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자르마신 수상 시장 |
ⓒ 김비아 |
잠빗을 지나 드디어 팡칼라분에 도착, 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오랑우탄 보호 센터가 있는 탄중푸팅 국립공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찰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허가증을 발급 받은 후 탄중푸팅에서 가장 가까운 강변의 작은 마을 쿠마이(Kumai)까지 갔다
▲ 반자르마신 수상 시장 |
ⓒ 김비아 |
충남 부여 출신의 김익배(53) 목사가 88년 서칼리만탄 주도 폰티아낙에서 차량으로 9시간 떨어진 신탕군(郡)에 첫 발을 내디딘 이래 지금까지 헌신적인 선교사업을 펴 대성공을 거뒀다.
밀림속 판잣집에서 처음 시작한 `아가페 선교원'이 150㏊가 넘는 부지에 현대식 병원과 각급 학교 고아원 목공소 등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해 열악한 환경속에 있는 원주민들에게 무료 의료서비스를 포함한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반기독교 성향이 짙은 이슬람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신탕지역에서 아가페 선교원의 복음 전파 노력이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김 목사의 선교 방법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선교 초기 외부 세계와 고립된 정글 마을로 무작정 들어가 복음 전파를 시도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주민들이 말라리아와 장티푸스,간염등 각종 풍토병에 걸려 신음하고 90% 이상이 문맹자인 현실에서 복음이 제대로 전달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대부분 원주민은 평소 온순한 편이나 분쟁이 생기면 상대편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매달거나 시신의 간과 골을 꺼내 날 것으로 먹을 정도로 잔인한 성격을 드러내는 다약족이다.
김 목사는 원주민들과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그들 방식대로 맨손으로 밥을 먹고 손수 이발을 해주며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들을 부둥켜 안고 눈물로 기도하는 등의 사랑을 쏟는 것만으로는 선교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교육 및 병원 사업을 추진키로 결심했다.
그는 이어 계파와 국적을 초월해 기독교인들에게 선교 취지를 설명하고 지원을 호소해 한국과 미국, 인도네시아 교회 등으로부터 다양한 후원을 받아 학교와 병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
91년 농촌지도자 훈련원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해 학생 100여명을 모집, 성경 공부와 함께 축산 및 양어, 목공 기술을 가르쳤고 97년에는 부지 10㏊에 건물 17동을 신축해 적도신학대(STTK)를 개교했다.
유치원과 초.중.고교도 문을 열어 정글 속의 미개한 다약족 어린이들이 문명 세계에 눈뜰 수 있도록 가르쳤다.
96년에는 부지 27㏊에 병상 100여개를 갖춘 현대식 병원을 건립, 그동안 연평균1만-1만2천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의료진들은 STTK 재학생들과 함께 매월 한 차례씩정글을 돌며 무료 진료활동을 벌여왔다.
병원의 헌신적인 의료봉사 덕택에 밀림 지역 원주민들의 유아 사망률이 크게 개선됐다.
아가페 선교원으로부터 강물과 늪지대를 따라 뱃길로 2시간 떨어진 신쿠앙 마을에서 14일 연합뉴스 특파원과 만난 주민 트리시아나(21.주부) 씨는 "아가페 의료팀 덕택에 10년 전 60-70%에 달했던 유아 사망률이 10%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또 지방자치제 도입과 위성TV 보급 등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정신세계가 급속히 황폐해지고 있다고 판단, 정글 거주 청소년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3대 장강으로 꼽히는 카푸아스강 주변의 늪지대 4㏊를 구입해 2002년 목공소와 고아원을 완공한데 이어 태권도와 성경, 컴퓨터, 영어교육센터와 함께 영화관과 음악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 오락.교육 센터 건립은 2000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일부 원주민이 벌목권을 갖게 돼 졸부가 되고 위성TV가 보급되면서 도박과 윤락, 사기 범죄가 늘어나밀림 속 청소년들의 장래를 위협할 수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다.
김 목사는 원주민들 사이에 `말뚝박는 목사'로 통한다.
