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에게는 신라의 골품제도와 같은 제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계급을 왕, 아크 수이에크 무사 (흰 뼈 무사), 승려계급, 농민-유목민계급, 노예계급으로 나누었는데 이들은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어야 했다.

Темір Дәуіріндегі Қазақстан Сақ Тайпалары


Сақ тайпалары одақтарға бірікті. Одақтары көсемдер (патшалар) басқарды. Сақ қоғамы сословие және тоитарға бөлінді: 1. тайпа көсемдері мен ақсүйек жауынгерлер; 2. Абыздар; 3. малцылар мен егінщілер; 4. Құлдар. Оларды киімлеріне қарап ажыратқан: жауынгерлер – қызыл, абыздар – ақ, малщылар мен егінщілер - сары мен көк тісті киім киген.


철기 시대의 카자흐스탄 사크족의 역사 (윗글 해석)


사크족의 왕국들은 연합부족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합부족의 지도자들은 이 부족국가들을 지배했는데, 사크족의 사회와 왕국은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1계급 왕국의 지도자와 흰 뼈 무사들, 제2계급 승려들, 제3계급, 목동과 농민들, 제4계급 노예들이었다. 이들의 복장을 보면 이들의 계급을 알 수 있는데: 흰 뼈 무사는 적색, 승려는 흰색, 목동과 농민은 노랑색과 청색을 입었다.

출처: 카자흐스탄 역사, 청동기시대

표6) 스키타이의 골품제도[1]

 

계급(Class)

옷 색(Clothes Color)

왕국의 지도자 (Royality)

흰 뼈 무사들 (Warrior)

적색

승려 (Clergy)

흰색

목동과 농민(Patrol, Farmer)

노랑색과 청색을

노예(Slaves)


전 세계에 계급사회가 공통적으로 있었지만 이렇게 신라와 스키타이처럼 계급에 따른 옷의 색깔까지 이렇게 비슷한 민족이 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골의 자주색과 카자흐스탄의 붉은색은 색깔이 다르지만 같은 붉은색 계열의 색이며, 스키타이와 신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진시황의 진 (秦)나라는 중국대륙 통일 이후 진시황만이 붉은색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러한 제도가 생겨난 것은 바로 진나라의 지배계급이 바로 스키타이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이한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중국 서진 (西晉)때 진수 (陳壽)가 쓴 삼국지에 의하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그 나라 노인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진나라의 괴로운 부역을 피하여 유민들이 한나라로 오자, 마한에서 그들에게 일부의 땅을 주었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진서 (晉書)에는 진한 (辰韓)사람들과 진 (秦)나라 사람들의 말이 비슷한데가 많아서 진한 (辰韓)을 진한 (秦韓)으로 쓰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진나라와 진한은 같은 민족이 건국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진나라는 중국 한족이 건설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진한의 전신인 스키타이계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키타이와 신라는 그 조상이 같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4) 스키타이는 동이족인가?


우리 한민족의 조상민족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동이족이다. 동이족 (東夷族)이라는 말의 어원은 중국이 자신을 중심에 두고 주변 민족을 부르면서 생겨난 것으로 동이족이란 동쪽에 있는 활을 잘 쏘는 종족이라는 뜻이다. 동이족이라는 단어에는 활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스키타이란 말의 어원은 무엇일까? 스키타이를 지칭하는 명칭은 상당히 많다. 그 중에 스키타이 (Scythian) 혹은 스키프 (Скиф)라로 불려지게된 어원을 보면 이들의 명칭이 스쿠타 (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왔으며 오늘날 영어의 궁수 (Shooter)의 의미이다. 즉 동이족과 동일하게 ‘활’과 관련된 단어가 자신의 민족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한자로 한민족과 카자흐족을 표기하게 되면 한민족은 동이족 (東夷族), 카자흐민족은 서이족 (西夷族)이 되는 것이다. 과거 몽골인들은 우리를 색리국 (索離國)이라고 불렀는데 사크 (Сақ)족의 한자표기로는 ‘새 (塞)’로서 ‘사이 (Sai)’로도 읽히는데 고대에는 ‘석 (Sək)’으로 읽었다. 따라서 상기의 내용을 종합해서 색리국 (索離國)의 한자를 다시 표기하면 ‘석이국 (塞夷國)’으로 표기할 수 있다. 따라서 한민족과 카자흐족은 그 기원이 만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갔거나 아니면 중앙아시아에서 만주로 이동해서 형성된 민족임을 추측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 보면 사크족으로 추측되는 묘사가 나오는데


“색족 (色族) 중에 황부 (黃部)의 사람은 피부가 누렇고 코는 튀어 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고, 백부 (白部)의 사람의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 (赤部)의 사람은 피부가 녹 쓴 구리색이고,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 (籃部)의 사람은 풍족 (風族)이라고도 하며 야자나무색의 인종이라고도 한다.”[2]

그림) 흉노족의 편두[3]


즉 색족 (色族)은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민족이 함께 건설한 연립국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스키타이족에서 지도자가 나온 계층은 ‘흰뼈 무사 (아크 수이에크, АҚ сүйек, 적색 계급)에서 나왔는데 이들이 한단고기에 의하면 '피부가 녹 쓴 구리색이고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색 계급과 비슷하다.' 라고 묘사한 것으로 보아 아시아계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이 아시아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시아계 황색 계급 (황부, 黃部)과 다른 점은 이들의 이마가 넓고 뒤로 기울었다는 점인데 이는 이들 적색 계급이 편두를 해서 이마가 넓고 뒤로 넘어가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그 뒤를 잇는 신관계급인 백색 스키타이 (백부, 白部)는 피부가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러털이 하얗다고 한 것으로 보아 코카서스인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된다.

한국의 골품제도와 중앙아시아의 골품제도를 비교할 때 한국에는 제사장 계급이 없이 ‘6두품’ 즉 ‘청색’이 ‘흰색’ 대신에 있는 것은 동북아시아 지역에는 백인이 없었기 때문에 백색 계급이 없어서 신라의 골품제도에서는 빠지고 그 대신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청색 계급 (남부, 籃部)’을 더해 세분화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로인해 알 수 있는 것은 한단고기가 묘사한 환국이 존재하였던 지역은 아마도 중앙아시아지역서부터 티베트지역 사이가 아니였을까 하는 것을 더욱 더 확고히 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아앙시아에는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인종이 전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골품제도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는 동남아시아계 민족과 동남아시아 민족과는 다른 아시아계 종족 (아이누족으로 추정)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편두를 한 몽골계 아시아인이 한반도에 들어와서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그 밑으로 다른 아시아계 인종들이 하위계급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키타이족의 5계급 골품제도를 보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을 골고루 다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의 언어는 어땠을까? 5계급 중에 1계급 (황금색), 2계급 (적색), 5계급 (황색)이 아시아계 몽골로이드인 점으로 보아 이들 인구의 대부분은 아시아계가 차지하고 일부분은 백인인 3계급 (백색)과 흑인 4계급 (청색)이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이들은 스키타이 (환국)이 확장되어 가면서 현지 원주민과 혼혈이 이루어져 탄생한 그룹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실질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있는 투르크 민족을 보면 이들의 얼굴이 가지각색인데 이들은 전형적인 몽골로이드 얼굴에서부터 서양인의 얼굴, 아랍인처럼 검은색의 피부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투르크민족이다. 따라서 스키타이의 골품제도 속에 있던 백색, 청색 계급은 비록 혼혈이 되었지만 스키타이문화 속에 살면서 스키타이화 된 민족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투르크계민족이 세계사에서 현지 원주민과 혼혈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고 그 증거는 오늘날 21세기에 그들의 얼굴에서도 나타나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 예로 헝가리인과 불가리아인, 타타르인은 서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스키타이족이 공동조상이다. 즉 백색계급의 후손인 것이고 인도 남부에 있는 드라비다족은 바로 청색계급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백인, 흑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알타이-투르크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환단고기에서 언급한 적부 (赤部), 백부 (白部), 남부 (藍部), 황부 (黃部)는 사크족의 골품제도에서 나타나는 적색 (무사 계급), 백색 (승려 계급), 남색 (농민 계급), 황색 (목동 계급)과 색깔이 일치하므로 환단고기에서 언급한 색족은 사크족이며 이들이 건국했던 나라가 바로 색리국이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이들이 바로 조선 (주신)을 건국했던 주역이었던 것이다

8 세기 기원전 스키타이인(Scythai, 그리스 Σκύθαι). )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스키타이, 사하, 선 모두 암 순록 투르크어 사가이온(Сагаион) 과 다루르어 수간(Sugan) 어원으로 부터 왔다.

