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윤은 1902년 간도 시찰원이었다가 1903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승진하였고 간도지역에 민병대인 忠義隊충의대를 결성하고 군 초소를 구축했다.  이범윤의 충의대(忠義隊)와 대한제국군 함북진위대는 1901~1903년 북간도에 침입한 청병(淸兵)이나 청비와 싸워 연전연승함으로써 간도를 지켜냈다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인 1904년 봄 이범윤 부대는 자발적으로 의용군 부대로 전환하여 항일군사활동을 전개했다. 충의대는 3, 4천명 이상의 인원이 참가하여 상당한 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1904 3월 회령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수행하던 추명찬러시아와 우호협력을 유지하라.”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소지하고 있어다. 이들은 회령 지역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 동향에 관한 첩보를 수집해 러시아 제1 네르친스크 까자크연대 백인부대장에게 넘겨주었다

  함경남도 원산 지역에서는 현홍근 부대가 활약하였다. 이 부대는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인 1904 3, 연해주의 추구예프 유년군사학교 출신 현홍근이 같은 학교에 다니던 유년사관들과 함께 결성하였다. 현홍근 부태는 300명으로 구성되어 주로 원산과 평양에 진주한 일본군 경비대대와 전투를 벌였으면 첩보수집과 첩자체포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러시아 연해주 군관구사령부는 1904년 6월 함경도 일대의 도시 부령, 함흥, 무산, 원산, 경성, 회령, 훈춘 그리고 길주 등 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인의병을 지원하기 위해 3천명으로 구성된 기병대를 북부지장으로 파견하였다. 기병대장은 대한제국군 출신 김인수가 맡았는데 대한제국군 부령(중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일본이 한성을 장악하던 1904년 2월 서울을 빠져나와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로 건너간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군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한인 빨치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김인수 기병부대가 부여받은 임무는 북한지방을 계속 장악하면서 일본군이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침범하는 것을 막는데 있었다.  

  1905 7 7일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지휘하는 선견한국분견대先遣韓國分遣隊가 결성되어 작전을 수행할 때, 이범윤 부대 역시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러시아 군을 도와 일본군과 싸우라는 국왕 고종의 지시를 수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참고문헌

1. 심헌용,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일본은 1904 2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한성(漢城)을 점령하여 황궁 경운궁을 무력을 동원하여 공격한 후 1904 2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전략 요충지인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 한일의정서)을 불법으로 늑결(조인)하였다

일제는 갑진왜란 이틀 후인 2 8일 인천의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는데, 이 러일전쟁도 이제 갑진왜란의 연장선에서 ‘식민지 프레임’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파악돼야 한다.

1903 8 15일자로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러 우호와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러 연합항전을 제안했다.   (홍웅호 편역,  『러시아문서 번역집() 62~63,  ‘대한제국 황제가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서신’).   1904 1육군참장 이학균은 참령 현상건과 모의해 전 러시아 주재 한국참서관 곽광의를 여순에 보내 러시아에 조선을 보호령으로 해 달라고 요청하려고도 했다.

 

출전 : 방위성방위연구소 소장, 『한국주차군 진중기요韓國駐箚軍陣中紀要

 

일본군은 갑오왜란 후 삼국간섭으로 헌병대 200, 보병 수비대 4개 중대를 파견하여 한성에 2 중대, 부산, 원산에 각각 1 중대를 주둔시켰다. 같은 조치는 일본 정부가 한성, 부산, 원산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한 것을 보여준다. 헌병대는 전선 수비의 임무를 담당했다. 육군은 2 중대를 지휘해야 하는 경성수비대장의 계급을 소좌(대령)급으로 결정하였고, 부산, 원산 지역의 수비대장은 대위급으로 결정했다. 주한 일본군은 꾸준히 증가하여 1901년경에는 4 대대로 추정될 정도였다.

주차군駐箚軍은 공사관, 일본 거류민 보호, 한국 내 이권과 시설, 일본이 가설한 한성부터 부산까지 전신선을 보호, 군사 정보 수집 이었다. 1903년 일본은 한국 주둔 일본군을 한국주차대韓國駐箚隊로 개편하고 사령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침략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러시아는 1903 7월에 한성주재원漢城駐在員 귄스버그Gunsburg가 이용익李容翊에게 접근해 용암포 조차를 약속받았다.  조성협趙性協이 삼림감리森林監理로 파견되고 7 20일 용암포 조차에 대한 가조약을 러시아 삼림회사 총무인 모지스코Mogisko와 체결했다. 러시아군은 용암포에 포대를 설치하고 대안 구련성에서 봉황성, 안동현을 거쳐 용암포에 이르는 선상에 1개 여단 병력을 배치했으면 6월에는 안동-용암포 간의 수저전선水底電線을 가설을 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용암포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하였고, 이것은 러일전쟁 발발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일제 침략군,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한국을 침공한 것은 러일전쟁에 참전할 일본군을 편성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곧 러일전쟁 도발과 함께 ‘한국임시파견대’라는 이름하에 일본군이 한국을 침공한 것이다.   

