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Eurasia) 안드로노보(Andronovo)와 고조선 전사를 비교함으로써 문화 전파 관계를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란(Iran) 고원에서 시작한 청동기 문화는 유라시아에서 초원길을 통해서 오르도스(Ordos), 알타이 산맥과 천산산맥을 거처 중국 감숙(甘肅)으로 전파되었다.

안드로노보 문화는 청동기와 함께 전차문화를 급속하게 전파시켰다.

 

                                     안드로노보 전차 전사


안드로노보 전차병은 가죽갑옷 상의, 팔 소매, 정강이에 청동단추로 장식되어 있고 

 마구의  몸 덮개, 머리 가죽 끈에도 청동단추로 장식이 되어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청동단추를 동포(銅泡)라고 붙이고 갑포(甲泡)로 분류하며 서양학자들은

이것을 단추와 비슷하다고 하여 청동단추(bronze button)라 부른다.    고조선의 경우, 청동단추가

, , 활집, 투구, 마구 등 여러 곳에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요녕(遼寧) 심양(瀋陽) 정가와자(鄭家窪子), 가죽장화(皮長靴그래픽 복원도


                             영천(永川) 어은동(漁隱洞청동단추


                            경주(慶州) 죽동리(竹東里), 청동단추

 청동단추는 원형, 타원형, 사각형이 있고 원형 중에 안쪽으로 굽어지고  꼭지(鈕 인꼭지 뉴)

달려 있는 것이 있다.    청동단추는 청동거울(동경(銅鏡))로 발전하게 된다.

  

박트리아-마르기아나            안드로노보 지그재그(Zigzag) 무늬 토기

  

        요녕(遼寧심양(瀋陽) 정가와자(鄭家窪子) 지그재그(Zigzag) 무늬 청동거울

                요녕(遼寧) 조양(朝陽)  십이대영자(十二臺榮子) 청동거울

요녕(遼寧정가와자(鄭家窪子)와  십이대영자(十二臺榮子) 청동 거울의 지그재그 무늬는

안드로노보 문화 영향을 받으로 보인다.

               비파형(琵琶形청동 단검(短劍)              안드로노보 전사


안드로노보 전사는 창모양(spearhead, )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

창모양(spearhead) 무기에서 발전한 것이 고조선 비파형(琵琶形) 청동 단검(短劍)인데 모양이

비파처럼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고 중국학자는 곡형(曲形) 청동 단검으로 분류한다.

                  공병식 청동 단검              내몽골 오르도스 청동 단검


북경(北京) 창평(昌平) 백부촌(白浮村)    공병식주척검(銎柄式柱脊劍)


              북경(北京) 연경현(延慶) 옥황묘(玉皇廟)   유병식동검(有柄式銅劍)

유병식동검을 중국사학계에선 '비수식직인청동단검(匕首式直刃靑銅短劍)'이라 부른다.


                 요녕(遼寧) 정가와자(鄭家窪子)   비파형청동단검(琵琶形靑銅短劍)


동북지방의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는  공병식동검(고죽孤竹, 영지令支=부례구야(不例拘邪 : 프리기아, Phrygia),   유병식동검(산융山戎),  비파형동검(고조선古朝鮮) 3이 단국조선연맹을 이루며 중원 여러 나라와 대립을 이루었다.


                                                  동유럽 청동 단검 

                                      고조선 전사 그래픽 복원도

내몽골(Mongol) 오르도스(Ordos 鄂尔多斯) 준가르(Jungar 准格尔旗) 출토된

흉노(匈奴) 청동갑옷(동갑銅甲)

우리 한韓族계례의 뿌리와 형성에 대한 새로운 설이 나왔서 소개하려 해요.

2018 9 11일에 개최된 제18차 대동재단 포럼에서 신용하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한’ ‘맥’ ‘예’ 3부족결합설에 대한 내용인데 간략하게 정리해봤습니다.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한’ ‘맥’ ‘예’ 3부족결합설

발표자 :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울산대학교 석좌교수

 

 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은 성립후, 크게 세갈래로 분화 및 발전하였습니다.

