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기 기원전 스키타이인(Scythai, 그리스 Σκύθαι). )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스키타이, 사하, 선 모두 암 순록 투르크어 사가이온(Сагаион) 과 다루르어 수간(Sugan) 어원으로 부터 왔다.

Scythia, Saxa, and the Sǒn-Xian[Seon] (鮮: Soyon) all originate from the word for female reindeer—'Сагаион' in Turkish and 'Sugan' in Dagur.

스키타이 나 사이 XIYA 사람, 고대 페르시아 바다 호 해시의 키프로스의 키프로스면을 마시고, 키프로스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사카 (Saka, SECK 사람들)라고 ; 아슈쿠자이(Ashkuzai), 페르시아와 고대 인도라는 고대 아시리아는 "플러그"또는 "사카"라고, "한", 사카, Skuthoi 또는 Sacae 라는 고대 그리스, 중국 "역사 기록"이라고 기원전 3 세기, 중앙 아시아, 인도 - 유럽 언어 가족의 동부이란 유목민의 남부 러시아 초원에 위치 - 뾰족한 모자 키프로스 또는 Sakya이라고 사람들

유태인 아쉬케나지(Ashkenaz)는 스키타이와 어원이 같습니다. 유태인은 오히려 유태인이 스키타이인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독일에 대한 중세 히브리어 이름이 아쉬케나즈이고, 라인강 유태인 공동체 이름입니다.  거란 키타이(Khitai)도 동일 어원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사르마티아족에 흡수되었고 또 동쪽의 한 갈개는 파르티아와 대월지(大月地) 를 건설했습니다. 알란족 또는 라제스족으로 불렸고 로마 용병으로 활약했했고 코가서스 지역에 정착한 알란족의 후예로 오세트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면 파키스탄 및 아프카니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의 동쪽에 이란계 백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백인 투르크인의 원조다.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원 전 7~1세기 스키타이 세계의 문화

족/문화명

지역

정치, 문화

사르마타이

스키타이 동쪽에 위치

남우랄지방과 우랄강 동쪽 스탶지역

*알타이 산맥에서 카자흐스탄의 스탶국가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생활과 경제상황이 스키타이와 비슷하며 집을 갖지 않고 마차생활을 한다.

-스키타이를 공격하고 동쪽으로부터 내습한 阿蘭인에 의해 민족적 쇠망을 가져온다.

-무기, 마구, 의장이 스키타이와 유사

-전기 : 스키타이 색채가 엷어지면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식의 동물문, 괴수문과 함께 기하문이 유행, 말기에 가서는 그리스로마, 게르만과의 접촉을 통해 보석상감세공을 발달시킨다.   스키타이 동물의장과 오리엔트의 괴수의장이 결합되어 사르마타이 미술 특유의 동물투쟁문, 괴수문 등의 황금식판을 만들어낸다.

-중기 : 정치, 군사적으로 크게 연맹하여 중장비 기마전술을 채용하면서 번성.   후기에는 부족중의 하나인 아란이 사르마티아를 대표

塞, 烏孫

중앙아시아 동부

-二枝式말재갈, 새모양의 교구, 스키타이풍의 山羊形이나 態形의 飾具, 단추 등의 청동기, 청동제, 철제, 골제로 된 兩翼 내지 삼각鏃, 목제의 장족, 각종 珠類

-페르가나 지방 : 제사용으로 보이는 동물형 장식이 붙은 소반, 솥 등의 청동기 출토

-세가지 지방적 특색

*천산 : 남시베리아의 문화의 양향이 오래 지속

*페르가나 : 남방 아나우 문화와의 혼합

*시르 다리아 :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문화의 영향

⇒오손, 큐샨, 康居로 나뉨

오손은 유목적 전통을 잘 유지, 스키타이적 남시베리아와 관련 깊다.

쿠샨은 농경적 환경 속에서 발전

강거는 정주와 유목으로 나뉘어져 정주자는 아랄해 동안의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등과 혼합되며 한편, 색의 전통을 갖는 사람들은 중부 카자흐스탄에서 유목을 계속했다.

타가르문화

남시베리아 미누신스크분지

-카라수크 문화 계승 : 카라수크 문화에서 갖가지 동물표현이 이루어져, 타가르문화에 이르러 현저히 발달.

-흑해연안의 스키타이 문화와 가장 유사

분묘양식과 부장품을 가지고 3기로 나뉜다.

*제 2기 : 동물의장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산양, 사슴 등의 동물이 透彫나 입체상으로 표현되어 무기들을 장식한 예가 많다.   스키타이식 靑銅鍑 제작

*제 3기 : 철기제작 일반화.   스키타이 전기 이지식 말재갈 등 마구나 동물의장의 청동식판 등 스키타이풍 기마문화 번성

마이밀문화

 

알타이 산지의 타갈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

타갈 문화와 동류의 문화, 약간의 지방색을 띤다.

스키타이풍 유목기마민의 문화-청동제 단검, 장검, 圓鏡, 이지식말재갈, 동물의장

파지릭문화(전5~4세기)

알타이 산지

死者의 문신 : 공상적인 괴수문-스키타이 장례의식을 방영

묘실내에 대마의 열매를 넣은 청동향로 발견

애마의 부장-몽고마, 서방산의 밤색털인 아리아말

정령(전3~5세기)

바이칼호 남쪽에서 예니세이강 상류(북외몽고)

고분에서 스키타이식 삼익족, 삼각족, 鍑, 이지식말재갈, 칼, 스키타이풍의 동물의장 출토

중국문화의 영향-왕의 장신구, 전한의 화폐, 銅印

수원청동기문화(전5~전2세기)

남몽고의 오르도스

유목기마민족의 색채가 극히 강하게 나타남

-전5~전2세기:스키타이식 복, 아키타케스형 단검, 이지시 말재갈, 동복, 스키타이식 동물의장 식판, 칼, 투구, 갑옷, 馬面

-동물문은 스키타이 영향을 받은 흉노문화

타쉬투크문화(전1~5세기)

미누신스크 지방

타가르문화 후에 일어난 문화

타가르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하문화, 몽고의 흉노문화의 영향으로 성립

사자의 얼굴에서 떠내는 가면: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의 혼혈형을 보여주고 있다. 분묘 부장품에서 보면, 지배층은 유목기마민이고 피지배층은 농경민족.

전 1세기경의 한 대 유적이 발견-문화교류

일찍 청동가공 기술발달-동물상를 예술적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기나 장식품은 스키타이, 사르마타이 양식과 유사

스키타이 사하 ‘鮮’ 탐사기 - 주채혁(전 강원대 사학과)

조회 수 7285 추천 수 0 2010.08.23 19:28:21

스키타이 사하 ‘선(鮮)’ 탐사기
주채혁(전 강원대 사학과 교수)       

  울란바아타르 스텝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아주 잘 모를 수가 있다. 생태사나 생태현실에 관해서도 그렇고 역사나 격변중의 역사현실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눈뜬장님이라면 자기비하가 너무 심한 걸까? 갈라보고 쪼개보며 비교분석한 것을 맥을 짚어 정리해보지 않아서다.

