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月支)가 우지 (禺知 또는 禺支)와 소리가 비슷해 월지(月支)가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하였다는견해가 있다.

 

[오다니 나카오의 대월지에서 발췌]

 

일본 에가미 나미오, 마츠오 하사오, 구와하라 지츠조 역사가 있다. 그리스 로마의 프톨에마이오수가 서술한 카시(Casii)의 나라 이름은 Quasch 에서 유래하며 우지(禺支)와 동일한 이름으로 보았다. 기원자 200년경 그리스, 박트리아왕들이 세력을 뻗치려고 했던 동방의 프루노이(Phrynoi)와 세레스(Seres)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데 전자를 흉노, 후자를 비단민족을 뜨하므로 우지(禺支)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우지도도(禺氏 騊駼)” [일주서(逸周書)], “우씨의 옥(禺氏之玉)”[관자(菅子)], “화씨의 벽(和氏之璧) 등에 나오는 우씨(禺氏)”화씨(和氏)” 와 음이 비슷한 월씨(月氏)가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하였다. 고고학적인 발국 성과를 기초로 문화적인 면에서 기원자 4~3세기경 몽골 초원, 중국 서부에서 아무다리아 지역까지 퍼져 있었던 이란 계통인 사카 유목민 집단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月氏的“”字或作“”,破音字。《文解字》中“()”是形似而不同的两个部首,但常被混淆。中國大陸新版的《海》“月支”音改“越”。“月氏”在先秦史籍中早就见诸记载,即《逸周》和《管子》中所记载的“禺氏禺、月是同一来语音的不同译写,不应当读为“肉”。中華民國育部國語辭典中,月氏亦讀「ㄩㄝˋ 」(Yuèzhī)。但兼收「ㄖㄡˋ 」(Ròuzhī)、「ㄖㄨˋ 」(Rùzhī)兩種讀音。(위키백과, 基百科)

 

중국 위키백과를 보면, 월지(月氏)의 ‘月’자 혹 독으로 쓰는 ‘肉’은 破音字(한 글자가 두가지 이상으로 발음이 되는 글자)이다. 설문해자에서 ‘月’은 ‘肉()’과 같다고 한다. 흉노를 훈육이라고도 하고 수유, 슝노 등등 여러 유사한 이칭이 있는 것처럼 유----월 등의 음은 모두 흉노와 관련된 스키타이에 대한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다. ‘중국대륙신판의 《海》에 월지는 독음을 월()로 고쳤다’고 한다.

월지를 이르는 禺知、禺支 라고도 기록된, 외래어를 음으로 기록한 것도 북방흉노를 칭하는 말이라고 하는 누지(Nuzi)와 같은 소리이며, 월지 우지 누지 등이 큰 범주에서 통칭적으로 모두 흉노를 이르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월지(月氏)족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보고있고 고문헌의 토하리인(Tocharians)과 같거나 긴밀힌 연결된 종족으로 믿고 있다. 중앙 아시아 연구가인 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는 당시 중국 문헌과 서방 측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월지는 토하리인과 함께 인도-스키타이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당시 그리스의 역사가 프톨레미는 월지의 영역을 토가라(Thogara)로 기록해 두었다. 또한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의 침략 민족을 토하로이(Tokharoi)라고 부르고 있다. 이 때는 월지가 대하를 정복하고 대월지를 세운 때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르네 그루쎄에 따르면 감숙성에 남아있던 소월지는 이우 쿠차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당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실크로드 지역 최동부의 인도유럽어족 국가로 남아 있었다.

