) 해(Burqan: 紅太陽)-'순록',  아나톨리아 반도의 철기, 한랭 고원건조지대(Steppe: 原)의 순황금색(Altan gerel) 금태양-'羊', 시베리아(Siberia: 鮮卑利亞), 어미순록(Sugan: Сагаион-鮮), 카스피해와 바이칼호의 물개(Nerpa, Phoca Pusa sibirica; 세계 유일의 담수 물개), 스키타이~소얀(Soyon 鮮, 부리야트어 ), 「朝鮮」과 「鮮族」, 呼嫩鮮原, 米文平, 가셴둥(嘎仙洞), 可寒(Хаан)과 可敦(Хатан), 東明(Tumen), “騎馬[?]遊牧”, 騎馬射術, 유목 주도 농경통합형 유목제국(Pastoral nomadic empire)-胡漢~韓體制, 多勿(Ergune)都, “스텝과 해양”이라는 개방공간의 속도전과 정보전의 기동성 및 타격력, Chaatang朝鮮, 鮮(Sopka)과 原(Steppe).

Nomadic Roots, the Hulunbuir Mongol Steppe and the Nun River Plain (呼嫩平原), Steppe Pastoral nomadic empire, Empire maritime industry, Reindeer herding nomads, Sheep herding on horseback, Lichen(蘚: Niokq in the local language), ‘Sǒn(Seon)’ in Korean(鮮: Sopka in Russian: 小山), the Cho-Chao Tribe (朝族), the Sǒn(Seon) Tribe (鮮族), Maek Tribe(貊族), Ye Tribe(濊族), Chaatang: Reindeer herding nomads, the non-nomadic life in the T-shaped BaekduDaegan area, Qori(弓: Bow) Tribe, the Gooli (高句麗~‘高麗’=弓: Bow)Pastoral nomadic Empire, the empire of horse-riding sheep herders
유목태반, 호눈평원(呼嫩平原), 스텝유목제국, 해양산업제국, 순록유목, 기마 양유목, 선(蘚: Niokq, 다구르語), 선(鮮: Sopka, 러시아어: 小山), 조족(朝族)과 선족(鮮族), 맥족(貊族)과 예족(濊族), Chaatang(순록유목민)朝鮮, 백두대간 비유목지대, 코리(弓)족, 고올리(高句麗~‘高麗’=弓) 유목제국

Nomadic Chaatang reindeer herders Roots_Siberia Society No 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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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는 러시아의 남부, 몽골의 북서쪽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의 자치공화국입니다.

투르크 계통의 목축인으로 '우랑하이' 또는 '소요트'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족이름 '소욘'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투바인의 외모는 한국인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사얀 족의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만 보더라도 투바의 사얀족은 한민족의 한 뿌리이며,
한민족과 같은 혈통을 가진 잃어버린 형제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현재 사야족의 DAN를 검사하고 있는 I.A 자하로프 박사는
조선족이나 몽골족이 이 사얀족으로부터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강원대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예전 우리 한민족을 일컫는 '조선'이란 말은

 ‘선(鮮/순록의 먹이인 이끼)을 향해 가는'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조선'이라는 원래의 한문 이름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 시베리아 원주민 사얀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조선의 ‘선(鮮)'이 순록목초지(Ewen: 鮮)이고, 

그 선은 바로 몽골과 한국의 선조인 고조선(古‘朝鮮’)·선비(鮮卑)의 그 선(鮮)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몽골족의 기원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에서는

아직도 Korean을 선어(鮮語)로 말하고 선문(鮮文)을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라면 조선(朝鮮)도 한(韓)도 없이,  

몽·한이 모두 선족(鮮族)-‘순록치기’의 후예인 동족 ‘선(鮮)겨레'라는 것이지요.

 

투바는 그러한 ‘선(鮮)'의 기원지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지배선(64·역사문화학) 교수는

 “바보로 유명한 고구려 온달(溫達·?~590) 장군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2011년 5월 백산학보 제89호에

자신의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했다고 합니다.

 제 글은 연세대 지배선교수의 글과는 조금 배치되지만

바로 이 온달장군과 투바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바보온달의 원주지,,,투바공화국, 거기에 온달족이 지금도
살고있다.

에두아르 온달 (Ondar)
구글어스그래픽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투바사람들로 구성된 훈후르투라는 4인조 밴드가 전통악기와 스로트싱잉 창법으로 연주한 Chiraa-Khoor라는 노래인 것으로 압니다. 물론 온달 콩가르 올이라는 분도 투바의 유명한 전통음악가인것은 맞지만 그분이 부른 것 같지 않군요. 상당히 설득력있는 가설을 담고 있는 동영상인데 이것이 혹시 트집거리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이건욱 연구원의 논문 입니다.
원문에 나온 기호나 문자, 참고문헌등이 깨지거나 빠져 있으므로 원문전체를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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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치 샤머니즘 고찰
이건욱


〔요약〕

샤머니즘은 시베리아 제 민족들의 전통적 종교관이다. 샤머니즘은 그 안에 그 민족의 역사를 통해 면면이 내려온 정신·물질 문화를 담고 있다. 그래서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는 시베리아 민족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연구 테마이다.

본 원고는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 중 오로치인들의 샤머니즘을 연구하였다. 이들의 샤머니즘 전통은 이웃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집적된 것으로서 오로치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는 주변 여러 민족들과의 비교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에서는 오로치 샤머니즘이라는 큰 주제 아래에 샤먼의 입무, 샤먼의 장비들, 제의 장소와 샤먼의 나무 '뚜', 샤먼의 의례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비록 오로치 샤머니즘의 심오한 의미와 역할들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최신자료(1988년부터 1992까지의 조사)를 통해 현재 오로치의 샤머니즘에 대한 상황까지 살필 수 있었던 데에 의의를 둔다.


들어가는 말

1. 연구 배경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시베리아의 제 민족문화는 항상 우리의 원류로 추정되어 왔다. 하지만 시베리아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었고 막상 시베리아 지역이 우리에게 문호를 열었지만 원주민 수의 감소와 현지 언어 전공자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연구 보고서의 양은 너무나 적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우리 민족 무속의 연관성을 찾고자 하지만 제대로 된 번역서도 없는 처지에서 그저 여러 가지 가설만이 난무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본 고에서는 한국무속학회 5호에 실렸던 '투바 공화국의 샤머니즘 고찰'에 이어서 오로치 족의 문화, 특히 샤머니즘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무속문화와의 비교 연구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본고는 19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판된 '만주지역 민족의 민속(                           )'의 두 번째 시리즈인 베레즈니쯔끼(           )의 '오로치의 신화와 신앙(                            )'에서 발췌하여 번역, 편집한 원고이다.

2. 오로치 개관

오로치는 퉁구스-만주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이며 인구는 공식적으로 880여명이다. 하지만 필자(베레즈니쯔끼)가 1988년∼1992년에 직접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467여명에 불과하였다. 대다수의 오로치인들은 극동지역인 하바롭스끄 지역의 로쏘신, 자베트이 일리치, 마이스끼, 인노겐쩨예프 마을에 주거한다. 이외에 바비노와 바닌스크 지역의 다따, 우씨싸-오로츠스까야, 아꾸르, 뚤루취, 께나다 마을과 꼼소몰스크-아무르, 꼼소몰스크 지역의 노보예 옴미 마을, 울치스크 지역의 쏠론차, 침메르마놉, 깔린놉보크, 두다 연해주의 끄라스느이 야르와 악주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오로치족이 서구에 알려진 것은 프랑스 탐험가 J.F. 라뻬루즈에 의해서이다. 그는 1787년 유럽인들 중 처음으로 타타르 해협을 항해하던 중 자신들을 '오로차(     )'라 부르는 민족을 만났다.
오로치인들의 기원은 아무르강 유역과 사할린에 사는 민족들의 기원문제와 마찬가지로 단정지을 수가 없다. 최근에는 오로치인들의 기원을 복합(나나이, 울치, 네기달, 우데게이인들과 섞였다는) 기원설과 특히 나나이-울치의 요소가 좀 더 강하다는 기원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결국 이러한 복잡한 민족기원은 오로치의 다민족적인 종교 관념과 생활 습관 등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오로치인들은 크지 않은 씨족집단이 어울려 살고 있다. 오로치인들의 주 경제 생활은 채집, 해수류 포획, 사냥과 어업이다. 여름에는 물고기(연어, 송어, 곤들매기 등)를 잡으며 '볼로졔(       )'에서 산다. 겨울에는 모피를 얻을 수 있는 것과 유제류(有蹄類) 동물을 잡을 수 있는 강 상류로 간다.