  일례를 들면 울란바아타르시를 굽들아 흐르는 톨강이나 셀렝게강 및 오르홍강은 모두 바이칼 호수로 흘러들어 북류(北流)하는 북극해권이고, 오논강이나 헤르렝강처럼 칭기스칸의 태생지 부르칸(不咸)산과 접맥되는 강은 훌룬호와 부이르호를 거쳐 몽골의 기원지 에르구네강을 에둘러 아무르(일명 흑룡黑龍)강을 통해 동류하는 태평양권이다. 전자는 물이차서 거북이(龜)와 호랑이가 못 살고 거대 제국의 발전이 불가능했지만, 후자는 물이 그리 차지는 않아 거북이와 호랑이가 살 수 있으며 유목국가는 보통 목·농이 어우러져야 이루어지고 그래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기원지가 모두 다 훌룬부이르 몽골스텝·눈(嫩)강평원임은 북방민족사학계에서 공인된 지가 이미 오래다.


  곰녀(熊女)와 호녀(虎女)의 사랑싸움얘기로 점철되는 「단군(檀君)신화」의 태반도 물론 여기다. 조선(朝鮮)은 애초에 중국인이 한자로 그렇게 적었으니 중국발음으로 읽어 ‘아침의 나라’(朝Zhao國)가 아니고 ‘차아탕’(朝Chao族: 순록치기)의 나라임이 밝혀진 사실은,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인 금세기 일대의 사건일 수 있다. 「조선(朝鮮) 차아복‘누우델친’(순록유목민|馴鹿‘遊牧民’: Chaatang) 기원설」이기 때문이다. 정녕 몽·한은 그 창업 주도집단이 ‘누우델친’(Нүүдэлчин: Pastoral nomad: 유목민)기원이어서 우선 그 시원 생업태반이 일가일 수 있다. 물론 이론(異論)이 제기돼 치열한 과학적인 논증을 둔 진지한 토론이 많을수록 좋다. 
  우리가 차아탕 누우델친(순록치기 유목민)의 본향이라 할 레나강 유역 사하(새|塞: 야쿠츠크)를 본격적으로 탐사한 것은 2006년 6월 26일~7월 1일에 걸친 5일간이다. 2000년 5월경에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보르지긴. 쇼보 교수(몽골사)에게 레나강~예니세이강 일대의 순록 주식 이끼밭(鮮)에 관해 정보를 얻고 2004년 8월 초순에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과 조용헌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부부가 동참했던 사하 답사를 했지만 여기서 순록치기와 그 드넓은 이끼밭(蘚: Niokq의 鮮: Sopka)을 직접 만나고 달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영하 72도까지 내려가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진 사하의 오이미아콘 언저리에 위치한 한디가 압끼다 수림 툰드라 순록 여름유목지대로 답사를 떠나면서 필자는 『순록치기가 본 조선. 고구려. 몽골』[2008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의 초고를 들고 갔다. 2006년 6월 21일에는 이에 관해 야쿠츠크 국영TV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황금순록.jpg

[사진 1] 울야프 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 마두황금순록‘뿔’탈[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탐사단은 필자(몽골유목사학), 김천호 교수(식생활문화학), 최준 박사(민속사학), 반기동 현지 기독교 선교사(북방몽골로이드 역사 연구생), 조영광 교수(중국인| 식생활문화학)와 삐까 에벤족 여대생 및 총을 멘 50세 전후의 길잡이 사냥꾼이었다. 한여름에 툰드라로 드는 산야에는 순록의 주식인 눈빛 흰 이끼(蘚)가 지천으로 널려 있기 마련이다. 며칠을 달려도 가없이 펼쳐지는 이러한 순록의 목초지(鮮)는 흰 이끼가 툰드라의 흰 눈 속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이어진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입에서 “조선은 순록유목민의 나라!”라라는 탄성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장관이고 알려지지 않은 무진장한 비경이다. 그 응달에 이끼가 나는 밑밑한 산등성이의 선(鮮)들이 겹겹이 좍좍 거대한 선(線)을 그리며 뻗어나간 웅장한 광경을 감상하며 “아, 차아탕의 후예인 우리에게 선의 예술이 이래서 생겨났구나!” 하고 감탄했다. 저습지대 순록 목초와 더불어 자라는 낙엽송이 있고 앙증스럽게 작지만 버드나무와 진달래도 있다. 우리와 역사적인 인연이 무던히도 끈질긴 수목들인가 보다. 


  물레질해 실을 자아내며 읊조리던 우리네 할머니의 고저굴곡이 없이 펑퍼짐한 노랫가락이 꼭 이곳의 그것을 빼닮았다. 1993년 8월초에 훕스굴 에린칭룸베 설산(雪山) 차아탕 유목지 곁을 지나며 이 후미진 이국땅에서 우리말을 쓰는 이는 필자뿐이어서 혼자 우리 타령 비슷한 가락을 흥얼대며 외로움과 두려움을 달랠 적에, 올 초에 타계한 몽골샤먼 연구자 오. 푸렙 교수가 “당신의 그 가락이 꼭 설산 위의 차아탕(순록치기)의 그것을 닮았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순록을 정식으로 만나「조선 순록유목민기원설」을 제기하고 나온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99년 8월 11일 훌룬부이르맹 오룬춘기 박물관에서였고 그 가락을 다시 상기한 것은 또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 6월 하순에 사하 에벤(鮮=小山: Sopka)족 할머니 노래를 듣고서였다. 15년만의 자각인 셈이다. 산악 밀림지대(大山: Gora)와 너무 다른 무한히 평평한 대지생태를 닮아나는 소리가락일까. 개인날 아침이면 날이 가물려면 운다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SBS와 KBS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팀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순록치기 유목 핵심지역 관계 내용들만 찍어내는 탐사로정으로는 이러한 감격 속에서 순록치기 생태현장을 몸소 직접 체험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고 봉고차에 배낭과 함께 실려, 금광 채굴을 위해 근래에 새로 뚫은 아슬아슬한 험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순록유목 중심지대.jpg

[지도 1] 북동아시아 순록유목 중심지대

   목적지인 한디가 압기다 여름 순록유목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또 약 20Km를 순록을 타고 더 들어가야 한다. 말은 등에 안장을 놓고 타지만 순록(Chaabog: Цаа буга)은 목과 어깨부위에 안장을 얹고 탄다. 게다가 순록 목초지에는 이끼와 풀뿌리가 흙에 뒤엉켜 생겨난 당라순(Danglasun)이라는 늪지대가 있다. 당라순은 툰드라의 빙수 늪에 생긴 작은 디딤돌 같은 것이어서 잘못 디디면 얼음물에 빠지기 일쑤다. 이런 풍토에 적응한 순록의 발가락은 당라순을 움켜쥐고 걷게 진화돼 왔다. 고도의 균형 감각이 없으면 순록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사냥해먹고 살아낼 도리가 없다. 우리 무당이 작두를 타고 걷는 기의 집중과 균형미는 이에서 비롯된 걸까? 여기는 너무 추어서 양이 못살고 살아 따라다니는 음식인 양이 없는 데서는 몽골경기병이 작전을 할 수 없다. 물론 스텝의 타르박(乾獺)굴에 발만 빠져도 치명상을 입는 몽골말이 순록목초지를 내달릴 수가 없기도 하다.
  도중에 물을 마시면 긴장이 풀려 중도에 낙오한다고 현지 가이드가 일러줘서 꼬박 5시간 반을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며 걷고 타고, 그 길 아닌 길인 순록목초지를 소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며 또 걸었다. 노인대원들은 너무 자주 떨어져서 순록을 못 타게 하고 젊은이들만 타고 걸었다. 병원이 있을 리 없는 현지에서의 낙상이 우려돼서다. 목이 타고 순록목초지가 누런 황색으로 뿌옇게 눈에 들어왔다.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가며 순록을 타고 온 젊은이들은 그날 밤 내내 허리가 아파서 신음을 해야 했다.

