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반정천황(瑞齒別)
서기 이중전기에서 응신을 달리 꾸민 주길중황자를, 진언을 달리 꾸민 자령건이 죽이게 하고 그 자령건마저 죽이는 서치별황자가 후에 반정천황이 되는데 이 스토리는 대화왕조를 이룬 아라사등의 아들 삼형제의 왕권다툼과 승계를 은유한 것이다.
그 마지막 승계자인 동성대왕을 증조부 예진별명으로 대표시킨 것이다. 서치별황자는 응신의 형 예진별명을 달리 꾸민 인물 중의 하나다. 성씨록에 가계가 아래와 같이 나온다.
飛鳥戶造; 出自 百濟國 比有王也(우경제번) 飛鳥戶造; 出自 百濟國主 比有王男 琨伎王也(하내국제번) 飛鳥戶造; 百濟國 末多王 之後也(하내국제번)
가계가 아라사등>예진별명(=서치별)>비유왕>곤기왕(=곤지)>말다왕(=동성왕)로 이어진다. 서기 반정전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천황은 처음 담로궁(淡路宮)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치아가 하나[一骨]로 된 것 같았다. 용모가 미려했다. 우물이 있어 서정(瑞井)이라고 했다. 그 물을 떠서 태자를 씻겼다. 그때 다지화(多遲花)가 우물 안에 있었다. 이로 인해 태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多遲花는 지금 호장화(虎杖花)다. 그래서 다지비서치별(多遲比瑞齒別)천황이라 불렀다』
이 천황의 기사에는 이 인물이 실사상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특이한 사실이 세 가지 들어 있고 그것은 이 천황의 한풍시호의 의미에 직결된다.
서기 신무전기 무오년 6월조에 보면 신무의 형 도반명이 담로도 유량항해전에서 전사하여 서지신(鋤持神)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천황은 처음 담로궁에서 태어났다」라고 한 것은 담로도에서 전사한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태어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미쯔.노.이[瑞井]라는 우물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부왕인 아라사등(=반정)이 전사한 구주의 미이[御井]와의 연결고리다. 미이[御井]는 미이[三井]로도 볼 수 있고 이것은 미쯔.노.이[三井]로도 읽을 수 있어 미쯔.노.이[瑞井]과 같아진다. 가야왕족 대반가(大伴家)의 인물이라는 암시다. 태어나는 것과 부왕이 전사한 지명을 관련지어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서기 계체기 22년 11월조에 보면 귀수대왕을 달리 꾸민 물부추록화대련이 축자의 어정군(御井郡)에서 아라사등을 달리 꾸민 반정과 싸워 이겨 반정을 베었다고 나온다. 이것은 서기 371년 3월의 사건을 달리 꾸며서 응신을 재등재한 계체기에 실어 놓은 것이다. 여기 반정이 전사한 御井郡이 지금의 후꾸오까 三井郡이다. 반정의 전사가 경행기에서는 일본무존이 웅습효수를 죽이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물을 떠서 태자를 씻겼다. 그때 다지화가 우물 안에 있었다. 이로 인해 태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다지화는 지금 호장화다. 그래서 다지비서치별천황이라 불렀다」라고 하는데 우물 속에 다지바나[多遲花]가 있어서 이름에 '다지히'를 넣어 다지히미즈하와께[多遲比瑞齒別]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다지(多遲)'는 열도음이나 반도음이나 같고 반도음 화(花)를 '히'로 바꾸어 '다지히'로 조어한 것이다.
이 다지히[多遲比]라는 이름은 하내국 다지히[丹比]로서 고사기 이중기에 태자가 난파에서 묵강중황자의 화공을 당하여 피하다가 다지히노[多遲比野]에서 잠을 자게 된다는 노래가 나오는데 잠을 잔다는 것이 곧 전사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초고대왕의 전사를 교묘히 은유한 것인데 '다지히'라는 것이 연결고리로서 초고대왕을 전사시킨 사람들이 바로 예진(=서치별), 예전(=응신) 형제들인 것이다. 이 역시 초고대왕의 전사와 관련지어 전사시킨 인물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암시를 보면 이 인물의 한풍시호 '反正'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反正이란 시호를 풀이하면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실사가 바로 보인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천황의 기사 속에 있는 내용 세 가지 담로궁(淡路宮), 서정(瑞井), 다지화(多遲花) 등을 "거꾸로 해석하면[反] 바로 볼 수 있다[正]"라는 뜻이다. 자신의 전사와 부왕의 전사, 초고대왕의 전사 등 "세 인물의 전사를 이 인물의 출생과 관련짓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 "구주 후나야마고분의 주인공" 참조
19세 윤공천황(雄朝津間 稚子宿니) 귀수대왕
한풍시호에서 '允'은 "진실하게/좇을/허락할/옳게 여길"이란 뜻이 있다. '恭'은 받든다는 뜻이다. 그러면 '윤공천황'은 "진실로 받들어야 할 천황"이란 의미가 된다. 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화풍시호 '朝津間'이 중요한 키워드다. 이 이름은 대화국 갈상군의 지명인데 성씨록에 아래와 같이 키워드로 들어 있다.
1) 秦忌寸; 秦始皇帝五世孫 弓月王 之後也(산성국제번) 2) 秦忌寸; 太秦公 宿니同祖 秦始皇帝之後也 功智王 弓月王 譽田天皇(諡應神)十四年來朝 上表更歸國 率百二十七縣伯姓歸化 幷獻金銀玉帛種種寶物等 天皇嘉之 賜大和朝津間掖上地居之焉... (중략)... (산성국제번) 3) 秦忌寸; 神饒速日命之後也(산성국천신) 4) 秦忌寸; 太秦公宿니同祖 融通王五世孫 丹照王之後也(좌경제번) 5) 秦忌寸; 太秦公宿니同祖 融通王四世孫 大藏秦公志勝之後也(좌경제번) 太秦公宿니; 出自秦始皇三世孫 孝武王也 男功滿王 大仲彦天皇(諡仲哀)八年來朝 男融通王 (一云 弓月王) 譽田天皇(諡應神)十四年 來率二十七縣百姓歸化 獻金銀玉帛等物 大초료천황 (諡仁德) 以百二十七縣 秦氏 分置諸郡...(중략)...(좌경제번)
고대에 '君'은 '王'이므로 궁월군을 궁월왕이라고 부르고 '태진공숙니'조를 보면 궁월왕을 융통왕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하다[秦]씨를 진시황의 후손으로 기록은 했으나 '3)진기촌'조를 보면 요속일의 후손이라 하고 있다. 요속일은 초고대왕이다. '1)진기촌'조를 보면 궁월왕이 진시황의 5세손이고 '태진공숙니'조에서 진시황의 손자 효무왕의 아들이 공만왕이고 이 인물이 융통왕의 부왕이므로 공만왕이 초고대왕인 것이다. 백제 초고대왕을 진시황의 증손자로 분식한 것이다. '2)진기촌'조의 공지왕도 공만왕과 동일인물이다. "공이 가득한 왕[功滿王]"은 보통 존칭이 아니다.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5)진기촌'조의 '대장진공지승'이란 이름에서 '大藏'은 백제왕을 의미하고 '秦公'은 성씨이며 이름은 '志勝'인데 대수로 보면 귀수대왕의 증손자 전지왕에 해당한다. 굳이 백제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신왕부터 대화왕조가 존속하는 동안은 열도가 백제령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4)진기촌'조에서 단조왕은 전지왕의 아들 구이신왕으로 보인다.
서기 응신기 14년 2월조의 궁월군 120현민 망명건은 실사상 서기 382년 말에 착수되었던 귀수대왕의 본주원정군을 분식한 것이다. 궁월군은 귀수대왕이며 서기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에서 日神인 천조대신 다음의 2인자 月神의 이칭 月弓尊의 한자순서만 바꾸어 지은 이름이다.
'2)진기촌'조에서 궁월군이 귀화하였을 때 대화국의 아사쯔마[朝津間]에 살게 했다 하였는데 이 인물이 윤공천황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기 위해 키워드 '朝津間'을 윤공의 화풍시호에 넣어둔 것이다. 그런데 '아사쯔마[朝津間]'라는 지명은 (열도어+반도어)로 조어하여 한자를 치환한 것으로서 쯔[津]는 노[之]와 같은 뜻이고 마[間]는 반도어로 읽어야 하는데 '사이/새 間'이다. 원래는 같은 음의 '새 鳥'를 한자만 바꾸어 알아보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복원하면 아사[朝]>'아침', 쯔[津]>의, (새 間)>(새 鳥)가 되어 "아침의 새">'아침새'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다시 아스까[飛鳥]>"아침이 밝아와 비상하는 새[飛鳥]"와 같은 뜻을 담고 있고 귀수대왕의 숙원인 열도병합이 이루어져 무령왕부터 시작되는 아스까시대가 열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귀수대왕>궁월군>윤공천황으로 꾸민 것이다.
※ "궁월군" 참조
20세 안강천황(穴穗)
서기 안강전기에 진사왕을 달리 꾸민 혈수황자가 침류왕을 달리 꾸민 목리경태자를 죽이는 사건이 나온다. 안강기 원년 2월조에는 침류왕을 달리 꾸민 대초향황자를 죽이기도 한다. 동일인물의 이름을 바꾸어 다른 스타일로 기술한 것이다. 백제왕권을 의인화한 대초향황자의 처 중체희를 데려다 비로 삼고 열도통치권을 의인화한 번사황녀를 응신을 달리 꾸민 대박뢰황자에게 주어버린다. 이것은 진사왕이 침류왕을 죽임으로써 백제와 왜가 분립하여 대화왕조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은유한 스토리다.