이 부대는 일본군 제12사단 예하 4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되었으며, 그 사령관에는 제23여단장인 목월안강木越安綱소장이 임명되었다.   1904년 1월 22일 일본군은 123여단장 기고시 야스츠나(목월안강木越安綱소장에게 한반도 점령의 임무를 주었다그가 인솔하는 보병 4개 대대로 편성된 선발대 즉 조선임시파견대朝鮮臨時派遣隊가 대한제국 정부가 외교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왕실과 정부를 장악하기 위하여 한성을 조기에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임시파견대는 동향평팔랑東鄕平八朗이 거느리는 60여 척의 일본군 연합함대와 함께 1904년 2월 6일 좌세보佐世保항을 출항하였다. 연합함대는 2개 함대와 4대 전대로 편성되었다. 부산 앞바다를 지날 무렵에 러시아 전함 한 척을 공격하여 서전을 장식하였고, 목포 앞바다를 통과하면서 다시 러시아 기선 한 척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목포 부근에서 항로를 나누어 정로군征露軍1, 2, 3전대은 뤼순항(여순旅順港)로 향하고,  순양함 6척과 어뢰정 8척으로 편성된 제4전대가 우리우(瓜生外吉) 소장 인솔 하에 한국임시파견대와 함께 인천항으로 향했다. 

이때 인천항에는 러시아의 순향함 2척 코레예츠호와 바랴크호가 정박하고 있었다일본의 우리우 소장은 러시아 함대가 9 12시까지 인천항에서 퇴함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함 2척이 외항으로 퇴함하자, 일본함대는 8 16 20분 함포사격을 가하여 이들 함대를 인천 앞바다에 가라앉혔다.

 

조선임시파견대 기고시 여단 2,200는 8~9일 양일간 인천에 상륙한 뒤, 보병 제46연대 제2대대와 제47연대 제2대대는 인천을 점령하여 그곳에 일시 머물고, 나머지 제14연대 제1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9일 오전에 목월안강木越安綱사령관의 인솔하에 서울로 침공하여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임시파견대의 서울 점령은 곧 일제가 대한식민지화를 감행하려는 의지의 직접적 표출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당일 2월 9일 오후 15 30분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 임권조林權助는 광무황제를 알현하고 “이번 개전과 일본군의 서울 입성은 한국의 황실과 국토를 보호하여 한국의 독립을 영구하게 하기 위한 의거”라는 상투적인 거짓말을 상주하여 광무황제의 배일행동을 우선적으로 견제하였다.

2 18일에 인천 경비부대 2개 대대와 2 19일 제12사단장 이노우에(정상광井上光)가 사단 주력부대를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왔다 일본군 후속부대는 그후에도 계속 들어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면서 전토를 유린하였다. 특히 인천-서울 사이에는 일본군과 군수물자로 뒤덮였으며, 한국군 병영을 비롯해 관청과 학교, 심지어는 궁궐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중요한 건물 대부분이 일본군에 수용됨으로써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던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왜군이 인천에서 속속 입경入京한 자가 병사가 5만여 명이고 말이 1만여 필로서 창덕궁·문희묘文禧廟·환구단·저경궁·광제원·관리서 등을 빌려 무릇 18곳에 연이어 군영을 삼아 주둔하였으며, 서문 밖의 민가 수백 채를 사들여 헐어서 마굿간으로 삼았다. 또한 5강한강연안에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만들었으며, 밥짓는 연기가 수백 리에 뻗쳤다. 남쪽으로부터는 왜군이 동래를 거쳐 대구로 나아가고, 남해를 거쳐 남원으로 나아갔으며, 군산을 거쳐 전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서로西路에는 평양·삼화, 북로北路에는 원산·성진에서 서로의 거리를 수백 리로 하여 차차 요동으로 항하여 나아갔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갑진늑약甲辰勒約)는 이와 같은 폭압적 공포분위기하에서 강요된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영구화하기 위해 3월 11일자로 한국임시파견대를 한국주차군으로 고치고 그 사령부를 서울에 두었다. 제12사단 병참부에 후비병을 보충하여 영구적으로 점령할 준비를 하면서 육군소장 원구겸제原口兼濟를 초대 한국주차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원산 주둔의 보병 제37연대 제3대대와 제12사단 병참부 및 제47연대 제1대대를 이에 예속시키는 한편 제45연대의 일부를 부산에 파견하여 한국 전토를 점령하는 제반 조치를 마쳤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군은 먼저 이른바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1904년 7월부터 시행한 군사경찰제가 그것이다. 군사경찰제 시행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저항한 한국민을 탄압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1904 223일 이노우에가 고종을 알현한 후에, 15시에 공수동맹인 대한국(大韓國)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 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勒結; 조인)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를 일본이 간섭하고 한국의 영토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군사목적에 영토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1. 현광호, ‘대한제국기 주한 일본군의 활동’, 고려대학교, 2013