정글 곳곳을 누비며 말뚝을 박고 톱으로 나무를 잘라 건물을 세우는 방법으로 손수 건립한 교회 숫자가 100개를 넘은데 따른 별명이다.
그는 33-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정글을 오갈 때 빗물과 강물을 마시며 생활한 탓에 그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겪었으나 한번도 선교활동을 단념할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의 두 다리는 7년 째 계속된 피부병으로 인해 진물이 나고붉은 반점으로 뒤덮혀 있어 중증 나병환자를 연상케 한다.
그는 "98년과 2000년 각각 대장암, 심장병 수술을 받았고 각종 열대 독충에 물리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맞았다.
병에 걸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아픔을 주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육신은 힘들었으나 절망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또 "기독교인들이 `소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세상이 타락하고 있다.
원주민들의 육체적 아픔을 치유하고 정신세계를 맑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정글에 남아 선교활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한편 다약족은 42-45년 식민지 점령군 일본군에 의해 2만3천명이 학살당할 당시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의 만행이라는 거짓 정보에 속아 한국에 대한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었으나 아가페 선교원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실을 알게된 점도 김 목사의 소중한 업적이다.
(자카르타/연합뉴스)
한국인 선교사가 인도네시아 정글 속에서15년 동안 원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교회 100여개를 건립해 의료와 교육 봉사 등의 활동을 벌여 온 사실이 드러나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마을의 롱하우스를 둘러보았다. 원래 다약 사람들은 롱하우스에서 함께 살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이야기다. 가이드북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이 일대에 있는 롱하우스들은 관광객을 위해서 70년대부터 지방 정부에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특한 조각이며 군상들이 무척 매력 있었다. 일부 다약족은 마을에 살지 않고 정글 속에 흩어져 살아가는데, 그들을 발견하기란 무척 어렵다고 한다. 수리야디씨가 마을 이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버팔로 의식 같은 것은 이미 끝나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무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다약족의 전통춤을 20만 루피아를 내면 볼 수 있다고 했다. 2만원 정도 되는 돈이기에 그러자고 했다. 나는 밝은 낮에 보기를 원했지만 낮에는 농사지으러 가기 때문에 밤에만 가능하단다. 강가라서 농토는 보이지 않았기에 어디에서 농사를 짓느냐고 물어보았다. 두 시간 정도 걸어가면 농장이 있어서 매일 그 먼 길을 오간다고 했다. 강가에 사는 이유는 아마도 물을 구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약속한 8시가 되어서 롱하우스에 갔다. 날은 이미 져서 어두운데, 꼬맹이들부터 시작해서 할아버지까지 마을 사람들이 전통 옷으로 차려입고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색채와 장식이 감탄할 만큼 무척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흐릿한 조명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예쁘장한 소녀 하나가 다가오더니 내게 선물로 목걸이를 걸어주고 머리띠도 둘러 준 다음에 내 자리라며 의자로 안내했다. 롱하우스는 춤꾼, 악사들, 그리고 구경나온 다른 마을 사람들로 이내 가득찼다. 혼자 보기엔 정말 과분한 춤이었다. 한 마디로 기대 이상이었다. 농사, 사냥, 전쟁, 출산, 치료,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름 짓기 등의 춤이 무려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갖가지 마을 축제와 의례 때마다 추던 춤을 공연용으로 줄여서 한데 모아놓은 것이었다. 어린 꼬마들까지 춤에 가세해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뿐만 아니라 접시를 돌리는 다약 소녀들의 표정과 미소는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여행의 피곤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그런 표정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에. 나이드신 어머니들의 능숙한 동작, 할아버지들의 신들린 듯한 몸놀림도 놓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피리 소리, 북 소리를 따라서 꿈결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칼리만탄은 인도네시아에서도 가난한 지역에 속하지만 목재를 비롯해서 석유, 천연가스까지 돈 되는 것은 죄다 여기에 있으니 개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결국 자본을 소유한 외지인들인 모양이다. 춤이 끝나고 칼리만탄의 그 단단한 나무로 만든 조각품도 몇 개 샀다. 원래 다약 여인들은 귓볼에 구멍을 뚫어서 금속 고리를 매단 후 귓볼을 어깨까지 길게 늘어지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조각상 속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깨까지 늘어뜨린 귓볼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만쫑(Mancong) 마을로 출발했다. 탄중 이수이에서 만쫑까지 이어지는 강길은 양 옆으로 숲이 무성하다. 긴코 원숭이가 간간이 모습을 나타냈고 색색의 새들이 날아왔다 사라져갔다. 다들 농사지으러 갔는지 만쫑 역시 고요했다. 롱하우스를 둘러보고 거리를 거닐다가 학교가 눈에 띄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그 틈으로 교실 풍경이 내다 보였다. 학생들도 나를 발견하고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쳐다보았다.
