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의 황금문화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새녘출판사)

노하심 유적의 묘제와 출토 유물의 문화내용은 앞의 서차구 유적과 같은 계통의 문화로서 그 시기만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서차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와 문화내용은 다음과 같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 나라[부여]에서는 가축을 잘 기르며, 좋은 말과 붉은 구슬[적옥()]·담비·아름다운 구슬[미주()]이 산출되는데, 구슬은 대추만하다. 그리고 활·화살·칼·창 등 병기를 사용하며 집집마다 각자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계속해서 “부여는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왔다[]”라고 한 점을 미루어보아 부여에서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 夫餘 비마형 飛馬形 금구 1쌍 노하심묘에서 출토된 금동제 신수문()금구. 머리를 치켜세우고 갈기를 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매우 동적인 금동조각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부여에서는 명마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바로이 비마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는 7.2×11.5cm.

부여의 황금 귀고리 부여에서는 황금이 많이 산출되었으며, 부여족들은 금과 은으로 관식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 고분에서 출토된 금 귀고리.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 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각주

  1. 무국훈(武國勛) ; 「夫餘王城新考-前期夫餘王城的發現」 『黑龍江文物叢刊』 1983-4, p.35~42.
  2. 손수도(孫守道) ; 「‘匈奴西岔溝文化’古墓群的發現」 『문물(文物)』 1960-8·9, p.25~32.
  3. 전운(田耘) ; 「서차구고묘군족속문제잔석(西岔溝古墓群族屬問題淺析)」 『黑龍江文物叢刊』 1984-1, p.29~34.
  4. 이전복(李殿福) ; 「漢代夫餘文化歸議」 『北方文物』, 1985-3.
  5.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 문물출판사, 1987.
  6. 유경문(劉景文)·방지국(龐志國) ; 「길림유수노하심묘장군족속탐토(吉林楡樹老河深墓葬群族屬探討)」 『북방문물(北方文物)』 1986-1.
  7.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5, p.213~227.
  8. 노태돈 ; 「부여」 『국사관논총』 4, 국사편찬위원회, 1989.
  •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23년 구입한 부여의 금동 얼굴상. 길이 27.4cm  오른쪽은 중국 뤼순박물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얼굴이 매우 닮았고 크기슨 17.9cm 로 약간 작다.  국립중앙박물관 김민구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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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갸름하고, 찢어진 눈… 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 허윤희 문화부 기자  E-mail : ostinato@chosun.com   입력 : 2014.09.05 05:38
    美 미네소타大 김민구 교수 "2~3세기 夫餘 얼굴상 2점 확인"
    머리에 상투 튼 모양… 귓불엔 귀고리용 구멍 뚫려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사진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높이 17.9㎝. /김민구 교수 제공

길고 갸름한 얼굴에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 머리엔 상투를 틀고 귓불을 뚫은 중년 남성.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한 뼘짜리 얼굴상이 고대 한국인 최고(最古)의 얼굴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민구(37) 미국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동양미술) 조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린성 지린시 동부 둥퇀산(東團山)과 마오얼산(帽兒山)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 얼굴상 2점은 한민족계 고대국가인 부여(夫餘) 2~3세기의 유물"이라고 밝혔다. 최근 발간된 '미술사논단' 제38호에 수록된 '부여의 얼굴: 둥퇀-마오얼산 출토의 금동면구(金銅面具)와 그 외연(外延)'이라는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둥퇀-마오얼산 일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 혹은 고구려계 유적일 것이라 막연히 추정했으나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부여의 왕성지(王城址)임이 확인됐다"며 "금동 얼굴 역시 후한 말기나 훨씬 늦은 시대의 거란계 유물로 추정돼왔으나 출토지가 부여 왕성지로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부여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선 금동 얼굴이 최소 6점 발견됐다. 4점은 일찍 자취를 감췄으나 2점은 중국 뤼순박물관(추정)과 지린성박물관에 각각 전한다. 그나마 국내 학계에선 광복 이후 잊힌 유물이다. 둘 다 얼굴은 갸름하고 인상은 강렬하다 못해 기괴하다.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김민구 교수 제공

이 중 둥퇀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얼굴상의 높이는 17.9㎝. 정수리 부분이 상투를 튼 것처럼 볼록 솟아있고, 귓불에 천공(穿孔·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시사하는 점 등이 고대 한민족 특유의 습속을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마의 주름, 벌어진 입, 살짝 내민 혀…. 이 얼굴은 관동청박물관(현 뤼순박물관)이 1926년 발간한 소장품 도록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한 점은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1903~1982)이 1934년 마오얼산 아래 밭에서 발굴했다. 높이 13.8㎝.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얼굴상의 용도는 뭘까. 김 교수는 “마구(馬具)나 무기 등에 장식용으로 장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부여(기원전 2세기 이전~기원후 346)는 철기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 최초로 고대국가를 성립한 세력이다. 이들의 문화가 이후 고구려·백제는 물론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정치·언어·이념·종교 등 다방면으로 계승됐다. 김 교수는 “따라서 이 얼굴상은 고대 한국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입체 조형 최고(最古)의 걸작”이라고 했다.

