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건국 내용에서 동명왕이 고리국(槀離國)에서 떠나왔다고 한다. 고리국(槀離國)은 탁리국(橐離國), 색리국(索離國)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탁리국 기원에 대한 연구 내용이 있어서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발췌] '사서 분석을 통한 고죽과 부여의 위치 비정' 심제 이진우

고죽국의 위치와 관련된 "孤竹國의 성립과 古朝鮮 후국의 지위"라는 연구에서 신용하는 고죽국에서 고구려가 발생하였다는 『배구전』의 내용을 참고하여 고추가라는 관직명이 고죽의 중국고어(中古語)인「kuchu」라는 사실과 동명의 탁리국이 중고어「Tari(Dari)」로서 제나라와 전쟁을 벌인 고죽국왕의 이름 답리가(答里可)에서 기원하므로 부여에서 가장 강성했던 종족이라 밝힌 것은 성과로 볼 수 있으나, 기존 연구자들의 논지와 유의차 없이 현 하북 영평부로 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역사인 홍산문화, 동이족의 영웅인 치우 그리고 쥬신족의 최초 나라인 고조선 등 이제는 상고시대 역사까지 중화의 것으로 만들거나 왜곡, 부정, 파괴하려고 합니다.

고조선은 한겨레의 최조 나라이고 한겨레의 뿌리입니다. 실상 뿌리인 고조선을 신화로 치부하고 존재 마저 부정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과연 중원 국가에 대한 고조선은 존재감은 어땠을까요? 국가간의 우위는 군사력이고 전쟁에서 확인이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중원 국가간의 전쟁을 사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원 사서에서 고조선을 비하한 다른 이름으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퍼옴] http://m.blog.naver.com/knightblack/10013824767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不哈 平海上熊襲 사벌(沙伐) 단제 무오50(B.C 723)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甲戌六十六年 帝遣祖乙 直穿燕都 與齊兵 戰于臨淄之南郊 告捷 갑술66(B.C 707), 사벌단제께서 조을을 보내 연나라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회에서 싸우고 승리를 알려왔다.」 기록되어 있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二十五年, 北戎伐. 鄭使太子忽來救. 희공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나라에서 태자 홀을 보내 제나라를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사벌단제가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제나라 13대 희공(BC 731~ 698) 때의 일이다. 희공 25년 이면 기원전 707년에 해당하므로 그 연대가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있다. 사기는 고조선을 가리켜 북쪽의 이족이라는 뜻으로 북융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참고로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동이라 표현한 예로 보아 북융은 조선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나라 이전에는 동호를 북융과 산융으로 호칭했음을 말한다. 동호는 동이와 같은 뜻으로 고조선을 비하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是後六十有五年 而山戎 越燕而伐齊 齊禧公與戰于齊郊. 전략. 그로부터 65년 뒤 山戎(산융)() 나라를 넘어와서 () 나라를 공격하여 () 禧公(희공)이 산융과 제 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705년경(770-65=705)으로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산융(山戎)으로 적혀있다.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라 하더니 흉노전에는 산융이라 한다. 이는 조선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중국인의 의도적인 곡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고조선은 제나라를 공격하였을까? 그것은 제나라가 산동성 일대의 래이(萊夷)를 병탄한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원] 정간 편에 의하면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의 말을 듣지 않자 제나라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고 한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춘추 좌전에도 언급하고 있다.

(노나라 환공 ; BC 712 ~ 694) 6(BC 707)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후(齊候 : 희공)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나라 태자 홀이 군대를 끌고가 제나라를 구원하였다. 6월에 북융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북융의 장수인 대량과 소량 및 갑수 300명을 잡아 제나라에 바쳤다.

