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가 유대치는 양반 출신

글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7 1 09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되 유대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

백의유대치월헌홍규지묘(白衣劉大致月軒洪奎之墓)라고 적혀있다. 탁본 제공 유영심씨

개화당의 개혁정치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여 백의정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유대치. 의원으로 알려졌던 그는 역관 출신인 친구 오경석(1831 – 1879)과 더불어 대표적인 중인층 개화파 지도자로 꼽혔다. 그런 그가 양반 출신일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지난해 상한(常漢.상놈) 계층이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구명한 갑신정변 연구를 펴낸 박은숙 서울시사연구소 연구원이 한국인물사연구제ㅎ4호의 유대치의 신분과 정세인식에서 밝힌 내용이다.

개화당 연구의 대가인 고 이광린 서강대 명예교수는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1973)’에서 유대치의 본명으로 알려진 유홍기(劉洪基)가 연관을 많이 배출한 한양 유씨의 족보에 1831년생으로 등장하는 점에 주목했다. 유대치는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윤치호의 윤치호 일기에 자주 등장하다가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행적이 묘연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은 그가 오경석의 아들이자 제자인 위차 오세창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와 가평으로 피신 중 변소에 간다면 나간 뒤 사려졌다는 위창의 회고가 마지막이다. 이 때문에 이 교수의 유홍기= 유대치추정은 학계의 정설이 됐다. 박 연구원은 이를 반증하는 자료를 제기했다. 우선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되 강릉 유씨 유홍규(유홍규, 1814 – 1884)의 묘비명이 있다. 묘비명에는 유홍규가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박 연구원을 이 묘비가 1924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주민 증언도 채록했다. 1911년 발행된 강릉 유씨 족보에 유홍규가 대치로 개명했으면 개화당을 지도한 백의정승이라는 가필된 기록도 발견됐다.

1882 11 11일자 승정원 일기에 유대치가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인 유학(幼學)이어서 부사용(副司勇)이라는 종9품의 관직을 내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1869년 발간된 한양 유씨 족보에는 유홍기가 이미 사용이란 관직을 받았다는 모순된 기록이 나온다.

 박 연구원은 유대치 중인설은 그가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의()를 업으로 했다는 후대의 기록(1944년 발간된 김옥균 전)과 중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광교 부근 관철동 에서 살았다는 정황 증거에 근거한다.”김옥균, 박영효 등 최고 문벌 양반과 교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양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의 출생과 가게 [출처 : 위키 백과)


출생과 가계 1851년 2월 23일에 조선 충청도 회덕군[5] 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인 김병태(金炳台)와 부인 은진 송씨 (* 대유학자 송시열 있음)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외삼촌 송인식(宋寅植)의 집으로,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옥균 선생 유허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 - 1호 (위치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됐다. 당시 유력 집안에 적자가 없는 경우 일가 친척 중 양자를 들여 정치적 지위와 제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흔했어도 맏이를 양자로 보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그는 친아버지인 김병태의 결정으로 세도가 집안에 입양가게 됐다.


    그러면 사영대감 김병기 (金炳冀, 1818년~1875년)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부는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의 증손 김영근인데 9촌숙이 되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의 양자가 되었다. 순원왕후의 조카뻘이 된다.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184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다시 승진하여 성균대사성이 된 뒤에 종2품으로 거듭 승진,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 등을 지냈다.
그 뒤 거듭 승진하여 1853년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 등 각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2년 판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그 뒤 종일품 의정부좌찬성(左贊成)으로 있을 때, 1863년 12월 철종이 급서하자 조대비와 후계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으며, 고종이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하자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좌찬성(左讚))에 이르렀다.
안동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몰락왕족으로 파락호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도 교류하며 어려움에 처했던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도운 관계로, 뒷날 안동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김동인과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서는 흥선군의 주요 정적이자, 흥선군을 면박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문집에 《사영집》이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어려서부터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입양 후엔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해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만 전념했다. 11살 때 양부 김병기가 외직에 나갈 순번이 돼 강릉 부사로 갔다. 옥균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해 송담 서원에서 배웠다.[8] 강릉은 서인의 원조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율곡의 사당을 모신 그곳에서 노론의 학통을 이었다. 5년 후인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1870년 당시 홍문관 제학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됐다.