미술해부학 박사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부여족과 연관된 브리야트족의 얼굴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유사하다. 긴 얼굴에 광대뼈, 홀쭉한 뺨, 얇은 입술 등 북방계 얼굴”이라고 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5~6세기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얼굴과도 비슷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극동 퉁구스 계통 민족의 공통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전형적 북방계 얼굴”이라고 말했다.

[퍼옴] 부여의 기원과 문제점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1)부여의 중심지와 세력권


 부여의 문화의 기원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부여의 세력범위 및 위치설정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중국 및 우리학계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제 문헌사료 등을 참작,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시 일대, 더 구체적으로는 초기 부여의 왕성을 길림시 동단산(東團山)남성자(南城子)로, 그리고 기원후 4세기 이후의 부여 중심지역을 농안지방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으로 비정한다는 전제 아래 기원후 3세기경까지의 부여의 세력권이 ‘약수’곧 제 1송화강(동류 송화강)을 그 북한(北限)으로 동으로는 장광재령, 서로는 이통하 유역, 그리고는 남으로는 휘발하 유역을 포섭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또 혹자는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 기원후 1~3세기 부여국은 대략 북으로는 눈강과 송화강 일대까지 포괄하면서, 서쪽으로 조올하(洮兀河)하류의 건안(乾安) ․ 장령(長岭) ․ 쌍요(雙遼)등지를 경계로 하며,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접하고, 동으로 위호령(威虎嶺)을 경계로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길림 합달령(哈達嶺)을 경계로 휘발하 이북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다.


(2)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부여의 위치설정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및 중국측 여러 사료와 「광개토왕릉비문」, 「모두루묘지」등에는 ‘부여-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卒本)’라 지칭되는 다양한 부여의 기록이다. 이것은 마치 네 개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 사실은 부여사 인식체계를 짜는데 적지 않은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북부여, 동부여의 실체구명 여하에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간단히 세 가지 유형화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는 따로 떼어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들은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북부여로 불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둘째, 부여, 북부여를 별개의 실체로 보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동부여를 포함하여 세 개의 실체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동부여를 부여나 북부여와 일치시키는 의견도 있다.

 셋째, 세 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통설로 보고 있는 첫 번째 유형을 통해 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실체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이 견해는 본래 주몽의 고향은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로서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에 합병되었고, 동부여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시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의 일족이 세운 나라인바,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 통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부여’란 탁리국(槖離國) 출신의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그 중핵지로 기원전 3~2세기 말경 ‘국가’를 형성, 기원후 4세기 중반경 농안지방으로 그 중심지를 이동, 이후 494년까지 존속한 바 있는 ‘부여’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동부여1)’란 고구려 건국 당초부터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 후 285년 선비 모용외의 제 1차 강습으로 부여(북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지방으로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사행동에 의하여 공멸되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부여의 위치를 설정 해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맨아래쪽) 


3.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2)

 부여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들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청동기문화인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와 부여의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탁리국의 문화로 추정하는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이다.


(1)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길림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서단산문화3)이다. 주거지는 반지하식이고, 주로 석관묘를 조성하였으며 교상횡이호(橋狀橫耳壺)와 길쭉한 방망이 모양의 석부 및 쌍공의 반월형석도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이다. 대체로 동쪽으로 장광재령, 서쪽으로 이통하와 동요하 상류, 북쪽으로 납림하, 남쪽으로 휘발하를 경계로 하여 길림성 중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니, 종래의 부여 범위와 비슷하다. 이 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아 왔고, 발굴조사와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종래는 이 문화의 주인공이 숙신족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부여 건국의 기반이 된 예족의 산물로 보는 데에 별로 이견이 없다.