안강은 결국 아신왕을 달리 꾸민 미륜왕에게 7년 만에 죽는다. 이때가 서기에는 응신기 3년 시세조의 구원에서의 4차전역이고 삼국사기 진사기 8년조의 구원에서의 사냥 및 몰과 같은 내용이다.
한풍시호 '安康'에서 '安'은 아나[安]>아라가야, '康'은 '편안할'이므로 "아라가야를 편하게 해준 천황"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진사왕이 침류왕을 죽인 것이 결과적으로 가야의 대화왕조가 열린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화풍시호 아나호[穴穗]는 구멍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얼굴에 구멍이 난 곰보라는 의미다. 왕위계승서열에서 벗어난 인물이 이복형을 강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시신을 팔단을 내어 참혹하게 처리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밉다고 붙인 이름이다. 한자를 바꾸어 孔王이라고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孔王部首; 穴穗天皇(諡安康)之後也(하내국미정잡성)
혈수황자가 죽인 목리경태자는 윤공의 태자인데 모꾸리[木梨]는 모꾸라[木리]와 반도음/열도음이 사실상 같다. 阿羅斯等을 阿利斯登이라고도 하므로 '라'와 '리'는 같이 쓰인다. 모꾸라[木리]는 신공기에 등장하는 침류왕의 이칭 목라근자의 모꾸라[木羅]와 같고 枕流의 마꾸라[枕]와도 같은 것이다. 뜻은 전부 '나무토막'이고 음도 같은 키워드들이다. 리=(刀 세 자) ※ "아신왕의 역쿠데타" 참조
21세 웅략천황(大泊瀨幼武)
서기 숭신전기 천황 소개기사에 『...幼好雄略...』이라 하여 웅략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서기 신공전기 4월조에도 『...然暫假男貌 强起雄略...』라고 나오는데 9월조에 해산달이라고 나오니 4월이면 벌써 응신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웅략을 일으켰다(가졌다)"라는 것은 태중의 응신이 곧 웅략이라는 뜻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고사기 안강기에 대장곡왕이 시변인치왕을 사냥하자고 꾀어 살해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둘이 사냥을 하기 직전에 대장곡왕의 하인이 대장곡왕에게 「조심하라[應愼]」라고 충고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장곡왕이 응신천황과 동일인물임을 한자의 반도음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응신(應愼)>응신(應神)으로 같다. 하쯔세[長谷]와 하쯔세[泊瀨]는 같고 가야계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시변인치왕의 이름 이찌헤오시하[市邊忍齒]는 (열도어+반도어+열도어)로 조어된 이름이다. 이찌[市]>이찌[一], 헤[邊]>해[日]>왕[日], 오시[忍]는 오시[押]와 같이 위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첫째가는 왕이란 뜻이다. 위의 시변인치왕 살해기사는 근강전투를 극도로 압축하여 달리 꾸민 것이다. 이때 시변인치왕을 꾀는 인물로서 사사끼야마.노.기미[佐佐紀山君]의 선조 가라후꾸로[韓대]가 나오는데 성씨록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佐佐貴山公; 阿倍朝臣同祖(우경황별) 佐佐貴山君; 阿倍朝臣同祖 大彦命之後也(섭진국황별) 膳大伴部; 阿倍朝臣同祖 大彦命孫 磐鹿六雁命之後也(좌경황별)
사사끼[佐佐貴]는 사사끼[佐佐紀], 사사끼[狹狹城]와 같다. 대언명이 예진별명이며 이와가무쯔가리[磐鹿六雁]도 동일인물이다. 무쯔[六]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며 무쯔[牟都]와 같은 것이다. 가야군이 근강전투에서 귀수대왕을 전사시킨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사끼'도 근강전투에서의 수공을 상징하는 "물을 붓다"라는 뜻의 '소소기[注]'에서 따서 지은 성씨다. '(ㅅ+아래아)(ㅅ+아래아)기'에서 갈라졌기 때문이다.
고사기에는 대장곡왕이 시변인치왕을 죽인 후 그 자리에서 시신을 잘라 말구유[馬축]에 넣고 봉분 없이 땅에 묻어버렸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는 익사하여 시신을 수습 못했다는 것이 경행기에도 나오므로 같은 의미를 전혀 달리 꾸민 것이다. 봉분 없이 묻었다는 것은 능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 되고 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시신이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또 '말구유[馬축]'가 역시 '마굿간[廐戶]'에서 태어난 성덕태자와의 연결고리다. 성덕태자도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 "성덕태자" 참조
또 시변인치왕의 아들 둘이 '구스바강[玖須婆之河]'을 건너 도망하였다고 하는데 역시 '구스[貴須/久須]'계열 키워드로 알려주고 있다. 구스바[玖須婆]는 서기 숭신기 10년 9월조의 언국즙(=무내)과 식안언(=귀수대왕)의 근강전투를 달리 꾸민 기사에 등장하는 '구스바[樟葉]'와 같은 지명으로서 패전한 쪽이 귀수대왕의 백제군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22세 청녕천황(白髮武廣國押稚日本根子)
서기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에 등장하는 소잔명존이 출운에 가서 팔기대사를 처치하고 스가[淸地]에 가서 『내 마음이 淸淸하도다』라고 노래를 부른 인물로서 한풍시호에 키워드 '淸'을 넣어 지었다. 화풍시호의 '白髮'이란 키워드는 서기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 이설6에 『...이때 소잔명존(아라사등)은 나이가 들고 수염이 길었다...』라는 구절과, 신대기 하9단 이설4와 신무전기에 등장하는 염토노옹과의 연결고리다.
화풍시호의 '廣國'이란 키워드는 동성대왕과 연결되는 키워드로서 후손 중에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押'은 위력을 나타내고 '稚日本根子'는 아라사등을 등재한 개화천황의 화풍시호에도 들어 있어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화풍시호에 '廣'자가 들어 있는 천황은 전부 가야계다.
23세 현종천황(弘計)
서기 현종전기에 『안강천황 3년 10월에 천황의 부 시변압치왕 및 사인 좌백부중자가 가야노에서 웅략천황에게 살해당했다...』라고 나온다. 시변압치왕이 귀수대왕이고 '가야노[蚊屋野]'란 근강전투가 있었던 지명인데 근강은 원래 가야가 개척한 연고지다.
또 현종전기(청녕 2년 11월)에 파마국 적석군 축견둔창수 인해부조세목의 신축연회에서 시변압반황자의 아들 억계왕과 홍계왕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현종이 『...내 아들[子等], 아시히기[脚日木]가 이 가따야마[傍山]에서 숫사슴[무鹿]의 뿔[角]을 치켜들고 춤을 출 수 있다면 시장에서 直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맛있는 술과 향기로운 떡을 내리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아시히기>아시시기>아싯기>아식기는 '아직기'와 같다. '아시'와 '아지'는 각각 아침의 사국시대 고어형태인 '앗'과 '앚'에 명사형어미 '이'를 붙여 받침 없이 읽은 형태로서 같은 말이다. 아식기>아직기는 아신왕의 이칭이고 그 부왕인 현종은 침류왕인 것이다. '가따야마'란 가따야마[片山]와 같아 온전하지 않은 반쪽의 영토 즉 열도를 가리키고 "숫사슴의 뿔"은 열도통치권의 상징인 칠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칠지도를 들고 춤을 춘다는 것은 백제가 열도를 병합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최대의 키워드 '아침'" 참조
이어서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왜는 초초한 지하라[茅原], 아사지하라[淺茅原]의 弟日이 바로 나로다!』라고 불렀다. '지하라/아사지하라'는 열도를 의미하는데 아시하라[葦原]와 같은 말이다. 뜻은 아침땅> 새땅[新土], 새나라[新羅]다. 弟日이란 日이 王을 비유한 말이므로 "작은 왕"이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열도는 아름다운 새나라이고 그 새나라의 작은 왕이 바로 나로다"라는 뜻이다. 이때 "작은 왕"이란 현종의 부왕 시변압치왕의 이찌헤[市邊]>이찌[一]+헤[日]>이찌[一]+해[日]>"첫째가는 왕"에 상대되는 호칭인 것이다. 백제왕은 대왕이고 열도의 왜왕은 "작은 왕[弟日]"인 것이다.
이 노래를 듣고서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石上 후루[振]의 신온(神 )에서 本을 베고 末을 잘라 지은 市邊宮에서 천하를 다스렸던 天萬國萬押磐尊의 아들[御子]이 바로 나로다』라고 불렀다.
석상의 후루[振]는 초고대왕이 주제신으로 진좌한 석상신궁이 있는 지명이다. 온( )은 기둥[柱]을 뜻한다. 本을 베고 末을 잘라 그것으로 기둥을 하여 지은 시변궁은 백제왕성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시변압치왕의 궁이다. 천만국만압반존이 귀수대왕의 별칭이다. 오시와[押磐]는 오시하[押齒/忍齒]와 같다. 本은 나무의 윗부분 즉 무내숙니를 가리키고 末은 끝부분인 진사왕을 가리킨다. 가운데 남은 것이 침류왕인 것이다. 신온이란 神木을 의미하고 달리 표현하면 백제왕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귀수대왕의 세 아들 중에 정통왕위계승자는 침류왕이라는 뜻이다.
