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7월 연해주 의병은 최재형(崔在亨)이 주축이 된 동의군(同義軍)이범윤(李範允)을 주축으로 한 창의군(倡義軍)으로 전제덕(全濟德)의 지휘로 안중근(安重根)우영장(右令將)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 엄인섭(嚴仁燮)좌영장(左令將)을 맡아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였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동의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고 했을 때 최신형 체코제 권총 두 자루를 최재형 선생이 구입해 한 자루는 우덕순, 한 자루는 안중근 의사한테 전달했고 또한 사격연습을 할 곳과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하얼빈까지 가는 경비 일체를 지원하였으며 안중근 의사가 사로잡혔을 때를 대비해 변호해 줄 러시아 변호사를 구하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유리한 재판을 위해 재판권을 러시아로 가져오려고 애를 썼지만 일본에게 재판권이 넘어가 버렸다최재형 선생의 딸 고 최올가의 일기에 있다.

안중근 의사가 직접 쓴 수기에 최재형 선생에게 권총을 받았고 최재형 선생 집에서 저격연습을 했다는 것도 나와 있다.

  유인석 (柳麟錫) 장군1908년에 이미 문인 70여 명을 이끌고 원산에서 배편으로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곳에 도착한 유인석은 최재형 등의 도움을 얻어 의병부대를 정비했고, 1910년 초 이범윤 · 이남기 · 이상설 · 정재관 등의 추대로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를 맡아 연해주 의병을 총괄하게 되었다 13도의군(十三道義軍) 19106국망 직전에 항일의병의 상징적 인물인 유인석(柳麟錫)장군과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이 주축이 되어 함경도 의병장 홍범도(洪範圖)와 이남기(李南基), 황해도 의병장 이진용(李鎭龍)등 항일운동세력이 총결집하여 편성된 의병통합군단이다

13도의군(十三道義軍)

하얼빈 의거가 있기 전 '대한의군(大韓義軍)'의 구성을 보면, 총독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金斗成, 류인석의 변성명), 대장에 전제덕·김영선, 영장에 안중근·엄인섭·백규삼(白圭三)·이경화(李京化)·김기룡(金起龍)·장봉한(張鳳漢) 등이었고, 군자금은 최재형(崔在亨)이 맡았다.

1909년 이 지역에 파견되었던 한국어 통역관이 남우수리스크 크라이의 국경수비위원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지역 의병장 최재형(崔才亨, 표트르)선생이 이끌던 의병 200여명중 일부가 지신허(地新墟; Tizinkhe)에 살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사격훈련을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얼빈 이토히로부미 암살은 고종 황제와 관련이 있을까?

정재관(鄭在寬)이라는 대동공보사 주필로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전 고종의 최측근에서 모시는 시종무관 ( 대통령 경호원)이었고 이토 암살 2개월 전 미국에서 경성(서울)을 거처 블라디보스톡 연해주에 도착했고 연해주 독립투사와 의논을 했고 이토 암살 현장 하얼빈 역에도 있었다.  이용익과 함께 제국익문사(현재 국가정보원) 요원이었을 지도 모른다.

전 시종무관 ( 임금 경호무관)

1902년 미주 이주.

19083스티븐스 암살사건 주동자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한국어 신문 발행

1909년 공립협회와 합성협회 통합한 국민회(國民會) 총회장

19115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이종호(李鐘鎬)권업회(勸業會) 조직

 

 

 

 

   드라마 연속극連續劇 미스터 션사인(Mr. Sunshine)는 신미양요辛未洋擾 전투 얘기부터 시작혀요.    양요洋擾는 한자로 큰 바다 양’, ‘시끄러울 요, 움직일 우인데 양인洋人은 큰 바다에서 와서 양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서양인(西洋人)들이 일으킨 난리(亂離)를 말해요.    양요洋擾1866(고종 3)년에 불국佛國(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丙寅洋擾)1871(고종 8)년에 미국美國(USA) 군함이 침입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있어요.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응징과 통상을 목적으로 강화도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점령한 난리를 에요.