  삐까는, 사회주의 집단목장화로 이동성 본질이 거세된 순록유목업이 어렵게 되어 백수로 헤매던 아버지가 병들어 죽고 근근이 애들을 돌보며 막일을 해오던 어머니도 병이 들어 입원했으나 입원비가 없어 나앉는 판에 본인도 대학을 중퇴하고 미용사 노릇을 시간제로 하던 터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시에선 그토록 풀이 죽어있던 에벤족 처녀였다. 그런데 자기 생업 생태태반인 수림툰드라 순록치기 여름유목지에 돌아오자마자 삐까가, 돌연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야생마가 되어 나는 듯 산야를 치달렸다. 3살적에 이곳을 떠났단다. 그런데도 생태태반이란 이런 마술적인 세계인가보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처녀가 되면서 광대뼈가 솟아 지금은 창피하게 느낀단다. 
   수림툰드라 끄라이(邊地)의 새벽은 오들오들 떨렸다. 화덕의 불이 꺼지니 온통 소동이 일어났다. 가이드가 군불을 지피고서야 다시 잠들이 들었다. 화덕 곁에서 땅바닥에 낙엽송 가지를 깔고 그 위에 곰이나 순록의 모피(Fur)를 겹쳐 얹고 누어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담요를 몇 겹 겹쳐 깔아도 땅바닥의 한기(寒氣)가 차단되지 않아서 자연섭리의 오묘함을 새삼 실감했다. 모깃불도 효과가 있기는 했으나 악머구리 끓듯 윙윙대며 떼로 달려드는 모기를 막을 방도는 모기장을 치는 길밖엔 없었다. 순록의 천적이 모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늘한 바람이 스치기만 하면 그 지겨운 모기떼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최저온도가 영하 40~45도까지 내려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못산다는 대흥안령 북부의 최고 혹한지대인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의 껀허(根河)일대가 순록유목제국의 중심보루([槁離國])가 됐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비상식량으로 가지고간 누룽지와 볶은 콩이 현지음식에 비위가 상해 뒤집힌 속을 달래주고 허기를 채워주었다. 이번 학기에 몽골제국시대사 박사학위논문 2편을 심사해 통과시키고 온 터라 피로가 계속 쌓여온 데다가 일교차가 수십~100도까지 나서 감기를 달고 다니고 목가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순록을 잡아 요리하고 가죽을 손질하는 법이나 순록치기의 세수법이며 유제품을 만들어 보관하는 법을 유심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양치기들의 그것과 거의 상통했다. 순록 도살과정에서 모기가 순록 가죽을 뚫고 몸속에 유충을 심어 새끼손가락만 하게 자라고 있는 걸 발견하고 이지대 생존실태의 엄혹함을 재삼 실감키도 했다.
  순록치기의 문화를 양치기가 계승하고 상호소통하며 살아왔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울야프 고분 출토 스키타이 유물인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품 마두황금순록‘뿔’탈 유물을 상기케 된다. 말에는 물론 뿔이 없다. 수림툰드라의 기(騎)순록 순록유목민의 계승자가 스텝의 기마 양유목민임을 보여준다. 오가는 길에 수림툰드라지대의 샘 파기도 관찰했다. 장작더미를 언 땅위에 쌓아놓고 불을 오래 지피면 얼음이 녹아 땅이 꺼져 웅덩이가 생기고 물이 고인다. 그걸 소와 순록이나 곰과 늑대들이 마시고 산다. 이 지대의 현행 순록유목 60~70%가 자본가가 시장을 겨냥해 투자해 경영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순록치기 양식은 점점 급속히 사라져가는 중이라는 정보도 확보했다.

쿠마河 부근.jpg

[사진 2]. 鮮(Сопка: 小山); 대흥안령 북부 헤이룽장성 쿠마하(河) 부근 소재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길 없는 길을 오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비가 와서 기나긴 샛강물이 불어 차가 못 건너갈 수 있다는 바람에 예약한 비행기 시간에 못 갈 형편이 될 뻔도 했다. 특별히 총을 멘 가이드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길을 찾아 홀로 떠난 터에 다시 귀로마저 잃고 헤매는 100분여 시간동안을 선(鮮)의 당라순 습지 위에 앉아 기다리는 그 공포의 순간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다. 굶주린 늑대 떼와 곰의 기습을 받는 날엔 도무지 대책이 없는 상황이어서 벌벌 떨며 싸늘한 보슬비가 뿌리는 가운데도 배고프고 졸려서 감겨오는 눈을 서로 살을 꼬집어 억지로 띄우며 “예서 이렇게 졸면 이대로 죽는다!”고 계속 각성시켜주면서, 가슴 졸이던 수림툰드라 순록유목지대 대탈출 추억이다.
  여기, 이 아까운 지면을 사하 순록목초지 탐사기록으로 이렇게 채우는 건, 특히 북아시아 몽골로이드 유목태반사에서의 그 압도적인 비중 점유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관한 한 전문가나 비전문가를 불문하고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려 함에서다. 2001년 8월초에 처음으로 장대한 타이가인 동·서 사얀(鮮: Sayan)산맥 중의 투바에 가서 투바대학교 사학과의 스키타이사 전공자 헤르테크 여교수를 만났더니 놀랍게도 스키타이(Scythia)도 사하(Saxa)도 소욘(鮮: Soyon)도 모두 젖을 주는 암순록 수간(Sugan)에서 나온 이름이란다.

