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한 글 : 붉은색


▶ 백제어와 드라비다어


요즘 우리는 ‘열쇠’를 ‘키(Key)’라고 부르고, ‘주전자’를 ‘포트(Pot)’라고 부르고 있다. 이 둘은 원래 영어 낱말인데, 우리가 미국과 교류하면서 반 세기 이상 영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외래어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역사학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그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나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백제(남부여) 본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스리랑카(실론)나 바라트(인도) 남부에서 우리말과 비슷한 낱말이 많이 나와, 백제와 이 두 세계가 교류하지 않았겠느냐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여행객인 이지상 씨가 바라트(인도)에서 현지인에게 들은 타밀어(드라비다어) 낱말들을 살펴보자. 그는 바라트를 여행했다가 타밀인에게서 우연히 이런 말들을 들었다고 한다.


▽타밀어       ▽우리말


잉게 와   :    이리 와요

잉게 봐   :    이것 봐요

엄마      :    엄마

아빠      :    아빠

왕        :    왕

풀        :    풀(초草)

쏘루      :    쌀

언니      :    형(우리말에서 갈라져 나온 일본어는 ‘형兄’을 ‘아니’라고 부른다 - 잉걸)

나르/나라 :    대지(大地)/땅

강가      :    강

말레이    :    메(뫼. 산을 일컫는 우리 옛말)

빨        :    이빨


그리고 고(故) 김병호 박사가 이끄는 문화 탐사팀은 드라비다 말에서 우리말과 비슷한 말들을 몇 개 찾아내었다.


▼우리나라 말                           ▼드라비다 말


- 가요                                 - 자요

- 와요                                 - 와요

- 나                                   - 나

- 너                                   - 니


뿐만 아니라 김성호 박사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대한제국에 건너온 미국학자 H.B 헐버트(Hulburt)의 저서인『The Passing of Korea』(1906)를 인용해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관계도 아직 친족관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으며, 그가 오노 교수가 고른 타밀어 어휘와 자신이 직접 고른 또 다른 타밀어 어휘를 우리말 어휘와 비교함으로써 이를 증명하려 하였다.


타밀어                          한국어


팟 - 우카르                    밭

쿠발                           구불

쿠리                           굴

무르                           무리

우르 - 압프                    울다

타르                           (매)달리다

파-라                          벌(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언어의 “어휘를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그 발음과 뜻이 너무나 일치함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수의 어휘가 일치하는 현상은 우리나라와 인접한 만주어나 몽고어에서도 미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한일 두 나라 언어에 대한 드라비다어의 영향이 얼마나 강력했나를 짐작하게 한다(김성호 박사, 이하 존칭 생략).”


이런 현상에 대한 종래의 설명은 김해 김씨와 함께 가야를 세운 허씨족이 바라트(인도) 출신이기 때문에, 허씨족과 함께 들어온 드라비다의 문화가 가야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말에 드라비다어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인데, 가야는 백제의 일원인 변한이 낙남정맥 아래의 바닷가(경상남도의 바닷가)를 점령한 뒤에는 바다를 통해 외부와 교류하지 못했고,『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나마 건너온 허씨족도 “허황후 일행의 이름이 모두 중국풍(김성호)”이고 싣고 온 물건이 “한사잡물(중국제품)”이며 허황후의 별칭이 “보주태후(普州太后)”인데, 이 ‘보주’라는 땅 이름은 “주산군도 보타도(普陀島)”(김성호)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이 현상은 가야 대신 해외 곳곳에 담로를 세운 백제가 당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던 타밀나두(드라비다)인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백제어를 전파했거나, 아니면 반대로 백제인이 타밀인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왕’이 있다. ‘왕’은 북경어로도 ‘왕’이기 때문에 드라비다어에서 우리말로 건너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것은 한자어인 ‘왕’을 재빨리 받아들인 백제인이 타밀인에게 가르쳐준 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농사와 관련된 어휘나 친족 관계와 관련된 어휘는 반대로 타밀어에서 우리말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 때문에 우리말과 드라비다어에서 비슷한 어휘가 나오는 까닭을 ‘쌍방의 교류’로 보는 것이다)       


▷ 백제어와 싱할라어


그리고 바라트와 이웃한 실론 섬(스리랑카)에도 우리말 어휘와 비슷한 어휘를 찾을 수 있는데, 싱할라어는 드라비다어와는 달리 어순이나 문장 구조가 우리말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징이 나와 흥미를 끈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음식과 관련해서 싱할라어(스리랑카의 신할리인人이 쓰는 말 - 옮긴이)와 한국어를 비교해 볼 때 유사한 발음을 갖는 어휘를 찾아볼 수 있다.


명사로는


사알(saal) - 쌀(경상도에서는 지금도 ‘쌀’을 ‘살’이라고 부름 : 잉걸)

밧(bat) - 밥

뉘(n+위에 ‥이 붙은 u) - 뉘

수라(sura)/수르(sur) - 술


등이, 동사로는


우이어이(우이어, 우여. uyəi) - 우려내다

가누와(간우와, 간와. ganuwa) - 간을 보다

비우와 - 빨아먹다


등이 있다.


벼와 관련되는 언어를


- ㅂ(p)계통 : 발리, 밥, 브와


- 벼와 ㅅ(s)계통 : 쌀리,


- 그리고 ㄴ(n)계통 : 뉘


등으로 구별한다고 할 때 쌀, 밥, 뉘의 발음이 같거나 유사하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송위지,「불교를 바탕으로 한 스리랑카인의 음식문화」,『음식으로 본 동양문화』에서


위 글은 우리와 신할리인이 만난 적이 있다는 ‘증언’인데, 우리말은 알타이 어족이고 신할리어는 인도 - 유럽 어족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두 말이 같은 말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순 없고, 우리는 서기 4세기에야 벽골제를 만들었음에 비해 스리랑카는 서기전 7세기부터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치수(治水) 사업을 벌여 벼농사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에 우리의 낱말이 건너가서 싱할라어의 외래어가 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백제인들이 실론(스리랑카)섬에 담로를 세우고 싱할리인과 교역할 때, 그들의 낱말을 ‘외래어’로 받아들였다고 추측하는 바이며, 싱할라어 낱말은 남부여가 망하고 해외 담로가 해체된 뒤에도 살아남아 백제의 해외 담로 건설과 국제교류를 증명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덧붙임 : 김성호는 실론(스리랑카)섬 북쪽 끝에 ‘담수마’라는 해민(海民)들의 보금자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곳은 백제의 해외 담로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날 실론 섬 북쪽 끝에 있는 ‘자프나’항인 듯하다.