겨울에는 나무로 만든 반쯤 땅에 묻힌 집에서 산다. 각 씨족들은 자신들의 경제 생활권과 묘지를 가진다. 가부장적인 사회로 경험 많은 노인에게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서 이들을 중심으로 씨족의 풍습이 엄격하게 이어진다. 이들은 인간이란 주변 생태환경의 한 분자이기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며, 자연을 파괴하고 무지한 동물남획을 하게 되면 자연 정령들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생업과 관련된 풍습에서 오로치의 샤머니즘이 발전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오로치의 샤머니즘은 이웃 민족들의 샤머니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19세기 초부터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오로치인들의 삶에 다른 민족의 문화요소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상인들이 타이가에서 모피동물들을 몰살하고, 강에 서식하는 물고기를 그물로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타타르 해협주변은 생명이 없는 죽은 지역이 되고 말았다. 이주민들이 저지른 생태 문화적 환경의 파괴로 인해 오로치인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게 되어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정신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대부분의 오로치인들이 세례를 받았으며, 결국 오로치인들의 전통적인 삶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소비에트 시절에는 협동농장에서 일을 하고, 획일화된 학교 교육 등으로 민족 정체성을 점점 잃어갔다. 90년대에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시베리아 출신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오로치인들의 전통문화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오로치 샤머니즘

1. 입무

오로치 샤먼은 부족사회 안에서 활동을 한다. 각 부족마다 한 명의 강한 샤먼과 그를 돕는 몇 명의 약한 샤먼이 있다. 샤먼은 남·녀 할 것 없이 누구나 될 수 있다. 샤먼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선한 편이다. 샤먼이 되려는 징조는 주로 18∼20세에 나타난다.

격한 감정의 소유자나 정신병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샤먼이 되기 쉽다. 또한 예술적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거나, 자기 암시를 논리 정연하게 하는 사람도 그러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최근에 죽은 샤먼의 수호 정령의 도움을 받아 무업의 길로 부름을 받는다. 꿈속에서 정령의 등장은 강력한 신경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이 사람은 병이 난다.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이 그를 가장 부족의 가장 강력한 샤먼에게 데리고 간다.

밤새도록 수 차례 치유의례를 받게 되지만, 무병일 경우에는 어떠한 차도도 없으며 오히려 발작만 더 심해진다. 이 발작 증세는 몇 달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이때 강한 샤먼은 환자를 도와줄 보조 정령들과 수호 정령들을 '구해(        )'주게 된다. 그리고 나서 입무 의례가 행해진다. 장차 샤먼이 될 후보에게 그를 도와줄 정령들이 그려진 옷을 입히고 바닥에 앉힌다. 이러한 상태에서 샤먼의 후보는 예전과 다른 정신상태가 될 때까지 앉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위 다른 정신상태로 전이가 되면 그는 갑자기 북을 잡게 되며, 샤먼이 의례를 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입무 의례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샤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샤먼이 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는 달리 성적인 간택을 받아서도 샤먼이 될 수 있다. 반대의 성(性)을 가진 영혼(일반적으로 최근에 죽은 샤먼의 수호 정령)과 미래의 샤먼은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성행위를 나눈다. 그 상대의 영혼은 미래 샤먼의 수호 정령이 되며 또한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될 다른 정령들을 내려준다. 이러한 성적 결합에 의한 샤먼의 선택은 나나이 족에게서 자주 보여진다.

2. 샤먼의 계급과 의례

오로치 샤먼은 크게 두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진다. 각 부족마다 두세 명의 '작고 약한' 샤먼(니티 싸마니,            )이 있다. 이들 작은 샤먼들은 아픈 사람을 고치기도 하는 등 경험과 실력 면에서 그리 떨어지지는 않지만 부족에서 큰 권위를 갖지는 못한다. 이들은 부족에 한 명밖에 없는 큰 샤먼이 의례를 행할 때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한다. 오직 큰 무당(싹드이 싸마니,             )만이 '우니(   )', '하냐바(      )' 또는 '하냘라(      )'와 같은 의례를 행하며, 태양과 달로의 여행과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샤먼의 기본 능력 중의 하나는 정령들과의 접촉이다. 특히 보호정령의 도움으로 악령들과 싸우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때로는 악령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악령을 속이거나 깜짝 놀라게 하며 죽이기까지 한다. 수호정령은 샤먼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기도 한다.

샤먼이 정령들과 접신을 하면 신체적·정신적으로 많은 긴장을 하게 되어 체력적으로 에너지의 소모가 크다. 따라서 정령들의 도움으로 얼마나 빨리 엑스타시에 빠지느냐는 샤먼의 내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의례 당일 저녁부터 샤먼은 엑스타시에 빠지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금식하며 정신 집중에 몰입한다. 의례는 보통 밤에 행해진다. 의례가 행해질 무렵이 되면 주위 사람들은 샤먼과 샤먼의 수호 정령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샤먼은 바닷물을 마시고 '바굴닉(         , 철쭉의 일종)'을 태운 연기를 온몸으로 흡입하며, '바굴닉'의 뿌리를 씹으며 정령과 접촉하기 위한 상태로 빠져든다. '바굴닉'은 휘발성 정유(精油)가 있으며, 마약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수면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샤먼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샤먼은 두 팔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나는 시늉을 하면서, 엄청난 힘으로 멀리 떨어진 물건도 한번에 달려가 가볍게 집어온다. 여느 샤먼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총을 쏘라고 하기도 한다.

후퉁까라는 샤먼은 까마귀로 변신하였으며,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의 등에 있는 몽고반점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태어난 아이를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넣으려는 듯한 행동으로 어린이의 영혼을 강력한 힘으로 붙잡아서 여자들 몸 속에 다시 넣는 것도 보여주었다. 샤먼은 의례를 행하면서 악한 샤먼을 죽이기도 한다. 때때로 오로치 샤먼은 하늘을 날아 아무르 강을 건너 나나이 족의 악한 샤먼들과 싸움을 하러 가기도 한다.

3. 샤먼의 장비와 제단

1) 샤먼의 장비

샤먼이 정령과 접촉하는 데 있어서 그가 입는 옷과 기타 장비들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도구들은 샤먼의 능력에 따라 부족 노인들이 만들어 준다. 일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의례를 행할 때에 샤먼의 장비를 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은 샤먼들은 자신들의 북과 북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례를 행할 시에는 평상복을 입으며, '일라우(    )'라는 작은 나무 조각들을 옷에 단다. 때때로 '씨싸(    )'라는 샤먼의 혁대를 매기도 한다. 큰 샤먼의 경우 무복은 몇 종류로 나뉘며, 보통 '하냐바'와 '우니'를 행하며 제물을 바칠 때 입는 옷 등이다.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 샤먼의 무복은 크게 짐승과 새의 형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곰이나 사슴과 같은 짐승 모양의 옷이 천상계라는 개념이 생긴 후, 나타난 새 모양보다는 더 오래된 스타일이라는 게 중론이다. 오로치 샤먼의 무복은 새 모양이다. 하지만 무복을 제외한 다른 소품은 짐승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북채의 등 쪽(안 때리는 쪽)에는 곰이나 호랑이가 그려져 있으며, 지팡이의 밑 부분은 곰 발바닥이거나 사슴 발굽 모양이다.