신미양요 미군 공격로

   62(음력 415) 광성진 앞 손돌목(孫乭項)에서 2척 전함과 4척 소형 증기선이 함포사격을 가하였어요. 손돌목(孫乭項)은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를 곳이고요.   손돌목 돈대는 광성보가 관리하는 돈대 중에서 규모가 크고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요. 미군 블레이크(Homer C. Blake) 중령의 말에 따르면 '남북전쟁 때에도 그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고 했어요.

  610초지진 오전 10시 상륙하여 점령하고, 611일 광성보를 8 시간 가량 치러진 전투에서 점령하고 광성진의 관아와 시체를 불태우고 어재연魚在淵 장군將軍의 수자기帥字旗를 탈취했어요.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거의 전멸을 해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배경으로 일병 포비스(Hugh Purvis), 상병 브라운(Charles Brown) 그리고 대위 맥레인 틸턴(Mclane Tilton) 

   미스터션사인 광성보 전투 장면에서 영어 독백이 나오는데 슐레이(Schley) 대령의 회고록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여요

적군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The enemies are still desperately fighting back, even in the face of crushing defeat.

패배가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Despite being on the verge of losing, there has not been a single deserter.

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Even with the overwhelming motor power of our forces,

적군은 장군의 깃발 수자기(帥字旗)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the enemies keep getting back up, time and time again, under the battle flag of their general.

창과 칼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Those with broken spears and swords are putting up a fight by throwing stones and soil.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I've never witnessed such a raging and fiercebattle.

     신미양요 (Shimiyangyo, 주말전쟁 War of Weekend in Korea)  요약 표

 

 

미국

조선

지휘관

아시아함대 사령관

소장 존 로저스(Rodgers, J.)

중군장 어재연 장군

군대 무기

군함 5

대포 85

소총: 레밍턴 카빈, 단발

스프링필드, 연발

홍이포

불량기

소총: 화승총

징겔포

인원

1,230

(해군보병 451, 해병대 100

이상)

600

결과

피해

전사자 3명 전사 (휴 맥키

Hugh Mckee) 중위 외)

부상자 10 여명

전사자 243

익사자 100 여명

부상자 24

전리품

조선군 포로 20

각종 군기(軍旗) 50

대포 및 소총 481

-

 

개항을 통한 수교를 하지 못 함

쇄국 정책 고수

개화가 늦어짐

 

  이 신미양요 전투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외국군대와 벌인 최초의 교전이자 상륙작전이었으며 외국군과의 교전으로 명예훈장(Medal of Honor)서훈된 첫 사례이지요.  더불어 미국이 팽창주의로 전환한 이후 해외에서 거둔 첫 승리기도하구요.    미국은 전사한 대위 휴 윌슨 맥키 ( Lieutenant  Hugh Wilson McKee) 추념하여

1. 광성보를 맥키 요새(Fort McKee) 라 불렀고 

2. 해군사관학교에 추념비를 세웠고

3. 3척 전함에 맥키 이름을 붙였어요.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어재연 장군처럼 영웅(Hero) 이라는 거지요.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수자기帥字旗는 미국 해군박물관으로부터 임대하여 2007136만에 우리나로 귀환歸還하여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어요.   수자기는 조선 후기 장수를 뜻하는 ()’라는 글자가 한가운데 적혀 있는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어요.    수자기 귀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수자기帥字旗에 사열하는 모습

  수자기가 다시 우리 바다에 등장했요.   제주 남쪽 앞바다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 좌승함인 일출봉함이 수자기를 달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11개국 39척의 함정을 해상 사열했어요.  

                        국제관함식 일출봉함에 게양된 이순신 장군 수자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병제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905 4 16일 대한제국 최고 군사 기관인 원수부를 해체하고 진위대(지방군)의 병력을 크게 감축시켰는데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습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 축소에 아예 정미 7조약의 비밀조치서 따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하려고 했습니다.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군 시위대 병력 전부를 1907 8 1일자로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모이라고 공지했습니다.  참고로 통감부는 1910면 한일합방 이전에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은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였습니다. 대한 의병장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맞고 숨을 거두웠더래요.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 군대가 1907 8 1일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전투로 남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아우러는 일대에서 오전 9 시부터 시작되어 1230분 즘까지 4시간 이상 장렬하게 벌어진 전투입니다.