Scythia, Saxa, and the Sǒn-Xian[Seon] (鮮: Soyon) all originate from the word for female reindeer—'Сагаион' in Turkish and 'Sugan' in Dagur.

스키타이 나 사이 XIYA 사람, 고대 페르시아 바다 호 해시의 키프로스의 키프로스면을 마시고, 키프로스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사카 (Saka, SECK 사람들)라고 ; 아슈쿠자이(Ashkuzai), 페르시아와 고대 인도라는 고대 아시리아는 "플러그"또는 "사카"라고, "한", 사카, Skuthoi 또는 Sacae 라는 고대 그리스, 중국 "역사 기록"이라고 기원전 3 세기, 중앙 아시아, 인도 - 유럽 언어 가족의 동부이란 유목민의 남부 러시아 초원에 위치 - 뾰족한 모자 키프로스 또는 Sakya이라고 사람들

유태인 아쉬케나지(Ashkenaz)는 스키타이와 어원이 같습니다. 유태인은 오히려 유태인이 스키타이인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독일에 대한 중세 히브리어 이름이 아쉬케나즈이고, 라인강 유태인 공동체 이름입니다.  거란 키타이(Khitai)도 동일 어원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사르마티아족에 흡수되었고 또 동쪽의 한 갈개는 파르티아와 대월지(大月地) 를 건설했습니다. 알란족 또는 라제스족으로 불렸고 로마 용병으로 활약했했고 코가서스 지역에 정착한 알란족의 후예로 오세트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면 파키스탄 및 아프카니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의 동쪽에 이란계 백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백인 투르크인의 원조다.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원 전 7~1세기 스키타이 세계의 문화

족/문화명

지역

정치, 문화

사르마타이

스키타이 동쪽에 위치

남우랄지방과 우랄강 동쪽 스탶지역

*알타이 산맥에서 카자흐스탄의 스탶국가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생활과 경제상황이 스키타이와 비슷하며 집을 갖지 않고 마차생활을 한다.

-스키타이를 공격하고 동쪽으로부터 내습한 阿蘭인에 의해 민족적 쇠망을 가져온다.

-무기, 마구, 의장이 스키타이와 유사

-전기 : 스키타이 색채가 엷어지면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식의 동물문, 괴수문과 함께 기하문이 유행, 말기에 가서는 그리스로마, 게르만과의 접촉을 통해 보석상감세공을 발달시킨다.   스키타이 동물의장과 오리엔트의 괴수의장이 결합되어 사르마타이 미술 특유의 동물투쟁문, 괴수문 등의 황금식판을 만들어낸다.

-중기 : 정치, 군사적으로 크게 연맹하여 중장비 기마전술을 채용하면서 번성.   후기에는 부족중의 하나인 아란이 사르마티아를 대표

塞, 烏孫

중앙아시아 동부

-二枝式말재갈, 새모양의 교구, 스키타이풍의 山羊形이나 態形의 飾具, 단추 등의 청동기, 청동제, 철제, 골제로 된 兩翼 내지 삼각鏃, 목제의 장족, 각종 珠類

-페르가나 지방 : 제사용으로 보이는 동물형 장식이 붙은 소반, 솥 등의 청동기 출토

-세가지 지방적 특색

*천산 : 남시베리아의 문화의 양향이 오래 지속

*페르가나 : 남방 아나우 문화와의 혼합

*시르 다리아 :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문화의 영향

⇒오손, 큐샨, 康居로 나뉨

오손은 유목적 전통을 잘 유지, 스키타이적 남시베리아와 관련 깊다.

쿠샨은 농경적 환경 속에서 발전

강거는 정주와 유목으로 나뉘어져 정주자는 아랄해 동안의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등과 혼합되며 한편, 색의 전통을 갖는 사람들은 중부 카자흐스탄에서 유목을 계속했다.

타가르문화

남시베리아 미누신스크분지

-카라수크 문화 계승 : 카라수크 문화에서 갖가지 동물표현이 이루어져, 타가르문화에 이르러 현저히 발달.

-흑해연안의 스키타이 문화와 가장 유사

분묘양식과 부장품을 가지고 3기로 나뉜다.

*제 2기 : 동물의장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산양, 사슴 등의 동물이 透彫나 입체상으로 표현되어 무기들을 장식한 예가 많다.   스키타이식 靑銅鍑 제작

*제 3기 : 철기제작 일반화.   스키타이 전기 이지식 말재갈 등 마구나 동물의장의 청동식판 등 스키타이풍 기마문화 번성

마이밀문화

 

알타이 산지의 타갈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

타갈 문화와 동류의 문화, 약간의 지방색을 띤다.

스키타이풍 유목기마민의 문화-청동제 단검, 장검, 圓鏡, 이지식말재갈, 동물의장

파지릭문화(전5~4세기)

알타이 산지

死者의 문신 : 공상적인 괴수문-스키타이 장례의식을 방영

묘실내에 대마의 열매를 넣은 청동향로 발견

애마의 부장-몽고마, 서방산의 밤색털인 아리아말

정령(전3~5세기)

바이칼호 남쪽에서 예니세이강 상류(북외몽고)

고분에서 스키타이식 삼익족, 삼각족, 鍑, 이지식말재갈, 칼, 스키타이풍의 동물의장 출토

중국문화의 영향-왕의 장신구, 전한의 화폐, 銅印

수원청동기문화(전5~전2세기)

남몽고의 오르도스

유목기마민족의 색채가 극히 강하게 나타남

-전5~전2세기:스키타이식 복, 아키타케스형 단검, 이지시 말재갈, 동복, 스키타이식 동물의장 식판, 칼, 투구, 갑옷, 馬面

-동물문은 스키타이 영향을 받은 흉노문화

타쉬투크문화(전1~5세기)

미누신스크 지방

타가르문화 후에 일어난 문화

타가르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하문화, 몽고의 흉노문화의 영향으로 성립

사자의 얼굴에서 떠내는 가면: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의 혼혈형을 보여주고 있다. 분묘 부장품에서 보면, 지배층은 유목기마민이고 피지배층은 농경민족.

전 1세기경의 한 대 유적이 발견-문화교류

일찍 청동가공 기술발달-동물상를 예술적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기나 장식품은 스키타이, 사르마타이 양식과 유사

스키타이 사하 ‘鮮’ 탐사기 - 주채혁(전 강원대 사학과)

조회 수 7285 추천 수 0 2010.08.23 19:28:21

스키타이 사하 ‘선(鮮)’ 탐사기
주채혁(전 강원대 사학과 교수)       

  울란바아타르 스텝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아주 잘 모를 수가 있다. 생태사나 생태현실에 관해서도 그렇고 역사나 격변중의 역사현실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눈뜬장님이라면 자기비하가 너무 심한 걸까? 갈라보고 쪼개보며 비교분석한 것을 맥을 짚어 정리해보지 않아서다.

  일례를 들면 울란바아타르시를 굽들아 흐르는 톨강이나 셀렝게강 및 오르홍강은 모두 바이칼 호수로 흘러들어 북류(北流)하는 북극해권이고, 오논강이나 헤르렝강처럼 칭기스칸의 태생지 부르칸(不咸)산과 접맥되는 강은 훌룬호와 부이르호를 거쳐 몽골의 기원지 에르구네강을 에둘러 아무르(일명 흑룡黑龍)강을 통해 동류하는 태평양권이다. 전자는 물이차서 거북이(龜)와 호랑이가 못 살고 거대 제국의 발전이 불가능했지만, 후자는 물이 그리 차지는 않아 거북이와 호랑이가 살 수 있으며 유목국가는 보통 목·농이 어우러져야 이루어지고 그래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기원지가 모두 다 훌룬부이르 몽골스텝·눈(嫩)강평원임은 북방민족사학계에서 공인된 지가 이미 오래다.