 

[춘추]는 노나라의 사서를 공자가 도덕적 견지에서 수정 가필한 문헌이다. 윗글을 보면 북융이라 표현된 고조선이 제나라와 연나라 연합군에서 크게 깨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의 춘추 기록을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제후들이 (북융 : 조선의 공격에 대항하여) 제나라를 수비하였기 때문에 제나라에서는 구원하러 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노나라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나라는 뒤로 물러났으며 태자 홀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전공(戰功)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과정에서 연나라가 뒤로 밀려난 것은 실상 그들이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戊辰五十二年, 帝遣兵與須臾兵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入孤竹. 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36대 매륵 (買勒: BC 704~BC 646)) 무진년(戊辰年)이며 재위 52년에 즉 BC 653년에 매륵단제(단군)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위의 단군세기 기록은 매륵단제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사기 제태공세가에도 위와 같은 사살이 실려있다.

 

二十三年 山戎代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代山戎 至干孤竹而還. 제나라 환공 23, 산융이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제나나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산융을 쳐서 고죽까지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전략. 그로부터 44년 후 산융이 () 나라을 쳤다. 연 나라는 곧 위급함을 () 나라 알렸고 () 桓公(환공)은 산융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其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B.C 653년경) [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661년경(705-44=661)으로 적혀 있다.]

 

위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당시 제 환공(BC 685 ~ 643)이 고조선 및 연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교모히 감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만약 승리하였다면 기사의 마무리가 “산융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돌아왔다”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 대 연제 연합군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을까? 설원 권모편을 보기로 하자.

 

“제 환공이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노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노나라 왕은 신하들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만이(蠻夷)의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연나라 군대와 합세한 제 환공이 고조선의 복명에 걸려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 환공이 다시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노나라가 도와주기 않자 제 환공은 고조선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제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이라는 공자의 말(논어) [, 여기서 피발은 종발이라고 하며 고대 고조선인의 머리를 트는 모양을 말한다.], 고조선의 거듭된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 가까이 간 연나라, 그리고 고조선 연제 연합군과의 싸움을 기록한 사서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은 신화상의 국가가 아니라 실존한 국가였으며, 중국이 두려워한 국가였다.

[출처] 실증 한단고시 (정신세계사), 한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사)

《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6)

http://www.dbanews.com  동북아신문
박문희  |  pwx0907@yahoo.com.cn  2008.03.14


《단군신화》를 보면 460여자 되는 짧은 글속에 수천년간에 걸친 아름찬 력사내용을 압축해 담고있다. 환웅의 삼위태백 강림, 단군의 탄생, 조선국 창설, 백악산아사달 천도, 장당경 은둔...하다면 환웅이 내렸다는 삼위 태백은 진실일가, 허구일가? 아니면 태백의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가? 진실이라면 그 위치는?

《尚書·舜典》에 “三危”란 지명이 追記된 이래 력대의 문헌기록과 후세 사람들의 연구자료를 보면 “고삼위”의 존재는 확실하며 위치도 서북지역임이 분명하다.

北魏의 酈道元 등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水經注》)고,  

唐의 리태 등은 “삼위산은 沙州(돈황)의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括地志》)고, 

《한서》,《후한서》,《상서정의》,《상서법》,《태평어람》등은 “三危가 감숙과 청해성 경내에 있다"고 기술했고  

동한시기 마융의 《상서주》와《한서·공안국전》,  

唐나라 공영달의《尚書正義》등 史籍은 “三危”가 서부지역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중 “대삼위”, “대돈황”설과 최신판《辭海》력사지리 분책에 올린 감숙성 롱서현(隴西縣) 서북부 지역설 등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얻고있다.

초보자 위한 강좌 - 영주(營州)의 흔적.. 玄朝_문무의 조선사 / 역사

玄朝..  2010.10.09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3pCY/23

# 롱서(隴西)의 수양산(首陽山)은 확실히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확대해서 보면 다음 아래와 같다..

{ ※ 우연하게도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위원(渭源)은 근세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 관련 지명이기도 하는데, 평양(平壤)과 양평(襄平)도 역시 평안도(平安道)에 속하는 지명이기도 한다.. }

롱서(隴西)는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에 실존하는 지명이고, 롱서(隴西)의 북쪽 경계에는 란주(蘭州 : 金城)와 령주(靈州)가 있는데..