2. 심헌용,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연구',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2011년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는 1901년 기준으로 대한제국군 병력이 한성 서울 중앙군 병력과 지방 군대인 진위대를 합치면 2 8천 여명에 달하고 전국 포군과 육군무관학교 생도를 합치면 충분히 3만명이 넘는다고 추정치를 근거로 제시한다.

 정말 대한제국 군사력이 그렇게 강했다는 말인가? 대한제국 군대와 무기 관련해서 살펴볼까요. 먼저 총기제조에 대해 볼까합니다.

 대한제국 시위대 기병대


한국근대 전력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오진석, 2006‘Ⅱ. 1. 1) 대한제국의 근대산업육성정책내용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887년에 설립한 기기국 산하의 기기창은 1890년대 자금난으로 크게 위축되어 었는데, 대한제국에 들어서 군부 軍部 포공국砲工局 산하의 기계창機械廠 (기기창機器廠, 한성기계국漢城器械局 등으로도 불림)으로 변신해 중흥을 꾀하고 있었다.

 기기창을 관할한 기기국은 군무아문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895 3 군무아문이 폐지되고 군부가 신설되면서 기기국이

폐지되고 포공국이 신설되었다. 아마도 기계창은 이때부터 포공국에서 관할하게 것으로 보인다.  

* 기계창機械廠은 기계()나 도구()를 두어 두는 창고(), 또는 만드는 공장()

그런데 1901 이용익李容翊 기계창의 대대적인 확장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프랑스 육군포병대위 출신 패이외(Payeur) 중위 루이(Louis) 각각 기계창의 수지사首技師와 군물조사원軍物調査員으로 고빙하여 기계창 확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당시 프랑스인 기술자 고빙계약을 체결한 군부 포공국장 대변 軍部砲工局長 代辦 이건영李健榮(이인영의 ) 이용익 계열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군부 포공국장 軍部砲工局長(1901.2.4~3.15) 재직하다가 이용익이 맡고 있었던 탁지부의 탁지부 사세국장度支部 司稅局長(3.16~7.24)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당시 군부 포공국장변軍部砲工局長代辦(3.20~7.31) 겸하였다. 

이용익의 군수산업 육성 계획은 1903 말에 다시 추진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면서 외국에서 각종 군사장비를 대량 수입하고 징병제 실시를 통한 의무병역제도로의 개선을 시도하는 육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4,000톤급 포선 砲艦 양무호揚武號(55만원) 구입하여 해군 창설을 도모하는 대규모 군비확장을 기도하였다. (김재승金在勝, 한국근대해군창설사 韓國近代海軍創設史 혜안, 2000)

 이런 분위기 아래 1903 12월경 이용익은 드디어 삼정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장京城支店長 소전감사차랑小田柿捨次郞, 정상선문井上宜文 협의 하에 용산 전환국 뒤쪽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경성부사京城府史2, 경성부京城府, 1936, 1025~1026. 군부 포공국에서 이미 1903 7월경부터 삼청동 기계창 내에 총기제조소 설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삼정三井과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아 성공하지못했는데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7.2, 7.30, 9.1, 9.8, 11.21) 전기철도사무 조변위원電氣鐵道事務 査辦委員 임명된 적이 있었던 이용익 계열의 이무영李懋榮 군부 포공국 포병과장에 임명(1903.11.19) 이후, 급진전하여 12월경에 설립에 성공한 듯하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11.17,12.12.) 

 이에따라  위치도 애초 삼청동 기계창 내에서 용산으로 변경되었다.