 

간략 전투 배치도

남대문 전투의 도호선이 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현재 소령), 권총 자결입니다그는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접한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결하였고 1연대 소대장 참위 남상덕이 "대대장과 함께 죽자!"라고 외치며 군사들을 지휘하여 일본 교관진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위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1연대 1대대가 봉기하뎐 시점에 바료 옆 병영에 있던 2연대 1대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그때 제 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을 통제하는 회의에서 해임되어 격양되어 있었다.

대대장을 따라 훈련원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 이 치열한 총성을 들은 시위 2연대 참령 오의선이 군도를 뽑아들며 "앉아서 무장해제를 당할 수는 없다.  1연대가 궐기했으니 우리도 싸우자!"고 외쳤고, 대대원들 역시 이에 적극 호응하여 "1연대가 궐기했다!"고 외치며 영내로 난입, 마침 무기고를 점검하며 탄약을 반출하던 일본군을 발견, 육탄으로 그들과 난투극을 벌이며 마침내 총과 탄약을 회수하고 바로 거리로 뛰쳐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들 시위 1, 2연대의 각 1대대 병력은 거리에서 합류, 2연대 참령 오의선, 정위 권중협, 소대장들인 참위 남상덕,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한승, 그리고 무관학교 3학년 생도로서 소대장 견습차 파견되어 있던 견습 참위 이충순 등 3, 특무정교 다수의 지휘 하에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이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오전 10 20분 대한제국군 시위대 2연대 1대대 주둔지를 향해 51연대 3대대 병력과 남대문 위병 등, 그리고 호치키스 기관총 3을 투입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한편 51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서소문 위병들과 더불어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대한제국군 시위대 1연대 1대대 주둔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M1914 호치키스 기관총을 프랑스에서 운용 중인 미군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참고로 호치키스 기관총(Hotchkiss machine gun)은 가스압력 작동방식을 구현한 첫 총기다. 현재까지 등장한 모든 가스작동식 소화기의 공통 조상에 해당하는 획기적인 무기체계다.  8mm탄을 사용한 호치키스 기관총은 분당 500~600발을 사격할 수 있다.


  그러나 1차 공격은 아직 실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시위 1, 2연대 각 대대의 치열한 반격에 공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추가로 시위 2연대 병영 가까이에 있던 남대문 위에서 기관총 2정을 추가 거치, 영내에 집중 총격을 퍼붓는 것과 동시에 51연대 3대대 중대장이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병영으로 돌입, 육탄 폭파를 가하는 맹공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51연대 3대대 중대장 대위 가지와라[梶原] 1명이 대한군의 총화에 휩쓸려 전사하였고, 육탄돌격에 가담한 특무상사 등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는 등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은 2차례 이상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하여 통감부를 습격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에 전진을 매번 포기해야 했고,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뒤이어 증원된 2개 연대의 일본군에 맞서면서 보유한 그 적은 탄약마저 거의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훈련원에서 해산된 병사들 상당수는 울분을 터뜨리며 봉기를 일으킨 시위 1, 2연대에 연거푸 합류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오를 조금 넘겨 12 3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시위 1, 2연대 1대대는 병영을 포기하고 서울 시내로 흩어져 시가전을 개시하게 되지만 탄약부족으로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 하고 전투는 끝났습니다.

 

8 1일 전투 당시 간부로서 확인된 전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령             오의선 ( 2연대 1대대 중대장)

정위 권중협 (1연대 1대대 중대장), 참위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규병, 이한승, 남상덕

특무    정교    김순석, 고희정

견습 소대장    이충순, 백보용

령관장교 1, 위관장교 7, 특무정교(원사) 2, 견습소대장 2. 12.