첫째는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정착한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족으로 호칭했지만 다른 부족과 구별하기 위해 족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은 큰,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한은 중국 고문헌에는  , , , , 등 동일발음의 여러 가지 다른 한자로 借音표기되고 있는데 이 사실 자체가  한은 고대 한국 고유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이며 이것을  한강漢江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가음借音이고 특히  자를 차자借字한 것은 옛 일부 선비의 사대적 악습이라고 해석된다.

 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의 특징은 선진적인 농업경작을 하고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태양()이 있는 하늘하느님을 숭배하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를 토템으로 애호하고 자신들은 천손天孫이라고 생각하는 천손의식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일부가 약 9,000년 전 ~ 6,000년 전 언저리에 서북방이동을 하여 지금의 요서지역, 대릉하, 소릉하, 노합하, 시라무렌강(Xar Moron, 西拉木淪河),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신석기인들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한자로 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의 상고음上古音은 박(bak), (ba)이었다. ’(bak) ‘ ’(baek)이었다. [후한서]은 음이 백 이다라고 기록하였다.

後漢書후한서 1光武帝紀하무제기 建武건무 25春正月條춘정월조

[貊人穢貊國人也 貊音陌.]

[설문해자]에서는 은 북방의 인데, 종이다. 백으로 발음한다고 하여, 북방종을 가리키는 것이고, ’ 족명의발음이라고 설명하였다.

[說文解字] (段玉裁注단옥재주) 9 , [ 北方  豸種也 (貉讀爲十百之百).]

공자는 자는 으로도 동일하게 쓰인다고 말하였다.

[尙書正義] 18, 周書 孔安國傳, 說文作 北方豸種 孔子曰之言貊.

원래 의 속자俗字자이고 초기에는 자로도 쓰여졌다. . = = 것이다.

 [한서] 무제기에서 주의 무왕成王, 강왕康王 외교관계를 돈독히 한 나라로 숙신肅愼, 북발北撥, 거수渠搜,,을 들었는데,  안사고顔師古북발北發은 북방이고 은 국명이라고 하였다. ‘’ ‘족을 가리킨 것으로서 북방의 밝족족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漢書 6, 武帝紀 6, 「周之成康 刑錯不用 德及鳥獸 教通四海 海外肅・北發 渠搜來服 의 기록에 대한 顔師古 에서  師古曰 北發非國名也 言北方即可徵發渠搜而役屬之 瓚說近是.

 이 자료들은 족이 한반도에서와 같이 자기 족속을 밝음(光明)’을 의미하고 ,,이라고 호칭한 것을 고대 중국인들이 ’,’이라고 표기했으며, 후대에 변음되어 (make, )으로 읽게 된 것을 알려주고 있다.

부족은 태양()를 숭배하면서 새로이 ()’을 토템으로 정하여 곰토템족이 되었다. 일본어에서 을 음독에서 (bak)이라 일고, 훈독에서는 고마(, goma)라고 읽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셋째는 한반도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요하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 태자하, 단강, 2 북류 송화강 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 )족이라고 호칭하였다. 고대 중국인들은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변음되어 (Ye)’ 발음하게 되었다. 양주동 박사에 의하면, 의 원래 발음은 (e)’,(sei)’로서 고대조선어의 의 의미를 음차해서 표기한 의 차자(借字)이다.  새는 , 의 뜻의  새와 동원어同原語古語이다. 현존한 한국어 방언에도 을 새라 하니, 샛바람 (東風), 샛마(東南風), 샛쪽(東方)’ 등과 같은 예이다.

공조孔晁 일주서逸周書 왕회해에서예인穢人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 별종이다 라고 하였다.  일주서逸周書7, 왕회해王會解59, 「穢人前兒  穢韓穢 東夷別種

족은 농업경작을 하면서 태양()’를 숭배하면서 울창한 삼림지대에 적응하여, ‘()’를 토템으로 정하고 새를 부토템으로 한 범토템족이 되었다.