營州,鄰海軍,下,刺史。本商孤竹國。

영주,인해군,하,자사。본상고죽국。
[ # 요사(遼史) 권040.. ]

 # 간단히 보면, 영주(營州)는 본디 상나라(商) 당시의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地理誌曰 : 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지리지왈 : 영지유고죽성, 고고죽국야..
史記曰 : 孤竹君之二子伯夷 · 叔齊, 讓國於此, 而餓死於首陽..
사기왈 : 고죽군지이자백이 · 숙제, 양국어차, 이아사어수양..
[ # 수경주(水經注) 권014.. ]

 지리지(地理誌)가 말하기를 :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고,(그 곳은) 옛 고죽국(孤竹國)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말하기를 : 고죽(孤竹) 임금의 아들 2명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고, (고죽국에) 나라(고죽국)의 자리를 사양하였고, 수양산(首陽山)에 굶어 죽었다..

 # 윗 문구를 보아 알수 있듯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곳 - 수양산(首陽山)은 고죽국(孤竹國)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수양산(首陽山)을 단서로 삼아 추적하기 전에 근세 조선(朝鮮)의 시를 읊어보면서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得聖之淸孰與齊 : 성인으론 맑은 이를 누가 겨루랴
首山道便此憑隮 : 수양산 가는 길 이로 좇아 올랐도다
爲傳公信及公達 : 백이와 숙제를 전하기 위함인데 
底較遼西復隴西 : 요서와 농서는 비교나 되랴 
何事宋朝賜圭冕 : 송 나라선 무엇하러 규면을 내렸는지 
可知夫子視塗泥 : 부자께서 흙덩이로 여김 알 수 있네 
史遷慨羡靑雲士 : 사마천은 청운의 선비 부러워했으니 
未識浮名本稗稊 : 뜬 소문 원래 쓸데없음을 몰라서지 
[ # 계산기정(薊山紀程) 제4권 - 돌아오는 길[復路] : 근세 조선(朝鮮).. ]

 # 요서(遼西)와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을 고죽국(孤竹國)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단서로 얻었다..

그 전에 다음 아래의 글을 읽기 전에 마음을 비워두기를 바란다..

 阮籍《詠懷詩》亦以爲然。今此二山。竝有夷、齊祠耳。
완적《영회시》역이위연。금차이산。병유이、제사이。
而曹大家注《幽通賦》云。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
이조대가주《유통부》운。롱서수양현시야。금롱서역유수양산。
許愼云。首陽山在遼西。諸說不同。致有疑惑。
허신운。수양산재료서。제설부동。치유의혹。
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
이《백이가》운。등피서산。칙당롱서자근위시야。 
[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고죽수양산변증설(孤竹首陽山辨證說) : 근세 조선(朝鮮).. ]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는 역시 그렇다고 여겼고, 지금의 두 산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제사를 기울이면서 아울러 가졌다..
조대가(曹大家)의 주석 유통부(幽通賦)가 이르기를 롱서(隴西)의 수양현(首陽縣)이 옳다.. 지금 롱서(隴西)에 역시 수양산(首陽山)이 있다..

허신(許愼)이 이르기를 수양산(首陽山)은 요서(遼西)에 위치한다.. 여러 사람이 주장하는 말이 똑같지 않고, 의혹하기를 이르렀다..
백이가(伯夷歌)가 이르기를 서산에 오르면, 당연히 롱서(隴西)와 가까우니 옳다고 한다..

 # 윗 기록을 읽으면서 알수 있듯이  요서(遼西) 위치설에 대하여 여러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니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 # 우리 나라의 사학계와 지나(支那 : 중화) 사학계는 이를 알지 못하는채, 의혹스러운 요서(遼西) 위치설을 고집하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

 # 확실한 것은 고조선(古朝鮮) 시대부터 근세 조선(朝鮮) 시대까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에 위치하는 것은 옳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정론으로 볼 수 있다..