이 本/中/末은 형제서열을 의미하는데 인덕전기에 나오는 대화왕조의 왕배출순서를 비유한 노래에 본변, 말변과 유사한 비유법이다. 본변은 응신이고 말변은 예진별명가의 동성대왕을 가리키고 가운데는 진언의 진왕가인 것이다.
서기 현종기 3년 4월조에 (*1)福草部를 두었다고 나오는데 성씨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三枝部連; 額田部湯坐連同祖 天津彦根命十四世孫 達己呂命之後也 顯宗天皇御世 諸氏賜饗연 于時宮庭有三莖草獻之 因賜姓三枝部連(대화국천손)
여기서 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진 삼경초를 복초라 한 것이다. 천진언근명은 침류왕의 이칭이고 액전부도 침류왕을 조로 하는 성씨다.
額田部湯坐連; 天津彦根命子 明立天御影命之後也 允恭天皇御世 被遣薩摩國 平준人 復奏之日 獻御馬一匹 額有町形廻毛 天皇嘉之 賜姓額田部也(좌경천손)
명립천어영명은 "하늘같은 분의 어영을 밝게 세운 분"이란 뜻이고 天御影은 성덕태자의 초상을 가리킨다. 성덕태자의 어영을 그렸다고 알려진 백제 아좌태자는 아신왕이며 그 부왕인 천진언근명은 침류왕인 것이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윤공천황 때 사성한 누가다베[額田部]의 조가 아신왕으로 나온다. 아사[阿佐]>아사[朝]로서 아신왕의 이칭 '아지/아시'와 같이 아침이라는 뜻이다.
(*1) 『三枝部라고도 한다. '사끼구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여러 설(山百合, 朱草 등등)이 있어 알 수 없다...(중략)...성씨록 左京神別⌒大和神別의 三枝部連의 항에는 「현종천황이 諸氏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궁정에 난 세 줄기[三莖]의 풀을 꺾어 바쳤으므로 三枝部造의 성을 주었다」고 보인다. 서기도 성씨록도 이 성씨를 현종천황의 名代部로 보고 있는 듯하다. 또 현종記에 忍齒王의 치아는 「如三枝押齒坐也」라고 되어 있어 이것을 인치왕의 名代로 한다는 설도 있다...(중략)...'上宮記'에 의하면 성덕태자의 아이로 여덟[八兒]을 들고 최후로 「合七王也」라고 注記하고 있고, 수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해 法空은 다섯 번째의 삼지왕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이어지는 세 사람의 王子女(三兒)의 총칭이라고 했는데 黛弘道도 같은 설이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3/368p/보주8>』
현종은 침류왕이고 그 부왕인 압치왕은 성덕태자와 동일인물로서 백제 귀수대왕이다. 서기 현종전기(청녕 5년) 1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청녕천황이 붕한 후 억계왕과 천황이 위를 서로 양보했다. 오래도록 위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황의 누이 반풍청황녀(飯豊靑皇女)가 忍海角刺宮에서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다. 스스로 忍海飯豊靑尊이라 칭했다...(중략)...11월 반풍청존이 붕하였다. 갈성식구구능에 장사지냈다』
아라사등의 장녀 반장희를 달리 꾸며 침류왕을 등재한 중애천황의 비(=신공)로 하여 섭정을 하는 신공황후로 꾸몄는데 이번에는 같은 인물을 현종의 누나[姉]로 분식하여 잠시나마 섭정에 가까운 역할을 시킨 것이다. 飯은 稻飯命(=예진), 사飯大神(=응신)에도 들어 있는 가야계 키워드다. 豊은 가야가 개척한 豊國/豊城에서 딴 것이고 葛城>加羅城>加羅國이다
24세 인현천황(億計)
이 천황만 유일하게 오호시[大脚], 오호시[大爲] 등의 휘가 있다. 다른 천황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휘가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신무도 '彦火火出見'이라는 휘가 있다고 했으나 단순한 이칭이지 휘가 아니다. 신무에게 휘가 있다고 기록해둔 것은 인현천황에게만 휘가 있다는 것이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에 희석시키려고 해둔 말인 듯하다. 한풍시호 '仁賢'에서 '賢'은 세 가지 뜻이 있다. 有德, 善, 勝 등이다. 이 중에 '勝'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본다. '勝'자가 붙은 이칭이 또 있기 때문이다. 서기 신대기 상6단에 正哉吾勝勝速日天忍穗耳尊, 고사기 신대기에 正勝吾勝勝速日天之忍穗耳命이다. 여기서 '勝勝'은 존칭으로 보이고 아마 대륙경략시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불패를 자랑한다는 뜻으로 본다. 삼국사기 근초고기에는 이런 초고대왕의 기사가 2년에서 21년으로 건너뛰면서 18년 동안 기록이 없는 공백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공백이야말로 백제의 대륙경략사가 결락된 자리인 것이다.
신대기의 이칭에서 '速'은 본기와 신찬성씨록의 速古王/速古大王의 速이고 열도음이 '소꼬[速古]'로서 서기 신공기의 쇼오꼬[肖古], 고사기 응신기의 쇼오꼬[照古]와 같은 것이다. '日'은 역시 신대기에 나오는 日神과의 연결고리이고, '天'은 백제를 뜻하며 대국의 뜻이고 천강하는 천손(=니니끼/귀수태자)의 출신지를 말한다. '忍'은 위력을 나타내는 존칭이고 '穗'는 벼이삭을 뜻하니 백성이나 영토를 말한다. '귀 耳'자는 서기 인덕기의 百舌鳥가 사슴귀를 파먹는 설화와 연결시키기 위한 글자이기도 하고 반도음이 같은 貴를 뜻하기도 한다. '尊'과 '命'은 존칭이다.
한편으로는 '勝'의 뜻 중에 '낫다'는 뜻도 있어 仁賢이란 "王仁보다 낫다"라는 뜻도 된다. 그런데 왕인은 8세기초에 기·기저자들이 자기들의 시조인 귀수대왕을 전인적인 인격의 소유자로 추앙하기 위해 창작한 인물이므로 일본고대사에서 귀수대왕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초고대왕밖에 없는 것이다. '賢'의 뜻 중에 '善'을 취하여 聖數 '三'을 덧붙여 성씨까지 창씨했다.
三善宿니; 出自百濟國 速古大王也(우경제번)
화풍시호 '億計'란 말은 글자 그대로 '億年之大計'란 뜻으로 본다. 왕실의 시조이므로 한껏 올린 것이다. 신대기에 등장하는 국상입존의 '國常'과 같은 뜻이다. 國常立尊의 '도꼬시(나)에[常/長/永久]'는 "왕실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도꼬[床]와도 음이 같아 반석(磐石) 같은 상석(床石)과도 의미가 통한다. 암석은 고래로 십장생에도 들어있듯이 '영구',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국상입존이란 "나라를 반석 같이 단단히 세운 분"이라는 뜻으로서 다름 아닌 일본왕실의 시조 초고대왕인 것이다. 국상입존의 '立'은 초고대왕의 열도음 세우고[肖古]>세우고[建/立] 그대로인 것이다. 서기 신공기 49년 3월조의 『示長遠之不朽者』, 『千秋萬歲 無絶無窮』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
字가 島郞이라 했고 어릴 때 이름이 島稚子, 大石尊 등이 있는데 오호시[大石]는 오호시[大脚/大爲]와 같은 음인데 한자만 달리 하여 이 인물이 석상신궁과 관련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大爲는 큰 일을 하였다는 뜻이고 성씨록 '태진공숙니'조에 등장하는 이칭 功滿王과 같은 뜻이다. 오호시[大脚]는 오호아시[大脚]의 준말인데 이때 '아시'는 '아침'이라는 뜻으로 아스까[飛鳥]를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스까는 귀수대왕의 숙원인 열도병합이 이루어져 제후국의 아침이 밝아 새로 은유된 귀수대왕이 비상한다는 의미인데 거기에 '큰 大'자를 더 붙인 것이다.
島稚子는 성씨록에 '어릴 稚'를 '젖 乳'로 바꾸어 실어 놓았고 '섬[島/嶋]'과 관련된 島氏도 천조대신의 아들 정재오승승속일천압수이존의 후손으로 나온다.
物部首; 神饒速日命子 島乳命之後也(하내국천신) 島首; 正哉吾勝勝速日天押穗耳尊之後也(섭진국미정잡성) 천조대신, 정재오승승속일천압수이존, 요속일, 도유명, 도치자 등은 전부 동일인물의 이칭이다. 전부 초고대왕에게로 수렴되고 있다. 오시[忍]와 오시[押]는 같다. '도치자'란 이름은 그 유래가 신대기 상6단에 나온다.