담로가 실론 섬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신할리인이나 타밀인(타밀나두 - 드라비다 - 인)과 접촉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히 상거래를 할 때 상대방의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자신의 문화를 소개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참고 자료


-『음식으로 본 동양문화』(김태정/손주영/김대성, 대한교과서, 서기 1997년)

-『슬픈 인도』(이지상, 북하우스, 서기 2001년)

―『우리 문화 대탐험』(김병호, 황금가지, 서기 1997년)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김성호, 푸른숲, 서기 2000년)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2 (김성호, 맑은소리, 서기 1996년)

▲ 아카족캠프의 모든 아이들이 기념촬영을 위해 모였다
ⓒ 오문수
1994년부터 아카족 캠프를 시작한 데이빗의 얘기다. 그가 방콕에서 멀리 떨어진 태국 북부 지역의 산악 오지를 방문했을 때 두살바기 수쿤야는 땅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하지만 "수쿤야가 설사와 기관지, 옴이나 수많은 마을 어린이를 죽음으로 몰고간 질병에서 벗어나 학교를 다닐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는 아카족 어린이들을 알기위해 치앙마이 대학교에서 고산족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그가 생생히 기억한 것은 12살에서 16살까지 강간당하거나 성노예가 되어 임질 매독 에이즈 등의 성병에 걸린 소녀들에 관한 의사들의 보고였다.

▲ 수쿤야가 이렇게 컸다. 식당에서 식사준비 중이다
ⓒ 오문수
수쿤야에게 마음이 끌린 그는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 죄도 없는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걸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장래에 대한 기회도, 희망도 보이지 않고, 평범한 부모에게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생명이었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종일 밭에서 일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아무 이유도 모를, 그리고 예기치 못한 첫 파도인 질병에서 살아남는다면, 다음은 이익이나 노리개를 위한 목표가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수쿤야의 아버지가 딸을 교육시켜 달라고 읍소를 하며 그를 찾은 것은 6년 후의 일이다. 데이빗과 아카는 그녀를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숙소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쿤야의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대나무와 풀들을 베어와 허락만 떨어지면 오두막을 지을 참이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그녀는 항상 친구들과 학교 다닐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행복해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생에 아무 가치도 없을 것 같은 작은 아이가 최우수 학생이 된 것이다. 그녀는 쉽게 배우고 자신이 지닌 지식을 다른 아이들에게 전한다.

수쿤야는 현재 중학교 1학년이다. 아카센터에서 고등학교에 보낼 돈도 없고,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아이들이 30명이나 된다는 것도 잘 안다. 아버지가 돈 벌어오기를 원할지 혹은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는지 몰라 걱정이다. 그녀는 또다시 혹독한 시련의 세계로 갈 것인가, 아니면 희망의 빛이 보이는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에 고민하고 있다.

▲ 페인트팀 팀장인 솜차이. 곧 호주에서 발목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 오문수
아카캠프의 페인트팀 팀장은 14살 된 솜차이다. 어려서부터 한쪽 발목이 90도 정도 굽혀진 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침 5시에 기상해 6살부터 또래이하의 아이들을 통솔하며 건물 지붕에 올릴 슬레트에 페인트칠하는 것을 감독하고 문이나 철근 페인트를 도맡는다.

때로는 아이들 몸에 페인트가 덜 묻도록 비닐을 씌워주거나 마스크도 주지만, 아이들 옷 절반은 페인트 범벅이다. 하지만 호주의 한 정형외과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 주겠다고 약속해 수술날짜를 기다리며 들떠있다.

▲ 도마뱀을 잡고 놀고 있다
ⓒ 오문수
전기 드릴을 이용해 철근에 구멍을 뚫고 창틀을 만드는 스치는 14살이다.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하지만 일만 끝나면 어린 동생들과 함께 돈치기 놀이에 여념이 없다. "집에 돌아가고 싶냐?"고 묻자 고개만 가로 저었지만 의사소통이 안돼 이유를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아침이면 경운기 머리를 붙인 사발이를 몰고 동생들을 학교에 등교시킨다.

▲ 장수풍뎅이 암놈을 고무밴드로 묶어 강제로 교미를 시키는 놀이가 유행이다
ⓒ 오문수
용접팀장인 모파는 용접공부를 체계적으로 못했지만 캠프내의 모든 문짝과 용접을 도맡아한다. 말없이 일하다가 밥먹고는 옆구리를 쿡 쥐어박으며 미소를 보내는 아이다.

그 밖에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미초와 미오, 그리고 페오는 항상 싱글거리며 봉사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는가?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는가"를 묻는다.

캠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어린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노동력 착취는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이 왜 일찍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가 됐다. 일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배워야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잡히며 일상생활에 들어가는 경비를 줄여야만 학비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5시 30분까지 점호와 기도를 마치고 작업현장에 투입된다. 용접, 페인트, 잡초베기, 식사준비, 청소 및 빨래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린이들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진다. 데이빗과 아사가 전체적인 운영과 모금을 책임지고, 나머지 스탭들은 교육과 작업현장의 진도와 공정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자재는 캠프에 사는 아사의 동생이 시내에서 사온다.

모든 작업현장에는 팀이 조직되어 있으며 팀장의 지시하에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제 갓 들어온 어린 동생들은 선배들이 일을 가르치고 아프거나 힘들면 감싸주며 형제같은 분위기다.

4시 하교 후 곧 바로 작업복을 갈아입고 4시 반부터는 오후 일과가 시작되어 6시에 끝난다. 저녁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논다. 돈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신발던지기. 도구가 없으면 들판에 나가 잠자리를 잡고 도마뱀꼬리를 붙잡고 논다.

▲ 전통 의상을 입은 아카족 엄마들이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자녀들을 방문했다
ⓒ 오문수
지난 금요일은 한 달에 한번 있는 어머니 날이다. 부모가 없는 50명을 제외한 엄마들이 학교를 방문 후 캠프에 자식들을 찾아보고 돌아가는 현장은 각양각색의 모습이었다. 모처럼 엄마를 만난 6살 먹은 어린이는 따라간다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또 조금 철이든 아이는 엄마가 옥수수와 닭다리 죽순 떡 등의 13가지나 싸준 비닐 주머니를 들고 잔치 기분이고, 엄마가 오지 않은 아이는 부러움에 침만 삼키며 주위를 빙빙돈다.