샤먼의 복장의 주요 구성요소로는 모자, 망토, 치마, 가슴가리개, 덧소매, 정강이에 대는 것, 신발 등이다. 하박(下膊)과 무릎, 복사뼈에는 '일라우' 다발을 매며, 모자 대신 '일라우'가 달린 관을 쓰기도 한다. 샤먼이 복장 일체를 다 갖춰 입은 모습은 샤먼에게 도움을 주는 정령들의 모습이라고 여긴다.

샤먼의 모자는 흔히 보는 모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우니'를 행할 때에는 머리장식으로 특별히 만든 '우니 아이우(       )'를 쓴다. 이것은 영양 가죽을 뱀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머리에 쓰기 쉬운 띠로서 위쪽이 열 십자로 매어져 있다. '우니 아이우'의 윗부분에는 사슴, 토끼 등의 모양으로 새겨진 조각이 올려져 있다. '하냐바' 때 쓰는 것과 비슷하지만 짐승 대신 새의 조각이 올려져 있다.

샤먼의 망토(쩨가 싸마니,            )는 평소 때 입는 망토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니'를 행할 때는 중국 비단으로 만든 망토를 걸치기도 한다. 망토의 뒷부분(등 쪽)에는 새 깃털이 7개의 다발로 되어 달려있다. 4개는 양어깨 쪽에, 3개는 척추를 따라 매달려 있다. 각 다발에는 부엉이, 독수리, 매의 깃털이 섞여 있다. 중국 비단으로 만든 망토는 뒷부분에 물고기를 잡는 새의 깃털을, 팔 쪽에 독수리 깃털을 꿰매어 전체적으로 새의 모습이 연상되도록 만들어진다.

뱀처럼 생긴 가죽 끈 양쪽 끝에는 두 개의 가슴가리개가 있으며, 이 끈을 목에 두르게 되어 있다. 두 개중 하나의 가슴가리개에는 심장처럼 생긴 두 개의 작은 입상이 달려 있다. 둥근 머리를 가진 정령 '만기(     )'와 뾰족한 머리를 가졌으며, 샤먼의 천상계 부인인 '부우쵸(     )'의 정령을 담은 '쎄베끼(      )' 이다. 이들은 샤먼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다른 가슴 가리개에는 뱀의 모양을 그려 놓았다. 이것은 아픈 사람들을 건강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한다.

샤먼의 덧소매(나꼽따,        )는 북을 칠 때 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덧소매에는 샤먼의 보조 정령인 뱀이 그려져 있거나 바느질로 꿰매어 표현되어 있다.

샤먼의 치마(호쎄,     )는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구분된다. 남성용은 바다표범의 모피로 만들어 졌으며, 옷자락은 색깔 있는 천으로 되어 있다. 여성용은 사슴가죽으로 만들어 졌으며, 옷자락에 생선 껍질로 물고기, 도마뱀, 뱀의 모습을 붙여 놓았다.

샤먼의 허리띠(씨싸,     )는 사슴가죽으로 만들었다. 허리띠는 앞으로 매게 되어 있고, 뒤쪽에는 원추형 쇳조각들로 만든 방울들이 달려 있다. 때때로 다른 종류의 금속 조각들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 방울 소리는 샤먼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내게 되어 있으며, 이 소리에 악령들은 놀라 도망가고 선한 정령들이 모여든다. 허리띠에는 구리로 만든 거울 '똘리(    )'가 달려 있기도 하다. 학자들은 이 똘리를 만주지역 샤머니즘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거울의 역할은 방패처럼 악령의 공격으로부터 샤먼을 지켜주는 것이다. 거울에 구멍들이 뚫려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구멍의 개수는 샤먼과 악령들과의 싸움의 횟수이다. 거울은 태양을 상징하기도 하며, 저승계(부니,     )로의 여행시 샤먼에게 길을 비춰준다.

샤먼 각반의 특징은 일반 보통 사람들의 각반에는 없는 박쥐와 지렁이, 뱀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이 각반대신 샤먼들은 형형색색의 긴 양말을 신기도 한다.
샤먼의 신발은 '운따 싸마니(           )'라 부른다. 이 신발도 일반 신발과는 달리 샤먼의 보조 정령들인 도마뱀, 뱀, 물고기, 개구리 등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때때로 의례 전에 샤먼은 악령들을 겁주기 위해 얼굴에 그을음으로 색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샤먼의 젖꼭지 사이에 사람머리를 그리며 복부 쪽에 개구리와 새를, 양쪽 갈비뼈와 허리에 뱀 한 마리씩을 그린다. 뱀 머리는 밑을 향한다. 오로치 샤먼은 문신을 하지 않는다.

샤먼의 북 '운뚜(    )'는 짧은 띠 모양의 나무테에 사슴 가죽을 붙인 것이다. 북의 안쪽은 십자가형 손잡이가 있다. 이 손잡이는 '운뚜 띠드줴니(            )'라 부르며 두꺼운 사슴 가죽으로 만들었다. 손잡이의 끝 부분은 뱀의 머리 모양이며, 북 테두리에 가는 가죽끈으로 고정시킨다(때때로 뱀의 혀로 고정시키기도 한다). 손잡이에는 '만기'와 '부우쵸'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가죽끈의 매듭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가운데에 금속 반지가 끼워져 있다.

북의 앞면에는 '도쏘(    )'라는 정령 또는 나는 뱀, 수탉, 도마뱀, 개구리, 용철갑상어와 쥐노래미 등 물고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큰 무당의 경우 북을 두세 개정도 가지고 있다. 의례 중간 샤먼이 자리를 바꾸거나, 이동시에는 특별한 케이스에 북을 담아 보관한다.

여자 샤먼일 경우, 북 대신 소리내는 장비(죠삐,       )를 사용한다. '죠삐'는 두 개의 나무판을 때려서 소리를 내거나, 하나의 나무판을 물고기 가죽으로 싸고 그 안에 작은 돌맹이를 넣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
북채인 '기씨(    )'는 북에서 여러 소리를 내게 하는 매개물이다. 그것으로 북의 중앙과 테두리 등을 때려서 각기 다른 소리가 나게 한다. 북채는 단단한 나무로 되어 있으며, 때리는 부분에는 수달이나 개 또는 사슴의 모피를 붙인다. 때리는 부분 뒤쪽에는 물고기 가죽으로 수호 정령들인 뱀, 여우, 늑대, 곰, 개구리, 도마뱀, 지렁이 등의 형상으로 붙여 놓는다. 이외에 토끼나 여우의 발을 바싹 말려서 북채를 대용하기도 한다.

샤먼은 여러 종류의 지팡이를 사용한다. 아픈 사람의 영혼을 찾기 위한 의례에서는 나무 지팡이의 끝을 뾰족하게 깎은 '꾸바라(      )'를 사용한다. '우니'를 행할 때에는 두 개의 지팡이를 사용한다. 그중 하나의 윗부분에는 머리 두개 - 곰과 부우쵸 정령 -와 지팡이 아랫부분은 곰 발바닥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머지 하나의 윗부분은 새와 만기의 정령, 아랫부분은 사슴 발굽 모양이다.

샤먼의 창인 '게다(    )'에는 곰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종려나무 창인 '라우이차(      )'는 '만기'의 머리와 뱀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하냐바' 의례 때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 '부우쵸'의 모습이 나무에 새겨진 갈고리를 이용한다.