  곰녀(熊女)와 호녀(虎女)의 사랑싸움얘기로 점철되는 「단군(檀君)신화」의 태반도 물론 여기다. 조선(朝鮮)은 애초에 중국인이 한자로 그렇게 적었으니 중국발음으로 읽어 ‘아침의 나라’(朝Zhao國)가 아니고 ‘차아탕’(朝Chao族: 순록치기)의 나라임이 밝혀진 사실은,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인 금세기 일대의 사건일 수 있다. 「조선(朝鮮) 차아복‘누우델친’(순록유목민|馴鹿‘遊牧民’: Chaatang) 기원설」이기 때문이다. 정녕 몽·한은 그 창업 주도집단이 ‘누우델친’(Нүүдэлчин: Pastoral nomad: 유목민)기원이어서 우선 그 시원 생업태반이 일가일 수 있다. 물론 이론(異論)이 제기돼 치열한 과학적인 논증을 둔 진지한 토론이 많을수록 좋다. 
  우리가 차아탕 누우델친(순록치기 유목민)의 본향이라 할 레나강 유역 사하(새|塞: 야쿠츠크)를 본격적으로 탐사한 것은 2006년 6월 26일~7월 1일에 걸친 5일간이다. 2000년 5월경에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보르지긴. 쇼보 교수(몽골사)에게 레나강~예니세이강 일대의 순록 주식 이끼밭(鮮)에 관해 정보를 얻고 2004년 8월 초순에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과 조용헌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부부가 동참했던 사하 답사를 했지만 여기서 순록치기와 그 드넓은 이끼밭(蘚: Niokq의 鮮: Sopka)을 직접 만나고 달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영하 72도까지 내려가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진 사하의 오이미아콘 언저리에 위치한 한디가 압끼다 수림 툰드라 순록 여름유목지대로 답사를 떠나면서 필자는 『순록치기가 본 조선. 고구려. 몽골』[2008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의 초고를 들고 갔다. 2006년 6월 21일에는 이에 관해 야쿠츠크 국영TV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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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울야프 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 마두황금순록‘뿔’탈[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탐사단은 필자(몽골유목사학), 김천호 교수(식생활문화학), 최준 박사(민속사학), 반기동 현지 기독교 선교사(북방몽골로이드 역사 연구생), 조영광 교수(중국인| 식생활문화학)와 삐까 에벤족 여대생 및 총을 멘 50세 전후의 길잡이 사냥꾼이었다. 한여름에 툰드라로 드는 산야에는 순록의 주식인 눈빛 흰 이끼(蘚)가 지천으로 널려 있기 마련이다. 며칠을 달려도 가없이 펼쳐지는 이러한 순록의 목초지(鮮)는 흰 이끼가 툰드라의 흰 눈 속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이어진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입에서 “조선은 순록유목민의 나라!”라라는 탄성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장관이고 알려지지 않은 무진장한 비경이다. 그 응달에 이끼가 나는 밑밑한 산등성이의 선(鮮)들이 겹겹이 좍좍 거대한 선(線)을 그리며 뻗어나간 웅장한 광경을 감상하며 “아, 차아탕의 후예인 우리에게 선의 예술이 이래서 생겨났구나!” 하고 감탄했다. 저습지대 순록 목초와 더불어 자라는 낙엽송이 있고 앙증스럽게 작지만 버드나무와 진달래도 있다. 우리와 역사적인 인연이 무던히도 끈질긴 수목들인가 보다. 


  물레질해 실을 자아내며 읊조리던 우리네 할머니의 고저굴곡이 없이 펑퍼짐한 노랫가락이 꼭 이곳의 그것을 빼닮았다. 1993년 8월초에 훕스굴 에린칭룸베 설산(雪山) 차아탕 유목지 곁을 지나며 이 후미진 이국땅에서 우리말을 쓰는 이는 필자뿐이어서 혼자 우리 타령 비슷한 가락을 흥얼대며 외로움과 두려움을 달랠 적에, 올 초에 타계한 몽골샤먼 연구자 오. 푸렙 교수가 “당신의 그 가락이 꼭 설산 위의 차아탕(순록치기)의 그것을 닮았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순록을 정식으로 만나「조선 순록유목민기원설」을 제기하고 나온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99년 8월 11일 훌룬부이르맹 오룬춘기 박물관에서였고 그 가락을 다시 상기한 것은 또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 6월 하순에 사하 에벤(鮮=小山: Sopka)족 할머니 노래를 듣고서였다. 15년만의 자각인 셈이다. 산악 밀림지대(大山: Gora)와 너무 다른 무한히 평평한 대지생태를 닮아나는 소리가락일까. 개인날 아침이면 날이 가물려면 운다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SBS와 KBS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팀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순록치기 유목 핵심지역 관계 내용들만 찍어내는 탐사로정으로는 이러한 감격 속에서 순록치기 생태현장을 몸소 직접 체험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고 봉고차에 배낭과 함께 실려, 금광 채굴을 위해 근래에 새로 뚫은 아슬아슬한 험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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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 북동아시아 순록유목 중심지대

   목적지인 한디가 압기다 여름 순록유목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또 약 20Km를 순록을 타고 더 들어가야 한다. 말은 등에 안장을 놓고 타지만 순록(Chaabog: Цаа буга)은 목과 어깨부위에 안장을 얹고 탄다. 게다가 순록 목초지에는 이끼와 풀뿌리가 흙에 뒤엉켜 생겨난 당라순(Danglasun)이라는 늪지대가 있다. 당라순은 툰드라의 빙수 늪에 생긴 작은 디딤돌 같은 것이어서 잘못 디디면 얼음물에 빠지기 일쑤다. 이런 풍토에 적응한 순록의 발가락은 당라순을 움켜쥐고 걷게 진화돼 왔다. 고도의 균형 감각이 없으면 순록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사냥해먹고 살아낼 도리가 없다. 우리 무당이 작두를 타고 걷는 기의 집중과 균형미는 이에서 비롯된 걸까? 여기는 너무 추어서 양이 못살고 살아 따라다니는 음식인 양이 없는 데서는 몽골경기병이 작전을 할 수 없다. 물론 스텝의 타르박(乾獺)굴에 발만 빠져도 치명상을 입는 몽골말이 순록목초지를 내달릴 수가 없기도 하다.
  도중에 물을 마시면 긴장이 풀려 중도에 낙오한다고 현지 가이드가 일러줘서 꼬박 5시간 반을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며 걷고 타고, 그 길 아닌 길인 순록목초지를 소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며 또 걸었다. 노인대원들은 너무 자주 떨어져서 순록을 못 타게 하고 젊은이들만 타고 걸었다. 병원이 있을 리 없는 현지에서의 낙상이 우려돼서다. 목이 타고 순록목초지가 누런 황색으로 뿌옇게 눈에 들어왔다.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가며 순록을 타고 온 젊은이들은 그날 밤 내내 허리가 아파서 신음을 해야 했다.