 

東漢經文學家曹大家(即班昭)注《幽通賦》說:"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陽。" …
동한경문학가조대가(즉반소)주《유통부》설:"이제아어수양산재롱서수양。" …
正義曰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정의왈조대가주유통부운:「이제아어수양산,재롱서수。」
[ # 사기(史記) 권061 백이열전제일(伯夷列傳第一).. ]

 동한경(東漢經)의 문학가 - 조대가(曹大家 : 즉 반소(班昭)이다)의 주석 유통부(幽通賦) 설에 따르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에 위치한다..

정의(正義)가 말하기를 조대가(曹大家)의 주석 유통부(幽通賦)가 이르기를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에 위치한다..

 #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근세 조선(朝鮮) 당시의 기록과 후한(後漢) 당시의 기록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에 있다는 것이다..

 首陽山, 古孤竹國之地, 伯夷 · 叔齊, 孤竹君之二子, 餓死首陽山之下, 即此山也..
수양산, 고고죽국지지, 백이 · 숙제, 고죽군지이자, 아사수양산지하, 즉차산야..
[ # 무경총요(武經總要) 전집(前集) 권022.. ]

 수양산(首陽山)은 옛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고,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아들 2명이다..  수양산(首陽山)의 아래에 아사하여 죽었고, 즉 이 산(롱서의 수양산)이다.






http://www.coo21.rgro.net/ 

玄濟 현제  2009-03-02 12:38:57

 


▲ 참고로 백석산(白石山)은 살수(薩水)와 깊이 관련되는 지명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은 고죽국(孤竹國)이라면..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의 서쪽에는 백석산(白石山)이 실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① 東漢經文學家曹大家(即班昭)注《幽通賦》說:"夷齊餓於首陽山 在 隴西首陽。" …

▲ 윗 문장을 읽어보면, 알 수있듯이..
반고(班固)의 유통부(幽通賦) : 백이 숙제가 굶어 죽은 곳 즉 수양산(首陽山)이고,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史記: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③ 竝有夷、齊祠耳。而曹大家注《幽通賦》云。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 … (중략) … 許愼云。首陽山在遼西。諸說不同。致有疑惑。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


즉, 기록에는 옳다(是) 이라고 분명히 나와있어서,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은 본디 백이 숙제의 무덤임을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백이가(伯夷歌)에 의하면, 백이(伯夷)와 관련되는 서산(西山)도 역시 당연히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적어도, 기록에 따르기 위해서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은 현 하북성(河北省)과 현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할 수 없는 지명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제 견해로 보자면.. 현 산서성(山西省) 서남부의 수양산(首陽山)은 본디 근세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이라고 추측합니다..

감사합니다..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1부)

성훈 http://blog.joins.com/slsung

B.C 1,100년 경 은나라 말기에는 고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유명한 은나라 마지막 주(紂)왕과 은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문왕(西伯昌)과 무왕(武王)이 등장하며, 그 유명한 기자(箕子)와 백이.숙제(伯夷.叔齊) 그리고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姜太公)이 등장한다.


필자가 이들의 역사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당시 하남성에 있었던 은나라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단군조선의 강역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3,1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은나라 건국에 관련된 단군조선 
먼저 은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한다. 중국은 삼황오제의 시대를 지나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가 들어서고, 4백 수십 년이 훨씬 지나 하나라 다음에 은(殷)나라가 들어선다. 이 은나라 역시 삼황오제와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동족(同族)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였다. 

중국 사학자들의 공동 저서인 ‘고사변’에 따르면 “현조(玄鳥)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족의 조상신이다. 동이와 은나라 사람은 같은 종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 제준, 소호, 제곡, 제순(순임금) 그리고 설(은나라 조상) 등이 동이족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은나라는 우리와 동족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조는 검은 새로 은나라 조상인 설(契)의 탄생난생신화(誕生卵生神話)에 나오는 새이다.

