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업(申學業, 이명: 신주극申柱極, 신주식申柱植, 신학우申學雨 1901~1975),

언양(彦陽) 사회주의 운동가

 

   신학업은 1901년 12월 16일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서부리 156번지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156) 에서 출생했다.    고령(高靈) 신씨 이족(吏族, 아전衙前) 가문으로 아버지 신병석(申秉奭)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석하(金錫夏)의 딸 김옥봉(金玉鳳) 사이의 첫째 신근업(申根業), 둘째 신영업(申榮業), 막내 신동업(申東業), 누이 신수복(申壽福)과 신래복(申來福) 중 셋째 아들이다.  신학업의 자녀로 거창에 거주하는 신숙자이다.

 

   신학업의 가족은 홀어머니 곁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언양면 호적에서 신학업은 첫째 행님 신근업(申根業)을 호주로(戶主, 세대주) 호에 속에 있고 토지대장에서 신근업은 답(沓, 논) 1,445평과 대지 286평을 소유하였고 신영업은 별호(別戶)로 분가해 있었는데, 소유한 토지는 없었다.   이들 3형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신합업은 언양공립보통학교 3회(1917년)로 이웃한 정인섭(鄭寅燮 1905~1983, 영문학자, 민속학자, 아동문학가)과 4살 차이가 있지만 동기 동창이다.   

언양읍 남문길 주변 역사적 인물들의 생가 터 [출처 : 울산저널]

   왜정시대인물자료 1권에 의하면 ‘1918년 1월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상과(商科) 야학부에 입학’으로 되어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대학으로 진학이 불가능하고 그 시기에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대학부는 이재과(理財科)가 있었는데 현재 경제학부로 볼 수 있다.    야간학부에 다닌 이유는 고학생(苦學生) 즉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인데 당시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이 있었다.

일제 시대 인력거

   일본 동경에서 1919년 3.1 독립선언 운동에 참여해서 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1917년 3월 혁명으로 러시아 차르(Tsar) 황제의 전제 군주제가 붕괴되었고 11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임시정부가 타도되었고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비에트 혁명정부는 러시아 내 각 만족들 간의 평등, 각 민족 자결권, 모든 민족적 특권과 제한의 철폐 등을 선언하므로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언양청년동맹 집행위원, 1928년 6월 3일.(이동개의 아들 이건욱 제공)

   1921년 8월 11일부터 18일까지 언양청년회에서 신문화 보급을 위해 지방순회 강연단를 조직할 때 우석(愚石) 김기오(金琪午 1900~1955, 대한교과서 사장), 김원룡(金元龍 1900~, 삼남면장 역임), 김진호(金鎭湖), 오락영(吳樂泳), 김남주(金南柱) 함께 연사로 활동하였다.

   1922년 일본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 (正則英語學校)에 입학을 하여 유학하는 동안 사회주의 잡지를 발행하는 경험을 하고 1923년 7월 귀국한다.   우연하게도 같은 달, 동경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주류파들도( 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鍾範)·정우영(鄭又影)·백무(白武) 등 ) 신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일시 귀국하였다.

 

   그들은 순회 강연단을 편성하여 7월 30일 서울 종로의 청년회관에서, 8월 1일에는 서울 천도교 회관에서 각각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강연주제는 ‘현 사회의 중병’, ‘해방운동의 의의’, ‘인간생활의 개조와 조선민족의 사명’, ‘청년의 역사적 사명’ 등 이었다. 그 뒤 1주일 동안에 걸쳐서 서울,평양,대구,광주,마산,진주,김해 등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3년 9월 30일 언양청년회에서 노동야학을 개설한다.   당시 50~60명이 참가하고 정인목(鄭寅穆)과 정인섭(鄭寅燮) 형제 그리고 김기호(金琪午)와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고 학생들은 조선어(국어), 한문, 산술(산수), 일어(일본어), 습자(習字, 글씨 연습)를 배웠다.   신학업의 지도로 언양청년활동가와 소년운동가들은 신사상,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활동 방식이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1923년 11월 동아일보 울산지국 기자와 언양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한다.   1924년 1월 4일부터 1월 15일까지 울산소작인회에서 소작인의 생활상태와 소작료를 함부로 더 받는 지주(地主, 땅주인) 조사를 할 때, 신학업은 범서, 두동 등 언양 서부 5개 면을 김택천(金澤天1895~1987, 울산 유력가, 동아일보 울산지국장),  오태영(吳太泳, 중남청년회),  오덕상(吳德相 1893~1971,  우정동 강정(江亭)마을 천선꾼, 울산청년회) 과 함께 직접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실제의 사정을 살폈다.   울산소작인회는 동아일보 울산지국에 창립 사무소가 있었다.

암태도 소작쟁의

   1924년 3월에는 언양청년회 김기오, 행님 신영업(申榮業 1899~? )과 함께 사회주의적 정치 운동 성격이 강한 무산자 동맹(無産者同盟)을 결성하였다.   당시 발기인이 39명이었는데, 그동안 계몽운동 중심의 청년운동이 사회혁명의 마르크스주의에 큰 영향을 받아 새로운 전환점에 있었고 그 추종 세력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신학업은 이후 언양에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일까?

  왜정시대인물자료 1권을 보면 1925년 까지 경성부(京城, 서울) 원남동 214 번지 김철수(金喆壽 1896~1977, 독립운동가, 정치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 것으로 나온다.

   김철수 선생은 양산출신으로 신학업과 동일 시기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다녔고 동경 2.8 독립선언 11인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1922년 조선청년연합회 상무위원으로,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위원회 선전위원 및 지방순회반 경남대표로 활동했다.

 

   1926년 4월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한 ‘사상 요시찰인 연명부 추가의 건’ 에 신합업은 조선총독부 감시대상으로 실려있다.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에 보면 ‘1926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름’ 으로 나온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신합업은 경성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것으로 볼수 있다.

 

    1927년 경남 울산군 언양면(彦陽面)에서 농민조합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신학업은 소위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28년 9월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1931년 7월경에는 양산군 상서면(上西面)에서 최해봉(崔海鳳) 등과 함께 권대형(權大衡)을 만나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경남동부위원회(慶南東部委員會)를 결성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신학업은 이와 같이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3년 5월 징역 2년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 , 정치가

   광복 직후 1945년 10월 결정된 거창군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신학업의 지도 아래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걸쳐 산하에 거창농민조합, 거창읍청년동맹, 부녀동맹 등이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신학우(申學雨)와 함일호(咸一鎬)가 참가했다.   고령 신씨 대동보에 ‘정은공파 24세 우(雨)항렬로 족보명은 신학우(申學雨)이고 학업(學業)이 그의 자(字)’라고 되어 있는데 신학우는 신학업과 동일인일 수 도있다.

   1946년 6월 4일 거창 인민위원장 신학업 등 39명이 미군정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거창 인민 위원회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47년 거창 인민 위원회 대표는 신학우였다.

*참고

1. 이병길, [경상일보] (2018년 09월 12일), ‘언양 울산 양산의 청년 농민운동의 중심에 선 신영업, 신학업 형제‘

2. 왜정시대인물자료 1권

3. 경성 종로경찰서 (1926년 04월 09일),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추가의 건」, 『경찰사무(檢察事務)에 관(關)한 기록(記錄) 3』

4. 이영훈(2015), 「20세기 전반 언양의 소농사회(小農社會)」, 『경제논집』 제54권 1호, 75-182,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7,1978), 『독립운동사』 3·9·10

6. 고령 신씨 대동보

7.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거창 인민 위원회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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