▲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자 6살 먹은 아이가 따라간다고 떼를 쓰며 울자 형이 달래고 있다
ⓒ 오문수
비록 풍요롭지 못하지만 세상의 사랑과 관심속에 소통의 끈을 연결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겐 앞날에 대한 희망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2007-08-12 09:26   오마이 뉴스
[경인뉴스]  2008년 06월 23일 (월)                                                                          전상천junsch@kyeongin.com

아카족  발전센터  루카 목사

"아편중독  탈출 재활교육에 앞장… 가난 굴레벗기 '1가족 1소 지원'"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바로, 바로 당신이랍니다."

아편 생산지로 악명높은 태국 치앙마이의 소수민족인 '아카족'의 부흥을 이끈 인물 루카 목사. 그는 아편에 중독된 자신과 같은 민족인 아카족을 재활 및 교육으로 빈곤을 퇴치하고 있다.

푸른경기21 연수단이 태국 치앙마이서 국경으로 이동해  방문한 '아카족 발전센터'(Aka tribe development center). 이 센터는 루카 목사를 비롯, 10명 안팎의 직원들이 100여명의 인근 아카족 아이들을 기숙교육시키고 있다.

루카 목사가 지난 1999년에 시작한 센터는 인근의 가난한 가정의 7~8세 가량의 아동이나 부모없는 고아 등 20명을 모아 놓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교회지도자 등 교육전문가를 육성해왔다.

루카 목사는 우선 고산서 살고 있는 아카족이 아편 중독과 빈곤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 교육과 의료가 시급하다고 판단, 빈곤 퇴치프로그램을 운영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는 아카족 1가족당 소 1마리를 지원한 후 3마리까지 키우게 한 뒤 소로 생계 및 자녀 교육비로 지원토록 했다.

이어 한가정이 소 3마리가 넘게 되면 이웃 가정에 분양하게 하는 수법으로 저마다 '살찐 소'를 재산밑천으로 삼아 가난서 벗어날 수 있도록 원동력을 제공했다.

루카 목사는 아카족의 희망인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각 가정이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아카족이 거주하는 고산지대의 기후 등을 고려해 소득증대 차원서 '차'나무를 키우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부 성인들중 아편 등에 중독돼 살지 않기 위해서 육체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가능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루카 목사의 이 같은 계획도 FTA 체결 등으로 외국 농산물이 몰려들면서 수입이 줄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카족은 이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작은 토대를 마련하는 중이다. 아카족은 더이상 빈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각종 NGO단체 등이 아카족 빈곤 퇴치를 위해 '태국 아카족 지원 재단'(Thai-Aka Ministries Foundation)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센터에서 만난 학생들이 치는 기타 등 각종 교육자재에 모두 '한국'에서 지원된 것임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최근 고양의 한 교회에선 '교인들중 복된 일이 생길 때마다 소 한마리값을 헌물로 내 놔 아카족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하는 등 국경지대 소수민족을 돕기 위한 도움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을 한차례 방문하기도 했던 루카 목사는 "미신 등을 숭배하던 아카족이 기독교로 모두 개종케 된 것은
   
부모님의 한결 같은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아카족 아이들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한민족의 후예
태국 라후족 소개

http://www.hilltribetour.com에서 펌

라후족 역사

    라후(lahu)족은 태국에서 한 6만명즘되는 강하고 독립적이고 매우 다양성을 가진 소수민족이더래요. 라후족은 대부분 치앙마이와 치앙라이 지역에  살더래요.  기러나 탁 지방처럼 먼 곳에서도 상당한 수의 라후를 역시 발견할 수 있더래요.  라후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기위한 강한 결속력 따문에 라후족은 대개 길이나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정착해서 사더래요.
          라후족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더래요.  타이에서 6개 정도 다른 라후 부족이 있고 몇몇 말은 서로 이해할 수 없더래요.  타이에 있는 라후족 대부분은 라후 니(붉은 라후)이고 메시아 지도자 토보(Dtobo)를 따르는 범신적인 정령숭배자들이래요.  상당한 수의 라후 나(검은 라후)와 라후 설레가 있고 이들 중에 많은 수가 거의 100면 전에 기독교인이 되었더래요.  라후 나는 동남아시아에 곳곳에 있고 표준 라후 방언으로 간주되래요.

          원래 농부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쌀과 옥수수를 재배하면서 살았지만 라후는  사냥군이면서 전사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더래요. 강력한 선악의 원리를 따르는 완고하고 진지하고 사람들이고 마을의 모든 사람은 연장자의 공통 결정을 따른다.  다른 고산부족 공동체 보다 광 범위한 가족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라후족은 여태까지 강력하게 통일성으로 행하고 생존을 위해 함께 일한다.  라후족은 세상에서 가장 남녀 평등한 사회일 것이다.

라후 새해(Kin Wor)

        "코자오 식(Korjao)" 또는 킨워(Kinwor), 라후 새해 잔치는 추수 계절후에 행한다. 정확한 날은 정해져있지 않지만  라후 새해 잔치는 2월,3월 또는 4월에 열린다. 게다가 모든 라후마을이 같은 시기에 행사를 할 강제성은 가지지않는다. 요리후에 흑도야지를 죽여가지고 참깨를 썩은 인절미를 함께 신(우사 Uusa)께 제사를 지낸다. 이 거를 오푸(Orphu) 또는 카우푸(Kaopu)라고 일컫는다.

          카오자오 의식은 12일 동안 행해지는데 2시기으로 나누지고 각각 6일 식 행하는데 첫번째 주는 '코루앙(Kohluang)' 또는 큰 해이고 여자들이 잔치를 즐기고  그 다음 한 주는 '코노이(Kohnoi)' 또는 작은 해이고 남자들이 즐긴다.  첫째와 둘째 시기 사이에 1~2일 쉬는 시기이고 쉰후에 매일 밤 새벽까지 '카커 의식(Kaker)'으로 춤을 추고 낮에는 남자들은 팽이로 놀고 여자들은 사바(Saba)로 논다. 나무 씨앗과 벼겁찔로 만든 공을 사용한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잔치를 행하는 이유는 예전에 라후 남자들은 자주 전쟁,무역,사냥을 위해 여러 날을 집을 떠나야 했고 카오자오 의식에 참여하기위해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코루앙과 코노이를 하지만 남자와 여자들은 함께 잔치를 할 수 있다.  새해잔치 기간동안 모든 마을 사람들의 평화와 부를 기도하기위해 초를 붙인다. 다른 마을이 같은 시기에 잔치를 행한다면 라후 사람들은  포크를 가지고 이웃마을을 방문해서 오푸(Orphu)를 행하고 마당에서 함께 춤을 추면서 잔치에 참여한다.  이 것을 오리드다 의식(Orreetheda)이라 일컫는다. 몇 일후에 방문을 받은 마을은 반대로 손님으로 방문할 것이다.