고대 중앙 아시아 역사 연구가 아데시 카타리야 (Adesh Katariya)가 쓴 월지족 (소제: 구자라 Gujars)의 기원의 내용에서 일부 발췌하여 번역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은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lideshare.net/adesh1986/origin-of-yuezhi-tribe

 

마누법전(Manu Smriti)에 따르면 토처(Tocher, 월지 月支 Yuezhi) 는 아리안 부족이고 왕국은 인도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고 달 근원 (찬드라 밴시 Chandra Vanshi) 아리안이다중국에서는 토하라인(Tocharian)은 월지로 언급되었고 달 종족  ( Yue = Moon ), = Family 종족)을 의미한다. 토하라어가 산스크리트어(Sankrit)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토하라인이 아리아 기원 민족이이었다는 것이다. 원 토하라인(Tocharian) 또는 툭하라인(Tukhara) 은 이란계 박트리아인이었고 그것은 이란은 고대시대에 인도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란 박테리아 쪽으로 이주한 아리아인의 아리아 언어였다.

 

스키타이인은 월지(月支) 영역과 이웃에 있었다. 스키타이인과 토하라인은 거의 친근한데 그들은 인도유럽 공통 유산을 공유하고 급격하게 그들의 문화를 변화할 수 있는 고도의 발전된 문명으로부터 오랫동안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길게 오랜 인도유럽 관습과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는 후에 토하라인보다 늦게 타림 분지에 정착했을 것이지만 중국 기록은 스키타이 침입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미 이 지역에 호탄에 관한 첫 번째 중국 기록이 쓰여졌던 기원전 200 전에 이주했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아담스 (Douglas Q. Adams)에 따르면, 토하라인은 국경주민의 의미로 그들 자신을 아니(Akni)로 불렀다. 역사가 버나드 서전트 (Bernard Sergent)는 아시쿠치(Arsi-Kuci)로 불렀고 최근 악느쿠치 (Agni-Kuci)로 바꾸었다.

 

모합하라타 서사에 투차(Tuchar)로 불려진 토처(tocher)는 고대 달 왕조의 후손이었다. 흰두 신화에서 달 왕조는 (Soma-vansha, Chandra-vansha 그리고 Ailas 로 알려진)는 크샤트리아 바르나 (Kshatriya Varna) 또는 전투 계급의 4개 주요 가게중의 하나였다. 이 전설적인 왕조는 달 (소마 Soma 또는 찬드라 Chandra)로 부터 내려왔고 반면 다른 주요 가게인 태양 왕조(Surya-vanshi)는 태양 (Surya)로 부터 내려왔다. 일라(Ila)와 부다의 아들, 달신 소마의 불법적인 아이, 푸루라바스(Pururava)가 발견한 달 왕조의 전설적인 수도는 프라티스타나(Pratisthan)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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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트리아는 아리안족의 고향이었으며, 그들은 BC2500-2000년에 남서쪽으로는 이란에 들어갔고, 인도 북서부에 들어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550?330 BC)의 북부 주가 되었다. 바로 이 지역은 산이 많은 나라의 비옥한 토지가 투란 사막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Zarathushtra가 태어나고 첫번째 신봉자들을 얻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아베스탄 언어는 조로아스터교 성전의 고대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관련있는 고() 이란어였다.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서부 방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언어가 아리안족의 가장 오래된 인도-이란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베스탄(Avestan) 언어는 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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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로 찬드라(Candra)는 힌두신화에서 달의 신이다.

चन्द्र, Chandra, 또는 Candra. 산스크리트어 '빛나다'는 뜻이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과 구요(九曜. 인도천문학에서 취급하는 아홉 개의 천체). 라자니파티(밤의 왕)이라고도 한다. 베다 시대에 달을 관장하는 신은 소마였으나 힌두교 시대가 되면서 달의 신격 소마는 찬드라와 동일시되었다. 간다라가 달의 신이라는 말은 카니쉬카왕이 세운 간다라제국이 달의 신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는 이전의 마우리아 찬드라 굽타나 아육왕의 나라와 구별될 이유가 없는 동일한 나라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그 지배세력의 중추가 쿠샨이라 불리는 계층이었다는 것인데, 사실 귀상(贵霜)이나 쿠시라는 말도 월지족과는 분리될 수 없는 ‘달’의 개념이다.

 

샤히는 월지족, 무로다는 샤카족 추장의 호칭이다.