점을 칠 때 이용되는 돌을 '한고우끼(        )'라고 한다. 이 돌은 어떤 악령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없어진 물건이 어디 있는지 날씨가 어떻게 될지 등을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돌은 옆에서 보면 사람얼굴처럼 생겼기 때문에 얼굴 부분인 '도(  )'와 입술 부분인 '호무(    )'로 나누기도 한다. 이 돌은 나무에 묶인 끈으로 매달려 있으며, 나무 끝에 '부우쵸'의 얼굴을 새겨져 있다.

샤먼은 나무나 금속으로 자신의 보조 정령들의 모습을 직접 만든다. 이것을 '쎄베끼 싸마니(             )'라고 한다. '쎄베끼 싸마니'는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이며, 최근에는 '쎄베끼 싸마니'에 모피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호랑이 입상인 경우, 호랑이 모피는 샤먼조차 손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하기만 한다. 사람 모양 입상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한다. 몇몇 입상들 머리에 새나 곰 모양을 조각해 넣기도 한다.

제의를 지낼 때 샤먼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깔개(흐이쌰,      )를 바닥에 깐다. 동물 모피로 만든 깔개는 '꾸말란(       )'이라고 달리 지칭된다. 만약 샤먼이 '꾸말란'을 준비하지 못해서 제 지내는 집의 주인 것을 사용했다면, 제의 후에는 샤먼의 것이 된다. 이는 샤먼이 쓰던 물건을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이 금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제의 장소

샤먼이 제의를 올리는 장소에는 자신의 수호 정령과 보조 정령들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한 나무기둥 몇 개, 이른바 샤먼의 나무라 불리는 '뚜(  )'를 준비한다. 종종 나무 가지가 두 갈래로 된 생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드물지만 잘 마른 나무를 사용할 때도 있다. '뚜'에는 보조 정령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거나, 새겨져 있다. '뚜' 위에는 나무로 깎은 독수리나 오리를 올려놓는다.

이것은 거대한 철(鐵) 새의 모습을 한 악령 '꼬리(    )'를 상징한다. '뚜' 앞에는 통을 가져다 놓는데, 이 통에다 '바굴닉'을 태워 연기를 내기 위함이다. 큰 샤먼과 작은 샤먼의 제의 장소의 준비는 차이가 있으며, 큰 샤먼만이 제대로 된 제단을 꾸밀 수 있다. 또한 제의 장소는 일생동안 몇 번이고 '뚜'나 향로를 새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담당 샤먼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들을 벨 수 없다. 아래의 '뚜'는 마리아라는 여자 샤먼의 예전 제단이다.

마리아는 개, 수탉, 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나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뒤쪽으로 '만기(동그란 머리)'와 '부우쵸(뾰족한 머리)'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바로 앞에 한 개의 기둥이 횡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횡목에는 샤먼의 지팡이가 기대어져 있다. 그리고 그 앞쪽에 두 개의 기둥은 뭔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서 있다.

다음 그림은 마리아 샤먼의 새 제단으로 조사 당시 5년 전에 만들어 진 것이다.

위 부분의 가지가 양쪽으로 갈라진 나무를 '부우쟈(      )'라고 한다. 가지 양끝에는 얼굴이 있으며, 그 위에 '꼬리'의 암·수가 올려져 있다. 양끝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의 왼쪽에는 물감으로 '쎄우(   )', 즉 태양과 '아버지 북'인 '아미네 운뚜(          )'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가지에는 달('베'/  )과 '어머니 북'인 '아뇨 운뚜(        )'가 그려져 있다.

북 밑에는 박쥐의 혼이 그려져 있다. 나무의 줄기가 갈라지는 부분에는 모자를 쓴 샤먼을 그리고 그 위에 소나무 등지에 나는 구과(毬果)가 그려져 있다. 거기에서  약간 밑으로 둥근 테가 끼워져 있다. 이 테 위에는 새 6쌍이 놓여있고, 오른쪽으로 작은 나무로 기대어 놓은 그늘진 공간에 샤먼의 영혼인 '두쌰 마씨(         )'가 조각되어 놓여져 있다. 테의 아래 부분에는 물고기(붕어나 잉어) 모양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는 용(무두르,      ) 모양이다.

'부우쟈'의 양옆 끝으로 '만기'와 '부우쵸'의 얼굴이 새겨진 기둥 두 개가 있다. 사각형의 기둥의 머리 위에는 곰 형상이 올려져있는 것은 '두운따 마씨(           )'이다. 이 세 기둥에는 긴 횡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횡목에는 흰 수탉 한 마리가 제물로 매달려 있다. 횡목 앞쪽으로 샤먼의 지팡이가 가로로 매달려 있다. '두운따 마씨' 앞에는 작고 뾰족한 지붕 모양으로 창고 역할을 하는 것이 세워져 있다.

창고의 내부 가운데에 사람모양의 '두운따 마씨' 입상과 오른쪽에 공과 비슷한 '두운따 야비(          )'가 있다. 기타 샤먼의 모자, 질병 퇴치 부적 등이 놓여있다. 제단 의 맨 앞에 놓인 두 개의 장식물은 향로(헴프,      )이며, 왼쪽 향로에 손잡이처럼 뾰족하게 달려 있는 것은 동물 머리 모양으로 조각한 것이다.

아래의 것은 바실리라는 샤먼의 제단으로 위의 마리아 샤먼의 것보다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굵은 기둥인 '무끄데니(       )'의 두 개 모두 머리부분을 안으로 움푹 파서 '부우쵸'를 안치하고 있다. 기둥의 아래쪽 놓인 옆으로 긴 나무 상자 내부에는 '쎄베끼' 4개가 들어있다. 오른쪽 나무 한 그루에는 제물용 수탉이 걸려있다.

마찬가지로 제단의 맨 앞에 향로 세 개가 세워져 있다. 그 중 가운데의 것은 호랑이와 뱀, 그리고 '부우쵸'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으며, 양쪽 두 개의 향로 각각에는 새와 두꺼비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4. 샤먼의 정령들

1) 샤먼의 수호 정령

오로치인들은 강하고도 선한 샤먼의 수호 정령은 '엔두리(      )'와 그의 부인인 '엔두리 마마챠(             )'로 여기고 있다. '엔두리'는 선하면서 강력한 정령으로서 하늘의 주인이다. '엔두리'는 긴 수염을 한 체격 좋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오직 큰 샤먼만이 볼 수 있다고 한다.

2) 샤먼의 보조 정령

선하고 악함을 불문하고 샤먼들은 모두 보조 정령들을 가지고 있다. 악한 샤먼은 흑담비나 족제비 등의 맹수들을 보조 정령으로 모신다. 선한 샤먼은 악한 샤먼보다 많은 보조 정령을 가지고 있다. 호랑이와 곰은 강력한 샤먼의 보조 정령이다.

보조 정령은 아니지만 '부씨부(      )'라는 정령들이 있다. 선악의 개념을 잘 모르며 갑자기 나타나서 샤먼들을 놀라게 한다. 샤먼들이 치료 의례를 행하면서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부씨부' 정령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라 하기도 한다.

5. 샤먼의 의례

1) 치료 의례

오로치인들은 가벼운 질병은 스스로 치료를 한다. 하지만 중병일 경우 샤먼을 찾아가 병 치료를 의뢰한다. 오로치 샤먼들은 치료 능력은 매우 유명해서 인근 러시아 농민들까지 찾아와서 주문할 정도이다. 샤먼이 주문을 받게 되면 장소가 어디이건 상관없이 치료를 해줘야 한다. 부득이하게 장소가 멀어서 가기 불편한 경우에는 의례를 부탁한  쪽에서 급사를 보내 정중히 모셔간다.