박규수는 누구일까?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의 계승자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퍼옴] 어느 ‘일본군 출신 장교’를 위한 한국군 합참장

한겨레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등록 :2011-11-28 20:31수정 :2011-11-29 13:23

1950년 9·28 서울수복에 이어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재흥 장군(앉은 이)이 육군 2군단장 시절 참모들과 찍은 사진. 그는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일본 육사 출신인 탓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9·28 서울수복에 이어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재흥 장군(앉은 이)이 육군 2군단장 시절 참모들과 찍은 사진. 그는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일본 육사 출신인 탓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재흥 예비역 중장 ‘군 장례식’ 논란
부친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 ‘친일사전’ 등재도 나란히 해방 뒤엔 4·3 ‘토벌’ 지휘
6·25땐 패전뒤 군단 해체되고 전작권 환수 반대 나서기도 29일 대전 현충원 안장 예정

‘대한민국 군번 3번.’

제3대 합참의장(1957~59년)과 제19대 국방장관(1971~73년)을 지낸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이 90살을 일기로 27일 별세했다. 군은 합참장의위원회(위원장 정승조 합참의장)를 꾸리고 합참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군번에서 보듯 그는 한국군 최고 원로 가운데 한명이다. 하지만 후배 군인들이 그를 마음껏 기리기에는 그의 삶의 궤적이 간단치 않다.

근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유재흥 장군은 2대에 걸친 ‘부자 친일 장교’로 유명하다. 그의 부친 유승렬은 일본 육사(26기)를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육군 대좌(대령)로 일제 패망을 맞았다. 유 장군도 아버지 뒤를 이어 일본 육사(55기)를 나왔으며 1943년 보병 대위 시절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런 경력 덕분에 이들 부자는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해방 뒤 이들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국군이 됐다. 아버지 유승렬은 1948년 1주일간 특별훈련 뒤 한국군에 편입돼 102여단장과 1사단장을 지냈다. 1950년 3사단장으로 한국전쟁을 맞았고, 이후 경남과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지낸 뒤 전역했다. 아들 유 장군도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위로 임관했고, 28살에 별을 달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4·3항쟁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뒤이어 태백산 지구 전투 사령관을 역임했다. 친일부역 장교에서 빨갱이 때려잡는 국군으로 변신한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 유 장군은 지휘하는 부대마다 패전의 기록을 쌓는다. 전쟁 발발 때는 자신이 지휘하던 7사단이 무너지며 서울이 함락됐고, 2군단장 시절엔 휘하 6·7·8사단을 몰아 북진을 재촉하다 중공군에게 반격을 당해 막대한 타격을 입고 군단이 해체된다.

1951년 3군단장 시절엔 ‘한국전쟁 최대의 치욕’으로 불리는 현리전투의 당사자가 된다. 중공군 1개 중대가 후방 퇴각로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3군단은 패닉 상태에 빠져 붕괴했다. 유 장군은 비행기를 타고 후방으로 빠졌고, 휘하 3·9사단장은 계급장을 떼고 도망쳤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막대한 양의 차량, 야포, 박격포 등이 중공군의 손으로 넘어갔고, 복귀한 병력은 40%가 채 되지 않았고, 군단이 해체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 지휘부(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하고 미8군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했다.


그는 한국어가 서투른 한국군이었다. 1951~1952년 포로교환·휴전 회담에 미군 통역으로 참여했던 정경모(재일 통일운동가)씨는 저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회담장) 뒷자리에서 소곤소곤 일본말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나중에 알아보니 일본말로 통역하는 이는 한국군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이었고, 일본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한국군 옵서버로 파견된 유재흥 중장이었다.”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일본군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은 그에게 모국어는 일본어였던 것이다.