 

고조선은 한, , 3부족이 결합하여 생긴 고대국가이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요녕성 평강지구 유적에서 고조선 말기 (중국학자들이 중국 서한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 금도금 장식품이 출토되었는데 커다란 새(독수리 또는 삼족오)의 지휘와 돌봄 아래 곰과 범이 모여 순종하고 있는 도안의 장식품이었다.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출토된 새 토템족이 곰토템족, 범토템족, 이리토템족을 휘하에 거느린 도안의 청동장식

 

 이 커다란 새를 삼족오로 해석하면 삼족오는 환인, 환웅, 단군의 3대 태양신이므로, ‘족에서 나온 제왕의 지배아래서 곰토템부족(맥족), 범토템부족(예족)이 연맹하여 고조선이 형성된 사실을 표상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용하慎鏞廈, 고조선문명권古朝鮮文明圈 삼족오 태양三足烏太陽 상징과 조양朝陽 원태자벽화묘袁台子壁畵墓 삼족오태양三足烏太陽, 한국학보 제105 , 2001; [한국 원민족原民族형성과 역사적 전통], 나남출판, 2005 재수록

고조선이  고대국가라는 사실은 고조선의 중앙정부  관료제도인 8(八加)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조선의 중앙정부는 단군팔가(檀君八加)제도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8개 부처로 조직된 고대 관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호가(虎加) - 모든 가들을 총괄 큰 아들 부루[(夫婁)를 임명]

마가(馬加) - 주명(主命) 담당  옛 신지[(神誌)씨를 임명]

우가(牛加) - 주곡(主穀) 담당  고시[(高矢)씨를 임명]

웅가(熊加) - 주병(主兵) 담당  치우[(蚩尤)씨를 임명]

응가(鷹加) - 주형(主刑) 담당  둘째 아들 부소[(夫蘇)를 임명]

로가(鷺加) - 주병(主病) 담당  셋째 아들 부위[(夫虞)를 임명]

학가(鶴加) - 주선악(主善惡) 담당  주인[(朱因)씨를 임명]

구가(狗加) - 분만제주(分管諸州) [여수기(余守己)를 임명]

 

단군 8가제

 

고고선의 후국인 한족이 세운 진국 지역의 천군天君이 사용했던 의기의기에 고조선과 후국들의 종속관계를 평면으로 도안한 청동제 팔주령八珠鈴이 있다.

 천군의 8주령에서 중앙의 태양()은 고조선 본국과 단군을 상징하는 것이고, 중앙의 햇빛을 받은 주변의 연결된 8방의 작은 태양()들은 고조선의 지배를 받는 8방 후국들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에는 고조선이 1개 중앙 본국과 8방의 주변 소국들의 9개국 체제로 되어 있었다는 전통적인 의식이 존재해 왔으면, 고중국에서는 동이가 9개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구이라는 별병이 있는 것으로 의식해 왔다.

 

고조선 문명의 천군天君의 의기 8주령珠鈴에 도안된 고조선 8방 후국들의 관계 상징

 

수메르와 고조선의 갑옷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그림은 수메르 우르 왕의 무덤에서 발굴한 우르의 군기 (Standard of Ur)이다.

우루의 군기(Standard of Ur) , 기원전 2,600 , 대영박물관

 수메르 병사에 대한 복장을 보겠습니다.

수메르 병사

수메르 병사 갑옷 도안 

수메르 메스칼람덕(Meskalamdug) 금투구 , 기원전 2,600년, 바그다드 이라크박물관

수메르 병사는 모자(투구)를 쓰고 망토같이 생긴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망토 곳곳에 원형이 있는데 이것은 동그랗게 자를 구리판을 박아놓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구리판은 반짝이는 장신구 기능과 보호구 기능을 하였고 적에게는 위화감을 주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갑옷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신석기 후기는 뼈 값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청동기, 철기 시대에 찰갑을 입었습니다.