오로치인들은 나쁜 정령이 사람의 몸안에 들어와서 혼(하냐,     )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발병하며, 샤먼이 나쁜 정령을 달래거나 속이든지, 아니면 겁을 주든지 해서라도 반드시 '하냐'를 찾아와야 병이 낫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샤먼은 의례를 행하기에 앞서 어떤 악령이 환자의 하냐를 앗아갔는지를 말해줄 보조 정령들과 접신한다.(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호 정령과는 접신하지 않는다.) 의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환자의 친척들이 샤먼의 시중을 들게 된다. 샤먼의 몸과 샤먼의 옷을 '바굴닉'으로 문지르며, 담배나 물 등을 가져다 준다. 아래의 내용은 병을 일으킨 나쁜 정령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한 샤먼의 주문이다.


      ,                                         
도와주고, 안타깝게 여겨다오
(       )        병 없이
잘 살수 있게 도와다오
다시 한번 도와다오
다시 한번 안타깝게 여겨다오
나쁜 것 없이 잘 살 수 있었건만
(  )도쏘가 듣지 못하고
꼬로가 이간질 할 수 없게
내가 병을 노래하는 동안
난 어떤 병인지 모른다네  
          ?
곰에게로부터 온 것인가?
          ?
바다로부터 온 것인가?
         ?
호랑이로부터 온 것인가
악마가 보지 못하게 해다오.


이 주문이 끝나면 샤먼은 '쎄베끼'에게 음식 등을 대접한다. 그리고 다시 짧은 주문을 올리고, '한고우끼'에 얼굴을 대고 주문을 외운다.
샤먼이 환자의 몸에서 악령을 끄집어내면 미리 준비해 놓은 저장함(뿌당꾸,        )으로 옮겨 넣고, '뿌당꾸'를 조각조각 내거나 불질러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다른 '뿌당꾸'를 준비해서 다시 시작한다. 아무리해도 치료되지 않는다면 보조 정령(또는 수호 정령)이 샤먼의 꿈에 나타나 치료 방법을 알려준다. 꿈에서 깬 샤먼은 다시 '뿌당꾸'를 준비해서 악령을 끄집어 낼 때까지 의례를 행한다.

샤먼은 좀 더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 직접 만들었거나 전임 샤먼으로부터 물려받은 '쎄베끼'나 무복의 일부를 이용한다. 하지만 샤먼의 실수나 능력 부족으로 환자가 차도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샤먼은 아주 심한 중병으로 결핵, 여성의 불임(간혹 불임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등과 같은 경우는 치료를 기피한다.

만일 샤먼이 병이 낫을 경우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므로, 다른 샤먼에게 치료를 부탁하거나 자신의 수호 정령이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탓한다. 그래서 병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적을 지니고 다닌다.

2) '하바냐'

하냐바는 오직 강한 샤먼만이 할 수 있다. 하바냐를 행하는 샤먼은 바다표범, 물고기, 보트, 고래, 강치 등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쎄베끼'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또는 환자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암바야, 암바야 영혼을 물에다 숨겼느냐, 땅에다 숨겼느냐"하며 영혼을 찾는 동작을 반복한다. 마침내 환자의 영혼을 발견하면, 샤먼은 갈고리로 영혼을 붙잡아서(하냐 쟈랄리,             ), 영혼을 삼키고는 환자의 입에 불어넣는다.

3) '우니'

봄과 여름에 강한 샤먼은 일년에 두세 번 정도 '우니'를 행한다. '우니'는 수호 정령과 보조 정령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례이자, 영적 능력을 배가시키고 마을을 악령으로부터 정화시키는 의례이다. '우니'는 '우네이니(      )'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눈과 얼음이 녹는 시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니'는 오로치 샤먼들에게 가장 큰 의례이다. 샤먼들에게는 생일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축제나 다름없다.
샤먼은 '우니'를 준비하기 위해 버드나무 줄기 등으로 옷을 만들어 술을 달고, 의례 보조자 18명을 선임한다. 보조자들은 두 패로 나뉘며, 한 패는 '만기'의 정령들이며 다른 한패는 '부우쵸'의 정령들이며, 각 무리에 맞춰서 옷을 입는다. 보조자들 중에는 약한 샤먼도 포함되어 있는데, 강한 샤먼에게서 힘을 얻어내기 위해서 참가한다.

샤먼은 양쪽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의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인 '오댜니(     )'를 지도자로서 임명한다.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샤먼의 뒤에서 참관할 수 있다. 참관자들은 제일 좋은 옷으로 깔끔하게 차려 입는다.

우니는 샤먼의 처소와 주변 가정들을 악령으로부터 정화하는 '축빠르 꿀리끄타하니(                )'로 시작된다. 샤먼은 북을 치고 기도문을 외우며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집으로 향한다. 집 앞에 도착하면 샤먼은 여러 물건들을 들고있으므로 '오댜니'가 앞에 서서 문을 연다. 샤먼이 문지방을 밟고 들어가자마자 집 주인은 샤먼에게 '바굴닉' 잎을 우려낸 '쏜께 무니(          )'와 파즙인 '쏘드이 무니(         )'를 다른 그릇에 담아 대접한다. 샤먼은 먼저 '쏘드이 무니'를 한 모금 마신 후, '쏜께 무니'를 또 한 모금 마신다. '바굴닉'의 가지와 나머지 잎은 화로에 태운다.

손님들은 슬슬 화로 주변에 앉기 시작한다. 샤먼은 북을 치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화로 주위를 태양이 도는 반대방향으로 도는데, 태양이 도는 방향으로 돌게 되면 태양이 금방 저물어 죽음의 세계인 '부니'로 가게 되기 때문에 매우 금기시 한다. 샤먼은 상체를 흔들며 돌며 '호롤리니(        )'라는 춤을 춘다.

샤먼의 몸놀림에 따라 허리띠에 매달린 쇳조각들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좋은 정령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의례를 행하는 집 주인에게 복을 가져다 주고 악령을 내 쫓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샤먼은 추던 춤을 멈추고 화로 옆에 앉는다. 이때 샤먼의 창과 '만기' 무리는 샤먼의 왼쪽, '부우쵸' 패와 종려나무는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집 주인은 참석자들에게 죽, 생선, 고기 수프 등을 약간씩 대접한다. 음식을 먹고 나면 '오댜니'는 문을 열고 샤먼을 앞세우고 모두들 나간다. 샤먼은 집 주위를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며, 보조자들 역시 샤먼의 뒤를 따라서 같이 돈다. 그리고 다른 집으로 다시 가서 같은 의례를 진행한다. 이런 식으로 부족의 모든 집을 도는데, 중간에 날이 어두워지면 어느 한 집을 골라서 샤먼과 그의 일행들이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 집에서 야간 의례를 행한다.

야간 의례는 보통은 샤먼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시작한다. 그 다음 약한 샤먼이 진행하고, 맨 마지막에 큰 샤먼이 의례를 진행한다. 의례의 시작은 춤이다. 춤은 특별한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춰도 된다. 하지만 화로 주위를 세 바퀴 이상 돌 수 없다. 큰 샤먼의 의례는 2∼3시간 정도 걸린다. 선한 정령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추종자들에게 복을 부탁한다.

샤먼의 의례가 끝나면 모두 잠자리에 든다. 이날 밤은 모두에게 성행위의 자유가 주어진다. 이 날밤의 성행위는 삶의 에너지를 키워주며, 좋은 정령들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적 자유는 샤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아침이 되면 간단히 차를 마시고 샤먼이 지정한 다른 집으로 간다. 겨울에 강가나 호수를 지날 때에는 개썰매를 타고 건너거나 여름에는 보트를 이용한다. 이러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경우, 샤먼이 탄 썰매나 보트가 항상 앞장서며 샤먼은 북을 치며 큰소리로 기도를 한다. 보트로 이동할 경우에는 향로인 '헴프'에 '바굴닉'을 넣고 계속 태운다.