  모음과 모음사이의 'g'가 탈락되는 북방몽골로이드 언어의 관행에 따라 선(鮮: Son)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흑해일대에서 우랄-알타이 지역으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원주민들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유목사를 공부해옵네 하던 필자의 무지가 너무나 부끄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문제는 그 선이 순록목초지(Ewen: 鮮)이고 선은 바로 몽골과 한국의 선조인 고조선(古‘朝鮮’)·선비(鮮卑)의 그 선(鮮)이라는 점이다. 몽골족의 기원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에서는 아직도 Korean을 선어(鮮語)로 말하고 선문(鮮文)을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한다. 그 몽골본향엔 조선(朝鮮)도 한(韓)도 없다. 몽·한이 모두 선족(鮮族)-‘순록치기’의 후예인 동족 ‘선’겨레라는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00년 전부터 15,000년간 몽골고원은 빙하기로 동토(Tundra)지대여서 이곳에서 사람을 먹여 살릴 식량자원은 순록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순록시대’라 할 장대한 생태 생업사 배경이 있었음을 각별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순록시대의 토대 위에 그 후 ‘순록유목의 창세기’가 중동부 시베리아 북극해권에서 쓰였음을 전제로 하고서야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시원사적 거대토대를 복원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런 거대하고 장구한 한랭 고원 저습지대 순록유목태반사를 거세시킨 「몽골국사」의 비극은, 칭기스칸 몽골세계제국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사안(史眼)으로 들여다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한랭 고원 건조지대 스텝 기마(騎馬) 양(羊)유목 기원의 칭기스칸 ‘몽골 기마양유목제국사’가 특히 몽골 사회주의체제 와해 이후부터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부각되면서 그 위대하고 장엄한 뿌리인 북방 몽골로이드의  ‘순록유목제국사’가 「몽골국사」에서 아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몽골국사 복원사상의 가장 치명적인 비극이라고 하겠다.” 


  이런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태반으로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많든 적든 이러저러한 계승관계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몽골족이 직접적으로 기마 양유목을 배운 것은 돌궐 지배 하나 또는 영향권 안에 들어서이니, 돌궐의 서진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통해서건 그 유산을 물려받아서건 위구르한(回鶻汗)국이 멸망한 840년 이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훌룬부이르 몽골 수림툰드라지대에서 본격적으로 몽골스텝으로 진입하면서 양유목을 배웠고 양유목을 발전시키면서 비로소 말을 타고 양을 몰고 활을 쏘게 돼 기마사술(騎馬射術)이라는, 당말·오대·송초 변혁기 이래의 최첨단 제철기술과 결합된 유목무력을 갖추게 돼서 뒷날 몽골 유목세계제국을 창업할 토대를 마련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혼|Xонь(羊) 이라는 몽골어가 실은 돌궐어임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는, 돌궐과의 접촉이 있기 이전의 핵심 순수몽골인인 'Nirun Mogol'인은 양을 몰랐거나 양치기(牧羊)가 적어도 주된 목축업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양치기의 보조수단으로 발달한 기마사술이라는 최첨단 유목무력도 보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5년 7월 2일 울란바타르 호텔 로비에서 한껏 들뜬 억양으로 “주교수, 내가 뭔가 보여줄 거야!”라고 외친 이가 있었다. 유언이 될 이 말을 남긴 이는, 1950년대 중반에 씨마늘을 걸머지고 충남 서산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던 촌티 나게 검게 탄 당시의 시골소년 한국무가(巫歌)연구자 김태곤 교수였다. 1996년 1월 25일에 나는 서울의대 병원 영안실에서 김선배를 마지막 보게 됐다. 영하 4~50도를 오르내리는 사하를 한겨울에 적응과정도 없이 예순을 코앞에 둔 나이로 네 번이나 넘나들다가 입원중에 기도(氣道) 협착으로 돌연사한 터였다.

  필자와는, 김선배가 당시에 찬반론의 극과 극을 오가던 이 풋내기 연구자의 처용가의「처용(處容)은 거북이」(왕팔단|王八蛋: 뱀에게 마누라 뺏긴 웅구|雄龜놈; 현무신주|玄武神主)라는 논문을 과감히 『한국민속학』(6, 한국민속학회 1973)에 처음 게재케 해준 심정의 인연이 있다.

 너무 추어서 사하엔 개구리(Мэлхий)는 살고 거북이(Яст Мэлхий)는 못살지만, 아둔하고 게으른 필자는 두 번째 현지탐사를 하고 이제야 김태곤 선배가 왜 사하-순록유목 기원지 선(鮮)에 그토록 한사코 몰입했었는지를, 북방몽골로이드의 유목본질은 농경정착문화와는 달리 이끼(蘚)나 양초(羊草)와 같은 ‘유목목초’를 따라 끈질기게 시공을 옮겨 다니면서만 읽어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새삼 깨우치고 있다.

석가족의 나라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 8월호), pp.12-19에 게재된 것이다.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1)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2)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으로 연상하기 쉽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3) 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그러나 그 뒤 빈센트 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5)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6)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7)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8)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9)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0)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1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12)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13)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14)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15)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16)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17)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18)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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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사카 번역

1.명칭,언어, 역사적 배경

사카(Sakas)는 (고대 이란어의 영어 형태로 복수 남성명사, 고대 그리스어Σάκαι, Sakai; 사스크리트어 Śaka)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중기 페르시아 시대까지 중국 신장에서 부터 동유럽에 걸펴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평지에 이주하여 살았다.  중기 페르시아 때 투르크 이동으로 투르크인으로 대치되거나 투르크에 흡수되었다.
 * 투르크는 돌궐(突厥)이다.

아키메니드 제국 때 사카 영역 대부분은 페르시아의 관할영에 있었고 사카(Saka)라 불렸고 고대 이란 다른 지역에도 거주했다.  고대 그리이스인은 사카를 스키타이(Scythians)라고 불렀지만 페르시아어로 사카이(Sakai)로 인식했다.
사카이는 모든 스키타이인을 의미하고 또한 중앙 아시아와 극동의 종족까지 의미했다.

기원후 300년 전, 중기 페르시아 시작 전에  이들은 후에 카작스탄(Kazkhstan), 우즈벡키스탄(Ozbekistan), 타직스탄(Tajikistan),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 인도와 이란 지역, 알타이 산맥,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신장성
에 살았다.  이 때문에 로마는 Saceans (Sacae) 과 Scyths (Scythae) 모두 인식을 하였다.
   스키타이인는 경계 지역에서 중국어로 사이(Sai: , Old Sinitic*sək)로 불러졌고 서쪽 경계에서는 중동 지역에 들어온 첫 이란인 이었다. 아시리아 시대 에사하돈 기록에 사카인들에 대해서 아쉬쿠자(Ashkuza) 또는 이쉬후자(Ishhuza)로 불렸다.

허그 윈클러(Hugo Winckler)는 심한 의문이 들지 않게 스키타이와 정체성을 연관시킨 첫 사람이다.   고대 시메리안(Cimmerians)이라 알려진 기미라이(Gimirrai)와 관련되었다. 이 스키다이인은 주로 우라투(Urartu) 왕국에 정착하는 관심이 있었고 후에 아르메니아(Armenia)가 되었다. 유티(Uti), 사쿠센(Shacusen)은 그 이름을 반영한다.   고대 히브루 텍스트에 아쉬쿠즈(Ashkuz)는 기미리(Gimirri; Gorner)부터 파생된 종족으로 여겼다.  

스키타이는 키에프 남쪽 우크라이나(Ukraine)와 트레이스(Thrace),마케도니아(Macedon)로 진출했다. 구별된 명칭이 이점을 줄 정도로 충분히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키메니드(Acheamenid)는 그들을 위한 관할 명을 스쿠드라(Skudra)로 지었다. 그 이름은 엘람과 아카이드에 Is-ku-ud-ra로 발견된다.  