참위 이준영은 장교가 된지 하루만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 내용을 표로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대한제국군

일본 조선주차군 13사단

교전국

시위대 1연대 1대대

시위대 2연대 1대대

 

51연대

7,9,10,12 중대

지휘관

참위 남성덕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대위 가지와라[梶原]

병력

소총 베르단

후장식 단발 소총

탄약 소지 10 ~ 15

소총 5연발 38식 아리사카

호치키스 기관총

피해

전사 68(장교 13)

부상 100 여명

포로 516

전사 4

부상 30 ~ 40

총탄

-

총탄 보병 7215, 공병 350, 기병 및 포병 8, 기관총탄 1138, 황색화약 1.6kg 총탄 보병 7215, 공병 350, 기병 및 포병 8, 기관총탄 1138, 황색화약 1.6kg

노획물

-

소총 74, 실탄 3,305

 

대한제국군 시위대 봉기를 진압하고 병영을 점령한 일본군

* 출처

1. 경향신문 남대문 전투관련 기사, 1907 8 9

2. 한양이야기, 조선왕조 500년 도읍 한양 읽기 , 남대문 전투 단락

3. 한국 근대사 산책 4,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남대문 전투 단락

4. 조선군사령부 1910 ~ 1945, 古野直野, 1997, 대왕사

5.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서인한, 서울 ; 혜안, 2000

6.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박승환-궁금-, 호국보훈이야기, 독립이야기, 국가보훈처

 

 

  석현(石峴) 이용익李容翊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의 최측근 근왕주의 정치인, 친러파 관료, 외교관, 경제관료,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 설립자이다. 


이용익(李容翊) 齋木寬直/위키백과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용익 암살 죽음에 대해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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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http://m.cafe.daum.net/shogun/NaM4/34

이용익을 죽인 김현토는 일제의 밀정이었나?

작성자삼한일통|작성시간16.05.05|조회수611


온라인 상에서 이용익에 대해 검색해보니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사하신 후, ...]

라고 되어있는데 


김현토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근현대인물자료>를 보면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이        름     김현토 ( 金顯土 ) 

민 족 구 분     한국인

이       명     웨르트로페트로프스치, 顯昌 干齊

생 년 월 일     1867-11-06

출   신  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관청리官廳里 444 (본적)

현   주  소     하얼빈 마가구馬家溝  문화가文化街 24호 원내1호

경력및활동     27세경 러시아령에 들어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극동고려공산당에 입당.

                 1923년 8월 하얼빈 馬家溝 文化街 24호 원내1호에서 은거 중임.

참 고 문 헌     용의조선인명부


강화태생의 사람으로 27세 쯤에 러시아에 거주하여 러시아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심지어 용의조선인명부에서 나온 기록인걸로 보아 일제의 앞잡이는 아닌걸로 보입니다.


정교가 쓴 『대한계년사』의 일부를 보면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1906년(광무10, 병오)


이용익(李容翊)을 러시아에서 암살하다.

앞서 이용익은 프랑스 수도 파리(Paris, 巴里)로 가서, 그 나라에게 보호해달라고 애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彼得堡)로 가서 전(前)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書記)였던 아무개를 찾아갔다. 우리나라 전국 광산 ? 삼림 및 황무지를 러시아인에게 허가해주겠다며 그 사람에게 보호해달라고 요구하고, 황제의 재가(裁可)를 얻었음을 의미하는 '계(啓)'자가 찍힌 공문을 보여 주었다. 이용익은 두서너 해 전에 러사이 수도로 유학 갔었던 강화(江華)의 선비 김현토(金顯土) <나이가 30살 남짓이다>에게 통역을 요청하며, 부귀를 보장하겠다고 그를 꾀었다. 하지만 그 일이 미처 성사되지 못했는데, 그 아무개는 유럽의 어떤 공사관 서기로 전근 가버렸다.