          잔치 끝에 라후 사람들은 대나무로 장식된 워(Wor)를 제작하고 우사께(Uusa) 건강과 번영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축복의식으로 모래와 꽃

(새코 의식; Sae Kor ceremony)  


          라후 불교 전통인 모래상 전통 또는 '새코(Sae Kor)'는 타이 송크람 축제로 같은 시키인 4월14일이다. 새코는 죽은 동물에 대한 공덕을 기리는 전통의식이고 새코를 행한다면 자신의 죄를 속죄받을 수 있고 부와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로 믿는다.  새코를 행하기 위해 각 가정은 꽃이 장식된 대나무 투브,,쌀,벼,옥수수,생강,모래,초를 가져오야 한다. 모든 마을사람들은 새코를 행하기위해 마을 중앙에 모인다.

새코절차
ㄱ. 장식된 대나무를 세우기 위해 구멍을 만든다.
ㄴ. 새코를 행할 주변에 꽃으로 장식한다.
ㄷ. 중앙에 씨를 놓는다.                                                                 

ㄹ. 그리고 나서 초를 붙인다.

무당(샤먼)이나 노이이 죽은 동물에 공덕을 쌓고
용서를 빌기위해 축문을 읽는다.
게다가 모들 마을
사람을 위한 행복과 식물성장과 풍요를 기도한다.

호예(Hor Yae)

        라후 사람들은 조상,영,신 또는 우사를 숭배한다. 거의 모든 마을은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호예가 있다.  호예는 불교 절과 비슷하고 대게 종교 수장 토보(Dto Bo)'가 거주하는 가까운 고지에 있어서 호예를 보고싶다면 토보가 사는 곳에 가서 말을 하면되다.

호예에서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제단 또는 '카파테(Kapatae)'인데 이 곳은 우사와 토보가 대화하는 곳이다. 나무새 쌍,남자,'나나부 준개(Nanabu Ju-ngae)'그리고 여자,'나시 준개(Nasi Ju-ngae)'가 물 웅덩이 또는 '리데(Lide)' 가까이에 놓있다.  라후 사람들은 이 2두새가 신의 소유물이고 이 새들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되돌려 올 수 있다고 믿는다. 15세기에 한 달에 두번 상현달 기간동안 토두는 '리데'를 채웠을 것이다. 요즘 라후 사람들은 종교적인 관습을 준수하고 행하는 것은 그만 두었다. 호예에서 공덕을 쌓고 종교 의식을 위해 몇 가지 준비한다. '포이(Poy)' 식 또는 '자쿠(Jaku)' 춤을 춘다. 사람들은 춤을 더 많이 출수록 더 많은 공덕을 쌓는 다고 믿는다.

종교 집례자

           종교 선생이자 신(Uusa)와 마을 사람들과의 의사전달 수단인 토보는 기도하고 축문을 읽는 사람이다. 토보는
친절하고 수용적이기 때문에 호예를 돌봐야하는 의무가 있고 토보가 되기 위해서 그는 신내림을 받아야 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라후족은 다른 종족과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아지까지 조상들의 방식을 굳거니 지키고 이어오고 있다. 라후족은 그들의 문화와 삷의 상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라후인들은 종교적인 수장을 가장 존경하고 달이 차는 기간과 달이 지는 기간 15일 종교 의례를 위해 호예에 모이고 저녁에 속죄를 하고  신나게 밤에 춤을 춘다.

 

반잘래 고산부족 삶과 문화 센터(Ban Jalae Hilltribe Life and Culture Center)

       치앙라이 행정수도 치앙라이시로 부터 22km떨어진 반잘래(Ban Jalae)에 전통적인 라바 라후 마을이 있다. 반잘래는 후에이매사이(Huaymaesai) 폭포와 인접하고 아카,라후,미엔 부족 마을로 둘러쌓여 있다.  반잘래 마을 사람들은 여태까지 전통적인 신념을 고수하고 있고 정글 고산에서 수백년 이상 생존하면서 축천한 지혜의 근간이 되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Similar to most tribal communities in Thailand, however, Ban Jalae is experiencing a rural exodus as restrictions on farming land force families to send their children and young adults to work in the city to make ends meet. Losing this generation to the city produces not onl y a strain on the social fabric of the village, but also an abrupt discontinuity in the Lahu culture and lifestyle that has been passed down for centuries. Most concerning, Lahu youth working in the city often simply reject all aspects of their culture as 'old fashioned'.
To address the dual problems of cultural erosion and lack of sustainable sources of income near the village, the Mirror Foundation and Ban Jalae chose to create the Ban Jalae Hilltribe Life and Culture Center. This multi-media center powered by solar energy combines displays about traditional Lahu culture, handicrafts and know-how with video presentations that show that the deep and intricate cultures of the tribal peoples in and around Ban Jalae are anything but 'old fashioned'.

          The Ban Jalae Hilltribe Life and Culture Center is very much a community endeavor. All artifacts in the Center come from Ban Jalae and surrounding Akha and Lahu communities, with each home in Ban Jalae donating at least one  item. The community also invested six months of labor to construct the four adobe buildings that comprise the Center. The villagers of Ban Jalae have made this investment so that they may not onl y share their culture with guests to the village, but in hopes that the Center will rekindle among hilltribe youth throughout Thailand an interest in tribal culture that has waned over the past generation.

매야요 소 행정기관,치앙라이 관광 당국과 하기 관대한 재정과 물품 지원에 감사합니다.
         록펠어 재단
         국제노동기구 (ILO/IPEC;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싱가폴 국제기구 (SIF; Singapore International Foundation)
         고산부족 민속 박물관 @
www.hilltribe.org,  (록펠러재단 지원받는 미러재단프로젝트)
         워체스터 폴리테크닉 사(Worcester Polytechnic Institute)
         미러재단의 고산부족 친환경 관광 프로젝트 @
www.hilltribetour.com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힘과 비전을 위해 반잘래 마을을 알리고 싶습니다.