이런 은나라의 건국에는 단군조선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 1767년) 겨울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의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명하여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걸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길을 막자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섬서성)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라가 망하고 은나라가 들어설 때의 일인데, 은나라가 하나라를 쳤으나 조선이 하나라를 도우니 은나라가 사죄하고 돌아갔고, 하나라 왕이 약속을 어기자 이번에는 조선이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이다. 즉 하나라와 은나라의 운명은 단군조선의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섬서성 빈.기의 땅에 관청을 설치했다 하는데 빈.기는 섬서성 서안 서쪽을 말함이다.
 
빈기고지도.gif
▲   고대 중국지도에서의 빈과 기. 섬서성 서안 서쪽의 고대 지명이다.

이 기록은 <단군세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그 관련 기록이 있다. 한나라 때 유향이 쓴 <설원(設苑)> 권모(權謀)편에 같은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번역)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길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러자 걸왕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윤이 말하길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원문: 湯欲伐傑 伊尹曰 請阻乏貢職 以觀其動 傑怒起九黎之師以伐之 伊尹曰 未可彼尙猶能起九黎之師 是罪在我也 湯乃謝罪請服 復入貢職)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움직이려 하였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말하기를 “됐습니다.”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징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
(明年又不供貢職 傑怒起九黎之師 九黎之師不起 伊尹曰可矣 湯乃興師伐而殘之 遷傑南巢氏焉)


이 외에도 <후한서> 동이(東夷)전과 서강(西羌)전에도 같은 내용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동이전) “걸왕이 포악하고 잔인하자 여러 동이들이 쳐들어왔다.(傑爲暴虐 諸夷來侵)”
(서강전) “걸왕이 어지럽자 견이가 빈(邠).기(岐) 사이에 들어와 점거하였다. (傑之亂 畎夷入居邠岐之間)”

위 <단군세기>의 기록과 중국 사서의 기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위 중국 기록에서의 구이(九黎)와 견이(畎夷)는 단군조선임을 알 수 있다. 하나라가 멸망한 것도, 은나라가 일어난 것도 모두 단군조선의 강력한 힘이 작용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탕왕(湯王)에 의해 세워진 은나라는 17세 30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은나라의 통치기간에 대해 중국 기록인 <죽서기년>에는 은나라가 496년간 다스렸다고 하고, <삼통력>에는 6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단군세기>의 기록으로 볼 때는 <삼통력>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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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대 역사교재에 나와 있는 하대형세도에 하나라는 하남성 일대에만 있고 서안 바로 서쪽에 견이가 그려져 있다.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갈등 

은나라는 단군조선 덕택에 나라를 세우고는 조선에게 계속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곤 했다. 그러다가 약 470년 후에 아래와 같이 단군조선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참고로 고등(高登)이란 사람은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조선의 22세 단군이 되는 색불루의 조부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21세 소태단군 47년(B.C 1291년) 은나라 왕 무정(22대)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귀방이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귀방은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도 나와 <단군세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를 입증하고 있다. 

鬼方(귀방) : 古远方国,《易既济》“高宗伐鬼方,三年春之,”其说有五,
1)谓即西戎,《后汉书章帝纪》克伐鬼方,开通西域,《西羌传》武丁征西戎鬼方,三年乃克,《文选赵充国"042;李善注》“鬼方,于汉则先零戎也,”世本注同,案当在今青海境,
(서융으로 “<서강전>에 무정이 서융귀방을 정벌했다” 지금의 청해와의 경계이다)

2)谓即周荆楚之地,〈惠栋九经古义〉汲郡古文云,武丁三十二年,伐鬼方,次于荆,三十四年,王师克鬼方,氐羌来宾,商"042;殷武云,挞彼殷武,奋伐荆楚,疑周之荆楚,商时谓之鬼方,古文所谓次于荆者,盖鬼方之地也, (주나라 형초의 땅)