배의 소음과 진동, 딱딱한 바닥, 강 바람은 기운을 완전히 소진시켰으며, 탄중푸팅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을 물 위에서 보내면서 뭍과 산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어제의 감탄은 어디로 갔는지, 어서 빨리 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외로운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마하깜에서는 유독 그랬다. 아마 말 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수리야디씨를 제외하고는 의사 소통이 불가능했고, 여행자라고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나 매한가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이 광막한 강, 그 지류를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을 영위하고 있는 마하깜은 내게는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다른 세계였다. 자신에게 속한 수많은 동물과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풍요롭다 할 만한 칼리만탄의 대자연은 내게 다소 거칠고 위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힘겨운 보트 여행 말고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땅을 밟고 싶어서 마을에서 가까운 정글을 트레킹할 수 있냐고 수리야디씨에게 물었다. 아쉽게도 그는 이곳 문화나 트레킹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결국 걸음을 돌이켜서 꼬따반군까지 되돌아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더니 물결이 많이 쳤다. 나는 보트가 뒤집어지지나 않을까 무척 염려했는데, 보트를 모는 노인은 괜찮다는 미소를 보내왔다. 곧 이어 강물은 잠잠해졌고 그 위를 보트는 쏜살같이 달렸다.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꼬따반군에 닿았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버스도 끊긴 뒤였다. 따뜻한 물에 씻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밖에 없었던 나는 마을에서 지프를 고용하여 그 밤에 사마린다까지 갔다. 그리고 가장 좋다는 호텔 머사라로 직행했다. 사마린다에 오니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심심하면 오지 타령을 해왔으면서도 역시 내게 문명 세계는 친숙한 곳이었나 보다. 피곤과 외로움으로 서둘러 떠나오기만 했을 뿐 그곳의 삶과 문화를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또 여유있게 즐기지도 못한 것이 마하깜 여행이었다. 돌이켜보면 많이 부족하고 아쉬운 날들. 그렇지만 그 끝모를 강을 가랑잎 같은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달리던, 드넓은 하늘과 강 사이를 빠져나가던 순간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은 그토록 넓었으며 천 개의 얼굴을 지닌 자연은 인간 삶의 방식도 그만큼 다양하게 규정짓고 있음을 마음에 새긴 시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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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또 종족분쟁
◆사진설명 : |
피해자는 주로 마두라족. 창과 칼 방패 등으로 무장한 수천명의 다약족들이 마두라족의 정착촌을 습격,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고 마을 전체에 방화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중부칼리만탄 주도인 팔랑카라야 일부가 일요일(25일)밤 불길에 쌓였으나 월요일(26일) 아침에는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번 유혈사태로 삼팟지역에 거주하는 마두라족 3만여명중 2만명 이상이 해군 선박 등을 타고 피신하는 등 탈출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25일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중인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특수부대 파견 지시로 26일부터 공수부대 등이 현지에 투입되면서 사태는 당분간 악화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현지 외신들에 따르면 다약족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마두라족 이주민들의 머리를 잘라 창에 꿰거나 허리춤에 차고 시내를 행진하고 있으며 흥분한 일부 폭도는 『우린 마두라족의 심장을 날로 먹었으며 그것이 육체와 정신을 강하게 해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인도네시아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놓고 다약족은 가해자, 마두라족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으로 사태를 파악하면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초 보르네오섬의 원주민은 다약족이었는데 수하르토 독재정권 이후 인근 회교도 마두라족들을 대량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다약족의 삶의 터전과 경제적 지위가 위협받아 왔으며 그로 인한 갈등·원한이 수하르토 몰락 이후 본격적으로 분출돼나오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칼리만탄과 인접한 말레이시아의 사라와크와 사바주에선 마두라족 유민들로 비상이 걸렸다. 