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성 9여단장 오오시마 오오토리 공사 협의하여 내정개혁에 대한 답변의 시한을 정하고 구체적인 경복궁 점령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경복궁 점령작전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조선의 국왕을 포로로 삼아 조선군의 무장해제를 도모하고, 새로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정부가 일본에 조선주재 청군의 축출을 의뢰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군사작전이었습니다. 

7 22, 10시경에 일본공사관에서 오오토리 공사와 오시마여단장을 비롯한 일본군부와 외교라인이 모여 23일 새벽부터 진행되는 경복궁 점령작전을 지휘했습니다.  작전은 제11연대가 동대문, 광희문, 동북문 등을 점령하고 순찰 및 서울시내 경계를 담당하면, 21연대가 실질적으로 경복궁으로 난입하여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조선군을 제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7 23, 새벽 4시부터 시작된 경복궁 점령작전은 왕궁수비대와 접전을 벌였지만, 고종의 신변이 일본군에 확보되자 고종의 명으로 왕궁수비대의 무장해제가 내려졌습니다. 아침 7시를 전후하여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21연대 제1대대는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진입하여 경복궁의 동서 양쪽으로 우회하여 왕궁수비대와 접전을 벌였다.  1대대의 일부 병력은 광화문 왼쪽의 장위영을 습격하여 지원병력을 차단시켰습다. 평양병으로 구성된 왕궁수비대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응하여 경복궁의 후문이었던 신무문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접전했지만, 4배의 정규 일본군에 의해 열세에 있었습다.  일본군은 영추문을 먼저 통과하여 신무문을 통해 진입한 병력과 함께 경복궁 향원지 북쪽에 별궁으로 있던 건청궁乾淸宮서 고종의 신변을 확보했습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작전에 대응한 조선군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미약했습다.  당시 경복궁을 수비하던 조선군의 전력은 평양군이 주축이었으며, 별도로 친군장용영 있었지만 압도적인 일본군에 의해장해제 되었습다.  친군장용영은 많은병력이 한양 외곽경비 북한산성에 배치되어 실제 왕궁경비 병력은 적었습다.  오후 3시경에 동대문 근처의 친군통위영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오후 5시경 통위영의 우영과 좌영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습다.   고종의 신변이 일본군에 의해 제압되면서 강제로 내려진 고종의 교지 접하자 대부분 흩어져 평양으로 복귀했습다.  또한, 중앙군영의 병력들은 경복궁 점령이후 하도감 모여 일본군의 군영점령에 대비하여 결사투쟁을 맹세하고 보유한 무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에 대응했습다. 그러나 평양병과 마찬가지로 고종의 교지를 가져온 의장병 도착하자 스스로 해산했습다.

   

일본 혼성여단 조선군 진압 지역


  대규모 일본군이 인천과 용산에 주둔하며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을 비롯한 연대기사료에 조선의 구체적인 대응이 없습니다.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을 한다고 지방군을 불러올 여력이 없었겠지만 지방군을 집합시키든지 어가가 이동하여 왕의 신변 안전을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일본군의 불법적인 경복궁 점령은 고종을 포로로 하고,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청군의 구축(철병)의뢰를 요청하도록 하며, 일본에 적대적이었던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함에 있었습니다.  경복궁 점령이후 일본은 7 25,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청일전쟁의 명분을 확보하고자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과 체결된 일체의 장정폐기 章程 廢棄 선언宣言하도록 했으며, 조선에 주둔한 청군을 구축驅逐(철병)하는 정식요구를 일본에 도록 협박했습니다.


1894년 갑오년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10년이 되는 해로 일본은 정한론(征韓論 ; 에도 막부 말기 1855년 에서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서 등장한 조선 침략론) 에 따라 드디어 실행은 옮깁니다.  갑오년 일본의 조선 정벌은 개혁으로, 청일전쟁으로 갑오왜란, 조선 정벌, 경복궁 점령은 가려져 있고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에 병탄, 합방, 보호국,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준비과정, 출병, 경복궁 강제점령 등은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일본군은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여 동학농민군의 진압이 아닌 내정개혁요구, 한성(경성, 서울) 진입과 경복궁 점령을 통해 조선정부를 제압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청일전쟁을 안정적으로 개시했습니다.