반잘래 고산부족 삶과 문화 센터는 전시실, 발표실,사진 및 예술 전시실 3개 홀이 있습니다.  전시홀에 과거에 현재가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주방시설,의복,다른 자료와 고산부족의 이주 지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발표실에서 후에이 매사이(Huaymaesai) 마을에 있는 고산부족에 대한 삶의 방식,문화를 비디오를 상영합니다.
(민 또는 야호,아카 또는 에커, 라후 또는 무저)
         

사진과 예술 전시실. 고산부족 아이들의 사진 전시

[출처] 태국 高山지대의 라후族에게 한글을 보급하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 2004

● 체질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흡사
●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으로 추정돼
● 한글과 유사한 언어 구조
● 글자가 없어 한글을 가르치는 작업 진행 중

李 炫 馥 서울大 명예교수
1936년 충남 보령 출생. 서울大 언어학과 졸업, 영국 런던大 박사. 現 대한음성학회 명예회장, 한국음성연구소 소장, 한국언어학회 회장, 서울大 언어학과 명예교수.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CBE 훈장 수훈, 제18회 세종문화상(학술부문) 受賞. 저서 「한국어의 표준발음」, 「한국어 표준발음사전」 등.

태국 북부에서 듣는 강원도 민요

<필자로부터 한글 음성문자를 배우는 라후族 사람들.>
 김치를 먹고 색동옷을 입는 태국 북부 고산지대의 라후(Lahu)族. 한글과 라후語는 놀랄 만큼 닮았다. 그래선지 음성언어만 있고 문자언어가 없는 라후族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우리나라에서 이주해 간 이민의 역사가 분명하고 그들의 말도 비록 여러 가지로 특이한 면이 있긴 하나 그래도 우리말의 여러 방언적인 차이를 보일 뿐, 분명히 우리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기록된 역사가 없는 동남아의 어느 高山族(고산족)이 쓰는 말이 우리 국어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면 흥미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과 해외 동포 이외에도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국 북부와 미얀마의 북동부, 그리고 라오스의 서북부 및 중국 운남성의 남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황금의 삼각지대" (Golden Triangle) 주변에 흩어져 사는 산족중에  "라후"(Lahu) 족이 있다. 이들의 언어 역시 "라후어"라고 한다. 이들은 화전으로 농사를 짓고 쌀을 주식으로 하나 항상 먹거리가 부족한 실정이다. 태국인들이 가늘고 긴 알랑미로 밥을 지어 먹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과거에는 양귀비 재배로 소득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양귀비 재배가 법으로 금지되어있다.   필자가 접촉한 태국 북부에 사는 라후족은 국적이 없고 여권도 가질 수가 없어 해외 여행이 불가능하며 태국 안에서의 여행도 자유롭지 못하다.  
   
 라후族은 언어, 풍속, 생활 양식 등에서 인근의 태국인이나 라오스인, 미얀마인, 중국인 등과는 전혀 다른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라후族은 얼굴의 생김새나 식생활이 한국인에 가깝다. 퍼슬퍼슬한 안남米가 아닌 둥근 쌀로 지은 밥에 김치 같은 반찬을 먹을 뿐 아니라, 축제 때에는 우리와 유사한 색동옷을 입는다.
 
  특히 음력 설 무렵의 축제는 라후인들에게 가장 즐겁고 풍요로운 잔치이다. 한껏 차려입은 젊은 남녀들은 마을의 공터에서 둥그런 원을 그리며 앞장 선 남자의 호로생 악기 연주에 맞춰 16박의 리듬으로 힘차게 땅을 내디디며 몸을 트는 춤을 춘다. 이런 축제가 젊은 남녀에게는 서로 짝을 찾고 사랑을 나누며, 결혼으로 이어지는 뜻깊은 기회가 된다.
 
  가톨릭 대학의 한승호 교수는 현지 조사를 통하여 라후族의 머리 형태를 조사 분석한 결과, 라후인이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짧은 머리형」과 「높은 머리형」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머리 형태는 형태학적으로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한다. 라후族의 남자는 한국인과 비슷한 위턱 앞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톨릭 대학의 미생물학 교실 팀은 라후族의 혈청에서 백혈구 抗原(항원)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 등 몇몇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HLA-B59가 발견됐다고 한다.
 
  라후族은 민속 음악에 있어서도 한국의 민요와 맥을 같이 한다고 중앙대학의 전인평 교수가 지적했다. 해당 구절을 소개한다.
    『라후 셀레의 민요를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 붙는 듯, 등골이 오싹해진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게 웬일일까? 수만 리 떨어진 태국 북부의 산 속에서 흡사 강원도 아낙네가 푸념하듯 내뱉는 노래가 들려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사만 바꾸면 그냥 강원도 민요다. 노래의 장단, 노래의 시작하고 끝나는 법, 특히 잔잔한 우수가 깃든 음악의 정서가 완전히 일치한다. … 이러한 상관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라후語 「너레」는 한국어 「너는」과 같다
 
  특히 라후語는 그 구조가 한국어에 아주 유사하다. 소설가이며 문화탐험가인 김병호 박사는 라후族을 고구려의 유민으로 보고 있다. 羅唐(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三國史記와 수만 명의 고구려 유민이 唐軍(당군)에 쫓기다가 운남성 부근에서 사라졌다는 중국 史書의 기록을 근거로, 그들 중 역경을 딛고 南으로 南으로 내려온 고구려인의 후예가 바로 라후族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쓰는 말 역시 고구려 유민의 언어, 즉 우리말의 일종이라고 본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매티소프(Matisoff) 교수는 『라후말의 구절 구조는 일본어와 한국어에 대단히 유사하다』고 했다.
 
  그러면 라후語가 우리말과 어느 면에서 유사하며,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너레 까울리로 까이베요」는 「너는 한국으로 간다」라는 뜻이다. 우선 이 문장을 이루는 낱말의 배열 순서가 「주어+보어+술어」로 한국어와 일치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술부의 동사가 문장의 끝에 온다. 영어라면 「You go to Korea」이니 술어가 바로 주어 다음에 오게 된다. 독일어나 중국어도 마찬가지이다.
 