  삐까는, 사회주의 집단목장화로 이동성 본질이 거세된 순록유목업이 어렵게 되어 백수로 헤매던 아버지가 병들어 죽고 근근이 애들을 돌보며 막일을 해오던 어머니도 병이 들어 입원했으나 입원비가 없어 나앉는 판에 본인도 대학을 중퇴하고 미용사 노릇을 시간제로 하던 터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시에선 그토록 풀이 죽어있던 에벤족 처녀였다. 그런데 자기 생업 생태태반인 수림툰드라 순록치기 여름유목지에 돌아오자마자 삐까가, 돌연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야생마가 되어 나는 듯 산야를 치달렸다. 3살적에 이곳을 떠났단다. 그런데도 생태태반이란 이런 마술적인 세계인가보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처녀가 되면서 광대뼈가 솟아 지금은 창피하게 느낀단다. 
   수림툰드라 끄라이(邊地)의 새벽은 오들오들 떨렸다. 화덕의 불이 꺼지니 온통 소동이 일어났다. 가이드가 군불을 지피고서야 다시 잠들이 들었다. 화덕 곁에서 땅바닥에 낙엽송 가지를 깔고 그 위에 곰이나 순록의 모피(Fur)를 겹쳐 얹고 누어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담요를 몇 겹 겹쳐 깔아도 땅바닥의 한기(寒氣)가 차단되지 않아서 자연섭리의 오묘함을 새삼 실감했다. 모깃불도 효과가 있기는 했으나 악머구리 끓듯 윙윙대며 떼로 달려드는 모기를 막을 방도는 모기장을 치는 길밖엔 없었다. 순록의 천적이 모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늘한 바람이 스치기만 하면 그 지겨운 모기떼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최저온도가 영하 40~45도까지 내려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못산다는 대흥안령 북부의 최고 혹한지대인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의 껀허(根河)일대가 순록유목제국의 중심보루([槁離國])가 됐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비상식량으로 가지고간 누룽지와 볶은 콩이 현지음식에 비위가 상해 뒤집힌 속을 달래주고 허기를 채워주었다. 이번 학기에 몽골제국시대사 박사학위논문 2편을 심사해 통과시키고 온 터라 피로가 계속 쌓여온 데다가 일교차가 수십~100도까지 나서 감기를 달고 다니고 목가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순록을 잡아 요리하고 가죽을 손질하는 법이나 순록치기의 세수법이며 유제품을 만들어 보관하는 법을 유심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양치기들의 그것과 거의 상통했다. 순록 도살과정에서 모기가 순록 가죽을 뚫고 몸속에 유충을 심어 새끼손가락만 하게 자라고 있는 걸 발견하고 이지대 생존실태의 엄혹함을 재삼 실감키도 했다.
  순록치기의 문화를 양치기가 계승하고 상호소통하며 살아왔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울야프 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인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품 마두황금순록‘뿔’탈 유물을 상기케 된다. 말에는 물론 뿔이 없다. 수림툰드라의 기(騎)순록 순록유목민의 계승자가 스텝의 기마 양유목민임을 보여준다. 오가는 길에 수림툰드라지대의 샘 파기도 관찰했다. 장작더미를 언 땅위에 쌓아놓고 불을 오래 지피면 얼음이 녹아 땅이 꺼져 웅덩이가 생기고 물이 고인다. 그걸 소와 순록이나 곰과 늑대들이 마시고 산다. 이 지대의 현행 순록유목 60~70%가 자본가가 시장을 겨냥해 투자해 경영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순록치기 양식은 점점 급속히 사라져가는 중이라는 정보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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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鮮(Сопка: 小山); 대흥안령 북부 헤이룽장성 쿠마하(河) 부근 소재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길 없는 길을 오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비가 와서 기나긴 샛강물이 불어 차가 못 건너갈 수 있다는 바람에 예약한 비행기 시간에 못 갈 형편이 될 뻔도 했다. 특별히 총을 멘 가이드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길을 찾아 홀로 떠난 터에 다시 귀로마저 잃고 헤매는 100분여 시간동안을 선(鮮)의 당라순 습지 위에 앉아 기다리는 그 공포의 순간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다. 굶주린 늑대 떼와 곰의 기습을 받는 날엔 도무지 대책이 없는 상황이어서 벌벌 떨며 싸늘한 보슬비가 뿌리는 가운데도 배고프고 졸려서 감겨오는 눈을 서로 살을 꼬집어 억지로 띄우며 “예서 이렇게 졸면 이대로 죽는다!”고 계속 각성시켜주면서, 가슴 졸이던 수림툰드라 순록유목지대 대탈출 추억이다.
  여기, 이 아까운 지면을 사하 순록목초지 탐사기록으로 이렇게 채우는 건, 특히 북아시아 몽골로이드 유목태반사에서의 그 압도적인 비중 점유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관한 한 전문가나 비전문가를 불문하고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려 함에서다. 2001년 8월초에 처음으로 장대한 타이가인 동·서 사얀(鮮: Sayan)산맥 중의 투바에 가서 투바대학교 사학과의 스키타이사 전공자 헤르테크 여교수를 만났더니 놀랍게도 스키타이(Scythia)도 사하(Saxa)도 소욘(鮮: Soyon)도 모두 젖을 주는 암순록 수간(Sugan)에서 나온 이름이란다.

  모음과 모음사이의 'g'가 탈락되는 북방몽골로이드 언어의 관행에 따라 선(鮮: Son)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흑해일대에서 우랄-알타이 지역으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원주민들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유목사를 공부해옵네 하던 필자의 무지가 너무나 부끄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문제는 그 선이 순록목초지(Ewen: 鮮)이고 선은 바로 몽골과 한국의 선조인 고조선(古‘朝鮮’)·선비(鮮卑)의 그 선(鮮)이라는 점이다. 몽골족의 기원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에서는 아직도 Korean을 선어(鮮語)로 말하고 선문(鮮文)을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한다. 그 몽골본향엔 조선(朝鮮)도 한(韓)도 없다. 몽·한이 모두 선족(鮮族)-‘순록치기’의 후예인 동족 ‘선’겨레라는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00년 전부터 15,000년간 몽골고원은 빙하기로 동토(Tundra)지대여서 이곳에서 사람을 먹여 살릴 식량자원은 순록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순록시대’라 할 장대한 생태 생업사 배경이 있었음을 각별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순록시대의 토대 위에 그 후 ‘순록유목의 창세기’가 중동부 시베리아 북극해권에서 쓰였음을 전제로 하고서야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시원사적 거대토대를 복원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런 거대하고 장구한 한랭 고원 저습지대 순록유목태반사를 거세시킨 「몽골국사」의 비극은, 칭기스칸 몽골세계제국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사안(史眼)으로 들여다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한랭 고원 건조지대 스텝 기마(騎馬) 양(羊)유목 기원의 칭기스칸 ‘몽골 기마양유목제국사’가 특히 몽골 사회주의체제 와해 이후부터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부각되면서 그 위대하고 장엄한 뿌리인 북방 몽골로이드의  ‘순록유목제국사’가 「몽골국사」에서 아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몽골국사 복원사상의 가장 치명적인 비극이라고 하겠다.” 


  이런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태반으로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많든 적든 이러저러한 계승관계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몽골족이 직접적으로 기마 양유목을 배운 것은 돌궐 지배 하나 또는 영향권 안에 들어서이니, 돌궐의 서진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통해서건 그 유산을 물려받아서건 위구르한(回鶻汗)국이 멸망한 840년 이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훌룬부이르 몽골 수림툰드라지대에서 본격적으로 몽골스텝으로 진입하면서 양유목을 배웠고 양유목을 발전시키면서 비로소 말을 타고 양을 몰고 활을 쏘게 돼 기마사술(騎馬射術)이라는, 당말·오대·송초 변혁기 이래의 최첨단 제철기술과 결합된 유목무력을 갖추게 돼서 뒷날 몽골 유목세계제국을 창업할 토대를 마련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혼|Xонь(羊) 이라는 몽골어가 실은 돌궐어임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는, 돌궐과의 접촉이 있기 이전의 핵심 순수몽골인인 'Nirun Mogol'인은 양을 몰랐거나 양치기(牧羊)가 적어도 주된 목축업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양치기의 보조수단으로 발달한 기마사술이라는 최첨단 유목무력도 보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5년 7월 2일 울란바타르 호텔 로비에서 한껏 들뜬 억양으로 “주교수, 내가 뭔가 보여줄 거야!”라고 외친 이가 있었다. 유언이 될 이 말을 남긴 이는, 1950년대 중반에 씨마늘을 걸머지고 충남 서산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던 촌티 나게 검게 탄 당시의 시골소년 한국무가(巫歌)연구자 김태곤 교수였다. 1996년 1월 25일에 나는 서울의대 병원 영안실에서 김선배를 마지막 보게 됐다. 영하 4~50도를 오르내리는 사하를 한겨울에 적응과정도 없이 예순을 코앞에 둔 나이로 네 번이나 넘나들다가 입원중에 기도(氣道) 협착으로 돌연사한 터였다.

  필자와는, 김선배가 당시에 찬반론의 극과 극을 오가던 이 풋내기 연구자의 처용가의「처용(處容)은 거북이」(왕팔단|王八蛋: 뱀에게 마누라 뺏긴 웅구|雄龜놈; 현무신주|玄武神主)라는 논문을 과감히 『한국민속학』(6, 한국민속학회 1973)에 처음 게재케 해준 심정의 인연이 있다.

 너무 추어서 사하엔 개구리(Мэлхий)는 살고 거북이(Яст Мэлхий)는 못살지만, 아둔하고 게으른 필자는 두 번째 현지탐사를 하고 이제야 김태곤 선배가 왜 사하-순록유목 기원지 선(鮮)에 그토록 한사코 몰입했었는지를, 북방몽골로이드의 유목본질은 농경정착문화와는 달리 이끼(蘚)나 양초(羊草)와 같은 ‘유목목초’를 따라 끈질기게 시공을 옮겨 다니면서만 읽어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새삼 깨우치고 있다.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툰드라 지역 순록치기 곰 토템족의 사냥꾼 범토템족 정복사


단군신화도 순록유목 태반사의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훌룬부이르 대초원의 양 유목. <김문석 기자>

 

코리안 루트 탐사에서 단(檀)족 군장들인 단군의 족적을 추적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한반도 사관에 고착된 우리의 시각과 시야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단군도 한반도에서 경영형 부농으로 입신한 인물쯤으로 상정하고 한민족의 창세기를 서술해내는 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이 기원전 2000~ 3000년 전에도 고온다습한 태평양 중 한반도에서만 농사를 지어먹고 산 청동기인이라고 못박아놓아야 주체적이라며 안심하는 경향은 여전한 것 같다.