이 향로는 새 모양(독수리, 오리 등)으로 생겼다. 보트를 타고 가서 육지에 내릴 경우 땅을 처음 밟을 수 있는 것도 샤먼이며, 그 뒤에 '오댜니'가 내릴 수 있다. '우니'는 다른 큰 샤먼의 구역을 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샤먼의 구역에서 '우니'를 행하는 것은 월권행위로, 이는 곧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례를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샤먼은 곧바로 자신의 '뚜'로 가서 수호 정령과 보조 정령들에게 개, 돼지, 수탉을 제물로 바친다. 이들 제물은 먼저 방망이로 두들겨 팬 다음, 칼로 심장을 찌른다. 이때 제물에서 나는 피는 종이 등에 묻혀 나중에 장대 위에 묶어서 달아 두던가, '쎄베끼'의 입술에 발라준다. 재물 중 개의 시체는 샤먼이 '뚜' 주변에 묻어준다. 그리고 나서 뜨거운 '바굴닉'을 손에 들고 무덤 주위를 9번 돌며 기도를 올린다. 돼지와 수탉은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나눠 먹는다. 하지만 샤먼은 오직 코, 심장, 신장, 간, 귀, 꼬리 약간씩만 먹을 수 있다.

나가는 말

위에 서술한 의례 외에도 샤먼은 산모를 정화 시켜준다든지, 미래를 예언한다든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등 많은 일을 한다. 이미 위에 서술했듯이 오로치 샤먼의 권위는 이 지역에 이주해 간 러시아 농민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때때로 별 것 아닌 것을 도와달라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짝사랑하는 처녀와 결혼하게 해달라는 식의 주문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으나 이에 응하게 되면 샤먼이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샤먼에게 감사를 표할 때는 항상 샤먼이 자신들의 정령들과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으로 해야한다. 일반적으로 개나 망토를 선물하며, 가죽끈은 필수이다. 만약 샤먼이 비싼 선물을 받았다면 '엔두리'가 죽음의 형벌을 내린다고 한다. 샤먼은 일반 사람들처럼 다른 생계 수단이 있기 때문에 의례 대가로 받은 것만으로 생활하지 않는다.

1930년 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로치인들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의례를 행할 때 샤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한 말다툼이나 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심판관 역할까지 맡았다고 한다. 오늘날 샤머니즘은 오로치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는 있으나, 중요한 종교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샤먼은 부족의 몇몇 의례에서 소외되며, 곰 축제, 쌍둥이 의례의 진행자로서 참석할 수 없다.

이렇게 지속되어 오던 오로치 샤머니즘이 변하게 되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사건은 19세기 중엽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이다. 이때 대부분의 오로치인들이 세례를 받고,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러시아 이름은 오로치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큰 샤먼인 니꼴라이 아꾸닌이 선교사에게 두 개의 좋은 이름을 요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져 온다.

십자가(쎄베끼)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샤먼들에게 널리 퍼져있으나, 러시아 정교회는 샤머니즘에 비해 민중들 속 깊이 침투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 사건은 1930년대 중반 공산주의 권력에 의해 오로치 샤머니즘이 탄압을 받게 되어 샤머니즘을 비롯하여 오로치의 전통문화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붕괴된다.

소련이 붕괴되고 각 민족들이 자 문화의 원형을 찾고자 노력중이다. 하지만 오로치인들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오로치인들의 숫자가 적고, 전통적인 경제활동이 변화됨으로써 더 이상 옛 문화의 도움이 필요치 않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언젠가 이들 내부에서도 자 문화의 원형 찾기에 대한 운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당당했던 오로치 샤먼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 바이칼은 무엇인가?  (월간중앙 2004년 6월호)

     -  주채혁(강원대 교수, ‘바이칼포럼’공동위원장)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는 거대한 화산지대이다. 약 13,000년전의 후기빙하기 이후로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비교적 고도가 낮고 온천수가 솟아나는 등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이며 과거 유라시아 북방민족의 유전자 집단이 이루어지고 몽골리안의 창세기가 쓰여진 장엄한 역사무대이다.이곳은 바이칼 서부와 북부의 중간에 있는 알혼(olkhon)섬과 건너편 동쪽의 바르구진섬,그리고 서남단을 감싸도는 알타이산맥에서 바이칼호로 길게 뻗은 거대한 사얀산맥이 이르쿠츠크가 있는 그 서남단을 감싸안고 있으며 이어서 남동부로 뻗어 올라가며 코산맥, 즉 붉은 가지 버드나무(紅柳)산맥이 울란우데가 자리잡고 있는 바이칼 동남부를 감싸안고 있다.

 몽골-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메카인 알혼섬에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같은 바이칼 원주민  코리족의 시조 탄생 전설이 서려있는 부르한(burkhan) 바위가 있고 바르구진섬과 분지에는 코리족 시조의 부인이 탄생한 부족이 자리잡고 있어서,코릴라르타이 메르겐 아버지와 바루구진 고아 어머니가 짝지어 몽골의 여시조 알랑고아 탄생을 주도하는 역사 배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바이칼의 사얀(sayan)산맥은 조선의 선(鮮)과 직결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장의  문왕지십(文王之什) 황의(皇矣)구절에 ‘소산(小山)을 대산(大山)과 구별하여 선(鮮)이라’ 주석을 붙인 점과 청나라 고증학자  정겸(丁謙,)의 『후한서오환선비전 지리고증(後漢書烏桓鮮卑傳 地理攷證)』에 ‘대선비산(大鮮卑山)의 원형이 지금의 알타이-사얀산맥 지대에 있다’ 고 한 점을  미루어보아 확실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붉은 가지 버드나무 산맥은 곧 고구려 건국신화의 영웅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부인을 성모(聖母)로 삼는 붉은 버드나무 부르한(不咸)신앙과 접맥돼 있어 부르한 중의 부르한이 좌정하고 있는 알혼섬 부르한 바위와 재미있는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부르한은 ‘밝’이 아니고 ‘붉’이다.북방민족이 태어나고 죽어 돌아가는 ‘붉은 산(紅山,赤山)’은 조상들의 공동묘지이다.그래서 칭기스칸의 무덤도 부르한 산에서 찾고 있다.투르크-몽골말로 하느님이란 뜻이다.여러 전설들이 이 산맥에 주로 깃들어 온 점은 아주 재미있는 일인데, 구릉과도 같은 밑밑한 소산(小山)인 선(鮮)이 위주인 몽골-시베리아지대에서 이 산맥만은 유달리 한국의 대산(大山)을 닮아,습기가 적고 아주 키가 작은 스텝초원의 난쟁이 민들레를 찾지 못한다면 꼭 한국에 와 있다고 착각할 지경이다.이 산중의 앙기르 마을에서 코리 부리아드말을 지키고 있는 원주민을 만나 느끼는 감격 또한 우리에게는 감회가 새롭다.그런데 결국 이 모두의 존재의의는 그 역사창조의 주체인 바이칼 코리족을 탄생시키는 데로 집약된다.‘코리’는 과연 무엇이며 그 사실상의 역사배경은 어떠한가?  