사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국 신장성 웨이우얼 자치구에 있지만 그 언어는 이란 동부 또는 북동부 지역에 넓게 퍼졌고 다시 2개 방언으로 갈라졌다.  중기 이란 시기에 스키타이는 사마트(Sarmatians),알란(Alan), 로하러니(Roxolani)같은 다른 민족명으로 동화되거나 훈족으로 흡수되었다.


페샤와르에서 - 석가(사카)는 카불(가비라)에서 태어나고 페샤와르(파샤, 파사, 秦都, 錦都)에서 도를 폈다

여지껏 여러분은 발해가 반도의 북쪽에서부터 현재의 간도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을 앞글들에서 필자는 한헌석 칼럼을 인용하여 논하였다.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은 조선의 朝가 '아시'이며 '아시아'는 아샤라는 소리일 뿐 마지막의 '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에서 만들어지는 발음상의 늘어진 음절에 불과하다.

 

고기에 이르기를 '인류의 조상을 나반과 아만이라 하니 천하(天河)의 동쪽에 살다가...서로 만난 곳이 아리스타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리스타 또한 아리의 땅이란 뜻이다. 아시나 아리나 모두 시작 처음 아침을 뜻하며 곧 태양을 뜻하기도 한다.

 

한인이 한웅이 한검이 모두 한님, 하늘님의 조화 교화 치화의 삼권을 칭하는 의미라면 현 인류사는 하늘의 역사이며 태양의 역사 빛의 역사 광명의 역사이다. 즉 광명이세를 추구하는 지상문명시대이다. 이것이 현 지상 인류문명의 정체이다.

 

아사아가 조선이란 등식에서 놓고 볼 때 조선이란 아시의 태양, 아시의 해, 아시의 광명이란 뜻이며 조선은 곧 아시아의 아침이요 태양이요 빛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해모수가 성이 해씨요, 고주몽이 성이 고씨였다. 소서노가 소서의 신령한 빛을 받고 태어났기에 소서노라 하였으며, 알영이 또한 아리영이며 아리 아시와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이름이었다.

 

여러분은 빛의 역사 아시아 조선의 역사 아니 세계사 자체가 조선의 역사인데 그 역사의 비밀을 벗기는 것이 곧 광명이세하는 길이며 이 지상문명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란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필자는 조선 고려사의 핵심인 서안(평양)과 동경(낙양)과 남경(호탄, 에덴)과 송도(개경)과 의주(카스)를 비롯하여 람시성(안시성, 발흐), 해주(백주, 배성) 등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추적하여 왔으며, 지속적으로 필자의 기고를 탐독한 독자는 혼란과 곤혹스런 고통을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역사거 거대하게 왜곡되고 그 왜곡하는 세력들이 있다면 그 세력들의 게임은 의도하는 큰 그림이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Central Aisa 즉 아시아의 중앙이 바로 조선의 중앙이며 세계의 중심이란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지 않고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여러분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오늘의 기고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가비라국과 설법을 한 파사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한헌석 칼럼을 전문인용한다. 秦都와 錦都가 어디였는지를 알기 바라며, 또한 석가모니를 인도인으로 조작하는 것과 불기를 조작하는 현란한 조작자들의 솜씨를 보기를 바란다.

 

조선신도(신두)를 조작하여 조선을 지우면서 신두, 힌두를 인도로 완벽하게 잘알지 못하게 조작하여 놓고 불교가 있던 자리에 이슬람을 채색하여 놓는가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을 인위분리하여 동서파키스탄의 사이에 인도를 조작하여 놓고 이슬람에 포위된 채로 중앙아의 불교흔적을 깔끔히 청소하는 거대한 음모를 이미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동방견문록을 조작의 교과서로 삼고서 대당서역기를 비롯하여 조작의 뼈대를 구성하여 놓고 역사의 골격을 다시 구성하여 나가면서 완성된 현재 역사서술이 완전히 엉터리란 것을 여러분이 알 때, 오늘의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숨은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간다. 한헌석 칼럼을 깊히 탐독하여 주길 바라는 바이다.

P158 '바다샨에서 남쪽으로 열흘 거리 떨어진 곳에 파샤이라 불리는 지방이 있는데, 그곳 주민들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고 우상숭배자들이며 피부가 검다. 그들은 주술과 마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남자들은 귀에 귀걸이를 달고, 금은과 진주 그리고 보석이 많이 박힌 버클을 차고 다닌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이고, 풍습도 나쁘다. 이지방은 매우 더우며, 주민들은 고기와 쌀을 주식으로 삼는다.'



파샤이는 F본에는 PASCIAI,  R본에는 BASCIA Z본에는 PAXAY로 나와 있다. 파샤의 발음이 각각 다르게 전승되다가 고정된 것 같다. 이 파샤이는 법현전,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에 다 나온다.



먼저 법현전부터 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501 '여기서(숙가다국, 현 스와트)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錦都, 간다라-대당서역기의 건타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탁실라, 현 이슬라마바드)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건타위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대당서역기의 포로사포라-현 페샤와르)에  이르렀다....부처님 발우는 바로 이 나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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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당서역기/동국역경원 P66 '건타라국의 큰 도성은 포로사포라(주34, PURUSAPURA-지금의 페샤와르)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이다. 왕족은 이미 후사가 끊겨졌으며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왕성 안의 동북쪽에 옛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보대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발우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수백년에 걸쳐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 올렸는데,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지금은 파라사(波剌斯- 뒷편에서 페르시아로 조작해 놓았다.)에 있다.'


-포로사포라는 파라사국, 파사국 혹은 파라사성이다. 현재의 페샤와르다.(PURUSAPURA>퍼ㄹ사보라>페사[순경음]보르>페샤와르)



대당서역기 P354~363의 현장의 귀로에 다시 건타위국(간다리지방)을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에 언급하는 나라들을 열거해보자. 신도국 무라삼부로국 발벌다국 아점파시라국 낭게라국 파랄사국 비다세라국 아반다국 벌랄나국 등이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 카불(서경)에 수도를 둔 카피시국이 건타라국의 포로사포라를 동경으로 삼고 있었다.(바로 수나라의 서경과 동경이다.-현장이 왔을 때는 수가 고구려에 망해서 고구려의 도호부가 카피시에 세워진다. 대당서역기는 이를 돌궐이라 부른다.)


 이 카피시국이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고 있는데, 대당서역기의 묘사가 참으로 기묘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무라삼부로국은 책가국(탁실라, 법현전의 축찰시라, 현 이슬라마바드)에 복속, 발벌다국도 책가국에 복속, 아점파시라국은 신도국에 통치되고, 낭게라국(P65의 나게라갈국 -카불과 페샤와르 사이의 현 낭가르하르 지방)은 파랄사국에 복속, 비다세라국은 신도국에 복속, 아반다국은 신도국에 복속, 벌랄나국은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현장의 귀로에 묘사하고 있는 지역은 현 이슬라마바드에서 카불까지의 지역인데, 그 지역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책가국, 신도국, 파랄사국, 가필시국을 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 파랄사가 페르시아란다. 얼토당토 않다. 아예 어이가 없다.