이용익은 크게 실망하여, 다시 러시아 외무부의 한 관리를 찾아 그 문제를 의논했다. 김현토는 만나보기로 약속한 그 날짜에 먼저 이용익과 함께 여관으로 가서 그 사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김현토가 품안에서 권총을 빼내어 이용익에게 쏘았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급히 몸에서 단도 <당시 러시아 수도에서는 무기의 매매를 금지했다. 김현토는 손재주가 꽤 있어서, 일찍부터 지니고 다니던 부서진 권총을 수리하고 또 일본인 상점에서 단도 한 자루를 구입했다>를 뽑아내어 이용익을 마구 찔렀다. 여관 안에서는 놀라 소동이 벌어졌다. 러시아 순사(巡査)가 빨리 가서 구했으나, 이용익은 병원으로 실려 간 지 겨우 30분이 지나 죽었다.

김현토는 러시아 경무청(警務廳)에 봍잡혔다.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李鍾浩)가 법원에 고소하여, 복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이 열린 날, 김현토는 이용익이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극렬히 논하며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응대했다.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은 모두 김현토가 옳다고 칭찬하며 앞다투어 조화(造花)<러시아 풍속에서는 무릇 재판할 때, 칭찬할 만한 일로 벌어진 소송에서 정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조화를 던진다. 조화는 베와 비단 및 종이 따위를 잘라서 꽃무늬로 채색한 것이다>를 던지니, 쌓인 조화의 높이가 김현토의 키와 나란할 정도였다. 그리고 김현토를 위해 앞다투어 변호하는 사람이 십수 명이었다. 그 가운데 한 변호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의 말에,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은 누구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철석같이 지킨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법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무릇 이용익은 한국의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요 어버이를 해친 자식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즉 김현토와 같은 의로운 선비는 무죄 석방해주어야 옳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김현토는 드디어 석방되었다.

얼마 안 있어 한 러시아 사람이 김현토에게 알려주기를, "그대가 만약 이곳에 오래 머무른다면, 반드시 이종호로부터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찌하여 여기를 떠나지 않습니까?" 하고는, 이어서 김현토에게 여비를 주었다. 김현토는 마침내 불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海蔘威)로 갔는데, 여비 등을 주며 그를 전송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러시아 수도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한 소년이 김현토를 수행하였는데,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이웃한 여관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 수십 일이 지나서 김현토에게 와 말하기를 "이종호가 나에게 많은 돈을 보내어, 복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돈을 물리쳤지만 그대의 뒤를 몰래 살핀 것은, 그대가 혹시 이용익과 무슨 원한 관계의 일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제게 들어서였습니다. 그대의 동정을 살펴보니, 이용익을 죽인 것은 참으로 충성심에서 우러난 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찌 차마 의로운 선비에게 해를 가하겠습니까? 그러나 이후에도 역시 당신을 해치려고 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나는 여기를 떠나 하얼빈(Harbin, 哈爾賓)으로 갑니다." 했다. 그 이름을 물어보니, 바로 안중근(安重根)이었다. 김현토는 그 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일단 해당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은

1. 이용익이 러시아로 간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것.

2. 김현토의 명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 이용익을 죽였다는것.

3. 수많은 이들이 변호를 했다는것.

4.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가 보낸 자객이 김현토에게 실토하니(물론 돈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안중근.


위 4가지입니다.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이범진이 국권이 피탈당하면서 자결을 하기전에 편지를 보낸 인물이 김현토였다는 점입니다.


「이범진(李範晉)의 자결(自決) 순국과 러시아와 미주 한인사회의 동향(動向)」이라는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논문을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1) 이범진의 편지와 기부금
자결을 결심하면서 이범진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양학원(Eastern Institute) 한국어강사인 김현토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범진은
편지에서 “나-국사에 대하야 어대까지던지 하려 하였더니 이에 들으매 원동 각처에 당파의 형세가 한인과 일인 보다 더 심하다 하니 큰
일은 이미 그르고 또한 평일에 바라던 바-아니라. 나의 사는 것이 차라리 죽난 것만 갓디 못한 고로 이제 자처하노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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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의 동양학원 학원강사 김현토라고 하네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김현토는 일제의 밀정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다.

●이용익은 고종의 측근이지만 민중의 지탄을 받는 인물

●이범진, 안중근 등은 오히려 김현토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음.

●일제는 김현토를 감시의 대상이자 위험한 안물로 봄.