5000~60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은 많게든 적게든 움직이게 마련이다. 생업이 유목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튀어나온 광대뼈며 째진 눈과 염소 수염, 그리고 성형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콧날이 거의 서지 않았던 많은 납작코 유형은 오랜 툰드라 생활사를 겪지 않고는 한반도나 발해 연안에서만 설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신체 유형을 디자인해준 툰드라와 삼림 툰드라 태반사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

신석기시대 이래 순록치기 천하

 

 

 

 

 

 

 

시베리아 전도. 순록 유목 문화권인 오비·예니세이·레나 강은 북극해로 흐르고,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케룰렌강은 아무르 강과 연결돼 태평양으로 흐른다.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만주의 북쪽에 있는 사하의 툰드라와 삼림 툰드라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대만주 권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하고, 순록의 먹이인 이끼(蘚)가 눈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래서 놀랍게도 다른 식량 생산업과는 달리 본격적인 유목의 태초라 할 특수 목축인 순록 유목이 극북지역에서 대규모로 먼저 이루어졌다. 그곳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양도 거북이도 못 산다. 숫수달인 ‘부이르(Buir)’-예(濊)도, 산달인 ‘너구리’-맥(貊)도 못 사는 그 동토지대에서 순록치기의 천하가 이미 신석기시대 이래로 경영돼왔다는 사실은 지금의 한반도 한국인이 보기에는 참으로 기상천외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니세이 강의 ‘예니세이’는 원주민의 이름이다. 레나 강의 ‘레나’는 원주민어로 ‘큰 물’이라는 뜻이며 대만주권과 대사하권을 남북으로 가르는 장대한 스타노보이 산맥에서 아무르 강으로 흘러든 제야 강의 ‘제야’는 에벵키어로 ‘칼날’이라는 뜻이다. ‘아무르’는 에벵키 청년의 이름이다. 이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흥안령에서 흐르는 눈 강과 백두산에서 기원하는 송화 강이 칭기즈칸이 마시고 자란 케룰렌 강을 발원지로 하는 아무르 강으로 유입해 마침내 한반도의 동해-태평양으로 흘러든다는 지리적 초보 지식을 익힌 이는 또 얼마나 될까. 케룰렌 강에서 종이배를 띄우면 한국의 동남해안 삼척이나 부산에도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2005년에 사하를 답사해 관계 정보들을 수집하고 나서는, 2006년 여름엔 마침내 툰드라~수림 툰드라 지역인 한디가 압기다 에벤족 순록 유목지를 답사하며 아주 놀라운 체험을 했다. 7월 11일에 연해주에서 출발해 스타노보이 산록을 돌아 바이칼 호수에 오는 동안 그간의 북극권 답사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정리해 이야기들을 나눠보았지만, 코리안루트 탐사대원들과 함께는 그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바이칼호 알혼섬의 부르칸 바위에 코리족 족조 탄생 설화가 서려 있는 것은, 순록이라는 뜻인 ‘코리(槁離)’의 유라시아 최대 유목지대가 앙가라 강을 통해 예니세이 강으로 이어지는 지대와 전에는 물길이 열려 있는 흔적이 보이는 카축 일대를 통해 레나 강으로 이어지는 지대 사이의 북극해권이기 때문이다. 고원 건조지대 바이칼 호수면에 비친 따가운 햇볕이 반사돼 천상의 구름을 소멸시키기 때문에 거대한 호수지대이면서도 건조하고 하늘이 유난히 맑아 이곳에 제천단이 많이 세워지고 천문 관측이 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어느 천문기상학자의 견해가 새삼 생각난다.

수분 친화적 토템족 정착 성공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의 전설이 서린 바이칼호 알혼 섬의

부르한(Boir Khan) 바위. <김문석 기자>

IT, BT 시대에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세계 각지의 관계 정보를 충분히 소화하는 터전 위에 과학 언어로 그 순록 유목 태반사를 본격적으로 복원하는 차원에서 해독해야 한다. 어느 시대, 어떤 생태에서 뭘 해 먹고 살아왔느냐에 관한 엄밀한 논증 과정을 거쳐 논리 정연하게 사람 생명 살이 얘기로 다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 ‘게놈’에 주목하며 조선 태반사를 복원해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랄 산맥 중에 대통령이 집정하고 쿠마(錦: 熊) 강이 흐르는 ‘고미’ 공화국-곰 나라-이 있다. 요즈음도 일부 투르크계 종족이 살고 있지만 고대에는 주로 황인종이 원주민으로 살았는데 그 신화 내용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박물관에는 아예 아기를 안은 청동 곰녀상까지 진열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민족 동류 루트 답사를 이끌고 있는 김영우 교수의 조언이다.

박정학 치우학회장은 환인에 대해 황의돈·송석하 소장본 ‘삼국유사’ 및 1902년 도쿄대 발행 활자본 등에는 분명히 모두 ‘환국(桓國)’으로 쓰여 있는데 1921년 교토대학의 영인본에만 ‘환인(桓因)’으로 되어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환웅은 환인의 아들이 아니라 북방 몽골로이드의 호칭 관행을 따라 환국(Khan ulus)의 서자라는 관직을 가진 칸(桓: Khan) 바아타르(雄: Baatar)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같은 동굴에 사는 웅녀와 호녀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함은, 식량 생산 기원지인 서아시아에서 알타이 산을 넘어 사얀 산맥을 타고 동래한 선진 환웅족이 곰 토템족과 범 토템족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식량 생산 단계로 진입하려는 경쟁을 벌였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이들이 식량 채집자 사냥꾼만으로가 아니라 좀 더 편안하게 사람답게 사는 식량 생산자 순록치기가 되는 길을 모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실은 전래하는 단군의 영정대로라면 그 긴 수염은 혹한지대인 극북의 몽골로이드의 것일 수 없고 따라서 그 혈통에는 당시의 선진 서아시아인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동굴 근거지 쟁탈전서 곰토템족 승리

 

 

 

 

 

 

 

 

 

다마스커스 박물관의 아기를 안은 곰녀상.

마늘과 쑥을 먹고 햇빛을 안 보고 100일간 견디기를, 사냥꾼의 식량 채집 단계에서 순록치기의 식량 생산 단계로 나아가는 시련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본 것으로 풀이해볼 수는 없을까. 물고기도 잡아먹는 수분 친연적인 곰 토템족이 이와 유사한 북극 생태 환경에 익숙한 순록을 유목 가축화하는 데 성공한 반면 북극의 혹한 생태 속에서 못 견디고 덜 수분 친연적인 범 토템족이 이에 적응해내지 못하는 과정을 설화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나라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곧 그 생업을 지칭해 ‘순록치기의 나라’라고 했음을 말해준다.

실은 웅녀 전설도 2000년대 지식 산업 시대에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레나 강 북극해권에는 호랑이는 추워서 못 살고 곰은 잘 사는데 특수 목축인 유목의 경우에 순한 순록의 유목이 먼저 시작되고, 아무르 강 태평양권 몽골 스텝에서는 북극권에서 역시 추워서 못 사는 양의 유목이 사나운 말을 타고나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다. 말은 금속 재갈을 물려야 탈 수 있으므로 청동기~철기시대 이후에나 그것이 가능했다. 레나 강 북극해 권에서 유목 생산을 먼저 시작한 곰 토템족은 힘이 넘쳐 아무르 강 태평양 권으로 진출하게 됐는데, 여기서 호랑이 토템 부족과 대흥안령 북부 선비족의 갈선동이나 고구려 집안(輯安)의 국동대혈(國東大穴)과 같은 동굴 근거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연히 선진 곰 토템족이 범 토템족을 내쫓고 동굴을 독점해 살면서 환국의 서자 벼슬아치인 환웅과 결혼해 곰녀의 자손들을 낳게 됐는데, 그게 칸의 혈통을 타고난 알탄우룩(Altan urug: 黃金氏族=‘해’겨레)-천손족인 순록치기 한(韓: Khan) 민족일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짐승과 달리 사람으로 다시 나게 된 것은 당연히 생명 생산과 사육의 원리를 터득해 식량 채집 단계에서 식량 생산 단계라는 생명 주관 과학 누리로 진입하면서다. 그래서 엔 베 아바예프 투바대학 교수는 “순록을 상징하는 젖을 주는 암사슴(Sugan-Soyon, 鮮)이라는 낱말에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본다. 웅녀는 환웅과 결혼해 사람 곧 ‘순록치기’-선인(鮮人)을 낳았던 터다”라고 말한다.