  「너레」의 「너」는 우리말의 「너」라는 대명사와 형태가 아주 유사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격조사 「레」이다. 이는 북한(과거 고구려) 사투리에서 「내레, 너레」 할 때의 주격 조사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작의 방향을 나타내는 「로」는 현대 국어에서도 「서울-로」, 「김포-로」에서와 같이 일상 쓰이는 조사로서 형태와 기능이 일치한다.
 
  「간다」는 뜻의 라후말 「까이」도 한국어의 「가다」와 비슷하다. 「까울리」는 中國이나 태국 등에서 「고구려」나 「고려」를 뜻하는 말로서 바로 우리나라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라후말로 문장을 구성할 때는 우리말 순서대로 라후말 단어를 대입만 하면 되며, 단어 중에는 형태마저 같은 것이 있으니 더욱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휘에 있어서는 한국어와 유사한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상대를 부를 때 쓰는 호격도 우리말과 유사하다. 가령 한국어에서 인순이를 부를 때 「인순아!」 하듯이 라후 사람들도 「나시」라는 이름을 부를 때 「나시아!」라고 한다. 부르는 상대의 이름 다음에 「아」라는 어미를 더하는 것은 틀림없는 한국식이다.
 
  명사에 붙는 라후語의 소유격 「베」 역시 한국어의 「의」처럼 쓰인다. 「너베 예」는 「너의 집」이다. 분류사를 쓰는 방법도 같다. 우리말의 「소 두 마리」에서 「마리」를 분류사로 볼 수 있는데, 라후語에서는 「마리」에 해당하는 분류사 「케」가 「둘」을 뜻하는 수사 「니」 다음에 연결되어 「누 니 케」로 대응된다. 라후말 「누 니 케」와 우리말 「소 두 마리」는 그 구성이 똑같다.
 
 
  음성체계, 형태·통사론적 특성도 유사
 
  라후語는 음성체계도 한국어와 유사한 면이 많다. 음성체계가 유사하다는 것은 발음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우선 자음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三重대립을 나타낸다. 가령, ㅂ/ㅍ/ㅃ 같은 파열음이 三重으로 대립하여 한국어에서 비/피/삐 같은 낱말을 이루어 내듯이, 라후말도 이같은 三重대립을 보인다.
 
  영어 등의 서양 언어가 b/p 의 두 가지밖에 구별을 안 해 bay/pay 같은 二重대립밖에 없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라후語는 우리말에 없는 소리가 네댓 개 더 있다. 가령, 목젖으로 나는 소리는 한글로 표기할 수 없다.
 
  라후語의 모음 역시 한국어와 유사하다. 우리와 같이 이/에/애/아/오/우/어/으 같은 모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소리 값 역시 아주 유사하다. 특히 다른 외국어에서 찾아보기 힘든 「으」나 「어」를 한국어와 라후語가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라후語에는 제주도 말에 지금도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15세기 국어의 「아래 아」 모음이 하나 더 존재한다. 이 소리는 표준말의 「오」보다 입을 더 벌리고 혀를 내려서 내는 열린 모음이다.
 
  이렇게 볼 때 라후語는 한국어보다도 자음과 모음의 수가 더 많다. 그러나 라후語는 聲調(성조·목소리의 높낮이)가 7개나 있어서 우리말에 비해 복잡한 면도 있다.
 
  음성과 음운의 체계가 유사할 뿐 아니라, 형태론 및 통사론적 특성에 있어서도 라후語는 우리말과 유사한 면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언어학적으로 라후語는 「사이노-티베트(Sino-Tibetan)」라는 거대한 語族에 속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 語族의 한 분파인 「티베트-버마계」로 이어지며 그 하위 분파인 「롤로-버마계」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국어는 알타이 語族에 속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語族的으로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라후語가 어찌하여 한국어와 유사성을 지니는지 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라후語는 과연 한국어와 계통이 같은 언어인가? 아니면 단지 유형적으로 유사성을 지니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으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우리말과 유사한 면을 지니게 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려면 먼저 라후語 자체에 관한 언어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어서 라후語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어와 구조적 특성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라후族과 한국인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도 앞으로 계속 연구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라후族은 고유의 언어인 라후語를 쓰고 있으나 이를 표기할 글자가 없는 無文字 고산족이다. 일부 기독교로 개종한 라후의 젊은이들은 선교사들이 만든 로마자 표기를 이용해 라후말을 적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못한 대다수의 라후인들은 아직도 글자를 모르고 음성언어에만 의존하고 산다.
 
  이같이 문자가 없고 기록이 없으니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와 역사에 대한 기억도 겨우 口傳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라후族은 자신의 조상들이 아주 먼 옛날 흰 눈이 내리는 추운 곳에서 왔다는 정도로 내력을 알고 있을 뿐이다.
   
  국제한글음성문자」로 해결
 
  필자는 1994년 태국 북부 치앙마이市 인근의 산중에서 라후, 아카, 리수 등의 山族 마을에 처음 들어가 보고 놀라움과 함께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필자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국가와 일본 등 문명사회의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가져왔다. 문명을 등지고 사는 오지의 사람들과는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여유롭게 사는 그들의 모습에서 연민과 함께 일종의 동경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특히 고구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라후族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라후語를 조사·연구하며 우리말과 관련성을 비교 검토하는 데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필자는 그 과정에서 고유의 글자가 없는 라후族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자유롭게 글자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후語의 음성체계를 볼 때 라후語를 표기하는 데 한글 이상으로 적합한 글자가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두 언어의 음성체계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라후語에는 우리말과 일치하는 모음이 8개나 되고, 자음에서는 18개가 대응되니 몇 개만 더 보완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후語가 한국어보다 모음과 자음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이다. 우리말은 모음 8개, 자음 19개를 적을 수 있으면 되나 라후語는 모음이 9개, 자음이 23개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행 한글 자모만으로는 라후語를 완벽하게 적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오래 전에 필자가 고안해 발표한 「국제한글음성문자」 중에서 라후語에 필요한 기호를 택해 추가하는 방법으로 라후語의 한글 표기 체계를 완성하였다. 국제한글음성문자는 한글을 바탕으로 개발한 발음기호로 이를 이용하면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정확하게 적을 수 있다. 가령, 현행 한글 자모로는 서양어의 f, v, th, sh 같은 소리를 적을 수 없으나 국제한글음성문자로는 이런 소리를 모두 적어 낼 수 있다. 라후語에는 목젖 소리나 우리말의 「오」보다 입을 더 열고 내는 모음이 있는데, 이들을 현행 한글로는 적을 수 없으니 이에 해당하는 한글 음성기호를 골라 활용하게 된다.
 