"이용익도 독립운동 하려고 한건데 왜 죽였나?"

다만 웹상에서 김현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이유는 분명하겠네요.

"이용익도 독립운동 하려고 한건데 왜 죽였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당시의 시각에서 이용익은 그리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 대신이었다.

이정도로 답하는게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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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걸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정순만의 피살] 중에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 34집 (2009.12)

대동공보 1909년 4월 24일자 제국통신

정순만의 양성춘 살해 사건은 기호파와 평안도파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평안도파에 속한 인물은 차석보, 양성춘, 유진률, 정재관, 김성무, 이강, 함동철 등이었고,   기호파는 정순만, 윤일병, 김현토,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 정순만 등 기호파에서는 김성무가 미국에서 대동공보에 연조한 돈을 , 그리고 윤일병은 정재관이 미주 태동실업회사의 돈을 착복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김현토는 평안도 인사들이 불공평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순만은 평안도파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구성원은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에는 대동공보가 정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한인의 국한 연구를 대표하는 계봉우禹(1880.8.1. ~ 1959.6.5.) 기호파(경기도파)와 북도파(함경도파) 분파의 원인으로 정순만의 양성춘 살해, 김현토의 이용익 암살 기도사건으로 보면서도 그 근본 원인은 주의나 정견의 차이가 아니라 기호사람들이 이전의 사색당쟁에서 얻은 선천적 수단으로 해외사엄의 영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라거나, ‘봉건적 영웅들에게서 흔희 보게 되는 수령 다툼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함경도 출신으로 기호인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또한 러시아에 거주하며 국학을 연구한 계봉우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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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평화회의의 첫 번째 특사 이용익李容翊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던 대한제국의 특사는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에 앞서 원래 이 회의에 참석할 특사로 선발되었던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


  만국평화회의는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로 제1차 회의는 1899년에 개최된 바 있다. 2차 회의는 원래 1906 8월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다가 사정상 1년 연기되어 1907 6월에 개최되었다. 


  대한제국은 1905 10월말 러시아 측으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릴 국제회의에 초청한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지만 그 이전부터 이 회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5 7월 한국주재 일본공사는 궁중에서 평회회의를 위한 비밀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첩보를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1905년 9월 그가 국외 망명을 감행한 것은 만국평화회의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익은 9 11일 황제의 밀지를 가지고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9 29일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1905년 11 27일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여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와 여러 차례 회견하는 등 외교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저격미수 사건까지 겪는 등 불행이 겹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용익은 1906 3 8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곧바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이곳의 교민사회를 근거지로 해서 장기적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는 이 무렵 헤이그에 건너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회의는 연기되었고 그는 1907 2 24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서 이상설과 이준이 급히 특사로 선발된 것이다.



1901년부터 늘어난 대한제국의 국방비 비율에 대한 고찰

2017. 9. 1. 14:54      작성자 : 오로라    http://blog.naver.com/kkumi17cs1013/221087135645

 

대한 제국군 군복


 

 대한제국은 1900년 3월 20일 원수부관제 를 개정하였고, 이는 군무軍務중심의 국정운영을

의미하는 조치였고 이로써 원수부 4개국 局長의 호칭은 總長으로 승격되었고, 그 권
한도 확대되었다.  고종은 관제개정 이후 즉각 관련 인사를 선별하였다.

 

구 분

군사관련 관직 및 약력

비 고

군무국총장

軍務局總長

이종건

李鍾健

 

1885, 포도대장 및 군전영 감독

1895, 총어사 및 연무공원리사무

1896, 군부장 임명 및 군부대

소소속으로

대한국국제 제정.

 

검사국총징

檢查局總長

조동윤

趙東潤

 

1897, 령 임용 및 3대대장

1898, 장 임명 및 군부협판

1899, 군부장 임명 및 원수부 군무국장

대 군무국장 역임.