나는 일찍이 현지 답사 중에 이런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파이호(巴爾虎)로 음역되는 바르쿠족은 호랑이 토템일 가능성이 있다. ‘바르(Bar)’가 몽골어로 범-호랑이인데 ‘쿠’는 ‘~을 가진’이란 뜻이므로 그런 가능성이 높다. 한자 음역에 ‘호(虎)’자가 든 것도 음역(音譯)과 의역(意譯)을 동시에 추구하기를 좋아하는 한인(漢人)들의 음사(音寫) 전통으로 보아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예컨대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으로 음역하고 고려를 멋진 2개의 뿔이 달린 사슴이란 고려(高麗)로 음역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실제로 바르쿠진 분지를 따라 내려오며 범내, 범바위, 범고개와 범골과 같은 호랑이 관계 지명이 많은데 바르쿠족 원주민들과 함께 하는 구체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답사 중에 7월 17일에 놀랍게도 셀렝게 강변 샤먼산 게세르 100년 기념비 앞에서 현지 원주민에게 1905년에 마지막 호랑이가 총살되었다는 정보를 확보해 마침내 이를 입증할 수 있었다. 금번 답사가 이룩한 작은 기념비적 업적이라 하겠다. 그 결과 이런 유목형 몽골의 여(女)단군-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 탄생 설화가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비사’에 실린, 코릴라르타이(순록치기: Qorichi 부족들)의 메르겐(麻立干: Mergen)과 바르쿠진 고아가 결혼해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를 낳는 이 탄생 설화는 실은, ‘코리(馴鹿)치’-순록치기가 돼 식량 생산 단계에 든 레나 강 북극해권의 선진 곰 토템족이 아직 식량 채집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아무르 강 태평양권의 수렵민 후진 호랑이 토템족을 정복하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정녕 이 몽골 여시조 탄생 설화는 단군 탄생 설화의 유목형 전개라고 하겠다.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
<후원 : 대순진리회>

발해고구려학회

http://www.palhae.org/gnubrd4/bbs/board.php?bo_table=pds2&wr_id=201&page=6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Abaev N. Viacheslavo -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 


                            Abaev N. Viacheslavovitch(러시아 투바대학)
                                               
                                                               
원(原)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 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등과 맞물려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이 민족간의 이동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행해졌고, 동쪽 아무르강 연안,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과정 속에 현대 몽골어와 부리야트어가 만들어지게까지 될 정도였다.(빅토로바, 1958)

 
원몽골어와 고대 투르크 언어들은 흉노의 언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사얀-알타이 지역 동부의 산악-타이가지역에서 이 두 언어의 모태가 형성되어 점차로 동부 사얀에서 아무르강 상류까지, 몽골 알타이를 지나 현재의 중국 신강지역을 따라 남쪽의 황해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언어의 흐름은 서기 전 3세기 경 고대 흉노의 거대한 유목제국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대 중국문헌에 나오는 여러 흉노어의 관련 단어들은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꾸라끼띠는 흉노어는 투르크어계통에 속한다고 주장했다.(시라토리, 1970, 4권, 1-8쪽) 그러나 람스테트는 흉노의 언어에서 아직 몽골어와 투르크어로 갈라지지 않은 상태인 알타이어계통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람스테트, 1937, 81-91쪽) 이에 러시아 학자인 L.N. 구밀레프는 흉노의 언어는 투르크어계통이라고 굳게 확신하였다.(구밀레프, 1960, 48-49쪽) 하지만 L. 라게티같은 학자는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며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라게티, 1950, 141-149쪽)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흉노 언어의 기원은 우랄언어들이고 특히 그중에서도 핀-위구르어, 사모예드어, 케트어같은 고아시아어일 것이라는 의견이 옳다고 본다. 또한 고대 투르크어와 몽골어의 구분은 우랄 인접지역 숲 속에 살던 민족들이 사얀-알타이, 남우랄 지역 그리고 이 후 중앙아시아 숲-스텝과 대유라시아 평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겨났다는 주장도 옳다고 본다. 이와 같은 민족들의 이동은 결국 우랄-알타이계 민족들과 스키타이같은 이란계 민족들, 아리아인이라 부르는 인도-유럽계 민족들 간의 적극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민족간의 만남들은 왜 투르크-몽골어 언어요소 안에 이란 언어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어안에 우랄어, 특히 핀-위구르어의 요소들이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몽골학 연구자들은 몽골어는 궁극적으로 고대 투르크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퉁구스-만주부족의 영향을 받은 극동지역의 우랄-알타이어를 근간으로 형성되고 분화되었다고 여긴다. 그와 동시에 고대한국어가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한국어의 영향으로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의 정치문화에 대한 중요한 단어가 만들어진다. 사얀-알타이어어의 '사까(    )'와 '한(  )'과 어근에서 같이 하는 '까간(      또는 '한')'이란 단어가 이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어원 설명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설명은 스키토-시베리아의 민족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숭배했던, 예를 들어 사코-스키타이와 투르크-몽골계 부족들에게 신화적인 조상 할머니인 '알란-호아(알란호)'같은 순록이나 사슴 토템에서 나왔다는 의견이다. 두 번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까-간(뚜바어로 '하안')'은 '피'를 뜻한다. 이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닌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족의 피란 뜻이다. '까간'은 한편으로는 사코-스키타이인들이 '항금뿔을 가진 순록의 산' 알타이와 관련이 있다.

'위서(魏書)' 41장에 따르면 중국 대륙에 뚜파(Tufa)족은 '남양'왕조를 세웠고, 또바(Toba)족은 북위(386-534년)를 세웠는데, 이들은 서로 가까운 친척부족이라고 써있다. 또한 위서에는 또바, 썅비(      ), 쥬잔(    ) 그리고 아바르(오브르이)족과 현대 헝가리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쥬잔족들과의 관계도 무척 친밀했다고 밝히고 있다.(따스낀, 47,48쪽) 러시아 문헌에는 쥬잔(중국어로는 쥬앙)의 일부가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아바르라는 이름으로 현재 헝가리의 빤노니 지방을 정복했다고 한다.

 이 아바르인들은 결국 헝가리민족을 형성했으며, 또한 알타이(우랄) 언어요소도 전파시켰다. 이러한 언어적 요소가 이런식으로 한국어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빅토로바, 1980, 131쪽)

 
흥미로운 것은 야쿠트어에서 '또파(Topa)'는 '순록'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투르크-몽골어에서는 또파란 '고개', '산정상'을 뜻한다. 이는 민족명인 '뚜바(띄바)'가 우랄어계통에서 '울창한 숲으로 덮힌 고원'이란 어원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민족명이 가지는 어원적 의미는 지명(地名)뿐만 아니라 인명(人名)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칭기스칸의 조상중 하나이자 몇몇 전설에 따르면 아무르 유역에 살고 항상 물고기 껍데기로 만든 옷을 입었다던 도부메르겐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주변 민족명, 지명이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위에 잠깐 서술한 쥬잔족은 사얀의 지명 그리고 사까의 민족명과 관련이 있다. 어근들을 풀어보면 쥬잔족은 '순록의 민족'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사얀은 '사까의 민족들'이란 뜻이 나온다. 그런데 사까 자체도 순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쥬잔, 사얀, 사까는 같은 뜻의 말인 것이다.


서부 부리야트의 '뚠까(    )'라는 지명도 주목할 만하다. 이곳은 몽골비사에 나오는 '뚠까이뜨(      )'를 연상시키는 현대 뚜바의 성씨(姓氏)인 '돈각(      )'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N.P. 샤스찌나는 '뚠까이뜨'의 어원은 'tongho', 즉 '숲'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B.I. 따따린쪠프는 뚠까이뜨와 돈각, 뚠까는 발음만이 비슷하게 들릴 뿐, 실제 뜻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돈각은 뚜바어의 동사 '둔'이 중심어이며 이 말은 투르크어의 '똔'인데 이것은 '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따따린쪠프의 의견으로 뚠까의 어원을 살피기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와 발음상 비슷한 단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에 있는 한 민족인 '퉁구스(      )', 강이름인 '퉁구스카', 이루쿠츠크에 있는 큰'퉁구스'강 그리고 '썅비'와 같이 흉노의 붕괴이후 등장했으며 러시아 학자들이 고몽골인들로 생각하는 중국의 민족지적 개념인 '둥후(    )'와 뚜바의 돈각과의 관계는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썅비'는 몽골인들의 직접적인 조상들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썅비'는 고대 한국의 민족이자 정치체인 '조선'의 원류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썅비'의 어원을 제공한 성스러운 산 '썅비샨(        )'과 '달라이-노드(    -  )'호수는 흥미롭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달라이-노르 호수는 당시 '쮸이룽(        )'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는 '훌룽(      )', '꿀룽(      )', '훌룽-부이르(      -    )'라고 부른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다쌴비샨(            )'은 이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며, 대흥안령 산맥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V.S. 따스낀은 호수는 아르군(    )강과 연결되어있으며 현대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달라이-노르 호수를 끼고 흐른다고 한다.(따스낀, 363쪽, № 8)