  일본은 한성 진입, 경복궁 점령을 위해 군사작전을 시행했습니다. 출병한 혼성여단의 전체 병력은 8,000여명이었으며, 혼성9여단사령부, 보병11연대, 보병21연대, 기병5대대1중대, 야전포병5연대3대대, 공병5대대1중대, 치중병대, 위생대, 야전병원, 병참부 편제(예하부대) 종졸마졸(從卒馬卒), 인부 보조병력이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별도의 전신대를 혼성여단에 편성시켜 작전통신을 확보하고자 했다.

인천에 상륙한 혼성여단의 전신대(479) 서울에 무단 입성한 조선과 협의없이 임의대로 경부간 전선가설을 시작했다.   전선가설에 대한 명령은 1894 6 27, 대본영 참모총장 熾仁 親王 명의로 혼성여단장 大島義昌에게 하달됐다. 혼성여단은 12전선가설대 편성하여 병참총감에게 소속하고, 1지대는 부산에서 청주까지, 2지대는 서울에서 청주까지 전선을 가설했다. 군사전선의 가설은 불법성이 있었다. 조선의 영토에 외국군이 임의대로 군사목적의 기반시설을 착공하는 것도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해당 전선이 통과하는 토지를 매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 전선가설을 감행했다. 군사전선의 가설이후 이에 대한 경비문제도 있어 일본군은 차후 이를 조선정부에 일방적으로 책임지우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국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이며, 이후 외 일본군이 출병하여 수도 서울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으며, 왕궁이 불법적이고 강제적으로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도록 조선군은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무기력한 조선의 군사적 대응으로 마냥 치부하기엔 시기의 정세변화와 군사강점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조선군에 대한 정리가 먼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군 군제도와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1888(고종 25) 4월에 고종은 군제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군인 수효가 적은데 군영은 많다는 이유로 새로운 군제에 대한 절제와 규식을 정한 절목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신건친군우영, 신건친군후영, 해방영을 합쳐 통위영으로, 신건친군전영, 신건친군전영, 신건친군좌영을 합쳐 장위영, 별영으로 총어영을 정했습니다. 신설된 3영의 지휘관으로 민영익閔泳翊 통위사統衛使, 이경하李景夏 통위대장統衛大將으로,  전영사 前營使 한규설韓圭卨 (형인 韓圭稷 ) 장위사壯衛使, 신정희申正熙 장어대장壯禦大將으로, 별영사別營使 이종건李鍾健 총어사總禦使 임명했습니다.  3영체제를 지속하면서 1891(고종 28) 고종은 서울 외곽방비의요지였던 탕춘대蕩春臺 북한산성北漢山城 수비를 위해 이전 총융군摠戎軍 3영에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 별도로 신설했다.  실질적인 왕궁 호위를 담당했던 친군 용호영을 제외하고 조선의 중앙군은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 친군 4영체제로 지속되어 1894년 청일전쟁시기까지 유지됐습니다.

장위영 조직은 총 2,66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간부 및 사무직은 도제조(都提調) 1, 영사(營使) 1, 병방(兵房군사마(軍司馬문안(文案정령관(正領官부영관(副領官참영관(參領官초관(哨官)·참군(參軍) 241명이며, 병정은 1,680명이고, 지원 요원은 치중병(輜重兵) 150, 비전병(非戰兵) 170, 공병(工兵) 25명 등 745명이었다. 장위영의 조직도는 그림과 같다.



이들 중앙군영 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 간과해서 안 되는 조직이 1888년 설치된 연무공원鍊武公院이다. 미국인 교관에 의해 미국식 군사교육을 시행했던 연무공원은 40여명의 생도들을 대상으로 장교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연무공원을 통해 양성된 생도들은 중앙군의 핵심이었던 친군 4영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연무공원의 기간요원들도 정부의 핵심요직으로 배치됐습니다.  이때 이전에 각 영별로 약 500여 명이었던 병력이 1영에 병력 2,250, 작대병作隊兵 1,960명으로 확충됐습니다.

3군영으로 통합한 1889 6, 1891 2, 고종은 직접 봉무당隆武堂에서 왕세자가 대좌侍座한 상태에서 통위영, 장위영 군영의 새로 훈련된 군사들의 연조演操 점검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추진하는 군영강화의 결과 일정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고종은 군영의 훈련을 담당했던 훈련교관 차윤茶伊(Dye, William. M.)은 병조참판으로, 인시덕 仁時德(Neinstead, F.H.) 병조참의 임명했습니다.

