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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주연의 신토불이

근현대사25

언양, 복음의 씨앗, 왕길지(王吉志, Gelson Engel) 선교사 언양, 복음의 씨앗, 왕길지(王吉志, Gelson Engel·1864∼1939) 호주선교사 언양제일교회는 100년이 넘은 오래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02년 삼남면 덕천역(德川驛) 수남(水南)마을에서 수남교회로 시작해서 교인이 늘자 언양읍성 남문 밖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덕천역은 삼남읍 교동리 수남마을의 덕천고개 서북쪽에 설치됐던 역참(驛站)인데 이 역은 양산의 위천역(渭川驛), 울산의 굴화역(堀火驛), 경주의 잉보역(仍甫驛, 인보(仁甫))을 연결하여 조선시대 언양현 물류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덕천고개를 넘어 진등(長嶝, 陣嶝) 산등성이를 따라 가다보면 교동리 진장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생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 언양읍성에 도대체 어떻게 복음이 전파된 것일까?.. 2021. 7. 16.
양산의 독립운동가, 김철수(金喆壽 1896~1977, 독립운동가, 정치가) 김철수(金喆壽 1896~1977, 독립운동가, 정치가), 양산의 독립운동가 김철수는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번지에서 김상형(金商炯)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삼마을은 상북면 소재지 석계와 양산천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상삼마을에서 1km 떨어진 좌삼마을은 대한제국 1907년 의병장 서병희(徐炳熙 1867~1907)의 고향이고 김철수의 집 가까이 의병장 김병희(金柄熙 1851~1908)의 집이 있다. 1907년 6월 11일 서병희 부대의 도주를 위해 김병희와 아들 교상(敎相 1872~1908)은 자기 집 사병(포수 의병) 50여명과 일본군 50여명(제14연대 의병토벌부대)과 40분이 넘게 교전해 14명을 사살(또는 중상)한다. 하지만 김병희, 교상 부자.. 2021. 7. 10.
언양 사회주의 운동가, 신학업(申學業) 신학업(申學業, 이명: 신주극申柱極, 신주식申柱植, 신학우申學雨 1901~1975), 언양(彦陽) 사회주의 운동가 신학업은 1901년 12월 16일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서부리 156번지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156) 에서 출생했다. 고령(高靈) 신씨 이족(吏族, 아전衙前) 가문으로 아버지 신병석(申秉奭)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석하(金錫夏)의 딸 김옥봉(金玉鳳) 사이의 첫째 신근업(申根業), 둘째 신영업(申榮業), 막내 신동업(申東業), 누이 신수복(申壽福)과 신래복(申來福) 중 셋째 아들이다. 신학업의 자녀로 거창에 거주하는 신숙자이다. 신학업의 가족은 홀어머니 곁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언양면 호적에서 신학업은 첫째 행님 신근업(申根業)을 호주로(戶主, 세대주) 호.. 2021. 7. 7.
언양보도연맹 희생자 은인, 조용기 부친 조두천(趙斗天 1913~2006) 각공 조두천(角空 趙斗天, 1913~2006) 언양보도연맹 희생자 은인(恩人) 보도연맹은 ‘국민보호선도연맹(國民 保護 先導 聯盟)’을 줄인 이름으로 1949년 6월 결성되었고 가입자가 전국에 3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이 단체명은 국민을 보호하고 압장서서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뜻이다. 광복 후 건국위원회, 인민위원회, 공산주의,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동맹 등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향(轉向) 즉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자유주의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도연맹은 원래 목적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6.25 한국전쟁을 빌미로 가입자를 잡아서 가서 사람이 드문 산이나 바다에서 처형을 했다. 언양은 일제강점기나 광복 후에도 울산에서 농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농민운동을 벌였던 청년들 대부분이 보.. 2021. 6. 18.
우루목(도천마을) 하씨(河氏), 남도부(南到釜) 하준수(河準洙) 우루목(도천마을) 하씨(河氏), 남도부(南到釜) 하준수(河準洙) 영화 ’곡성(哭聲)’ 의 촬영지가 우루목 마을인데 마을 모양이 소의 목과 닮아서 붙여 쳤고 우동(牛洞)에서 일제 강점기 도천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루목 마을 표지석 곡성 촬영 집 도천마을은 진양 하륜(河崙)의 후손 양암공(陽菴公) 하활(河活, 1508-1580)이 진주 단목에서 옮겨와 번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우루목 하씨’라는 명성을 얻은 진양하씨 집성촌이다. 이곳에서 동해남부 빨치산 사령관 남도부(南到釜), 본명은 하준수(河準洙, 1921-1955)가 태어났고 생가도 있다. 남도부(南道富)가 아니라 남도부(南到釜)라고 친구인 윤인호(尹仁浩, 1922~2004) 곤충연구가 증언했는데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고 일본 .. 2020. 4. 26.
안중근(安重根)과 최재형(崔在亨) 1908년 7월 연해주 의병은 최재형(崔在亨)이 주축이 된 동의군(同義軍)과 이범윤(李範允)을 주축으로 한 창의군(倡義軍)으로 전제덕(全濟德)의 지휘로 안중근(安重根)이 우영장(右令將)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 엄인섭(嚴仁燮)이 좌영장(左令將)을 맡아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였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동의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고 했을 때 최신형 체코제 권총 두 자루를 최재형 선생이 구입해 한 자루는 우덕순, 한 자루는 안중근 의사한테 전달했고 또한 사격연습을 할 곳과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하얼빈까지 가는 경비 일체를 지원하였으며 안중근 의사가 사로잡혔을 때를 대비해 변.. 2019.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