 오늘날, 우리학계는 동북아시아 주민이동의 큰 줄기인 고아시아족(Palio-Asiatics)과 알타이어족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우리 청동기문화의 향유자인 예맥족이 신석기문화의 담당 주민이었던 고아시아족을 정복·흡수·동화·통합하는 과정이 한민족의 형성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형성과 기원, 그리고 고조선·부여·고구려 주민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예맥이다. 우리 민족의 기원·형성 문제 해명을 위한 노력은 Altai어족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독립된 민족단위인 예맥의 실체 구명 문제로 집약된다. 또 그것은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의 주민 구성과 문화 계통을 밝히는 문제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4)


(2)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두번째는 서단산문화 북쪽에 분포하고 있는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이다. 1974년에 조원현 백금보유적을 발굴한 뒤에 처음 백금보문화란 명칭을 붙였고, 같은 해에 대안 한서유적을 발굴하면서 두 개 층위를 확인하여 하층은 청동기시대인 백금보문화, 상층은 초기철기시대인 한서2기문화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말을 전후하여 고리국(탁리국)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동명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남쪽 예족의 선주지역에 와서 부여국을 건립하였다. 이 내용은 왕충이 쓴 『논형』에 잘 보인다. 이것을 흔히 우리는 동명성왕 설화5)라고 한다.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부여의 시조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국왕의 시녀가 햇빛을 몸 안에 받아들여 낳은 자이다. 성장하면서 신이(神異)한 바가 많으므로 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를 건너 부여 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 이런 비슷한 신화를 가진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다. 동명신화는 바로 부여족 계통의 여러 집단이 공유하였던 건국신화로 고구려의 주몽신화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를 그대로 따른다면 탁리국은 부여에서 북쪽으로 큰 강을 건넌 곳에 위치하게 되어 송화강, 눈강 건너에 분포하고 있는 이들 문화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백금보 문화에 뒤이어 나타난 한서2기문화를 대체로 문헌의 탁리국 소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탁리국 주민들이 제2송화강 중류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예지(穢地)‘로 남하하여 서단산문화를 누리던 부여 선주민과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건립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첫째로 부여의 동명설화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당시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의 주민들이 공유하던 설화로서 역사적 실체는 거의 담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백금보문화-한서2기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이 여기저기 산견되어 발견됨으로써 섣불리 부여와 연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상호 이웃해 있는 문화 사이에 공통적인 요소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동명전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류의 결과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몇 가지 요소로서 전설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로 탁리국의 문화로 비정되는 고고학문화가 탁리국으로 비정할 정도로 상당한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룩한 증거가 있는지, 길림성 중부 지역의 서단산문화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대등한 수준인지, 길림성 중부 지역의 토착사회가 외부 집단의 이주와 정착을 쉽게 허용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1) 한편 ‘동부여’의 입지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혼춘(琿春)을 중심지역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이라고 보는 견해와 단결문화(團結文化-크로우노브카문화)를 남긴 북옥저 지역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혼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 ‘북옥저’지방은 고구려가 국초부터 그 세력을 진출시킨 지역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 동부여의 입지를 혼춘이 아닌 화룡(和龍)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장되기도 한다.

2) 예맥문화권안에 서단산문화와 백금보, 한서, 망해둔 문화가 속하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보면 모두 예족계통의 문화, 예족을 기원으로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3) 하지만 이 청동기 문화연대는 B.C. 8세기경까지로 소급되고 있지만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청동제품은 전반적으로 빈약하고 또한 이를 모델로 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동검을 내제화(內製化)하지 못하는 등 서쪽의 요동(遼東)지방 청동기 문화에 비해 현저한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여 부여의 국가형성은 서단산문화가 종말을 고할 무렵인 B.C. 3세기 말경이후로 보고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4) 이 문제와 관련, 학계는 '예·맥·예맥'의 상호관계, 곧 예와 맥이 동일한 종족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여하를 밝힘을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먼저 예맥동종설의 입장에서, '예맥'이라는 명칭은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며, 한대 이후 '예'와 '(예)맥'은 동일 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맥동종설의 관점을 따르더라도, '예맥'이란 연칭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 선진시대부터 '예'와 '맥'으로 표기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예맥'은 '예'와 '맥'이라는 각기 별개의 단칭을 가진 지역적으로 분별되는 동일 종족이었던 것이다. 곧 '맥족'은 요동과 한반도 일부에 분포하며, '예족'의 주지는 길림·송화강 및 눈강 유역 그리고 한반도 일부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예와 맥의 주지를 일정 지역에 고정시켜 이해하는 것보다 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제사상의 시간적 선후 관련성을 유념하여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진 시대 이래 예와 맥은 고조선·부여·고구려 등 여러 국가의 계기적인 성립·발전과 더불어 부단한 변화상을 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경우 맥의 주지를 '예'라 하지 않고, 예의 그것을 일부 '예맥'이라 지칭하기는 했어도 '맥'이라 한 적이 없었음은 눈여겨 볼 점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이들 예와 맥이 남쪽의 '한족'과 더불어 한민족 구성의 근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와는 다소 다른 시점도 없지 않다. 곧 이런 입장은 종래의 예맥 문제 연구 성과를 주민이동론과 분포설로 분별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 견해는  고구려를 세운 족속으로 거론되는 선진 문헌 상 '맥족'이란 고대 황하 유역 주민들이 그 북방의 족속들을 지칭하던 일종의 범칭으로서, 특정한 족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이 견해는 분포설이 사실이라 할 경우라도, 북중국 방면의 맥족은 한국인의 기원이나 고구려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또 이런 입장은 이동설 역시 동이족 혹은 맥족의 이동 과정이나 그 결과물이 考古學 상으로 논증되어야만 그 유의미성이 확인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박경철, 2006, 「예맥․ 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5)“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에 옮겨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엄호수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고로 북이(北夷)지역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논형》왕험편-


