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제4부 가야의 힘과 미 ②철산지를 찾아라 '가야 철 연구가 손명조씨


가야사 연구자 중 드물게 ‘가야의 철’을 집중 연구해온 손명조(41·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지난 6일 본사 주최 ‘가야사 시민강좌’의 강사로 참여, ‘가야의 철’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 후 그를 인터뷰했다.

-가야사 연구자 중 철기연구가는 얼마나 되나.

▲가야사를 푸는 열쇠가 ‘철’인데도 연구가는 2, 3명이다. 그만큼 접근이 어렵다는 말도 된다. 철은 시간이 가면 녹이 슬고 햇빛을 보면 부식된다. 다루기가 까다롭다.

-철이 왜 중요한가.

▲고대사회의 철은 오늘날 석유나 핵무기에 비유된다. 그 자체가 사회변동 요인이기도 하다. 철을 가진 자, 강철을 만드는 자가 사회를 지배했다.

-고대 철생산은 어떻게 이뤄졌나.

▲철이 생산되려면 원료(철광석), 연료(나무와 숯), 구조물(제련로), 노동력, 기술력이 모두 구비되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수입해야 한다. 구조물인 노(爐)는 하이테크다. 그래서 제작이 끝나고 나면 모두 뜯어낸다. 기술보안 때문인 것 같다. 조사해보면 대부분 바닥뿐이다.

-고대인들은 철광석을 어떻게 찾아냈나.

▲아직도 의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철광석은 전국에 두루 분포한다. 문제는 철의 함유량이며 경제성이다. 20~30%의 쇠가 함유돼 있는 철광석은 경제성이 없다. 70% 이상은 돼야 철을 뽑을 수 있다. 탄소함유량을 잘 맞춰야 강철이 된다. 그런 원료를 어떻게 찾아내 제련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김해의 생림, 생철에는 철산지가 있을 법한데.

▲10여차례 현장을 조사했으나 찾지 못했다. 김해지역 고분에서 쏟아진 엄청난 철기를 볼 때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찾아야 한다.

#철 생산의 단서들

가야의 그 많은 철기들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해 유통시켰을까. 철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던 가야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고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아쉽게도 가야의 철 생산유적(철산지·제련로)이 조사된 예는 아직 없다. 단편적인 단야(鍛冶·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벼리는 것) 유물들이 나오긴 했으나 가야 철의 실체에는 접근이 안된다.

재미있는 단서들은 있다.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는 김해 창원 밀양 합천 양산 안동 등지의 가야 옛 지역에 철산(鐵山)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또 이들 지역에 불무골 쇠똥섬 똥뫼 금곡 야로 생철 생림과 같은 철산지를 암시하는 지명이 많고 지금도 적지 않은 철똥(슬래그)이 발견되고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쇠똥

먼저 6세기대 제철유적으로 확인된 밀양 사촌으로 가보자.

밀양 시내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울산쪽으로 10㎞쯤 가다 보면 최근까지 철을 캐냈다는 금곡(金谷)이란 마을을 만난다. 이곳 삼거리에서 표충사 가는 길을 따라 금곡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감물가는 길로 들어서면 사촌(沙村)마을이다.

마을 외곽의 나지막한 구릉이 2년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조사한 사촌 제철유적. 주민들이 ‘똥뫼’라 부르는 유적 주변에는 ‘철재(鐵滓·쇠똥)’가 야산을 이룰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조사 결과 여기서는 제련로 7기, 송풍관 및 노벽 조각 등이 확인됐다. 제련로의 조업시기는 함께 출토된 토기로 보아 6세기 전반~7세기 전반으로 추정됐다.

시기적으로 보건대 가야의 철 생산 거점을 신라가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을 맡았던 손명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제련로의 형태, 송풍관 편 등을 보면 대규모의 철생산 기지가 틀림없다”면서 “조업시기의 상한을 5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여지도 있어 가야 철과의 연관성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원통형의 노(爐), 노벽의 재료와 축조기술, 송풍기술 등을 보면 4세기대의 제철유적인 충북 진천의 석장리 유적과 기술수준이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밀양의 동쪽 송곡산(금곡마을 뒷산인 용암산으로 추정)에서 철이 난다는 기사가 있는데, 사촌유적이 그 현장일 가능성도 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아리송

이번에는 함안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남해고속도로 의령IC에서 의령 쪽으로 난 1004호 지방도로를 따라 3km 정도 들어가면 함안군 군북면 월촌(月村)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 동남쪽의 나지막한 구릉에는 시기를 알 수 없는 고분군이 있고, 군북면 월촌출장소 인근에는 ‘쇠똥섬’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농경지와 맞닿은 구릉지를 살펴보면 슬래그로 짐작되는 흑갈색의 유리질 돌이 수북이 쌓여 있다. 여기서는 회청색 경질토기편까지 채집됐다고 한다.

주변 정황으로 보면 야철지가 분명한데 시기가 논란이다. 향토사 연구자들은 가야시대 야철지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김해박물관측은 고려 초기의 제철지일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함안군 여항면 주동리(별천), 군북면 원북리 신사동, 군북면 덕대리 대암동에도 야철지가 있다. 주동리에는 고인돌군과 고분군이 산재하고 많은 슬래그와 노 파편이 수습돼 가야시대 야철지일 개연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 조희영 회장은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에서 많은 철기가 출토된 것을 보면 함안 어딘가에 가야시대 야철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가능성이 있는 곳을 선정,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름이 걸작인 야로

합천군 야로면 야로리 돈평마을의 야로(冶爐) 철산지는 이름부터 걸작이다. 권병석 합천문화원장은 “문헌기록이나 지명, 현장에 널린 슬래그 등으로 볼때 가야의 철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돈평마을 뒷산은 불무골(또는 불뫼골)로 불리며, 주변에는 금평(金平)마을, 금굴동 같은 철산을 암시하는 지명이 있다.

고령군청 이형기 학예연구사는 “대가야의 강성한 힘은 야로 철산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며 “연구자에 따라 3세기 후반부터 채광되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하나 조사가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경남발전연구원은 지난 연말 야로 철산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 표층에서 슬래그와 조선시대 기와편을 발견했다. 이일갑 조사1팀장은 “철 제련시설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므로 퇴적층을 본격적으로 발굴해 들어가면 가야 유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조사된 가야지역 철기생산 유적은 부산 동래패총, 김해 대성동 소성(燒成)유구, 김해 봉황동 유적, 고성패총, 창원 성산패총 등 11곳.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은 단편적인 단야(대장장이 일) 유구이다.

제련 공정을 알 수 있는 곳은 밀양 사촌유적과 양산 물금유적 2곳인데, 그나마 신라의 철 생산집단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시기도 6세기 이후다.

가야세력이 주도한 가야 철의 생산기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이를 찾아내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이 부분이 해명돼야 ‘철의 왕국’이 제대로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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