 
  라후인들의 한글 습득은 성공적
 
  라후語에 맞는 한글 표기체계를 마련하는 것과 이를 라후인에게 가르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한글이 있었어도 실제로 이를 배우지 못한 눈 뜬 장님이 많았던 것처럼, 라후말을 적을 수 있는 한글 음성문자 체계를 만들어 내도 이를 실제로 가르치고 학습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일이다.
 
  라후의 어른들은 아편이나 피우며 無爲徒食(무위도식)하는 하는 이들이 많고 여자들은 집안일, 밭일 등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니 억지로 불러 앉힐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무리 없이 가르치기 좋은 층은 어린이들이며 여기에 일부 청년들과 여인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라후인의 한글 습득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진도가 빠른 사람들은 며칠간의 학습으로 자신과 가족의 이름이며 마을 명칭 등을 한글로 쓸 수 있고 일상의 간단한 표현을 적어 낼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에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이 어려운 漢字에 고통을 겪던 우리 민족을 위하여 창제한 훈민정음이 21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의 오지에 사는 高山族의 손으로 쓰이고 있다니, 그것도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적는 데 쓰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한글의 국제화이며 동시에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펼치는 길이기도 하다.
 
  라후인들이 한글을 쉽게 익힐 수 있는 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한글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ㄱ」을 배우면 「ㅋ」과 「ㄲ」을 쉽게 배우듯 한 글자를 배우면 이와 글자 모양이 유사한 글자를 쉽게 배우고 기억할 수 있게 한다. 만약에 로마자로 한다면 「g」와 「k」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기호를 익혀야 하는 부담이 있다.
 
  둘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라후語가 한국어와 같이 三重대립을 보이므로 한글로 대응시켜 적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다. 로마자 「g」와 「k」만 가지고는 라후語의 세 가지 소리 「ㄱ」, 「ㅋ」, 「ㄲ」을 간편하게 적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라후族을 대상으로 한 한글보급운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깊은 산 속 이곳저곳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수만 명의 라후族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을 하려면 많은 교사와 긴 세월의 노력이 필요하다.
 
  라후族이 진정 고구려의 유민이라면 우리는 1300년의 긴 단절 끝에 우리의 동포를 다시 만난 셈이다. 글자를 모르는 이들은 한글을 학습할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한글을 전수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한글은 그들의 글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라후族은 태국 북부와 미얀마의 북동부, 그리고 라오스의 서북부 및 중국 운남성의 남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황금의 삼각지대(Golden Triangle)」 주변에 흩어져 산다. 이들은 화전(火田)으로 농사를 짓고 쌀을 주식(主食)으로 하나 항상 먹을거리가 부족한 실정이다. 과거에는 양귀비 재배로 소득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양귀비 재배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필자가 접촉한 태국 북부에 사는 라후族은 국적이 없고 여권도 가질 수 없어 해외여행이 불가능하며 태국 안에서의 여행도 자유롭지 못하다.
 
  라후族은 「검은 라후(Lahu Na)」, 「노란 라후(Lahu Shi)」, 「붉은 라후(Lahu Ni)」와 「라후 셀레」로 나뉘어 방언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이 중에서 「검은 라후」의 말이 대표적인 표준말로 널리 통용된다. 전체 인구는 6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에서 중국에 36만 명, 미얀마에 20만 명, 태국에 6만 명, 라오스에 2000명 정도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양신을 믿고 호랑이를 숭배
 
  해발 1200m 이상의 높은 산 속에 사는 라후族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단순한 집에서 산다. 한쪽 면을 산비탈에 맞대고 마룻바닥을 땅에서 들어 올려 높다랗게 지은 대나무집 아래와 주변 마당에는 닭, 개, 돼지 등의 가축이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모습이 정겹기까지 하며 옛날 우리나라 산골 농촌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순하고 작은 집이긴 하나 집집마다 방안에는 취사를 위한 부엌 세간이 있고 한 쪽 위에는 간소한 神壇(신단)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들의 토속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라후族은 태양신을 믿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다. 태국인들은 라후族을 「뭇수르(mussur)」라고도 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하는 데서 붙여진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길게 연결한 대나무 대롱에 산골짜기의 물줄기를 실어 집 마당까지 끌어 들여 식수로 쓸 뿐 아니라, 세면과 목욕에까지 이용하는 생활의 지혜에 절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태국인들은 높은 산 속에서 가난하게 사는 라후인들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며 깔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배운 것 없이 산 속에서 곤궁하게 사는 山族들이니 그렇게 대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후族이라고 제대로 된 농토를 원하지 않겠는가! 넓고 편편한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싶지만 심산유곡에서는 어려운 일이고, 산을 내려와 평지에 접근하면 태국인과 마찰을 빚고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이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라후인이 산 아래 쪽으로 내려와 버려진 땅을 밭으로 개간해 놓으면 이를 빼앗으려는 태국인과 마찰을 일으키게 마련이고 때로는 살인사건이 빚어지기도 한다.
 
  라후族은 이렇게 험난한 생활을 꾸려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린 딸을 싼 값에 팔아 넘기는 부모가 적지 않다. 겨우 14~15세가 될까 말까 한 나이가 되면 가난에 찌든 부모, 특히 아편에 중독된 아버지는 돈 몇 푼에 쉽게 딸을 팔아 넘기곤 한다. 태국인, 중국인 등 외국인에 팔려 가는 경우가 많으며, 근래에는 방콕 등 대도시의 유흥가로 흘러 들어가는 일이 적지 않다.

아카족 마을을 가다

 

태국 북부 고산지대에 사는 아카족 사람들 풍습

▲ 전통 아카족 집. 비가 많이 와 뒷 배경이 흐리다
ⓒ 오문수
태국 북부 고원지대에는 '아카족'이라는 고산족이 산다. 원래는 중국 남부 지방에 살았으나 백여년 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쫒겨나 미얀마와 태국 북부, 라오스 지방에 흩어져 산다. 1천m 이상의 고산지대에 사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아편을 재배했으나 현재는 옥수수, 벼, 토마토 등을 재배하면서 살아간다.