『是後 伊장諾尊 神功旣畢 靈運當遷 是以 構幽宮於淡路之洲 寂然長隱者矣. 亦曰 伊장諾尊 功旣至矣 德亦大矣 於是 登天報命 仍留宅於日之少宮』 > 『이장낙존은 신으로서의 공을 마치고 영계로 옮기려고 했다. 그리고 담로주에 유궁을 짓고 조용히 오래도록 은거했다. 또는 이장낙존은 공을 이미 이루었고 덕이 또한 컸다. 그래서 하늘에 올라가 보명했다. 그리고는 해[日]의 소궁(少宮)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이 기사 속에 인대기의 실제인물과의 연결고리가 들어 있다. 담로주의 '섬 洲'는 '섬 島'와 같고 소궁의 '少'와 도치자의 '稚'는 둘 다 '어리다'는 뜻이므로 담로주의 洲와 소궁의 少를 따서 키워드로 삼아 (담로洲+少궁)>洲少>島稚로 만든 것이다. "해[日]의 소궁"이란 日神이 머무는 궁으로 이해된다. 즉 이장낙존이 천조대신과도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연결고리가 「日之少宮」인 것이다.
인현기 원년 정월조에 『황태자가 石上廣高宮에서 천황위에 올랐다』라고 했는데 역시 석상신궁과의 연결고리로서 신궁의 주제신과 동일인물이라는 암호문이다. 말을 바꾸면 이중천황과 이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는 뜻이다. '石上'이 '第一神'이라는 뜻이므로 "왕실의 제일신의 넓고 높은 궁"이란 뜻이다. 이름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인현기 11년 10월조에 『식생판 본능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이 식생판은 서기 이중기에 태자가 화공을 피하여 처음 도착한 지명이고 고사기 이중기에는 태자가 다지히노[多遲比野]에서 잠을 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같은 곳이며 잠을 잤다는 것이 전사한 것이다. 현대에도 죽음을 잠으로 흔히 표현한다. 또 경행기에서 일본무존의 혼령이 화한 백조가 마지막으로 날아 앉았던 하내국 舊市邑이며 인덕기 38년 7월조의 '도가노'이기도 한 곳이다. 구시읍은 지금은 후루이찌[古市]인데 석상신궁이 있는 후루[布留]와도 음이 같다. 이 천황이 이중천황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능이름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일본서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 신공기 46년인데 그 기사 속에 그 2년 전인 44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백제와 가야의 영토분쟁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고 열도와 관련하여 백제가 처음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시점이기도 한데 서기 364년이다. 또 초고대왕은 서기 375년 본주원정 도중에 전사하였으므로 열도와 관련하여 인연을 가진 것은 정확히 11년 간이다. 그런데 인현천황은 즉위 11년만에 붕하고 있으므로 이 시차까지도 짜 맞춘 것으로 보인다.
25세 무열천황(小泊瀨稚초료)
이 천황은 기원 이후 사상최대의 대제국을 이룬 백제 동성대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한풍시호 '武烈'에서 '武'는 '大'의 뜻이고 '烈'은 熱, 威, 光, 功, 猛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여러 가지 뜻을 두루 갖춘 영웅이었다. "불같이 뜨겁고 위엄이 있으며 크게 빛나는 공을 세운 천황"으로 풀 수 있다. 백제와 왜를 통합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열전기 11월조에 『希世之雄』이라고 칭하고 있다.
화풍시호에서 '小泊瀨'는 '大泊瀨', '泊瀨部'에 상대되어 작다는 뜻으로 쓴 이름이고 가야계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대박뢰는 웅략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고 박뢰부는 숭준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데 둘 다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다. 동성대왕은 가야왕족으로서 응신천황의 친형의 증손자였기 때문이다.
'稚초료'는 '사사끼[초료]'가 '새새끼'를 뜻하는데 그것도 "어린 새새끼"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인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대초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덕의 화풍시호 "큰 새새끼[大초료]"는 새로 은유된 귀수대왕의 "큰아들"이라는 뜻이지만 무열의 화풍시호 "어린 새새끼[稚초료]"는 무령왕부터 시작되는 아스까[飛鳥]시대의 직전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아침이 밝아와 비상하는 成鳥에 상대되어 아직 날지 못하는 새새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조시대'란 "제후국의 아침이 밝았다"는 뜻이므로 그 아침이 오기 직전의 새벽이라는 뜻이다. (비조>아침, 치초료>새벽)이라는 뜻이다. 열도를 백제령으로 병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까시대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가야왕족이었기 때문이다. '稚'는 仲子를 뜻하기도 하는데 동성대왕도 중자였다.
무령왕의 아스까시대를 만들어준 그 직전의 동성대왕인 것이다. 이때 백제의 판도는 대륙의 강남백제(越땅/적어도 廣西·廣東·湖南·貴州), 요서백제(河北·河南·山西·山東), 반도서남부(충청·전라·경남), 열도(九州·本州常陸까지)에 걸쳤으니 당대 아시아 최강국이었고 어쩌면 당시의 세계 최강국이었는지도 모른다.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에 서동설화의 키워드 이모[暑預]가 들어 있고 삼국사기저자들은 이런 일본서기를 다 해독하고서도 실사를 전면 절사하였고 그나마 일연은 이 키워드를 보고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과 연결하여 '마동[薯童]'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설화를 꾸며 유사에 실으면서 동성대왕을 무왕이라고 허기를 한 것이다.
고사기 開化記에 보면 동성대왕의 고조부인 아라사등이 오호마다[大오]왕으로 나오고 그 아들에 증조부인 예진별명이 서립왕(曙立王)이라고 나온다. 이 역시 '새벽 曙'에 '설 立'자이므로 아스까[飛鳥] 직전의 새벽[曙]을 은유하여 동성대왕을 배출한 가문임을 나타내고 대왕의 증조부임을 말하고 있는데 서기 이중기에 석상신궁으로 가서 태자에게 보고하는 서치별황자인 것이다.
26세 계체천황(男大迹)
이 천황의 기사에는 원년 정월조에, 황극기 3년 정월조에 기술된 서기 389년 아신·응신의 백제·왜분립 밀약과 응신이 왜왕이 된 사실이 은유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내마사수 황롱이 아신왕의 분식명이고 초대왜왕이었던 귀수대왕의 이름이 들어간 구스바궁[樟葉宮]이 왜왕궁의 별칭이다.
21년 6월조에는 서기 369년의 가야가 본토수복을 위해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열도에서 반도로 진입한 사건이 실려 있다. 근강 모야신이 아라사등의 이칭이다. 같은 기사에 축자국조 반정의 반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반정이 아라사등이며 대장군 물부추록화대련이 당시 귀수태자로서 서기 370∼371년의 구주평정건을 달리 꾸민 사건이다. 22년 11월조에 축자의 御井郡에서 반정과 싸워 이기고 반정을 베는데 실사는 서기 371년 3월의 구주 북부전투였고 아라사등이 전사한 사건이다.
6년 4월조부터 임나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서기 370년대 초반의 세또내해전투 관련 기사가 있고 신공기의 多沙城도 되풀이 기술되어 있다. 23년 4월조에는 임나왕 노고마다간기[己能末多 干岐]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인물이 阿利斯等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숭신기, 수인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10년 9월조에는 오경박사 단양이와 한고안무의 교대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것은 서기 385년의 사건이다. 단양이는 침류왕이고 한고안무는 아신왕이다.
한풍시호 '繼體'에서 '이을 繼', '근본 體'이므로 "근본을 이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응신이 아신과 백제·왜분립 밀약을 맺은 후 진사를 타도하고 아신을 옹립함으로써 백제의 정통왕권을 이어주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화풍시호 '男大迹'의 '男'은 웅략의 '雄'과 음과 뜻이 같고 '大迹'은 "큰 발자국">"큰 업적"이란 뜻으로 웅략의 '略'과도 통한다. 계체가 웅략과 동일인물이라는 뜻이다.
계체는 서기 4세기후반 5세기초반의 인물로서 응신을 재등재한 천황이다. 25년 12월조 계체의 장례기사 주의 내용이 응신천황의 실제 몰년기록이다. 계체기의 표면적인 몰년기록은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경주신라에 투항하는 서기 532년에 맞추어 놓았다. 응신이 가야왕족이기 때문인 듯하다.
27세 안한천황(廣國押武金日)
서기 안한기 원년 정월조에 『도읍을 大倭國의 勾金橋로 옮겼다』라고 했는데 기·기에서 '金日', '金村', '勾金' 등으로 이름에 '쇠 金'자가 따라다니는 유일한 인물이 가야의 大伴家의 장자 예진별명이다. 무열기, 계체기에도 등장하는 大伴金村連도 동일인물이다.
한풍시호 '安閑'에서 '아나[安]'는 아라가야를 의미하고 '한가할 閑'자는 뜻으로 "볼 일이 없다"라는 정도로 풀 수 있지만 파자해 보면 "문에 나무가 난 형국"이므로 "사람의 출입이 없는 폐문"이라는 뜻이다. 가야왕실은 동성대왕을 끝으로 왕통이 끊겨버린 것을 그대로 표현한 이름이다.
화풍시호 '광국압무금일'에서 '廣國'은 동성대왕이 대제국을 이룬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押'은 위력을 나타내며 '武'는 '大'의 뜻으로 장자집안임을 나타내고 '金日'은 '김씨왕'이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대제국을 이룩한 증손자(=동성대왕)을 배출한 가야의 장자집안 김씨왕"이라는 뜻이 된다.