 

회계국총장

會計局總長

민영환

閔泳煥

 

1884, 개성해방총관/ 1888,

1896, 군부장, 군부대, 러시아제대관식 특명전권공사 權公使

1897, 군부대, 영국여60주년의식 大使

해천추범海天秋帆,사구속초使歐續草

저서에서 서구의 군제 및

규모를 긍정적으로 평가

기록국총장

記錄局總長

이학균

李學均

 

1888, 군사관 다이 보

1895, 령 임용 및수원대 대대장

1899, , 원수부 사국장

1898,무관학교군사교범 보명조전步兵操典을 번역출간

                                     원수부 초대 총장과 군사관련 주요 약력

 

이전에 대한제국의 국방비에 대한 자료를 올렸었는데, 1896년에 16.28%, 1897년에는 23.38%, 1898년에는 27.66%, 1899년에는 22.37%, 1900년에는 26.56%였으나 돌연 1901년부터는 41.02%, 1902년에는 38.33%, 1903년에 39.46%, 1904년에는 37.63%라는 엄청난 비율로 국방비가 증가되는 것에 대해서 한 번 고찰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1년 만에 국방비가 20% 가까이 증가세를 보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대한제국은 국방비에 상당한 지출을 했지만 1901년부터 1904년만큼은 아니었죠.


이러한 배경에는 총 3가지의 사건이 한 몫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는 의화단 운동으로 인한 변경의 불안함과 러시아와 일본의 국방비 증강, 그리고 국내의 소요 사태 등이 그 원인으로 꼽혀집니다.


1900년 3~4월부터는 청 내부의 분쟁이 예상되어 막벌이군 수백 명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난 온다는 소문과  산동지역 피난민 10,000여 명이 평안도로 건너온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는 등 국경지역의 혼란은 심화되었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대한제국 역시 청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각 국 공사관이 공격받았음을 알고 있었고 이후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청군 패잔병과 의화단 잔존 세력이 대한제국 변경 지대로 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청에서 건너온 피난민들도 상당한 골칫거리였죠.


대한제국 정부가 확인한 피난민의 숫자는 14,000명이었고, 이외에 더 많은 피난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었습니다. 연합군의 진압 이후 함경-평안도 일대까지 청군 패잔병과 비적 떼가 난동을 부리는 사태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궁내부 고문관이었던 샌즈(W. F. Sands)는 의화단사건의 확장이 차후 대한제국에 대한 열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며 경고하자,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따라서 대한제국 원수부는 황제의 명에 따라 변경 지대의 병력을 증강합니다. 


청에 주재하던 각 국 공사관 무관들도 대한제국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달라며 경고를 보내죠. 만약 대한제국이 청군 패잔병과 의화단 잔여 세력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8개국 연합군이 한반도로 진주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말입니다.


 

의화단(청비) 국경 유입 방지를 위한 대한제국 북경지역 군사운영과 배치도


따라서 일련의 군비 증강은 필수적이었으며 대한제국은 기존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는 이들을 모두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 하에 안북도 의주 및 강계, 함경남도 북청, 함경북도 종성에 진위대를 설치하는 안건을 황제에게 올리고, 황제는 의화단에 대비하는 것이라며 승인합니다.


총 5곳의 진위대가 증설되면서 50만 1,016원을 소모하게 되었고 이는 대한제국 국방비의 30.6%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따라서 1900년 26.56%였던 국방비 비율이 1901년부터는 41.02%로 증가하게 된 원인의 하나라고 꼽혀집니다.