[퍼옴] 부여, 고구려 고고학〉-부여문화의 원류와 서단산문화-

 작성자   청초쪼꼬    2007.06.08. 17:19      http://blog.naver.com/tomorrowx

 

             부여의 기원과 그 문제점


                                                        


 

                                           - 목 차 -


                                        Ⅰ. 머리말

                           Ⅱ. 부여의 기원

                             1. 부여에 주목해야하는 이유

                             2. 부여의 세력권과 실체

                             3. 서단산문화와 백금보(白金寶)-한서2기(漢書2期)문화

                          Ⅲ . 부여의 문화와 문제점

                             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집단에 있어 정체성(identity) 문제의 핵심은 동아리 내부의 동질성의 확인과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인식함에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남과 다름을 인식함과 다름 아니다.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고고학적 연구는 많은 자료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자료도 예전에는 고고학 문화를 일정 집단의 동질적이고 규범적인 틀로 보는 대신 오늘날에는 문화적 진화와 사회적 변화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체계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족속과 집단의식에 대한 고고학 연구에 보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 것은 민족성, 혹은 동족성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와 관련된 사회적 조직화의 한 양상으로서 특히 집단 상호간의 경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후과정고고학이 출현하고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민족성 혹은 동족성이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주관적인 정체의식으로서 실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1)

  이처럼 종속성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과 유동성이 인식되면서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족속추정을 시도하는 것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각지에서 식민제국의 붕괴 이후 성립된 제 3세계 민족국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자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대두되면서 양상은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선의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고고학 자료의 정치적 이용이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족속 추정에 있어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역사학이나 인류학 또는 고고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기에 우리민족의 기원을 이미 사람이 이주해 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2) 게다가 중국학계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으로 최근 몇 년간 중국동북지방, 만주지역에 있던 문헌상의 옛 민족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를 위해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그 속에서 부여는 주몽이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적대관계 속에서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실상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에 우선 우리가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부여문화의 기원에 대해 논하기 전에, 부여 문화를 향유하던 세력범위와 고고학 측면에서 부여의 문화에 대해 짧게나마 알아보겠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부여 기원 연구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Ⅱ. 부여의 기원과 정의

1. 부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3)

 그동안 학계에서도 부여사는 발해사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변경의 역사로 취급되고 있다. 주로 고구려의 원류로서, 그리고 고구려의 정복대상으로서 부차적인 관심만 가져왔기에 부여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에 넣으려는 근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예맥족의 역사인 부여를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역사로 다루고 있는 사실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부여사의 현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여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학계에서는 부여4)가 우리의 민족의 주요 종족인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건국세력이 바로 부여에서 분파해 나간 점을 들 수 있다. 

 부여의 터전은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이 나왔다. (계루부 왕실) 주몽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5) 그러자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살던 주민들 중 일부 (비류, 온조집단)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동명사당을 두어 부여를 세운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서기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6)라고 고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 ․ 백제 왕실의 뿌리 구실을 했다. 최근 경상남도의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청동솥을 비롯해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 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부여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7)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시조 대조영도 우리 발해는 “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여 부여를 자신들의 오래 된 조상의 나라로 보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책 《무경총요》에서도 발해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으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부여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집단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부여의 역사는 우리 고대 국가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디딤돌이었고, 부여족은 우리 겨레를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중앙집권화 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직전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1)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2)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3)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4) 근대 역사학의 단초를 열었던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기존의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한족(韓族)중심의 정통론을 부정하고,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제기하였다. 신채호는 우리민족이 하나의 종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주동력이 되는 한 종족을 주족(主族)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종족을 객족(客族)으로 취급하여 주족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부여족이 주족, 지나족(支那族)․ 말갈족․ 여진족․ 선비족․ 토족(土族: 韓族과 濊貊등)․몽고족․ 일본족을 객족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사천년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盛衰消長)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민족의 역사, 국사는 곧 부여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채호가 말하는 부여중심의 역사는 고조선사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다.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5) 묘제상으로 볼때  부여와 고구려가 크게 달라 양자간의 관계를 의심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삼국지』고구려전에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 등 여러 가지 사항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두나라의 시조 및 건국신화가 같다는 것은 필경 양자가 역사적 기원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6) 472년 蓋鹵王이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직면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으로 北魏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세에는 고구려가 舊款을 돈독하게 존중했습니다.“고 한 것을 보면 제의 부여씨 왕실이 고구려와 동족, 동원으로 믿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聖王은 587년 왕도를 泗沘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했다. 이는 지배층의 종족의식에 호소하면서 加一層의 단결과 분발을 촉구한 조치로 이해된다.