 

스키타이와 대월씨국 - 고조선과 월지국

[신라는 대륙에도 존재했다] 

     신라의 뿌리를 추적하던 중 유물면에서 스키타이와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 그 스키타이인들이 세운 대월씨국(대월지국)과 만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단고기에도 등장하는 대월지국은 신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직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월지국에 대하여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한다.   추후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1. 스키타이의 후손으로 본 월지국
 
1) 스키타이란 : 기원전 제2천년기말에 볼가강의 한 인도유럽어족은 수레를 끌고 자신들의 땅을 떠나 시베리아 땅으로 올라가 예니세이강까지 갔다.   북쪽과 동쪽으로 카스피해를 돌아 이란까지 내려가 거기에서 키메르족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다음에는 사카족(석가모니 종족)으로 불리다가, 기원전 7세기에 마침내 스키타이족이 되었다.

    춘추시대 이후 중원계국강대화에 따라 병합, 분리하다가,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으로 하서회랑까지 점령하며 월지국을 세운다.

2) 기원전 177년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월지는 감숙에서 쫓겨나 서쪽(일리-이식쿨유역)으로 이동한다.
 
3)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大夏 : 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가리키며,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박트리아의 중심지)를 지배하였다.   그것은 한(漢)나라가대월지(大月氏) 와 더불어 흉노를 협격(挾擊)하고자 하여 장건(張騫)을 파견한(BC 139) 직후의 일이었다.    대월지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하 지방의 통치에 힘써 파미르·힌두쿠시의 남북에 토착제후(土着諸侯)인 다섯의흡후(翕侯)를 두고 다스리게 하였다.  
 
4) AD 1세기경 다섯 흡후의 하나인 귀상흡후(貴霜翕侯)가 대두하고, 이어서 대월지에 대신하였다(쿠샨왕조).   또한 황허강 상류 유역에는 대월지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하였다.
 
5)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스키타이 
6) 유물로 보는 스키타이와 신라의 연관성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은 신라 금관과 유사하다.   이 시리아․테베 유적의 연대는 대월지 시대에서 쿠샨시대 초, BC1c~ AD1c경 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금관(틸리아 테페) ⓒ김운회                             신라 금관(5~6세기)
 
      수목형 솟은장식과 머리띠형 다이아뎀에 붙여진 꽃모양 장식은 신라 왕관과 다르지만, 다이아뎀에 수목형 솟은장식과 작은 원형의 금제 달개를 매단 형식은 똑같다.   발굴 보고자는 관내부에서 발견되 성스러운 결혼을 부조한 황금장식판과 금알갱이로 세공한 목걸이와 날개 달린 아프로디테상들으로 보아 스키타이 여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5, 6세기 금관과 이 여왕의 수목형 금관의 연대차는 4,5백년 정도이지만, 간접적이었을지라도 이것이 원류였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시리아-테베의 금관과 로마유리는 신라문화가 그처럼 오래전부터 스키타이인과 관련 있었고, 그후에도 소중하게 유지하여 로마문화를 흡수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문화왕국 - 신라(新羅)」(新潮社)]

2. 고조선의 후손으로 본 월지국
 
(태백일사환국본기)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인산산맥?)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진왕(辰王)이 월지국을 통치하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월지국은 진주(辰主)의 치소(治所) 라 했다.   곧 월지국은 진국의 도읍지 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월지국이 고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 을 밝히고 있다.

{국어대사전}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이라 하고 목지국은 옛 진국의 한 부족국가라 하였다.

옛 진국이란 고조선을 지칭한다.

{불교사전}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라고도 하며, 서역에 있던 큰 왕국"

월지국(月支國)을 서역에 있던 대월씨(大月氏)에 결부시키고 있다.

대동방씨족원류사

1. BC230년경 秦나라가 6국을 정벌통합할 때, 韓나라 또한 멸절되었다.

이에 여러 나라[6국]의 부호들을 秦나라의 수도 함양에 옮겨 살게 하였는데 ... 이러한 때에 산동, 장안 등지에서 좋은 물건들을 가지고 서쪽(서역)으로 대상의 길을 다니면서 서쪽 지방에도 안주하면서 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2. 서역 그 곳에 대월 , 안식, 사라 라는 지명도 생겨나기도 했다.