시라또리를 위시하여 일련의 부리야트 학자들은 이 아르군 강을 전설적인 '에르구네-쿤(      -  )'으로 여긴다. 하지만 좀더 연구해본 결과 필자는 에르구네-쿤이 두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가 뚜바남쪽에 있는 웁스-후르 호수와 떼스-헴강이다. 두 번째 에르구네-쿤은 아르군 상류와 대흥안령산맥이다. 이 두 곳이 몽골인들과 동(東)우량하이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것이다.
한국-투르크-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민족 단어중 하나인 '함(  )'은 학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말은 사얀-알타이 민족들에게 '샤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L.K. 헤르쩩은 '함'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의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함'은 고아시아 사얀-알타이어에서 '강(江)'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헴(  )'에서 온 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의 '강(江)'은 헴-함을 거쳐 강이라는 발음을 가졌을 것이다. 또 다른 그의 이설은 '함'은 '까간'처럼 '혈통'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부르한과 텡그리라는 종교관을 가진 사얀-알타이 민족들의 샤머니즘의 요소들은 타이가지대 시베리아와 극동에 사는 유목민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얀의 동쪽과 동북쪽에서 고대 투르크인들과 고대 몽골인들과 더불어 살던 퉁구스-만주 민족들과의 접촉과 상호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그래서 성산(聖山)의 하나인 '우환(      , 중국어로 '치산')에 살던 '둔후(    )'족의 지역상황에 특별한 관심이 쏠린다. 따스낀에 따르면 우환산맥에서 '우환'족이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하는데, 이 산맥은 중국인 판이에 따르면 랴오뚱에서 북서쪽으로 수천마일 떨어져 있다고 한다.(따스낀, 6-7쪽) 따스낀은 이 산맥이 아무르 상류 쪽일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까지 에벤끼족이 살았던 부리야트 공화국의 끼진긴스끄 아이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어에서 '붉다'라는 뜻의 '울라간(      , 또는 '울란(    )', 중국어의 '치산'도 '붉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에서 어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척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부리야트의 지명들은 투르크어나 에벤키어 또는 고아시아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환이라는 민족명칭에서 퉁구스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우환산에 대해 고대문헌에서는 '오관(ogwan)'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것은 아마도 트랜스바이칼지역에 살았을 퉁구스부족 '우왕(    , 또는 '구이(  )', 갸이(  )')'와 명칭이 유사하다.(바인슈쩨인, 1972, 119쪽) 당서(唐書)에 보면 '우왕'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있다. "...그들에게는 양과 말이 없다.

대신 순록을 가축처럼 기른다. 이끼를 먹이고 수레를 끌게 한다."(비츄린, 1950, 1권, 350쪽) 여기서 수레란 순록이 끄는 썰매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7세기에 쓰여진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바이슈쩨인은 순록업의 기원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약 순록업을 주로하는 삶의 양태를 안다면, 순록이 끄는 썰매에 대해 의심할 바 없다."라고 하였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여기서 하나 덧붙인다면 우환과 둔후가 고대 몽골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따스낀은 다른 문헌을 토대로 우환을 우왕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따스낀, 7-9, 483쪽)

신빙성에 다소 문제는 있지만 좀 더 오래된 중국 문헌에는 북아시아의 동부지역에서 5세기말에도 순록업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499년에 쓰여진 중국 문헌 '난시(      )'에는 '푸산(    )'에 있는 어떤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순록에 썰매를 매서 다니며, 순록의 젖으로 꾸므이스를 만든다고 쓰여져 있다.(비츄린, 1950, 2권, 47쪽)

많은 사얀-알타이 민족들, 예를 들어 동뚜바의 또드진, 그들의 친척관계인 또팔라르 그리고 다르하뜨, 쏘이요트인들은 사모예드인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순록 썰매를 끌고 다니며, 순록업을 퉁구스인들보다 먼저 했을 것이다. 또한 우랄-알타이계열 민족들뿐만 아니라 이란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만났을 것이다. 문헌을 보면 순록업은 사얀지방에서 먼지 시작되었고, 여기서부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을 볼 수 있다.(바인슈쩨인, 1991, 292쪽) 바인슈쩨인은 고고학자 B.A. 슈람꼬의 툰드라지대 민족에겨서 볼 수 있는 순록썰매에 쓰는 용구와 유사한 것이 스키타이에도 서기전 4세기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의견(슈람꼬, 1988, 233-237쪽)에 반박하였다.

바인슈쩨인은 사얀지역에서 순록을 기르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순록업의 시작은 스텝지역에서 밀려들어온 목축업을 하는 민족들이 타이가 지역에서 사냥을 하던 사모예드계 부족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바인슈쩨인, 1991, 291쪽) 다시 말해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목축업자, 정확히 말하면, 말을 기르던 민족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V.K. 다르쟈와 O.K. 슈의라빠를 위시한 뚜바 연구자들은 바인슈쩨인과 다른 의견을 낸다. 그들은 순록업과 목축업은 우랄-알타이와 사얀의 산악-타이가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순록업과 목축업은 숲과 숲-스텝의 사냥꾼들과 어부들의, 채취경제에서 농업단계로 넘어가 태평양 연안지역까지 진출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문화-경제생활의 총체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동시에 그들은 기존의 목축업의 방법들을 잊어가면서 전문적이 순록업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범위는 숲 툰드라 지역과 유라시아 북부의 툰드라 평원까지 넓어졌다.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산악 타이가 지역에서 순록업이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안에 사얀에서 동쪽으로 사는 민족, 특히 트랜스 바이칼지역의 에벤키에게 순록업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비교적 최근까지 퉁구스인들을 '말(馬) 퉁구스인'과 '순록 퉁구스인'으로 나누어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유라시아의 유목문명 현상은 목축업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이가 사냥꾼들의 농업, 목축업, 순록업 등 생업문화의 총체적인 결과로 인해, 또는 숲과 스텝 부족들의 민족문화적 협동관계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자연적으로 옛날에 어느 정도 목축업과 말 사육을 번갈아 했던 민족들은 조금씩이나마 농업도 하면서 유라시아 대 평원 전지역에 급격히 퍼져나갔다. 더불어 순록업자들, 예를 들어 사얀인들은 스키타이, 흉노 등 스텝제국들이 형성되기 전에 일찌감치 동쪽과 남동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순록업과 이동이 일찍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적지는 물론이거니와 정착민들(중국인들)의 문헌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인슈쩨인에 따르면 퉁구스의 순록업은 서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기 일천년 중반 무렵 그들의 순록업에 대한 내용이 중국문헌에 등장한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그러나 이것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중국문헌 자체의 신뢰성이다. 생활상의 묘사, 민족의 특징에 대한 묘사는 다른 스텝지역의 유목민에 더 가깝게 기술했고, 산악타이가지대에 대한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 둘째로 순록에 얹는 안장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기에는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셋째 순록은 안장없이 탈 수 있다. 특히 키가 작은 퉁구스인과 청소년들은 안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뚜바-또드진인들은 겨울에 순록에게 썰매를 매어 짐을 옮기게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스키를 탔다. 스키가 순록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사얀-알타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 관계에 대한 보충자료들은 흉노와의 부족구성의 문제와 그들의 종교-신화적 분석, 고대 한국인들과의 신화계보의 비교를 하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중국에서는 흉노의 왕족을 '후양(    )'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주목한다. 하지만 문제는 '후양'으로 발음되고 씌여지게 된 납득할만한 근거를 중국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흉노, 투르크, 몽골의 신화와 전설은 기본적인 세부사항은 서로 일치한다. 몽골의 왕족 칭기스칸 보르드쥐긴의 신화적 조상은 '끼얀(    )'이며, 이 가문의 증조부는 '끼야트(    )'인 것에서 앞의 '후양'의 어원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있다. 다른 한편 끼얀은 이란의 왕족 '케이아니드'와 관계가 있다. 또한 늑대의 자궁에서 또는 산의 동굴, 계곡(세 가지 다 신화적 사고에서는 같은 것이다.)에서 출생한 고대 위구르민족의 엘리트층과도 관계가 있다. 위구르의 '위(  )'는 '산에 있는 동굴'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북부 지역에서 조상의 탄생신화의 장소는 동굴이나 산의 협곡과 관련이 있으며, 남부 지역은 궤짝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대로 동굴과 궤짝은 유라시아지역에서 세상을 태어나게 한 '우주의 알'을 뜻한다. 그러나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민족들처럼 한국인들에게도 우주알로부터의 세상의 창조라는 고대의 모티브는 인성을 가진 조상의 출현까지만 통용되었다. 주몽의 탄생설화를 보면, "알을 깨자 그가 거기서 나왔다. 갓 태어난 아이는 완성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쟈르일가시노바, 1972, 86쪽) 한국신화에서 문화영웅 또는 조상들은 하늘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탄생은 거의 땅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단군은 태백산에서, 김수로는 구지봉에서, 김알지는 금산주변의 처녀림에서 태어났다.
지배자들의 이름은 흉노의 지배 부족과 사얀-알타이 부족들 간의 민족적 관계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역사서에 따르면 흉노의 강력한 중앙정부체제는 서기전 209년 아버지 뚜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모대(마오둥)와 관련이 있다. 모대의 군대는 서기전 201년까지 10년 가까이 중국문헌에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의 '동호'부족을 압박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모대란 이름은 뚜만(    )이라는 이름처럼 고대 사얀-알타이의 부족인 '마아드이(    )'부족과 관련이 있는 씨족명이다. 뚜만도 뚜마뜨(    )부족과 관련이 있다. 뚜마뜨 족은 사얀-알타이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뚜바스(    )', '또바(    )', '떼파(    )', '찌파(    )', '뚜판(      )'족의 시족 공동체이다. 이 씨족명은 한국 북부에 있는 한자로는 '대지의 문'이란 뜻이 있는 '두만강'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