원년 4월조에 膳臣大麻呂가 伊甚에 가서 구슬[珠]을 구하게 했는데 伊甚國造 등이 늦게 京에 이르러 기일을 넘겨도 보내오지 않자 대노하여 국조 등을 포박하고 문초했다고 나온다. 膳臣은 예진별명을 조로 하는 집안이고 대마려는 예진을 가리킨다. 마로[麻呂]는 마로[椀]과 같고 응신의 이칭에 마로꼬[椀子]가 있는데 형인 예진에게 '大'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고사기 신대기 천안하의 서약조에 천보비명의 자 건비량조명이 이지미[伊甚]국조라 했는데 아메.노.호히[天菩比]는 서기의 아메.노.호히[天穗日]와 같고 무내숙니다. 그 아들이름 건비량조명에서 '建'이 '大'의 뜻으로 장자를 뜻하고 히라도리[比良鳥]는 뜻이 새새끼>사사끼이므로 무내를 등재한 인덕의 오호사사끼[大초료]와 같은 뜻으로 아들이 아니라 무내와 동일인물인 것이다. 구슬[珠]>玉은 왕권을 상징하고 예진이 무내를 문초했다는 것은 귀수대왕 전사 후에 왜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가 가야계가 무내를 제거한 것을 달리 꾸민 것이다.
28세 선화천황(武小廣國押盾)
장자에 화염황자가 있고 중자에 상식엽황자가 있다. 상식엽황자는 단비공, 위나공의 조라 했고 완자라고 부른다. 마로꼬/마리꼬[椀子]는 응신의 별칭 게히[氣比/사飯]와 마찬가지로 '그릇'을 뜻하여 상식엽황자는 응신의 이칭이다. '上殖葉'은 "맨 위에 난 잎"이라는 뜻인데 대화왕조에서 맨 먼저 왕이 된 인물이라는 의미다.
多治眞人; 宣化天皇皇子 賀美惠波王之後也(우경황별) 爲名眞人; 宣化天皇皇子 火焰王之後也(우경황별) 三國眞人; 諡繼體皇子 椀子王之後也(우경황별)
선화천황의 아들 상식엽황자가 계체의 황자로도 나온다. 사실은 계체, 상식엽, 완자 등은 전부 응신의 이칭인 것이다. 화염왕은 응신의 형 예진이다. 고사기 수인기의 火中君, 서기 신대기의 火明命과도 동일인물이다. 다지[多治]는 응신의 이칭 다지[田道]와 같아 응신이다. 선화천황은 예진과 예전의 부왕인 아라사등이다.
화풍시호에서 '小廣國'은 아라사등이 개척한 소국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구주의 풍국, 신라국, 일향국, 웅습국, 위북국, 화국, 출운국, 안예국, 월국 등등이다. 가라국 자체도 원래 소국들의 연합체 성격이었던 것 같다.
한풍시호 '宣化'는 '開化'와 뜻이 같고 열도에 문명을 열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宣'자에는 "머리가 일찍 센"이란 뜻이 있다. 한어 "머리가 세다"라고 할 때 '세다'의 어원이 바로 이 '宣'자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어 음이 '쒠'에 가깝다. 이 글자는 아라사등을 등재한 청녕천황의 화풍시호 '백발무광국압치일본근자'의 '白髮'과도 연결고리다. 신대기 하9단 이설3과 신무전기의 염토노옹도 아라사등이다. '鹽土'도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29세 흠명천황(天國排開廣庭)
흠명은 동성대왕을 등재한 인물인데 한풍시호에서 '欽'은 불교를 장려한 왕답게 "종 절조 있게 칠"이라는 뜻이 있다. '明'은 아침을 뜻하는 아스까 직전의 새벽이라는 뜻이다. 서동설화는 동성대왕이 경주신라 소지왕의 도움을 받아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를 도입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무열전기에 보면 『...장성하여 죄인을 다스리기를 좋아하였다. 법과 영이 분명하였다. 해질 무렵까지 정사를 돌보고 유왕(幽枉)은 반드시 밝혀졌다...』라는 대목도 '欽'자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왕은 숨겨진 억울한 일을 말한다. 영특한 군주를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글자다.
화풍시호 '천국배개광정'에서 '天國'은 백제를 말한다. "천국의 문을 밀어 열어제치고 넓은 정원에 턱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호다. 열도의 가야왕족 출신으로서 백제왕권을 장악한 대왕다운 시호가 아닐 수 없다.
서기 흠명기에 불교관계기사가 많이 나오고 임나관계 기사가 많이 나오는 것도 불교도입, 장려와 동성대왕의 출신과 관련 있는 것이고 표면기사상으로 흠명기 23년조에 임나가 망했다는 기사도 나오는데 역시 동성대왕 사후 수십 년 내에 가야가 그 역사의 막을 내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30세 민달천황(渟中倉太敷珠)
민달은 귀수대왕을 등재한 인물인데 '敏'은 '민첩하다', '達', '聰' 등의 뜻이 있다. 達은 通, 到, 成就 등의 뜻이 있다. 이 역시 경행의 '景'자처럼 이어서 풀어보면 "총명하여 만사에 통달한 천황" 정도로 풀 수 있다. 왕인과 관련된 시호로 보인다. 왕인의 후손 중에는 文·武生의 성씨가 있을 정도다. 문무겸전한 전인적인 인격의 소유자로 묘사한 것이다.
화풍시호에서 '渟'은 비파호를 가리키고 '倉'은 음이 '구라'로서 王位를 의미하고 '太珠'는 큰 구슬[玉]이니 역시 '大王位'를 뜻하고 '敷'는 베풀다, 펴다, 깔다라는 뜻이니 "(자신은) 비파호에 잠들면서 왕조를 베푼[陳] 천황"이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
초고대왕은 물부가의 상징적인 시조로서 신대기에 日神으로 나오지만 실제 인대기의 비중은 귀수대왕과 응신천황에 집중되어 있다. 응신은 열도의 실질적인 초대왜왕이었고, 귀수대왕은 태자시절 칠지도에 나오듯이 백제왕실로서는 초대왜왕이었고 나중에 왕권을 장악한 물부왕가의 시조처럼 기록되어 있다. 서기상의 시호 貴首>"고귀하신[貴] 시조님[首]", 신공기의 이칭 구저>"영원한[久] 시조님[저]" 등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기사 중에는 아신과 응신의 연합군이 열도에서 반도로 진입하여 네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진사왕을 타도하고 아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왜의 對고구려 외교사로 절묘하게 꾸며져 기술되어 있다.
31세 용명천황(橘豊日)
用明은 "새벽을 이용했다"는 뜻이 되는데 침류왕의 후손인 무령왕이 열도가 백제의 제후국으로 편입된 아스까시대를 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明'은 새벽이란 뜻이고 가야왕족 동성대왕을 흠명, 서명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동성대왕을 침류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이 암살하고 백제왕실 기준으로 아침에 해당하는 아스까시대를 열었다는 뜻이다. 용명천황은 침류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화풍시호 귤풍일에서 다지바나[橘]가 열도통치권을 상징하는 칠지도를 비유한 것이고 '豊'은 침류왕이 야마구찌 '豊浦'에서 전사한 것과 관련되고 뜻도 '크다[大]'는 뜻이 있고 日은 물론 王이라는 뜻이다. "왜왕을 지내고 풍포에서 전사한 대왕"이란 뜻이 된다. 풍일은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천황의 화풍시호 天萬豊日과의 연결고리다. . 재위 중에 진사왕을 달리 꾸민 혈수부황자가 민달(=귀수대왕)의 비인 취옥희황후(=백제왕권)를 범하려고 하고 또 진사왕을 달리 꾸민 물부수옥대련이 침류왕을 달리 꾸민 삼륜군역을 죽이는 기사가 있고 이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는 것이 주에 혈수부황자가 직접 가서 쏘아 죽였다고 나오는데 숭준전기 7월조에 진사왕을 분식한 하내국사가 침류왕을 분식한 포조부만을 죽이는 장면과 같은 것이다. 응신을 달리 꾸민 적견수적도와 아신을 달리 꾸민 마자숙니도 등장한다.
반여의 지변쌍규궁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께헤[池邊]는 아신왕의 후손성씨다. 쯔끼[槻]도 아신왕이 정착한 지명 쯔끼모도[槻本]와의 연결고리다. 2년 4월조에 「天皇之瘡轉盛」이라 하여 침류가 비참하게 전사한 것을 달리 꾸민 것이다. 죽을 때 안부다수나가 「천황을 위해 출가하여 수도하고 장육의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짓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안부는 백제왕족의 성씨고 多須那는 귀수대왕이다. 鞍作村主 司馬達等(초고대왕)> 鞍部多須那(귀수대왕)> 鞍作鳥(=鞍作得志/무내)로 이어지는 계보다. 구라[鞍]는 구라[位]와 같이 왕위를 나타내는데 안작은 "왕위를 만든 집안"이라는 뜻이 되므로 역시 왕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32세 숭준천황(泊瀨部)
숭준은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다. 하쯔세[泊瀨]가 가야계를 가리키는 키워드다. 즉위전기에 아신(=마자숙니)과 응신(=적견수적도)의 연합군이 네 차례에 걸쳐 진사왕(=물부수옥)을 타도하는 기사가 실려 있고 진사왕이 勾原에서 전사하고 그 후손들이 열도(=葦原)로 대거 망명하는 내용도 있다. 또 진사군이 가야군과 협공하여 침류왕을 전사시키는 내용도 있다. 5년 10월조에는 진언이 응신의 후손을 밀어내고 왜왕이 된 내용도 은유되어 나온다. 일본서기 숭준전기의 '勾原'은 삼국사기 진사기의 '狗原'과 같으며 아시하라[葦原]는 뜻으로는 '아침땅/새땅'이고 열도를 가리킨다.
