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오년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10년이 되는 해로 일본은 정한론(征韓論 ; 에도 막부 말기 1855년 에서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서 등장한 조선 침략론) 에 따라 드디어 실행은 옮깁니다. 갑오년 일본의 조선 정벌은 개혁으로, 청일전쟁으로 갑오왜란, 조선 정벌, 경복궁 점령은 가려져 있고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에 병탄, 합방, 보호국,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준비과정, 출병, 경복궁 강제점령 등은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일본군은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여 동학농민군의 진압이 아닌 내정개혁요구, 한성(경성, 서울) 진입과 경복궁 점령을 통해 조선정부를 제압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청일전쟁을 안정적으로 개시했습니다.
일본은 한성 진입, 경복궁 점령을 위해 군사작전을 시행했습니다. 출병한 혼성여단의 전체 병력은 약 8,000여명이었으며, 혼성9여단사령부, 보병11연대, 보병21연대, 기병5대대1중대, 야전포병5연대3대대, 공병5대대1중대, 치중병대, 위생대, 야전병원, 병참부 등 편제(예하부대)와 종졸마졸(從卒馬卒), 인부 등 보조병력이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별도의 전신대를 혼성여단에 편성시켜 작전통신을 확보하고자 했다.
인천에 상륙한 혼성여단의 전신대(479명)는 서울에 무단 입성한 뒤 조선과 협의없이 임의대로 경부간 전선가설을 시작했다. 전선가설에 대한 명령은 1894년 6월 27일, 대본영 참모총장 熾仁 親王의 명의로 혼성여단장 大島義昌에게 하달됐다. 혼성여단은 제1・2전선가설대를 편성하여 병참총감에게 소속하고, 제1지대는 부산에서 청주까지, 제2지대는 서울에서 청주까지 전선을 가설했다. 군사전선의 가설은 불법성이 있었다. 조선의 영토에 외국군이 임의대로 군사목적의 기반시설을 착공하는 것도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해당 전선이 통과하는 토지를 매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전선가설을 감행했다. 군사전선의 가설이후 이에 대한 경비문제도 있어 일본군은 차후 이를 조선정부에 일방적으로 책임지우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국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이며, 이후 외 일본군이 출병하여 수도 서울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으며, 왕궁이 불법적이고 강제적으로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도록 조선군은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무기력한 조선의 군사적 대응으로 마냥 치부하기엔 이 시기의 정세변화와 군사강점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조선군에 대한 정리가 먼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군 군제도와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1888년(고종 25) 4월에 고종은 군제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군인 수효가 적은데 군영은 많다는 이유로 새로운 군제에 대한 절제와 규식을 정한 절목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신건친군우영, 신건친군후영, 해방영을 합쳐 통위영으로, 신건친군전영, 신건친군전영, 신건친군좌영을 합쳐 장위영, 별영으로 총어영을 정했습니다. 신설된 3영의 지휘관으로 민영익閔泳翊 통위사統衛使, 이경하李景夏 통위대장統衛大將으로, 전영사 前營使 한규설韓圭卨 (형인 한규직韓圭稷 갑신정변 참살) 장위사壯衛使, 신정희申正熙 장어대장壯禦大將으로, 별영사別營使 이종건李鍾健을 총어사總禦使로 임명했습니다. 3영체제를 지속하면서 1891년(고종 28) 고종은 서울 외곽방비의요지였던 탕춘대蕩春臺와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비를 위해 이전 총융군摠戎軍을 3영에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을 별도로 신설했다. 실질적인 왕궁 호위를 담당했던 친군 용호영을 제외하고 조선의 중앙군은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 친군 4영체제로 지속되어 1894년 청일전쟁시기까지 유지됐습니다.
장위영 조직은 총 2,66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간부 및 사무직은 도제조(都提調) 1명, 영사(營使) 1명, 병방(兵房)·군사마(軍司馬)·문안(文案)·정령관(正領官)·부영관(副領官)·참영관(參領官)·초관(哨官)·참군(參軍) 등 241명이며, 병정은 1,680명이고, 지원 요원은 치중병(輜重兵) 150명, 비전병(非戰兵) 170명, 공병(工兵) 25명 등 745명이었다. 장위영의 조직도는 그림과 같다.
이들 중앙군영 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 간과해서 안 되는 조직이 1888년 설치된 연무공원鍊武公院이다. 미국인 교관에 의해 미국식 군사교육을 시행했던 연무공원은 40여명의 생도들을 대상으로 장교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연무공원을 통해 양성된 생도들은 중앙군의 핵심이었던 친군 4영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연무공원의 기간요원들도 정부의 핵심요직으로 배치됐습니다. 이때 이전에 각 영별로 약 500여 명이었던 병력이 1영에 병력 2,250명, 작대병作隊兵 1,960명으로 확충됐습니다.
3군영으로 통합한 1889년 6월, 1891년 2월, 고종은 직접 봉무당隆武堂에서 왕세자가 대좌侍座한 상태에서 통위영, 장위영 두 군영의 새로 훈련된 군사들의 연조演操를 점검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추진하는 군영강화의 결과 일정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고종은 군영의 훈련을 담당했던 훈련교관 차윤茶伊(Dye, William. M.)은 병조참판으로, 인시덕 仁時德(Neinstead, F.H.)은 병조참의로 임명했습니다.
1891년(고종 28) 서울 도성의 방위를 위한 배후지로 탕춘대와 북한산 방비를 강조한 고종은 이전 총융청에 소속되었던 병력을 별도로 차출하여 경리청라 지칭하고, 서울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참고자료
1] 2014. 12, 김경록,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에 관한 군사사적 검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 2015. 08, 김경록, 韓日關係史硏究 제51집, 청일전쟁淸日戰爭 초기初期 조일맹약朝日盟約의 강제 체결과 일본의 군사침략,
청일전쟁기_일본군의_경복궁_침략에_관한_군사사적_검토.pdf
청일전쟁 초기 조일맹약 강제체결 군사침략 KCI_FI00202403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