이용익은 1903 10월에 육군참장陸軍參將 헌병사령부관憲兵司令官 임명되었고, 1904 1월에는 군부대신軍部大臣을 거쳐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되었다. ( 안용식安龍植, 대한제국관료사 연구 大韓帝國官僚史硏究,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延世大學校 社會科學硏究所, 1995, 680.) 주지하듯 이용익은 1904 2월에 일본으로 납치되었으므로 이후로는 이상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총기제조소는 1904 7월과 9월에 정식으로 군기창관제軍器廠官制 공포되어 군기창 산하기관인 총포제조소銃砲製造所 편입되었다. 관제로 군기창은 군부대신 직속으로 산하에 총포제조소銃砲製造所, 탄환제조소彈丸製造所, 화약제조소火藥製造所, 제혁소製革所, 직조소織造所 거느린 거대조직이었다. 

관제 포고와 함께 책임자인 제리提理(관리管理)에는 조직에 걸맞게 군부협판 참장參將 현영운玄暎運 임명되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高宗4178, 411019. 관제상으로 보면 소장所長에는 참령參領 혹은 정위正尉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기창은 향후 육군에 필요한 병기兵器, 탄약彈藥, 기구器具, 재료材料 제조 수리를 맡고 해군에 필요한 화약火藥 제조하는 한편 제화製靴, 제직製絨 군용軍用 혁구革具, 피복被服 제조製造 등을 담당할 거대 기관으로 구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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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jcjc518 블로그 '대한제국의 군사력'

2015. 2. 28. 8:43


대한제국의 군사력입니다
정규군 25,000명에 예비군10,000명
1인당 국민소득 850$,당시 이정도면 일본다음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개인화기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탄:10.67×58mm
숫자:5천문 수입 대한제국군 주력소총

독일제 m1871마우저 소총
탄:11×60mm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주력소총 입니다
미국제 레밍턴 소총
구경 : 7.62mm, 길이 : 109.7cm, 총신길이 : 61cm, 무게 : 3.94kg
영국제 엔필드 소총
탄약 7.7×56mm (.303 브리티시탄) / 작동방식 볼트액션 / 전장 1,100mm (MLE) / 중량 4kg / 발사속도 분당 20~30발 / 유효사거리 503m

일본제 무라타 소총
구경: 8mm
전장: 122cm
무게: 4.17kg
장탄수: 5발
독일제 m1896마우저 권총 
탄:7.63mm
대한제국군 주력권총 입니다

분대지원화기


개틀링건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라노은 기관총
20문 수입
맥심기관총
탄종.303 브리티쉬
급탄250발짜리 천제 탄띠급탄
작동 방식반동식
냉각 방식수랭식
총열 길이673mm
전장1079mm
운용 인원4명
중량26.7kg
발사속도분당 500발


포병전력

독일제 75mm크루프 야포
이건 당시에는 일본도 가지지못한 고급포 였다고 합니다 현제로 따지면 pzh-2000정도

청나라제 암스트롱포
청나라에서 10문 수입합니다

대한제국 군사력이 이정도입니다


케이블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 (김태리)과 유진최이(이병헌) 대화에서 유진초이가 고애신에게 '

귀하의 정체는 뭐요? 활빈당이요? 의병이요? 라고 묻는 대사가 나온다.  깜놀 깜짝놀랬서라. 왠 활빈당. 홍길동전의 그 활빈당.

아니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대한제국 시기 1900년에서 러일전쟁 발생 전 1903년 배경으로 벌어지는 무명 의병얘기다.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기 활빈당 活貧黨은 존재했었다.  


1. < 조선왕조실록 >에서 < 활빈당 >이란 검색어로 찾아지는 기사는 단 한 건 ,  1885년 고종 22년의 기사다 .

  '만여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활빈당이라' 칭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2. *사법품보 司法稟報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기의 재판 기록을 정리한 < 사법품보 >를 봐도 당시 활빈당이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1890년에서 1905년에 이르는 약 15년사이, 활빈당과 관련해 처벌받은 사람의 숫자가 무려 200여명에 달한다 . 

*1894년(고종 31)부터 1907년까지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법부()에 전국 각지의 관아와 지방재판소에서 보내온 공문서를 제책한 자료. 


활빈당은 화적火賊, 비적匪賊, 도적盜賊으로 여겨져 의병운동에 비해 부각되지 못 했다.

활빈당의 반제국주의, 반일, 외세 침략 대항 사례를 보겠서라. 활빈당 활동을 보니 일본인을 혼내주던 '각시탈' 만화가 떠오르네여.  


활빈당의 외국상선에 대한 습격은 이들로 인해 내왜국 상선의 손해가 많아 상선의 운항에 방해가 심하고..

[황성신문 광무 11(19074 242면잡보 (水賊熾盛 수적치성; 해적이 왕성하다.)]