한단고기

bc195~ [74기준] 제가의 무리는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일컬어 중마한이라 한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기준시기(bc195)의 번조선(기자조선)은 연나라세력과 대립하며 요녕지방에 위치한다.  번조선의 상장군 탁은 요녕지방에서 하서회랑에 위치한월지로 이동한다.(bc195)   그리고는 월지와 함께 쿠샨왕조까지 이어지게 된다.   약간의 시대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동방씨족원류사에서 멸절한 韓의 부호들이 이동하는 곳도 함양(장안)이며, 장사를 통하여 서역으로 진출하여 대월과 안식, 사라를 세운다는 것은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일봉의 한단고기에서는 월지의 또 다른 이름이 중마한이라 한다.   마한... 우리의 삼한중의 하나로서 일반적으로는 한반도 위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대륙에 위치하는 마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심스레 삼한의 위치에 대한 관념을 의심해 본다.   여기서 대동방씨족원류사의 삼한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삼한의 위치를 대륙에서 찾아보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조선천독(朝鮮天毒) 산해경(山海經. 전한 초 BC 202)원문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외人愛之..."

       동쪽나라 안의 북쪽의 모퉁이 에 있는 나라이름은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며,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 율곤선생의 편역)
 
===> 본문에서 동쪽의 나라안 이라고 한 것은 대륙의 중앙을 뜻한다.

       그 다음의 북쪽 나라 모퉁이 라고 한 것은 지금의 동북쪽인 북경(北京)의 동쪽을 뜻한다.
 
        동해지내(東海之內)라고 한 것은 조선(朝鮮)이 대륙을 중심하여 지배하고 있다가 후일에 북해지우(北海之隅) 즉 북쪽의 나라 모퉁이로 옮겨갔음 을 뜻한다.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  곽박의 주

朝鮮今樂浪郡也 天毒卽天竺國貴遣德有文書金銀錢貨□屠出此國中也晉大興四年天竺胡王獻珍寶.... 생략

    곽박에 의하면 조선(朝鮮)은 낙랑군(樂浪郡)이라 했다.   원가(袁珂)는 조선(朝鮮)은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다고 했다.   또한 곽박은 천독(天毒)은 천축국(天竺國) 이며 도덕(道德)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문서(文書)가 있으며 금은(金銀)과 돈을 갖고 있으며, 나라 가운데서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갔다고 했다.(이중재씨의 편역)
 
*당(唐)나라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629년)에 의하면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대월지국(大月支國)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은 3만리(三萬里)이다.   일명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한다."  고 하였는데 통전(766년)에서는 월지국(月支國)을월씨 국(月氏國) 이라고 하였다.   감숙성 돈황 남쪽에서 흉노에게 쫓겨 서역인 토노번까지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들은 본래 월지국(月支國)이었으며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하였다.   [월지국이 곧 신독(조선)이였음을 말한다]
 
*통전(通典)

    천축은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있었다.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전한 초에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어떻게 이것을 얻었으냐고 대하국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독국의 시장에 가서 사왔다고 했다.
    신독국이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천축을 혹 마가타(摩伽0)라고도, 바라문(婆羅門)이라고도 했는데, 총령( 嶺)의 남쪽에 있었다.   즉, 총령은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뜻한다.   이곳은 신강성(新疆省) 남부이며 서장성(西藏省) 북부지역을 말한다.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인데, 지역은 3만여리(三萬餘里)였다.

=== 따라서 곤륜산맥의 서북으로 수천리 떨어진 곳이 월씨국이 된다.

=== 律坤 율곤 李重宰著「한民族史」284쪽 
    東夷 朝鮮人들이 너무도 영리하고 용맹스럽고 지혜가 있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별명처럼 불려진 것이 신독(身毒) 또는 천독(天毒)이다.   그리고 후일 천축(天竺)으로 불려져 중천축 · 북천축 · 서천축 · 남천축 · 동천축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광동성(廣東省) 지방의 천축산(天竺山)에서 유래되어 청해성(靑海省)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기록도 보이나, 본래 天毒·身毒은 곤륜산을 배경삼아 천산산맥 등지와 타림 분지 등 여러 곳에서 수렵을 했던 용맹스러운 묘족(苗族)의 후예였다.