고조선 투구, 홍산 하가점 하층 문하 기원전 2,700, 중국 조양시 닝청현 박물관

고조선 갑옷에 수메르 갑옷 처럼 청동 조각 및 청동 단추를 이용해서 가죽에 붙였습니다.

고조선 청동기 청동 단추(동포 泡)


고조선 갑옷 그래픽 도










동호(東胡) 퉁구스(Tungus) 연관성2

 

고조선과 주변 유목민족 간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역사신문

저자 : 정길선 박사

일본 도쿄대학 역사문화학 터키·이슬람 문화사 전공.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Aspirant, Candidante, Doctor과정 학위 및 수료.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 Research Professor.

유라시아 고고인류학 연구소 Research Professor.

  

1. 동호(東胡) 언어, 민족적 계통학 분석

 

동호 연구에서 언어, 계통학 다음으로 중요한 고찰은 인류학적 계통에서 나타난 민족, 혹은 부족의 분류이다. 이러한 분류에서 동호에 대한 정의는 시미즈 마사오(淸水正夫) 이후 일본학계에서 쿠도 노리오카(工藤紀岡)가 부여계통에 대한 소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동호東胡와 조선朝鮮은 동족이고 융과 같은 계열이다. 융의 동쪽 지역은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호족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 역시 부여계夫餘係이다.”

 쿠도의 정의에 의하면 동호는 애초부터 동북쪽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이 위치해 있던 초원지대에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흥안령산맥이 위치한 지역은 현재 몽골과도 위치가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숙신肅愼과 흉노의 본거지인 오르도 지역과도 인접해 있다.

 

2. 동호의 기원과 인식에 대해 필자, 타 학계의 시각과 한국 학계의 반응

 필자는 고조선의 혼란기, 말기 즈음에 고조선과 동맹관계, 혹은 종속해 있던 유목민족들이 일제히 독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고조선과 다른 계체로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 서융西戎과 동호가 분리되었고 서융은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과 섬서성陝西省 지역으로 남하하여 춘추시개의 진나라와 합류했다.

 동호는 현재 내몽골 홍산 지역과 서랍목륜하 西拉木倫河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여기에서 동북방의 숙신肅愼도 분열한 것으로 보았다. 숙신은 송화강松花江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산서성山西省지역에는 산융山戎, 적융狄戎이 잇달아 갈라져 나갔다. 숙신肅愼은 예맥濊貊과 동족이고

같은 고조선이자 동호와 동족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필자는 해당 시기에 동호의 동쪽 지역에는 숙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東方東胡, 有肅愼 라는 일주서逸周書의 기록을 들어 숙신과 동호가 분리되어 있는 세력이고 동북지역에 갈려져 나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리지린李址麟이 예맥과 동호가 같은 국가라는 동일 국가설을 주장하였고 동호東胡와 맥을 동일민족으로 보았다.

 과 예는 고조선의 종족으로 예족은 서기전 8~7세게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이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근거 논리는 예맥이 기마유목민족의 성향을 보였다는 것으로 예와 맥족이 자리 잡았던 송화강 유역에는 부여보다 이전의 기마유목민족들의 마구馬具들이 발굴되었다. 예맥, 동이, 동호를 동일민족으로 보는 경향도 존재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역사인 홍산문화, 동이족의 영웅인 치우 그리고 쥬신족의 최초 나라인 고조선 등 이제는 상고시대 역사까지 중화의 것으로 만들거나 왜곡, 부정, 파괴하려고 합니다.