바이칼은 몽골-시베리아 고원의 스텝과 타이가 및 툰드라가 모두 만나는 허브(hub)요 개활지로,이 지대를 장악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의 어떤 집단이나 개인도 이곳에 오래 둥지를 틀고 살 수 없었다.험준하고 광활하면서도 오비강과 예니세이강을 끼고 있어서 비교적 비옥한 거대한 타이가 스텝지대인 알타이 사얀산일대는 선진문명 지대인 서아시아에 젖줄을 대고 신흥세력이 기반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둥지다.여기서 자라나 성인이 된 집단이 무한경쟁이 요구되는 바이칼 벌판으로 진출해 인력과 식량을 확보하며 고대유목제국으로 나아가는 기틀을 형성했던 것이라 하겠다.따라서 고대제국 성립을 기점으로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며 이 지대의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보려면 자연스럽게 한민족 북방기원설이라 할 스키토-시베리아 기원설을 읽게 마련이다.

종래 한민족에 관해서는 북방기원설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북방에서는 몽골이란 스텝세계제국이 인류사상 최초로 창업됐으며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해양세계제국이 생겨나고 제공권 확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구촌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점으로 보더라도,주류 한민족 형성의 역사적 태반은 역시 북방이라야 한다. 더군다나 인류사상 최초로 야생식물의 작물화와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지역이 서아시아임은 고고학이나 생태학, 유전학의 연구성과로 확인되고 있으며,  식량생산이 시작된 선사시대 이래로 이것이 주로 “스텝의 길”-“몽골리안 루트”를 통해 이동했음을  밝혀냈다.

유라시아대륙은 남북축으로 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와 달리 동서축으로 돼 있어서 등온대를 이룰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를 중심축으로 하는 유목적 기동력의 가세로 사람과 생산력  및 전투력이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자명했다. 유라시아대륙이 다른 대륙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의 스텝세계제국도 여기서 창출됐고,근대 영ㆍ미 해양세계제국 또한 그러했다. 한민족의 북방기원론이 이런 생태환경의 발전과정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스키토시베리아 기원설이나 내몽골의 오르도스 기원설은 다 이런 생태환경을 그 역사무대로 삼고 있다.[지도]  

 백두산 호랑이가 시베리아 호랑이와 생태유전학적으로 상통된다면, 백두산 조선족 또한 그럴 수 있다. 고원지대에서 고원지대로 돌아다니며 사는 동물의 생태상 그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백두대간은 그래서 민족의 기원을 추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역사적 연구 대상이다.  한민족의 ‘유목사적 시원’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중원지역보다 오히려 더 먼 알타이 - 사얀산맥이나 티베트고원이 역사적으로 더 밀접하게 접맥(接脈)되어 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는 스텝-타이가-툰드라지대로 이루어진 거대한 벌판이다.  아시아대륙의 1/4이고 지구 육지면적의 1/10이다.  침엽수림 위주로 지구상에서 가장 드넓은 타이가라는 '숲의 바다'는 수많은 짐승들의 서식지다.  이런 생태권은 한편으로는 대서양까지 이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북아메리카지역에 이른다.  여기에서 '시베리아의 황금'이라는 '모피'(fur)가 주산품인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고원지대 「모피의 길」을 따른 이동루트는 당연히 백두대간과 접목된다.  

아울러   「강해(江海)루트」로 태평양, 북극해와 대서양으로도 그 권역이 이어지는 시베리아에는 수산모피자원 또한 육상모피자원 이상으로 풍요로운데, 이동 주류 중 하나가 오랜 기간에 걸쳐 3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한반도를 기반으로 생활을 지속해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타이-사얀산맥에서부터 고원지대를 따라 뻗어내려 '맥국(貊國)'이라는 「산달(山獺)-너구리나라」가 춘천에 있었고 바이칼호와 거대한 동ㆍ서사얀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예니세이강의 지류 퉁구스하로부터 저습지대를 따라 이어 내려온 '예국(濊國)'이라는    「(숫)수달(水獺)나라」가 강릉에 있었다.  

그러니까 역사를 역사자체로만 접근하여,고대국가의 형성지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형성주체의 유래처나 기원지 곧 역사적 태반을 추구하려는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한민족 형성의 주류는 농경기원이 아니고 순록유목기원이다. 따라서 장백산맥같은 이른바 큰산(大山)이 주무대가 아니고,그 건너편의 대ㆍ소ㆍ외흥안령으로 이어지는 시베리아 스텝-타이가-툰드라지대의 구릉과도 같이 끊임없이 펼쳐진 작은 산(小山)은 순록의 겨울 주식인 선(蘚:niokq=이끼)이 나는 선(鮮), 사얀, 소욘(soyon)이다. 

순록의 먹이인 이끼는 생태상 습기가 많은 응달 지역에 잘 자란다.  이끼(蘚)가 더 잘 자라나는 새로운 목초지인 선(鮮)을 찾아(朝)서시베리아인 알타이-사얀산맥지대에서 태평양쪽으로,곧 ‘이끼의 길(lichens road)’을 따라 이동해온 순록유목민이 바로 조선(朝鮮)겨레다. 결과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해 왔지만 해를 쫓아온 것은 아니다.

남러시아 스텝의 순록유목민은 이끼의 길을 따라 대서양 쪽으로 북향해 가기도 했다.[사진1]<선(鮮=소산):대흥안령 북부 흑룡강성 쿠마하 부근>;[사진2]<선(蘚=niokq):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맹 근하(根河)시 아룡(阿龍)산> . 올 삼월에 국립중앙박물관 초청으로 온 아.오치르 몽골역사박물관장과 체벤도로지 고고학실장은 몽골-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순록유목민이 알타이-사얀지대의 소욘(鮮)과 코리(高麗: [사진3 시베리안 골드:알타이 스키타이 돌무지널무덤 출토 순록 유물])족이고 동쪽에 있는 순록유목민이 베링해에 이르는 시베리아 끝자락 땅과 캄차카반도에 사는 축치와 코리야크 자치주의 원주민들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런 몽골-시베리아의 역사를 낳아온 자궁이 바이칼이다.스텝-타이가-툰드라가 다 모인 북방유목민족사의 허브다.코리족의 시조 탄생지 알혼섬이 바이칼호에서 가장 큰 섬으로 자라잡고 있고,조선산이라 할 사얀(鮮)산맥이 병풍처럼 서남으로 바이칼호를 감싸안은 데다가 부르한중의 부르한이 좌정하고 있는 야외 신단이 알혼섬 부르한(不咸:burkhan[사진4:봉우사상연구소 정재승 소장 제공])바위에 차려져 있다.지금도 부리아드 코리족 샤먼이 “나무꾼과 선녀”라는 코리족 시조 탄생설화를 담은 무가(巫歌)를 춤을 곁들여가며 여기서 부르고 있다.

이는 알타이-사얀산맥에서 바이칼호 알혼섬-칭기스칸의 태생지 헨티산-대흥안령-백두산-금강산의 감호(鑒湖:고대 투르크말 무당-하느님[사진5:강원도 북고성군 민통선내 소재;양양문화원 부원장 최낙민 작가 제공])에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여기서 감호는 고대 투르크말로 keam이며 하느님 혹은 무당이란 뜻이다. 때마침 과기부에서 는 동북아민족 기능성 게놈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코리족의 분포와 역사적 이동루트를 구체적으로 연구-추적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필자는 지난 해 여름 “바이칼의 후예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수행중인 어느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바이칼호는 한민족의 성수요 사얀산은 한민족의 성산“이라고 거센 바이칼 호반의 바람을 맞으며 외쳐댔다.초기에 목축과 농경을 함께 하던 한민족과 유목을 위주로 하던 몽골족은 소흥안령 상단 징키르강을 축으로 어느 시기에 이르러 동서로 분기됐다.

북방유목민족 형성의 태반은 이처럼 바이칼 지대이지만 고대국가의 창업은 태평양 해안선을 낀 비옥한 아무르강 남북을 아우르는 대만주권역 곧 바이칼 동남부 몽골-러시아 국경 언저리에서 동북방으로 뻗어 올라간 야블로노보이-스타노보이라는 외흥안령과 몽골-만주와 러시아-만주를 가르는 경계선을 중심으로 뻗은 대ㆍ소흥안령 지역에서 대흥안령 북서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의 훌룬호수와 부이르호수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접맥되면서 비롯됐다.

