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904년 2월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한성(漢城)을 점령하여 황궁 경운궁을 무력을 동원하여 공격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전략 요충지인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 한일의정서)을 불법으로 늑결(조인)하였다.
일제는 갑진왜란 이틀 후인 2월 8일 인천의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는데, 이 러일전쟁도 이제 갑진왜란의 연장선에서 ‘식민지 프레임’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파악돼야 한다.
1903년 8월 15일자로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러 우호와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러 연합항전을 제안했다. (홍웅호 편역, 『러시아문서 번역집(Ⅳ)』 62~63쪽, ‘대한제국 황제가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서신’). 1904년 1월 육군참장 이학균은 참령 현상건과 모의해 전 러시아 주재 한국참서관 곽광의를 여순에 보내 러시아에 조선을 보호령으로 해 달라고 요청하려고도 했다.
출전 : 방위성방위연구소 소장, 『한국주차군 진중기요韓國駐箚軍陣中紀要』
일본군은 갑오왜란 후 삼국간섭으로 헌병대 200명, 보병 수비대 4개 중대를 파견하여 한성에 2개 중대, 부산, 원산에 각각 1개 중대를 주둔시켰다. 같은 조치는 일본 정부가 한성, 부산, 원산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한 것을 보여준다. 헌병대는 전선 수비의 임무를 담당했다. 육군은 2개 중대를 지휘해야 하는 경성수비대장의 계급을 소좌(대령)급으로 결정하였고, 부산, 원산 지역의 수비대장은 대위급으로 결정했다. 주한 일본군은 꾸준히 증가하여 1901년경에는 4개 대대로 추정될 정도였다.
주차군駐箚軍은 공사관, 일본 거류민 보호, 한국 내 이권과 시설, 일본이 가설한 한성부터 부산까지 전신선을 보호, 군사 정보 수집 이었다. 1903년 일본은 한국 주둔 일본군을 ‘한국주차대韓國駐箚隊’로 개편하고 사령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침략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러시아는 1903년 7월에 한성주재원漢城駐在員 귄스버그Gunsburg가 이용익李容翊에게 접근해 용암포 조차를 약속받았다. 조성협趙性協이 삼림감리森林監理로 파견되고 7월 20일 용암포 조차에 대한 가조약을 러시아 삼림회사 총무인 모지스코Mogisko와 체결했다. 러시아군은 용암포에 포대를 설치하고 대안 구련성에서 봉황성, 안동현을 거쳐 용암포에 이르는 선상에 1개 여단 병력을 배치했으면 6월에는 안동-용암포 간의 수저전선水底電線을 가설을 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용암포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하였고, 이것은 러일전쟁 발발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일제 침략군,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한국을 침공한 것은 러일전쟁에 참전할 일본군을 편성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곧 러일전쟁 도발과 함께 ‘한국임시파견대’라는 이름하에 일본군이 한국을 침공한 것이다.
이 부대는 일본군 제12사단 예하 4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되었으며, 그 사령관에는 제23여단장인 목월안강木越安綱소장이 임명되었다. 1904년 1월 22일 일본군은 제1군 제23여단장 기고시 야스츠나(목월안강木越安綱) 소장에게 한반도 점령의 임무를 주었다. 그가 인솔하는 보병 4개 대대로 편성된 선발대 즉 조선임시파견대朝鮮臨時派遣隊가 대한제국 정부가 외교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왕실과 정부를 장악하기 위하여 한성을 조기에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임시파견대는 동향평팔랑東鄕平八朗이 거느리는 60여 척의 일본군 연합함대와 함께 1904년 2월 6일 좌세보佐世保항을 출항하였다. 연합함대는 2개 함대와 4대 전대로 편성되었다. 부산 앞바다를 지날 무렵에 러시아 전함 한 척을 공격하여 서전을 장식하였고, 목포 앞바다를 통과하면서 다시 러시아 기선 한 척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목포 부근에서 항로를 나누어 정로군征露軍제1, 제2, 제3전대은 뤼순항(여순旅順港)으로 향하고, 순양함 6척과 어뢰정 8척으로 편성된 제4전대가 우리우(瓜生外吉) 소장 인솔 하에 한국임시파견대와 함께 인천항으로 향했다.