  1891(고종 28) 서울 도성의 방위를 위한 배후지로 탕춘대 북한산 방비를 강조한 고종은 이전 총융청에 소속되었던 병력을 별도로 차출하여 경리청 지칭하고, 서울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참고자료

1] 2014. 12, 김경록,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에 관한 군사사적 검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 2015. 08, 김경록, 韓日關係史硏究 제51집, 청일전쟁淸日戰爭 초기初期 조일맹약朝日盟約의 강제 체결과 일본의 군사침략, 

 

청일전쟁기_일본군의_경복궁_침략에_관한_군사사적_검토.pdf

청일전쟁 초기 조일맹약 강제체결 군사침략 KCI_FI002024039.pdf


   조선 후기 관리들의 수탈과 픽밥으로 1차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 4월 발생하여서 5월 31이 전주성이 함락하였습니다.   고종, 민영준은 중국 청나라에 대해 지원할 병력 요청을 주장하였고 김병시는 텐진조약 ' 조선에 출병시 상대 나라에 대해 통보한다.' 는 항에 때라 일본 군대가 출동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6월 4일 중국 청나라에 군대 병력을 요청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죠.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 구식 군대가 월급으로 받은 쌀에 모래가 썩여있는 것에 대해 시작되어 권력에서 물러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추대한 난임. ] 때에도 조선 자체 군대 병력으로 난을 다스리지 못 하여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여 임금의 아버지가 중국 북경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일본 군대가 출동하는 일이 벌여졌었지요.

   이렇게 해서 일본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6월 10일 새벽에 해군소장海軍少佐 무코야마 신키치向山愼吉 함께 육전대陸戰隊 400여명 야전포野戰砲 6문, 순사 20명 인천에 상륙하여 경성으로 향합니다.   

  육전대의 파견과정에서 일본군의 불법적인 측면은 명확하게 파악되는데 육전대를 포함한 일본군의 조선출병에 대해 6월 7일, 스기무라 임시공사로부터 통보받은 조선은 독판 교섭통상사무 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직 趙秉稷으로 하여 금 일본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에게 조회를 보내 동학 및 공관호위를 빙자한 일본군의 출병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철회를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일 조선공사 김사철金思轍을 통해 일본정부에 철병을 철회 하도록 요구했다.  

* 구한국외교문서 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2, 고종 31년 5월 5일, 동학난 東學亂 및 공관보위빙자公館護衛憑藉의 파병방침철회요구 派兵方針撤回要求.

  6월 16일부터 17일에 걸쳐 육군소장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지휘하는 5사단 9 혼성여단 8천여명은 인천항에 상륙하여 임시 주둔했으며 17일에 대위 原野兼이 지휘하는 보병 21연대 8중대가 부산에 상륙하여 주둔했다.


                    조선 정벌 일본 9 혼성여단 조직


일본 조선 출병 현황

※ 출전 : 참모본부 편 參謀本部 編, 명치27,28년 明治二十七八年 일청전사日淸戰史 卷1,東京印刷株式會社, 1904.97~101쪽. 

※ 3차,4차 수송부대는 1894년 6월 하순에 동원을 완료하여 7월 중순 경복궁 점 령이 임박하자 수송을 결정했다.

혼성여단 전투서열


  일본군은 장기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군용전선을 1894년 7월 부터 1지대는 부산에서 대구방향으로, 2지대는 경성(서울)에서 부산방향으로 가설을 하였습니다. 조선 보호국 또는 정복하기 위해 자국민, 공사관 보호 명분을 얘기하며 군대를 무단으로 출병, 주둔하여 전쟁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군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883년과 1884년에 각각 교련병대를 모태 로 한 친군전·후영이 신설되면서 조선의 중앙군제는 전통 조선군식 훈련을 받는 군영과 청군식 훈련을 받는 친군좌·우영, 일본식 훈련을 받는 친군전영 등이 존재하는 기형적인 편제였다.  모순적인 조선의 중앙군제는 갑신정변 당시 일본군식 훈련을 받은 친군전·후영은 정변에 가담하고 청군식 훈련을 받은 친군좌·우영은 정변을 진압하는 등 난맥상을 보였다. 