임실군에서는 일본인 미상米商 중미 中尾가 2,000 금을 탈취당한 후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황성신문, 광무 11(1907) 3 6 2면잡보(살인)]


천안군 예서시에서는 적한합명賊漢拾명이 취리取利 하는 일인 1명과 전구영업하는 일인 1명을 봉목으로 난타하고 칼로 난자하야 전구하는 일인을 즉사하고 취리하는 일인도 사경에 이르게 했다.

[황성신문, 융희 2(1908) 12 16 2면잡고(적입례시)]


밀양에서는 철로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산에 올라 측량하던 일본인 10여명이 맹감역당에게 습격을 받아 구타당한 후 무기 및 의복 등을 탈취당하였다.

금갑팔공소: 사법품보司法稟報 제 92, 광무 8 (1094년) 5 31


추풍령 부근에서는 경부철도선로공부 금정좌차랑 今井佐次郞 소천국치小川國治가 충청남도 황간, 변산 등지에서 활동하는 집단에게 습격을 당해 한 명이 사망하는 등 철도부설관계자를 습격하였다.

[각사승록 各司勝綠, 동래포보첩 東萊浦報 7, 광무 9 3 6일]


그 외에 철로에 방해물을 설치하여 기차의 전복시키거나 운행을 지연시키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가 외부대신에세 철도운행방해의 엄벌을 요청하다

경부철도회사의 품소에 의하면 경산일존 내 신동부근에서는 선로상에 석괴를 병치하여 기차의 전복을 계획함이 한 두번이 아니란 것이다 

[고종시대사 6, 광무 8 11월 , 국사편찬위원회]



1902년 개혁당(改革黨)은 동년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이용익李容翊이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체가 조직되었습니다.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명령으로 1989년 11월 해산되고 감옥에 투옥되었고 전 독립협회 활동가들이 개혁활동을 계속하면서 개혁당이라 이름이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에 1894년 김옥균이 우두머리로 활동한 무리를 개화당 또는 개혁당이라 불렸었는데 수구파 즉 보수파 반대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당에 이상재李商在, 이상설 相卨, 박은식朴殷植, 남궁억南宮檍, 양기탁梁起鐸, 장지연張志淵, 이도행李道宰,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노백린盧伯麟,오세창吳世昌, 이범진, 김석환, 민병두, 김병태전덕기 등이 함께 했습니다. 개혁당은 일본이 *동청사변(東淸事變)영향으로 영일동맹을 맺어 대한제국 침략의 기반을 다지자 대외에 중립국을 표방 및 구국독립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준열사가 1902년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 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 동청사변이란  러시아가 건설중이던 동청철도(東淸鐵道)가 중국 의화단 운동으로 파괴되면서  러시아는 자국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18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주요지역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중국 의화단 운동을 북청사변(北淸事變) 이라고도 하는데 동청사변은 이것의 연관된 사건이다.

1902년 6월 연락책 이상재가  밀고를 당해서 체포되었는데 이유는 "민영환을 회장, 박정양을 부회장으로 추대한 조선협회(朝鮮協會)를 조직하여 독립협회 잔존세력과 일본망명객들이 연대하여 정부 개조를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경위원(警衛院) 총관 이근택에게 심문을 받고 그를 비롯한 아들 이승린, 이원긍(李源兢), 홍재기(洪在箕), *유성준(兪星濬), 김정식(金貞植) 등 독립협회 시절 동지들이 함께 체포 및 구속되었고 두 달간의 심문 끝에 국사범으로 판결받은 그는 1902 8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 유성준兪星濬은 유길준兪吉濬의 동생으로 아관망명 즉 아관파전으로 갑오개혁이 중단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2년 귀국하여 1902년 2월 일본 육사 출신 청년장교들의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 쿠테타 기 사건' (유길준 음모 사건)에 연류되었다.   1904년 3월 11일 법부대신 이지용의 재판장 신태휴가 김홍진(金鴻鎭), 장호익(張浩翼), 조택현(趙宅顯) 3명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11기)을 사형을 선고했고 곧 처형되었다.


1903년 한성감옥에서 애국동지들과 함께 

왼쪽 중죄수 복장이 이승만, 앞줄 오른쪽 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 부터 부친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 (이상재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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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직은 후에 1907 4월에 결성된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新民會 계보가 이어진다

* 참고자료

1. 유자후(柳子厚), 이준李儁선생전

2. 관보(官報) 1902 6 28일자 사법(司法)’

3. 관보(官報) 1904 3 28일자 사법(司法)’; 질품서(質稟書) 2 (190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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