=== 전한(前漢 B.C.206∼AD.8년)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나 신독국(身毒國)으로 불리었고,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와서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렸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때는 또한 연독국(捐毒國) 이 있었는데, 장안(長安)으로부터 9,80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9,800리라고 한다면 신강성(新疆省) 남부에 있는 지금의 화전(和田)인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를 말한다.   도호부가 있는 곳으로부터는 2,800리 떨어진 곳이다.   남쪽으로는 총령( 嶺)인 곤륜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하고 있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과 알타이 산록 일대에 있었다.   연독국 사람들의 의복은 오손 사람들과 비슷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옛날의 색종(塞種)이다.

 

안사고(顔師古)의 말에 의하면 연독(捐毒)은 즉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했다.

색종(塞種)은 즉 석종(釋種)을 말한다.   말하자면깨달은 사람들의 가문, 석씨(釋氏) 가문의 혈족이라는 말이다.

대륙삼한설에 이어 신라의 위치 또한 의문이 생긴다.

아래 혜초스님의 오언시( 詩) “여수(旅愁)” 를 살펴보자.
 
月夜瞻鄕路   浮雲飄飄歸   緘書參去便   風急不聽廻   我國天岸北   他邦地角西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월야첨향로   부운표표귀   함서참거편   풍급불청회   아국천안북   타방지각서   일남무유안   수위향림비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 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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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혜초((704-787)승이 남천축국에 있으면서 旅愁(여수)를 5언시로 읊은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그린 내용이다.   고향을 그리면서도 남천축국의 사정을 잘 묘사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향인 계림(鷄林)이 하늘 끝 북쪽 이라고 한 사실이다.   남천축(남천축국은 대륙에 위치한 오천축국의 하나로 대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에서 바라보는 하늘 끝 북쪽은 어디일까?   신라의 위치는.... 

이래 지도는 한반도의 신라를 구성하는 辰韓(秦韓)의 유민이 원주지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이다.

즉, 한반도 신라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인 것이다.

 


또한 신라와 관련성 있는 왜(倭) 또한 대륙에도 존재했다. ( 여기를 클릭)

출처 : [正心正道] 무 병 장 수 원 | 글쓴이 : 금빛물결 |원글보기



소발률 정복을 위해 고선지장군과 휘하의 당나라 군대가 넘었을 탐구령(Darkot Pass).사진= 장영주 KBS PD  

唐나라 開元 15년(727년) 음력 11월. 마침내 慧超 스님(704~787년)은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 당도한다. 약 4년간 천축(인도)과 서역을 巡遊한 뒤다. 20대 초반의 젊은 승려가 교통과 숙식이 용이치 않았을 낯선 세상 험한 곳으로 장기간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즐거움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다. 여행은 인내를 요구한다. 혜초 스님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생이 대략이나마 그려진다. 그가 귀로에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고산병으로 얼굴이 호빵처럼 붓고 울렁증이나 두통으로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었을 것이다.

서역과의 교류에 대한 중국 사신의 말을 기록한 『宋書』 「夷蠻傳」 第57 豫州蠻條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漢代 서역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어 먼 곳까지 통할 수 있게 되니, 길이 난 곳이 수만 리가 됐다. 頭痛之山을 넘는데, 밧줄을 타고 건너가야만 하는 험난한 곳을 넘고, 죽음의 길을 살아서 지나가려니, 몸은 앞으로 나가는데 魂은 돌아가려 할 지경이었다.”