7) 1990년대 초 한반도 김해지방의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가야고분에서 북방민족의 특유의 청동솥인 오르도스형 이 출토되어, 이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림성 북부 부여족의 이주에 의한 소산으로 적극 검토해 볼만하다고 申敬澈교수가 제기했다. 285년 옥저로 망명했던 부여족이 항해술을 이용, 동해안 항로를 따라 김해지방에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 배경으로 가야의 철이 동예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어 이를 구입하기 위해 김해를 내왕했던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설을 크게 뒷받침하는 측면이 강하다. - 이기동, 위의 책

[퍼옴] 부여의 기원과 문제점 (3) http://blog.naver.com/tomorrowx

작성자 : 청초쪼꼬  2007.06.08. 17:29

Ⅲ . 부여의 문화와 문제

1. 고고학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그렇다면 부여의 문화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전한 이후 부여인들이 남긴 문화는 서단산문화 다음에 나타나는 한 대문화이다. 그렇지만 부여문화의 실체는 1980 ․ 81년에 대규모로 발굴된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세 개의 층위 가운데 중층이 부여문화에 해당하는데, 장방형 수혈토광묘 129기와 마두 매장갱 1기, 유물 4200여 점이 발굴되었다. 또한 1985년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3기가 발견되고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길림 모아산(帽兒山)고분군은 부여문화의 연구에 본격적인 불을 댕기게 되었다. 아직은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서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나 용담산(龍潭山)에서 시작하여 너른 범위에 걸쳐 토광목곽묘, 토광묘, 토광목관묘, 토광화장묘, 토광석광묘 등 다양한 고분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이 발굴됨으로써 이제 비로소 부여문화의 기준이 설정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길림시 일대에서 발견되는 한 대의 유적은 한인 취락형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부여문화로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부여문화의 범주에서 다루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하심유적의 족속문제이다. 1985년에 처음 발표된 발굴보고에는 선비(鮮卑)로 규정하였지만 오히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부여인으로 규정해오고 있다. 노하심 유적은 부여 당시에 송화강 수로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거리인 100여km보다 훨씬 가깝게 느꼈을 것이지만 이를 부여유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부여 핵심부와는 독립된 세력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삼국지』부여전(夫餘傳)에서 보듯이 부여는 다양한 제가집단(諸加集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출도(四出道)를 분장(分掌)하는 제가와 관련된 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아산 고분군의 실체가 보고되어야만 부여 중심부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노하심 일대 세력의 정체와 함께 길림시 세력과의 관계도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까지의 견해에서는 노하심중층유적과 함께 서차구유적과 석역향 채람유적을 모두 부여 유적에 넣는 것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박양진 선생님은 묘제나 유물에서 족속을 판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없고, 다만 상대적으로 농경화된 유적은 부여에 속하는 반면에 유목적 요소를 강하게 띄는 것은 조선에 속한다고 판단하였다. 서로 비슷한 요소가 보인다고 해서 동일한 족속으로 판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서차구유적과 채람유적을 부여문화에 넣는 것은 이들 유적이 노하심유적보다 이른 시기에 속하여 부여사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쩠든 이러한 유적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부여의 문화적 특성을 알아보자.1)


(1)유물로 알아보는 부여의 문화 곽


①토기

 쌍이사경호(雙耳斜頸壺)와 쌍이관(雙耳罐2)), 두(豆)3) 등이 가장 대표적인 부여의 토기로 인식되는데 서단산문화의 토기로부터 포자연유형을 거쳐 발전한 점이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후기로 갈수록 토착적인 속성의 토기는 점차 축소되는 반면 한식토기 또는 한식토기를 모방하여 자체 제작한 토기류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는 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 상층유적과 노하심(老河深) 유적 등이 있고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는 동단산과 모아산 유적이 있다. 