카불과 페샤와르의 서경 동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그 지역을 통치할텐데, 무슨 그런 콩가루 조작을 해대고 있는 것인지! - 쯧, 딱하기도 하다. 고구려에 패한 수나라가 망하고, 고구려 점령군이 서경 동경을 장악하고 있는데, 역시 딱하게도 이 점령군을 돌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점령군은 분명히 발흐(안시성)의 양만춘장군의 군대일 수밖에 없다. 658년에 이 점령군은 당군에 의해 다시 다시 쫒겨나지만(흔히 이 지역에서의 서돌궐이 당조에 의해 멸망했다고 운위되지만), 7세기 말에 발해에 의해 다시 재점령되는 것이다. 물론 고선지의 파미르를 넘는 위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 발해세력의 견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력에 의해 격퇴되는 것이다.



대당서역기의 파랄사국조를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P358~359  20) 파랄사국[비록 인도의 국가는 아니지만 가는 도중에 나오는 나라이며 구역(舊譯)에서는 파사(波斯)라고 한다.]


‘파랄사국의 둘레는 수만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소랄살당나(주56-SURASTHANA)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리에 달한다.... 가람은 두세곳 정도 있으며 승도들은 수백명이 있고 이들은 모두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법을 익히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발우가 이 나라 왕궁에 있다.(P359의 주59-페르시아에 사원이나 승려들이 있었으며 소승교를 전하고 있었고 부처님의 발우를 받들고 있었다고 하는 기사는 다른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진위(眞僞)가 불분명하고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없다.)'


-우선 소랄살당나(SURA-STHANA)성을 먼저 확인해 보자. 왕오천축국전/학고재,정수일 역주 P184 '사위국(슈라바스티, 사바티)은 "비슈누푸라나"에 의하면 슈라바스타(실라벌실다)왕이 사위성을 건설한 데서 기원했다고 하고,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이 슈라바스타왕이 슈라바(실라벌)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수라바스타성을 수라스타나성이라고 소랄살당나성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부처가 25년간 머물면서 설법한 사위국인 것이다. 수라스타나의 스타나는 ㅅ당 혹은 스탄이 틀림없는데, 이는 슈라바스티 혹은 슈라바스타의 슈라(SURA)의 성 혹은 땅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삼봉집/민족문화추진회 P329 '사위성-(안)사위는 파사국의 이름이다.'의 구절이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슈라를 현장은 실라라 부르고 바스타를 벌실다라고 부른다. 현장의 귀에는 슈라가 실라로 들렸던 것이다. 소도 수도 혹은 부도가 수터(새터, 쇠터)와 함께 쓰였는데, 수터가 수러로 발음되는 것은 류음화현상이다. 슈라 혹은 실라는 수도라는 말인 것이다. 즉 여러 왕국을 거느린 중소제국의 수도였던 것이다. 석가부처는 조그만 소왕국의 태자가 아니라 간다라지방 전체의 제왕의 태자였던 것이다.




이 파사를 산스크리트의 파라사라는 원음을 이용해 마치 현장이 페르시아에 간 것처럼, 부처님 발우까지도 페르시아로 옮겨놓는 조작을 하고, 슈라바스티(사위국)을 네팔 남쪽의 궁벽한 곳에 교살라국의 주요도시라고 심어 놓은 것이다. 선입견을 다 버리고, 상식적으로 본다 해도, 불교유적이 산같이 그득그득한 간다라지방이 불교의 중심 활동무대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 지방에서 석가가 태어나고 출가하고 깨닫고 활동하고 죽었다고 보아야 상식적으로 온당한 것이 아닐까? 불교유적 유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 히말라야산맥의 고원지대에서 태어난 아기부처를 발가벗은 채로 야외에서 바가지로 물을 들이붓는 목욕을(관정식) 시킨다면 아무리 부처님 도력이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조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더욱 황당하게 조작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파사국(페르시아)>대식국(아랍)>대불림국(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까지 혜초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 참 어이없기가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이제, 동방견문록으로 돌아 가보자. 바닥샨과 카슈미르 사이에 선명하게 파샤이(파샤 혹은 파사)를 마르코 폴로는 자기발로 밟았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파사가 페르시아가 아니고, 이들이 불교도라고 선명히 이야기한다. 바로 앞의 바닥샨(파미르고원의 일부) 그 첩첩산중까지 마호메트를 신봉한다고 했는데도, 이 사위성(슈라바스티, 파사, 페샤와르)에 불교전통이 석가시대 이후로 가장 강력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석가부처는 베그람 혹은 바그람에서 태어나고( 베그람[카불 북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은 대당서역기에서는 가필시[KAPISI]라고 부른다. 카필라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명이다. KAPI 다음에나오는 시와 라는 슈라혹은 실라 두음절 어느 것이 오더라도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두산백과사전의 가비라성[迦毗羅城,KAPILAVASTU]조를 인용하면, '가비라바소도(迦毘羅婆蘇覩)·가유라위(迦維羅衛)라고 하며, 줄여서 가비라(迦毘羅)·가이라(迦夷羅)·가유(迦維)라고도 한다. 네팔의 타라이(Tarai) 지방에 해당한다. 가비라 선인(仙人)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석가모니 생존시에 사위국(舍衛國, 슈라바스티)에게 망하였다.'


인용문과 같이 가비라국은  옆에 있는 페샤와르의 슈라바스티국-사위국에 망하는 것이다.), 페샤와르(파사국)에서 깨달음을 얻고 가르치고 니렌하 혹은 니르바나하, 열반하인 인더스강(마르코 폴로가 키안수라고 부른) 옆의 그 보리수나무 아래서 열반하셨다. 바로 카불지방에서 탁실라, 카슈미르까지의 간다라지방을 무대로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 고대 불교문화의 유적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지방을 마르코 폴로는 만지 즉 (조선,고려의)만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스키타이(키타이 카타이 사카 석가 塞 夏 가라 구르 가야)가 파미르 바닥샨의 산지의 길을 열고 중천축(천조 신주 중국 - 신강)으로부터 이동하고 연결을 놓지 않고 있던 남천축의 센타였던 것이다. 문자(카불은 카부도이니, 사카족의 수도라는 말이다) 그대로 사카족의 활동무대이다.


이제 석가부처의 생몰연대를 전등록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추적해서 이 사카족이 천축 신주 천조 중국 즉 신강으로부터 언제 이 남천축으로 이동하였는지를 확인해 보자. 전등록 1권/바로보인,문재현 P45~48 '이때(부처님이 탄생하실 때)가 주소왕 26년 갑인 4월 8일이다....이때(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곧 주목왕 53년 임신년 2월 15일이었다.' 주소왕 26년은 BC1027년이고, 주목왕 53년은 BC949년이다. 현재 세계의 공식적인 불기는 2552년이다. 그러면 부처의 몰년은 BC544년이다. 전등록의 불기로는 올해가 2957년이다. 약 407년의 차이가 난다.