파미르를 넘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목숨을 건 도전인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두통산이란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필경 고산증 증세로 나타나는 두통 때문에 산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 같다. 그러나 해발 3천 미터만 되면 어느 곳에서고 두통이 생기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頭痛之山이 특정한 山이름인지는 모르겠다. 『通典』 卷193 「邊防」 渴槃陀條와 『漢書』 「西域傳」에 따르면, 두통산이 지금의 신장 타시쿠르간(Tashkurgan) 타지크 자치현의 갈반타 서남쪽에 있고, 고대 인도의 계빈(Kapisa)으로 통하는 험준한 산으로, 大頭痛山과 小頭痛山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 수그드 강 남쪽에 자리한 소그디아나의 도시들. Rabinjan(혹은 Arbinjan) 근처에 월지의 Kush clan(玉氏族)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Kushaniya가 있다.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binjan  

혜초 스님은 토화라에 있던 겨울 어느 날 문득 눈을 만나 난감한 심정을 오언시로 표현했다. “차디찬 눈보라 얼음까지 섞여 몰아치고/ …… / 우물가는 도사린 뱀처럼 얼어붙었다/ 횃불 벗 삼아 오르며 노래 불러보건만/ 저 파미르 고원 어찌 넘을 것인가.” 蔥嶺 즉 파미르를 넘기 전이다. 파미르고원이 어디든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산악고원지대다. 이곳에 과거 護蜜國이 있었다. 호밀이란 나라 이름은 胡麥 또는 黑麥이라고도 하는 호밀(rye)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왕의 居城은 색가심성(塞迦審城). 여기가 심상치 않은 곳이다.

『신당서』 「서역전」이 전하는 호밀국 이야기를 먼저 읽어본다.

“護蜜은 달마실철제(達摩悉鐵帝) 혹은 확간(???侃)이라고도 부른다. 북위 때에 발화(鉢和)라고 불렀던 것인데 역시 吐火羅의 고지이다. 왕의 거처는 색가심성(塞迦審城)인데 북쪽으로  湖河(아무다리야 강)에 임해 있다.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다. 현경 연간에 그 땅을 鳥飛州로 삼았고, 국왕 사발라힐리발(沙鉢羅???利發)을 자사로 임명했다. 그 곳은 四???이 토화라로 들어가는 길의 입구에 해당하며, 예전에는 토번에 복속했. 개원 8년(720) 그 왕인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羅旅伊陀骨???祿多毗勒莫賀達摩薩爾)를 왕으로 책봉했다.”

놀랍지 않은가. 여기 사람들이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다니. 기억을 더듬어보자. 돌궐과 오손인의 신체적 특징이 푸른 눈에 붉은 머리라는 사실을 인문학기행 초반부에 얘기했다. 그렇다면 호밀국의 주민은 돌궐, 오손과 같은 종족일 수도 있다. 왕의 이름도 흥미롭다. 사발라힐리발. 沙鉢羅는 어떤 음,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일까. 돌궐제국(552~744년)의 5대 카간 阿史那 攝圖(ashina shetu or setu, ‘white dragon’이란 뜻)의 칭호도 沙鉢略(또는 始波羅)이었다. 돌궐비문에 근거해 이 이름은 이시바라(Ishbara)라고 읽는다. 돌궐제국의 창건자 伊利可汗(Illiq Qaghan) 阿史那 土門의 동생으로 西面可汗 즉 서돌궐의 엽호(yabghu)였던 阿史那 室點密(재위: 552~575년)은 Istemi의 음차어다. 어쨌든 왕의 칭호로 Ishbara를 같이 쓰는 이상, 그렇다면 호밀국(왕)은 돌궐과 같은 언어와 칭호를 사용하는 족속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開元 8년(720년) 唐 조정에 의해 왕으로 책봉됐다는 당시 호밀왕의 官稱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도 그가 돌궐과 동계임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 긴 칭호에 포함된 한자어 骨???祿, 莫賀는 돌궐인명에서 흔히 보는 어휘다. 위구르 제국 초대 가한 칭호의 한자어 표기도 골돌록으로 시작한다. 골돌록비가궐가한. 이는 고대 투르크어 Qutlugh bilge k¨ul qaghan의 음사로 ‘고귀하며 현명하고 강한 군주’라는 의미 깊은 칭호다. 그 왕의 거처가 색가심성이라 했다. 이 또한 파미르에서 발원하는 아무다리야강, 정확히는 지류인 판지강(the Panji)의 南岸에 있는 이시카심(Iskashim)城의 음차자다. Iskashim을 한자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 모음 /i/가 탈락됐다.