※ "아신왕의 역쿠데타" 참조 |
33세 추고천황(豊御食炊屋姬)
추고는 아라사등의 차녀 삼취옥희를 등재한 인물이다. 서기 신대기 하9단 이설2에 등장하는 木花開耶姬가 황손과 결혼하여 하룻밤만에 임신을 하고 "産屋에 불을 지르고 아들 셋을 낳았다[三炊屋姬]"라는 뜻으로 지어 붙인 이름인 것이다. 이때 결혼한 황손은 천강한 천손 니니끼[瓊瓊杵]인데 이 사건은 서기 371년 귀수태자의 구주평정을 달리 꾸민 것으로 천손은 백제태자였다. 목화개야희란 이름은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의 월신의 이칭 월야견존과의 연결고리다. '耶'는 '夜'를 가린 글자로서 "밤에 피는 꽃[花開夜]"이므로 "달밤에 본다[月夜見]"고 한 것이다. 일신 다음의 월신은 귀수대왕이다.
'豊'은 가야가 개척한 구주북부의 豊國(지금의 후꾸오까 일대)에서 딴 연결고리이고 미게[御食]는 미게[三木/三毛]와 같은 가야계를 가리키는 키워드다. 고사기 중애기에는 응신을 御食津大神이라고도 하는데 성씨록에는 御食持命으로 나오며 서기 신대기 상5단 이설11에 등장하는 위원중국의 保食神도 아라사등이다. 서기 신대기 하11단에는 언파불합존의 아들 중에 三毛入野命이 있는데 응신의 아우 진언이다.
신대기에서 천손과 짝이 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인대기에서도 귀수대왕을 등재한 천황의 황후로 꾸미고 있고 추고도 그 사례 중의 하나다. 추고는 민달의 황후였고 어릴 때 이름이 額田部황녀라 하였고 풍포궁에서 즉위하였다 했는데 豊浦에서 전사한 額田部의 조 침류왕과도 연결시키고 있다.
추고기는 기사 대부분이 성덕태자와 관련된 것이고 성덕은 귀수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창작한 인물이다. '推古'란 "옛날을 생각하다">'회고하다'라는 의미로 풀 수 있는데 결국 이 시호 자체도 왕실의 시조인 "귀수대왕을 추모한다"라는 뜻에서 지은 것이고 추고기는 귀수대왕을 모델로 성덕태자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작하여 그를 추고하는 형식으로 꾸민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5년 4월조에 백제 아좌태자가 나오는데 이 인물이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7세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말을 바꾸면 백제가 망한 후에 열도의 패권을 차지한 백제계가 초고대왕과 귀수대왕을 시조로 하여 황국사관을 확립한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짐작하건대 七末八初의 작품일 것이다. 아사[阿佐]태자는 아신왕의 이칭이고 성씨록에는 의미를 살리면서 한자만 바꾸어 실어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額田部湯坐連; 天津彦根命子 明立天御影命之後也...(중략)...(좌경천신)
천진언근명은 침류왕의 신대기에서의 이칭이고 그 아들 명립천어영명은 아신왕인데 '明立'은 "밝게 세우다"라는 뜻이고 '天御影'은 "하늘같은 분의 어영" 또는 "천손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덕태자의 초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덕태자[天]의 御影을 밝게 세운[明立] 분[命]"은 아좌태자일 수밖에 없고 아사[阿佐]는 '아직기/아화/아지사주/아지길사' 등 모든 이칭에 '아침'이란 뜻이 들어 있는 아신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자를 바꾸어도 음과 뜻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원래는 귀수대왕의 숙원인 열도병합을 아신왕의 후손인 무령왕이 이루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과 같은 의미를 달리 꾸민 기사가 28년 10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자갈을 회외능의 위에 모았다. 域外에 흙을 산처럼 쌓았다. 各氏에게 명하여 土山 위에 큰 기둥[大柱]을 세우게 했다. 그때 倭漢坂上直이 세운 기둥이 제일 높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름하여 大柱直이라 불렀다』
여기 왜한판상직이 바로 아신왕인 것이다. 서기 응신기 20년 9월조에 『倭漢直의 조 阿知使主와 그 아들 都加使主』라고 나온다. 倭漢氏의 조가 아신왕인 것이다. 판상은 응신기에서 아직기가 양마를 했다던 지명인데 성씨로도 쓰인다.
坂上大宿니; 出自後漢靈帝男 延王也(우경제번) 池邊直; 坂上大宿니同祖 阿智王之後也(화천국제번) 檜原宿니; 坂上大宿니同祖 都加直孫 賀提直之後也(우경제번)
후한 영제는 귀수대왕이고 연왕은 침류왕이며 판상대숙니와 아지왕은 아신왕이며 도가직은 도가사주 즉 전지왕이다.
추고기 29년 2월조에는 성덕태자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귀수대왕의 실제 전사일을 알려주기 위해 꾸민 설화로서 서기 384년(甲申年) 2월 5일 열도 近江에서 전사했다. 그래서 삼국사기 근구수기 몰년 2월조에 "일본열도의 미에[三重] 근방 근강에서 왕이 전사했다"라는 뜻이 담긴 「日有暈三重 宮中大樹自拔」이라는 암호문이 남아 있는 것이다.
34세 서명천황(息長足日廣額)
이 천황은 백제 동성대왕을 분식한 인물이다. 한풍시호 '서명'의 '舒'는 '펴다'는 뜻이 있으므로 "새벽 또는 아침을 열었다"는 뜻이 된다. 열도출신으로 백제왕이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열도를 백제령으로 병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무령왕에게 물려줌으로써 실질적으로 아스까시대를 연 군왕이라는 뜻이다.
화풍시호 '息長足日廣額'에서 오끼나가[息長]는 가야계 지명이고 신공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오끼나가[氣長]와 같은 말이며 가야계임을 나타내는 연결고리다. 아시히[足日]는 '아침해', '아침왕'이라는 뜻이다. 백제계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아침>아스까[飛鳥]시대를 연 군주로서 인정을 했다는 뜻이다.
'廣額'이란 이마가 넓다는 뜻이 되지만 그보다는 국토가 넓어졌다. 즉 국토를 넓힌 첫 왕이란 뜻이다. 백제와 왜를 처음으로 통합한 왕이라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백제왕실의 숙원인 백제·왜 통합을 이루어 물려줌으로써 가야왕족으로서 백제왕실에 대해 面目이 선다는 의미도 있을 것 같다.
서명기 11년부터 말년인 13년까지는 동성대왕의 익산천도와 관련한 기사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백제대궁, 백제대사, 백제천, 구중탑, 백제대빈 등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서동설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것이다.
※ "삼국사기에서 사라진 동성대왕 익산천도", "가야왕실의 마지막꽃 백제 동성대왕" 참조
35세 황극천황(天豊財重日足姬)
이 천황은 아라사등의 장녀 반장희를 등재한 인물이다. 중애의 비로 나왔던 신공을 재등재한 것이다. 3년 정월조에는 아신(=중신겸자)과 응신(=중대형)의 백제·왜분립 밀약을 맺는 상황이 기술되어 있고 진사왕의 왕위찬탈도 은유적으로 들어 있다. 침류왕의 이칭은 윤공기의 이칭 木梨輕皇子에서 木梨만 떼고 輕皇子로 부르고 있다.
화풍시호에서 '足姬'는 신공의 화풍시호 '氣長足姬'에도 들어 있어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연결고리다. '天豊財重日'은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의 화풍시호 '天萬豊日'과의 연결고리다. 서명천황의 황후인데 침류왕을 중애천황으로 등재했을 때는 황후로 등장시켰으나 여기서는 침류왕(=효덕)의 누나로 등장한다. 침류왕을 현종으로 등재했을 때도 누나[姉]로 등장시켜 잠시 섭정 같은 일을 보았다고 나온다.
4년 6월조에는 귀수대왕 전사 이후 무내와 가야계의 내분으로 가야계가 무내를 제거한 스토리와 그 후 침류왕의 왕권승계가 순조롭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오고 진사왕이 침류왕을 죽이고 '國記(=왜왕권)'를 중대형에게 바치는 사건도 실려 있다. 중대형은 후에 천지천황이 되는데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고 중대형이 국기를 접수한 것이 대화왕조를 열었다는 뜻이다. 원년 9월조에는 부왕인 아라사등의 이칭 오호마다[大派]황자가 등장할 정도다.
36세 효덕천황(天萬豊日)
이 천황은 침류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효덕기 대화 5년 3월조에는 침류왕(=蘇我倉山田)이 이모제 진사왕(=蘇我日向)과 가야군(태자, 대반박련, 삼국마려공, 수적신교 등)에게 협공 당하여 전사하는 상황이 실려 있다. 효덕기 백치 4년 5, 6월조에는 침류왕의 실제 전사시기가 성덕태자가 죽은 때를 알려주는 것과 비슷한 기법으로 꾸며져 실려 있다.