물이 북류하여 북극해로 흘러드는 바이칼 몽골고원권과 이 대만주권역 이북과는 달리 물이 동류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거대하고 비옥한 이 ‘대만주권역’에 진입해 목농생산과 해상무역에 종사하고,대산지대인 천험의 요새, 장백산맥에 둥지를 틀면서 비로소 조선과 부여-고구려가 고대정복제국으로 창업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코리’란 과연 무엇인가? 동몽골에서는 고올리라고 하고 한문으로는 고리(槁離),구려(句驪),곽락(郭洛<guo luo: 현대 중국어 발음>)과 고려(高麗)라고도 적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코리는 ‘순록’이다.투바대학교의 엔.베.아바예프교수는 『몽골비사』9절의 거러거(göre'etei)를 이미 순록으로 보고 있었고 아.오치르 관장은 만주지역의 원주민 오룬춘의 오룬이 옛 문헌에는 코룬(Xorun)으로 되어있다며 코리를 치는 순록유목민이 오룬춘이라는 족명의 본뜻이라 했다.

내몽골의 육사현(陸思賢)교수는 ‘선비곽락대’ 연구 논문에서 ‘곽락’이란 선비족 무덤 출토유물인 허리띠 버클, 곧 대식(帶飾)의 분석을 근거로 볼 때 순록이라고 결론지었으며,마쓰모도 히데오교수는 코리야크 족명의 코리가 그들의 말로 순록이라는 뜻이며 실제로 그들은 오랜 세월 한결같이 순록유목을 주된 생업으로 해오고 있다고 했다.순록은 만주 퉁구스족의 에웽키말로 ‘오롱’이며 오룬춘말로 ‘올렌’이고 다구르말로는 ‘오른 복’이다.러시아어로는 이를 따라 ‘셰베르늬(북방의) 알롄’이라 한다.

이는 ‘오로오’라는 ‘길들지 않은’이란 뜻의 낱말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순록(馴鹿)은 원주민들에게는 한문 이름자와는 정반대로 ‘길들지 않은 ’사슴(不馴鹿)이 되는 것이다.투르크-몽골말로는 또 ‘차아 복’이라고도 하는데 차아는 ‘…을 향해’라는 뜻으로 조선의 조(朝:chao)와 뜻이 같다.지린(吉林)성의 토착 원주민인 조족(朝族)도 본래 순록유목민이다.

그런가 하면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맹 선비(鮮卑)족 원주지에서 한국인을 선어(鮮語)를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작은 산 선(鮮)에서 이끼 선(蘚)을 뜯기며 사는 순록유목민을 지칭한다.목초지 선(鮮)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다.마치 목초지 옹크(onk)에 사는 순록유목민을 ‘에웽키’라 한 명칭관행과 상통하는 사례라 하겠다.

모두 몽골-시베리아 원주민의 토박이말 이름들이고,이 지대에서 유일하게 처음으로 고대 유목제국의 틀을 주도적으로 마련하던 순록유목민에 관한 호칭이다.이처럼 고구려의 족명 내지는 국명인 고려(고올리)는 코리야크족이나 오룬춘족,다구르족이나 투르크-몽골족의 말로 “순록”이라는 뜻이다.당연히 고구려말로도 코리(高麗)다.‘몽골’은 맥(貊)+고려 곧 너구리+순록의 합성 명칭이다.다만 ‘캄’과 ‘부르칸’이 모두 하느님 또는 무당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갈래의 유래를 아직 모르듯이,‘코리’와 ‘차아복’ 또한 그렇다.연구돼야 할 과제다.

선비족 우두머리 칸의 황금벨트 버클인 선비곽락대(鮮卑郭洛帶)의 장식패([사진 6]北朝 神獸紋 帶飾:내몽골자치구 후흐호트시 투메드좌기 討合氣村 출토<내몽골박물관 소장>)를 분석해보면 이것이 이끼가 나는 목초지 「선」에서 꼴을 뜯고 있는 「순록」의 그림임이 간파된다.그러니까 이런 시각에서 보면, ‘조선’과 ‘고려’는 둘이 아니다.

같은 순록유목민을, 조선(朝鮮)은 목초지 ‘선(鮮)’에 초점을 맞추어 선(鮮)족이라 했고 고려는 고원지대의 끝없이 펼쳐진 작은 산(小山)‘선(鮮)’에서 이끼-‘선(蘚)’이라는 꼴을 뜯어먹고 있는 순록유목의 주인공 순록 곧 ‘코리(高麗)’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곽락(郭洛: khori)-고려족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다만 여기서 유목할 수 있도록 가축화된 순록(馴鹿:chaa bog=rein deer)과 단순한 사냥감인 야생 사슴(鹿:bog=deer)을 준별하는 시각의 세련도는,식량생산단계와 식량채집단계를 가름하는 준거를 세우는데 지극히 중요하다.고려의 여(麗)자가 “아름다운 뿔 한 쌍이 난 사슴”이고 신라시대 관직명인 이벌찬(伊伐餐)-각간(角干)에서 보듯이, 뿔이 대권을 움켜쥔 영도자의 상징이라면 고려(高麗)국명에서 순록을 그런 글자로 의역(意譯)하여 음사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사진 7]<시베리아 수린다 타이가 지역의 순록: SBS-TV 홍순철 PD 제공>

  오늘날 한국의 국제적 호칭인 "Korea"가 한국사의 순록유목사적 태반의 소산인 이 선(鮮)의「고려(高麗)」, 소산(小山)의 순록(馴鹿)인 "코리(郭洛)"에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특별히 긴요하다. 한민족 시원의 주류인 조선이나 고구려는 농경기원이 아니고 특수목축인 순록유목기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철기의 제조와 함께 타이가라는 숲의 바다에서 무한경쟁이 강요되는 광활한 스텝으로 나와 대규모 기마양유목(말을 타고 양을 침)을 시작해 기마양유목민으로 변신하고 목축농경민들과 부딪치며 접목되어 마침내 조선,부여, 고구려, 북위,돌궐,발해,거란,여진과 몽골 등 북방민족나름의 정복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목사적 정체성의 확보야말로  이 시대 조선-고려 겨레의 사활을 가르는 분기점일 수 있다.

중국 한(漢)족은 황하유역의 그리 넓지 않은 농경지대를 토대로 일어나서 식량생산에 우위를 보이며 수적인 우세를 확보해온 사람들이고,조선-고려 겨레는 유목적 태반의 속성상 그보다 수십 배 또는 수백 배에 달하는 유라시아와 북서 아메리카에 걸치는 스텝-타이가-툰드라지대를 태반으로 태어나 그들나름으로 발전해온 사람들이다.

농경민 인 중국인의 기원지에는 당연히 순록의 주식인 이끼(蘚)도 없고,스텝의 양초(羊草)도 없다.그런데 온전히 순록유목민의 태반을 가진 조선과 고구려가 역사적으로 거기에 존재했단 말인가? 중국의 동북공정이란 실로 가소로운 망나니의 생떼인데도 이에 일일이 대꾸하며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는 한국학계가 어른스러운 의연함을 잃은 것 같아 가엾어 보인다.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 하에서의 생존을 고려해야 하는 외교관들이야 어떻게 대응하든,학계는 이럴수록 의연해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한민족의 시원으로서 유목사적 정체성을 읽어내는 문법과 시력이 잠재된,황하의 누런 눈동자와 준별되는 “바이칼의 푸른 눈동자”를 소생시켜 나아가야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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