  1888년(고종 25) 3영으로 통폐합됐다. 전영과 좌영을 합쳐 장위영壯衛營, 우영과 후영 및 해방영海防營을 합쳐 통위영統衛營, 별영은 총어영總禦營으로 개편하고, 이경하李景夏를 통위대장統衛大將, 신정희申正熙를 장어대장壯禦大將으로 임명했다. 조선의 중앙군은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 친군4영체제로 지속되어 1894년 청일전쟁시기까지 유지됐다. 

    1894 7 23일 새벽 5시경에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중장 휘하의 일본군 혼성여단 2개 대대는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불의에 습격·침입하였다.   조선측 궁성수비대(箕營兵) 600명은 영추문 迎秋門 광화문 光化門으로 돌입하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어명을 받은 우포장(右捕將) *안경수(安駉壽)의 전투중지 명령으로 무기를 버리고 왕궁을 빠져나갔습니다.  


1. 군부대신 안경수(安?壽)를 일본공사에 훈련대해산과 무장해제를 통보한 후 명성황후가 시해됨

2.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에 연루됨

3. 고종이 러시아로 빠져나갈려고 계획했는데 밀고해서 '춘생문 사건' 으로 다시 유폐됨 

4. 김재풍(金在豊) 등과 함께 고종 황제 양위 음모를 꾸밈


   
이렇게 쉽사리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가통수권자인 고종을 포로로 잡고 감금하고 경회루 慶會樓 본부를 설치하고 서울과 수원 등 궁성 내외의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이어서 별도로 동원된 일본군 1개 중대와 경찰대 및 일본인 壯士輩 호위 아래 대원군이 경복궁에 입궐함으로써 민씨계 친청정권을 대체하는 새로운 친일 정권이 수립하였다.    7 23일 이후 8 24일까지 경복궁은 일본군에 의해 수비되었고, 일본공사관이 발급하는 문표門票없이는 궁궐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친일 꼭뚜각시 정권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군국기무처 軍國機務處 통하여 개혁의 서막이 열렸는데 이때 부터 조선은

일본에서 정복된 것입니다.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고 나라사랑과 충성의 기치로 2차 동학혁명과 의병이 일어나고 대한제국 망국 후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895년 을미왜란, 을미사변으로 한 나라의 어머니 명성황후가 한낱 일본 낭인과 해산된 시위대에 의해 시해(살인)이 되는 참극이 발생합니다.   



    갑오왜란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 기간 ( 1894년 7월 27일부터 1897년 2월 11일) 중 정치 세력은 갑오파 (국내 개화파 ; 김홍집) , 갑신파 (망명한 갑신정변파; 박영효), 궁정파(왕당파) 왕족 및 외척, 정동파 (정동구락부; 외국 공사관 지역으로 세부 친미파, 친러파 구분), 신진관료들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로 전주성이 점령되고 관군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군대가 출동할 것은 요청하게 되자 일본에서도 즉시 1894년 6월 9일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이  일본군 제5사단 혼성 제9여단 6000명 (보병 3,000명, 기병 300명)을 이끌고 인천항에 상륙하여 6월 21일 새벽 5시 경복궁을 점령한다. 그렇게 하여 기존 수구파 정권을 전복하고 대원군과 김홍집을 앞세워 정권을 수립한다. 대원군과 김홍집은 1880년대 기구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라는 최고 의결 기구를 만들어 개혁을 추진한다.

갑오왜란 기간 중 김홍집 내각 조직을 간략하게 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친미개화파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윤치호, 이하영, 이상재(李商在)

갑신계      :   윤치호(尹致昊)․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친러파      :   이범진(李範晉)․이윤용(李允用)․민영환(閔泳煥)․민상호(閔商鎬)




대한제국 박정양 내각


갑오왜란 김홍집 내각_180811_JYKim.pptx




  

고균 김옥균에 대해 역사 책에 갑신정변에 대해 나오고 해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개화파 지도자로서 몇 가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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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http://blog.daum.net/ileejj/1533 강의자료 7 : 고균 김옥균의 삶과 사상 


김옥균을 두고 흔히 초기개화파 또는 급진개화파라고 부른다. 이는 뒤의 온건개화파와 구분해서 붙여진 것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은 꾸준히 정치개혁을 도모했고 끝내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들이 추진한 방향을 두고 부르주아 혁명이라 평가하기도 하고 급격한 정치개혁 노선을 지향했다고도 한다. 


김옥균 등의 정치적 지향은 첫째로 자주독립을 꼽는다. 