3)谓即今贵州,《清一统志》贵州,商周为鬼方地,(지금의 귀주)

4)《丙子学易篇》“苍"049;篇云,鬼,远也,又云鬼方言其幽昧也,”此不以地实之,惠栋斥为臆说, (유매의 땅)

5)近人王国维谓鬼方即狄人,殷周时据陕西西北一带,古之獯"739;,汉之匈奴,皆其同种,春秋时狄人隗姓,隗即鬼也(즉 적인으로 은.주 때 섬서성 서북일대)

여기서의 귀방은 1)번과 5)번으로 거의 같은 지역이다. 즉 단군조선이 하나라가 망할 때 점령해서 관청까지 설치했던 빈(邠).기(岐)와 가까운 곳이다. 필자는 이 지역을 계속 단군조선의 점령지로 보는 이유는 은나라의 도읍은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 섬서성 서쪽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이야기했다.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 (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또 은나라 왕 무정이 공격했다가 단군조선에게 대패한 영지(令支)에 있던 나라는 바로 고죽국(孤竹國)이었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보고 있으나,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이 증명되는 기록이라 하겠다. 은나라가 자기네 제후를 침공하는데 단군조선이 공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 바로 후에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이 되는 곳이다. 그 문헌적인 근거가 아래에 인용한 <한서지리지>이다. 이 요서군의 위치는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남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됨으로서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532;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고 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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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 고향인 수양산에 와서 굶어 죽었다. 백이.숙제의 묘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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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바로 요서군의 땅이라고 밝혀주는 백이.숙제의 묘가 일년 반 전에 발견되었다.


이어서 단군조선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때인 23세 색불루단군 때의 <단군세기> 기록이다.
“B.C 1285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했다가 또 싸워 이를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은나라의 도읍은 황하북부 하남성이며, 고죽군(孤竹君)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으로 뒤에 나올 백이.숙제의 아버지이다. 단군조선은 다시 빈.기를 점령하고는 여(黎)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여는 구리(九黎)와 연관된 말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며, 여파달이라는 장수의 성이기도 하다. 

<단군세기>의 이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熏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 와 그에게 재물과 땅을 요구한 뒤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하고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여들었다.”

고공단부가 옮겨간 기산이 섬서성 서안 서쪽 감숙성과 가까이 있는 바로 기(岐) 땅이다. 이러한 고공단부의 손자 중에 창(昌)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은나라 말기에 서쪽 제후로 봉해졌다 하여 서백창(西伯昌)이라고 하며, 나중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되고 강태공(姜太公)을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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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이 섬서성 서안 서쪽인 빈.기를 점령한 것은 조선의 핵심 강역이 산서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서안 서쪽의 피라미드는 누가 만든 것인가?

섬서성 서안 서쪽에서 엄청나게 큰 피라미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 작업을 하던 중국 당국은 이 유적에서 동이족의 유물들이 튀어나오자 급히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발굴 작업을 했던 인부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게다가 피라미드를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위장을 해 인공위성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중국 정부는 왜 그랬을까?

중국 고대역사의 심장이라는 서안의 서쪽에서 동이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중국의 자존심이 구겨지고 또한 고대 중국의 영토는 옛날부터 만리장성 안쪽이라는 엉터리 거짓말이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성 서안 서쪽 피라미드의 주인은 바로 단군조선이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고조선의 영토로 보는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마치 기록이 잘못된 허구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을 산서성에 놓고 보면 단군조선의 서안 서쪽 점령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아~! 단군조선은 실로 엄청나게 크고 위대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나라를 이천년 넘게 다스린 47분의 단군을 곰의 신화로 만든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천벌이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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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서안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는 아래 사진과 같이 중국정부에서 나무를 심어 철저히 위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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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림성 집안에 있는 피라미드들.  피라미드는 원형이 고인돌로 단군조선/고구려의 전통 무덤 형태이다.


곧 이어서 (2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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