한풍시호 '孝德'은 "효를 크게 했다"라고 풀 수 있는데 '효'란 침류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에 의해 부왕인 귀수대왕의 숙원이었던 열도병합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또 "聖德에게 孝를 했다"라고도 풀 수 있을 것이다.
'家傳'에는 '輕萬德王'이라고 한다는데 전부 키워드로만 된 이칭이다. '輕'은 윤공기의 木梨輕太子에서 따고 '萬'은 숭준전기의 이칭 '捕鳥部萬'에서 따고 '德'은 효덕기 대화 5년 3월조의 '耳梨道德'에서 딴 것이다. 이 이름이 성씨록에는 萬德使主로 실려 있다.
화풍시호 '천만풍일'에서 '天'은 일반적으로 백제를 가리키며 '萬'은 이칭이고 '豊'은 침류왕의 전사지 풍포와의 연결고리이고 日은 王이므로 "豊浦에서 전사한 萬이라는 이칭을 가진 백제왕"이라는 뜻이 된다.
37세 제명천황(天豊財重日足姬)
효덕이 죽고 황극이 다시 천황이 되어 중조(重祚)한 경우다. 그래서 화풍시호가 황극과 같다.
원년 5월조에 『공중에 龍을 탄 자가 있었다. 모습이 唐人과 흡사하였다. 청유립을 쓰고 갈성령에서 담구산으로 달려 숨었다. 정오가 되자 住吉의 송령산에서 서쪽으로 달려갔다』라고 나오는데 이 문장은 제명천황이 가야인임을 알려주기 위해 실어 놓은 것이다.
가야왕족은 바다를 주름 잡은 해양국가답게 海神으로 불리고 주로 용, 뱀, 거북으로 상징하고 있으므로 용을 탔다는 것이 곧 이 인물이 가야왕족이라는 뜻이다. 서기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 이설6에 이장낙존이 물 속에서 몸을 씻고 낳은 와다쯔미[少童]가 해신인데 아즈미.노.무라지[阿曇連]가 제사지낸다 하였다.
安曇宿니; 海神綿積豊玉彦神子 穗高見命之後也(우경지기) 阿曇連; 綿積神命兒 穗高見命之後也(하내국지기)
와다쯔미[少童]와 와다쯔미[綿積]는 같고 아즈미[阿曇]와 아즈미[安曇]도 같다. 해신이라 부르고 있는데 신별분류에서 地祇라 하여 임나왕 아라사등의 세 아들 중 국신출신인 진언의 후손이다. 서기 신대기 하10단 이설3에는 아라사등의 장녀 豊玉姬(=신공)가 "큰 거북을 타고[馭大龜]" 등장하고 고사기 신무기에는 아라사등의 삼자 진언이 "거북 등을 타고[乘龜甲]" 나타나고 있고 일본서기에는 가야계를 뱀으로 상징한 경우가 10회 정도나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김수로왕도 거북알에서 나왔고 수로왕의 아들딸인 선견과 묘견이 구주 팔대시에 이주할 때도 거북을 타고 뱀을 앞세우고 상륙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으며 동성대왕도 용의 아들이라고 서동설화에 나온다. '龍'자가 들어간 왕이름도 있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가라히또[唐人]는 가라히또[加羅人/韓人]를 알아보기 어렵게 한자를 바꾼 것이다. 唐人과 흡사하다는 것은 加羅人이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靑油笠이란 '갓'인데 서기에서 갓과 관련된 인물은 단연 신공을 들 수 있다. 신공전기 3월조(17일) 『時飄風忽起 御笠墜風 故時人號其處曰御笠也』라고 나오는데 서기 371년 3월 17일 구주 八女市전투에서 신공이 전사한 상황이다. 제명이 신공과 동일인물이라는 연결고리다. 구주남단에는 가사사[笠狹/笠沙]라는 가야계 지명도 있고 笠臣이라는 가야계 성씨도 있다.
제명기 7년 7월조에 朝倉宮에서 죽는데 8월조에 『...朝倉山 위에 귀신이 있어 큰 갓[笠]을 쓰고 상의(喪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했다』라고도 나온다. 제명의 혼령이 갓을 쓰고 나타났다는 뜻이다. '喪儀'란 "장례의식'을 말한다. 조창궁도 응신을 재등재한 웅략의 궁이름이다.
갈성령의 '葛城'은 '加羅城'을 반도식으로 받침을 붙여 읽고 한자를 바꾼 것이며 加羅國에서 나온 말이다. 住吉大神은 신대기 상5단 이설6에서 소동과 같이 출생한 가야계의 이칭이다.
住吉朝臣; 上毛野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좌경황별)
다까하세[多奇波世]는 응신의 형 예진의 이칭이며 서기 이중전기에 응신의 이칭이 住吉仲황자로 나오는데 住吉氏 중에서 仲子란 뜻이다.
38세 천지천황(天命開別)
이 천황은 황극기에서 아신(=중신겸자)과 백제·왜분립 밀약을 맺고 진사왕을 타도하고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 나오다시피 阿花를 왕위에 오르게 해준 中大兄이다.
한풍시호 '天智'는 의미로 보면 "하늘의 뜻"이고 백제에 굴하지 않고 초고대왕, 귀수대왕을 차례로 전사시키고 열도 최초의 왕이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고 본 것이다. 화풍시호 '天命開別'은 "하늘의 명[天命]에 따라 백제와는 분립된[別] 열도의 대화왕조를 최초로 연[開] 천황"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이 천황도 시조라는 것을 알려주는 문구가 황극기 4년 6월조에 『中大兄使將軍巨勢德陀臣 以天地開闢 君臣有始....』라고 나오는데 「이천지개벽 군신유시」가 바로 그 구절이다. "천지개벽 이래로 왕[君]과 신하[臣]의 別이 처음으로 있었다"라는 것은 왕조가 처음으로 열렸다는 뜻이다. 그냥 겉보기 문구만 보면 일본서기에는 적어도 시조가 셋이나 된다. 始馭天下之天皇 신무, 御肇國天皇 숭신, 天地開闢君臣有始 천지천황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기저자들의 언어의 유희일 뿐 셋은 동일인물인 것이다. (신무=숭신=응신=웅략=계체=숭준=천지)인 것이다. 천지천황은 기묘하게도 7년 정월조에 『황태자가 천황에 즉위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극기 4년 6월조에 황극이 효덕에게 양위하면서 동시에 중대형이 황태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효덕 재위 10년을 거쳐 다시 제명천황 재위 7년 7월에 붕하자 位에 오르지 않고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7년만에 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6년 간은 분식된 천황도 없는 공위시대인 것이다. 7년 정월조 주에는 6년 3월에 즉위했다고도 한다. 짐작컨대 이것은 아마도 神武前史와 같이 놓고 신무와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천지 9년 6월조에도 묘한 기사가 있다. 『邑中獲龜 背書申字 上黃下玄 長六寸許』 > 『읍 중에서 거북을 잡았는데 등에 申자가 쓰여 있었다. 위는 노랗고 아래는 검었다. 길이는 여섯 치 정도였다』
거북의 등[背]은 딱딱한 껍질로서 '龜甲' 또는 '甲'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甲에 申자가 쓰여 있으므로 '甲申'이 된다. 그런데 갑신은 귀수대왕의 몰년인 서기 384년의 간지다.
또 천지현황 또는 천현지황이면 정상이므로 상현하황이면 정상이나 상황하현이므로 비정상이다. 노랗다는 것은 거북의 배색깔을 의미하고 검다는 것은 거북의 등색깔을 의미하는데 노란색이 위에 있고 검정색이 밑에 있다는 것은 거북이 뒤집혀 있다는 뜻이다. 거북은 뒤집히면 죽는다.
그런데 뒤집힌 거북의 등에 귀수대왕의 몰년간지 갑신이 적혀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서기 384년 갑신년에는 예진, 예전, 진언, 무내숙니 등 가야세가 귀수대왕의 12만 본주 원정군을 근강전투에서 대파하고 귀수대왕을 전사시켰는데 임신난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예언하듯이 암시해 놓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천지의 아들 중에 伊賀皇子가 있었는데 후에 大友皇子라 하였고 임신란에서 천무에게 패하여 천무 원년 7월에 『不破宮으로 향하였다. 대우황자의 머리를 군영에 바쳤다』라고 나온다. 천지는 응신이고 오호도모[大友]는 오호도모[大伴]와 같아 가야계로서 응신의 후손이다. 즉 서기 384년 갑신년에는 귀수대왕이 패하여 전사하고 그로 해서 응신이 대화왕조를 세웠지만 임신란에서는 귀수대왕의 후손이 응신의 후손을 이기고 열도의 패권을 차지한다는 뜻을 고도로 암시해 놓은 것이다.
39세 천무천황(天渟中原瀛眞人) 천무천황은 귀수대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이 인물은 일본서기상 가장 위대한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실의 시조인 귀수대왕을 등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大海人皇子가 나중에 천무천황이 되는데 황자 때의 이름과 천황 때의 이름이 전혀 다른 것 같은데 분석해 보면 꼭 같은 뜻을 갖고 있다.
海人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원주민 중에서 구주북부의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음이 '아마[海人]'다. 이것은 아마[天]와 음이 같으므로 大海人은 大天이 되고 天武의 武는 健과 같이 '大'와 같은 뜻으로 쓴다. 즉 大海人皇子는 大天皇子이고 天武天皇은 天大天皇이 되는 것이다. 글자 순서가 바뀌었지만 결국은 같은 이름이다.