지형적 장애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혈통을 지키는 이들은 남들과 서로 교류하지 않고 살아왔다. 한가한 날을 잡아 데이빗 아사와 함께 그녀가 태어난 아카족 마을을 방문했다.

▲ 아카족 젊은 엄마의 전통복장
ⓒ 오문수
▲ 아카족 노인들의 전통복장으로, 자세히 보면 씹는 담배로 입술이 시커멓다
ⓒ 오문수

 [아카족 여인 전통의상] 우리 한복 색동옷의 느낌이 풍겨나오는 왠 일일까?

독립성과 문화적 주체성이 강한 고산족들은 자신들만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강해 데이빗과 아사가 기독교 포교를 하려하자 마을 사람들이 죽이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아카캠프를 방문하여 찬송가를 듣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면서부터 포교가 허용됐다. 하지만 아직도 2백여 가구 중 1/10인 20가구만 기독교를 믿는다.

데이빗이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우리의 서낭당에 비유할 수 있는 곳으로 마을에서는 동물의 정령신을 모셨다.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걸치듯이 걸쳐 놓은 나무에는 여러 형태의 정령들이 얹혀 있다.

[태국영화 제목: 사랑스런 아카족]


▲ 우리나라의 서낭당에 해당하는 정령신을 모시는 곳
ⓒ 오문수
마을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면 이들은 신이 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죽이고, 이들을 낳은 부모는 마을에서 1년간 쫒겨나 누구하고도 대화를 하지 못하고 격리되어 살다가 1년 후에야 돌아올 수 있다.

▲ 부엌의 모습으로 그을음 때문에 거의 모든게 시커멓다. 걸어놓은 고기도 보인다
ⓒ 오문수
데이비드와 아사가 직접 지은 교회 옆 목사관 건물로 들어섰다. 목재인 기둥과 비를 막기 위해 지붕에 덮는 갈대를 제외한 모든 것은 대나무로 만들었다. 심지어 갈대와 갈대를 엮는 얇은 줄도 대나무를 베어 싱싱한 상태에서 얇게 만들어 물에 담가두면 잘 휘어져 실처럼 감으면서 엮을 수 있다.

습하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 특성상 다른 재질로 엮으면 쉽게 썩기 때문에 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지열을 피하기 위해 거의 모든 집들은 지상에서 1m 정도 공간을 두고 집을 지었다.

▲ 아사가 시범을 보여준 여자들의 운반도구인 '가카', 무거운 짐을 운반할 때는 머리 어깨 양손을 모두 사용한다
ⓒ 오문수
1m 정도 빈 공간에는 닭 돼지 개 들이 함께 살아, 우스갯소리로 새벽닭이 울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단다. 신혼부부가 결혼해 아이들이 없을 때는 집 밖에 조그만 집을 지어 살다가 아이들이 크면 집으로 돌아온다.

방은 2개가 있어 왼쪽 방은 여자가 오른쪽 방은 남자들이 따로 잠을 자, 부부라도 아침에야 만날 수 있다. 남자들 방은 단촐하지만 살림살이를 두고 부엌과 붙어 있는 여자들 방은 좀 더 복잡하다.

▲ 살림살이가 없는 남자방, 오른쪽 대나무 벽이 옆방과 붙은 곳으로 옆방 모습이 다 보인다.
ⓒ 오문수
▲ 살림살이가 있는 여자방으로 복잡하다. 두 번째 부인도 첫째 부인과 함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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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방을 구분하는 벽이래도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져 다 보이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잠자리에 들기도 곤란하다. 만약 시부모를 모시면 마당 한켠에 집을 지어 분가한다. 아카족은 일부다처제로 둘째 부인이 시집와도 여자 방에서 첫째 부인과 함께 자는데 위계질서가 분명하다. 현재는 많이 개화됐지만 지금도 둘째 부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전통복장은 나이든 여인과 젊은 여인들의 복장이 다르고 노인들을 공경한다. 이들은 '가카'라는 운반도구를 이용해 물건을 나르는 데 짐이 무거울 때는 머리와 어깨에 댄 나무판자, 그리고 양손을 뒤로 돌려 바구니를 받쳐 든다.

▲ 부엌에서 약간 벗어난 실내 천장에 있는 제비집으로, 제비똥을 방지하기 위해 대나무 발을 밑에다 댔다.
ⓒ 오문수
집안 천장에 새집이 있어 물어보니 제비집이란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왔다던 강남'이 바로 여기다. 제비는 아침에 나가 저녁이면 돌아와 잔다. 고산족들은 개, 고양이, 닭, 돼지, 새 들과 함께 산다는 느낌이다. 방밑에 있는 닭, 돼지는 그렇다 치고 부엌 위에 있는 제비가 밥먹을 때 똥을 싸면 어쩔까 걱정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제비집 밑에 촘촘히 엮은 대발로 방지턱을 만들어 붙여 놨다.

모든 벽과 바닥이 나무와 대나무로 구성됐지만 사방 1m쯤 되는 부엌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흙이 깔려 있다. 흙 부분에다가 화덕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음식을 하는데 연기가 방안에서 나기 때문에 온통 검은색 가구이고 연기 냄새가 배어 있다. 식탁은 대나무로 짰고 밥통은 박을 건조시켜 한 쪽만 둥그렇게 파낸 부분에 밥을 넣고 보관하기도 한다.

2년 전에 전기가 들어오고 작년에야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났지만 여자들은 도로곁으로 혼자서 못 다닌다. 아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백 여명의 마을 여아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낯선 사람을 보면 길가 수풀 속으로 숨었다. 납치된 여아들은 방콕의 사창가에 팔려갔다.

▲ 대나무로 만든 식탁으로 주걱과 젓가락, 양념을 갈기 위한 도구와 나무의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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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로 돌아오는데 계곡과 계곡 사이에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비가 와서 사진을 못찍고 돌아와 못내 아쉽다. 태국의 하늘은 믿을 수가 없단다. 태양이 쨍쨍 내리쬐다가도 어느새 비가 오기 시작한다. 널어놨던 빨래를 몇 번이나 비를 맞혔다.

전기줄, 도로, TV 등 문명의 모습이 보여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어딜가나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들의 순수함에 감동된다.

가난한 이들은 매달 한 번 있는 아이들 정기 면회날에도 못오고 일년에 두 세번 그것도 큰맘 먹어야 가능하단다. 어둡던 과거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문명 때문에 순수성과 아름다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종종봤다. 문명세계에 사는 가진 자의 오만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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