②철기(鐵器)

 철기는 그 계통상 한 대 철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으로 인정되지만, 출토되는 철기의 수량으로 볼 때, 자체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장방형 주조 도끼인 곽(钁)4)과 수확 도구인 겸(鎌)의 출토 빈도가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가 농경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철제 무기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는데 농구 및 공구와 비교할 때, 철검 및, 대도 등과 같은 단조철기를 이용한 무기의 출토 숫자가 좀 더 많으며 출토 빈도도 상대적으로 높다. 이것이 부여문화의 군사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일반적인 부장 관습인지는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이밖에도 철기로 차마구가 있는데 당시의 전형적인 한 대 마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a. 거마구

 부여는 죽을 때 무덤에 말이빨과 턱뼈를 가지고 갈 정도로 말을 숭상하고 애용하던 사회였고, 이러한 풍조는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이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부여는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쇠퇴하기 직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나라는 물론 북방유목민족 관련 집단중 가장 부강하고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의 경우 이동시 수레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부여의 유적에서는 적지 않은 수량의 거마구류가 발견되고 있는데, 절대다수는 마구류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말머리의 미간으로부터 코까지를 장식하던 말얼굴장식, 두쪽말재갈, 몸체 중간에 두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 말재갈멈치, 프로펠러 모양의 말재갈멈치, 단추모양의 말띠장식 등이 있다. 이외 부여에서는 아직 중장기병과 관련된 마갑(馬甲) 류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은데, 기원후 494년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마구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인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b.무기

 부여는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중 가장 넓고 평탄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토질 또한 좋아 오곡이 고루 재배되었고 일찍부터 요동의 한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그야말로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 여러 종족중 가장 잘 살고 풍부한 나라였다. 그러나 동쪽의 읍루, 서쪽의 선비, 남쪽의 고구려, 북쪽의 다소 늦은 시기의 물길과 같은 강한 세력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어 늘상 이들의 위협 속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외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부여의 무덤 유적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무기가 다량 부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차구나 노하심(老河深)과 같이 한화(漢化)가 비교적 덜 진행된 전기 유적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부여만의 무기가 적지 않이 부장되어 있다. 예를들어 서차구와 노하심에는 손잡이 끝에 주산알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연령병식(連鈴柄式)의 동병철검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검은 부여 외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형식이다. 부여의 칼중에는 손잡이 끝에 새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조형병식(鳥形柄式)의 동병철검도 있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칼은 부여문화 형성 이전 길림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선행하여 유행한 같은 류의 칼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외 연령병식검의 상당수가 손잡이 끝 장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손잡이부가 비파형동검과 중간형동검(중세형동검)의 T자형 청동제 검손잡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점을 통해 부여의 무기 형성에 길림 중부 토착집단의 무기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외 부여의 무기중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중국식의 둥근 고리 달린 철검과 나무 손잡이를 자루 맞추개에 따로 끼어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납작 자루 맞추개의 철검이 있는데, 이러한 중국식 철검은 중국식 청동거울과 동전 및 타날문토기 등과 함께 부여와 중국 군현과의 교역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칼 외에 주요한 무기류로는 철창과 철화살촉이 있는데, 철창은 중국제품을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 것과 제작기술의 수용에 의해 자체 제작된 것이 있고, 철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과 같이 부여 양식의 특징적인 유형이 제작되었다.

③청동기및 금동유물

 부여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경의 절대다수는 한경이다. 한경과 오수전(五銖錢) 등은 부여의 무덤에서뿐만 아니라 인접한 선비의 무덤에서도 빈번하게 출토되고 있는데 한과의 직 ․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서 획득한 위세품으로서 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피장자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이 뚜렷한 청동유물로는 청동용기인 복(鍑)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에서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는 이러한 청동 용기는 부여와 인접한 선비, 흉노 등의 유적에서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부여의 청동 장신구로서 완식(腕飾)과 이환(耳環), 금동패식(金銅牌飾) 등은 부여의 특징적인 유물이면서 동시에 북방 문화적 특징을 강하게 보여준다.