한국과의 유사점은 더 제시할 수 있다. 뚜바의 뚜마뜨는 마찬가지로 '호르-뚜마뜨(  -    )'로도 불리었다. '호르'는 하나의 큰 민족집단을 이루는데, 이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고대 사얀-알타이(알타이, 뚜바, 하카시아)민족들을 '호오라이(      )', '혼고라이(        )', '우량하이(      )'로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대한국의 '고려(고구려)'도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전설에는 강물의 신의 딸로부터 태어난 주몽이 시조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다. 그는 북부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물의 신의 딸이다."라고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자를가시노바, 1972, 86쪽) 주몽에 대한 신화 속에 서술된 고구려 사람들과 북쪽의 부여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상고지'의 필자는 "동방의 오랑캐들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고구려인들)은 부여에 뿌리를 둔 한 분파이다. 그들의 언어는 서로 거의 같다."(끄류꼬프, 64쪽) 고구려 민족의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한 R.SH. 자를가시노바는 이러한 상황은 북쪽의 퉁구스-만주족이 고구려 문화원류에 여러 요소를 가미하게 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주몽에 관한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과의 민족문화상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헤로도투스에 의해 스키타이로 잘못 알려졌고, 흉노의 융기와 함께 동아시아에서 흑해연안까지 주름잡았던 '싹'족의 신화와 유사하다. 서기전 2000년말부터 1000년 초까지 치끼, 구르이, 뗄레족과 다른 이란어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위그로-핀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고대 투르크 민족들은 서로 연합하여 강력한 부족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씨족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끊이지 않는 이동과 전쟁 속에서 멀게는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남쪽까지 침투하였다. 중국문헌에 의하면 이들을 '치디(    )'라고 불렀는데, '붉은 오랑캐'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들이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깝다보니 더 붉게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긴다. '붉다'라는데서 알수 있듯 붉은 색은 스키타이인들, 다시말해 귀족들인 전사집단의 특별한 상징이다.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의 종교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그들이 강물의 신을 숭배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하였다. 뚜바어로 '아릭-부가(    -    )', '깊은 곳의 지배자'란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왕 '아르폭싸이(        )'는 싸코-스키타이의 한 씨족장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제의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물에 대한 제의는 대지의 여신이며, 가정의 화로를 지켜주면, 산의 주인이자, 산의 동굴에서 왕권에 대한 상징물을 씨족장들에게 선사하는 '따비띠(      )'에게 바치는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에 있는 동굴은 강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대지의 문'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지의 문'인 두만강은 이러한 종교-신화적인 관념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부족명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헴-칙(  -  )'은 '강에 사는 치키인들', '또바(    )'는 '땅의 주인', '또곤(    )'은 '대지'란 뜻이 있따. 아마도 뚜바나 티벳이란 명칭도 위와 같은 명칭들이 확대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여하간 주몽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음운학적 토대에서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요점을 정리해보면 뚜바의 사키-치키들은 케렉수르문화와 황금뿔을 가진 성스러운 순록이 그려져 있는 '순록돌(사슴돌)'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의 확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미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정해 보건데, 첫째, 이 문화의 영향은 간접적으로 사얀-알타이 사얀-알타이 부족들, 즉 처음에는 사키-치키인들을 통해, 그 다음에는 흉노제국에 의해 실행되었을 것이다. 둘째, 흉노가 원몽골인들과의 협력관계의 과정에서 둔후를 정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신화는 사얀-알타이 민족들과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몇 가지 관념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이다. 신화 속에서 곰은 고대 한국인들의 국가인 조선의 시조로써 여겨진다. 곰에 대한 신성함은 사얀-알타이민족들에게의 성산(聖山)제의와 볼 수 있다.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에서는 신성한 산을 '하의라칸(        )'이라고 부른다. 이는 '곰산'이란 뜻이다.
구조와 내용에서 단군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그것은 최고 권력과 또한 거기에 걸맞는 상징이 천상의 최고신으로부터 집권부족의 대표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정치문화의 계승과 관련된 전통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뗀리 굿(        )' - '하늘의 신',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흉노의 지배자에 대한 형용구와 직함이다. 흉노라는 명칭에도 고대 위구르어로 '하늘의 태양'이라는 뜻의 '꾼 뗀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군'이란 이름도 단순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추측하기에는 '하늘의 신-태양'이라고 여겨진다.
이런식으로 흉노가 고대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증명되었다. 또한 반대로 고대 한국에서 흉노로의 영향은 이른바 '호르'라 불리는 사얀-알타이민족의 하위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호르'란 말은 고대 고려(고구려)라는 말로 변해갔다. '호르'의 다른 명칭인 '훈고라이(        )'는 '훈가르(      , 헝가리)' 등이 되었다.

흉노는 십중팔구 스텝과 숲-스텝을 휘젖고 다녔을 것이다. 흉노의 구성원에는 우랄-알타이계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둔후족(썅비족)은 주채혁교수의 의견대로 이끼의 길을 따라 산악-타이가지대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퉁구스-만주인들에 동화해가면서 흉노보다 먼저 아무르강 연안지역, 소흥안령산맥, 대흥안령산맥, 만주, 한반도에 도달했다.
주채혁교수의 사얀-알타이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간의 혈통적 연관성에 대한 결론은 러시아의 유전학자 자하로프와 뚜바 국립대 도르쥬교수가 한국인과 뚜바의 소얀, 끄르그이스 성씨 사람들의 머리털 100개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입증하고자 하였다. 자하로프 박사는 이러한 미토콘드리아 DNA검사는 그 DNA자체가 모계라인을 따라 전달되기 때문에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하였다. 아직까지 분자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확실한 결과를 위한 남성의 유전자라 할 수 있는 Y-염색체 검사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자하로프 교수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북부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북부 중국인들은 흉노, 투르크, 고 몽골인 등이 서로 동화되어 만들어진 민족이다.
아직까지 DNA의 핵타입에 대해서 컴퓨터를 이용한 분석이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사얀-알타이에서 남자들이 이주해왔다는 설도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 뚜바 신문 '에피르(    )'에 이것과 관련해서 논문을 투고하면서 따찌아나 우이눅-오올이 독일에서 한 실험에 대해서도 서술을 하였다. 이것은 야쿠트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내용인데, 야쿠트인, 부리야트인, 몽골인과 일본인의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내용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먼저 야쿠트인과 부리야트인들은 사얀-알타이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타이인, 뚜바인, 하카시아인들은 일본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조상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에 들어갔다고 본다.

한편 뚜바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조상도 사얀-알타이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고아시아 민족들이 순록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주채혁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말을 키우는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순록업도 잘 행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이론에 동의하면서 덧붙인다면, 사얀-알타이에 살던 사모예드인과 위구르-핀 민족들은 순록업을 먼저 고대 투르크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사는 퉁구스-만주인들과 원몽골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씨족의 그룹은 유라시아의 다른 민족들처럼 목축을 하는 전사, 전사귀족, 사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 특히 '중원(中原)'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국 고대 문화형성에 있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 온 기자(      )같은 사람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측 사료에서도 이들은 그저 '오랑캐국'의 '오랑캐'들 틈에서 잠시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되레 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 썅비, 고대 투르크, 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의 인종적, 민족적 원류를 갖추는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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