당시 대한제국이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는지, 진위대 증강으로도 모자라 중앙의 정예 친위대 600명을 추가로 파병할 지경이었으니까요. 북청의 진위대 병력이 전부 삼수-갑산 지대로 파견을 나간지라 비어버린 지역에 대해 중앙군이 공백을 메꿔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외에도 해주, 안주, 황주에 주둔한 병력 중 각 100명씩 총 300명을 차출하여 변경에 증원했으며, 강화 주둔 제1연대 소속 병사 100명도 서울에서 급히 재편한 다음 경흥부로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기존 방어 전략인 소수병력이 주요 거점을 장악하는 점형 방어에서 병력의 증강으로 인해 선형 방어로 전환하게 되죠. 특히 분쟁발생지역으로의 중앙군 파병, 타 지역 병력의 국경지원 등은 이 시기 군사운용의 성격이 대외적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방증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 당시에 독립 부대로서 활동하던 공병과 치중병을 모두 보병부대로 배속시켰다는 점인데 전투지원부대의 배속은 단위 연대의 전투력 발휘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제병협동을 중시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의화단 진압을 위해 러시아는 1900년 6월 중순, 만주의 경비대 인원을 6천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하였고, 동년 7월 9일부터는 아무르강 연안 및 시베리아 지역의 정규군을 만주로 출병시켜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대한제국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어서 청의 동북삼성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측에 군사원조를 제안하며 군사개입을 시도하지만 자체적으로 국경수비 및 국방비 증액을 통해 병력과 장비를 확충한 덕에 단칼에 거부합니다.


의화단 및 청의 패잔병을 대한제국군이 자체적으로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 이후의 대한제국의 국방비 비율은 30~40%대를 웃돌았으며 이는 러시아의 남하와도 연관이 있었죠.


이후 평양에도 1개 대대를 추가 편성했으며 회령과 종성에 각각 100명을, 무산과 온성에는 200명을, 회령과 종성 사이의 거점에는 400명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합니다.

대한제국군 중앙군 시위대, 친위대와 지방군 진위대 배치

 

대한제국군 체계.pptx



이러한 덕분에 대한제국군은 증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과를 올립니다. 


1. 함경도 무산군에 주둔 중인 1개 소대가 비적 37명을 사살하고, 말과 총기, 탄약 등 전리품을 얻기도 했고, 


2. 삼수군에 주둔중인 진위 제 5연대 2대대 예하 병력이 비적 400명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3. 수비에만 머문 것 뿐만이 아니라 대한제국군 1개 중대 500명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청비 40명을 사살하는 등 공세적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침략의 명분을 대한제국이 사전에 제거했으므로 러시아의 남하는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은 어땠냐고요? 대한제국군이 도강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거든요. 많은 교전을 통해 전공을 올린 대한제국군은 군비를 감축하자는 의견이 1901년 12월에 올라오지만, 원수부와 황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지금은 감축이 아닌 증강을 선택해야할 시점이라며 약간 낮아지기는 했지만 1902년 국방비를 38%대를 유지하며 병력을 더욱 강화하죠. 국내 소요도 문제였습니다.


북방을 안정시켰으나 여전히 활빈당이나 영학당, 동학 잔존 세력이 곳곳에서소요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에 군비는 감축이 아닌 증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1900년 3월 경에는 해적질을 하는 활빈당 세력까지 나온 통에 진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변경 지역 지원 병력을 제외한 중앙군은 수도에서의 정변 발생에 대비했으며, 당시 친위대 3,000명, 시위대 2,000명, 평양 진위대 1,000명, 포병대 400명, 기병대 100명 등 총 6,500명의 병력이 수도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평양진위대 1,000명이 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양 출신 병사들은 당시 대한제국군 내에서도 정예였다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1895년 경복궁 침입 당시 끝까지 일본군에 맞서서 자기 위치를 사수한 덕분에 고종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북방에 주력을 투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삼남 지역의 진위대를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했으며 국내 소요 이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벌어짐에 따라 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됩니다.


한 예로 1901년에는 제주에서 천주교도와 비천주교도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

여 프랑스 선교사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여 제주 진위대대와 강화 진위대에서 차출한 병력 100명, 수원 진위대에서 차출한 200명과 순검 15명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프랑스군과 대치하기도 했죠.


이렇듯 국내외적인 상황은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다수의 자금을 국방비로 전용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했고 그 결과 1901~1904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국가 예산이 국방비로 사용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병력을 상당히 유동적으로 운용했는데 북방 수비 하나는 제대로 해냈네요.


*출처

1. 大韓帝國期 元帥府 創設과 國防的 軍事運營

2.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서인한

3. '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 조재곤

4. 고종실록 권 38 광무 2년

5. 관보 7, 제 1160호 광무 3년 1월 17일, 57~59페이지

6. 일러스트 'An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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