파미르고원 와칸 계곡(중국 사서의 호밀)에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스스로를 이시코슈미(ishkoshum´l) 내지  이시코시미(ishkoshim´l)라고 부른다. 인도-아리안 자료에 근거할 때 첫음절 ish-는 Saka(索種)를 나타내며, koshum은 ‘land, earth’의 의미를 지닌다. 이 둘이 합쳐져 이시카심이 탄생했다. 이시카심은 ‘색종(사카족)의 땅’인 것이다. 월지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진 색종이 세계의 지붕 파미르, 판지강이 흐르는 와칸 계곡에 터전을 잡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고대 색종의 후예일 수도 있는 이시카미 마을의 어린이들.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닥샨주(the Province of Badakhshan) 판지강 상류 좌안에 사는 1천500에서 2천 명 정도의 이시카시미들이 예나 지금이나 무심히 흐르는 판지강 건너 타지키스탄 고르노-바닥샨 자치구(the Gorno-Badakhshan Autonomous Region) 이시카시미구 뉴트(Nyut) 키시라크(qishlaq: ‘촌락’)의 동족들을 바라보며 생활하고 있다. 역사의 비극이다.

그렇더라도 자연경관은 비경 중의 비경이다. 판지강 북쪽은 와칸산맥, 남쪽은 그 유명한 설산 힌두쿠시. 『魏書』 「서역전」과 『北史』 「서역전」 第85 鉢和國條는 힌두쿠시의 장관을 이렇게 말한다. “발화국은 갈반타의 서쪽에 있다. 그 풍토 역시 추우며, 사람과 가축이 함께 사는데, 땅을 파서 그곳에 거주한다. 또한 큰 설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와 같다. 그 주민들은 오로지 보리떡만 먹고 밀로 빚은 술을 마시며, 모전으로 만든 외투를 입는다.”

여기서 말하는 발화국은 와칸의 한자어 음차어로 바로 호밀국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 하려 한다. 위의 글에서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 같은 대 설산’이라고 한 산이 다름 아닌 힌두쿠시다. 이번 글의 표제 일부분을 ‘인도의 玉’ 힌두쿠시 산맥이라고 한 건 Hindukush에서의 kush가 다름 아닌 ‘玉’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Kush라는 어휘를 재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토템으로서 玉을 부족명으로 삼은 월지의 갈래가 본거지를 떠나 서역으로 이주해 간 경로나 흔적을 찾는데, 이 kush라는 어휘가 큰 역할을 한다.

천산일대를 거점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색종은 월지에 밀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한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원이나 언어 풍습 등은 어떠했을지도 무척 알고 싶었다. 일단 호밀국 혹은 발화라국으로 알려진 파미르 산중의 나라가 색종의 왕국이었음을 알았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언어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정보를 얻었다. 잠정적인 결론이지만 색종은 돌궐과 동종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신당서』, 『구당서』의 호밀국은 休密(『후한서』), 胡密丹(『梁書』), 胡蔑(『一切徑音義』) 등으로도 표기된다. 『대당서역기』는 호밀을 拘迷陀라 적고 있다. 이는 프톨레미(Ptolemy, AD 83년경~168년경.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인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를 말한다)가 말하는 Komedai와 아랍 문헌 자료에 보이는 Kumed와 같은 것이다.