고조선은 한겨레의 최조 나라이고 한겨레의 뿌리입니다. 실상 뿌리인 고조선을 신화로 치부하고 존재 마저 부정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과연 중원 국가에 대한 고조선은 존재감은 어땠을까요? 국가간의 우위는 군사력이고 전쟁에서 확인이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중원 국가간의 전쟁을 사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원 사서에서 고조선을 비하한 다른 이름으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퍼옴] http://m.blog.naver.com/knightblack/10013824767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不哈 平海上熊襲 사벌(沙伐) 단제 무오50(B.C 723)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甲戌六十六年 帝遣祖乙 直穿燕都 與齊兵 戰于臨淄之南郊 告捷 갑술66(B.C 707), 사벌단제께서 조을을 보내 연나라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회에서 싸우고 승리를 알려왔다.」 기록되어 있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二十五年, 北戎伐. 鄭使太子忽來救. 희공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나라에서 태자 홀을 보내 제나라를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사벌단제가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제나라 13대 희공(BC 731~ 698) 때의 일이다. 희공 25년 이면 기원전 707년에 해당하므로 그 연대가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있다. 사기는 고조선을 가리켜 북쪽의 이족이라는 뜻으로 북융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참고로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동이라 표현한 예로 보아 북융은 조선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나라 이전에는 동호를 북융과 산융으로 호칭했음을 말한다. 동호는 동이와 같은 뜻으로 고조선을 비하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是後六十有五年 而山戎 越燕而伐齊 齊禧公與戰于齊郊. 전략. 그로부터 65년 뒤 山戎(산융)() 나라를 넘어와서 () 나라를 공격하여 () 禧公(희공)이 산융과 제 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705년경(770-65=705)으로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산융(山戎)으로 적혀있다.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라 하더니 흉노전에는 산융이라 한다. 이는 조선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중국인의 의도적인 곡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고조선은 제나라를 공격하였을까? 그것은 제나라가 산동성 일대의 래이(萊夷)를 병탄한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원] 정간 편에 의하면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의 말을 듣지 않자 제나라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고 한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춘추 좌전에도 언급하고 있다.

(노나라 환공 ; BC 712 ~ 694) 6(BC 707)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후(齊候 : 희공)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나라 태자 홀이 군대를 끌고가 제나라를 구원하였다. 6월에 북융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북융의 장수인 대량과 소량 및 갑수 300명을 잡아 제나라에 바쳤다.

 

[춘추]는 노나라의 사서를 공자가 도덕적 견지에서 수정 가필한 문헌이다. 윗글을 보면 북융이라 표현된 고조선이 제나라와 연나라 연합군에서 크게 깨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의 춘추 기록을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제후들이 (북융 : 조선의 공격에 대항하여) 제나라를 수비하였기 때문에 제나라에서는 구원하러 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노나라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나라는 뒤로 물러났으며 태자 홀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전공(戰功)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과정에서 연나라가 뒤로 밀려난 것은 실상 그들이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戊辰五十二年, 帝遣兵與須臾兵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入孤竹. 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36대 매륵 (買勒: BC 704~BC 646)) 무진년(戊辰年)이며 재위 52년에 즉 BC 653년에 매륵단제(단군)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위의 단군세기 기록은 매륵단제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사기 제태공세가에도 위와 같은 사살이 실려있다.

 

二十三年 山戎代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代山戎 至干孤竹而還. 제나라 환공 23, 산융이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제나나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산융을 쳐서 고죽까지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전략. 그로부터 44년 후 산융이 () 나라을 쳤다. 연 나라는 곧 위급함을 () 나라 알렸고 () 桓公(환공)은 산융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其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B.C 653년경) [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661년경(705-44=661)으로 적혀 있다.]

 

위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당시 제 환공(BC 685 ~ 643)이 고조선 및 연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교모히 감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만약 승리하였다면 기사의 마무리가 “산융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돌아왔다”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 대 연제 연합군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을까? 설원 권모편을 보기로 하자.

 

“제 환공이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노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노나라 왕은 신하들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만이(蠻夷)의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연나라 군대와 합세한 제 환공이 고조선의 복명에 걸려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 환공이 다시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노나라가 도와주기 않자 제 환공은 고조선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제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이라는 공자의 말(논어) [, 여기서 피발은 종발이라고 하며 고대 고조선인의 머리를 트는 모양을 말한다.], 고조선의 거듭된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 가까이 간 연나라, 그리고 고조선 연제 연합군과의 싸움을 기록한 사서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은 신화상의 국가가 아니라 실존한 국가였으며, 중국이 두려워한 국가였다.

[출처] 실증 한단고시 (정신세계사), 한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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