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의하면 석가부처의 몰년은 BC484년이다.


최두환칼럼 277호 해동고승전의 행방을 인용해보자.

'《해동고승전》이 지어진 시기는 그 책에서 “佛入滅至今乙亥 二千一百六十四年”,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가 열반하신 지 올 을해년까지 2164년이라는 말로 보아, 고종(高宗) 2년인 1215년이다. 이 2164년의 숫자는 석가모니 나이 79살, 주(周)나라 목왕(穆王) 임신(壬申: BC. 949년)에 열반하신 때부터 계산한 것과 일치된다. 


2003년은 불기(佛紀) 2547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석가모니는 BC.544년(丁巳)에 태어난 것이 된다. 이것은《세계대백과사전》의 경우 BC.563(?)~BC.483(?)이라고 하는 것과는 서로 19년의 차이가 있지만, 각훈이 지은《해동고승전》에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26년의 잘못) 갑인(甲寅), 즉 BC.1027년에 태어났다는 것과는 무려 483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이 옳다면 2003년은 불기 3030년이다.'


대당서역기 P68 '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신 뒤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백년이 지난 뒤 어떤 왕이 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 이름을 가니색가라고 할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석가부처는 BC272년에 돌아가신 것이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677년의 차이가 난다.


송운의 서역기를 보면(낙양가람기/눌와) P196에 보면, "내가 열반한 이백년 후에 가니색가라는 이름의 국왕이 이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 -카니시카왕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고 카니시카탑을 조성한 연도가 135년이니, BC65년에 석가부처가 돌아가신 것이 된다. 전등록의 몰년과 비교하면, 884년의 차이가 난다.


왜 이리 한사코 부처시대를 400년 500년 700년 900년이나 후대로 끌어 당겨 내릴까?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월지 혹은 월씨의 관련조를 한번 정리해보자.


BC174, 월씨, 중국으로 부터 서방으로 이동을 시작.


BC165, 월씨, 흉노에게 쫒겨 감숙으로부터 이리방면으로 축출.


BC162, 대월씨, 흉노에게 쫒겨 돈황, 기련방면에서 이리 방면으로 축출.


BC160, 사카, 월씨의 침략을 받고 밀려 이동을 시작.


BC140, 중앙아시아에 대월씨국을 세움.


BC138, 漢 장건, 대월씨국에 사신으로 파견됨. /월씨, 아무르강의 유역을 공략하여 취함.


- 우선 눈에 띄는 모순점은 월씨가 바로 사카인데, 그 월씨가 사카를 침략했다는 것이 조작의 난맥상이 노출된 것이다. 어쨌든 월지가 중앙아시아와 서북인도에 이주한 시기가 BC160년경이면, 석가가 그 이후에 태어났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조작자의 강박관념이 만들어 낸 하향조정인 것이다.


이제 사기 대원열전의 대월지조를 한번 인용해보자. '처음에 월지는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자 멀리 떠나 대원(페르가나)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박트리아)를 공격하여 그들을 신하로 삼고, 마침내는 규수(아무다리아강) 북쪽에다 도읍을 세우고 왕정을 삼았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남산(南山)과 강족(티베트계 부족)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이 소월지가 바로 당항 혹은 당구트 혹은 탕구트인데, 이들이 후대 7세기에 서북인도(인도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와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여 대당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당제국의 국제적인 도시, 낙양이 바로 돈황이다. 돈황을 묘사한 법현전을 인용해보자.


고승전/동국역경원 P494 '하안거를 마치자 다시금 나아가 돈황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가 약 80리 남북이 40리나 되는 성의 요새가 있었다.'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대도성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P241 '그(대도성) 둘레는 24마일이고 한 면이 다른 면보다 더 길지 않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한면의 길이가 6마일 즉 9.6킬로가 되니 10킬로로 쳐서 그 넓이가 100평방킬로가 되는데, 돈황은 동서 32킬로 남북 16킬로가 되면, 그 넓이가 512평방킬로가 되니 돈황이 대도의 5배나 더 큰 도성이었던 것이다.


이 돈황이야말로 신라사의 동경 금성 바로 경주인 것이다. 당나라의 낙양성이다. 우리가 대도를 수도로 한 원제국의 실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BC162년에 고비사막(그 동북쪽 변경이 돈황에서 하미를 거쳐 트루판까지다)을 지나서 천산북로를 지나 이리지방으로 대원을 지나 BC160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하여 사카가 아프간의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한 스토리다.


잘 조직된 대상(隊商)이라 하더라도 아무 방해 없이 간다면 2년은 족히 걸릴 길을 축출당하는 부족이 끝없는 정복전을 계속해서 2년만에 대하를 정복했다면, 소도 웃을 일이다. 실제 천하의 칭키스칸도 신강지역을 정복하고 대하까지 정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월지 스토리는 싸구려 3류 무협지의 소재감도 못되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억지 조작일 뿐이다.



그러면 실제 석가족 혹은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의 이동을 추적해 본다면, BC11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해의 연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두가지가 보인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성립했다는 것과,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금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중원(하화 혹은 중화, 신강)의 주인이었던 하족(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서쪽 훈 혹은 한이라고 불리는 구려(역사상 주나라)에게 밀려서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이주했는데, 그 일을 단행한 지도자가 스키타이 혹은 키타이의 키즈(기자)라고 불리는 이였는데, 팔조금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바로 誠信愛濟禍福報應의 팔조로 된 참전계경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로 고정되는 것은 그 후대의 일이겠지만. 그 내용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일치한다. -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참전계경과 우파니샤드를 생산한 주체를 추적하여 고대의 사상의 원형과 현대세계에 대한 대안적 사상의 모색에 있기 때문에 이 두 고경의 분석과 비교연구를 필생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회가 닿으면 연구서를 낼 계획이다.)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기록이 사기 한서 상서 삼국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사략에 나오고, 근세조선시대까지 단군과 함께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왔다. 이 기자동래는 신강지역의 쿠차(혹은 카라샤르)지방에서 감숙지방의 돈황으로의 사카족 스키타이(시앤-商)의 이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지의 신라의 새부도 건설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기자동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장에 돈황(탕구트조)이 나오므로 그때 좀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한편 서쪽과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시앤-商)의 이동을 추적해 보면, 기자동래의 20년후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나와 있다.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BC1100년조에 '아리아인, 갠지즈강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라는 기사다.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의 신두푸조에서 논했지만, 갠지즈란 GANGE-SE(QUIANSU 혹은 QUIAN江이라고 마르코폴로가 불렀던 인더스강을 의미하고, 인도라는 이름은 영국의 식민지경략 때, 본격적으로 불리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아리아인(하족 사카 스키타이 시앤-商)이 철기문화를 들고 인더스강의 상류지방 즉 간다라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를 '사카남래'라고 불러 보자.


관련연표를 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스키타이 인도 아리아조를 정리해 보면

(BC1751~1520, 하나라 멸망.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BC1500, 인도 북서부에 아리아인 침입, 인더스문명 쇠퇴, 이후 인더스강 유역에 H묘지문화, 주카르문화, 가르문화 형성. 리그베다 성립


BC1200, 북아시아의 카라수크,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 문화가 서아시아와 동지중해로 퍼짐.