마하티르(Mahathir) 말레이시아 총리는 『사태를 주시하며 우리 안보를 지켜야한다』고 밝혔다. 지난 두달간 말레이시아 해경은 바다를 통해 밀입국하려는 인도네시아인 1500여명을 체포했으나 실제 밀입국수는 수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다약-마두라족 분쟁사
다약족은 보르네오섬에 사는 원주민을 통칭한다. 보르네오섬은 현재 남부는 인도네시아, 북부는 말레이시아, 북부 일부는 브루나이왕국으로 삼분돼 있다. 다약족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정글에서 수렵, 농업 등을 하며 살아왔다. 1930년대 인근 마두라섬에 사는 가난한 마두라족이 풍요로운 보르네오섬으로 이주하면서부터 분쟁이 시작됐다.
단결력이 강한 회교도들인 마두라족은 순박한 다약족들의 터전을 차례로 잠식해나가기 시작했으며 특히 1970년대 수하르토정권이 대량이주정책을 더욱 권장하면서 사태는 악화돼나갔다. 마두라 및 자바족들은 차츰 지배자적 모습으로 군림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다약족은 반감을 갖게 된 것. 결국 수하르토정권이 몰락하기 직전인 1997년부터 양측간 갈등은 유혈충돌로 표출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량살육으로 발전해나간 것이다.
( 홍콩=함영준특파원 yjhahm@chosun.com )
신동아 2001년8월 오지탐험 인도네시아 마지막 ‘밀림의 전사’ 다약족 |
올 초 인도네시아 대도시 도로에서 칼로 1000여 명의 목을 베어버리는 살육극을 벌인 다약족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비의 종족. 직접 이 종족을 만나봤더니 피부도 한국인과 비슷하고 풍속도 우리와 같은 점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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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 농학박사 > kimbh38@netian.com | |
때는 2001년이 막 시작되는 1월 어느날. 세계의 오지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에서 보기 드문 잔혹한 사건이 벌어졌다. 밀림 속에서만 살던 다약족이 마침내 봉기한 것이다. “우리도 인간이다. 더 이상 쫓겨갈 수는 없다.” 원시 무기인 죽창과 칼을 든 그들은 중부 칼리만탄의 큰 도시 팔랑카라야(Palangkaraya)와 삼핏(Sampit)을 점령하고는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적은 자바 섬의 북쪽 마두라 섬에서 칼리만탄으로 이주해온 마두라족. 인도네시아 정부는 마두라 섬의 인구 과밀 문제를 해소하고 또 원시 상태의 칼리만탄을 개발하기 위해서 문명의 노동력을 가진 상당수의 마두라족을 칼리만탄으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마두라족의 이주로 쫓겨난 다약족은 살 길을 찾아 정글 속으로 들어가서 어려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아메리카에서 백인들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인디언의 가슴 아픈 역사가 밀레니엄을 맞은 오늘날, 멀고먼 섬 칼리만탄에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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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로 적을 가려내 | |
“마두라족을 죽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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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유사한 민속 | |
필자는 인도 북부의 나가족 마을을 탐사했을 때, 그들이 우리 민족 고유의 씨름을 하는 광경을 보고는 놀란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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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그들의 조상들이 서아시아 혹은 인도에서 출발해 한반도 쪽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낙오되었거나 아니면 그 역으로 한반도 쪽에서 인도 방향으로 가다가 보르네오 섬(칼리만탄)에 주저앉아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