여러 작전 실패 등으로 인해 4성 장군이 되지는 못했지만 1960년 군복을 벗은 뒤에도 유 장군은 승승장구했다. 10여년간 타이·스웨덴·이탈리아 등 외국 대사를 지냈으며, 1971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뒤이어 대한석유공사 사장과 석유화학공업협회장 등을 지냈다. 1990년대에는 성우회 회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28일 유 장군 조문을 간다는 군인 몇몇에게 ‘그가 어떤 군인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 옛날 분이잖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 장군은 29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장군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요즘 1987년을 배경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는 공안당국과 사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그린 영화로 '1987년 '의 '이한열 열사' 역에 강동원님에 대해 참으로 떠들썩하다.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 항쟁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 전에 박종철 열사가 안전기획부에서 고문으로 죽었다. 아래 사진을 전국으로 퍼져 떠겁게 민주화 사항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배우 강동원이 영화 이한열 열사에 논란이 많게 된 것은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외증조부가 친일한 것을 연좌제 덫을 씌워야 할까? 예전에 빨갱이'라 딱지를 붙혀 정부기관, 회사 등 제한하는

연좌제를 가한 적이 있다.  조상이 친일이라고 배우를 하면 않된다는 생각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다음 기사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강동원이 영화 '1987(가제)'에서 故 이한열 열사 역을 맡는 거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내용이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460987&ref=D

[퍼옴] 전두환 "5.18 학살도 ,발포명령도 없었다. ...자위권 발동 주장

2017.04.0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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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5·18 학살도, 발포명령도 없었다"…자위권 발동 주장

"광주사태 당시 사망자수 165명…교통사고 총기 오작동 사망자도 포함"
"5·18 당시 발포명령 없었다…자위권 행사 요건에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전두환 전 대통령은 3일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에서 "광주사태 당시 국군에 의한 학살이나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은 광주사태 당시의 희생자 수"라며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980년 6월 광주지검이 민·관·군 합동으로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5명"이라고 적었다.

 

이어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에서 무차별 총기 공격을 했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165명 중에는 총기 오작동으로 인한 사망자, 음주운전·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포함돼 있고 계엄군이 사용하지 않은 카빈총 등에 의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고 서술했다.

그는 "당시 시위대가 탈취한 무기는 총기가 5천400여 정, 탄약 28만8천 발, 폭약 2천180t 규모"라며 "장갑차와 군용 트럭에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속칭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라는 점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혹인 '발포명령'과 관련해서는 발포명령 자체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전 전 대통령은 "무장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행위는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발포명령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초상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지휘관의 사격 명령이나 자위권 발동지시가 필요하지 않은, 개인적 판단과 행동만이 있을 뿐"이라며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상황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사격한 것은 자위권 행사 요건에 딱 들어맞는 경우"라고 적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포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수대원들이 차량에 깔려 죽거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어도 할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처럼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뤄진 발포를 놓고 내가 사격 명령을 했다느니, 그 발포의 책임자가 나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며 "서울의 사무실에 있던 내가 광주의 작전 현장에 나타나 장병들에게 일일이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라고 항변했다.

전 전 대통령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를 근거로 "음주운전 등 교통사고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무기류 취급 미숙에 의한 시민군 사망이 15명"이라고 주장했다.

또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개인화기는 M16뿐인데 1995년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며 "게다가 당시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M16도 적지 않았던 만큼 M16 총상에 의한 사망자도 반드시 계엄군의 총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근 논란이 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여부에 대해서도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전 전 대통령은 "한 미국인 목사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당시 기총소사 장면을 촬영한 것이라는 사진까지 제출했는데 그가 제시한 사진은 가짜였다"며 "이런 주장은 헬리콥터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거나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인 목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강도 높게 제기했다.

그 근거로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을 들었다.

전 전 대통령은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라며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미전향 장기수들, 간첩들을 해방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교도소 습격은 북한의 고정간첩 또는 5·18을 전후해 급파된 북한 특수전 요원들이 개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광주 여러 곳에서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목격된 점도 지적했다.

그는 "5·18 사태 당시 시위대 가운데는 흰 수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며 "그들은 시위를 폭력적이고 강경한 방향으로 몰아갔고 무기 반납을 적극 반대했다. 그리고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진 26일 저녁 무렵에는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고 적었다.

이어 "당시 북한 간첩들에게 지령하는 무전 교신들은 우리 군 당국에 의해 포착되고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는 진술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 전 대통령은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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