BC1122, 은 망하고, 주 성립. 은의 기자, 조선에 들어 와서 팔조법금 제정.


BC11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으로 발전. 인도에 철기문화.


BC1000, 아리아인 갠지즈강 유역에 이주. 아타르바베다 성립.


BC900, 인도 브라만교 일어남. 카스트제도 발생.


BC800, 브라만문헌의 성립(후기 베다 시대).


BC600, 故우파니샤드 문헌 성립.


BC563, 석가모니 태어남. 갠지즈강 유역에 앙가, 마가다 등의 소국가 분립.


BC519,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간다라를 정벌.


BC500, 스키타이 기마문화, 북아시아에 퍼짐.


BC430, 인도 와가다왕국, 갠지즈강 유역을 통일.


BC327, 알렉산더 인도 침입. (BC324, 바빌론으로 돌아옴. BC323, 알렉산더 죽음.)


BC317,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조 설립.


BC268,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즉위. 불전 편찬. 남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전부 지배.


- 역사조작세력의 고심의 흔적이 많이도 보인다. 먼저 이 아리아인의 정체를 확인해 보자. 이 주체들의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고찰해 보면,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이들의 언어를 우리는 산스크리트라고 부른다. 그 종교를 우리는 힌두교라고 부른다.(연표에서는 브라만교라고 불렀지만.) 그 문화를 위 연표에서 주카르문화와 가르문화라고 불렀다. 수카르(<스카트<스카타이) 혹은 가르(가트<[ㅅ]카타이) 혹은 가라 혹은 가락 혹은 가야 혹은 굽타 문화는 사카문화이고, 중원의 夏문화인 것이다.


그 종교는 힌두교 혹은 신두교다. 신두는 신독, 천독, 천축이다. 바로 천부도이고 부도교이고 부다교이다. 그 내용이 우파니샤드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범신론이면서도 주재자가 확실히 있는 유일신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날님 상제 제석을 모시는 原불교인 것이다. 바로 참전계경의 하날님이고, 천부경의 하날님을 모시는 부도교 부다교이다. 우파니샤드와 참전계경을 본격적으로 비교분석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 언어는 산스크리트, 즉 인도-아리아어로서 '그 잘난' 아리아인의 서구어의 모어로 전세계인이 알고있는 바로 그 언어다.


앞에서 분석한 적이 있지만, 산스크리트는 ㅎ한서글(書契)이다. 필자가 이전에 산스크리트가 하도 궁금해서 'ㅎ한글 고어사전 실담어 주석'/강상원,한국세종한림원을 붙잡고 한두어 시간 뒤적뒤적 꼬부랑꼬부랑 단어를 그 주석부분만 읽고 있는데, 세상에나! 그 모든 자음과 모음이 읽혀지는 게 아닌가? 한글 자모와 똑같은 글자가 거의 3분의 1이나 되지 않는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금 연구를 했더니, 그 발성원리와 제자원리가 훈민정음과 완벽히 똑같지 않은가? 놀라와라!!!! 산스크리트가 한글이라니. 한글이라니, 이게 무슨 경천동지의 일이고, 대경실색의 일이란 말인가?


역사조작의 온갖 굴레가 훠언히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남천축이 다름아닌 남조선이란 말이 아닌가? 그러면 중천축인 천축이 천독, 신독이  조선의 천조 신주 중국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하 여기 파미르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가 인류사의 주무대라는 것이 잡히는 순간, 고조선부터 근세 조선까지의 그 중앙의 황제직할지 중국이 신주 천조 중원 천축이 바로 중앙아시아(좁게는 신강)라는 것이다.


이제야 훠언히 알겠다. 왜 칭키스칸이 중앙아시아만 정복하느라 20년을 소모전을 했는지? 왜 대영제국이 인도를 200년이나 식민지로 붙잡고 대륙경영을 했는지? 왜 러시아를 중앙아시아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조선 중앙의 만주지역을 파괴하고 러시아화시키고, 아프간 파미르 천산 라인으로 러시아를 견제했는지? 러일전쟁의 무대가 여기 이 라인에서 벌어지고,


1905년의 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이 진행되는 중에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이 늙은 호랑이(조선) 처리의 뒷거래를 하면서, 영국 미국이 러시아를 밀어 붙이는 과정에서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905년 러시아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왜 러시아의 비밀조직쪽으로 미국의 검은 자금이 흘러 들어갔는지, 미국자본가들의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일본을 지원하는지 훤히 알겠더라는 것이다.


아리아인은 산해경의 '조선 천축'人이었던 것이다. BC1200년조의 북아시아의 오르도스 청동기 철기문화가 서아시아와 지중해지역으로 퍼졌다는 말이 바로 중앙아시아 중천축 즉 조선의 중국으로부터 퍼졌다는 말인 것이다.


BC519년은 이 년표대로라면, 석가 나이 56세 때 한창 간다라 지방에서 왕성하게 설법하실 때, 다리우스가 간다라를 정벌했다면, 불경에 온통 그 사건의 일화가 가득 들어 있을 텐데, 엉터리 조작일 따름이다.


 도대체 BC1520년과 BC1122년에 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민족대이동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夏)는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520년까지 존재했다고 기록된 중국의 옛 나라이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중국의 첫 국가이기도 하다. 상나라의 탕왕에게 멸망되었다. -위키백과사전의 하나라조에서 인용.


한단고기/임승국,정신세계사 P89~90 '설원의 기사를 옮긴다. "....탕임금은 걸왕을 쳐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다."



BC1520년경에 멸망한 지배층과 그 부족이 아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중원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한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상(商)이라고도 한다. 문서자료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여 이 왕조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전설적인 최초의 왕조 하(夏)의 계승국가로, 창건 연도는 BC 1760~1520년이며 몰락시기는 BC 1122~1030년으로 추측이 다양하다. 통치기간은 BC 1766~1122년으로 전해진다.’ 

- 브리태니커 은나라조에서


 BC1122년에 중원을 차지했던 은나라가 망하고, 이제는 동쪽의 감숙성지방으로 이 화족이 도망치게 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도망치는 사건을 기자동래와 사카남래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제 남쪽에 자리잡은 하(사카, 시앤-商)족이 간다라지방을 장악하고, 정치문물의 안정화가 되어가는 시기에 그 이전에 이동해 왔던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는 하나라의 사카(스키타이)족의 혼란한 사상 종교상황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역사적 과제를 석가부처가 맡게 되는데, 바로 BC1027에 태어나서 BC1000년경에 대각득도를 하는 것이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일인가? 그런 민족이동과 과거에 이동해간 고대적 사상과 정치 문화적 과제를 떠맡는 것이  그 지방(간다라)의 황태자로서도 얼마나 적확한 문제의식과 정면대결한 것인지가 사무쳐지도록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런 석가를 국적불명의 사상적 고아로 만들어 놓는다는 말인가?



이 시기 비정이 잘못되면, 역사의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만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 앞으로 더 많은 실증적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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