a. 위엄구

 청동기시대 중국문화권에서는 부월(斧鉞)5)과 옥기류 등이 위엄구로 활용된 반면, 석곽묘, 석관묘, 지석묘, 비파형동검 등이 유행한 중국 동북지역의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집단에서는 다뉴기하학문경6)이 대표적인 위엄구로 사용되었다. 철기시대 전기에는 다뉴기하학문경 외에 한나라로부터 교역이나 증여를 통해 들여온 한경(漢鏡)과 이를 모방하여 제작한 방제경(倣製鏡)7)이 위엄구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기원후 5세기 동안 존속한 부여에서는 청동거울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엄구가 사용되었는데, 대인(大人) 이상이 썼다고 하는 금은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모라든지, 유니콘과 유사하게 생긴 신마상(神馬像)이 장식되어 있는 금도금 청동패식이라든지, 가슴 부위에 장식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른 바 호심경(護心鏡)이라든지, 벽옥(璧玉)이나 규옥(珪玉)이라든지 하는 것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외 부여 왕이 쓰고 있었을 왕관 또한 위엄구로 볼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예가 없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2)종합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부여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시기의 고고학문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시기의 문화 변화가 자체적인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외부 문화유입은 북방의 영향보다는 남쪽의 한문화의 영향이 훨씬 더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대표적인 토기인 쌍이사경호와 쌍이관 등에서 확인되는 서단산문화의 전통적 영향은 자체 문화발전의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여 초기의 문화적 발전을 보여주는 포자연전산 상층, 양둔대해자맹 중층, 대가산 상층, 학고동산 상층 등의 문화층 아래에서는 모두 서단산문화층이 존재하고 있어서 단절없는 문화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서단산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부여사회가 발전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중국 동북 지방 전역에 유입되는 전국 연문화 및 진한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연문화의 영향은 길림성 남부 이수현 이용호 성지 출토유물에서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 토착사회와 전국시대 중국 제후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교류의 결과물에 있어서는 새로운 토기 양식이 출현하고  철제 농경 도구가 사용되며 유적에서는 토광묘가 이전의 석관묘를 대체하게 된다.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경에 일어난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화와 발전은 중국 문화 유입에 따른 문화적 충격에 각 지역의 소규모 사회가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재지 사회가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후기 부여 문화가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지역에 중원문화가 본격적으로 파급된 결정적 계기는 기원전 108년 한문제가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 사건이다. 길림성 중부 지역의 토착사회는 이제 합달령 이남지구에 자리잡은 한 ․ 현토군과 직 ․ 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군현 및 한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고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부여, 고구려 등을 비롯한 정치 ․ 사회적 집단의 형성과 발전이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하면, 고고학적 증거에서 관찰되는 부여 문화의 상한 연대는 기원전 2세기말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른바 포자연유형의 성립으로 초기 부여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부여사 연구의 문제점

 부여사 연구에서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사서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 내용의 신빙성 문제이다. 중국 역대 정사와 기타 문헌들은 주변 민족들에 대한 보다 풍부하고 체계적인 기록임을 자부하고 있다. 타자에 의한 기록은 객관성을 제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자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일방적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중국측 기록들의 단편성이나 부정확성 문제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그 기록들이 중국인의 전통적인 천하관과 화이사상에 의해 진상이 크게 이지러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그 역사서들은 중국 天子의 당위적인 지배 범위를 '천하'로 상정하고, 이민족 세계를 그 천하의 일부에 포함시켜 주변 민족의 역사를 사실상 중국 왕조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한편, 문화적으로 월등한 '중국'에 신속해야만 하는 야만 단계의 민족상을 구축하는데 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들은 자체의 기록을 갖지 못하였던 주변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변 민족들이 독자적인 사서를 편찬할 때도 이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이것이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잘못된 역사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이와 같이 형성된 전통적인 '동북관'이 현재까지 은연중 계승되고 있는 예가 드물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공간된 동북공정 관련 고구려사 및 동북지방사 연구 성과물의 상당수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8)

 두 번째로는 족속추정의 어려움이다. 부여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족속자체의 변화와 복합성이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시기를 달리하면서 계속 등장하고 소멸하는 여러 이름의 종족들이란 대부분 그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식이나 종족의식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9)

 세 번째로는 우리가 연구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자료가 가지는 문제점이다. 특히 동북지방에서 이제까지 조사된 대부분의 유적발굴이 구제발굴의 성격이 강하고 유적의 정확한 양상이나 내용이 명확하게 보고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한 발굴된 자료 역시 중국 정부에서 공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연구의 어려움이 있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부여의 문화와 그 기원에 대해 그리고 부여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사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방향설정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은 부여를 우리 역사로 꼭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과거 우리 역사라 칭해도 탈이 없는 고구려나 백제 등에서 저마다 부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칭한데서 부여 역시 우리역사라고 자부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왕조에 부속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과연 단일민족일까 하는 다른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단군 이래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관주도 민주주의에 대항해 만들어진 민족사학자들의 대항 담론으로서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지적하듯이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싸움을 민족간의 경쟁으로 보거나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을 민족통일로 보는 것은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라는 영토 안에서의 단일한 정치체의 출현을 곧 민족공동체의 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는 왕조국가였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신라에 의한 통일은 민족의 통일로 기억된다.