김옥균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이다. 어느 나라를 따질 것 없이 독립한 연후에야 화친할 수 있는데 조선이 홀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있으니 심히 부끄럽다. 조선이 어느 때에 독립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동열(同列)에 서겠는가? 〈신중환 공초〉, 《추안급국안》


이 말은 곧 우리가 완전독립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 전통적 외교노선인 사대교린정책을 불식하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명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개항 이후 청나라는 조선과의 전통적 외교관계를 들어 마치 속국처럼 다루고, 외교 · 통상조약에서 먼저 자국과

의 교섭 또는 허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왔다. 이것이 바로 자주적으로 서양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었다. 또 임오군란 이후 청국상인이 조선에 진출하고, 흥선대원군이 톈진에 구류되는가 하면 이홍장의 막하 오장경(吳長慶)이 서울에 주둔하면서 군문제독(軍門提督)이라는 이름으로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진행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 일본,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의 교섭에서 조선은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김옥균은 전통적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청국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여 새로운 국제 시대에 조선이 내정 · 외교에서 철저한 자주노선을 수립할 것을 역설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애국주의와 부국강병을 지향했다. 이것이 확립되지 않으면 외래 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자주독립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김옥균이 지향한 정체(政體)는 〈한성순보〉의 논설 〈구미입헌정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3권 분립과 양원제를 주축으로 한 의회제도, 이를 토대로 한 입헌군주제 아래에서의 국왕의 위치와 정부의 역할 등을 소개했다. 이는 봉건적 전제군주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입헌군주정치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한편 황현은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성공시키고 미국의 대통령제처럼 번갈아가며 그들이 군장이 되려 했다고 쓰고 있다.(황현 《오하기문》) 한마디로 김옥균이 입헌군주제와 대통령제,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봉건군주제도를 타파하려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기저 위에서 봉건제도의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다.


김옥균은 봉건신분제인 양반제의 폐지를 열렬히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양반제가 존재하는 한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와 함께 초기개화파들은 문벌의 타파를 추진했다. 세도정치 또는 족벌정치의 온상인 문벌의 타파가 선행되어야 양반제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관료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행정기구의 개폐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오군란 뒤 그들이 만든 기구인 기무처(機務處)에 이런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궁중예산제도를 확립하여, 왕궁에서 사사로이 무한정 쓰는 경비를 한정하게 했고, 국가재정수입을 호조의 단일 기구에서만 관장하도록 했으며 근대적 군사제도의 실시를 추진했다. 


그밖에 그들은 풍속의 변화를 꾀했다. 


그 중에서 복제의 개선, 색의(色衣)의 장려와 단발의 시행을 가장 중시했다. 이들은 벼슬아치들에게 도포나 장식이 많은 관복을 고쳐 두루마기로 통일시켰으며 일반 백성에게는 색의를 권장했다. 이는 실질 있는 풍속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근대문물 수입을 위해 학교의 설치, 통신제도의 개선, 기예의 장려 등을 도모했다. 


그들은 종래의 역마제(驛馬制, 역을 기준으로 한 파발)를 바꾸어 우정국을 설치했고, 전보를 보급하기 위해 전선국을 설치했으며, 각지에 어학학교 · 기예학교 등을 두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일본 · 중국에 파견하여 어학과 기술을 익히게 했고, 근대적 출판 · 언론을 보급하기 위해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러한 기구와 제도의 개혁과 풍속 · 문화운동은 단순한 개량의 수준이 아니었다. 비록 실학자의 주장을 수용한 면도 있고 선진문물의 영향을 입은 바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근대지향이라는 면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들의 이런 근대지향성은 번번이 수구파에 의해, 특히 복제개선 등에서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하고 좌절하는 수가 흔했다.  1895년에 전면적으로 단행된 ‘단발의 실시’를 놓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사례를 보아도 이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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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 상징인 손을 옷에 넣고 있다.



개화파 갑신정변 생사와 이후 참여 조직


갑신정변 김옥균_180507.pptx


관련 문서]

1> 박영효, <갑신정변>, <순종실기 :신민 14호>, 신민사, 1926.
2> 문일평, <사외이문비사(史外異聞秘史)>: 호암전집(3), 조광사, 1946.
3> 신복룡, <사외이문비사(史外異聞秘史)>: 호암전집(3), 조광사, 1946.
4>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동아일보> 193512)
5> 김옥균, <갑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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