이런 기술기법이 아니면 서기상 가장 위대한 천황으로 등재된 인물의 황자 때의 이름에 원주민을 가리키는 海人이란 말은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海人]라고 해서 구주 북부에 살던 원주민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구주 북부라면 전부 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이것도 아마[天]에서 건너간 사람들인 것이다.
화풍시호에서 '天渟中原'이란 "물 고일 정(渟)"자이지만 음이 '누'로서 '野'를 '노/누'로 읽을 때처럼 '노[之]'와 같은 뜻을 가지는데 소유격조사 '의'에 해당하는 말이다. 天은 주로 백제 또는 반도를 가리키고 中은 가운데, 原은 땅, 나라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가운뎃나라"가 되고 이는 단순히 봐도 대륙의 두 백제군, 백제, 열도를 놓고 볼 때 곧 백제다. 그게 아니라도 백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큰바다 영(瀛)'은 비파호를 가리키는데 비파호는 淡海라고도 한다.
眞人은 신찬성씨록에도 많이 나오는데 신선도에서 득도를 했을 때 부르는 '神仙'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풀어보면 "백제[天渟中原]출신으로서 비파호[瀛]에서 신선[眞人]이 된 천황"이라는 뜻이다. 이 眞人이란 말은 서기 추고기 21년 12월조에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성덕태자의 일화에도 나오는데, 추고기에서 성덕태자가 眞人이라고 부른 여인(旅人)의 능이 습능(褶陵)임을 알려주는 설화다.
화풍시호는 "귀수대왕이 근강전투에서 수공을 당하여 비파호로 떠내려가 신선이 되었다"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다.
천무 15년 7월에 연호를 바꾸는데 朱鳥라고 하여 경행기에서 白鳥, 신공기에서 羽白熊鷲, 성씨록에는 天日鷲, 봉황새[鸞] 등으로 은유된 귀수대왕답게 '새[鳥]'를 넣어 지었고 그것도 왕권을 상징하는 '붉을 朱'자를 붙였다. 이런 작명기법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궁의 이름도 아스까기요미하라[飛鳥淨御原]궁이라 하여 아스까[飛鳥]의 "나는 새[飛鳥]"가 천무 자신임을 은근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천무전기는 무령왕 이후 백제의 제후국이었던 열도에서 백제가 망한 이후 무주공산이 된 열도의 패권다툼인 임신란이 전개된 과정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최종 패권을 잡은 계파가 천무천황의 정비에서 난 초벽황자의 아들 문무천황이다.
천무천황은 천지천황의 同母弟라고 하는데 물론 꾸민 것이다. 천무는 천지의 딸 우노[토野]황녀를 정비로 들인다. 친조카를 정비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초벽황자가 난다.
천무 2년 3월조에 『備後國司가 구시[龜石]군에서 白雉를 잡아 바쳤다』라고 했다. 구시[貴石]는 구시[貴須/久志/久士]계열 이칭이다. 백치가 나타나는 것은 고대에 길조라고 했다.
40세 지통천황(高天原廣野姬)
추고천황을 재등재한 인물이다. 지통의 어릴 때 이름이 우노사라라[노野讚良]인데 신무의 부왕이름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에 우노[노자]가 들어 있다. 사라라[讚良]는 사라라[更羅/娑羅羅/佐良良/更荒]라고도 한다.
「更荒郡은 '和名抄'에 讚良(=佐良良)이라 하고 지통천황의 이름은 지통전기에 노野讚良황녀, 또는 혹본에 娑羅羅라고도 적고 있다...(중략)...천무기에 娑羅羅馬飼造, 토野馬飼造가 보인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3/333p/주16>」
宇努連; 新羅皇子 金庭興之後也(하내국미정잡성)
우노[宇努]=우노[노野/토野]이며 신라는 경주신라가 아니고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다. 이에 대해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1987년/405p>에는 아래와 같이 보고 있다.
『천무 2년 2월조에 있는 諸皇子女의 출생기사에서 정비를 세워 황후( 野讚良황녀/후에 지통천황으로 등재)로 했다 하고서 별도로 천황이 처음 額田姬王을 취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처음'이라고 특기한 것으로 보면 지통의 또 다른 이름이 額田姬王이란 표현이 된다. 그런데 민달의 황후였다가 뒤에 천황으로 등재된 추고의 어릴 때 이름이 額田部皇女로 되어 있어 이는 추고와 지통을 연결시켜 주고자 한 이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민달천황은 息長眞手王의 딸 '廣姬'를 황후로 삼았다 했는데 지통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廣野姬'와 같다. 식장진수왕은 아라사등의 이칭이고 히로.노.히메[廣姬]는 히로노히메[廣野姬]와 같은 이름이다. 오끼나가[息長]는 오끼나가[氣長]와 같은 가야계 키워드이고 마데[眞手]는 마다[末多/오/派/股/岐]와 같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다. '데'는 열도음으로 '대'와 구분이 되지 않고 '대'는 열도음으로 '다'로 읽히므로 '데'와 '다'는 같은 것이다. 마데[眞手]>'마다'다. 신공의 부왕이름도 氣長宿니라고 나온다.
서기 지통기 2년 5월조에 실려 있는 성덕태자의 御影기사가 풍토기에는 추고시의 스토리로 되어 있어 추고와 지통이 동일인물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서기 흠명기 23년 7월조에 지통천황이 가라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사가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新羅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 사신은 新羅가 任那를 멸했다는 것을 알고 國恩을 부끄럽게 여겨 돌아가지 않겠다고 청했다. 그래서 결국은 본토에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다. 나라백성과 같은 처우를 받았다. 지금 하내국 사라라[更荒]군의 우노[노자野]읍의 新羅人의 先이다』
지통천황의 이름이 신라인이 정착한 지명과 같다는 것은 지통천황이 新羅人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금(관)가야, 임나가라, 대가라, 아라가야는 전부 동체이며 아라가야(=阿尸良)가 新羅이므로 서기상의 신라는 경주신라가 아니고 加羅라는 사실이다. 그냥 기·기를 지으면서 가라의 여러 가지 이칭들을 이용하여 숱하게 적대적인 분쟁을 일으킨 것처럼 조작하여 분식을 해놓았을 뿐이다.
'사라라[紗羅羅/佐良良]'에서 阿羅國>阿羅羅라고도 하므로 娑羅羅>娑羅國, 사히시라기[沙比新羅]>金新羅>金加羅이고 한편 '사라'는 시라기[斯羅]에서 한자를 반도음으로 그냥 읽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사히[沙比]는 (ㅅ+아래아)이>소이>쇠[金]의 이두표기다. 한풍시호 '持統'은 "왕통을 잡았다"는 뜻이다. 왕통을 잡은 쪽은 물론 천무천황계다. 그 결과가 (천무천황>초벽황자존>문무천황)으로 이어지는 계보인 것이다. 문무천황은 귀수대왕의 장남 무내숙니계로 추정된다. 반도에서도 열도에서도 왕이 된 적 없는 무내숙니의 능이 열도 최대의 것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은 문무천황이 백제계 중에서도 무내계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열도 최대의 능은 인덕능인데 인덕은 무내숙니를 분식한 인물이다.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대화왕조 초대왕인 응신의 능보다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오사까府 사까이市 다이센町에 있는데 서기 인덕기 87년 10월조의 百舌鳥野陵이 바로 이것이다. 7세기말에 열도의 패권을 잡은 후손들이 무내숙니를 中始祖로 받든 것으로 판단된다. 문무 다음의 천황이 문무의 모후인 원명천황이고 시호 '元明'은 "왕실의 근본을 밝힌다"는 뜻이다. 원명세에 전국에 각 지방별로 일제히 '風土記'를 작성하라는 칙령을 내리는데 사실은 중앙에서 만든 것을 지방별로 배포하여 각종 신화·설화·전설을 심고 지명을 새로 지어 붙이고 하여 황국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한 사서들을 열도주민들에게 세뇌시켜 내려온 것이다.
원명 다음은 원정천황인데 시호 '元正'은 "근본을 바로 잡았다"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왕통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백제왕실이라도 계보가 달라졌다든가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다시피 고대 열도에는 천황은 없었다. 과거의 실사였던 가야사·백제사는 뒤로 감추고 황국사관에 입각하여 반도·열도 입장을 뒤집어 왜곡하거나 하여 사서를 쓰면서 공위시대를 메우기 위해 꾸며내거나 왕통에 혼란이 있었던 것을 은폐하기 위해 분식한 인물들인 것이다. 원명, 원정도 실재인물이 아니고 꾸며서 기록한 천황이다.
천지가 응신이고 천무가 귀수대왕을 꾸민 인물인데 이들이 친형제로 등장하고 천지의 딸 지통이 천무와 결혼하고 거기서 난 초벽황자가 천지의 딸이자 지통의 異母妹(=원명)와 결혼하여 문무와 원정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천무는 친조카딸과 결혼했고 그 아들 초벽황자는 이모와 결혼한 것이다. 父인 천무와 子인 초벽은 동서가 되는 셈이다. 이런 겉보기계보는 실사가 아니다.
재위순서는 (천지>천무>지통>문무>원명>원정)의 순이다. 문무천황 다음은 그 母后가 位를 잇고 그 다음은 문무의 妹가 位를 이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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