 “역사를 복원하는데 망각된 사람과 사건을 발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었다. 망각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써 나가는 필요조건이 된다.”10)

라고 말한 윤형숙선생님의 말씀은 고고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기원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예맥과 더 나아가 한민족의 기원문제에 까지 이르게 되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기원문제는 부여의 문제를 비롯하여 나아가 한민족의 문제까지 딱 이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고고학자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기원설정에 대한 언급없이 잠재적으로 이것은 이 문화이다라는 가정하에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논의되다 보니 부여나 기원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옛 부여가 있었고, 현재는 중국의 영토인 동북지방은 민족문제 등 예민한 문제들로 인하여 깊은 연구는 이뤄지고 있지만 실제 학계에 발표된 것이 극히 적고 서로의 연구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많다. 지금 이 지역의 역사학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부단히 연구되고 있지만 어느 민족역사에 포함시켜 심도 있게 그 전모를 밝혀야 하는지는 아직은 많은 난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잘못하면 자국의 역사에 대한 오류와 아울러 국익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갖고 시작하여 그 깊은 내용들을 파헤쳐 가면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고 또한 역사학자들의 사실을 정확히 보는 눈보다는 자국의 정치적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요구하기에 역사학자들이 사명감(使命感)을 갖고 올바른 인식과 설득력(説得力) 있는 연구 결과로써 진실이 밝혀져야 하고 또한 이를 인정해 줌으로써 자존심 문제나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고 본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부여의 역사는 우리,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아닌 부여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관련국들이 상호 긴밀한 협조로써 깊은 연구 하에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유물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함으로써 별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줄 안다.


<참고자료>

• 김정배, 『한국고대사입문』, 신서원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KSI한국학술정보(주)

• 대원 문재현, 『바로보인 환단고기 3 역사의 나침반』, 바로보인

• 이도학, 『고대문화산책』, 서문문화사

• 이도학, 『꿈이 담긴 한국고대사 노트(상)』, 일지사

• 윤내현,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 이종욱, 『한국의 초기국가』, 마르케

• 송호정, 2005, 『부여 ․ 옥저 ․ 동예사: 만주지역 우리역사의 원료』, 「컴퓨터파일」,부여편

• 박경철, 2006, 「예맥․ 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한국고고학보 39호

• 박양진, 2005, 「고고학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연구 37호

•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 연구 37호(2005.3)

• 송기호, 2005, 「부여사연구의 쟁점과 자료해석」, 한국고대사연구 37호

• 왕면후, 「고대부여의 흥망과 왕성의 변천」, 백산학보 58호

• 한국신문, 『한민족의 문화유산(고조선, 부여, 발해)』

• 오강원, 「중만지역의 초기철기문화-포자연식문화의 성립과 전개과정」

• 역사탐구위원회, http://cafe.naver.com/19101945

• 베네딕트앤더슨/윤형숙 역, 2005, 『상상의 공동체』, 나남

 

 

1) 이 곳에 소개한 유물들은 대게 부여의 유적이라 생각되는 노하심(老河深)유적과 모아산(帽兒山)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2) 질로 만든 두레박이나 주전자

3) 두껍고 굽이 높으며 뚜껑이 있어서 고기붙이, 국 따위를 담는 데 쓰는 나무로 된 제기(祭器).

4) 그러나 괭이로 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끊다, 쪼개다라는 듯도 있어 도끼로 추정되긴 하지만 전국(戰國)·진(秦)·한(漢) 시대의 실례로서는 두부(頭部)가 둥글고 조붓이 생긴 날의 한 끝에 네모난 구멍을 뚫었고, 약간 구부러진 것이 중국 허난성의 전국시대 묘(墓)에서 출토되었고, 또한 너비가 넓은 대형(臺形)의 날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것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5) 생살권의 상징으로서 주던 큰도끼와 작은도끼. 정하는 대장에게 통솔권의 상징으로 임금이 손수 주던 작은 도끼와 큰 도끼. 정벌, 군기, 형륙(形戮)을 뜻한다 

6)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보급된 된 것으로 원형의 뒷면에 꼭지(뉴)가 2-3개 달리고  대체로 삼각거치(三角鋸齒) 무늬를 무늬구성단위로 한 기하학무늬 거울을 말한다

7) 중국 한나라의 거울을 본 떠 만든 본뜬거울.

8) 박경철, 濊貊·扶餘와 高句麗의 正體性에 관한 硏究 , 강남대

9) 박양진, 1998, 「族屬추정과 夫餘 및 鮮卑 고고학자료의 비교분석」

10) 베네딕트앤더슨/윤형숙 역, 2005, 『상상의 공동체』, 나남, 280~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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