“실크로드는 로마령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크를 출발해 …… 메르브(Merv)를 거쳐서, 그리고 이 시기 인도-스키타이 사람들 즉 중국에서는 월지 또는 인도에서는 토화라인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박트라(Bactra, 大夏)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실크로드는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갔다. 프톨레미에 의하면 이 산맥의 계곡 즉 ‘코메다이(Komedai) 언덕’의 아랫자락에는 돌탑이 있고, 그 부근에서 ‘비단’을 운바하는 중국(seric) 상인들과 레반트 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했다”.(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0쪽)
결국 護密 등의 다양한 이표기는 구미타의 拘迷와 같은 음 즉 /kume/을 다른 한자로 전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밀의 또 다른 명칭인 鉢和나 확간(둘 다 Wakhan의 음차)의 의미를 검토하면 혹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서』 「서역전」 伽倍國條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이고 도읍은 和墨城이라는 것이다. 사차의 서쪽에 있고 代와는 1만3천리 떨어져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고도 했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라는 것은 과거 휴밀흡후였던 곳이 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가배국이라 불렸다는 말로 이해된다. 도대체 흡후(yabghu)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月氏의 수령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원래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자신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마침내 총령을 넘어간 월지의 또 다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귀중한 문헌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후일 쿠샨왕조를 세운 大夏(Bactria)의 오흡후 중의 하나인 귀상흡후는 옛 휴밀흡후였던 가배국의 서쪽 560리, 代와는 1만3천56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겸돈국이라고 『위서』 「서역전」 겸돈국條는 기록하고 있다. “겸돈국은 옛 귀상흡후로 도읍은 호조성이다. 절설막손의 서쪽에 있고 대와는 1만3천560리 떨어져 있다.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그런데 『위서』 「서역전」보다 훨씬 오래전에 쓰여진 『前漢書』 「서역전」 第66 大宛國條에 대완국의 도읍이 貴山城이며, 서남으로 690리 떨어진 곳에 대월지국이 있고, 토지, 풍토, 물산, 민속이 대월지, 안식과 동일하다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貴山은 月氏가 복속시킨 오흡후 가운데 하나인 貴霜과 어원적으로 동일하며 둘 다 Kushan 내지 Kushaniya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월지의 한 갈래인 Kush족이 이동 중에 흩어져 여기저기 자리를 잡으며 자신들의 흔적을 지명 등으로 남겼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 참고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사마르칸드 서북쪽에 과거 소그드인의 도시라고 알려진 Kushaniya가 있다.

가배국(휴밀흡후)과 겸돈국(귀상흡후)의 사이에는 절설막손(雙靡흡후)이 있었다. 가배국에서 서쪽으로 500리 떨어진 곳이다. 쌍미흡후의 위치와 관련해서 『신당서』 「서역전」은 호밀의 북쪽은 識匿(Shighnan), 남쪽에는 商彌가 있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상미는 오흡후의 하나로 그 지방의 크기는 2천 리가 넘는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도 나오는데 돌을 굴착해서 그것을 얻는다. 동북으로 산을 넘어 700리를 가면 波謎羅川(파미르강)에 이른다. 동서가 천리이고 남북이 백리이며, 봄과 여름에 비와 눈이 내린다”고 했다. 

과거 귀상흡후였던 겸돈국에서 서쪽으로 100리 떨어진 지점에 옛적에 힐돈흡후였던 불적사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代와는 1만3천660리 떨어진 곳이며, 이 나라 사람들 역시 여타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했다. 도읍은 薄茅城이다. 弗敵沙는 이 일대의 지명인 Badakhshan의 音譯이 아닐까 싶다.

불적사국에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閻浮謁國이 나오는데 여기는 과거 高附흡후이고 도읍은 高附城이다. 代와는 1만3천760리 떨어져 있으며, 여기 주민들도 역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後漢書』는 다섯 번째 흡후로 고부가 아니라 都密을 들고 있다. 그 진위야 어찌됐든 大夏를 구성하던 오흡후의 하나인 옛 귀상흡후 겸돈국이 나머지 4개 흡후를 규합해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중국사서가 계속해서 쿠샨제국을 월지라 부른 이유를 알만하다. 귀상흡후는 물론 파미르 산중의 다른 흡후들이 모두 월지에 속하는 씨족 내지 부족이었던 것이다. 귀상이 玉을 뜻하는 월지어 kush이듯, 나머지 네 흡후의 명칭도 월지어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며 나름대로의 상서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다 아는 것은 현재로선 역부족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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