이때 인천항에는 러시아의 순향함 2척 코레예츠호와 바랴크호가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의 우리우 소장은 러시아 함대가 9일 12시까지 인천항에서 퇴함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함 2척이 외항으로 퇴함하자, 일본함대는 8일 16시 20분 함포사격을 가하여 이들 함대를 인천 앞바다에 가라앉혔다.
조선임시파견대 기고시 여단 2,200명는 8~9일 양일간 인천에 상륙한 뒤, 보병 제46연대 제2대대와 제47연대 제2대대는 인천을 점령하여 그곳에 일시 머물고, 나머지 제14연대 제1대대와 제24연대 제2대대는 9일 오전에 목월안강木越安綱사령관의 인솔하에 서울로 침공하여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임시파견대의 서울 점령은 곧 일제가 대한식민지화를 감행하려는 의지의 직접적 표출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당일 2월 9일 오후 15시 30분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 임권조林權助는 광무황제를 알현하고 “이번 개전과 일본군의 서울 입성은 한국의 황실과 국토를 보호하여 한국의 독립을 영구하게 하기 위한 의거”라는 상투적인 거짓말을 상주하여 광무황제의 배일행동을 우선적으로 견제하였다.
2월 18일에 인천 경비부대 2개 대대와 2월 19일 제12사단장 이노우에(정상광井上光)가 사단 주력부대를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왔다. 일본군 후속부대는 그후에도 계속 들어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면서 전토를 유린하였다. 특히 인천-서울 사이에는 일본군과 군수물자로 뒤덮였으며, 한국군 병영을 비롯해 관청과 학교, 심지어는 궁궐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중요한 건물 대부분이 일본군에 수용됨으로써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던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왜군이 인천에서 속속 입경入京한 자가 병사가 5만여 명이고 말이 1만여 필로서 창덕궁·문희묘文禧廟·환구단·저경궁·광제원·관리서 등을 빌려 무릇 18곳에 연이어 군영을 삼아 주둔하였으며, 서문 밖의 민가 수백 채를 사들여 헐어서 마굿간으로 삼았다. 또한 5강한강연안에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만들었으며, 밥짓는 연기가 수백 리에 뻗쳤다. 남쪽으로부터는 왜군이 동래를 거쳐 대구로 나아가고, 남해를 거쳐 남원으로 나아갔으며, 군산을 거쳐 전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서로西路에는 평양·삼화, 북로北路에는 원산·성진에서 서로의 거리를 수백 리로 하여 차차 요동으로 항하여 나아갔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갑진늑약甲辰勒約)는 이와 같은 폭압적 공포분위기하에서 강요된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영구화하기 위해 3월 11일자로 한국임시파견대를 한국주차군으로 고치고 그 사령부를 서울에 두었다. 제12사단 병참부에 후비병을 보충하여 영구적으로 점령할 준비를 하면서 육군소장 원구겸제原口兼濟를 초대 한국주차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원산 주둔의 보병 제37연대 제3대대와 제12사단 병참부 및 제47연대 제1대대를 이에 예속시키는 한편 제45연대의 일부를 부산에 파견하여 한국 전토를 점령하는 제반 조치를 마쳤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군은 먼저 이른바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1904년 7월부터 시행한 군사경찰제가 그것이다. 군사경찰제 시행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저항한 한국민을 탄압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1904년 2월 23일 이노우에가 고종을 알현한 후에, 15시에 공수동맹인 대한국(大韓國)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 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勒結; 조인)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를 일본이 간섭하고 한국의 영토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군사목적에 영토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1. 현광호, ‘대한제국기 주한 일본군의 활동’, 고려대학교, 2013년
2. 심헌용,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연구',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